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金魚水 - 봄비의 서정성과 민족의식
이재창
김어수(1909, 1, 4~1985, 1, 7)시인은 강원도 영월군 상동면 직동리에서 태어났다. 1922년 13세때 부산시 범어사에 출가하여 25년간 승려생활을 하였고, 1930년 일본 경도시 화원중학교를 졸업하고 1938년 중앙불교전문학교를 마쳤다. 1932년 조선일보에 弔詩를 발표한 이후 전국 신문 잡지에 시조 및 수필을 발표하며 본격 문학활동을 시작했다. 1941년부터 교육계에 투신하여 부산과 경남 각지에서 중고교 교사와 교감, 교장을 역임했다. 1969년 대한 불교 조계종 중앙 상임 포교사직에 취임해 불교활동에 남다른 활약을 했다. 1983년 한국현대시조시인협회 창설시 초대회장을 맡았다. 저서로 불경번역서『안락국 태자경』『법화경』등이 있고, 수필집『달 안개 피는 언덕길』『가로수 밑에 부서지는 햇살』과 시조집으로『回歸線의 꽃구름』『햇살 쏟아지는 뜨락』『김어수 시집』등이 있다.
꽃잎 지는 뜨락 연두빛 하늘이 흐르다
세월처럼 도는 선율 한결 저녁은 고요로워
그 누구 치마자락이 스칠 것만 같은 밤.
저기 아스름히 방울지는 여운마다
뽀얗게 먼 화폭이 메아리져 피는 창가
불현듯 뛰쳐 나가서 함뿍 젖고 싶은 마음.
놀처럼 번지는 정 그 계절이 하 그리워
벅찬 숨결마다 닮아가는 체념인가
호젓한 좁은 산길을 홀로 걷고 싶은 마음.
-「봄비」전문
망해가는 왜적들이 바닷가에 城을 쌓고
더러운 발 디뎌가며 정세를 살피다가
사명당 한 마디 호령에 놀란 淸正 기절하다.
임진왜란 七년 만에 기진맥진 賊徒들이
쫓기다 여기 와서 머물다 간 그 자욱이
치욕의 역사와 함께 四百년이 가까워라.
城위에 올라서서 東海를 바랄 적에
그 날의 그 분노가 부드득 이 갈린다
주먹을 불끈 쥐면서 허리띠를 다시 죈다.
-「蔚山, 鶴城」전문
그는 불교를 떠나서는 살아본 적이 없는 종교인이다. 대부분 종교인들에게서 나타나는 종교적 색채의 작품들은 한결같이 교훈적이거나 구도자적인 작품이 태반을 이룬다. 그러나 김어수 시인도 거기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지만 위에 인용한 시조「봄비」는 종교적 신념에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온 서정적인 작품이다. 그 누구 치마자락이 스칠 것만 같은 밤의 고독과 외로움은 시인이 가지는 일차적 정서이지만 상투적이지 않는 것은 그의 시가 가지는 섬세한 서정과 언어의 활달함 때문이다. 그리고 불현 듯 뛰쳐 나가 함뿍 젖고 싶은 그의 마음과 호젓한 좁은 산길을 봄비를 맞으며 홀로 걷고 싶은 마음은 인간이 살아 있음으로서 느끼는 하나의 대상에 그리움의 표출이다. 그 대상은 여러 가지 일 수 있지만 일차적 정서의 여인이 될 수도 있고, 자신과의 싸움에서 나타나는 고독과 염원을 추스르는 감정 다스리기 일 수도 있다. 또다른 작품「蔚山, 鶴城」은「봄비」와는 대조적이다. 이것은 임진왜란을 배경으로 한 역사적 유적지를 찾아가 그때를 회상하고 왜군에 대한 분노를 삭이지 못해 쓴 시로 보인다. 사명당의 활약에 적장이 기절하고, 그들이 쫒기다 머문 그 자리가 사백여년 치욕스럽게 느껴진다. 그 날의 분노가 부드득 이가 갈리도록 원한에 맺힌 그의 민족의식이 잘나타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