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그네 야그 5탄
('68 사학. 홍광택)
호미회 나그네가 들려 드리는 다섯 번째 얘기
인도의 하늘밑 2500여년전 전설처럼 아득한 옛날
세상저편의숲속 어딘가에 스승이 앞을보고앉으셨다 많은 제자들이
스승의 움직임을 주시 하면서 모여 있다 잠시 동안 정적이 흐릅니다
너무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드디어 스승이 입을 열어 말씀을 하십니다"
"삶의 돗대 위에 스승의 입김이 속삭이기 시작한다
"항상 이것을 잊지 말라 그대는 저 멀리 나아가야 한다 구름 너머 저 멀리>>>>
이분이 우리가 존경 해 마지않는 부처이십니다
부처는 이상마저 믿지 않습니다
모든 이상은 인간의 내면에 갈등과 긴장을 초래하기 때문입니다
억압도 없고이상도 없는 삶을 제시합니다
어떤 목적을 위한 삶이나 무엇을 성취해야 하는 삶이 아니라 행복해지는 삶을
가르칩니다
부처는 결코 저 세상을 가르키지 않습니다
열반은 이루어야 할 목표가 아니라 그대가 긁어 모은 모든 것을 버릴 때
더 인색하거나 집착하지 않을 때 돌연 비어 있는 공간이 나타납니다
그 공간은 항상 거기 있었습니다 우리가 느끼지 못했을 뿐이죠
마치 밤에 배를 타고 호수에 나아 갔을 때 선실의 등불을 끄자 비로소 밖의 달빛이
선 실속으로 들어오는 것처럼 달빛은 항상 거기 있었습니다
다만 호롱불 빛 때문에 그 달빛을 못 봤을 뿐입니다
부처님과 제자가 앉아 있는 자리에는 요즘 우리가 추구하는 돈 권력 색 땅 부동산
안락함 한자리 자동차 뭐 이런 것은 없는 자리이군요
더 많은 욕망은 다급히 달려 간다
동물이나 식물은 단순히 그냥 살다 죽는다 어떤 긴장도 없다
그것이 일어 나도록 놔둬라
진정한 필요를 들여다 보라 축제와 같다 왜냐면 진정 필요 한 것은 많지 않기 때문이다
거리를 두고 지켜보는 자가 되어라 좋다 나쁘다 평가 하지말고
안전하면 할수록 생기를 잃어 버릴 것이다
타협은 두려움과 탐욕 때문에 일어난다
욕망을 충족 시키지 말고 필요를 충족 시켜라
이 순간에 존재하라 이 순간만으로 충분하다
타인에 관심을 갖지 말라 그대 삶만으로도 충분하게 만들어 놨다
위대한 것도 하찮은 것도 없다
부처는 걸음을 멈춤으로서 목적지에 도달 했다
단순해지고 자연적인 것을 허용하라
나 자신에 대해 근심하지 않는 자는 구도자다
행동에서 무위로 옮겨가는 것 이것이 명상이다 정반대의 리듬은 생의 중요한 열쇠
인간의 얼굴이 추한 것은 여기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도인은 자기 자신을 잊는다 신발이 꼭 맞을 때 존재를 잊는다
쉽고 편한 것이 옳은 것이다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존재하라
언 재나 쉬운 삶을 살아라 에너지가 흘러 넘치면서
분노 탐욕 성욕은 실체가 아니다
그는 아무도 자신에게 관심 두지 않는 것을 좋아 한다
자기를 돋보이게 하지 마라 불편하고 긴장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도의 사람은 모든 특기를 떨쳐 버리고 자기 속에 머문다
다리 위에 집을 짓는 사람은 없다 왜냐하면 완전하지 못한 곳에 성공이란 없기 때문이다
행복이란 자기가 사라지는 순간에 나타난다
무상을 아는 사람은 편안하고 자비롭다
비교하지 말라 그대가 불편한 것은 판단과 비교 때문이다
사물은 있는 상태 그대로가 하나의 축복이다 이 축복과 하나가 되라
나는 정열에 대해 절대적으로 찬성한다 그 안에 자신을 용해시켜라
그 용해가 구원이 될 것이다
그는 아침 산책을 즐기듯이 살아 간다 그는 아무 곳으로도 가지 않는다
그에게는 미래도 없고 걱정도 없다
위에 적힌 말씀은 부처님 말씀도 있고 장자 노자 이런 성현의 말씀이 대부분입니다
우리는 진리에 목말라 합니다 고대 휘장에도 자유 정의 진리라고 쓰여 있지 않습니까
어떤 대학교 밧지에는"Veritas Lux Mia"" 이렇게 쓰여 있씁니다
"진리는 나의 빛" 이런 뜻이라는군요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이런 말도 있죠
이 험난하고 기 막힌 세상을 여행하다 보면 괴로운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죠
감기에 걸리면 의사의 처방을 받아 약을 사 먹죠 주사도 맞고요
하도 괴로울 때면 부처 5mg 노자 3mg 예수2mg 장자 6mg 이렇게 의사의
처방을 받지는 않지만 좋은 말씀을 섭취하여 겨우 가라 앉는 경우도 있죠
차도가 보이지 않으면 어찌할 줄을 몰라 아파트 14층에서 다이빙하는 사람도
종종 있지 않습니까
주색 잡기에 몰두하여 차도가 있기를 바라는 사람도 있죠
그런데 이 세 가지의 공통점이 자기를 잊어버리는 것인 줄 알고 계셨습니까
삼매"사마다:"라는 것 말이죠
술먹고 필름이 끊어지는 것 고우 스톱 삼매경에 빠지는 것 sex에 열중하여
감장 삼매경에 빠지는 것 이게 모두 자기를 잊는 몰아의 경지가 아닌가요
알고 보니 주색 잡기도 도는 아니지만 그렇게 먼 것은 아니군요
주소록 상단 부에 나와 있는 선배님들중 상당수는 사진에서 본적 있는 분도 있고
사진마저 없는 분도 많고 그 당시에는 호미회가 없었으므로 졸업하면 일단
바삐 사시다 보면 연락 두절이 되어 세월이 무심히 흘러가는 것이 대부분이군요
백남해.권태영 홍기선 이원일 신완우 문영렬 구화자 김정길 차금자 윤홍석 피용진
이상정 이런 분들은 유감스럽게도 한번도 뵐 기회가 없었습니다
재익형 말씀을 듣고 겨우 졸업하신 선배님들을 가늠하거나 사진을 보고 인식하거나
서실 족보를 말씀하시는걸 보면 유승재 선배님이라고 계시는데 제일제당에
오래 근무하시다 은퇴하시고 뉴질랜드로 이민을 가셨는데 얼마 전
다시 한국으로 다시 돌아오셨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만 이분이 서실을
굉장히 융성하게 하신 비조라고 들었습니다
김진익 노성희 이 두 분은 직계 선배라 가끔 뵐 기회가 있었고 유승재 선배와 함께
동방 연서원 이라고 우리나라에서 제일 알아주는 서도 학원인데 이 세 분이
유명 서예가이신 김충현 선생님의 제자로서 그 학원에서 많은 것을 배워 오셔서
고대 서화회 후배들에게 전수 했다는군요
김진익 선배 동생 분도 김진달이라고 고대 졸업하셨는데 육조 체를 아주 잘 쓰셨는데
나중에 강진환이도 육조 체의 달인이 되지 않았습니까
재익형 다음으로 서실을 굳건히 지킨 사람 중에 이석재라는 후배가 있었는데
영천의 추억의 사진에서 축구 시합하고 난 후에는 한번도 보지 못했는데
보고 싶군요 요즘은 연락이 전혀 안 된다는데 이 글 보면 연락 한번 하게나
굉장히 침착하고 성실하며 글씨도 아주 잘 썼습니다
대체로 보면 서실 사람과 화실 사람은 성격이 확연히 구분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화실 사람은 급하고 열정적이며 서실 사람은 침착하고 더디며 온화한 경우가
많았으며 서실 에 도착하면 의자에 앉아 법첩을 내놓고 먹을 갈아 글을 쓰면 쉽게
접근이 가능한데 화실은 접근이 그림의 성질상 그렇게 간단치가 않습니다
이점 우리 화실 회원들은 적극 공감할 것으로 믿습니다
화구를 챙겨 밖으로 사생하러 나가면 문제가 달라 오히려 쉽게 접근할 수 있으나
이것도 혼자 나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닌 것이 대단한 용기와 결단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그룹으로 가야 되는데 테니스 치려면 마땅한 파트너 찾기 어려운 것처럼
문제가있구요 화실 안에서 정물을 하자니 진부한 경우도 있고 과일이나 기타
도자기등 소품이 없어 어려운 경우도 있고 인물화를 하자니 모델이 마땅치 않고
화실 동지들 이런 경우 많았죠
그러다 보니 서실 에 가서 이바구를 까거나 준 서실 회원이 되어 글씨를 쓰고 있거나
그림은 이와 같이 시체 말로 열을 어느 정도 받아 탄력이 붙어야 되는 꽤 까다로운
점이 있다는 것이고 용권이 글에 보면 화실 회원이 처음 되어 왔을 때 굉장히
망설이게 되고 누가 금방 친구가 되어 주고 친절하게 안내도 해주면 그 회원은
오랫동안 서화회에 나오지만 첫만남이 썰렁하면 서화회 온 첫날이 마지막날이
되는 불행한 일이 생기는 건데 그 당시에는 그 심각성을 회원들이 잘 몰랐습니다
요즘 교회 가면 새 신자 영접 팀이라고 오는 순간부터 원스톱 서비스하는
마케팅 팀이 한번 오면 영원 회원으로 놓치지 않는다 이런 집요함이 있죠
가끔 서실 에서 글을 쓰고 있는데 재익형이나 터주대감도 없고 서실 에 글씨를
써 보겠다고 새회원이 처음 왔는데 당사자가 없으니 그냥 돌아가세요 하면
좋은 신자 한명 놓칠 것 같아""주승은 어디 가고 객이 홀로 듣는 구나""" 이런
심정이지마는 어쩌겠는가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지""
내가 서실의 숙달 된 조교로서 "식당개 3년에 라면 끓인다고
장봉이 어떻고 중복이 어떻고 일단 신문지에 줄긋기를 시키다가
마침 서실 요원들이 오면 인계하는 경우도 많았죠
서실회원들께는 대단히 죄송한 얘기고 선생님 앞에서 책넘기는 오류를 범할 수
있으나 서실 숙달된 조교로서 그당시 어깨넘어로 습득한 서체의 족보를 최소한
이 정도는 알고 글씨를 써야 한다는 근간만을 말씀 드리죠
대체로 서실 에 글씨 연습을 할 때 해서""예서:: 행서"" 초서 이런 순서로
배우기가 십상입니다 그러다 보니 서체의 생성 순서도 그와 같은 순서가 아니냐
이렇게 느끼시는 분이 많겠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서체 중 가장 큰 형님은 흔히 도장 글씨라고 하는 전서인데 주나라때 태사
주가갑골문과 금석문 등을 혼합하여전서를 만들었는데 그것을 "대전"이라고 하죠
한참 후에 진나라의"이사::나그네 야그 3편 출현한 인물" 가진 황제에 주청하여
발전적 간략화한 모델을 출시 하는데 이것을 소전 이라 합니다
대전은 "올드 버젼"이고 소전은 "뉴 버젼"인 셈이군요
전서는 가장 상형 문자에 가까운 글씨 아닙니까
그 다음 형님은 예서 입니다 전서의 자획을 간략화 하여 한나라 때 만들어지고
전국시대부터 진나라 때까지의 공식 서체인 전서에 예속된 서체라는 뜻이라는군요
노비인 "정막"이 만들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초서는 한나라때 만들어지고 전서를 신속히 쓰는 필기체로 때어 났다는군요
초서나 행서는 해서의 흘림체로 해서를 부셔서 만들 걸로 오해하고 있는 경우
많은데 전혀 그렇지 않고 해서가 막내 동생이라는 것을 꼭 기억 하시기 바랍니다
행서는 후한 초에 유덕 승이 창시 했으며 예서를 빨리 쓰기 위해 생겨 났습니다
해서는 후한 말기에 발생 했으며 일점 일획을 독립 시켜 쓰는 서체이고 "위진" 이후
예술적으로 완성되었다는군요
흔히 해서는 서 있는 글씨 예서는 앉아 있는 글씨 행서는 걷는 글씨
초서는 뛰는 글씨라고 하지 않는가요
화실 사람들이 가끔 서실 에 와서 글을 쓰면 곧잘 씁니다
아마 한자가 상형 문자이기 때문에 이것도 그림의 일종이라고 생각되는군요
언젠가 한번은 화실 사람들의 붓글씨 경연 대회를 하여 가표구하여 화실에서
전시회를 한 적도 있었군요
너무 아카데믹 한 얘기를 많이 했으니 당시 유행했던 개그를 하나 듣고
넘어 갈까요
아프리카 서부에 있는 어느 나라에 쿠테타가 발생 했습니다
군부가 실권을 잡고 아프리카 육사를 나온 강성 장관들이 내각에
줄줄이 입각을 했습니다
그중 가장 강성 인사가 내무부 장관에 부임 했습니다
취임 일성이" 전 경찰은 오늘부터 콧수염을 기른다""
민간인이 만약 콧수염을 기르다 발각되면 긴급조치 위반으로 입창조치 한다는
포고령이 내려졌습니다
한참후 사회가 어느 정도 안정 될 즈음에 시내 번화가를 재벌 가의 무남독녀가 오픈카에
여자 친구를 태우고 한참 폼을 잡고 가는데 어떤 건장한 남자가 차를
급히 세웠습니다 신호 위반이니 면허증을 제출하라는 것이죠
그 여자가 딱 올려다보니까 그 남자 콧수염이 없었습니다
그여자왈""경찰도 아닌 사람이 왜 면허증은 보자고 하느냐 고소하겠다
으름장을 놨죠 그 남자 왈"꼭 증을 봐야 면허증을 제시 하겠느냐
여기서는 뭐 하니 차를 골목 앞으로 빼고 골목으로 잠깐 들어와라"....
그 남자 골목에서 그 여자 둘을 앞에 세워 놓고 허리끈 밑의 지퍼를 내리더니
위엄 있는 목소리로 "나는 비밀 경찰이다.."하더라는 야그 아닝가요
서실에 들어서면 맞은편 벽에 7-8호 정도 크기의 판넬에 스냅 사진이 붙어 있고
그 밑에"김송자"그렇게 써진 판넬이 오랫동안 붙어 있었습니다
그 사진작가인 주인공은 66학번 선배였는데 그림이나 글씨를 쓰는 경우는
드물었으나 같은 학번"이남엔"선배와 항상 실 바늘처럼 붙어 다녀
서실 에 자주 오곤 했습니다 올 때는 푸짐한 보급 투쟁을 해와 후배들을 기쁘게 했죠
그 이남엔 씨는 약혼자가 미국에 있어 졸업하시고 미국으로 들어 가셨는데
최근 재익형 한데 들은 얘기로는 평소 재익형하고 친했던 관계로 그 아들 되는 분이
"스탠포드""대학을 졸업했는데 한국에 나와 재익형을 만나고 갔다는군요
세대를 이어가는 국제적인 서화회가 되는군요
그 김송자 씨는 졸업하고 대전에 사신다는 얘기만 들었지만 얼마나 변했는지
보고 싶군요
서화회 커플 2호는 사실 허영빈 이원형 선배인데 잘안알려져 있죠
그 두분이 워낙 조용하고 점잖은 분이기때문인것같습니다
그 두분의 특징은 공부를 너무 잘해 두분 다 특대생이었습니다
이원형 선배 오빠가 허영빈 선배 친구였기 때문에 가까워진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지금은 두분이 지방 대학에서 교수 하신다는 얘기 들었는데 안 본지가 하도
오래 되어 한번 볼 기회가 있을는지 알 수 없네요
영천이의 추억의 흑백 사진에 보면 북한산 탁본 사진 과"관악산 야유회 사진이
있는데 그 당시 관악산은 지금처럼 서울대학교도 없었고 들어가는 입구에
인적이 그렇게 많지 않아 정말 아름답고 개천 물에 송사리도 많아
아름다움 자체였는데 지금은 어찌나 인간이 많은지 시궁창에 시멘트 범벅에
인간의 손이 닿기만 하면 볘려버리니 어쩌면 좋을 까요
영천의 사진첩에는 없으나69 년도에 북한산을 가면서 북한산 성문 입구 와
개천에서 밥하면서 찍은 사진이 있는데 그때 서화회는 몹시 단촐 했습니다
"재익형 나 영문과 여학생 이명희 선배 이원형 선배 운헌형도 갔던가...
그때는 장발이 유행이어서 나도 베토벤 정도 머리를 길러 머리가 시야를 가리니까
5분에 한번씩은 머리를 뒤로 재껴야 했습니다
이원형 선배 이명희 선배 영문과 여학생이 찍은 사진이 오랫동안 화실 사진첩에
붙어 있었는데 지금은 다 어디로 갔는지 재익형은 그 사진 갖고 계실는지
이원형 선배는 전각에도 조예가 깊어"고암동연"이라고 여러 사람에게
전각을 해서 줬다는군요 고암동연이란 뜻은"바위를 쪼아 같이 연마한다"라는
깊은 뜻이 있었다는군요
용권이가 호미회 홈페이지 서두에 쓴 글을 보면 서화회는 그 당시 사회 분위기로 보아
요즘이라고 크게 낫지도 않지만"늘 우울하고 내일이 불투명했던 우리에게
유일한 안식처요 피난처"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일본말에 약을"구수리"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 말은 한국말"굿"에서 가져간 말이라는군요 옛날에는 아플 때 약을 먹기보다
굿을 했습니다 내가 재학 중엔"굿장"이란 말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그만은 젊은 외로운 분통이 터지는 어찌할 줄을 모르는
청년들 이이"서화회의 "굿을 통해 치료를 하고 상처를 싸매고 간 것을 생각할 때
우리 서화회는 아름다운 곳이기 이전에"청춘 종합 병원 야전 병원"은 아니었을까요
우리가 그때를 그리워 하는 것은 그당시의 나를 보듬어 보고 싶어
호미회 모임에도 나가보고 마치 우리가 그 당시에 유행했던 올드"팝"을 들으면
왜 그렇게 기분이 좋은 지요 그 당시로 다시 돌아간것같은 착각을 갖지는 않나요
미국의 작가"어빙 워싱턴"이라는 사람이 쓴"스케치 북"이라는 책에 보면
"립반 윙클"이라는 사람이 어느 날 동네에서 가까운 산에 올라가 산 속의 난장이들과
"나인핀' 놀이를 하고 산에서 내려와 보니 자기가 사는 동네에 아는 사람이
한사람도 없더라는 거죠 나중에 알고 보니 자기가 산에 갔다 오는 동안에
100애년이 흘러 자기 증손자뻘 되는 사람들만 살더라는 야그아닌가요
요즘 나도 가끔 그런 착각에 빠져 시간개념이 가끔 멈추면서 30애년이 흐른 것은
전혀 실감을 못하고 지금도 자고 일어나면 안암동 본관 4층에 가서 친구도 만나고
그림도 그리고 총각 집에도 들리고 그럴것같습니다
나만의 착시 현상인가요 우리 호미회 회원 님들도 가끔 그런 경우 있나요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은 사실 같은 것 아니면 별차 이가 없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여기 조선시대 시인이요 고급 공무원이었던 백호"임제"의 시한수 듣고
넘어 갈 가요
"청초 우거진 골에 자 는다 누엇는다
홍안은 어디 두고 백골만 무쳣느니
잔 잡아 권 할이 없으니 이를 슬허 하노라"
황진이는 원래 기생도 아니었는데 동네 총각이 황진이를 보고 짝사랑하다 죽어
충격 받고 세상을 희롱하다 살기로 작심하고 기생이 되었다는군요
얼마나 매력 있는 여자이었는지 조선의 그 당시 남자 치고 가슴이
헐레벌레 하지 않은 남자 없었고 당대 최고의 선지식 "지적 선사"도 하루밤에
재물을 만들어"십년공부 나무아미 타불이라는 말이 그때부터 나왔다는군요
서경덕"만 정복을 못해 그때부터 황진이, 박연폭포, 서경덕이 송도 삼절이
되었다는 야그 아닌가요
위에 시를 읊은 임제는 부임 중에 황진이의 아름다움이 너무 속절없음을
서글피 생각하고 고속도로에서 잠깐 내려 황진이를 추모하고 ""원 샸""
한번 했다고 중앙 정부로부터 파면 당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그만은 남자의 가슴을 기관차 화통같이 뜨겁게 만들었던 황진이도
어느 날 이렇게 백골이 되어 누어 있군요
가끔 전철을 타고 가다 보면 90살쯤 되어 보이는 할머니가 쭈글쭈글한 얼굴을 하고
아무 표정도 없이 앉아 계십니다
나는 속으로 생각하기를 저 할머니도 젊었을 때 많은 남자들의 가슴을 뛰게
하였을 탠데 인간이란 이렇게 한철만 살다가는 벌레와 같이 속절없는 것이군요
"제임스 죠이스"가 "젊은 예술가의 초상에서 얘기한 "즐기고 남은 찌꺼기"란
말인가
폐차장에 가보면 찌그러진 차 교통사고 난 차 녹슨 차 그런 폐허 같은 흔적들을
보면서 저 차 쓰레기들도 처음 출고 될 때는 얼마나 비까번쩍 했을까
이런 상념도 "안톤 슈낙"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에 추가해야 되겠군요
"2500년전의 비석이 로마 근교에서 발견 되었는데 거기에 이런 문구가
있었다는군요"요즘 신세대는 너무 싹아지가 없다고...."
2500년전에도 신세대는 여전히 싹아지가 없었군요
중요한 것은 2500년 후에 우리가 볼 때는 그 당시 신세대건 노인이건
"동시대"를 살아간""동시대"인으로 본다는 거죠"뭐가 그렇게 다르냐.."
화실에 오기 전까지의 나의 보잘것없는"그림 역정을 잠시 말씀드릴까 합니다
화실 회원들 나와 거의 같은 동년배는 거의 같은 정서 같은 추억이 있을 거라는
확신 아래 내가 유년 시절을 보낸곳은 극장 앞이었습니다
거기서 18년을 살았으니까 유년기 사춘기를 거기서 보냈군요
가장 예민한 시절을 그곳에서 보냈는데 맹자 어머니가 보면 금방 이사를 가야
되는 그런 동네였습니다
그 당시는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안되어 경제는 피폐 했지만 사람들은 순박하고
요즘 생각하면 아름다운 시절이었습니다
TV 세탁기 전축 컴퓨터 에어컨 있다고 그때보다 지금이 더 행복하다고는
도저히 못하겠군요
어른들은 살기 바빠 지금처럼 애들이 학교 갔다 오면 간식 주고 머리 쓰다듬어 주고
그런 광경은 보기 힘들었습니다
피임이라는 개념이 아예 없는 때이므로 생기는 대로 나오니 한집에 일곱 여덟은
보통이죠 간섭하고 어쩌고 겨를이 없습니다
저녁 점호 시간까지 무사히 기어 들어 오면 다행인 시절이군요
요즘 아이들은 자기가 행복 하다는 것을 모르니 그것이 큰 불행입니다
88올림픽 개회식때 본 굴렁쇠의 추억 여학생들은 잘 모르겠군요
그 당시는 장난감도 자기가 주워 오거나 스스로 만들거나"DIY"그런 것 혹시
아시나요 얼마전 한국에도 유행 했었죠"do it yourself"약자죠
가구 같은걸 완제품을 사는 게 아니고 재료만 사와 본인이 조립하죠
그 당시 어린이는 자기 장난감을 본인이 직접 자급자족 했습니다
조담이가 근무하는 전남대 뒤에서 산을 두개 넘어 가면 군부대 사격장이 있는데
거기 가면 화약도 주워 오고 박격 포탄을 줏어와 밑퉁을 세멘트 벽에다 갈아대고
베아링을 박아 놓으면 훌륭한 팽이가 되었고 Y자 나무를 잘라 다듬어 새총을 만들어
사직 공원 전남대 뒷산 고무줄 새총에 돌을 장전하여 새를 가늠쇠 안에 넣고
쳐다본 세상은 얼마나 아름답던지 지금도 잊을 수 없군요
그 극장 안에 아침에 영화가 시작 하기 전에는 문이 열려 있었는데
들어가 보면 창고 같은 곳에 극장 영화 간판을 그리는 화실이 있었습니다
내가 어깨 너머로 그림을 배우는 돈 안주는 학원이군요
그림 그리는 아저씨가 길다란 대 막가지 에 초크를 끼워 그림이 워낙 크다 보니까
멀리서 그 긴 대막가지의 "쵸크"가 목탄 역할을 하면서 "댔쌍"을 하는군요
페인트로 그린다는 것만 다르지 나는 거기서 그림의 알파요""오메가""를
다 마스타 했습니다
영화가 보고 싶으면 동네 아이들과 작당하여 영화 시작하기전 화장실에 숨어 있거나
아니면 밤에 개구멍으로 들어 가거나 아니면 매표소 앞에서 마음씨 좋은 아저씨
만나 사정하여 손잡고 진짜 아버지나 되는 것처럼 들어가거나- 그 당시엔 어른들
따라가면 어린이들은 돈을 받지 않음--상영 영화는 거의 서부 영화 이었는데
필름이 낡아 스크린에 서 거의 비가 오는 것처럼 화면 상태가 좋지 않았다
죄 없는 인디언들이 몰살 당하는데도 어린 마음에 백인이 착한 사람 인줄 알고
열광했던 기억이 엊그제 같습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 사생 대회 나가면 시장상 도지사상 쓸었죠
극장 안에서"씨네마 천국"이란 영화 있었죠--배운 실력을 유감 없이
발휘 하는 거죠
중학교 고등학교 때도 미술부에 들어가 그림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고
많은 상을 타고 다들 미술 대학에 가라고 했는데"숙명"이었는지
미술대학을 못 가고 고대 서화회에 들어와 오늘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그때 고등학교 미술 반에서 같이 그림 그리던 한 친구는 전남대 ""미술학과""교수로
있고 한 친구는 고등학교 미술 교사로 있군요
그때 차라리 미술 대학을 갈껄 후회하는 때도 가끔 있습니다
숙명이라고 하니까"빅톨 위고"의 노틀담의 꼽추가 생각 나는군요
십수년 전에"노틀담 사원에 가본적이 있지만 빅톨 위고가 발견 했다는 낙서
숙명이라는 낱자는 보지 못했습니다
위고는 그 사원의 벽에 써진 "숙명 "이라는 단어 하나를 보고
"노틀담의곱추"를 썼답니다
곱추"콰지모도"는 "에스메랄다"가 죽자 그 시체를 짊어지고 어디론가
사라집니다 시간이 많이 흐른 후에 그 사원 한 모퉁이에서 두구의 백골이
발견 되는데 그뼈들은 심하게 엉켜 있는데 사람들이 떼어 놓으려 하자
서로 떨어지지는 않고 부수러 버리더라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두구의 백골이"콰지모도""와 ::에스메랄다""의 것이라고 하더라는것이죠
정말 치명적인 사랑이군요 그리고 요즘 사람들을 심히 부끄럽게 합니다
신혼여행의 비디오 필름에 먼지가 앉기도 전에 가정 법원의 벤취를 덥게 하는 사람이
열에 넷이라니 무슨 말을 더 하겠습니까?
내가 좋아하는 ""고흐"" 빈센트 반 ""고흐 얘기를 좀 해드리죠
고흐 아버지는 목사였습니다 고흐도 젊은 시절 목사가 되어 탄광 촌에서 목회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고흐 작품에 여러분들이 좋아하는""열네송이 해바라기""닥터 가세의 초상"'
빈센트의 방"" 밤의 카페"" 까마귀 나는 밀밭 |'별이 빛나는 밤__라디오 프로 이름 같죠
아르르 고흐의 방"" 오베르의 교회"" 자화상 탕기 영감의 초상 해바라기 생폴 정신병원
이름만 들어도 그 그림이 생각나시죠
그런데 고흐가 살아 생전에는 그림 한 폭도 팔아 보지 못했다는 것 아시죠
사람이 이렇게 간사웁고 남을 이해 내지 알아 내는 데 무심합니다
옛날에도 천리마는 많지만 천리마를 보는 눈이 없다고 한탄하지 않았나요
어떤 평론가는 예술은 고등 사기라고 ""폭언 을 했습니다
나는 이해가 되는 것 같은데 회원님 들은 어떤가요
고흐의 작품중"닥터 가세의 초상"은 20 호 내외의 조그만 그림인데
놀라지 말라 8000억원에 팔렸습니다 그림그린 화가는 한푼도 만지지
못했는데 그 그림 하나에8000억 이라니 고흐가 죽기전 그의 열렬한
후원자 이었던 동생 "터오"가 형을 위로하기 위해 그림이 팔렸다고 거짓말을 했지만
한 점도 제대로 작가 살아 생전엔 대접을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인간의 수준이 이 정도 밖에 안됩니다
현자는 고향에서는 대접 받지 못한다는데 예수도 그랬죠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그런 영화 보셨죠
모차르트도 살아 생전에 별로 인정을 못 받았죠 인간들은 죽고 나면 이렇게
환장을 하는 거죠
"피카소"와 같이 살아 있을 때 인정 받는 사람은 진짜 행운아가 아닌가요
우리나라에도 그림 값이 가장 비싸다는"이중섭" "박수근" 같은 사람도
살아 있을 땐 대접을 못 받아 불우하기 짝이 없었죠
고흐의 작품이 일본의"우기요 에"의 영향을 받았다 그런 얘기 들어 보셨습니까
우끼요에"는일본의 "무로마찌"시대부터 "에도"시대 말기 까지의 서민 생활을 기조로한 회화의
한 양식으로 대부분 목판화이며 풍속화였다는것 아닙니까
"스즈끼 하루노부" "가스가와 순슈" " 도리요기요나가" "기타가와 무타마로" "우타가와 도
하루"등의 천재 화가들이 손을 댄 장르 였다는군요
""고흐""의 그림의 터치를 보면 꼭 목판화 같은 거친 터치가 이런 영향이 아닌가
싶구요 이것이 그 당시 프랑스 화단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는군요
고전파 사실주의 화가의 유화를 보면 클라식 음악을 듣는것같죠
고흐 같은 인상파 신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을 보면 "록" 이나"쨰즈" " 헤비 메탈"
그런 음악 듣는 것처럼 자유의지를 느끼죠
고흐의 그림에 나오는 의사 폴 가세 박사는 고흐의 정신병 치료의 주치의였는데
인상파 화가의 후원자였으며 고흐를 자기 집으로 초대하여 의사이자 친구이자 모델이 된
사람이라는 군요
가세 박사는 고흐를 만났을 때가61 세로 그 이전부터"도미에" " 쿠르베" " 마네"
"피사로" "기요맹:" "세잔" 과 깊은 교유를 갖었으며 그는 유사 요법 전문가였으며
가세가"폭스 글로브"라는 약초를 들고 있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단조롭게 채색된 캔버스의 파란 색 바탕에 갈색 창과 노란 끈
연한 색채 등으로 모자는 정확하게 묘사하고 역동적인 붓질로 생기를 불어넣고
다갈색의 머리카락과 군청색 옷등 두드러진 색을 통해
"가세"의 열정적인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내가 어렸을때 읽은 책중 "프란다스의 개"라고 아시나요
만화 영화로도 나왔었고 국민 학교때 단체 관람도 한적 있었는데
그 주인공 소년이 화가가 꿈이었는데 추운 겨울날 자기가 존경하는
"루우벤스"작품 밑에서 동사해서 죽는 장면이 나오죠 어렸을 때 나도
많이 울었습니다
나도 그 루벤스 작품도 좋아하지요
독일 출생 벨기에사람으로 화려하고 장대한 그림으로 역사화 종교화에 능했고
파리 룩상부르 궁전의 21면으로 이뤄진 연작 대벽화가 유명하고 바로크 회화의 집대성인
그의 작품은 감각적이고 관능적이며 밝게 타오르는 색채와 웅대한 구도와 어울려 생기가
넘치는게 특징입니다
"한복입은 남자"라는 그림 생각나시죠
조선 시대 무관 복인"철릭"을 입은"안토니오 코레아"임진 왜란때
포로가 되어 이탈리아에 팔려 간 사람으로 추정 된다는군요
그러나 이렇게 좋은 그림도 나이를 먹어 가면서 ""캔바스가 썩고 물감이 녹아 내려
작품을 복원 하는 기술이 발달 한다는군요
우리가 그림을 좋아하고 그리고 사랑하고 그림에 정진하고 하지만
아마츄어로서의 한계도 있고 그림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들의 작품도
세월이 지나면서 없어지고 컴퓨터에서 오래된 콘텐츠는 지워 지는 것처럼
이 시대의 그림중 몇 편이나 대표작으로 남을지는 역사도 마찬가지지만
20세기를 살았던 한국 인물중 박정희 김대중 정도 남아 있다가 그것도 얼마 있어
기억 하는 사람이 있을지 그림도 이와 같지 않을지 걱정됩니다
"인터넷의 99%가 쓰레기라고 혹평하는 사람도 있지만
유명한 수필가 "피천득"선생님 같은 분도 선생님 왜 요즘은 글을 안 쓰시냐는
물음에 좋은 글도 많은데 나까지 공해를 만들고 싶지 않아
꼭 발표 할 만 한 글을 아직 못찿고 있다는 겸손을 표시 했다는군요
학생 회관을 준공하여 기념으로 학생 회관에서 미전을 할 때였습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고대 구내에서-- 농대 쪽에서 바라보면 도서관이 보이고
수양버들 나무도 보이고 멀리 서관 시계탑이 보이는 구도의 이 절지 수채화를
"돌"이라는 제목으로 전시했는데 어떤 모르는 미모의 고대 여학생이
극구 그 그림을 막무가내로 달라는 사건이 발생 했습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당시에는 약간의 화구 재료를 살 수 있는 활동비를
제공하고 전시회의 그림은 학교에서 전량 갖는 것으로 계약이 되어 있었습니다
지금 같으면 남 안볼때 그 여학생 "핸드폰"번호나 물어 보고 후일을 기약하면서
어서 갖고 토끼라고 했을 텐데 그때만 해도 순진했던 모양입니다
지금 생각하면 몹시 안타까운 생각이 듭니다 내 작품을 맘이 들어 갖고 싶어 했는데...
화실 미전이 있을 때 우리 지도 선생님이신 "이규호"선생님은 아주 좋은 분이었습니다
일본에서 미술 공부를 본격적으로 하신 분이었고 문과대학에서 "서양 미술사"
강의도 하셨는데 전성기 학형 나 몇 명 서화회 회원들이 들었는데
서화회 회원들은 무조건A 학점이었습니다
또한 미전 준비가 계획대로 안 되면 지도 선생으로서 애가 타셨는지
직접 그려 주시기도 하고 하셨죠
관악산 가서 찍은 재액형 사진이7-80 호 되는 대작의 모델이 되기도 했죠
엊그제 두일에게서 전화가 와서 십수년만에 통화를 하는데 자기가 옛날에
만우절날 형을 골탕 먹이려고 흰 수채화 물감을 컵에다 타서 우유라고
나에게 줬다는 것 아닝가요 그 가짜 우유가 입에 들어 가자 마자
그 중금속 덩어리가 3-5M 떨어진 유리창까지 총알같이 돌진하여 투명한 유리가
졸지에 "스테인드 글라스가 되어 30분간 화실이 캄캄했다는 야그 아닙니까
그때야 나는 잊고 있다가 생각이 다시 났습니다 ""이런 후배 보셨나요"""
도봉산 시체보고 놀란 사건도 잊고 지내다가 용권이 글을 보고 다시
생각이 났으며 모든 것을 기억 하는 것도 꼭 좋은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서실 회원 중에 글씨도 잘 쓰는 이쁜 여학생 후배가 있었는데
재익형이 같은 회사 후배 사원에게 소개하여 아들 낳고 딸 낳고 잘 살았다는
얘기입니다 재익형은 좋은 일도 참 많이 하십니다
운헌 형 집은 종암동 석산 밑에 있었는데 운헌 형에게 이쁜 여동생이 있었는데
문기가 한참 그 여동생의 가정 교사로 있어 내가 그 종암동 집에 놀러 간
기억도 새롭습니다
본관4층에 서화회가 있다가 4학년 후반엔가 노란 집으로 이사를 갔는데
꼭 성북동이나 연희동 중앙 집중 난방이 되는 부자 동네에 살다
경기도 어디로 쫒겨 간 것같이 처음엔 영 정이 들지 않았습니다
보안 유지도 어렵고 지나가는 누구나가 들여다 보는것같고
영천의 추억의 사진에 회향나무 옆에서 찍은 박태규 생각도 납니다
인상 좋고 항상 웃고 그림도 잘 그렸는데 만난 지가 오래 되었군요
이 글 읽으면 연락 한번 해라
"피곤 하실테니 "앤디 윌리암스"의 노래 한번 들어 볼까요
"she fills my heart with very special things"
"she fills my soul with so much love"
회원 님들 휴가 건강히 잘 다녀 오시기 바라고 다음을 기약하고
대지 문수 사리 보살
대행 보현보살 대비 관세음 보살 영산당시 수불 부촉
지심귀명례
2003.7,7 홍광 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