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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발 사태로 인하여 손자가 다시 1명으로 줄어든 다음 날(1월 6일) 아침.
이번에는 큰 손자로 바뀌었고 4개의 다른 코스처럼 나는 1대 1로 하므로
서울둘레길을 거푸 2번 걷게 되었다.
이미 걸은 4개의 코스를 큰 손자와도 단 둘이 걸었지만 그 구간은 2번째
걷기 전에 발표했기 때문에 언급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상대가 다를 뿐 대동소이하므로 생략하겠다.
그러나 이 코스의 발표는 오래지 않은 훗날 작은 손자와 걸은 것을 한 데
묶어서 해야겠다.
다만, 정승 황희의 일화가 내게는 재갈이 될 수도 있겠다.
왕십리를 지나가던 그는 소 2필로 밭을 갈고 있는 농부에게
"어느 소가 일을 잘 합니까"
황의의 물음을 들은 농부는 하던 일을 멈추고 황희에게 다가가서 누가
들을세라 소근거리듯 대답했다.
농부의 처사를 괴이쩍게 여긴 황희가 다시 연유를 물었다.
"짐승도 귀가 있는데 제 흉보는 말을 듣는다면 힘껏 일할 맛이 나겠소?"
두 손자는 각기 비교 우열이 분명하다.
우매한 황희가 될까, 현자 (賢者) 농부가 될까.
2번 코스로 분류된 용마.아차산 구간은 총 거리가 12.6km로 되어 있다.
역 코스니까 광진구를 거쳐 중랑구에서 끝나는 길이다.
순 방향으로 말하면 묵동천~망우산~용마봉과 아차산을 연결하는 코스다.
최고 높이가 해발 348m(용마봉)에 불과한 산들의 능선을 따라서 산책하므로 어렵지
않음은 물론 서울둘레길 전체 코스 중 가장 뛰어난 전망을 확보하고 있는 코스란다.
2번의 지하철(하자역 군자)과 1번의 버스(마을버스)를 이용해 16시간 반쯤 전에 탈출을 완료했던
중곡동의 간고랑길 종점에 다시 섰다.(위)
2017년 1월 6일 아침 9시 반쯤이였으며 30여분 후에 서울둘레길 본류(本流)에 올라섰다.
서울둘레길이 서울시와 경기도의 경계를 넘나들고 있으므로 구리시가 유명시인의 시판을 노상에
세운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아래)
다만, "하고많은 시인들 중에 하필 박목월이냐"는 의문은 제기할 수 있다.
'육영수 전기'의 집필과 관련해서 무성한 뒷말에 시달리다 조기에(63세) 세상과 작별했다는 뒷말
까지 회자되던 동심(童心)의 시인이기에.
태양광 에너지가 가정의 전력으로 전환되고 있지만 산에서 휴대폰의 배터리 충전에도 사용되고 있다(위)
고맙기는 하나 갈길 바쁜 산길에서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시간인데 충전 대기시간에 대한 설명이 없다.
나이 2년 차(差)의 위력인가.
두 손자 사이에는 참을성의 차가 적지 않다.
광진구와 중랑구, 구리시가 정립상태인 용마봉 정상의 구리시 쪽에 장년 구리 녀(女)가 막걸리와 컵라면을
팔기 위해 간이 좌판을 차려놓았다.
점심때 까지 2시간쯤은 능히 참을 수 있다는 큰 손자와 2시간이나 참으란 말이냐는 작은 손자.
도저히 참을 수 없다며 컵라면 1개를 먹었다.(아래)
생후 1년된 영아에게 우유1컵을 줄테니 1시간을 기다리라는 것은 20대 성인에게 종일(24시간) 기다리라는
것과 같다는 아주 오래 전의(60년이상) 설(說)이 생각났다.
용마산5보루에서 암사대교를 중간점으로 하는 일직선 끝 좌우로 예봉산과 검단산이 가늠되고(위 1,2)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으나 예봉산과 검단산은 한강이 가르고 있다.
서울 거의 모든 지역에서 잡히는 세계의 새로운 랜드마크 '롯데월드타워'를 오늘도(2017년 1월 6일과 4월 9일)
마치 고압 전선철탑 정도로 볼 수 밖에 없다.(아래)
전망대 초대권(Seoul Sky Observation Deck INVITATION TICKET)을 받아놓고 하늘 맑은 날 오기만 기다리고
있는데 유효기간(2018. 04. 30) 놓치고 마는 것 아닐지.
줌(zoom)에 실패했지만 삼각산(우에서 인수봉, 백운대, 국망봉)이 과연 명물이로다(위)
저 산 앞자락에서 붙박이 반백년이 가능했던 이유가 원거리일 수록 뚜렷이 보인다.
개발과 고도의 제한.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다"(영역:Man shall not live by bread alone)
성경의 본(本) 뜻이 어떠하던 빵만으로 살 수 없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소위 고위급 인사들 청문회의 단골 메뉴가 '위장 전입'이다.
구실이 다양한 부동산의 매매와 전출입의 최종 목적은 축재였는데 인정하기가 그리도 어려운가.
나는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작은 집 하나를 샀다.
그리고, 입주 일성이 "이 집에서 관(棺) 나간다"였다.
"말이 씨가 된다"던가.
설마, 반세기를 살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한 일인데 나도 고령화 배에 타진 것 같고 결국 그 일성의
실현 확률이 높아가고 있다.
"우리 아빠는 몇번이나 이사했어요?
내 이야기를 들은 손자들의 첫 반응이다.
그들은 늘, 모든 것을 자기 아빠를 기준으로 한다.
너희 아빠와 고모들은 단 한번도 이사한 적이 없다.
내 아들과 딸들은 결혼해서 분가할 때까지 나와 함께 살았으니까.
단, 큰 딸만 가나(아프리까)와 멕시코, 미국 등지로 직장 따라 거주지를 옮겼을 뿐.
15년 사이에 여러번 국내외로 이사한 손자들에게는 할아버지의 말이 믿기지 않을 수밖에.
570계단 깔딱고개를 내려섰다.(아래)
긴 된비알에는 으레 붙는 이름이 깔딱고개다.
'깔딱'의 사전적 의미는 "목구멍으로 물 따위를 힘겹게 조금씩 자꾸 삼키는 소리. 또는 그 모양",
"약한 숨이 자꾸 끊어질 듯 말 듯 하는 소리. 또는 그 모양"이다.
그러므로, 깔딱고개란 힘겹게 오를 때 숨이 끊어질 듯 할 만큼 벅찬 고개를 말하는데 이 이름을 가진
고개가 전국에 하도 많아서 사실감이 떨어지며 여기 570계단 역시 깔딱할 정도는 아니다.
그보다 역겨운 것은 무분별하게 붙어있는 '우측통행' 스티커(sticker)다.
좌측통행이 '일제의 잔재'라는 이유로 보행자의 우측통행을 한 대통령이 주도함으로서 모든 보행자
통로는 물론 전국의 좁은 등산로까지 온통 우측통행 스티커 세상이 되었다.
일제시대와 달리 모든 차량이 우측통행을 하며 차량의 운전석이 좌측에 있는 점을 고려하여 교행이
가능한 도로에서 우측통행을 권장하는 것은 수긍이 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차는 여전히 좌측통행을 하고 있다.
전국의 열차 철로를 일제 강점기에 건설했기 때문인데 우측통행으로의 변경이 지난하다는 이유로
열차는 물론 열차와 연결되는 지하철(1호선과 4호선 일부 등)까지도 변함 없이 좌측통행 중이다.
(국철과 무관한 모든 지하철 만이 우측통행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측통행이 금과옥조는 아니다.
더구나, 교행이 불가능한 좁은 산길 또는 좌측통행이 불가피한 길에도 우측통행 스티커를 부착하는
것이 합당한 일인가.
이 스티커의 제작과 부착 비용도 낭비해서는 안되는 국민의 세금이기 때문이다.
570계단을 1번 오를 따마다 35분의 수명이 연장된단다.
매일 오르면 년간 213시간, 8.8일이 연장된다?
10년을 하루같이 오르내려도 88일이며, 1년을 더 살려면 30년을 적공해야 한다.
괄목할만한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결론이다.
그러므로 초점을 수명에 맞추지 말고 건강한 일상을 담보로 하는 홍보로 전환해야 할 것 같다.
가늘게 길게 보다 짧아도 굵게,
굵고도 길면 금상첨화라 하겠지만.
다음 코스(제1코스)인 불암산과 수락산을 바라보며(위) 깔딱고개를 내려서면 구간 2 스탬프가 기다리고
있는데 570계단을 오르기 전에 휴식을 취하라는(?) 깔딱고개 쉼터다(아래 1)
조금 더 내려가면 '국민건강탑'이라는 대변인(?)을 앞세운 큼직한 돌탑이 서있다.(아래 2)
대변인 왈(曰)
주인공인 최고학 옹이 "욕심을 버리고 남을 미워하지 않으면 건강해지고 온 가족이 행복해질 것" 이라는
일념으로 쌓은 탑이란다.
만단수심(萬端愁心)을 내려놓는다는 이름(忘憂)의 산록에 쌓은 것도 그의 의도와 일치하는가.
그러나, 넓게 차지한 저변에 비해 약간 조잡하다는 느낌인데 대변인의 말도 그렇다.
83세의 고령에 쌓기 시작했다니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닌데 이왕이면 조리있고 정제된 어휘와 문장으로
발표하는 정성을 보일 수는 없는가.
오가는 많은 길손이 걸음을 멈추고 들어(읽어)주기 바란다면, 그 바람만큼 정성도 깃들어 있어야 하는데.
'돌탑'이라면 세계적인 불가사의인 마이산 탑사(馬耳山塔寺)를 빼놓을 수 있는가.(아래 3~5)
80여기의 정교하고 견고한 탑들을 이 곳 거주자 이갑용 처사가 혼자 쌓았다는데 온갖 설(說)이 난무하는
것은 하도 믿기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프로필(19c 중반/1860? ~ 20c 중반/1957?/이갑용?)마저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으니 축조에 관한 설이야
오죽 양산되었겠는가.(지금도 신종 설의 생산이 진행중이다)
모든 석조(石造, 石彫)의 선진국은 단연코 유럽의 오래 된 나라들이다.
더러는 기백 년에서 최장 2천년의 풍우에도 말짱한데 백년 안팎의 세월로 비교하거나 판단하기는 뭣하나
그 선진국민들 조차도 경탄하는 석탑들이다.
망우리 공동묘지의 변화된 모습은 상전벽해(桑田碧海)에 다름아니다.(위)
우리나라의 공동묘지들의 옛 모습은 가히 목불인견의 참상이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그래서 공동묘지 주변에는 취락이 형성될 수 없었다.
그러나 공동묘지의 개념이 점차 서구화 되어 가는가.
취락의 조건, 살기 좋은 마을의 조건이 공동묘지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서구.
그들에게 빈티 또는 부티 마을의 기준이 마을 공동묘지의 조성과 관리에 있는데 우리나라의 공동묘지도
부티나게 관리되며 점차 마을과 인접해 가고 있으니까.
빈곤과 싸우느라 조상 관리 여력이 없다가 형편이 펴이면 윗대들의 유택 관리에 파격적인 개개인도 놀랍
도록, 마치 유행처럼 늘고 있다.(복합적인 이유들에 대해서는 언급을 피하겠다)
(거대한 미아리 공동묘지의 포화상태가 망우리 공동묘지를 낳았는데 담력이 세지 않으면 밤길을 걸을 수
없었던 미아리공동묘지는 100% 주거지가 되었다.
한때는 귀신 출현, 괴상한 울음 등 괴문이 난무하였으나 자기가 살고 있는 곳이 묘지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우리나라의 유택(幽宅) 문제는 국가적 현안이 되어 있다.
거대한 공동묘지의 조성에 산들이 절단나고 있지만 수요를 따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무주택의 비애가 이승에서 저승으로 이어지는 안타까운 현실 또는 가족관계의 파탄에 따른 자기 사후의
부담 등을 비관하여 화장 후 뿌리거나(풍장) 수목장 등이 날로 늘어가도 공급 부족현상은 여전하다.
유택촌의 부익부 빈익빈, 양극화 현상은 더 심하며, 심지어 상하 귀천이 없다는 천국(종교계의 묘역)에서
받는 위계(hierarchy)의 중압감은 질식할 지경이다.
일시적이나마 고령화로 사망률이 낮아가는데 왜 이런 유택 품귀현상이 일어나고 있을까.
백두대간과 정맥 등 높은 산줄기에서 무명의 무덤들을 만날 때마다 문득문득 스쳐가는 환영이 있었다.
시청률 51%라는 경이적 드라마로 등장한 헤일리(Alex Haley)의 소설 뿌리(The Roots)의 몇 장면이다.
거두절미하고, '뿌리'는 주인공 킨타쿤테의 7대손인 작가가 어린시절에 외조모로부터 구전된, 소년노예
쿤타킨테에서 시작된 아프리카 흑인 노예200년사(史)라 할 수 있다.
잔혹한 노예 생활이 여전히, 대를 이어 계속되고 있다면 노예 헤일리에게 글쓸 기회가 있겠는가.
바로 이 점에 나는 주목했다.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하여 걸핏하면 죽어간 부모형제와 처자식을 묻을 곳이 어딘가.
둘러메고 내려갈 곳이 없으니까 높은 산 줄기에 묻을 수 밖에 없었던 화전민.
(화전민이 뭐냐고 묻는 손자.
축자적인 뜻은 불로 유휴산야를 태워서 그 재를 거름으로 하여 농사를 지어먹고 사는 사람을 말하며 그
시원은 멀리 유목민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그들의 실체는 뜻처럼 단순하지 않다.
정부가 정책으로 다루기는 일제강점기에 시작되었고 한국 군사정부에 의해 종결되었으나 그들의 역사는
오래 전으로 올라간다.
화전민이 될 수 밖에 없었던 당시 정황을 살명하기가 여간 짠한 일이 아니기 때문에 조심스러워야 했다.)
쿠데타 정부는 간첩들의 아지트 제거라는 이유로 화전민 소탕작전(?)을 감행하였다.
산지사방으로 흩어진 그들에게는 구전(口傳)마저 불가능한 상테에서 대가 바뀌기를 거듭했다.
높은 산 정수리에 묻히기는 했으나 관리받을 기회마저 없이 세월과 더불어 무덤들도 사라져 가고 있다.
(풍수지리설을 믿고 산정에 묻은 시신도 극소수 있는데 후손이 잘못 되었는지 방치상태인 묘도 있다.
백두대간 종주중 우연히 만났으며 이 분야에 조예가 깊은 함양의 한 유학자는 산 정수리 또는 능선 날은
절대 명당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호박넝쿨 본줄기에서는 호박이 열리지 않는데(그래서 샛줄기를 많이 만들기 위해서 호박넝쿨에 도리깨
을 한단다) 명당도 같은 이치란다.
명당은 산 정수리 또는 능선 날에서 비켜 있다는 것.)
한국의 헤일리가 나오지 말란 법 있는가.
노예는 아니었지만 노예보다 나을 것이 없었던 화전민 조상을 찾으려고 하는 한국인 헤일리에게는 조상
찾기가 한결 수월해지는 듯 했으나(소위 DNA 검사로) 조상들의 세상에 나왔던 흔적이 사라져버렸다면?
여러가지 이유로 뿔뿔이 흩어진지 오래지만 다시 모일 이유가 충분해도 구심점이 없다면?
나는 화장 찬성론자다.
나와 내 가족이 신세졌던 병원의 의과대학 해부학교실에 시신을 기증했으니까.
그럼에도 몇가지 제기될 수 있는 이유로 나는 풍장 또는 수목장 등 흔적 버리기 편에는 서고 싶지 않다
망우산 일대에 조성되어 있는 공동묘지에는 일부 애국지사들의 유택이 있다.
대부분이 한심한 공동묘지 시절에 묻혔으며 보기 민망할 정도로 초라했던 무덤들이 쾌적한(?) 유택들로
리모델링 되어 있다.
이 코스에는 출토유물과 축성방법 등으로 미루어 삼국시대의 유적으로 보인다는 아차산 일대의 보루군
(群)도 포함되어 있다.
고구려보루군은 도봉산에서 사패산 ~ 한강봉 ~ 불곡산으로 이어지는 한북정맥 일부에서도 발견되는데
아마도 수락산과 불암산으로 해서 용마봉 아차산으로 띠두르듯 분포된 것 아닐까.
그래서, 5c후반 ~ 6c중반에 한강유역을 둘러싼 삼국정립의 판세를 규명하는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는 유적들이란다.
그래서, 이 구간은 뽕도 따고 임도 만나는 일석이조의 기회라고 생각되어 두 손자에게 각기 1대1의 역사
기행을 시도했지만 아쉽게도 그들에게는 시기상조였다.
역사와 지리의 교육은 어떤 방식도 현장 답사를 통한 학습보다 우월한 효과를 낼 수 없다는 것이 내 변함
없는 신념이다.
내가 대학에 몸담고 있던 시절에 국사학과를 편애한다는 비난을 들으면서도 그들(국사확과 학생)의 현장
답사에는 파격적으로 교통편의를 봐준 것도 이런 이유에서 였다.
그들의 답사가 얼마나 효과적이었는지 고스란히 담겨있는 답사 보고서가 지속적인 지원 여부를 결정하기
때문에 지도교수와 학생들이 늘 명실 상부한 답사를 하고 알찬 결과를 가지고 돌아왔다.
민주주의가 표를 먹고 사는 괴물이기 때문에 표를 의식할 수 밖에 없는 소위 정치가들이 표가 될 만한 일
이라면 처자식이라도 내놓을 듯 하지만 표와 무관한 일에는 하나같이 모르쇠한다.
당장에는 표가 되지 않더라도 장래를 위해서 꼭 해야 할 일이 산적해 있건만.
나는 기회 있을 때마다 중학교 이하의 유소년들은 정부의 완전 보증으로 전국의 방방곡곡을 누비고 다닐
수 있는 법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빈부와 무관하게 모든 유소년의 무료답사를 권리일 뿐 아니라 의무화 해야 한다고.
지리와 역사의 학교교육은 현장 답사를 위한 준비와 사후 관리 등 사무적일 뿐이고.
표와 직결되어 있는 고령자들에게 베푸는 각종 지원을 대폭 삭감하여(나는 80대 중반의 고령자다) 표와
무관한 유소년층을 위해 사용할 때 진정한 민주와 복지에 이르게 될 것이다
나는 중2, 초6, 초4 학년의 아들딸들과 8박9일의 순회 야영(traveling - camping)을 한 적이 있다.
천막을 비롯해 숙식도구 일체를 지고(개인용품 백팩은 각기 메고) 서울울 떠나 서울로 돌아오는데 42번의
환승(차량과 열차, 선박 등)을 하였다.
순천~여수~상주(남해)~진주~마산~부곡~울산~포항~영덕~울진~삼척(호산,임원,맹방) 등지를 거쳐.
주마간산에 불과했다 해도 현장에서 확인한 지리와 역사는 책을 통해서 암기하는 것과 천지 차가 있으며
이 과정을 통해서 예기치 못했던 인간관계(human relation)의 중요성도 체득하게 되었다.
이런 프로그램이 1회적이거나 특정인에 국한되지 않고 보편적이며 무제한적이어야 한다.
그래서 정부가 나서야 한다.
먹는 것에 별무관심인 듯 하던 큰 손자가 묘지 입구가 내려다 보이는 지점에서 점심메뉴를 물어왔다.
소위 배꼽시계만은 정확한 듯.
고개너머 구리쪽에 아는 식당이 있다.
짧은 2정류장 거리라 손자의 동의를 받아 걸었다.
걸신스럽게 먹은 손자의 한마디 소감은
"아 맛있다"
어리지만, 어릴 수록 오염되지 않은 미각이라 정확할 것이며 실제로 고추장으로 이름난 고장(전북 순창)
출신인 이 집의 음식맛은 일품이다.
음식 맛은 장맛이라고 한다.
그래서 간장, 된장, 고추장 등의 모체인 메주에 지극 정성이다.
손맛이라고도 말한다.
장들을 손으로 조절하고 주물러서 맛을 내므로 둘 다 맞는 말이다.
같은 재료로 만드는데도 유독 전라도 장과 전라도 손이 특별한가.
과식했는지 걸음이 되레 무디어진 큰 손자.(아래)
중랑캠핑장에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나도 동감이다.
내 평생 무수한 캠핑장을 섭렵했지만 캠핑장에는 군더더기가 필요 없다(군더더기가 없어야 한다).
그런 것이 필요하다면 왜 캠핑하러 나서는가.
오로지 캠핑이 목적이며 기본 시설 외의 너절한 부대시설은 오히려 캠핑에 역효과물들이다.
그래서 캠핑장은 주변 환경을 고려하여 위치를 선정하는 것이 중요한데 여기는 적지(適地)가 아닌 것 같다.
양원역을 지난 둘레길(위)은
섬뜩한 마을을 통과한다(아래)
"죽기를 각오하고 내 집 내가 지킨다"
아마, '양원지구보금자리주택'이라는 이름의 고층 아파트단지가 들어서려나 본데 반대의 소리가 처절하다.
낡은 주택들도 있지만 신축한지 얼마 되지 않은 산뜻한 집도 있다.
소형 주택도 있지만 2층 이상, 중형 건물도 포함되어 있다.
더 좋기 위해서라지만 파괴하기 아깝다고 생각되는 집들이다.
"25평 집이 10평 아파트 값도 안되냐"
합법이라는 이름으로 개인의 재산권을 무참하게 짓밟아도 되냐는 절규로 들린다.
조합의 이름으로 주택들의 부지를 매입하여 아파트를 짓는데 일부 소형 주택 소유자들은 혜택 받기는 커녕
건축비 차액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벌이는 투쟁인 것 같다.
누구를 위한 재개발이며 누구에게 필요한 아파트 건축인가.
왈가왈부할 처지가 아닌 나그네지만 한가지 알고 있는 분명한 사실은 저간의 이런 류의 조합들이 예외 없이
부정과 비리의 복마전이었다는 것이다.
반세기 전에 작은 주택 하나(현재의 누옥) 산 것 외에는 평생에 부동산 거래를 해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아는
것이 전무하지만 양측에게 역지사지를 권하고 십다.
그러면, 법이 뭐라 하던 소형이지만 어렵사리 장만하여 누리고 있는 남의 행복을 짓밟거나 소탐대실의 우를
범하지도 않을 것이다.
하루해를 걷는데 웃음꽃 피는 일만 보는가.
다만, 저러다가 힘이 부치면 극단적인 일을 벌이거나 자포자기하는 설상가상의 불행은 없어야 할 텐데.
이런 일을 늘 겪으며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예삿일과 다름 없겠지만 생소한 내게는 몹시 조마거리게 하는
일이다.
걱정될 정도는 아니지만 큰 손자가 작은 손자에 비해 체력이 약한 것은 분명하다.
같은 시기에 같은 조건으로 각기 1대 1로 걸어본 결과다.(위)
신내동(중랑구)에서 발원하는 하천과 공릉동(노원구) 육사(육군사관학교) 근처에서 발원은 하지만
아직껏 이름도 얻지 못한 하천이 북부간선도로 묵동나들목 인근에서 합수하는 지방하천.
발원지가 신내동이라 해서 신내천이라고도 불린다는 묵동천(墨洞川)이다.(아래)
이름을 닮았는지, 선입견인지 거무스름한 느낌인 하천.
겨울이라 삭막하기도 하고.
합류하는 중랑천 쪽으로 갈 수록 관리가 잘 되고 있는 것 같은데 화랑대역에서 작별한다.
2코스도 순, 역 방향, 들 날머리가 모두 지하철 6호선의 화랑대역이다.
서울둘레길 8개 코스의 시. 종점이 모두 지하철역인데 1974년에 개통된 1호선 이후
9개의 지하철 노선이 외곽까지 고루 뻗어있음을 의미한다.
(우리의 종주 당시에는 불편했던 우이동도 우이경전철의 개통으로 한결 수월해졌다.
지하철만으로 모든 코스에 쉬이 접근할 수 있으므로.)
손자들이 이용하는 3호선의 연신내역에는 6호선으로 직행이 가능하나 멀리 우회하기
때문에 약수역에서 3호선으로 환승하면 적잖은 시간이 절약된다.
이 일까지 마침으로서 7일째를 완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