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만 해도 기업은 뛰어난 기술력으로 시장을 지배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기술의 진화 속도가 빠르고 후발주자들도 선발기업의 기술을 복제할 수 있는 시대다. 단순한 성능 경쟁은 곧 가격 경쟁, 출혈 경쟁으로 변질된다. 이제, 시장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서는 ‘기술력+알파', 즉 소비자에게 새로운 UX(User Experience; 사용자 경험)를 제공하는 것이 필요하다.
UX를 어떻게 높일 것인가
세계 피겨계를 제패한 김연아 선수는 얼마 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고난이도 기술인 트리플루프를 포기하고도 예술적 연기를 안정적으로 펼쳐 꿈의 점수 200점을 넘었다. 이 사례를 기술의 총아라고 불리는 디지털기기에 대입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소비자는 기능뿐만 아니라 주관적인 감정, 느낌, 분위기, 지각, 감각, 감성 등 자신이 획득한 모든 경험의 합으로 제품에 대한 만족감을 느낀다.
그렇다면 소비자에게 풍부한 경험을 제공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물론 기본적으로 제품력은 있어야 한다. 기능이 조잡하거나 부족한 제품은 기본 바탕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최근의 사례를 통해 소비자에게 긍정적인 경험을 전달할 수 있는 ‘4플러스(+)', 즉 네 가지의 성공 포인트를 알아 보자.
포인트 1 : 오감을 만족시켜라
사용자 경험을 위한 첫 번째 비결은 인간의 모든 감각 기관을 자극하는 것이다. 심미안적인 디자인으로 인간의 눈을 즐겁게 할 뿐만 아니라 빛, 소리, 감촉, 향기 등 다양한 요소를 동원해 촉각, 청각, 후각까지 자극함으로써 새로운 경험을 제공하는 것이다.
삼성전자의 ‘햅틱폰'은 촉각을 승부수로 던져 성공한 사례로 볼 수 있다. 촉각을 의미하는 햅틱(haptic)은 사실 로봇공학에서 등장한 첨단 기술 용어였다. 그러나, ‘만져라, 반응하리라'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건 햅틱폰은 기계와 교감하는 새로운 경험(촉각)을 사용자에게 제공해 큰 반향을 일으켰다. 햅틱폰의 글로벌 버전인 ‘터치위즈(TouchWiz)'도 전 세계 풀터치스크린폰 시장에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팬택 계열 스카이가 내놓은 휴대폰 ‘후'도 눈길을 끈다. 마이크를 통해 들어오는 바람을 감지하는 ‘바람인식' 기능이 재미있는 경험을 제공한다. 사진이 바람에 날려 다음으로 넘어가고 대기화면에서 바람이 불면 꽃잎이 떨어지는 장면이 연출된다. LG전자와 MBC는 지상파 DMB를 활용한 3세대 방송, 즉 촉감 방송(청각 위주의 라디오가 1세대 방송, 시청각 위주의 TV가 2세대 방송이라면 촉감 방송은 3세대 방송)을 개발 중이다. 폭탄이 터지거나 축구경기에서 골망을 흔들면 휴대전화기가 진동하고, 나이트클럽 장면에선 조명이 깜박거린다.
포인트 2 : 이야기로 감성을 자극하라
요즘 사회 전반에 스토리텔링(storytelling), 이야기가 가지는 힘에 대한 재발견이 이뤄지고 있다. 재미있는 이야기, 감동이 있는 이야기는 제품에 매력을 더해준다. 삼성전자가 아르마니TV를 만들고 LG전자가 프라다폰을 만드는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큰 이유는 아르마니, 프라다라는 브랜드가 갖고 있는 힘, 즉 세계 최고의 패션 아이콘이 지닌 다양한 함의(예를 들어, 아르마니를 사랑하는 뉴요커들의 문화와 열정, 프라다가 이탈리아를 넘어 세계적인 디자이너가 되기까지의 과정 등)를 제품에 녹여 내기 위함이 아닐까.
‘보르도TV'는 삼성전자가 북미 TV 시장 1위를 달성하는 데 크게 공헌한 제품이다. 보르도 크리스털 잔 모양 TV의 탄생은 TV를 가전제품이 아닌 가구라고 생각했기에 가능했다. 여기에 최고급 와인 생산지 보르도의 이미지가 더해지고 때마침 불어온 전 세계적인 와인 열풍까지 가세하면서 보르도TV는 다양한 이야깃거리를 가진 제품으로 거듭났다. 장인이나 영웅 등 이야기를 지닌 제품은 그 가치가 배가된다.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제품은 인간의 감성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포인트3 : 의인화하라
‘텐 밀리언셀러'를 기록한 LG전자 초콜릿폰의 성공 요인은 무엇일까.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LED 버튼이 한몫했다. 눈웃음을 치는 듯한 초콜릿폰의 LED 버튼을 보고 있노라면 새까만 애완동물을 지닌 듯한 기분이 든다. 반도체 회로와 각종 부품이 얽히고설킨 기술집약적 제품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소비자는 왠지 모를 정을 느낀다. 친구나 애완동물 같은 느낌을 주는 디지털 기기는 많은 소비자의 관심을 받는다.
디즈니와 제휴를 맺어 출시된 아이리버(구 레인콤)의 미키마우스 모양 MP3플레이어는 미키마우스의 귀 부분에 해당되는 공 모양의 버튼을 돌려 볼륨과 음악 건너뛰기 설정이 가능하다. 현재 상태가 표시되는 십여 개의 LED 조명은 마치 미키마우스의 눈 모양처럼 보인다.
2007년 미국 조지아텍대학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사람들은 애완동물에 별명을 붙이고 아프면 걱정하듯 로봇 청소기에도 비슷한 감정행위를 나타낸다고 한다. 로봇 청소기 ‘룸바'에 별명을 붙이거나 예쁜 옷을 입히는가 하면 여행 갈 때 로봇 청소기를 데려가기도 한다. 심지어 로봇 청소기가 집에서 ‘편하게' 일할 수 있도록 집안 구조를 바꾸거나 애벌 청소까지 해 놓는 경우도 있었다. 생명력을 불어넣은 디자인, 그것은 소비자의 총체적인 경험치를 높이는 또 하나의 비법이다.
포인트4 : 향수를 불러 일으켜라
역사는 되돌릴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는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그립고 소중한 것이 된다. 특히 향수는 각박한 현대인을 위로하는 좋은 장치다. 아스라한 옛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것만으로도 위안을 받고 풍부한 감성을 즐길 수 있게 된다.
삼성전자와 덴마크의 가전업체 뱅앤올룹슨(Bang & Olufsen)이 협력 개발한 휴대전화기 ‘세린'은 원형 키패드를 채택해 예전 다이얼 전화기를 연상케 한다. 투박한 소리도 재현했다. 엡손 디지털카메라 ‘R-D1'은 사진 찍을 때 ‘찰칵', ‘드르륵' 하는 소리를 들려준다. 셔터를 누른 뒤 셔터 복원을 위해 레버를 젖혀야 하는 점도 수동카메라를 닮았다.
기묘한 계곡을 넘어서
새로운 사용자 경험을 제공하기 위해 욕심을 부린다고 모든 소비자가 환호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사용자가 원하는 기능이어야 할 뿐만 아니라, 익히기 쉬워야 한다.
일본의 로봇 공학자 모리 박사는 ‘기묘한 계곡'에 대해 말했다. 즉 로봇을 인간화하면 할수록 호감도는 높아질 수 있겠지만, 자칫 어설프게 인간을 모방하면 호감도는 급추락하고 혐오감까지 불러온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로봇 얼굴의 30% 가량이 사람을 닮으면 ‘귀엽다', 90% 이상 닮으면 ‘훌륭하다'고 느끼지만, 그 중간이라면 오히려 ‘징그럽다'는 반응을 보이게 된다는 것이다. 호감도를 그래프로 그리면 마치 계곡처럼 중간이 ‘폭삭' 내려앉아서, ‘기묘한 계곡(uncanny vally)'이라 부른다.
감성을 불어넣겠다는 제품 개발자들의 불타는 의지가 자칫 기묘한 계곡에 빠지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 게다가 ‘뻔하고 식상한' 감성 자극은 소비자가 느끼는 재미를 반감시키고 제품 사용 의지를 시들게 한다..
사용자의 총체적 경험, UX. 질적으로 우수하고 양적으로도 풍성한 UX를 제공하기 위해선 기술력, 상상력, 트렌드를 보는 세 가지의 눈이 필요하다. 탄탄한 기본기를 갖추되 기술이 채워 주지 못하는 부문을 상상력으로 매울 수 있어야 한다. 식상하지 않고, 너무 앞서 나가지도 않는 제품을 만날 때 소비자는 열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