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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좋은글/좋은나눔터 원문보기 글쓴이: 22k바보
홀로 서기
- 둘이 만나 서는 게 아니라
홀로 선 둘이가 만나는 것이다
서정윤
1
기다림은
만남을 목적으로 하지 않아도
좋다.
가슴이 아프면
아픈 채로,
바람이 불면
고개를 높이 쳐들면서, 날리는
아득한 미소.
어디엔가 있을
나의 한 쪽을 위해
헤메이던 숱한 방황의 날들.
태어나면서 이미
누군가가 정해졌었다면,
이제는 그를
만나고 싶다.
2
홀로 선다는 건
가슴을 치며 우는 것보다
더 어렵지만
자신을 옭아맨 동아줄,
그 아득한 끝에서 대롱이며
그래도 멀리,
멀리 하늘을 우러르는
이 작은 가슴.
누군가를 열심히 갈구해도
아무도
나의 가슴을 채워줄 수 없고
결국은
홀로 살아간다는 걸
한겨울의 눈발처럼 만났을 때
나는
또다시 쓰러져 있었다.
3
지우고 싶다
이 표정 없는 얼굴을
버리고 싶다
아무도
나의 아픔을 돌아보지 않고
오히려 수렁 속으로
깊은 수렁 속에서
밀어 넣고 있는데
내 손엔 아무것도 없으니
미소를 지으며
체념할 수밖에……
위태위태하게 부여잡고 있던 것들이
산산이 부서져 버린 어느날, 나는
허전한 뒷모습을 보이며
돌아서고 있었다.
4
누군가가
나를 향해 다가오면
나는〈움찔〉뒤로 물러난다.
그러다가 그가
나에게서 멀어져 갈 땐
발을 동동 구르며 손짓을 한다.
만날 때 이미
헤어질 준비를 하는 우리는,
아주 냉담하게 돌아설 수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아파오는 가슴 한 구석의 나무는
심하게 흔들리고 있다.
떠나는 사람은 잡을 수 없고
떠날 사람을 잡는 것만큼
자신이 초라할 수 없다.
떠날 사람은 보내어야 한다
하늘이 무너지는 아픔일지라도.
5
나를 지켜야 한다
누군가가 나를 차지하려 해도
그 허전한 아픔을
또다시 느끼지 않기 위해
마음의 창을 꼭꼭 닫아야 한다.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얻은 이 절실한 결론을
〈이번에는〉
〈이번에는〉하며 어겨보아도
결국 인간에서는
더이상 바랄 수 없음을 깨달은 날
나는 비록 공허한 웃음이지만
웃음을 웃을 수 있었다.
아무도 대신 죽어주지 않는
나의 삶,
좀더 열심히 살아야겠다.
6
나의 전부를 벗고
알몸뚱이로 모두를 대하고 싶다.
그것조차
가면이라고 말할지라도
변명하지 않으며 살고 싶다.
말로써 행동을 만들지 않고
행동으로 말할 수 있을 때까지
나는 혼자가 되리라.
그 끝없는 고독과의 투쟁을
혼자의 힘으로 견디어야 한다.
부리에,
발톱에 피가 맺혀도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
숱한 불면의 밤을 세우며
〈홀로 서기〉를 익혀야 한다.
7
죽음이
인생의 종말이 아니기에
이 추한 모습을 보이면서도
살아 있다.
나의 얼굴에 대해
내가
책임질 수 있을 때까지
홀로임을 느껴야 한다.
그리고
어딘가에
홀로 서고 있을, 그 누군가를 위해
촛불을 들자.
허전한 가슴을 메울 수는 없지만
〈이것이다〉하며
살아가고 싶다.
누구보다도 열심히 사랑을 하자.
〈출전 : 『홀로 서기 1』, 청하〉
〈스케치 - 83〉
♣ 풍경 하나 : 시란 무엇인가
"詩는 궁극적으로 神집힌 자의 沒我的 言語"다. 원형갑의 시에 대한 정의다. 이 말 속에 '神집힌 자' 란 과연 어떤 뜻이 함의돼 있을까. 하이데거의 이야기처럼 하늘 또는 사물의 이야기를 시인이 듣고 알린다는 '告知'자의 의미일까. 아님 시인 실러의 시 「西風賦서풍부」의 한 시구처럼 "나의 입술을 통하여 豫言의 나팔을 불게 하라" 는 '예언'의 뜻인가. 정말 시에 홀리면 시퍼런 작둑날 위에 올라 선 무당처럼 '詩巫接神'의 세계가 가능할까.
아마 시에 대한 고담준론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즉 무엇엔가 미친 듯이 몰두하지 않고는 결코 어떤 일도 이룰 수 없다는 大意를 내포한다. 또 한편 혹자는, 시를 "民以食爲天민이식위천'에 비유한다. 사람은 결국 먹고 사는 인간 현실의 문제일 뿐, 接神의 세계를 경계한다.
♣ 풍경 둘 : 그럼, 시인이란 무엇인가
"시인이란 제 1언어(言語)의 사랑놀이를 평생토록 지속하는 사람이다. 그때 그때의 낱말선택에서 딴 것으로 대체(代替)될 수 없는 유일자(唯一者)를 찾아내야 하는 사람" 임을 유종호는 갈파했다.
미당 서정주는 한 발짝 더 나아가 "시인이나 작가가 되려는 사람들이 무엇보다 먼저 마음을 써야 할 것이 있으니, 그것은 즉 정신의 완전한 자유(自由)다. 어떤 개인이나 단체의 강제(强制)에도 얽매이는 일이 없이, 또 사상사(思想史)속의 어떤 유파(流派)나 개인에게도 편승(便乘)하는 일이 없이, 먼저 하늘만큼 훤출한 자기자유의 능동적인 관찰력과 자기류의 독자적인 느낌을 가지고 사상의 선택과 그 수립을 전담하라"고 가르친다.
위의 말 뜻을 뒤집어보면, 시인이란 천명(天命)을 받은 자로서, 제각자 시 언어를 통해 우주로부터 부여받은 인간 자유의지를 마음껏 발현하라는 것으로 해석된다.
♣ 풍경 셋 : 문학상 수상 시 심사 기준의 詩眼
첫째, 대상에 대한 예사롭지 않은 발견과 성찰이 이어야 한다.
둘째, 응결 혹은 형상화의 미학이 있어야 한다.
셋째, 가독성과 흡인력이 높은 작품이어야 한다.
넷째, 독자의 나태한 일상을 흔들고 긴장하게 만드는 힘이 있어야 한다.
윗 글은 2007년 『미당 문학상 수상 작품집』속에서 발췌한 미당 문학상 시 후보작 심사 기준이다. 좀 더 쉽게 풀어보면, 시 의식의 세밀함과 구성의 치밀한 짜임. 기성 시단의 퇴색한 시 언어에 대한 비판적 수용. 난해성이 주는 현학을 딛고, 현실 체험을 바탕한 언어로 패기와 신선함에 도전해야 한다는 말을 포함한다. 그리고 말의 질서가 함부로 무시되선 안되며, '가독성과 흡인력'은 이웃·사회·공동체의 정서와 연결성이 존재돼야만 획득된다는 뜻이다.
♣ 풍경 넷 : 『홀로 서기』의 대중성
이쯤에서 우리는 현대시 100년 사상 가장 짧은 시간, 가장 많은 시독자를 확보한 시인 서정윤의 詩觀을 엿봄으로써, 다수 대중이 어떤 시를 공감하는지 탐색할 수 있다.
"시에 새로운 생명을 주자"라고 시인은 말한다. "사물에 사전적 의미가 아닌 사물 본래의 모습을 찾아 주자라는 선언들조차 과연 시에 대한, 사물에 대한 옳은 행위인가 하는 의문은 항상 살아 있다."
첫시집 『홀로 서기』자서에 실린 윗 글을, 두 문장으로 분리해 추론해보면, 시인 서정윤의 그 때까지 갖고 있는 시에 대한 의문점은 뭘까를 역설로 증명할 수 있다. 우선 그는, 기존 시들에 대한 시작 태도에 상당한 거부감을 '의문'이라는 한 단어 속에 숨겨두었음을 간파한다. '사물에 사전적 의미'이외에 '사물 본래의 모습을 찾아 주자라는 선언들 조차 과연 시에 대한, 사물에 대한 옳은 행위인가'하는 의문점으로 가득차 있다. 다시 말하면, 서정윤은 자신의 시작 활동은 사물에 사전적 의미이외에 그 어떤 특별한 심층적 '의미'부여를 경계시 한다는 점이다.
그 다음 연에서 곧바로 그는 "감동의 시 / 누군든지 시를 읽었을 때, 어떤 의미로든 감동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 시는 무슨 소용이 있는가. 이제는 시가 시로 존재할 필요성을 찾자. / 시인은 예언자가 되어야 한다."고 강렬히 주창한다.
서른 즈음, 1987년 2월 시점의 시인 서정윤의 시작 태도는 "시의 새로운 생명을 주자", 시는 "감동적이어야 한다." ,"시가 시로 존재할 필요성을 갖자.", "시인은 예언자가 되어야 한다." 4가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즉, 20C 실존주의자 하이데거의 표현처럼, "언어는 존재의 집"인 것이다. 존재하는 것만 참인 실존주의자들의 관점은 시인 서정윤의 시 언어를 선택하는 기준이 되고 있음을 알았다. 시 언어 선택에선 지독히 실존주의 관점인 그의 시작 태도에서 한 가지 주목할 사실은 "시인은 예언자"가 되어야 한다는 다소 형이상학적(接神的) 가능성을 언급했다. 아마 이것은 젊은 그가 믿고 따르는 카톨릭 종교관의 영향이 아닌가 쉽다.
그 당시 청소년과 젊은 대학생, 다수 대중들에게 가히, 혁명적 시관을 퍼뜨린 시, 「홀로 서기」는 인간 '실존'과 '예언'을 둘 다 공통 분모로 흡입한 채, 그의 시 세계를 바탕한다는 사실을 그의 자서에서 확인한다.
♣ 풍경 다섯 : 시 「홀로 서기」탄생
1981년 시 「홀로 서기」가 『嶺大文化』에 발표될 당시 시인은, 대학 재학생인 24살 때다. 정치적으로 1980년은 신군부에 의해 광주민주화운동이 유혈로 진압된 그야말로 한국 사회가 격동기 속에 휘말릴 때다. 박정희의 피살로 신군부에 의해 정권이 교체된 억압과 폭거의 항거 속, 계엄령하의 대학가는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된다.
부당한 폭력으로 정권을 잡은 신군부는 정권을 잡자, 학생들의 자유를 미끼로 대대적 교육 자율화를 선언한다. 디스코 열풍, 핀컬 파마, 디스코 청바지로 대표되는 젊은 유행을 타고, 대학가는 정권이 조장한 온갖 '축제'문화로 현혹된다.
'원형 공동체'의 삶에서 '개인 주의' 사회로 급속하게 이동하는 시점도 이즈음이다. 새로운 새대의 표현 욕구와 자유의 열망이 강렬한 반면, 정권에 의해 철저한 정보 차단과 대중 억압이 동시에 자행된 정체성 혼란의 시기였다.
그런 시대의 소용돌이 속에서 시 「홀로 서기」는 탄생한다.
♣ 풍경 여섯 : 시집 『홀로 서기』출간
1987년 3월 25일 청하 출판사에서 시집 『홀로 서기』가 첫 출간된다. 출간 당시 이 시집은 폭발했다. 한국 현대시 100년 동안 이 시집만큼 대중적 사랑을 받은 시집은 전무후무하다.
시 「홀로 서기」는 그야말로 은밀히 대학가에서 엄청난 가연성을 잠재한 채, 진화하고 있었다. 발표 당시부터 "이 시는 그 내용의 보편성에 힘입어 대구지방을 중심으로 카피와 필사본으로 광범위하게 유포되기 시작했다. 여학생들의 편지에 인용되고, 방송가의 전파를 타면서 이 시는 엄청난 독자층을 확보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비공식문화 유통경로를 통해 「홀로 서기」가 전파되는 과정에서 작자 이름조차 바뀌거나 지워진 상태에서 그것의 유통범위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 그 당시 청하 출판사 편집인이었던 시인 장석주의 말이다. "물론 「홀로 서기」는 체제비판적인 민중시와 같은 시대적 프리미엄이 전혀 없는 서정시라는 점에서 이 시집에 대한 독자들의 열화 같은 반응은 「홀로 서기」가 스스로 이룩하고 있는 탁월한 서정성, 혹은 이루지 못한 사랑의 안스러움, 절대고독의 가치, 젊음의 발황 등과 같은 주제의 대중적 호소력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장석주의 다음 말을 다시 음미하자.
"『홀로 서기』를 출판하는 데 있어서 사실 우리가 한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홀로 서기』의 저자인 서정윤에 대한 아무런 사전지식을 갖고 있지 못했다. 《국시》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권태현 시인이 대구동향의 서정윤 씨의 시집을 출판할 수 있겠느냐고 그 가능성을 타진해 왔을 때, 권태현 씨로부터 우리가 전해 들은, 그가 1957년생의 대구 출신의 젊은 시인이라는 것, 영남대학교 국문과를 나와서 현재 교직에 몸담고 있다는 것, 1984년 『현대 문학』지의 시인 김춘수의 추천으로 정식 등단하게 되었다는 점, 정도가 우리가 파악할 수 있는 그에 대한 정보의 전부였다. 우리는 그가 『현대 문학』이라는 권위있는 정통문예지 추천 시인이라는 것, 그리고 아직 그 가능성이 충분히 드러나지 않은 젊은 시인이라는 것 때문에, 잠재된 가능성을 믿고 시집을"출간했다고 한다.
가장 오른 선택을 장석주는 한 셈이다. 『홀로 서기 1』시집이 약 180 만부,『홀로 서기 2』시집이 2008년 현재까지 약 100만부가 대중들의 눈 속에서 읽혔다는 것은, 한국 현대문학사의 가장 경이로운 사건이다.
♣ 풍경 일곱 : 시 「홀로 서기」속, 다양한 시 읽기
이미 우리는, 시 「홀로 서기」의 부제에서 시인 서정윤이 이 시 속의 1인칭 화자를 통해 무엇을 독자에게 이야기하고자 하는지 '눈치'를 챈다. "둘이 만나 서는 게 아니라 / 홀로 선 둘이가 만나는 것이다"
심리학 용어에 '아니마'와 '아니무스'라는 말이 있다. 아니마는 남성의 내면에 깃든 여성성을, 아니무스는 여성의 내면에 깃든 남성성을 말한다. 서양 신화의 원형을 이루는 그리스 로마신화 속에 보면, 태초의 카오스 속 만물이 들어 있어 그곳에서 땅의 여신 가이아가 태어난다. 땅의 신 가이가는 하늘의 신 우라노스를 낳고, 자신의 아들인 그와 결혼해, 이후 신들의 기상천외한 세계가 펼쳐진다.
그럼, 인간은 어떻게 신화 속에서 태어났는가. 제우스신의 명령에 의해 인류가 멸망한다는 사실을, 예언자 아버지 프로메테우스에게서 들은 아들 데우칼리온과 그의 아내 피라가 겨우 살아남아, 땅의 돌을 주워 뒤로 던지므로써, 인간 남 녀가 탄생한다.
성서 속에는 아담의 갈비뼈로 이브가 탄생한다. 우리나라 전래 동화 속 '반쪽이'와 '꽃분이'의 사랑 이야기 역시 근저에는 남성성과 여성성을 동일시 하는 사유의 뿌리가 있다.
시「홀로 서기」1연을 꼼꼼이 들여다 보자. "어디엔가 있을 / 나의 한 쪽을 위해 / 헤매이던 숱한 방황의 날들. / 태어나면서 이미 / 누군가가 정해졌었다면, / 이제는 그를 만나고 싶다." 시인의 시 인식 심층 아래엔 태초에 이미 '남성'과 '여성'이 한 몸을 이루다 태어나면서 각각 남성과 여성으로 쪼개 갈라졌다는 것이다. 처음 1연만 보아도 이 시인의 사상적 촉수가 얼마나 신화에 기대있는지 알 수 있다.
이 세상에서 남녀간의 '사랑'보다 더 강렬한 본능이 있을까. 그것은 마치 식욕과 수면욕과 동일시되는 성욕의 다른 이름인 것이다. 시의 첫출발을 시인이 바로 남녀간의 정신적 육체적 사랑으로 접근한 것이 젊은 독자층들의 호기심을 더한층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2연은 24살 전후의 시인답지 않게, 더욱더 묘하게 시적 장치를 해두었다. "누군가를 열심히 갈구해도 / 아무도 / 나의 가슴을 채워줄 수 없고 / 결국은 / 홀로 살아간다는 걸 / 한 겨울의 눈발처럼 만났을 때 / 나는 또다시 쓰러져 있었다."
역시 直喩는 젊은 시인의 몫이다. '사랑'의 공간 뒤에 '이별'의 슬픈 시간을 바로 둠으로써, 결국 인간은 '고독'한 존재임을 깨놓고 암시한다. 더운 피가 시시각각 들끓는 젊은 이들의 사랑과 이별, 후회와 눈물, 절망과 불안을 한 컵 속에 넣어 마구 뒤섞어 놓은 감정이 볼 만하다. 3연의 '지우고' 싶은 ''표정', '깊은 수렁'과 '체념', '뒷모습' 이런 시어 역시 한순간 젊은 날의 우울과 몽상이 체념적 비극 속에 아주 잘 녹아 적절히 배치한다.
시 「홀로 서기」의 절정은 4연이다. "누군가가 / 나를 향해 다가오면 / 나는 〈움찔〉 뒤로 물러난다. / 그러다가 그가 / 나에게서 멀어져 갈 땐 / 발을 동동 구르며 손짓을 한다." 이 시의 대중적 폭발서을 난 이 연에서 찾는다. 대중이 열광한다면, 그 민족 문화 뿌리 속에 내재된 묘한 피의 생리와 상통한 그 무엇이 작품에 스며있다는 방증이다. 그것이 민족혼의 가락이던 독특한 정서든 24살의 젊은 시인에게 수 백만 국민이 흡입된다는 것은, 분명 놀라운 경이다.
이 시행은 김소월의 「진달래 꽃」이 아주 교묘히 현대적 어조로 변주에 성공한 정서가 들었다. 또 저 멀리 고구려의「황조가」, 고려 가요「가시리」, 정지상의 한시「送人」, 황진이의 시조에, 그 안타까움의 심중이 이어닿고 있다. 물론 앞 시들의 화자 대부분이 여성 화자인 반면, 시 「홀로 서기」의 '남성'화자만 다를 뿐, 인간 사랑과 이별의 시공간은 영원히 일치할 것이다.
"떠나는 사람은 잡을 수 없고 / 떠날 사람을 잡는 것만큼 / 자신이 초라할 수 없다. / 떠날 사람은 보내어야 한다 / 하늘이 무너지는 아픔일 지라도."
사실 설익은 풋풋한 과일이 어떤 면에선 더 신선해 보인다. 릴케가 그랬던가. "젊은 날에 쓴 시는 설 영근다." 우리는 위의 시행에서, 과연 24살의 젊은 시인이 '하늘이 무너지는' 天崩천붕과 같은 '이별'의 아픔을 체험했을까 의문한다. 그러나 또 한 편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 당시 젊은 시인에겐 가장 절박한 고뇌가 바로 '이별'임을 5연에서 어렴풋 짐작한다.
"〈이번에는〉/〈이번에는〉하며 어겨보아도 / 결국 인간에서는 / 더이상 바랄 수 없음을 깨달은 날 / 나는 비록 공허한 웃음이지만 / 웃음을 웃을 수 있었다. // 아무도 대신 죽어 주지 않는 / 나의 삶, / 좀더 열심히 살아야겠다."
불경 중 하나인 법화경의 한 구절에 '會者定離회자정리'란 말이 있다.'이별을 괴로워 하지만 만난 사람은 반드시 헤어진다.'는 의미다. 이 시행의 놀라운 점은 '아무도 대신 죽어 주지 않는 /나의 삶,/ 좀더 열심히 살아야겠다.' 는 강렬한 실존적 자각이다. 이것은 마치 깨달은 자의 포효로 들린다. 물론 이 시행의 심층구조 속엔 '去者必反거자필반'인 '떠난 사람은 반드시 돌아온다.'는 앞 행에 대한 긍정적 시관이 아주 절묘하게 연결된다.
우리는 시 「홀로 서기」6연과 7연을 살펴보기 전, '촛불'에 대한 몇 개의 담론과 결부지어 집어보고자 한다.
"물론 이마쥬 중에서 불꽃의 이마쥬는 시의 표징(signe)을 지니고 있다". 고 가스똥 바슐라르는 말한다. "불꽃은 우리들로 하여금 처음으로 보도록 촉구한다. 우리들은 그것에 대해 무수한 추억을 가지며 그것에 대해 하나의 극히 낡은 기억을 가진 자로써 꿈꾸는 것"으로 보았다. 혹자는 인간이 근본적으로 불을 그리워하는 것은 '동굴시대'의 흔적으로 파악한다. 신학자들은 촛불을 통해 상승과 하늘의 이미지를 찾는다. 꺼지는 촛불은 죽음의 또다른 이미지로 변용된다. 촛불은 또 俗과 聖을 이어주는 존재다.
시 「홀로 서기」7연 속에서 시인은 "어딘가에서/홀로 서고 있을,그 누군가를 위해/촛불을 들자." 고 말한다. "숱한 불면의 밤을 세우며/ 〈홀로 서기〉"를 익히고 있는 6연의 인간 고독감을 뒷받침한다. "촛불의 불꽃은 수직성이다.""인간을 해방"시키는 가장 중요한 몽상을 바슐라르는 수직성에 두었다. '촛불을 들자" 이 시귀는 인간을 일어서게 할 수직적 상승을 의미한다. 불꽃은 어둠과 빛이 싸우는 경계점에 있다. 다시 말하면, 시 「홀로 서기」 속의 '촛불'의 이미지는, 이별의 상처를 가진 젊은이의 사랑앓이에 대한 관심과 연민이 이 시전체의 맥락을 관통한다.
얼마전 현대 한국 사회의 뜨겁게 달궜던, 촛불 집회 또한 촛불 상승의 성스러움과 촛불 꺼짐의 죽음 이미지의 새로운 문화 변화로 나는 직감한다.
우리는 지금까지 시 「홀로 서기」의 대중적 사랑이 어디서 근거하는지 몇 가지 구체적 사례를 통해 살펴보았다. 장석주의 서평은 상당한 의미를 떠올린다. 우선 시 「홀로 서기」는 "시인이 쉽고, 다정하고, 낮은 목소리로 풀어내고 있는 삶과 사랑"이 있다는 점과 "사실 독자들보다 더 무서운 비평가가 어디 있겠는가"를 환기시킨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렇게 수백만 독자를 매료시킨 시가 한국 문단에서 발행한 『한국의 애송시』류의 시선집에 대부분 빠졌다는 사실은 참 '으아'하다.
시 「홀로 서기」는 기존 서정시와 다른 차원의 시 언어를 들고 젊은 이들과 소통한 최초의 시 혁명에 가깝다. 어떤 혹자들은 시가 너무 사춘기 청춘들을 겨낭한 것으로 말하지만, 功過를 떠나 적어도 80년 대 이후 한국 서정시의 한 축인, 서정윤 류가 생긴 것만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물론 명시의 기준이 다수 독자 확보만으론 증명이 부족하다. 그러나 기존 시층의 대지각 변동은 시 작품의 감동과 함께 예술성도 함께 담보함을 「홀로 서기」는 증거 한다.
시「홀로 서기」의 시 낭송 무대는 일정한 예술적 미학을 갖춘 공연 무대면 제 격이다. 여성 2인 시 낭송가와 남성 1인 시 낭송가와 3인 무대가 된다. 무대 가운데를 중심으로 온갖 색깔 모양의 촛불을 켠다. 조명은 될 수록 기본 포인트만 비추고, 고저 장단의 각지각색 다양한 조각된 촛불 이미지가 클로즈업된다. 무대 둘레엔 아주 극미세의 바람으로 촛불을 흔들게 하는 연출도 좋다. 물론 일정 부분 안개처리도 환상적이다.
그때 먼저, 현재 각광받고 있는 시 노래 작곡가 여승용에 의해 작곡된 시 노래「홀로 서기」전주가, 가수 루노의 감미로운 목소리를 타고 무대 중앙으로 울려퍼진다. 노래가 잠시 쉴 무렵, 여성 1인 시 낭송가가 1,2,3연을 낭송하고, 다시 시 노래가 이어진다. 물론 시 낭송 배경음악으론 저 아름다운 사랑의 피아노 선율 「Le premierpas」가 4분 36초 반복으로 선곡된다. 이어서 남성 1인 시 낭송가가 4,5연을 마치면, 루노의 노래가 또다시 이어지고, 마지막 장식은 여성 1인 시 낭송가가 마무리 하면, 시 노래가 그 뒤를 이어 총 연출 시간 15분 가량 안쪽으로 완성된다.
관객은 젊은 연인들이 쌍쌍으로 초대한다. 한국 현대 서정시의 전혀 다른 차원의 레일을 깐 시「홀로 서기」는 이렇게 시노래, 시낭송 무대에 전격 케스팅된다. 오늘날 활자 매체가 거의 사장된 디지털 시대에 그 어떤 혁명적 시가 21C 시독자를 폭발시킬지 열렬히 기대한다.
[출처] 스케치 83. 시인 서정윤님의 시 「홀로 서기」 (송앤포엠)|작성자 동원쌤
첫댓글 사부! 대구에 서정윤 시인보러 함 가요..음,,서정윤 주간으로 계시는 계간'문장' 여름호에 실을 시 2편 준비하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