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근대 한국과 러시아 관계 - 러시아인 세레진 사바찐의 하루
김영수(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진실과 거짓 사이
--------------------------------------------------
을미사변이란 1895년 10월 8일 새벽 주한 일본공사 미우라(三浦梧樓)가 지휘하는
폭도들이 경복궁에 난입하여 명성황후를 암살한 사건으로 널리 알려졌다.
기존 일본에서 야마베(山邊健太郞)와 박종근은 일본공사 미우라가 사건을 주모하
여 일본군인, 외교관, 영사관, 경찰, 대륙낭인 등을 동원했다는 사실을 최초로 실증했
다.1) 하지만 여전히 야마베와 박종근도 정작 을미사변 당일 사건의 추이를 상세하게
연구하지 못했다.
그동안 한국에서는 을미사변에 관한 기존 미우라 주도설을 뛰어넘어 일본측 배후
에 관한 새로운 시야를 넓혀주었다. 또한 을미사변의 전체적인 구도 및 사건 현장의
모습 등을 상상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했다.2) 그렇지만 한국학계는 러시아자료에 대
한 접근이 어려웠기 때문에 을미사변 당일 활발히 대응한 러시아공사관의 움직임을 상
세히 파악하지 못했다.
러시아에서는 김려호와 박벨라가 을미사변의 목격자 세레진-사바찐(Середи
н-Сабатин А.И.)의 증언과 보고서 등을 이용하여 을미사변 당일의 상황을
조명했다. 두 사람은 을미사변 관련 러시아측 사료를 최초로 소개했다는 점에서 큰 의
--------------------------------------------------------------------
*필자는 그동안 을미사변에 관한 연구를 진행했다.
2008 “Two Perspectives on the 1895 Assassination of Queen Min”, Korea Journal, Vol. 48-2 ;
「을미사변, 그 하루의 기록 : 대원군의 침묵과 명성황후암살의 배후」, 이화사학연구, 39집, 2009 ;
「세레진 사바찐의 하루 : 을미사변에 관한 기억과 선택」, 역사비평,
91, 2010 1) 山邊健太郞, 日韓併合小史, 東京: 岩波書店, 1966, 119-124쪽; 朴宗根,
日淸戰爭と朝鮮, 東京: 靑木書 店, 1982, 232-247쪽.
국내에서 일본학계의 연구성과 소개는 다음을 참조. 서민교, 「일본에서의 명성황 후 시해사건에 대한 연구와 과제」,
사총, 59호, 2004 2) 최문형, 「서설」, 명성황후 시해사건, 1992, 6, 26쪽;
강창일, 「三浦梧樓公使와 민비시해사건」, 명성황 후 시해사건,
1992, 31, 67쪽; 이민원, 「민비시해의 배경과 구도」, 명성황후 시해사건,
1992, 70쪽; 이민원, 명성황후시해와 아관파천,
2002, 국학자료원, 57-65쪽; 신국주, 「명성황후살해에 대한 재평가 」,
명성황후시해사건과 아관파천기의 국제관계, 1998, 53쪽
--------------------------------------------------------------------
미를 갖는다.3) 하지만 김려호와 박벨라는 세레진-사바찐(이하 사바찐)의 기록을 전적
으로 신뢰하여 사료비판에 근거한 본격적인 자료 분석을 진행하지 못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왜 사바찐이 건청궁 자객을 이끌었던 오카모토의 이름을 끝까지 숨기려고 했는
가를 주목하지 못했다.
기존 국내외 학계는 정작 을미사변 당일 어느 장소에서 무슨 사건이 어떻게 진
행되었는가에 대한 꼼꼼한 연구를 수행하지 못했다. 현재까지도 을미사변 관련 기초
적인 사실이 부정확하다. 여전히 을미사변의 무대인 건청궁을 비롯한 공간 및 사건
의 구성을 위한 시간에 관한 논란이 존재한다. 즉 건청궁 소재 건물의 위치, 왕과
왕비의 소재, 왕비의 암살과정, 일본군대와 일본자객의 행적, 훈련대와 시위대의 활
동 등이다.
그 배경에는 첫째 기존연구는 을미사변의 현장인 경복궁 내부 건청궁 부속 건물의
위치를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에 사건의 현장을 묘사하는데 많은 오류를 범했다. 현장
을 복원하기 위해서 필자는 2007년 복원된 건청궁의 건물을 답사했다. 그리고 필자는
우선 기존에 발굴되지 않았던 사바찐이 작성한 궁궐 지도, 1907년에 작성된 것으로 추
정되는 경복궁 지도 ‘북궐도형’, 우치다(內田定槌)영사가 외무차관 하라(原敬)에게
보낸 첨부 지도 등을 이용하여 사건의 위치를 규명할 것이다.
둘째 기존연구는 을미사변과 관련된 회고록, 증언, 보고서 등을 다양하게 이용했
지만 을미사변을 가장 상세히 기록한 목격자 사바찐의 증언과 보고서를 본격적으로 분
석하지 못했다. 당시 사바찐은 을미사변 당일 현장에서 매 시간마다 사건의 추이를 확
인했고, 새벽 5시가 넘어서는 15분 단위로 상황을 파악했다. 그래서 그 어떤 증언과
보고서 보다 사바찐의 기록은 사건에 대해서 상세한 정보를 제공한다. 따라서 필자는
사바찐의 증언과 보고서를 중심으로 을미사변 당일을 복원할 것이다.
그런데 사바찐의 증언과 보고서를 살펴보면 사바찐은 당일 사건을 둘러싼 인물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그래서 주한 러시아공사 베베르(К.И. Вебе р)와
즈프(芝罘) 주재 러시아부영사 찜첸꼬(А.Н. Тимченко-Острове рхов)는
사바찐에게 을미사변에 가담한 일본인의 이름을 강하게 추궁했다.
그런데 두 사람은 사바찐이 더 이상의 정보를 제공하지 않자 사바찐에 대한 의혹을 제기했다.
-------------------------------------------------------------------
3) Ким Рехо. 「Гибел королевы Мин(명성황후 암살)」
Корея. Сборник с татей к восимидесялетию со дня рождения профессора М. Н. Пака(조선)
, М. 1998. СС.127-129; Пак Б.Б. Российская дипломати я и Корея(러시아의 외교와 조선)
. М. 2002. СС.160-161
-------------------------------------------------------------------
따라서 필자는 사바찐이 을미사변 당일 자신의 증언과 보고서에게 무엇을 은폐하려고
했는가를 추적할 것이다.4)
1. 10월 8일 새벽 4시 : 일본군대와 훈련대의 경복궁 포위
새벽 4시 사바찐은 시위대(侍衛隊) 1대대장 참령(參領) 이학균(李學均)의 다급한
소리에 잠을 깼다. 평상복을 입고 잠을 청했기 때문에 사바찐은 바로 일어났고, 옆방
에 있던 다이와 함께 이학균에게 상황을 물어보았다. 이학균은 대략 200명의 훈련대가
4-5명의 일본 교관의 지휘에 따라 대궐 북동쪽 대문인 춘생문(春生門)을 둘러쌌고, 30
명의 일본 군복을 입은 사람을 포함한 대략 50-60명 일본인이 북서쪽 대문인 추성문
(秋成門) 성벽에 숨었다고 알려주었다.
다이 장군이 성벽을 살펴보기 위해서 함께 가자고 사바찐과 이학균에게 제안했다.
하지만 이학균은 이미 훈련대연대장(訓鍊隊聯隊長) 부령(副領) 홍계훈(洪啓薰)과 함께
춘생문을 살펴보았기 때문에 고종에게 긴급한 상황을 보고해야 한다며 다이와 헤어졌
다. 그런데 고종에게 보다 정확한 정황을 보고하기 위해서 이학균은 북쪽의 작은 암문
(暗門) 계무문(癸武門)으로 향했다. 이학균은 망원경을 통해서 북서쪽 성벽을 따라 움
직이는 약 12명의 그림자를 확인하자 바로 고종이 거주하는 장안당(長安堂)으로 달려
갔다. 이학균을 뒤로하고 사바찐은 다이와 함께 대궐의 당직실로 향했다. 그곳에는 적
어도 6-7명의 장교와 2명의 중령이 반드시 근무해야 했는데 사바찐과 다이는 아무도
찾을 수가 없었다.
사실 전날 사바찐은 평소와 같이 저녁 7시 경복궁으로 출근했다. 1894년 일본군대
의 ‘7.23경복궁점령사건’ 이후 고종은 사실상 일본의 정치적 영향을 받으면서 신변
의 불안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종은 러시아공사 베베르(К.И. В
ебер), 미국공사 실(John M.B. Sill), 미국인 고문관 그레이트하우스(Clarence R.
Greathouse)의 조언에 따라 장군 다이(W.M. Dye), 대령 닌스테드(F.J.H.
Nienstead), 건축사 사바찐(А. И. Середин-Сабатин)5) 등을 일본인들
---------------------------------------------------------------
4) АВПРИ. Ф.150.Оп.493.Д.6.Л.121об, 129об 즈프(芝罘))는 산동반도 끝 항구도시였다.
아관파 천 직후 전신선이 불통되자 고종은 인편을 통해 즈프주재 러시아영사관에 편지를 보냈고,
러일전쟁 직전 고종이 한국의 중립화를 선언한 지역도 바로 즈프주재 프랑스영사관이였다.
5) Афанасий Иванович Середин-Сабатин(蘇眉退, 薩巴丁, 薩巴珍, 薩巴玲)
------------------------------------------------------------------
의 활동을 감시하도록 경복궁에 상주시켰다. 따라서 경복궁에는 항상 두 명의 외국인
이 체류했고 사바찐도 1894년 9월부터 경복궁에 1주일에 4일씩 저녁에 출근하여 아침
에 퇴근했다.
사바찐은 1860년 우크라이나 동북쪽에 위치한 도시 뽈따바(Полтава)에서
영락한 지방귀족의 아들로 태어났다. 스위스계 러시아인 사바찐은 러시아에서 항해학
교를 다녔으며 전문분야는 조타수였다. 한국 외부 고문관인 묄렌도르프(Paul George
von Mö llendorf)는 1883년 1월 출장차 상해에 머물렀는데, 상해에 거주하는 많은 젊
은이들이 한국의 해관에 취직할 것을 묄렌도르프에게 요청했다. 그 당시 묄렌도르프와
친분이 있는 상해주재 오스트리아 총영사 하스(Hass)는 사바찐을 추천했다. 그 후 사
바찐은 한국 해관의 관리 명단에 포함되었다.
상해에 머물면서 건축분야까지 습득한 사바찐은 1883년 9월 인천을 통해서 입국
했고, ‘영조교사(營造敎士)’라는 직명으로 한국정부와 고용 약정을 체결했다. 인천에
도착하여 왕궁의 도면을 작성한 사바찐은 벽돌을 생산하는 방안을 제시하면서 불연성
의 이엉지붕 설비안도 함께 내놓았다. 하지만 비용문제 때문에 실행이 어려워지자, 사
바찐은 인천해관에 근무하게 되었다. 1884년 사바찐은 인천해관원 소속 외국인관료 7
명 중 세 번째 직위인 ‘토목사’로 임명되었고, 그 후 약 1년 동안 15-16명의 한국인
을 인솔하여 부두축조공사를 직접 지휘했다.
1888년 5월 사바찐은 경복궁 내부 건청궁의 관문각(觀文閣) 공사의 경리일체와 지
휘감독을 맡기로 한국정부와 계약을 체결했다. 궁궐에 지은 최초의 서양식 건물인 관
문각은 서양 문명을 수용하겠다는 고종의 강력한 의지가 반영된 건물이었다. 관문각은
1888년 2월 공사가 시작되었고, 1892년 공사가 완료되었다.
공사의 과정에서 1891년 사바찐은 그를 보조하는 한국인 현응택(玄應澤)과 부실
공사 책임 및 공사비 운영을 둘러싼 심각한 불화에 빠졌다. 사바찐은 1891년 9월 사직
을 결심하고 누수에 따른 공사 하자의 책임을 가리는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했다. 이
러한 상황에서 고종은 사바찐에 대한 신뢰감을 표시하면서 하자보수공사를 명령하였
고, 사바찐은 1892년 2월 수리를 위한 보관서류를 작성하고 4월에는 자재와 인부도
모두 조치하여 관문각을 보수했다. 관문각 공사가 마무리되자 고종은 “고생을 참아가
면서 열심히 일했으며 그르침도 어긋남도 없었다”며 1893년 10월 사바찐을 한국 해관
에 복귀시켰다. 이러한 신뢰와 인연 때문에 사바찐은 1894년 청일전쟁 이후 고종을 보
호하는 외국인 대궐수비대로 한국정부에 근무할 수 있었다.
이날 경복궁으로 출근하는 도중 사바찐은 평소에 잘 알고 지내는 한 중국인을 만
났다. 중국인은 이날 밤에는 절대로 궁궐에 출근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사실 이 중국
인은 이날 아침에 퇴근한 사바찐을 찾아와서 오늘 밤에 경복궁에서 불상사가 발생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궁궐 출근을 만류하는 중국인의 설명을 통해서 사바찐은 어떤 음
모가 꾸며져서 바로 오늘밤 실행될지도 모르며, 한국군대인 훈련대가 음모의 중심세력
이라고 직감했다. 왜냐하면 7일 0시에서 2시까지 일본장교에 의한 교육을 받은 훈련대
병사가 궁궐 앞에서 훈련대의 해산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기 때문이었다.
불길한 징후에도 불구하고 사바찐은 7시 30분 경복궁에 출근했다. 사바찐은 대체
로 활달하고 정력적이며 감정적인 성격을 소유한 인물이었다. 사바찐은 자신의 직장을
잃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에게 닥쳐올 불확실한 위험을 피하지 않았다.
이날 대궐에 출근한 사바찐은 음모의 징후를 살펴보았다. 하지만 궁궐은 평상시처
럼 조용했고 날이 어두워지면서 궁궐의 주변에는 보초만 남았다. 한 밤중이 되어서 사
바찐은 다이와 닌스테드와 함께 체류하는 서양인 숙소 협길당(協吉堂)에 들어갔다. 혹
시나 하는 생각에서 사바찐은 평상복을 벗지 않고 잠을 청했다.
새벽 4시 30분 사바찐과 다이는 당직실을 뒤로하고 북서쪽 추성문으로 도착했다.
이 날은 달빛이 매우 선명했기 때문에 그곳의 상황을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었다.
사바찐은 추성문의 넓은 틈을 통해서 대문 바로 앞에 최소한 50명 이상의 일본 병사가
정렬한 것을 볼 수 있었다. 일본 병사는 부동자세를 취하면서 자기들끼리 조용히 얘기
하고 있었다. 잠시후 일본군대는 사바찐과 다이의 발소리와 목소리를 듣고 누군가 자
신들을 엿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곧바로 일본 군대는 2열로 정렬하면서 추성문
옆쪽 성벽에 바짝 붙었다. 사바찐과 다이는 더 이상 현장의 변동을 파악할 수 없게 되
자 북동쪽 춘생문으로 향했다. 사바찐은 그곳에서 약 300명 정도의 훈련대 병사를 목
격할 수 있었다. 사바찐은 한국인 중 한명이 춘생문에 다가와서 대문을 열어달라고 외
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사바찐은 춘생문을 둘러싼 병사가 훈련대의 주력 병력이
라고 판단하였고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하면서 서둘러 당직실로 향했다.
다이와 사바찐은 대책 마련에 고심했지만 방어 조치를 마련하기에는 역부족이었
다. 이날 시위대 2대대장 참령(參領) 김진호(金振澔)는 당직 사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직실에 없었고, 대부분의 시위대 장교와 병사가 흩어져 버린 상황이었다. 그나마 일
부 시위대 장교와 병사조차도 초조하고 불안한 상태였기 때문에 지휘관의 명령에 주의
를 기울이지 않았다.
새벽 5시가 가까워지자 경복궁의 춘생문, 광화문, 추성문 등에서 심상치 않는 조
짐이 보였다. 일본수비대, 훈련대, 일본자객은 경복궁을 침입할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
기 때문이다. 이미 새벽 4시경 대포를 동반한 훈련대 중 일부는 궁궐의 북동쪽 춘생문
을 둘러쌌다. 또한 훈련대와 일본수비대 중 일부는 광화문 앞에서 정렬했다.
당시 일본수비대는 1대대 3중대 대략 600명, 훈련대 2대대 대략 1600명, 2개조로
구성된 일본 자객이 당일 사변에 참여했다. 경복궁 정문에서는 주한 일본공사관 무관
구스노세(楠瀨幸彦) 중좌의 지휘 하에 훈련대 교관 코이토(鯉登行文) 대위와 3중대장
마키(馬來政輔) 대위가 광화문에 배치되었다. 여기에 일본교관에 교육받은 훈련대 2대
대는 우범선의 지휘아래 대기했고, 훈련대 교관 이시모리(石森吉猶) 대위와 타가마츠
(高松鐵太郞) 대위는 2대대를 감시했다.
경복궁 후문에서는 일본수비대 대대장 우마야하라(馬屋原務本) 소좌의 지휘 하에
2중대장 무라이(村井右宗) 대위가 추성문에 포진했다. 훈련대 1대대는 이두황 대신에
중대장 이범래의 지휘하에 춘생문에 대기했다. 일본수비대 1중대장 후지도(藤戶與三)는
대원군을 호위했다.
서울에 거류하는 일본 자객은 2개 조로 조직되었다. 1조는 대장에 한성신보사 사
장 아다치(安達謙藏), 부장에 현양사 소속 사사(佐佐正之), 객장에 자유당(천우협) 소속
타나카(田中賢道)였다. 이들은 저녁에 한성신보사에 집합하여 공덕리로 출발해서 대원
군을 호위하여 광화문에 돌입했다. 2조는 천우협 소속 시바 시로오(柴四朗)의 ‘萬所
巴城館’에 집합하고, 대장에 한성신보사 주필 쿠니토모(國友重章), 부장에 일본신문
특파원 야마다(山田列聖)였다. 이들은 추성문으로 직행하여 건청궁으로 침입했다.
조희연과 우범선은 훈련대의 동원을 위해서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전 군부대신 조
희연은 훈련대 1대대의 장교들을 설득하여 정변에 참여할 것을 유도했고, 훈련대 1대
대 병력의 일부를 이범래의 지휘아래 춘생문에 대기시키고, 나머지 일부를 건춘문을
비롯한 경복궁 주변을 경계하도록 지시했다.
훈련대 2대대를 지휘한 우범선은 대원군을 호위해서 광화문을 통해 대궐에 들어왔
다.6) 이미 우범선은 1895년 9월 27일 일본수비대 소위 미야모토(宮本)와 함께 용산에
서 훈련대 2대대를 지휘해서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당시 훈련을 마친 우범선은 “훈련
----------------------------------------------------------------
6) 駐韓日本公使館記錄 7권 73쪽, 10월 8일 事變(王妃弑害事件)의 犯人處分 件,
1895년 12월 30일 小村공 사→西園寺외무대신. “禹範善이 출중한 줄 알엇다.
禹는 무엇보다 憺力에 出衆하엿다...
그는 閔妃事變때 도 가장 先鋒에 서서 활약하고 일을 지른 分量도 만하엿섯다.
軍人중으로는 主動者가 그엇스니까”(삼천 리 제6권 제5호 1934년 5월 1일, 권동진-韓末人物의 回想).
----------------------------------------------------------------
대는 열흘이 못되어서 해산될 것 같고, 훈련대 장교도 모두 엄벌에 처하게 될 것이므
로 빨리 도망칠 생각이다”고 자신의 불우한 처지를 미야모토에게 토로했다. 다음날
28일 우범선은 훈련대 교관 이시모리(石森吉猶)를 면담한 후 10월 3일 소좌(少佐) 우
마야하라(馬屋原務本)와 대위 이시모리(石森吉猶)와 동반해서 미우라 공사를 방문하여
정변에 주도적으로 가담했다.
그런데 정작 훈련대 소속 병사는 정변의 정확한 내용을 알지 못했다. 대부분의 훈
련대 병사는 대대장 우범선과 이두황의 야간훈련 명령으로 8일 새벽 대궐 밖으로 유인
되었고, 경복궁에 도착한 후 대궐을 호위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하지만 훈련대의 대부
분은 일본군대의 유도에 따라 경복궁을 진입했고, 어쩔 수 없이 정변에 가담했던 것으
로 보인다. 그렇지만 정변에 가담한 훈련대 장교 및 일본 사관학교 출신은 정변에 깊
숙이 개입했다. 이들은 “대원군으로 하여금 그 아드님 되시는 상감께 말씀하여 (왕비
를) 폐비케 한 후에 다시 사약을 내릴 계획”도 독자적으로 갖고 있었다.
2. 10월 8일 새벽 5시 : 추성문에서 울리는 한발의 총성
새벽 5시. 밤의 적막 속에 추성문에서 한 발의 총성이 울렸다.
총성과 함께 일본수비대 3중대의 5-6명의 병사가 사다리를 타고 광화문 왼쪽 성
벽을 넘었다. 성벽 위에 올라간 일본병사는 긴 밧줄을 성벽 안쪽에 던지고 내려와서
광화문 안쪽으로 진격했다. 광화문을 수비하던 시위대 위병은 저항했지만 일본수비대
의 위협에 눌려 도피했다. 총성과 위협으로 시위대 위병을 쫓아버린 일본병사는 광화
문을 활짝 열었다. 그러자 일본수비대 3중대는 광화문을 통해서 경복궁에 진입하면서
광화문 주변을 장악했다.
5시 30분경 대원군을 비롯한 일본수비대 1중대, 훈련대 2대대, 일본자객 1조, 일
본사관학교출신 등은 광화문 앞에 도착했다.
일본사관학교 출신인 권동진은 ‘왕비를 폐위시키고 민가일족과 수구파 일당을 제
거’하기 위해서 정변에 참여했다고 밝혔다. 대원군의 가마가 경복궁 정면에 도착하자
광화문이 열렸다. 30분 후 동쪽 하늘에 먼동이 틀 무렵이었지만 아직 사람의 얼굴을
제대로 구별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대원군은 이미 일본군대가 접수한 광화문을 일
본수비대, 훈련대, 그리고 일본자객 30여명의 호위를 받으면서 들어갔다. 광화문에 들
어설 때 병사들은 총검을 꽂고 일본자객은 칼을 빼들었다. 동시에 정변에 참여한 모두
가 ‘와아’하고 일제히 함성을 지르면서 돌진했다. 새벽 녘 살기가 경복궁을 온통 에
워쌌다.
5시 40분. 광화문을 지난 정변 가담자는 근정전 앞에서 2진으로 나뉘었다. 1진 일
본수비대와 훈련대는 본대를 형성해서 광화문에서 신무문으로 향하는 대로로 진격했
다. 2진 일본자객 및 대원군을 호위하는 1소대의 일본군대는 근정전을 바라보는 오른
쪽으로 향원정을 향해 달려갔다. 5시 40-45분까지 신무문으로 가는 대로에서 100여발
의 총성이 울렸다.
이미 새벽 3시경 訓鍊隊 聯隊長 副領 홍계훈은 일본군대와 훈련대가 궁궐에 접근
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홍계훈은 신속히 궁궐의 북동쪽인 춘생문으로 달려가 훈련대에
게 해산을 종용했지만 “당신은 더 이상 지휘관이 아니며 여기서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일본교관 한 명뿐이다”라는 답변을 들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한
홍계훈은 이학균에서 궁궐의 남쪽인 광화문의 상황을 점검할 것을 지시했다. 곧이어
홍계훈은 궁궐 수비대의 보고를 통해서 대궐 북서쪽인 추성문에 일본자객과 일본군대
가 잠입했다는 사실도 파악했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홍계훈은 근정전에서 건청궁으로 향하는 대로에 병력을 배치하
고 기다렸다. 5시 40분경 1진인 일본공사관 무관 구스노세(楠瀨幸彦)는 일본수비대와
훈련대를 총지휘하며 진격하던 중 홍계훈이 지휘하는 궁궐수비대의 저항을 받았다. 홍
계훈은 훈련대 병사들에게 “자신이 아닌 다른 어느 누구의 명령에도 따르지 말라”고
명령했다. 그러자 서로 총격전이 벌어졌다.
걷혀가는 어스름 속에서 궁궐수비대는 상대편에 일본수비대가 훈련대에 가담한 것
을 확인했다. 궁궐수비대는 일본수비대의 가세로 수적으로 열세인 상황을 깨닫고 점차
사기가 떨어져갔다. 일본수비대와 훈련대 중 일부 병력도 사건의 내막을 모른 상태에
서 갑자기 전투를 수행하여 점차 소극적인 자세가 되었다.
시간을 끌면 끌수록 불리하다고 판단한 구스노세는 소극적인 병사의 행동을 꾸짖
었다. 쿠스노세는 자신이 직접 검을 빼들고 칼날을 휘두르며 상대편으로 과감하게 뛰
어 들었다. 이 과정에서 쿠스노세는 홍계훈과 대적했고, 홍계훈의 어깨를 내려침으로
써 상처를 입혔다. 그러자 훈련대 2대대 지휘관인 우범선은 쓰러져 있는 홍계훈에게
여러 발의 총격을 가했다. 홍계훈이 무너지자 수백의 궁궐수비대인 시위대는 총검을
버리고 제복을 벗으면서 달아났다. 이후 홍계훈은 그의 집으로 옮겨졌다. 유럽인 의사
가 홍계훈의 집에 도착했지만 이미 그는 피를 너무 많이 흘려 사망했다.
2진인 일본자객은 광화문을 들어서서 30-40(30間)미터를 달리며 두 번째의 소문
을 통과할 무렵 광화문 근처에서 총성이 들렸다. 일본자객은 광화문 부근의 전투에 개
의치 않고 대궐의 후방을 향해 돌진했는데 그 순간 앞쪽에서도 총성이 났다. 2진인 일
본자객은 근정전 근처에 대원군의 가마를 멈추게 하고 전방에 진로가 열리는 것을 기
다렸다. 잠시 후 일본자객은 1소대의 일본 병사에게 가마를 지키게 하고 목적지를 향
해서 돌진했다. 일본자객은 왼쪽으로 꺾고 오른 쪽으로 돌아 후궁을 향해서 치달아 향
원정 근처에 도달했다. 5시 50분경 거기서 소나무가 우거진 조그마한 등성이로 진출하
여 건청궁의 외곽에 도착했다.
건청궁은 사방이 거의 2킬로미터(5리) 쯤 되는 경복궁의 맨 뒤 끝에 있다. 경복궁
광화문에서 건청궁까지 도달하려면 정문인 광화문에서 호수인 향원정까지 4-5군데의
대문을 지나가야 했다. 각 대문마다는 2명의 궁궐 수비대가 지키고 있었다.
당시 건청궁은 왕이 사용하는 장안당과 왕비가 머무는 곤녕합, 그리고 장안당 뒤
에 서재로 관문각을 지어서 마치 사대부가의 사랑채, 안채, 서재로 구성되었다. 건청
궁 정문을 지나 초양문을 들어서면 고종의 집무실인 장안당이 있었다. 함광문을 들어
서면 왕비가 거주하는 곤녕합과 정시합이 있었다. 1895년 8월 건청궁에서 고종을 접견
한 뮈텔은 “알현실은 대단히 넓으며 계단이 있는 남쪽으로 향해 있었고, 북쪽으로는
접견실로 보이는 다른 방들과 종이 칸막이로 나누어져 있었다”고 장안당을 묘사했다.
건청궁 성벽으로 둘러싸인 앞마당에는 전각이 세워져있고, 한 가운데 있는 한 채
를 국왕과 왕비가 편전으로 쓰고 있었다. 남향으로 세워진 편전은 동서로 길게 뻗어
몇 개의 방으로 나누어져 있었다.7) 일본자객이 침입한 그때 왕비는 건청궁의 맨 동쪽
끝에 있는 한국식의 미닫이를 동남의 양 쪽으로 달아놓은 옥호루 주변에 있었다. 그로
부터 서쪽으로 향해서도 많은 방이 있는데, 국왕은 왕비의 옆방인 곤령합에 머물렀다.
새벽 5시 첫 번째 총성이 울리자 추성문의 위병도 총과 탄환을 버리면서 도망쳤
다. 당시 대궐에는 대략 1600명의 병력과 50명의 장교가 대궐을 수비했다. 그런데 사
바찐은 대략 300명의 병사와 8명의 장교만 목격했다. 잠시후 일본수비대 2중대는 성
벽에 사다리를 세워 놓고 추성문 옆 성벽을 넘었고, 훈련대 1대대는 춘생문과 춘화문
을 넘었다. 일본수비대 2중대와 훈련대 1대대는 계무문(癸武門)으로 향했고, 경복궁의
북쪽을 장악했다. 벽을 타고 넘어온 군인이 추성문을 열어주는 동안 다이 장군은 대궐
--------------------------------------------------------------
7) 小早川秀雄, 閔后暗殺記, 100쪽, 1965
--------------------------------------------------------------
수비를 위해서 계무문(癸武門) 안쪽으로 남아있는 시위대 병력을 집결시켰다.
일본수비대장 우마야하라(馬屋原務本)는 추성문을 공격하기 직전 정변의 의미
를 부여하고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서 부하들에게 큰 소리로 연설했다. 그는 “일
본정부는 한국의 정치를 계도하기 위하여 청국과 싸우면서 한국의 독립을 확고히
하고 동양의 대국(大局)을 보전하려고 노력했다”며 청일전쟁의 의미를 부여했다.
그는 “지금 왕비가 한국 정부의 권리를 전단하여 한국이 망하게 되어서 일본도 보
전하기 어렵게 되었다. 일본이 보전할 수 없으면 청국 역시 존립하기 어렵고, 청국
이 사라지면 동양의 대세도 무너진다”고 주장했다. 그는 한국 일본 중국의 상호
관계를 설명하면서 왕비의 잘못으로 동양의 대세가 흔들린다고 주장했다. 그는
“왕비가 조선 5백년 종사의 죄인이며, 조선의 죄인일 뿐만 아니라 일본제국의 죄
인이다. 정령 동양의 죄인이다”며 정변에 참여한 군인과 자객에게 왕비에 대한 증
오심을 끌어올렸다.
3. 10월 8일 새벽 5:15 : 사바찐이 목격한 건청궁 현장
새벽 5시 15분 일본인, 일본병사, 훈련대는 계무문을 통과하여 무청문(武淸門)에
도달했다. 무청문에서 고종이 거주하는 장안당으로 들어가는 필성문(弼成門)까지 대략
50미터(80걸음, 29間) 정도였다. 다이의 지휘 하에 필성문 주변에 대략 300명의 시위
대 병력이 정렬했다. 침입자들이 무청문의 1-2인치 너비의 5-6개 틈으로 시위대의 머
리 위쪽으로 한번에 30-40발을 세 차례 발사했다. 6미터 이상의 위협사격을 받았지만
시위대 병사 중 1명만 어깨에 부상을 당했다. 위협사격이 개시되자 사바찐은 필성문
안쪽에 몸을 숨겼고, 다이는 서양인 숙소로 향하는 쪽문에 피신했다.
첫 번째 사격이 시작되자 시위대는 총을 한 발도 쏘지 않고 약실에서 탄환을 꺼내
면서 방전시켰다. 시위대는 총과 탄환을 버리고 군복을 벗어 던지며 도망치기 시작했
다. 시위대는 두 방향으로 나뉘었다. 한 무리는 다이 장군을 떠밀면서 서양인 숙소로
향하는 쪽문으로 향했지만 그쪽으로는 침입자들이 추격하지 않았다. 다른 무리는 사바
찐이 숨었던 필성문으로 몰려갔다.
사바찐은 관료, 시위대병사, 시종 등 대략 300명 정도의 인원에 이끌려 왕비의 침
소로 통하는 문까지 밀려났다. 사바찐은 장안당을 돌아 자신이 직접 설계하고 건설했
던 관문각(觀文閣)8)을 지나 왕비의 침소인 정시합(正始閤)의 정면에 있는 담장에 설치
된 일각문(㊀角門)9)에 자신을 은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침입자들이 여기까지 몰려오
자 사바찐은 왕비의 침소와 연결되는 문을 포기하고 뒤로 밀려나면서 녹원(鹿苑)으로
향하는 청휘문(淸輝門) 옆 곤령합(坤寧閤) 동행각(東行閣)의 문 아래 판자를 붙잡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사바찐을 지나쳐 청휘문을 통해 녹원으로 도망쳤지만 사바찐
은 곤령합 동행각에 서서 현장을 목격할 수 있었다. 곤령합을 장악한 40명의 훈련대,
1명의 일본장교를 포함한 5명의 일본 군인, 도검으로 무장한 20-25명의 일본자객 등
은 곤령합에 정렬했다. 이와 동시에 일본 군인은 청휘문과 정시합 정면에 있는 일각문
에 2명씩 배치되었다. 1소대 40명의 훈련대는 곤령합 마당에서 총을 비스듬히 내려놓
고 정렬했다. 일본 자객 중 4-5명은 칼을 뽑았고, 긴 칼을 차고 단검을 빼든 일본인이
현장을 지휘했다. 사바찐은 현장을 지휘한 일본인이 매우 고상한 외모에 양복을 단정
히 차려입었다고 기록했다.
그런데 사바찐은 자신의 증언과 보고서에서 현장을 지휘한 일본인을 끝까지 밝히 지 않았다.
이에 따라 주한 러시아공사 베베르(К.И. Вебер)와 즈프(芝罘) 주재 러시아 부영사 찜첸꼬
(А.Н. Тимченко-Островерхов)도 사바찐의 증언에 대해서 불만을 표시했다.
당시 고종은 현장에서 주한 전 군부고문 오카모토(岡本柳之助),
오카모토의 사적인 통역관 스즈키(鈴木順見), 영사관 경부(警部) 와타나베
(渡邊鷹次郞)를 목격했다고 증언했다. 서울주재 일본 일등영사(㊀等領事) 우치다(內田
定槌)는 본국에 보낸 을미사변 보고서에서 오카모토(岡本柳之助), 한성신보사 주필 구
니토모(國友重章), 한성신보사 기자 사사키(佐佐正之), 쯔키나리(月成光) 등이 중심이
되어서 일본자객을 지휘했다고 밝혔다. 더구나 미우라 공사의 히로시마(廣島)재판 증언
에 따르면 오카모토가 일본 자객을 지휘했고 일본 자객의 명성황후 암살을 조장했다고
밝혔다.
그날 새벽 3시에 오카모토는 대원군과 함께 공덕리를 출발했다. 그날 대원군은 광
화문으로 입궐했다. 그런데 오카모토는 일본 자객 중 가장 먼저 건청궁에 도착한 인물
이었다. 따라서 오카모토는 대원군을 설득한 이후 새벽 3시경 일본 자객을 지휘하기
위해서 추성문으로 출발했던 것으로 보인다. 새벽 4시 30분경 먼저 추성문에 도착한
오카모토는 5시 일본 자객을 총 지휘해서 건청궁으로 침입했다.
-----------------------------------------------------------------
8) 西洋殿(европейский дом)으로도 불림 9) 복수당(福綏堂) 서행각(西行閣)의 담장에 붙어있는 작은 문
--------------------------------------------------------------
오카모토(岡本柳之助)의 지휘아래 20-25명의 일본자객은 곤령함의 廳과 房을 거
쳐 옥호루(玉壺樓), 사시향루(四時香樓), 그리고 정시합(正始閤)의 房을 샅샅이 뒤지면
서 명성황후를 찾았다. 이 과정에서 일본 자객은 궁녀들의 머리채를 잡고 밖으로 질질
끌어내며 왕비의 소재를 추궁했다. 일본 자객은 두 자루의 길고 짧은 도검으로 무장했
다. 도검 중 긴 것인 가타나(刀)는 90cm 정도였고, 짧은 것인 와키자시(脇差)는 59cm
정도였다. 일부 일본 자객은 궁녀들이 왕비의 소재를 대답하지 않자 약 180cm의 높이
인 옥호루의 창문 너머로 10-12명의 궁녀들을 던져버렸다. 사바찐은 약 10m( 20-25
걸음) 정도 떨어졌기 때문에 옥호루 바닥에 떨어진 궁녀들의 표정을 살펴볼 수 없었지
만 바닥으로 떨어진 궁녀는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사바찐은 순간적으로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사바찐은 일본 장교의 보호를 받는
것이 최선이라고 판단했다. 사바찐은 용기를 내서 곧바로 일본 장교에게 다가가 영어
로 말을 걸었다. 영어를 이해하지 못하자 사바찐은 조금 알고 있는 일본어로 일본 장
교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10) 현장에 있던 일본 장교는 미야모토(宮本竹太郞) 소위였
다. 미야모토는 훈련대의 일본 교관으로 훈련대 2대대장 우범선과 긴밀한 관계를 유
지했다.
하지만 미야모토는 모르는 척하면서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사바찐은 옆에 있
던 일본 군인에게도 접근했지만 사바찐의 적극적인 행동에 대해서 애써 무시하는
태도를 느꼈다. 다급해진 사바찐은 지휘자인 오카모토에게 접근할 것을 결심했다.
사바찐은 오카모토에게 영어로 아침 인사를 하면서 접근했다. 그러자 오카모토는
“당신의 이름과 직업은 무엇인가?”라고 냉정한 어투로 물어보았고, 사바찐은 이
름과 직업을 밝혔다.
사바찐은 상대방의 표정을 살피면서 먼저 자신의 입장을 설명할 필요성을 느꼈다.
서둘러 사바찐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곤령합까지 왔기 때문에 자신을 보호해 줄
것을 요청했다. 사바찐은 최대한 진지한 표정으로 상대방의 시선을 끌려고 노력했다.
그러자 오카모토는 “당신은 보호되었고, 여기에 머무를 것”을 명령했다. 그런데 오
카모토가 외국인을 사건 현장을 목격하도록 방치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신변 보장에 안도감을 찾은 사바찐은 오카모토에게 1-2명의 군인을 통해 자신을
보호해 줄 것을 요청했다. 오카모토는 곤령합 마당에 있던 일본말을 구사하는 두 명의
-----------------------------------------------------------------
10) АВПРИ. Ф.150.Оп.493.Д.6.Л.125об
-----------------------------------------------------
훈련대 병사를 불러 사바찐의 옆에 서 있도록 명령했다. 이런 상태로 사바찐은 15분
정도 곤령합 마당 구석에서 현장을 목격했다.
새벽 5시 30분 5명의 일본 자객은 소리를 지르면서 곤령합의 계단으로 나왔다.
이들 중 한명은 일본어로 정렬적인 연설을 하더니 다시 곤령합으로 들어갔다. 이들은
궁녀의 머리채를 잡고 다시 곤령합의 계단으로 뛰어 나왔다. 뛰어 나오는 속도를 멈추
지 못한 양복을 입은 2명과 기모노를 입은 3명의 일본인은 정면에서 사바찐을 발견했
다. 그들은 핏발이 선 눈으로 놀라움에 약 10초 동안 정지했다. 정신을 차린 이들은
한 목소리로 일본말과 한국말로 사바찐이 왜 여기에 있는지 묻기 시작했다. 순간적으
로 사바찐은 숨을 멈췄다. 어떻게 대응할까를 망설였다. 사바찐은 일본말과 한국말을
모르는 척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하자 그들에게 영어로 말하기 시작했다. 사바찐은
이들 중 누군가 영어를 이해하고 있다고 느꼈다. 잠시 후 이들은 사바찐을 보호하고
있는 훈련대 병사들의 설명을 듣고 나서 다시 곤령합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던 그 순간 사바찐은 곤령합 마당으로 들어오는 한 한국인
과 눈을 마주쳤다. 그는 사바찐이 들어온 정시합(正始閤)의 정면에 있는 담장에 설치된
일각문(㊀角門)으로 들어왔다. 이 한국인은 사바찐를 보고 놀란 나머지 ‘아’하며 탄
성을 질렀다. 그는 사바찐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그 한국인은 대궐 안에
서 비서를 담당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너무 놀라 잠시 멈칫거렸다. 그는 곧바로 곤령
합으로 들어가고 있는 일본 자객에게 접근하며 활기차게 이들에게 무언가를 얘기하기
시작했다. 사바찐은 결코 건축기사가 아니며 아마도 대궐 배치와 명성황후를 잘 알고
있을 거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의 말이 끝나기도 무섭게 5명의 일본 자객이 사바찐
에게 소리를 지르면서 빠르게 달려왔다.
이 순간 사바찐은 가장 끔직하고 위험한 상황이라고 판단했다. 일본 자객이 맹력
한 기세로 달려들자 훈련대 병사 2명은 신속하게 길을 내주면서 옆으로 물러났다. 이
들 중 한명은 사바찐의 옷깃을 잡았고, 다른 한명은 사바찐의 소매를 잡았다. 동시에
일본말과 한국말로 “왕비가 있는 곳을 가리켜!”라고 소리를 질렀다. 사바찐은 그들
의 말을 못 알아듣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들의 무례한 태도에 놀란 표정까지 지었다.
그런데 사바찐의 옷깃을 잡았던 한명은 영어로 말했다. “왕비는 어디? 어디에 숨
었는지 우리에게 가리켜!”라며 사바찐에게 반복했다. 짧은 순간 사바찐은 흰 눈동자
를 굴리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생각이 떠올랐다.11) “외국인이고 남자이기 때문에 왕
비의 얼굴뿐만 아니라 왕비의 숙소를 전혀 알 수 없다”고 차분하게 답변했다. 사바찐
의 답변에도 불구하고 일본자객은 왕비의 숙소를 가리킬 것을 강요할 속셈으로 곤령합
으로 사바찐을 끌고 갔다.
그 때 멀지 않은 곳에서 현장 지휘자 오카모토가 보였다. 오카모토는 여기서 벌어
진 상황에 주목하면서 사바찐에게 다가왔다. 일본 자객은 공손한 태도를 보이며 사바
찐과 사바찐을 알아본 한국인을 손짓하면서 일본말로 오카모토에게 뭐라고 얘기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말을 듣고 난후 오카모토는 엄한 목소리로 사바찐에게 말했다. “우
리는 왕비를 찾지 못했소. 당신은 왕비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을 테니, 왕비가 어디에
숨었는지 우리에게 가리키시오.”
순간적으로 사바찐은 일본 자객이 자신을 손짓할 때 가장 적절한 답변이 무엇일까
를 고민했다. 사바찐은 자신에게 왕비의 소재를 묻는 것의 부당성을 설명하는 것이 최
선이라고 생각했다. 사바찐은 오카모토에게 한국의 관습과 법에 따라 왕비의 얼굴뿐만
아니라 왕비의 숙소를 전혀 알 수 없다고 또다시 반복했다. 다행히 오카모토는 사바찐
의 변명을 받아들였고, 자신의 부하들에게 사바찐을 놓아줄 것을 명령했다.
그런데 사바찐을 알아본 그 한국인은 끈질기게 오카모토에게 뭔가를 설득시키려고
애썼다. 그 한국인은 사바찐이 풀려난다면 사바찐을 고발한 자신에게 닥칠 혹시 모르
는 불이익을 생각했던 것 같다. 사바찐은 곤령합의 유일한 서양인 목격자인 자신을 풀
어주어 발생하는 위험을 열심히 설명하는 것으로 보였다.
이때 오카모토는 한국인의 의견에 동의하듯이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른 곳으로 움직이려고 했다. 숨죽이며 상황을 지켜본 사바찐은 자신이 한국인의 쥐
덫에 걸렸다고 판단했다. 사바찐은 대궐을 신속히 빠져나가는 길이 생존을 위한 최선
의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사바찐은 옆에 있던 훈련대 병사가 말리는 것을 뿌리치며 재
빨리 오카모토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사바찐은 “그가 자신을 보호해 주겠다”고 말한
것을 상기시켰다. “당신과 같은 신사들은 자신의 말에 항상 책임을 진다”며 오카모
토를 추켜세웠다. 그는 “끝까지 친절을 베풀어 자신을 보호해 주겠다”는 약속을 지
켜달라고 오카모토에게 애원했다. 사바찐은 “자신이 궁궐에서 나가는 것을 호위해 줄
군인을 붙여달라”고 부탁했다.
새벽 5시 45분 오카모토는 훈련대 군인 2명에게 사바찐을 곤령합에서 데리고 나
갈 것을 명령했다. 사바찐을 알아본 한국인도 오카모토의 결정에 불만을 표시했지만
-----------------------------------------------------------
11) АВПРИ. Ф.150.Оп.493.Д.6.Л.75об
---------------------------------------------------------------
사바찐과 함께 출발했다. 한국인은 인적이 드문 궁궐 뒤쪽인 복수당(福綏堂) 출입구로
유도하면서 사바찐에게 앞장설 것을 명령했다. 앞서서 걸어가던 사바찐은 곤령합에서
장안당으로 가는 자유로운 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적이 드문 복수당 뒤쪽으로 이동
하는 것에 대해서 의심을 품게 되었다. 더구나 사바찐은 한국인이 훈련대 병사에게 몰
래 귓속말로 속삭이는 것을 느꼈다. 곤령합을 벗어나 복수당을 돌아가는 과정에서 사
바찐은 훈련대 병사가 자신보다 조금 앞에 서서 걸어갈 것을 제안했다. 훈련대 병사가
자신의 제안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했기 때문에 사바찐은 다시 한번
완강하게 주장하였고 관철시켰다.
일본 자객으로부터 벗어나자 사바찐은 극단의 상황에서 자신을 방어할 수 있다
는 용기를 갖게 되었다. 사바찐은 아주 위험한 상황을 벗어났지만 혹시 모르는 위험
을 대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사바찐은 불안한 태도를 버리고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려고 노력했다. 공격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의식적으로 팔짱을 낀 채 걸
어갔다.
사바찐은 관문각을 거쳐 장안당을 지나면서 일본 군인과 장교, 한국 관료들을 목
격할 수 있었다.12) 대략 8-10명의 일본 장교가 100-150명 정도의 일본 군대를 지휘
했다. 사바찐은 한국관료가 장안당에 집결해 있는 것을 보면서 고종이 여기에 있을 것
이라고 추측했다. 사바찐은 장안당을 거처 6시에 대궐 남문인 광화문을 통과했다.
죽음의 그림자
결국 사바찐은 건청궁의 정황을 상세하게 증언했지만 왕비의 암살과정을 목격하지
못했다고 보고서를 작성했다.
사바찐은 을미사변 관련하여 증언뿐만 아니라 보고서까지 작성했다. 사바찐은 을
미사변 직후 10월 8일 러시아공사 베베르에게 사건에 관해 증언했다. 또한 사바찐은
즈프주재 러시아부영사 찜첸꼬의 권유로 10월 30일 을미사변의 보고서를 작성했고, 북
경주재 공사에게 자신의 보고서를 제출할 것을 요청했다. 당시 사바찐은 서울주재 독
일영사를 비롯하여 일부 외국인들이 보고서를 작성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지만 모두 거
절했다.
그런데 사바찐의 증언과 보고서에서 중요한 사실을 은폐한 의혹이 제기되었다. 우
선 사바찐은 당일 사건을 둘러싼 인물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그래서
--------------------------------------------------------------
12) АВПРИ. Ф.150.Оп.493.Д.6.Л.75об
-----------------------------------------------------------
주한 러시아공사 베베르(К.И. Вебер)와 즈프주재 러시아부영사 찜첸꼬(А.Н.
Тимченко-Островерхов)는 사바찐에게 을미사변에 가담한 일본인의
이름을 강하게 추궁했다. 두 사람은 사바찐이 더 이상의 정보를 제공하지 않자 사바찐
에 대한 의혹을 품었다.
주한 러시아공사 베베르는 외교단회의에서 현장의 유일한 목격자 사바찐을 간접적
으로 노출시켰다. 이로 인해 사바찐은 자신에게 “가장 참혹한” 결과가 닥쳐올 것을
직감했다. 사바찐은 증언 공개로 자신의 목숨이 더욱 위험하다고 판단했다. 한국에 거
주하는 일본인 및 일본의 지원을 받고 있는 한국 관료 등은 을미사변 현장에서 사바찐
이 더 많은 사실을 목격했을 가능성에 대해서 의심했다.
이러한 의심 때문에 사바찐은 자신의 암살 위협에 시달렸다. 실제 10월 8일 저녁
1명의 유럽인과 2명의 한국인은 사건의 현장을 목격한 사바찐이 암살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경고했다. 왜냐하면 사바찐은 대질신문을 통해서 을미사변에 관련된 일본인과
한국인을 알아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 날 이후 암살의 위험 때문에 사바찐은 밤에
잠을 잘 수 없었다. 또한 사바찐은 가족의 안전을 위해서 저녁 마다 집을 떠나야했다.
사바찐은 10월 9일 한국 내부협판 유길준이 자신을 한국 내부의 고문관으로 제안
하자 더욱 불안함을 느꼈다. 사바찐은 고문관의 제안을 을미사변 이후 출범한 내각이
자신을 위험한 존재로 인식한 증거라고 판단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공사관은 러시아
공사관에 書記官 스기무라(杉村濬)를 파견하여 사바찐의 증언을 확인하겠다고 제안했
다. 사바찐은 사건 현장의 내용을 사건에 가담한 스기무라에게 증언한다는 사실에 소
름이 끼쳤다.
한국정부와 일본공사관이 점점 압박하자 사바찐은 러시아공사 베베르에게 각종 조
언을 구했다. 그런데 베베르는 사바찐의 증언에서 구체적인 가담자의 성명이 나오지
않자 그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베베르는 오히려 서기관 슈떼인이 있는 자리에서 사바
찐이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자신에게 전달하지 않았다고 힐책했다. 더구나 사바
찐은 내부 고문관의 제안에 대해서 베베르에게 조언을 구했지만 스스로 결정할 문제라
는 원칙적인 답변만 들었다.
그런데 오카모토가 왕비를 살해하는 상황에서 사바찐을 보호한 이유는 무엇일까?
사바찐은 정력적이었지만 한편으로 신중한 성격을 동시에 갖고 있었다. 사바찐은 삼국
간섭 이후 “러시아공사 베베르 부인의 자매인 존타크와 왕비와의 친분이 주한 일본인
및 일본과 연대하는 한국인의 분노를 머리끝까지 자극했다”고 생각했다. 사바찐은 외
교적 수완이 전혀 없는 존타크와의 친밀한 관계가 왕비에게 매우 위험한 일이라고 판
단했다. 사바찐은 한국에서 러시아가 일본을 자극하는 행동에 대해서 비판적인 시각을
견지했다. 이러한 사바찐의 중립적인 태도는 일본인에게 사바찐에 대한 반감을 막을
수 있는 요인으로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사바찐은 10년 이상 한국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서울과 인천 거주 외국인과의
친분관계가 두터웠다. 그런 배경으로 을미사변 전날 출근할 때 중국인 친구는 사바찐
의 출근을 저지했고, 을미사변 직후 유럽인 친구는 사바찐에게 암살 위험을 경고했다.
한국 군부고문관으로 경복궁을 출입한 오카모토는 ‘건축사이자 궁궐감시자’라는 사
바찐의 신분을 확인한 순간, 사바찐의 존재를 쉽게 무시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또한
일본인이 러시아인을 살해한다면 러시아와 일본의 외교적 파장이 발생할 수도 있었다.
그만큼 사바찐을 살해했을 때 미치는 파장은 한국뿐만 아니라 러시아와 일본의 외교관
계에 커다란 악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사바찐의 중립적인 태도, 외교적 파장 등을 의식해서 사바찐을 보호했다
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당시 서울거주 일본인과 한국인 일부는 사바찐이 ‘더 많은 사
실’을 목격했을 가능성에 대해서 의심했다. ‘더 많은 사실’이란 무엇일까?
사바찐에 따르면 새벽 5시 45분 건청궁을 출발한 사바찐은 정동소재 러시아공
사관에 6시 30분 도착해서 베베르 공사와 슈테인 서기관에게 자신이 목격한 것을
증언했다. 아무리 느린 걸음으로 건청궁에서 광화문까지 걸어도 15분, 광화문에서
정동 러시아공사관까지 15분 정도가 소요되었다. 생명의 위협을 느끼던 사바찐이
발걸음을 늦췄을 가능성도 희박하다. 사바찐은 새벽 5시 45분이 아니라 6시 건청
궁을 출발했을 가능성이 높다. 5시 45분에서 6시 사이는 왕비가 암살되었던 시점
이었다.
또 다른 사실은 오카모토가 사바찐의 변명을 너무 쉽게 믿었고, 유럽인 사바찐을
곤령합 현장에 방치했다는 점이다. 사바찐의 증언과 보고서, 러시아와 일본 외교문서
등을 살펴보면 사바찐이 일본인에 의해 건청궁 내부에서 구금되었다는 기록은 존재하
지 않는다. 두 사람 사이에 어떤 합의가 존재했음에 틀림없다. 사실 사바찐이 그토록
감추려고 했던 인물은 일본자객의 총지휘자인 오카모토였다. 사바찐은 오카모토가 드
러나면 자신과 오카모토와의 의혹이 제기될 것으로 판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사바찐은 베베르의 추궁과 힐책에도 끝까지 침묵했다.
당일 사바찐의 행적에 관한 주요한 기록이 일부 남아있다. 서울 한성신보 편집장
고바야카와(小早川秀雄)는 “칼날이 번득이고 마당 안팎을 자객들이 우왕좌왕 할 때”
러시아인 사바찐이 현장을 목격했다고 기록했다.
우치다(內田定槌) 영사는 ‘벌써 해가 뜬 상황’에서 미국인 다이 장군을 목격했
고 “다이와 함께 왕궁 안에 숙직했던 러시아인 사바찐도 역시 숨어서 이를 방관하고
있었다”고 기록했다. 당시 공식적인 일출 시간은 6시 34분이었고, 해가 뜰 시간은 아
무리 빨라도 6시 이전으로 볼 수 없다.
고등재판소는 사바찐의 기록을 인용하면서 “사파진의 보고에도 일렀으되, 일본
사관들이 전정에 모이어 일본자객들이 모든 일을 완전히 지을 줄을 이미 알았다 하였
고, 또 일렀으되, 자객이 왕후를 해할 때에 일병이 전각을 환위하여 전문을 파수했다
하고, 그 자객이 각처에 찾더니...”라고 기록했다. 이 기록을 살펴보면 사바찐은 왕비
가 암살될 시각인 5시 50분 전후에 현장에 있었음에 틀림없다.
사건의 현장에서 사바찐과 오카모토는 어떤 합의를 했을까? 아마도 그것은 사바
찐의 생명을 구해주는 대신에 오카모토를 비롯한 일본자객의 폭력과 살해에 관해 침
묵을 지켜주는 조건이었을 것이다. 사바찐은 을미사변에 관한 자신의 보고서에서 오
카모토를 “매우 고상한 외모” “단정한 양복 차림” “당신과 같은 신사” 등으로
폭도가 아닌 신사로 묘사했다. 결국 사바찐은 자신의 보고서에서 자신의 목숨을 구해
준 오카모토의 이름을 끝까지 언급하지 않았고, 왕비를 비롯한 궁녀의 살해를 증언하
지 않았다.
사바찐은 베베르와의 불편한 관계 속에서 더 이상 러시아공사관이 자신을 보호해
줄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사바찐은 자신의 보고서에서 과거 자신에 대한 공사관
의 부당한 태도를 언급하면서 베베르의 행위를 간접적으로 비난했다. 사바찐은 공사관
으로부터 자신에게 적당한 직장을 소개할 수 없다는 통고를 받았고, 러시아공사관 건
축에 관여한 자신의 인건비 7%를 공사관에게 지불하지 않았던 사실도 기록했다.
신경이 더욱 예민해진 사바찐은 이러다가 암살당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에 사로잡
혔다. 사바찐은 을미사변 조사를 위한 특별위원회의 심리를 피하고, 베베르와의 불편
한 관계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한국을 떠나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라고 판단했다.
따라서 사바찐은 제물포에서 포함 까레이쯔(Кореец)를 타고 10월 11일 즈프(芝罘)에 도착했다.
사바찐은 즈프의 시웨(シ―ヴエ―, 玺悦) 호텔에 머물면서 러시아 부영사 찜 첸꼬
(А.Н. Тимченко-Островерхов)이외에는 아무도 면회하지 않았고,
을미사변의 보고서를 작성하면서 호텔의 방안에 틀어박혔다.
사바찐은 10월 30일 러시아부영사에게 자신의 보고서를 전달하면서
북경주재 러시아공사 까쁘니스트(Д.А. Капнист)의 초청으로 북경으로 출발했다.
결국 을미사변의 목격자 사바찐은 한국인과 일본인의 암살 위협에 시달렸고,
주한 러시아공사관의 보호마저도 받을 수 없었다.
주한 러시아공사관은 사바찐의 증언을 기초로 일본의 책임론을 부각시켜
한국에서 외교적 영향력을 강화하려고 노력했다.
주한 일본공사관과 김홍집내각은 을미사변의 진실을 은폐하기 위해서 사바찐을 회유하려고
시도했다. 을미사변의 진실을 둘러싼 각각의 이해관계가 첨예해지자 사바찐은 자신의
중립적인 태도를 더 이상 유지할 수 없었다. 사바찐은 한반도를 둘러싼 복잡한 열강의
외교관계에서 한 인간의 생존 방법이 무엇일까를 고민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쪽에 기
울어진 선택이 단기간에는 도움이 되지만 장기적으로 어려움을 줄 수 있기 때문이었
다. 환영받지 못한 목격자 사바찐은 자신의 생명과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 외국으로
도피하는 길을 선택했다.
한 인간의 선택과는 달리 한국·일본·러시아 정부는 러일전쟁
직전까지 명성황후 암살의 배후 논쟁을 끊임없이 진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