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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자 중 효자 코보대사와 시코쿠헨로 온잔지(恩山寺)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9월 8일(월)은 해마다 한번씩 되뇌는 이 말의 날인 2014년 추석이다.
내집에서는 80년전 바로 어제 아침에 내가 태어남으로서 오늘(추석)은 늘 생일뒤풀이
날이 되었지만 거국적으로 풍요를 구가하는 날인데 아침 6시 반에 숙소를 나왔다.
이런 날에는 하루쯤 순례자 신분에서 벗어나도 되련만.
헨로미찌는 신마치강(新町川)을 건넌 후 차도를 따르다가 니켄야(二軒屋/JR牟岐線)
역에서 55번국도로 옮겨 도로를 따라 남행한다.
다리가 예사롭지 않게 괴롭히는 이른 아침.
어제 약 먹는 일에 소홀했다가 치도곤을 당한 것을 알게 된 니시오가 약을 챙겨주는
등 어렵사리 걸어야 했는데 오전에는 몸에 이상이 온 듯 몸시 힘겨워 하는 니시오.
내 다리야 아침의 일과가 되었지만 그의 돌연한 이상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게 했다.
"남의 염병이 내 고뿔만 못하다"던가.
그가 이따금 통증으로 괴로운 듯 이상한 징후를 보였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나는 주저앉기를 반복하면서도 걸으며, 걸으면서 회복을 꾀하고 상태가 정상이 되면
종일 걷게 되지만 니시오는 어떤 시도도 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알려지기 원치 않는 지병인지 말을 아끼고 34세 청년 답지 않게 인생을 사유 운운하는
그에게 어떤 비밀이 있는가.
내가 당장에 할 수 있는 일은 기다려주는 것이 전부였다.
복잡하게 흐르는 몇개의 강(冷田川, 園瀨川, 大松川, 勝浦川 등)을 간신히 건넜다.
가쓰우라강(勝浦川) 건너 도로변에 있는 휴게소(露ヶ本遍路休憩所).
니시오를 1시간반 이상 누워있게 함으로서 몸을 추스를 수 있도록 도와준,우리에게는
오아시스에 다름아닌 헨로휴게소다.
고마운 휴게소지만 겨우 토쿠시마시를 벗어나서 코마쓰시마시(小松島市)에 들어섰을
뿐인데 벌써 정오가 넘었으니 오늘도 차질이 적지 않겠다.
연일 이어지는 차질이 누적된다면 88영장 완주에 빨간불이 켜지지 않을까.
니시오가 잠든 사이에 두딸과 카톡을 했는데 현 상황을 들은 애들의 걱정도 적잖았다.
니시오가 다시 걷게 된 것만도 다행이었다.(그를 두고 혼자 떠날 수는 없으니까)
우리는 철길(JR牟岐線)을 건넌 후 계속해서 남행하는 55번국도를 따라가다가 136번
지방도로로 옮긴지 얼마 후 농로 따라 온잔지(恩山寺/田野町)로 갔다.
코마쓰시마시 교외의 자그마한 야산, 쇼산지 이후 평지로 이어지다가 해발78m 작은
오름에 있는 영장이다.
이 사찰도 쇼무천황의 칙원으로 교키대사가 세우고 '미쓰겐지'(大日山福生院密嚴寺)
라 했는데 온잔지로 바뀐 사연이 있단다.
당시, 이 절은 여인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었다.
100여년 후,시코쿠영장을 개설 중인 코보대사가 이 사찰에서 수행할 때 생모가 1.000
km 이상 먼 사누키(讚岐)의 젠쓰지(善通寺)에서 아들을 보러 왔다.
그러나 여인 금지법에 걸려 어머니를 모실 수 없는 대사는 산문 근처 폭포에서 17일
동안 폭포수를 맞으며 수행, 해금(解禁)의 비법을 이룩했다.
어머니를 모시고 입산해 효양하고 사찰 이름도 온잔지로 개명했다는 것.
사찰 입구의 '보요바시(母養橋)'와 코보대사의 모친 이름(玉依御前)으로 된 경내의 소
사당 등에서는 대사의 효심이 읽혀진다.
사찰이 자리한 산명도 보요잔(母養山)이고 현의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는'비란수'
(毘蘭樹)까지도 효심을 담아 심은 나무라니 대사의 효심이야말로 측정할 길 없겠다.
그러나, 속 사정은 어떠하던 겉 보기는 건조해 보이는 영장이다.
현 지정풍치지구라는데 우리나라와 한판인 비좁고 불결한 축사들이 입구를 점유하고
있기 때문일까.
기케이 드림로드가 된 헨로미치
온잔지에서 19번 타쯔에지로 가려면 한여름에도 긴팔 옷이 필요하겠다.
온잔지 입구의 축사들이 불결한 탓인지 대낮에도 모기떼의 습격을 받기 때문이다.
축사를 지나면 얕은 산에 빽빽하게 박혀서 하늘을 가린 대나무 숲길이 헨로미찌다.
일본은 대(竹)의 나라?
극히 일부를 보고 있을 뿐이지만 곳곳이, 야산 심산 가릴 것 없이 거창한 대밭이다.
생필품은 물론 오카베(大壁)집 벽 안이 대나무발로 된 이유를 알만 하다 할까.
대는 절개를 뜻하는데, 그래서 일본인들이 절개를 위해 할복자살을 많이 하는가.
한데, 타쯔에지 가는 길에 들자마자 '쓰루마끼고개(弦卷坂)', '기케이 드림로드(義經
dream road)' 등 안내판이 늙은 이방인 헨로상의 걸음을 붙들었다.
'기케이'는 일본의 유명 군담소설 '깃케이키(義經記)'의 주인공인 일본의 전설적 무사
미나모토노 요시쓰네(源 義経)를 말하는데 이 지역이 그의 무대였다는 것인가.
소설에는 시코쿠 사누키국(讚岐國) 세토 나이카이(瀬戸内海/香川, 愛媛, 德島등 縣이
접해 있다)의 야시마(屋島/香川縣 高松市)까지 진출했다고 했는데 야시마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토쿠시마현 코마쓰시마시에 그의 길이 있다?
이름난 사람이나 사건은 실낱 만한 관련만 있어도 아전인수, 침소봉대하여 홍보에 열
올리는데 이는 한.일 양국이 난형난제 관계?.
우리나라의 지자체를 비롯하여 각종 기관과 단체들이 황당한 연기(緣起)를 주장하며
관광상품으로 활용하하고 있지 않은가.
여기 코마쓰시마도 애향사업(후루사토事業) 단체가 이름 지은 길인 듯 싶다.
대밭길을 벗어나 농로를 따르는 헨로미치는 한눈 팔면 대가가 따를 길이다.
헨로표석을 놓치면 알바하기 십상인 길이기 때문이며 다시 136번도에 합류할 때까지
긴장을 풀지 말아야 할 길이다.
타쯔에지를 2km쯤 남겨놓고는 1km쯤 간격으로 헨로휴게소가 둘이나 있다.
전년 초에 발행한 지도에 없는 것으로 보아 개설된지 2년 미만일 것으로 추측되는데
휴게소의 밀집 또는 과잉은 낭비일 뿐 아니라 역기능을 하게 된다.
견물생심적 충동을 받아 휴식를 남용함으로서 휴식 효과보다 되레 리듬을 깨게 되며
중요한 시간을 낭비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내 체험이다.
휴게소 마다 들러 살피게 되고 그래서 허비하는 시간이 적지 않다.
휴게소는 긴 도보 여정에서 피로의 누적을 막기 위해 잠시 풀고 가라는 작은 집이므로
영장 지근에 있는 코야(京塚庵)는 존재 의의마저 희박하다.
킨키대학(近幾)교수가 설계했다는 이색적인 휴게소 쿄즈카안(京塚庵/(お京塚庵옆)은
절실한 곳으로 이전하는 대승적 배려를 하면 좋으련만.
쿄즈카안 코야를 떠나면 타쯔에강을 만나는데 우리는 옛길이라는 안내에 끌려 강과
나란히 갔다가 시라사기바시를 2번 건너는 낭비를 했다.
곧바로 강(鹽瀨橋)을 건너면 우편국을 거쳐 19번영장으로 직행하는데 다리가 놓이기
전의 옛길이었던 듯 한 길을 따르다가 돌게 된 것이다.
타쯔에우편국에 들러 2번째로 소포를 탁송했다.
(배낭의 무게를 줄이기 위해서 였지만 수일 내에 후회하게 되었다.
당장의 중량 감소에 급급해 야간 기온의 강하에 대한 대비에 소홀한 것을)
까미노라면 이런 후회가 있을 리 없다.
당장에 불필요한 것들은 미구에 통과하게 될 지역의 우체국으로 보내면 되니까.
시라사기바시 전설
타쯔에지(立江寺/小松島市 立江町)는 코묘황후의 안산을 기원하기 위한 쇼무천황의
칙명에 따라 교키대사가 창건했다는 사찰이다.
5.5cm의 작은 황금 코야스지장(子安地蔵/順産지장)을 조각해 엔메이지장보살(延命)
이라 이름지어 본존으로 삼았다.
그후 815년(弘仁6), 이 사찰을 방문한 코보대사는 본존보살이 너무 작아 망실 우려가
있다고 판단해 1.9m가 넘는 대형보살상을 조각, 본존으로 대체하였다.
또한, 작은 보살을 새 보살의 흉중에 안치고 절 이름을 타쯔에지라 하여 19번영장으로
정했는데 당시의 사찰은 현 위치에서 400m쯤 서쪽 산기슭 경승지의 거찰이었단다.
병화로 소실되었으나 본존만은 기적적으로 무사하여 아와국 초대영주의 독지로 현재
위치에 재건한 타쯔에지는 고야산 신곤슈의 별격본산(別格本山).
시코쿠의 총관문으로 88개소의 근본도량이라는데 대사당 우측의 소사당 '쿠로카미도
(黒髪堂)가 볼거리란다.
오쿄(お京)라는 여인의 이야기다.
바람이 나서 남편을 살해하고 달아난 여인이 이 사찰에 와서 참회하는데 여인의 머리
카락이 거꾸로 서서 종줄에 감기었다는 전설이다.
19번영장을 나설 때의 시각은 오후4시 반.
누적된 지연은 논외로 하고 오늘만 해도 지금쯤 14km 전방인 20번영장을 통과했어야
정상에 접근하는데 겨우 15km남짓 걸었을 뿐이다.
내 시코쿠순례에서는 매일 미니멈 30km는 소화하는 것이 정상인데 경고 누적을 염려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니시오와의 동행2인 상태에서는 달리 쓸만한 대책이 없는 것이 더 문제다.
내일 일은 내일로 미루고 도중 하차가 불가피해진 오늘의 머물 곳을 찾는 것이 당면한
문제인데 다행히 3km남짓 전방에 젠콘야도가 있다.
우리는 그 곳을 목표로 하고 저녁과 아침 먹거리를 준비한 후 타쯔에강을 다시 건넜다.
시라사기바시(白鷺橋).
천황의 칙명을 받은 교키대사는 고민에 빠졌다.
마땅한 터를 찾지 못해서 낙심중일 때 나래를 접고 타쯔에강 위에 내려앉는 시라사기
로부터 암시를 받고 절을 세웠다 해서 이 다리를 시라사기바시라 명명했다는 것.
백로가 다리에 내려앉으면 다리를 건너려 해서는 안된다는 징크스(jinx)가 있는데 이
에 따른 전설이 또 있다.
예전에, 이 근처에 쿠로베(黑部)라는 난폭한 무사가 살았는데 동료 무사들과 다리를
건너려 하면 돌연 어데선가 백로가 날아와 훼방을 놓았다.
어느 날 같은 현상이 벌어졌는데도 다리를 건너려 할 때 타고있던 말이 물구나무서기
(逆立)를 함으로서 쿠로베가 낙마해 죽었다.
그 후로, 심성이 좋지 않은 사람이 건너려 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백로가 날아왔으며
나쁜 사람들은 겁이 나서 건널 수 없게 되었단다.
그렇다면 백로를 형상화한 무엇인가가 다리에 있을 법 한데 밋밋한 것이 아쉽다.
헨로상 미하라를 생각한다
헨로미찌가 된 지방도로 따라 남서진 하기 1시간남짓 지난 오후 5시반쯤 도착한 곳은
도로변의 주코코주안(壽康康壽庵).
호센지(法泉寺)가 운영하는 젠콘야도로 시코쿠영장과 무관한 사찰임에도 헨로상들을
위해 선의를 베풀고 있는 듯.
도로에서 조금 떨어진 높은 지대에 자리한 절에 올라가 신고(?)하고 들어선 실내에는
이미 와있는 건장한 도보헨로상 1인이 우리를 맞았다.
이 남자는 쿄토(京都)에서 왔다는 60세 미하라(三原邦春).
(헨로미찌 걷기 4번째로 逆 방향으로 걷는 중이라 해서 아침에 헤어졌는데 내가 가고
있는 순방향 길에서 2번이나 재회했다. 홈리스?)
니시오는 내 대변인 처럼 그에게 나를 소개했다.
까미노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으면서도 인터넷에서 본 내 사진들과 나한테서 들은
이야기로 장황하게 설명하면 그는 감탄과 존경하는 표정으로 내게 꾸뻑했다.
서양인들이 엄지손가락을 들어 올리는 것과는 대조되는 제스처다.
시코쿠헨로가 최고의 순례길이며 1.200km 헨로미찌가 세상에서 가장 긴 여정이라고
믿는 사람들에게 까미노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 길일 것이다.
더구나, 77살(당시) 한국 늙은이가 65일 동안에 2.100km를 걸었다는 것은 충격이 아닐
수 없는 것 같다.
내가 일본인이라면 자랑스럽겠지만.
다다미방의 면적이 여유로운데도 실내 맨바닥에 자기 천막을 치는 미하라.
우리 둘이 편한 밤을 보내도록 스스로 불편을 감수하는 그.
그의 이런 선의가 만행(순례)을 통해 체질화 된 것일까.
그에 대해서는 아직 아무 것도 모르지만 그도 나의 용일의 정서 확대와 촉진에 일조
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오늘도 진도에는 큰 차질을 더했지만 냉냉한 내 가슴에 온기를 불어넣는 하루였다면
밑지는 장사는 아니겠다.
용변 보러 나갔다가 중천에 떠있는 둥근 보름달을 보았다.
화장실이 실내에 있다면 놓쳤을 신선한 야경이다.
대간과 정맥, 장거리 산을 탈 때 맑은 날에는 실내의 편한 잠자리를 사양하고 통비닐
속 노숙을 즐기는 이유가 바로 이것 아닌가.
그늘진 데가 전혀 없는 맑고 밝은 달.
별들의 자취가 사라질 정도로 환한 달이다.
북한산 자락 내 동네에 뜨는 달과 여기 일본땅 쿠시부치초(櫛淵町)의 달이 하나의 달,
같은 달이듯이 내 가슴에도 하루 빨리 모두 같은 사람이기를.
이 밤에 헨로미찌의 제일 소망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계 속>
몸에 이상이 온 니시오를 받아준 고마운 휴게소(위 아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