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가 쓴 산문)
글쓰기의 즐거움
이동하
글재주란 타고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이외로 많다. 이런 사람들은 글 얘기를 꺼내기만 해도 질겁한다. 나더러 글을 쓰라고? 무슨 엉뚱한 주문이냐는 거다.
이런 고정관념은 물론 잘못된 것이다. 글재주란 선천적으로 타고 난다기보다 오히려 후천적 노력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천재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예외적 소수에 지나지 않다. 대부분의 시인 작가들은 각고의 노력을 통해 비로소 글쓰기에 익숙해진 것이다. 천재성을 들먹이는 사람들은 흔히 수련의 과정을 등한시하고 있는 셈이다.
달리 생각해보자면, 시나 소설 순수 창작인 경우에는 어는 정도 천부적 재능을 인정할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수필이나 일기, 감상문 여행기등, 생활문의 경우라면 더 말할 것이 없다. 이런 글을 쓰는데 요구되는 능력이란 후천적으로 습득되는 것이지 결코 천재성에 기댈 그런 것이 아니다. 어쩌다 서너 장짜리 산문 하나 쓸 일이 생겨도 금세 마음이 무거워지는 사람들은 잘못된 고정관념의 희생자들임이 분명하다.
또 그럴 정도는 아니라고 해도 일반적으로 글쓰기란 말하기에 비해 역시 부담스러운 일인 것만은 틀림없다는 것만은 사실이다. 왜 그런가? 대체로 글쓰기에 대해 느끼는 심리적 부담감은 다음과 같은 데에 근거를 두고 있다.
첫째, 문자 체계에 서툴기 때문이다. 말과 글은 의사 표현의 도구라는 점에서 동일하나 그 사용 방법에서는 서로 질서를 달리한다. 흔히 말의 사용에는 익숙해져 있지만 문자를 부리는 일에는 서툰 것이다. 글은 훨씬 논리적이고 구성적이어야 하며, 문법적 체계와도 맞아야 한다. 서툰 일은 당연히 부담스럽기 마련이다.
둘째, 타인에 대한 의식이 장애가 된다. 현장성 일회성을 가진 말에 비해 글은 기록성, 역사성을 갖는다. 따라서 누가 그 글을 읽게 될 수 알 수 없는 노릇이므로 타인의 시선이 의식되지 않을 수 없고, 따라서 이런 의식은 마음에 부담으로 작용하기 마련이다. 밤을 새워 썼다가도 다음 날 아침에 구겨버리는 일이 그래서 생긴다.
글쓰기란 자기 마음을 탐구하는 일이다. 이런 저런 사물에 대해 경험적으로 알게 된 어떤 진실, 곧 자기만의 생각이나 감정을 찾아내어 그것이 진실로 무엇인가를 음미하고 확인하는 행위인 것이다. 다시 말해, 글쓰기를 통해 이 세계를 주체적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인 것이다. 대다수 사람들은 자신의 일상적 체험들을 무심히 흘려 보내버리지만, 그러나 다른 한편의 사람들은 늘 생각하는 삶을 살고자 한다.
조금이라도 글쓰기를 해본 사람이라면, 가장 섬세하고 명료하게 사고하는 방법이 바로 글쓰기라는 사실을 진작 깨달았을 것이다. 인간의 사고란 원래 언어를 매개로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이를 좀 더 정확하게 지적하자면 특히 문장을 통해 구체화한다. 마치 조적공이 벽돌을 쌓아올리듯 문장을 하나하나 이어가면서 사고를 발전시키고 논리화하는 것이다. 단편적인 메모만으로는 불완전하다. 완전한 문장의 형태로 드러나지 않는 생각이나 감정은 머지않아 사라지는 안개 같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때문에 명제는 반드시 완전한 문장의 꼴을 요구하며, 진리는 언제나 명제의 형식으로 말해진다. 또한 우리가 문장 하나를 쓰기 위해 노심초사하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 즉 경험의 엄밀한 인식과 그것의 적확한 표현을 얻어내기 위해서인 것이다. 이렇듯 가열한 긴장 속에 글쓰기의 즐거움이 숨어 있다.
글쓰기는 자기 마음을 탐구하는 일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글쓰기의 가장 큰 의미는 자기 자신에게 있다. 즉 글쓰기를 통해 자신의 경험을 보다 심화시킴으로써 더 성숙된 세계 인식을 얻고자 하는 것이다. 전달은 그 다음의 문제다. 그렇다면 굳이 타인을 의식할 필요가 없다. 전문적인 글쓰기가 아니라면 더 그러하다. 그러므로 자신의 경험에 충실할 것이 요구된다. 적어도 두 가지 의미에서 그렇다.
첫째는 솔직하게 자신을 드러내는 일에 충실해야 한다. 잘 다듬어진 거짓말보다 비록 서툴지만 진솔한 말이 사람을 감동시키는 법이다. 둘째는 자기 경험을 신뢰한다는 의미에서의 충실이다. 즉 자신의 생각과 감정이 옳고 이야기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믿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설혹 세상 통념에 벗어나거나 어리석은 것이어서 비난받을 염려가 있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경험적 진실이 가르쳐준 것이라면 담대하게 말할 수 있는 자기 신념이 요구되는 것이다. 되풀이하는 말이지만, 글쓰기란 다름 아닌, 자아의 세계를 구체적으로 새롭게 발견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사소한 글이라 하더라도 자기 진실을 위해 수난당할 각오를 전제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한갓 낙서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일본의 노벨상 수상 작가 오에게자부로가 수상 소감으로 한 말 중에 참으로 감명 깊은 대목이 있다. 사람은 자기 안에 있는 어떤 것(예컨데 어떤 커다란 슬픔의 덩어리 같은 것)을 드러내기 위해 끊임없이 표현을 쌓아 올리는 과정을 통해 그 삶이 심화된다는 것, 또한 표현 행위 자체에는 치유하는 능력이 있노라고 그는 말했던 것이다.
글쓰기란 기능적 작업이 아닌, 자신의 삶 전체를 아우르는 행위다. 일상의 와중에서도 서너 줄의 문장을 쓰면서 문득 가슴이 더워지는 경험을 한 사람이라면 그는 이미 글쓰기의 진정한 즐거움을 맛본 셈이다. 그렇다. 글쓰기의 기쁨, 즐거움, 보람은 일견 하잘것없어 보이는 일상적 삶 가운데서도 진지하게 의미를 묻고 찾아 나서는 데서 얻어지는 것이다.
우리의 속된 삶과 의식에도 불구하고 문득 글을 가까이하게 하는 계절이다. 저 맑은 가을볕에 마을을 헹구고, 그리고 자신을 새롭게 돌아보는 글 한두 줄이나마 진솔하게 써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