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 사의재 / 영랑 다산
지난 시간에 다산초당을 둘러보았습니다.
전라남도 공무원교육원이 현재 광주광역시에 있어요.
교육원 건물을 해당 광역자치단체 안으로 옮기려 계획했고,
몇 개 기초 자치단체에서 유치하려고 했는데,
최종적으로 다산초당 소재지인 강진 도암면으로 결정되었다고 합니다.
공무원 교육원은 공직자의 기본 소양과 업무관련 교육을 하는 곳이니
다산이 강진으로 유배를 와 18년을 살았던 곳 그리고 목민심서라는 책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겠지요.
이제 전라남도 공무원교육원은 다산초당 인근에 있게 됩니다.
아. 물론 아직 공사 착공도 하지 않았습니다만...
강진이 자랑하는 다산, 강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가 자랑하는 다산이지요.
우리나라 최고 천재를 꼽으라고 할 때 몇 사람이 있어요.
그 중 다산이 첫째 아닐까 싶어요.
다산은 정치 경제 사회 역사 음악 의학 국방까지 다방면의 저서가 있습니다.
다방면의 저서는 다산 1인의 작업이라기 보다는
제자들과 함께 공부하고 연구하고 정리하는 분업 시스템이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정리를 하는 이들이 있고, 입으로 되뇌어 읽는 이들,
원고에 정서를 하는 이들, 교정을 보는 이들,
다산이 최종 점검을 하는 이런 과정을 5회 정도 반복했다고 합니다.
다산의 천재성은 다산 혼자만의 것이 아닌 강진 제자들과 함께였던 것이죠.
그 제자들과의 첫만남이 이뤄진 곳이 강진읍내에 있습니다.
다산초당을 나와서 강진읍내로 들어갈 경우라면
다산이 맨처음 머물렀던 그 곳을 방문해 보길 권해 드립니다.
사의재라는 곳인데요.
강진군에서 고증을 거쳐 2007년 복원을 했습니다.
최근에는 바로 옆에 한옥체험관을 조성해서 민박도 하게 되어 있더라구요.
맨처음 강진에 유배와서 다산의 첫 일성은
‘사람들이 나를 역병에 걸린 환자 보듯 피했다고 말하면서
부모도 임금도 거부하는 천주교도라는 죄로 유배온 나를 환영하는 사람은 없었다고 합니다.’
갈 데가 없었어요.
동문 밖의 주모가 방 한 칸 주고 받아 줬습니다.
1801년 11월에 유배왔고, 1802년 10월부터 아이들을 받아 가르쳤다고 합니다.
1년 간은 그냥 세월을 보낸 듯 하고, 그 허송세월을 깨우쳐주는 이가 이름없는 주모였습니다.
처음엔 동천여사라는 이름으로 불리다가 아이들을 받아 교육하면서
사의재라는 이름으로 방이름을 정합니다.
사의재.
넷 사에 마땅할 의, 재는 집이나 방을 나타내는 용어입니다.
지금은 회장실, 체육관처럼 관이나 실로 끝나는 건물이름이 있듯
옛사람들이 거처하는 곳의 이름을 정할 때 뒤에 붙이는 집을 나타내는 용어가 있거든요.
전당합각 재헌루정.
거처하는 집을 나타내는 용어 뒤에 한 글자를 넣어 부르는 이름입니다.
근정전 대웅전 연경당 환벽당 광풍각 ...
그 중 재는 선비들 서재에 잘 쓰이는 용어입니다.
齋 가 집으로서의 기본 뜻 외에 공경 엄숙이라는 뜻도 함께 갖고 있습니다.
네 가지를 마땅이 지켜야 하는 집.
그 네 가지가 생각, 말씨, 용모, 행동입니다.
“생각은 마땅히 맑게 하고, 용모는 마땅히 엄숙하게 하며,
말은 마땅히 과묵하게 하고, 동작은 반드시 더디게 해야 한다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바르게 살고 매사 조심하라는 말이지요.
저는 이 사의재라는 이름을 보면서요.
정약용의 글 중에는 논어를 비롯한 고전풀이도 많은데
중용에 있는 신독에 대한 풀이가 참 가슴에 와 닿아요.
신독이란 말은 스스로 몸가짐을 바로 해야한다는 말로 홀로 있을 때도 예를 지키라는 말이거든요.
그 신독을 풀이하는 부분에서
산길에 홀로 걷는데 어디선가 호랑이가 나타날 것 같은 느낌.
항상 두려움이 있다는 겁니다.
일상 생활이 곧 신독이었던 거죠.
다산은 제자 사랑이 각별했는데 해배되어 고향으로 되돌아간 후에 제자들이 정기적으로 모임을 갖고 찾아가기도 합니다.
사의재에서 처음 제자를 받아 가르칠 때 열 다섯 살의 황상이라는 이가 있었어요.
강진 아전의 자식이었던 그가 스승 다산을 만나 공부를 시작할 때인데 “저 같이 머리 나쁘고 앞뒤가 막혀 분별력 없는 사람이 공부를 할 수 있겠습니까? 라고 물어요.
이에 다산이 “항상 문제는 제가 총명하다고 생각하는 데서 생긴다. 너처럼 둔한 아이가 꾸준히 노력한다면 구멍을 뚫기는 힘들어도 일단 뚫고 나면 막히지 않을 터이니 열심히 노력한다면 될 것이다” 라고 말을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 글이 삼근계라는 이름으로 전해지고, 열다섯 소년은 그후 60년 동안 그 종이가 너덜너덜해지도록 읽고 또 읽어 가슴에 새기고 실천에 옮겼습니다.
다산은 제자들에게 종종 이렇게 가르침의 말씀을 친필로 써서 선물하곤 했는데, 그 사람에게 꼭 맞는 맞춤형 교육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아이들도 학기말이 되면 선생님이 한사람 한사람 잘하는 것을 기록해주는 기록문이 있던데 칭찬일색이예요.
요즘 교육이 자존감을 높인다는 측면에서 잘한 점을 찾아주는 것은 좋은데 좀 부족한 부분도 쓰여 있고 그 부족한 부분을 메꾸는 노력의 방법도 써주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강진 읍내에 들어섰다면 영암쪽에서 들어서는 곳과 장흥쪽에서 들어서는 곳에 동상이 두 개가 있습니다. 강진을 대표하는 두 사람이지요.
다산과 영랑입니다.
저는 강진 문학기행을 기획하면서 “영랑의 슬픔, 다산의 아픔”으로 제목을 달아 본 적이 있습니다.
슬픔 아픔 “픔”자 돌림이 되지요.
픔이 그래요. 아픔, 슬픔, 배고픔, 보고픔. 뭔가가 안타까움이 품자에 들어 있는 듯합니다.
그 픔을 슬픔을 노래한 시인.
강진에는 영랑 생가가 있습니다.
사의재에서 멀지 않는 거리입니다.
북쪽을 대표하는 이가 김소월이라면, 남도는 김영랑이지요.
그의 생가를 돌아보면 담장과 화단 사이사이 그의 시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다산이 강진으로 유배되는 아픔이 그의 다방면의 저술활동으로 이뤄졌기에 아픔이 승화되었다면,
영랑이 시어에서 말한 슬픔은 나라를 잃어버려 우리말도 제대로 쓸 수 없는 시대에 가장 우리말을 아름답게 살린 시어를 남겨놓음으로서 슬픔이 승화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강진에는
영랑이 있고 다산이 있기에 남도답사 일번지로서의 역할이 충분하다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