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관웅은 한국재즈 클럽문화의 부흥을 앞장서서 주도한
피아니스트라고 볼수 있다. 많은 재즈지식과 사회적
음악적 경험을 통하여 재즈연주자들의 큰형님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오랜시간동안 라이브 클럽
활동을 통해 꾸준히 팬을 확보하였으며 독자적인 노력을
통해 자신만의 재즈피아니즘을 형성시켜 갔다.
또한 대중들로 하여금 재즈 라이브의 즐거움에 눈뜨게한
공로는 결코 작은 부분이 아니었다. 그의 그런
활동은 소외 당해온 재즈에 있어서 외롭고 지칠만한 작업이었지만 많은 시간이 지난
오늘날 한국 재즈의 역사에 중요한 위치를 점유하게 되었다. 9년전쯤 신관웅트리오가
아무도 없는 재즈클럽에서 연주하던 장면을 잊을수가 없다. 마침 그날은 그의 생일날
이였는데 아빠와의 조촐한 파티를 준비한 딸과 그의 친구들만이 한쪽 테이블에서 연주
를 지켜보고 있었다. 가족외에는 아무도 봐주지 않았던 그때의 무대와 오늘날 가장 많
은 인파를 동원하게된 신관웅 빅밴드의 무대는 세월의 실감하게 하는 장면이 아닐수
없다. 신관웅의 연주스타일은 쉽게 단정짓기 어려운 다양한 패턴을 갖고 있으며 그보
다는 오랜기간동안 라이브무대에서 다져진 청중을 압도하는 매너와 즐거움을 배가 시
켜주는 적절한 타이밍적인 연주자로 보여진다. 한편,클래시컬하고 서정적인 아르페지오
는 대중들을 강하게 흡입하는 매력이 있다고 하겠다. 현재는 대학로(천년동안도)와 이
대후문(버드랜드)에서 연주활동을 하고 있다.
신관웅님에 대하여 더 자세히 알기 위하여 몇 년전 경향신문 최소영기자가 정리한글을
소개합니다
나의젊음,나의사랑-재즈 피아니스트 신관웅
저녁마다 학교에 숨어들어 몰래 풍금을 치던 시골소년. 레슨이 뭔지도 모른 채 혼자
연습에 몰두했던 그 소년은 이제 피아노 연주자가 되었다. 재즈계의 대부로 불리는 피
아니스트 신관웅씨. 「재즈」라는 말조차 생소하던 시절. 연주공간만 있어도 감지덕지
했던 어려운 시기를 묵묵히 참아왔고 한동안 우리 사회를 휩쓸었던 재즈붐에도 호들갑
을 떨지 않았다. 그저 피아노를 연주하며 30년 동안 한길을 걸어왔을 뿐이다.
-오히려 고마운 ‘못이룬 두 소원’-
50년대 충청도의 한 가난한 시골마을을 상상해보자. 피아노라는 걸 구경해본 사람은커
녕, 피아노가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되었을까. 그저 마을의 초등학교에 놓여있
는 풍금 한 대가 고작. 내가 자라던 곳이 바로 그런 마을이었다.초등학교에 들어가 처
음 풍금을 봤을 때 너무나 신기했다. 음악시간이되면 교탁 옆 창가에 풍금이 놓여지고
선생님은 두 손으로 아주 멋진 화음을 만들어낸다. TV는 물론이고 라디오도 없었으니
음악연주를 처음 들어본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나는 풍금을 쳐보기로 했다. 방과 후
에 남아서 도레미파솔을 다섯 손가락으로 차례차례 누르면서 연주는 시작되었다. 내게
는 유리한 조건이 하나 있었는데 그건 아버지가 교장선생님이었다는 것이다. 적어도
학교에 놓여있는 풍금을 만진다고 야단칠 선생님은 없었다. 아버지도 음악을 아주 좋
아하는 분이어서 그 시절 집에서 만도린을 즐겨 연주하곤 했다. 아버지의 허락하에 학
교의 풍금은 내 차지가 되었다. 당시 나는 아주 내성적인 소년이었다. 2~3년에 한번씩
전근을 가는 아버지를 따라 충청도의 산골마을을 돌아다니다보니 친구도, 이웃도 없었
다. 거기에 어머니마저 암으로 돌아가시자 아무데도 정을 붙이지 못했다. 내가 한창 뛰
어놀 나이에 풍금에 매달릴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처음엔 연습이라고 해야 한
손으로 멜로디를 치는 정도였다. 고등사범학교를 다니던 형이 방학때 내려와서 내 모
습을 보더니 『풍금을 연습하려면바이엘 책이 있어야 한다』고 가르쳐 주었다. 그때부
터 바이엘 책을 가지는게 내 소원이 되었다. 그리고 3학년 때 담임선생님으로부터 드
디어 바이엘교본을 선물받았다. 학교가 파한다고 곧바로 풍금을 칠 수 있는 것은 아니
었다. 풍금이 이반저반 옮겨다니니 어디 있는지 찾아다녀야 했다. 또 장소가 적당치 않
으면 혼자 낑낑대며 풍금을 옮겼다. 수업이 끝나지 않은 학년에서 풍금을 사용하고 있
을 때면 바이엘 교본을 옆에 끼고 운동장에서 기다려야 했다. 초등학교 시절 내내 바
이엘 교본을 펼쳐놓고 끊임없이 연습했다. 책 모서리가 다 닳고 실밥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곧 실력이 일취월장해 웬만한 동요는 반주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옹달샘」
「둥근해가 떴습니다」 등을 쳤는데 「넓고도 넓은 운동장에~」로 시작하는 운동회 노
래는 특히 좋아하던 곡이었다. 초등학교 6학년때쯤에는 선생님들이 내 연주를 듣더니
『넌바이엘은 떼도 되겠다. 이젠 체르니를 연습해야지』 했다. 이미 초등학교 선생님이
된 형에게 나는 교본을 구해달라고 부탁했다. 『형, 체니르라는 책이 있는데 그걸 쳐야
피아니스트가 된데』 한참 후 집에 들른 형은 『아무리 찾아봐도 체니르라는 교본은
없더라.체르니라는 건 있던데 혹시 그거 아니냐?』 했다. 중학교에 가면서 상황은 좀
나아졌다. 무엇보다 학교에 피아노가 있었다 흔히 있는 88건반 피아노보다 건반이 두
옥타브 정도 적은 베이비 피아노였지만 당시에는 피아노를 갖춘 중학교도 드물었다.
그때까지 나는 바이엘이 풍금교본인 줄로만 알았지 피아노 교본인 것을 몰랐었다. 피
아노로 연주되는 아름다운 클래식곡이 있다는 것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시골 중학
교에 피아노가 있었던 것은 음악선생님 때문이었다. 피아노를 전공한 분이었는데 처음
부임할 때 학교에 피아노를 사달라고 요구했던 것이다. 초등학교 때와는 사정이 달라
서 피아노를 마음대로 칠 수는 없었다. 피아노 뚜껑은 늘 잠겨있었다. 철사 같은 것으
로 몰래 따고 도둑 피아노를 쳤다. 가능한 한 살살 두드리면서도 늘 마음이 조마조마
했다. 싫어하는 과목이 있을 때면 도망나와 피아노를 치다 벌도 여러번 섰다. 처음엔
야단을 치던 음악선생님도 내 실력을 보더니 피아노를 치도록 허락해줬다. 당시 우리
학교에서 피아노를 칠 줄 아는 학생이라곤 나밖에 없었다. 학교에서 음악회가 있으면
늘 1등이었다. 음악실기시험을 볼 때도 선생님대신 내가 반주를 맡았다. 피아노 명곡들
도 알게 되어서 「엘리제를 위하여」 같은 곡을 즐겨 연주했다. 그때 내 첫째 소원은
유명한 피아니스트가 되는 것이었고 둘째 소원은 내 피아노를 갖는 것이었다. 두가지
소원 모두 이루어지지 않았다. 집안 형편은 점점 어려워졌고 고등학교 2학년 때 음대
진학을 포기했다. 소원대로 피아노를 갖게 됐다면 어땠을까. 아마 금방 진력이 나 그만
두었을 것이다. 피아노 앞에 앉기가 힘들었기에 일단 기회가 오면 온 마음을 다해 연
습에 몰두할 수 있었다. 클래식 연주자가 되었다면 나는 재즈의 깊은 맛을 몰랐을 것
이고 혹 알았다 해도 좋은 연주자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일단 클래식으로 굳어진 다
음에는 재즈로 돌아가기가 힘들다. 나는 두가지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을 항상 감
사하게 여기며 살고있다.
-좌절한 ‘클래식’불붙은 ‘재즈’-
중학교 때만 해도 나는 피아노에 꽤 자신이 있었다. 주위 어디를 둘러봐도 나만큼 피
아노 치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그 자신감은 서울에 와서 여지없이 깨졌다. 졸업이
가까워지자 음악선생님은 내게 서울예고에 진학할 것을 적극 권했다. 필기시험도 없이
실기만으로 입학생을 뽑는 특채가 있으니 응시해 보라고 했다. 아버지와 함께 완행기차
를 타고 서울에 올라가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서울예고는 정동에 있었다. 들어가려는데 바닥이 얼마나 깔끔하고 맨들맨들하든지. 엉
겁결에 신발을 벗었더니 선생님이 도로 신으라고 했다. 바닥은 그래도 약과였다. 시험
장에 놓여있는 그랜드 피아노를 보는 순간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그때까지 내가 친
것이라야 건반수가 작은 베이비 피아노밖에 없는데 갑자기 그랜드 피아노라니. 뒤에는
쟁쟁한 음악가들이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내 연주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험곡은 「토
이게 행진곡」(터키행진곡). 너무 긴장해서 어떻게 쳤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연주
가 끝난 후 그중 한 선생님이 점잖게 얘기했다 『잘 치긴 하는데 특채까지는 힘들 것
같군요. 나중에 일반전형으로 응시하면 합격할 수 있을 거에요』 한마디로 거절이었다.
서울에 와서 내가 우물안 개구리였음을 절실하게 깨달았다. 돌아오는 길에 아버지는
『특채라면 모를까, 집안 형편도 여의치 않은데 그냥 고향에서 학교 다니는 게 어떻겠느냐』
고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내셨다. 그렇게 해서 예고 진학은 좌절되었다. 그래도 피아노
연주만은 멈출 수 없었다. 고등학교에서도 역시 음악선생님의 조수 노릇을 하면서
피아노를 만졌다. 학교 근처에 선생님 집이 있었는데 거기에 피아노가 있었다.
수학이나 과학처럼 공부하기 싫은 과목이면 무조건 빠져나와 선생님 집으로 향했다.
나중에는 선생님 동생이 『불쑥 불쑥 찾아와 피아노를 두들겨대는 통에 시끄러워
살 수가 없다』고 호소했을 정도로 미친 듯 피아노에 몰두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이미 음대 진학을 포기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폐결핵을 앓기 시작하면서 집안 살림이 극도로 나빠졌다. 그래도 대학에는
가고 싶었다. 음악을 못할 바에야 돈이나 많이 벌자며 서울대 상대를 지원했다. 결과는
낙방. 3년동안 수업 빼먹기를 밥먹듯 했는데 점수가 좋을 리 없었다. 그길로 짐을 싸서
서울에 올라와 재수생활을 시작했다. 학원비며 하숙비, 용돈을 다 내손으로 벌어야 하
는 상황이었다.처음엔 별의별 아르바이트를 다 했다. 제약회사에서 약품을 받아다 약국
에 배달해주는 일, 가게 점원. 조금 시간이 지난 후 나는 피아노 연주로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당시 명동의 사보이호텔 근처에는 밴드맨들의 인력시장이 형
성되어 있었다. 혹시 일자리가 없을까 해서 그곳을 자주 배회했었는데 드디어 기회가
왔다. 거기서 알게 된 한 친구가 『피아니스트 한명이 아파서 갑자기 빠지게
됐다』며 미8군에서 연주할 수 있겠느냐고 물어왔다. 악보가 있으니 그대로 치기만 하
면 된다는 것이었다. 나로서는 기다리고 기다리던 기회였다. 삼엄한 경비를 통과해 부
대 안으로 들어가니 완전 별천지였다. 부대 곳곳에 클럽들이 있었는데 그중 내가 갔던
술집은 「김치 카바나」라는 곳이었다. 그날 내가 무슨 곡을 연주했는지는 기억에 없
다. 그보다 한 외국인 피아니스트의 연주가 내 마음을 온통 사로잡았다. 자유로우면서
도 한편으로 듣는 이의 마음을 긴장시키는 연주. 그때 나는 재즈가 뭔지도 잘 몰랐다.
그저 그의 연주를 듣는 순간 「바로 저거야, 앞으로 나는 저 음악을 할 것이다」라고
결정했다. 클래식에서 좌절했던 내 열정은 재즈에서 다시 불이 붙고 있었다.
-혼자 깨달아야 할 ‘즉흥연주’-
하숙집에 돌아와서도 미8군에서 들었던 재즈 피아노 연주가 귓전을 맴돌았다. 어디서
어떻게 시작해야 그런 연주를 할 수 있을까. 그때 마침 한 친구가 정근도씨를 소개해
줬다. 가수 정훈희의 삼촌인 그는 두개의 밴드를 이끌고 있는 재즈 피아니스트였다.
마침 밴드 중 하나에 피아니스트가 결원이라고 했다. 오디션을 보던 날 나는 클래식을
연주했다. 내 연주를 듣고 난 그는 몇가지를 지적했다. 그 정도의 클래식 연주실력을
바탕으로 재즈를 공부하면 아주 좋은 연주자가 될 수 있다. 단, 혼자 공부
해서 그런지 운지법이나 자세, 연주기법에 약간씩 문제가 있다. 지금 와서 고치기는 힘
들겠다. 기가 죽어있던 나는 그의 마지막 말에 용기를 얻었다. 『하지만 괜찮아. 클래
식이라면 문제가 되겠지만 재즈에는 많은 연주스타일이 있지. 재즈는 기술이 아니라
마음으로 연주하는 음악이니까』 그날부터 레슨을 받기 시작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피아노 선생님을 만난 것이다. 재즈는 생각했던 것보다도 만만치 않았다. 가장 어려운
것은 재즈 특유의 화성. 클래식과는 다른, 생전 처음 들어보는 화성이 처음에는 낯
설기만 했다. 귀를 트이게 만드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또 하나 까다로운 것이 즉흥
연주. 그건 누구도 가르쳐줄 수 없는 것이고 혼자 깨달아야 했다. 설명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었다. 리듬섹션과 직접 연주를 하며 부딪혀봐야 했다. 레슨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곧 현장에 투입되었다.
나이트클럽에서 밴드 연주를 했는데 지금의 나이트클럽과는 조금 달랐다. 전속무희가 있고
연주곡도 지금 같은 댄스뮤직이 아니라 분위기 있는 곡들이었다. 그리고 곧 용산 미8군 클럽
의 하우스밴드(클럽 전속밴드)로 들어가게 됐다. 미8군은 미국대중문화의 집산지였다.
부대마다 여러개의 클럽이 있었는데 한다 하는 한국의 음악인들도 미8군으로 흘러들어
갔다. 그리고 부대 안에서 미국인들과 교류하며 익힌 문화를 부대 바깥에 퍼뜨렸다. 윤
복희, 최희준, 정훈희 등 가요계를 풍미했던 이들이 다 미8군 클럽 출신들이었다. 미8
군에 한국의 음악인들을 공급하는 용역회사도 있었다. 미8군에서 활동하려면 이 용역
회사의 오디션을 거쳐야 했다. 나 역시 몇몇 선배 연주자들과 밴드를 구성해 오디션을
봤다. 한번 오디션에 합격했다고 천년만년 일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6개월마다 다
시 오디션을 봐 A, B, C, D로 등급을 매겼다. 오디션에는 미군부대에서 나온 장성들도
배석했다. 등급이 나쁘면 동두천, 의정부로도 돌아다녀야 했고 보수도 줄어들었다. 그
러니 평소에 쉬지 않고 실력을 닦아야 했다. 남영동에서 버스를 내려 부대까지 걸어가
는 30분 동안 나는 늘 휘파람으로 애드립을 연습했다. 겨울에 하도 많이 휘파람을 불
어 늘 입술에서 피가 났다. 귀를 트이게 만들기 위해 재즈 연주곡도 많이 들었다.
요즘에야 CD도 많이 나와 있지만 당시에는 재즈음반 하나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였다.
떨이로 나온 판들이 가득 쌓여 있었는데 쪼그리고 앉아 한장 한장 넘기며 재즈 음반을
찾았다. 저녁 때쯤 면 손이 새까매졌다. 그나마 판을 구하면 재수가 좋은 날이었다.
미군 클럽 하면 우선 떠오르는 것이 있다. 가게 문을 열고 들어서면 훅하고 끼쳐오는
양키들의 묘한 냄새.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피아노 연주를 하며 식탁마다 수북이 쌓여있는
통닭, 스테이크 같은 음식을 훔쳐보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때 내 유일한 낙은 쉬는 시간
마다 악단 앞으로 하나씩 나오던 미제 깡통맥주였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먹어본 맥주였는데
맛이 일품이었다. 매일 연주를 하며 맥주 나올 시간만 기다렸다. 지금 생각하면 슬픈기억이다.
-결혼후 꿈이룬 ‘피아노 장만’-
미군부대에서 일하면서 명지대 경영학과를 다녔다. 말 그대로 왔다갔다만 한 것이지
공부하고는 담을 쌓았다. 실력을 제대로 연마하려면 낮에도 연습을 계속해야 했다. 그
러니 수업에 성실할 수가 없었다.
그때도 피아노가 없기는 마찬가지여서 늘 연습에 쫓겼다. 생각다 못해 개인레슨을 시
작했다. 레슨비를 반으로 깎아주는 대신 한시간씩 피아노를 빌렸다. 그리고 틈만 나면
악보를 보고 외웠다. 클래식도 마찬가지지만 재즈는 악보를 보고 치는 것과 외워 치는
것이 천지차이다. 꼭 외워서 친다고해서 내 별명은 「메모리 박사」였다. 재즈 음반도
큰 가르침을 주었다. 청계천을 헤매며 간신히 하나 건진 재즈 음반은 틀어보면 음악소
리보다 잡음이 더 컸다. 그나마 너무 낡아 바늘을 올려놓으면 끝까지 쭉 미끄러지는
것도 있었다. 그런 날은 낙심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래도 오스카 피터슨, 존 콜트
레인 등의 음반을 들으면서 즉흥연주에 대해 많이 배웠다. 처음으로 구한 재즈 음반은
조지 쉐린의 연주였다. 맹인 피아니스트였는데 스타일이 독특해서 재즈용어 중에 「쉐
린 사운드」라는 것이 생겨났을정도다. 수백번을 반복해서 들으며 음을 하나씩 골라내
어 채보를 했는데 많은 공부가 됐다. 재즈 이론서라는 것이 있을 리 없었다. 동료들이
필사해서 보관하고 있는 재즈교본이 있었는데 가끔 그런걸 발견하면 빌려다가 밤새도
록 베꼈다. 그러나 이런 교본들은 재즈 연주자에게 비장의 무기 같은 것이어서 빌려주
기를 꺼려했다. 며칠 동안 술을 사주며 달래야 겨우 얻어볼 수 있었다. 미8군 연주생활
이 1년쯤 지나면서 클럽의 분위기가 조금씩 달라졌다. 하나둘 철수하는 부대가 생기고
클럽 수도 줄어들어서 많은 연주자들이 부대밖으로 나왔다. 나도 부대 일을 그만두고
파피」라는 예명을 가진 색소폰주자의 빅밴드로 들어가게 되었다. 모두 나보다 4,5년
선배들이었다. 명동 뉴코리아호텔의 꼭대기층 나이트클럽에서 매일 밤 연주를 했다.
끝나면 11시. 통금이 있던 시대였지만 그냥 가기는 섭섭했다. 근처 포장마차에 가서
큰 컵에 소주를 따라 10분 만에 마시고 버스정류장으로 뛰어갔다. 대학 4년 동안 비슷한
생활의 반복이었다. 대학 친구는 거의 없었다. 만나봐야 대부분 취직이나 사업 얘기만
하니 나와는 관심사가 전혀 달랐다.
졸업을 하면서도 취직은 안중에 없었다. 더 열심히 음악을 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졸업후 얼마되지 않아 결혼을 했는데 결혼후 나는 필생의 소원을 하나 이루었다. 피아노
를 장만한 것이다. 비록 12개월 할부였지만 단칸방에 피아노를 들여놓던 날 꿈을 꾸는
듯한 기분이었다. 피아노를 치기만 하면 주인집에서는 시끄럽다고 난리를 쳤지만 그래도
기쁘기만 했다. 하루에도 몇번씩 먼지를 털고 건반을 닦았다. 그러나 몇년후 그 소중한
피아노를 팔아야 했다. 더이상 피아노가 환영 받지 못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당시 몇몇 재즈 연주자들끼리 의기투합해「정성조와 메신저스」라는 그룹을 만들고 명동의
「오비스 캐빈」에서 연주를 했는데 업주가 피아노를 빼달라고 요청했다. 70년대 초
비틀즈가 유행하면서 전자 악기가 어코스틱 악기를 압도하고 있었다.
피아노도 마찬가지여서 피아노보다는 전자오르간이 인기 있었다. 하는 수 없이 피아노를
팔아 오르간을 장만했다. 피아노를 내가던 날 큰 딸은 『이거 내 피아논데 왜 가져가는 거야』
하며 땅바닥에 주저앉아 대성통곡을 했다. 자기 피아노라고 우기는 것이 우습기도 했지만
마음이 자꾸만 우울해졌다. 그렇게 재즈 연주자들을 둘러싼 상황은 조금
씩 변해가고 있었다. 건반하나면 색소폰이며 바이올린 소리까지 해결할 수 있으니 연
주자들이 설 자리는 점점 없어졌다. 당시 함께 활동했던 재즈 연주자들도 지금은 거의
없다. 선배들은 생계해결을 위해 재즈를 떠났다. 나도 슬슬 먹고 살 걱정을해야 했다.
-‘봉조클럽’서 ‘방송악단’으로-
흔히 한국의 대중음악계를 풍미한 세명을 들라면 이봉조, 길옥윤, 김강섭을 든다. 나는
십몇년간에 걸쳐 이 세명을 다 모시는 영광을 누렸다. 가장 먼저 만난 분이 이봉조씨
였다. 60년대 말, 70년대 초. 한국의 대중음악계는 이봉조의 전성시대였다. 미8군에서
색소폰 연주자로 활약했던 그는 세상에 나온 후 대중음악으로 눈을 돌렸다. 신성일, 엄
앵란 커플의 영화가 일세를 풍미하고 있었는데 영화음악은 모두 이봉조씨가 독차지했
다. 또 정훈희와 짝을 이뤄 국제가요제에서 출전해 좋은 성적을 거두기도 했다. 그때
불렀던 노래가 「안개」. 그 유명한 현미의 「밤안개」도 그가 만든 곡이었다. 당시 나
는 이동기 악단의 일개 피아니스트였다. 매일 밤 호텔 나이트클럽에서 술손님들을 상
대로 연주하는 그렇고 그런 생활. 뭔가 돌파구가 필요했던 그때 한 친구가 내게 『봉
조클럽에 피아니스트가 없다더라』고 귀띔해주었다.
봉조클럽은 청계천 3가 센추럴 호텔의 꼭대기층에 있던 클럽 이름. 이봉조씨가 사장이
었다. 봉조클럽에서 일한다는 것은 이봉조씨를 선생님으로 모실 수 있다는 얘기였다.
봉조클럽에 찾아갔더니 누군가 피아노 앞에 앉아연주를 하고 있었다. 벌써 피아니스트
를 구한 건가.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바로 이봉조씨 였다. 급한 김에 자기가 직접
피아노를 연주했던 것이다. 연주솜씨도 아주뛰어났다. 한참을 기다리다 연주를 끝내고
내려오는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피아니스트가 없다는 얘기를 듣고 왔습니다. 지금은
이동기 악단에 있는데 여기서 일해보고 싶습니다』 이봉조씨는 특유의 호탕함으로 반
갑게 맞아줬다.
『아 그래요? 그럼 다음 스테이지에 한번 올라가 연주를 해봐요』 내 연주를 들은 그
는 『내일부터 당장 나오라』고 말했다. 그렇게 해서 나는 이봉조씨 밑에서 일하게 되
었다. 봉조클럽에서는 재즈만 고집할 수가 없었다. 재즈 반에 대중가요 반. 그나마 몇
달 있다가 봉조클럽은 문을 닫고 말았다. 그 다음부터는 클럽을 전전하며 연주를 했다.
이봉조라는 이름 때문에 개런티가 꽤 높은 편이었다. 그러다보니 오랫동안 써주는 클
럽이 없었고 3개월에서 길어야 6개월이면 일이 끝났다. 대부분 새로 문을 열 때 선전
효과를 위해 이봉조 악단을 불렀다가 조금 장사가 되면 내보냈다. 그래서 우리끼리
「오픈 전문 밴드」라고 부르곤 했다. 우리의 음악을 듣는 이라고 해야 대부분 술에
취한 손님들이었다. 지금은 재즈클럽에서 연주할 때 손님들이 곡이 끝날 때마다 박수
를 쳐주는데 당시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풍경이었다. 무대 위에서의 외로움은 재즈
연주자에겐 숙명이었다. 또다른 문제는 가정생활이었다. 보통 11시 반에 일이 끝나면
집에 갈 시간이 없었다. 업소에서 잠을 자고 새벽에 통금이 풀리면 버스로 가곤 했다.
큰 딸의 백일 때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새벽 5시에 악단 동료들을 이끌고 집에 갔더니
온 식구가 밤새 기다리다 지쳐 잠이 들어있었다. 그때 아내의 소원은 월급 봉투를 한
번 받아보는 것이었다. 생활이 점점 힘겹게 느껴질 때쯤 이봉조씨가 제안을 해왔다. 당
시 그는 TBC TV 개국과 함께 전속 악단을 이끌고 있었다. 방송악단에서 함께 일해보
자고 했다. 방송국에 들어가기를 결심하기까지 하루에도 몇번씩 마음이 바뀌었다. 한달
에 한번씩 월급이 나온다는 건 뿌리치기 힘든 유혹이었다. 방송이라는 매체도 매혹적
이었다. 그러나 방송악단이 하는 일은 재즈와는 거리가 멀었다. 한마디로 가요반주가
주된 역할이었다. 즉흥연주니 재즈 화성이니 하는 것이 필요없었다.
-갈증 풀어준 ‘박성현과 야누스’-
방송국에 처음 들어가서 한동안은 모든 것이 신기했다. 특히 유명한 가수들을 직접 만
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황홀한 기분이었다. 당시 TBC의 간판 쇼프로는 그 유명한
「쇼·쇼·쇼」. 정훈희, 최희준,위키리, 한명숙, 현미, 패티김 등 장안의 유명한
가수들은 다 출연했다. 녹화가 시작되면 서소문의 스튜디오가 스타들로 가득 찼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싫증이 나기 시작했다. 매일 비슷한 곡을
연주하는 것도 싫었지만 NG는 또 왜 그렇게 많이 나는지. 1시간짜리 프로그램을 녹화
하려면 거의 하루종일 진을 빼야 했다. NG 이유는 여러 가지였다. 방송 초창기이니
기계나 시설이 제대로 되어있을 리 없었다. 녹음기계가 고장나서, 정전이 돼서, 조명이
틀려서. 가수들도 NG의 주범이었다. 다양한 변주를 하다가 정해진 악보에 따라, 그것
도 몇십번씩 연주를 하려니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매번 녹화 두시간 전 스
튜디오에 가서 내가 하고 싶은 연주를 마음껏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속이 풀리지 않았
다. 그래서 스트레스 해소용으로 밤에 연주할 장소를 찾기 시작했다. 무교동의 「스타
더스트」나 내자호텔 나이트클럽처럼 재즈만 전문으로 하는 곳에 즐겨 출연했다. 그러
나 그마저도 점점 어려워졌다. 나이트클럽 자체가 사라지고 있었다. 70년대 중반 등장
한 고고. 나이트클럽들이 속속 고고클럽으로 바뀌었고 이젠 빠르고 시끄러운 음악이
필요했다. 그때 재즈인이 걸었던 길은 두가지다. 이민 바람을 타고 너도 나도 미국으로
건너가거나 카바레나 요정의 악사가 되는 것. 어느새 돌아보니 주위에 남아있는 동료
가 별로 없었다. 바로 그때 드럼을 치던 유영수를 만나게 됐다. 방송국에 들어가기 전
「정성조와 메신저스」에서 함께 연주하던 이였다. 그가 『박성현씨가 운영하는 「야
누스」라는 재즈클럽이 문을 열었는데 함께 일해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당시
「야누스」는 신촌시장 골목의 허름한 건물 2층에 있었다. 10평이나 될까 말까. 그래도
재즈음반이나 자료가 꽤 많았고 고물이지만 피아노도 한대 있었다. 그곳에서 박성현씨
와 인사를 했다. 직접 만난 것은 처음이지만 나는 이미 그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미 8
군에서 활동할 때부터 재즈계에 소문이 자자한 여가수였다. 나이도 나와 비슷한 또래
였다. 우리는 곧 의기투합해 밴드를 만들었다. 색소폰의 김수열, 베이스의 이판근, 보컬
의 박성현, 피아노는 신관웅. 재즈 전용공간이 마련됐으니 하고 싶은 음악을 마음껏 해
보기로 했다. 몇번 연주회를 가진 후 곧 매달 첫째주
일요일이면 어김없이 열리는 야누스 정기연주회로 발전되었다. 초창기 야누스의 손님
은 연주회가 있건 없건 대부분 재즈인들이었다. 우리가 연주회를 열기 시작하자 옛날
함께 일했던 이들이 하나 둘 찾아오기 시작했다. 대부분 재즈를 포기하고 술집 악사로
전락해 있었지만 가슴 속의 열정만은 예전과 다름없었다. 술을 마시다 마음이 맞으면
즉흥으로 잼을 벌이기도 했다. 나 역시 정기연주회가 아니더라도 수시로 야누스에 드
나들던 단골이었다. 늘 식구들만 모이니 장사가 제대로 될 리 없었다. 연주회라고 해봐
야 손님이 10명 남짓. 월세를 내고 나면 남는 돈도 없었다. 그러니 연주자의 개런티는
성의표시 정도에서 그칠 수밖에 없었다. 악기나 음향설비도 열악했다. 그때 나는 조율
기계를 가지고 다녔다. 조율사를 부를 여유가 없었으니 급한 대로 내가 알아서 피아노
조율을 했다. 그래도 마음은 늘 행복했다. 곡이 끝날 때마다 받는 박수도 황홀했고 옛
친구들을 다시 만난 것도 꿈만 같았다. 게다가 점점 입소문이 퍼지면서 야누스를 찾는
손님들이 많아졌다. 2, 3년 지났을 때는 10평 공간에 100명이넘는 관객이 들어찰 정도
로 성황이었다. 야누스에서 재즈는 술맛을 돋우는 배경음악이 아닌, 귀기울여 감상하는
음악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었다.
웅...대게..길죠?하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