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라 개국에 관하여 가장 널리 알려진 삼성 개국 신화는 고려사 지리지, 신증 동국여지승람, 탐라지, 영주지 등의 문헌에서 그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 영주지의 기록에 의하면 "영주에는 태초에 사람이 없었다. 홀연히 세 신인이 한라산 북쪽 기슭에서 솟아 나왔는데 모흥(삼성혈)이라는 곳이다. 그들은 용모가 비범하고 도량이 활달하여 세상의 속됨이 없었다. 하루는 한라산에 올라 멀리 보니 동해로부터 목함이 떠내려와 머물어 떠나지 않는 것을 보고 그 곳으로 내려가 목함을 열어보니 속에는 새알 모양의 옥함이 있고 자주빛 옷을 입고 허리띠를 찬 사람이 나왔다. 또 옥함을 여니 푸른 옷을 입은 처녀 세사람이 있었는데 모두 나이는 15,16세요, 용모는 품위 있고 아름답게 장식하여 앉아 있었다.
또 망아지와 송아지, 오곡의 종자도 가지고 있었는데 이를 금당의 해안가에 내려 놓았다. 세 신인은 모두 즐거워서 말하기를 이는 반드시 하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하였다. 사자는 두 번 절하고 엎드려 말하기를, 나는 동해의 벽랑국의 사자올시다.우리 임금님이 서쪽 바다의 기상을 바라보시더니 자주빛 기운이 하늘을 이어 상서로운 빛이 서리는 것을 보시고 신자 세사람이 절악에 내려와 있어서 장차 나라를 열고자 하나 배필이 없어 하고 있어 신더러 명하여 세 공주를 그 곳으로 데려가라 하였으니 좋도록 짝짓는 예를 올리시고 대업을 이룩하소서 하고는 홀연 구름을 타고 사라져 버렸다.
세 신인은 곧 목욕 재계하여 하늘엥 고하고 나이 차례로 그녀들과 결혼하여 물 좋고 기름진 땅을 골라 이들은 형과 동생을 정하기 위하여 활을 쏘기로 했다. 활을 쏜 결과 고을라가 제일 멀리 쏘아 큰 형이 되고 그 다음 양을라,부을라순으로 정해졌다. 고양부 세 신인이 활을 쏘았던 곳이 제주시 화북동 조금 넘어간 곳인데, 이곳에 지금도 삼사석(三射石)이 남아 있다. 고을나가 사는 곳은 제 일도라 하였고, 양을나가 사는 곳은 제 이도라 하며, 부을나가 사는 곳은 제 삼도라 하였다.
이로부터 산업을 일으키기 시작하여 오곡의 씨를 뿌리고 송아지 망아지를 치니 날로 번성하여 부유하게 되어 드디어 인간 세계를 이룩하여 놓았다. 그 후 9백년이 지난 뒤에 민심이 모두 고씨에게 돌아 갔으므로 고씨를 왕으로 삼아 국호를 탁라라 하였다.15대손에 이르러 후, 청, 계 삼형제는 배를 만들어 바다를 건너 탐진을 거쳐 신라에 조공을 하였다. 때는 신라의 전성기였다.이때 객성이 남쪽 하늘에 보이므로 태사가 임금에게 아뢰기를 이국인이 내조할 징조라 하였더니 마침내 탐라왕이 신라에 내조하였으므로 왕은 기뻐하며 말하기를 내 갑자기 귀한 손님을 얻었으니 어찌 기쁜일이 아니리요하고는 후를 성주로 하고 청을 무릎 밑으로 오게하여 자기 아들과 같이 사랑하였으므로 왕자 동궁이라 불렀으며 계를 도내라 하였다.남쪽 나라라는 뜻에서 탐라라 개칭하고 각각 의관과 보개를 하사하고 친히 남도까지 전송하니 차와 기병 짐수레등 수행원이 백 리에 이르렀다.
후의 12세손 담에 이르러 백제에 신사하였는데 담이 죽은 뒤 오랫동안 섬기지 않았으므로 백제 동성왕은 경신년 이래 탐라가 조공을 이행하지 않은 것을 크게 노하여 군사 4천기를 인솔하고 친히 정벌코자 남쪽 요새 무진주(광주)까지 이르렀을 때 탐라왕 소는 사신을 보내어 사죄하였으므로 그 군대를 거두었다. 고려 태조 21년 무술에 탐라왕 고자견은 태자 말로를 파견하여 내조하였으므로 성주와 왕자의 벼슬을 내리니 이로부터 고려에 신사하였다. 고려 초에 처음 벼슬을 한 사람은 고유에 이르러 시작되었다.삼신인이 솟아나왔다는 세 구멍은 품(品)자 형으로 나열되어있는데 그 중 하나는 둘레가 6자, 깊이는 바다까지 통한다고 하며 나머지 둘은 둘레가 각 3자이나 세월이 지남에 따라 지금은 흔적만 남았는데 상혈은 고을나, 좌혈은 양을나, 우혈은 부을나로 전하고 있다
|
지방기념물 제17호로 지정된 이곳은, 성산읍 온평리 도로변에서 북서쪽으로 800m 정도 올라가면 혼인지를 알리는 표말이 보인다.
삼성혈에서 나온 삼신인이 수렵생활을 하며 지내다가 동쪽나라에서 온 삼 공주와 합동혼례를 올렸다는 조그마한 연못. 얕고 작기만한 연못에 불과하지만 삼신인이 이곳에서 혼례를 올림으로써 비로소 제주민이 늘어나고 농사를 짓기 시작한 계기가 되었다.
혼인지 바로 옆에는 삼신인이 혼례를 올린 후 신방을 차렸던 조그만 굴이 있는데 그 굴이 세갈래로 되어 있어 순전히 전설인 것만은 아닌듯 한 기분이 든다.
이곳은 삼성혈과 함께 제주도 시조의 자취를 더듬어보기 좋은 곳으로 여름과 함께 피어나는 붉은 연꽃은 노을처럼 곱기만 하다.
| | |
|
삼성혈의 조성은 조선조 중종 21년(1526년) 이수동 목사가 삼성혈 주위 280여척의 돌담을 쌓고 혈의 북쪽에 홍문과 혈비를 세워 삼성의 후예로 하여금 춘추제를 모시게 하고 매년 11월 초 정일(丁日)에 도민으로 하여금 혈제를 모시게 한 것이 삼성혈 성역화의 시작이다. 그 후 혈단.위패가 모셔진 삼성전과 분향소,제향을 받드는 전사청, 서원이었던 숭보당 등 각종 시설을 갖추면서 증.개수를 거듭하였으며, 꾸준히 조경사업을 실시하여 200년 이상되는 수십종의 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져 있어 도시 속의 숲으로 관광객이 끊이지 않는다. 삼을나묘인 삼성전은 그 후 숙종 28년(1702)에 이형상 목사가 가락천 동쪽으로 옮겼다. 그러나 고종 8년에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사우(祠宇)가 한 때 헐리고 말았다. 이에 고종 27년에 다시 세웠고, 1910년에 중건하였다.
지금의 건물은 1971년 낡은 건물을 완전히 해체하고 웅건한 모습으로 다시 중건한 것이다. 건물은 전면 6칸, 측면 4칸의 7량집이며, 면적은 앞너비 12.05m, 옆너비 5.5m이고 지붕은 팔작형이다. 또 높이 0.15m인 원형 주춧돌 위에 높이 1.55m의 기둥을 세운 후 그 위에 창방을 사래맞춤하였다.
양식은 주심포양식이며 막새에는 연화문이 새겨져 있다. 한편, 이 유적은 영조 48년(1772)에 양세현 목사가 바깥 담장을 쌓아 소나무를 심게 하고 祭田을 마련하여 향청(鄕廳)으로 하여금 제사를 지내게 하였으며, 순조 27년(1827)에 李行敎 목사가 전사청(典祀廳)을 창건하고, 헌종 15년 (1849)에 장인식 목사가 숭보당(崇報堂)을 세웠다. 숭보당은 재생들이 학업을 연마하던 곳인데, 1974년 12월에 현 위치로 옮겼다. 건물은 전면 7칸, 측면 4칸인 5량집으로 면적은 앞너비 15.95m, 옆너비 6.62m이며, 지붕은 팔작형이다.
높이 0.82m의 부초석 위에 높이 0.75m, 지름 0.28m인 원형기둥을 세웠다. 또 주두(柱頭) 위에 창방과 도리를 사래맞춤하였으며 끝막새에는 연화문을 새겼다. 또한 경내에는 書院인 三姓祠가 위치해 있었는데, 그 시초는 영조 16년(1740)에 안경운 목사가 재생(齋生)을 두면서부터였다. 그리고 사액(賜額)이 내려진 것은 정조 9년(1785) 2월이었다. 제주 幼學 양경천의 上言에 따라 禮官 高宅謙(고택겸)이 와서 '三姓祠' 란 왕의 어필 액자와 절목을 내렸다. 삼성사에는 장의(掌議) 1인과 有司 2인과 정원내의 30명과 정원 외로 70명의 학생을 두었다.
祭禮는 향교의 석전과 같이 제복을 갖추어 매년 4월 10일에 춘제, 10월 10일에 추제를 지내는데, 삼헌관은 고 양 부 3 성씨가 윤번제로 하고, 12월 10일에 지내는 乾始祭(건시제)는 제주 도민제로 모시었다. 초헌관은 지방행정의 책임자, 아헌관과 종헌관은 기관장이나 유지 중에서 뽑는다. 춘제 추제는 삼을나의 위패를 모신 삼성전에서 지내고 건시제는 혈단에서 지내므로 혈제라고도 한다.
지금도 4월 10일의 춘제와 10월 10일의 추제는 삼성 후손들에 의해 매년 지내는데,삼헌관은 고양부 3성이 순번제로 한다. 12월 10일 건시대제는 혈단 앞에서 제주도민제로 모시는데 초헌관은 도지사가.종헌관은 지방유지 중에서 선임한다. 삼신인이 솟아난 웅덩이에는 물이나 눈이 스며들지 않으며 주변 나무들이 웅덩이를 향해 숙여져 있는 모습이 마치 삼신인에게 절하는 모습같아 이곳을 찾는 사람들의 경이로움을 더한다. 이곳에는 수령 3백여년된 노송들과 녹나무,백일홍,조록나무 등이 울창하여 도심속의 숲을 연출하고 있다.삼성혈은 제주인의 맥이 숨쉬는 곳이다. | |
|
지정번호 : 제주도지념물 제 4호
지정년월일 : 1971년 8월 26일
위치 : 제주시 화북2동 1380번지
삼사석(三射石)은 탐라시조 삼신인이 벽랑국의 3공주를 배필로 맞이한 3신인이 한라산 북쪽 기슭 쌀손장오리(矢射岳)에서 활을 쏘아 거처할 터전을 정할 때 그 화살이 꽂혔던 돌이 바로 삼사석. 지금도 삼사석에는 살(矢)을 맞은 흔적이 남아 있어 3신인의 체취가 묻어나는 듯. 탐라의 자취가 비석 속에서 숨을 쉬고 수천의 시간이 고스란히 이곳에 흐르고 있다.
영조 8년(1735) 당시 제주 목사가 그 전설과 유적을 돌아보고 그 곳에 삼사석비를 세우고 "옛날 모홍혈에서 활을 쏘아 맞은 돌이 남아 있으니 세 신인들의 기이한 자취는 천추에 서로 빛날 것이다"고 하였다. 그후 순조 13년(1813) 지방사람 양종창(영조 43년∼철종 2년, 1767∼1851, 제주 유림)이 화살맞은 돌을 수습하여 석실을 만들어 보관하면서 석실 좌우 기중 판석에 새기기를 "삼산 유적이 세월이 오래되었으므로 남은 것을 거두어 이제 수집하여 석실에 합하였다"하고 밑에 있는 도리 판석에 "가경 계유에 석실을 만들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순조 13년(1813)에 해당된다.
삼사석은 직경 55cm 내외의 현무암 2개로 되어 있고, 이를 보호하는 석각은 영조 11년(1735) 제주인 양창종이 지었으며 석실 높이 149cm, 앞뒤너비 101cm, 옆좌우너비 67cm 규모이며 비는 높이 113cm, 너비 43cm, 두께 18cm이다 | |
|
절부암 (節婦岩)
지정번호: 제주도기념물 제9호
지정일시: 1971년8월26일
소재지: 북제주군 한경면 용수리
한경면 용수리 포구 곁, 고목이 울창한 속에 '절부암'이라는 큰 바위가 있다. 조선조말 용수리에서 강씨 총각과 고씨 처녀가 살고 있었다. 강씨 총각도 조실부모하여 남의 집에서 자라고, 고씨 처녀도 역시 조실부모하여 남의 집에서 심부름하며 자라났다.
총각.처녀가 다 착실하여 동네 사람들의 칭찬을 받았다. 나이가 15,6세가 되어 가니 강씨 총각을 데려 사는 주인이나 고씨 처녀를 데려 사는 주인이나 앞길을 걱정하게 되었다. 어느 날 두 주인은 이 처녀 총각이 다 같은 처지요 또한 서로 얌전하니 부부를 맺어 주자는 의논을 했다.드디어 처녀 총각은 부부를 맺게 되었다. 혼인 잔치를 지낸 지 일주일도 못 된 어느날 ,남편인 고씨는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갔다.가난한 새살림이라 부지런히 일을 해서 벌어들이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다로 나간 남편은 날이 저물어도 돌아오지 않았다.불행히 풍랑을 만나 불귀의 객이되고 만 것이다.
아내는 거의 미친 사람처럼 바닷가를 돌며 시체가 떠오르기를 하늘에 빌었다. 석 달이 되어 가도 시체는 돌아오지 않았다. 아내는 체념하고 남편의 뒤를 따르기로 결심하여 지새포 포구 곁, 절벽 위의 나무에 목을 매고 말았다. 그날 저녁 이상하게도 남편의 시체는 바로 그 절벽 밑으로 떠올라왔다. 당시 사람들은 입을 모아 중국 조아의 옛일 같다고 칭송하였는데 동네 사람들은 애처로운 이 광경을 보고 당산봉 양지 바른 곳에 두 시체를 안장하여 주었다.
그때 신제우라는 사람이 이 소식을 듣고 '내가 벼슬을 한다면 이런 갸륵한 영혼에게 열녀비라도 세워주겠야겠는데.....'하고 중얼거렸다. 그 후 신제우는 서울에 과거를 보러 갔는데 낙방이 되고 말았다. 고향으로 돌아와 실의에 차고 있을 때, 어느 날 꿈에 이 고씨가 나타나 다시 과거를 보라고 격려하는 것이었다. 신제우는 고씨의 묘에 참배하고 다시 과거를 보러 갔더니 이번엔 급제하였다.
신제우는 돌아와 고산리와 용수리에 각각 엽전 서른 냥식을 나누어 주어 매년 3월 15일에 열녀제를 지내도록 하고 열녀비를 세워 주었다. 그래서 고씨가 목매어 죽은 절벽을 절부암이라 부르게 되고, 그 후 매년 3월 15일에는 그의 묘에서 열녀제를 지내게 되었다 한다.
| |
|
포 충 사
광주 기념물 제8호
소재지 :광주광역시 남구 원산동
이곳은 임진왜란 당시 호남에서 최초로 의병 7,000명을 모집하여 금산전투에서 장렬히 순절한 고경명(1533 ~ 1592) 선생의 충절을 기리기 위한 사액사당이다.
중종 28년∼선조 25년(1533∼1592). 향년 60세. 조선 전기의 문인.의병장.
본관 장흥(長興). 자 이순(而順). 호 제봉(霽峰) 태헌(苔軒). 시호 충렬(忠烈). 명종 7년(l552) 진사가 되었으며, 1558년 식년문과에 장원급제하였다.
호조좌랑으로 기용되었다가 전적(典籍) 정언(正言)을 거쳐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1563년 인순왕후(仁順王后)의 외숙 이조판서 이량(李樑)의 전횡을 논할때 교리(校理)로서 이에 참여하였다가 그 경위를 이량에게 알려준 사실이 발각되어, 울산군수로 좌천된 뒤 파면되었다.
선조 14년(1581) 영암군수로 다시 기용되고, 이어 종계변무주청사(宗系辨誣奏請使)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91년 동래부사로 있다가 서인(西人)이 제거될때 사직하고 낙향하였으며, 선생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온 백성이 혼란에 빠져 있을 때 의연히 일어서 마상에서 격문을 지어 각 도에 돌리고 의병을 규합, 왜적과 싸우다 순절하였다.
나라에서는 선조 28년(1595) 선생과 함께 순절한 장남 종후와 차남 인후 삼부자를 위해 정문을 세웠고, 그뒤 선조 34년(1601) 국령으로 사우를 건립하여 선생의 삼부자와 함께 의거 순절한 월파 유팽로(1554 ~ 1592), 청계 안영( ? ~ 1592) 등 다섯 분을 같이 배향하도록 하였다.
후에 선조 36년(1603) 사당에 '포충'이라는 액호를 내리고 예관을 보내 치제하게 하였다. 현재 옛 사우 경내 건물로는 사당, 동재, 서재, 내삼문, 외삼문이 있으며, 1977년 정화시 충효당, 전사청, 청사영당, 고직사 등은 철거 정비되었다.
문집에《제봉문집(霽峰文集)》 저서에《유서석록(遊瑞石錄)》각처에 보낸 격문을 모은 《정기록(正氣錄)》 등이 있다. 남광주역 사거리에서 시작되어 광주역에 이어지는 제봉로는 선생을 기리기 위해 이름 붙인 거리이다.
종별 : 시지정 유형문화재 제21호
지정일 : 1994년 7월 21일
소재지 : 남구 원산동 947-4 포충사
시 대 : 조선 시대
|
|
|
|
포충사 소장 고경명 문적 (남구 원산동 포충사 소장) |
포충사 소장 고경명 문적 |
포충사 소장 고경명 문적 |
제봉 고경명 문적이 전시된 포충사 정기관 |
포충사에 보관되어 있는 고경명 문적은 그의 아들 인후, 종후 그리고 포충사와 관련된 문적으로「명문」2점,「입안문」1「교지」4점,「유물」2점이 있다.「명문」은1601년 나라에서 고경명 3부자를 위해서 포충사를 지어 봄 가을에 제사를 올릴 수 있도록 하고, 임금이 포충사라는 이름까지 지어내리니 고경명의 부인과 아들들이 감격하여 자신들의 농토와 노비를 영원히 포충사에 기증한일을 기록한 문서이다.「입안문」은 재산 헌납에 관한 관청의 인가증명서이다.
이외에 국왕의「교지」, 고경명이 직접 지은 격문과글씨 등 모두 9점이 포충사에 보관되어 있다.「명문」2점은 포충사 관리의 귀중한 자료이고,「입안문」은 국가 대우를 알 수 있는 자료이며, 또 글씨는 고경명의 얼이 스며있어 우리 조상들의 정신사를 밝혀주는 소중한 자료이다
● 기념물 제 12호
● 1844년
● 1985년 2월 25일 지정
● 남구 압촌동
임진왜란 때 금산전투에서 전사한 의병장 고경명장군을 비롯하여 그 일가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것으로 1충, 3효, 2열, 1절로 표창되어 있다.
고경명장군(1충)을 비롯하여 진주성에서 전사한 효열공 종후, 금산에서 전사한 의열공 인후등 효자 두 아들과 열녀로서 정유재란때 순절한 그의 딸 영광유생 노상룡의 처와 고거후의 처로 그의 질부인 광산정씨, 효자로 그의 손자인 선교랑, 고부금과 절의로 죽은 동생 고경형 등 일가 7명이 모셔져 있다.
현존 건물은 1844년에 세운것으로 사방에 홍살문을 설치하여 내부를 차단하고 앞뒤 이열로 정려현판을 걸었다. 정면 네칸, 측면 한칸의 맞배지붕으로 지붕은 부연이 없는 홑처마로 처리했다. 건물 밖에는 담장을 돌리고 외삼문을 세웠으며 삼강문 옆에는 고씨문중의 제각인 추원각이 있다.
|
|
|
고씨 삼강문(남구 압촌동) |
제봉 고경명 일가의 충절을기린 고씨 삼강문 |
고씨 삼강문에 걸린 정려 현판 |
구분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 28 호
위치 충남 금산군 금성면 양전리 산 170
* 조선 효종 27년(1712) 창건, 1952년 재건
* 고경명 선생은 문인 출신 의병장으로 임진왜란 당시 금산에 침입한 왜군을 맞아 혈전 끝에, 이 비석이 세워진 맞은편 산기슭 눈벌에서 전사했다. 이에 효종 27년 석비를 세워 그의 충혼을 기렸으나 일제시대에 왜경에 의해 파손되었다. 현재 석비는 광복 후에 재건한 것이다.
|
| |
|
고씨동굴은 석회암이 지하수에 의해 용식되어(물에 녹아서) 만들어진 전형적인 석회동굴 이다.이 동굴의 원래 이름은 노리곡 동굴이었던 것이 임진왜란 때 부락민이 이동굴에 피난하였다가 왜병이 동굴입구에 불을 질러 고씨 들만 살아남았으므로 고씨동굴이라 부르게 되었다.
고씨동굴에는 피난을 하면서 밥을 짓기 위해 불을 때어 그을린 흔적과 솥을 걸었던 자리가 남아 있다. 동굴 내부에는 약 4억년전부터 형성된 종유석과 4개의 호수ㆍ3개의 폭포ㆍ6개의 광장이 있으며 고씨동굴 입구 쪽은 급한 절벽을 이루고 있으며 큰 하천이 앞을 흐른다.
건너편의 주차장과 동굴 입구를 연결하는 다리는 1998년4월완공되었는데 현대식으로 매끈하게 만들어져 있 으며 양쪽 난간에 조각을 새겨 놓았으나, 오랜 세월의 인고 끝에 찬란한 자태를 드러낸 동굴과는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다. 어떻든 편해서 좋기는 하다.동굴에 들어가면 영겁의 세월이 눈 앞에 찬란하게 드러난다. 동굴 벽과 천장, 바닥 어디를 둘러보아도 아름답지 않은 곳이 없다. 수많은 종유석, 석순, 석주 등이 찬란한 빛과 자태를 뽐낸다. 사람들이 저마다 이름을 붙여 놓았으나, 어쩐지 이름이 쑥스럽다. 차라리 침묵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동굴을 감상하시는 분들께서는 부디 이름에 현혹되지 마시기 바란다. 이름을 무시하는 것이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느끼게 해줄 것이다.
강원도 영월군 하동면 진별리에 소재하고 있는 석회동굴로 주굴의 길이 1,800 m에 이르는 우리나라의 대표적 동굴의 하나로 1969년 6월 4일 천연기념물 제219호로 지정되어 있다. 영월읍에서 동남쪽 12km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영월화력발전소에서 동남쪽6Km 떨어진 남한강 상류 河蝕斷崖(하식단애)에 위치하고 있다. 1966년 4월 한국동굴학회가 이끄는 한일합동조사단에 의해서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되었으며 그 후 건국대학의 홍시환 교수팀의 본격적인 개발조사와 당시 군수 유은재,박영국 관광협회장의 헌신적인 노력에 의해서 관광동굴로 개발, 공개되었다. 이 동굴이 형성된 지질년대는 고생대의 대석회암통에 속하는 지층으로 약 4-5억년전에 형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굴이 1,800m, 支屈(지굴)을 합하면 총연장6.3km로 소개되어 있으나 정확한 길이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동굴탐험인들에 의해 약 3,000m 정도로 추정되고 있을 뿐이다. 동굴 입구에서 약 200m까지는 비교적 단순하게 외줄기로 뚫려 있고, 400m 지점부터는 협곡이 전개된다. 800m 지점에 이르면 지하천이 넓어지고 거미줄같이 지굴이 갈라진다.해발고도 210m의 강변에 위치하고 있는 고씨동굴의 기상환경에 대한 학계보고에 따르면 동굴내부의 기온의 연교차는 비교적 적은 편이며, 일교차는 약 10도이상 높은 것으로 나타나 있다. 1986년 11월 16일 14시에 실시한 동굴 안쪽의 기온이 4.5°c일때 바깥쪽은 그보다 약간 낮은 3.2°c였다. 동굴내의 기온은 입구에서 멀어짐에 따라 점차 상승하여 중간지점인 구름다리 앞에서는 10.2°c였고, 가장 안쪽인 광장의 기온은 16.2°c였다.
즉 외부보다 13°c정도 높다. 동굴내부의 습도는 동굴에서 300m 지점까지는 상대습도 50% 미만이나 깊어짐에 따라 습도는 높아지고 특히 주변에 물이 있는 곳에서는 60%를 상회하였다. 수온은 12°c이고 계절적인 변화는 0.6°c 내외이며 외기변화의 영향은적은 편으로 나타나 있다. 동굴을 형성하는 지형지물의 분포특징은 상층 지각의 구조암석인 석회암질의 구조성분과 지표에서의 침투 수량 및 기간, 집중도 등과 깊은 관련이 있다.
이 동굴에서 싹트고 있는 2차 생성물로 대표적인 것은 鐘乳石(종유석)과 石筍(석순), 石柱(석주), 流錫(유석),石灰華段丘(석회화단구) 등의 석순경관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이 동굴의 대표지역이라 할 수 있는 제3지역에는 懸垂狀 鐘乳石群(현수상종유석군), 石灰華瀑(석회화폭), 石幕石筍(석막석순) 그 밖에 섬세한 형성물체들이 있으며, 타에서 찾아볼 수 없는 절묘한 형상을 하고 있다. 그 밖에 경승지로는 십이선경 일대와 無量塔(*무량탑)등의 거대한 종유석군, 石柱列(석주열), 天宮(천궁) 일대의 대형 석순군 등을 들 수 있고, 기형형성물로는 극락전 일대의 유석군, 神農池(신농지), 꿈의 궁전, 天佛臺(천불대) 등이 있으며, 이들은 모두 보존가치가 높은 것으로 주목되고 있다.
동굴생물로는 1965년 분포조사 때 동굴내부의 호수에 많이 서식하고 있는 백색의 엽새우를 비롯한 20종의 동굴생물이 보고된 바 있고, 1971년도 조사에서는 소과 2종, 게새우 5종, 지네 4종, 곤충류 17종, 포유동물 3종, 거미 10종 등 41종을 확인하였다. 이들의 생태적 분포는 眞洞窟性(진동굴성)이 14%, 好洞窟性(호동굴성)이 36%, 外來洞窟性(외래동굴성)이 50%로 나타나 있다.
이중에는 지구상에서 4-5억년 전에만 볼 수 있었던 화석곤충인 갈로와충이 서식하고있음이 밝혀져 학술적으로 큰 관심을 불러 일으키기도 했다. 이 동굴은 현재 내부 IKm까지 관광용동굴로 개발 공개되고 있어 훼손 또는 오염의우려가 있다. 관리자는 물론 출입 관람객의 세심한 주의가 요망되고 있다.고씨동굴은 영월읍에서 12km 정도 떨어진 20분 거리에 있다. 남한 강가의 절벽에 입구가 있기 때문에 이 굴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나룻배를 타야 한다. 그 밖에도 영월에는 숙부인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17세에 죽음을 맞은 단종의 유배지로 유명한 청령포와 단종의 능인 장릉이 있다. 배를 대지 않으면 강줄기로 둘러싸여 섬이 되어버리는 청령포는 창살없는 감옥이나 다름 없지만 빽빽한 소나무 숲이 장관이다. 단종이 쌓았다는 돌탑과 단종의 유배생활을 굽어 살폈다는 6백년 된 관음송 등도 둘러볼 만하다.
삼 면이 강줄기로 싸여 있고 뒤로는 험한 산줄기와 절벽으로 둘러싸인 이곳은 수려한 절경으로 인해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으나 고고하며 애잔하게 느껴지는 까닭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은 듯하다.
이곳에는 청령포 유지비각, 망향탑, 노산대, 관음송이 있다. 또 영월읍에서 강줄기를 따라 12km 정도 거슬러 올라가면 어라연 계곡이 있다. 동굴 주변에는 국민관광지가 조성되어 향토 음식점과 숙박 시설이 완비되어 있다.
입장요금
어 른 |
군인,청소년 |
어린이 |
노 인 |
개인 |
단체 |
개인 |
단체 |
개인 |
단체 |
개인,단체 |
2,500 |
2,000 |
1,800 |
1,500 |
1,200 |
1,000 |
무료 |
위 치
강원도 영월군 하동면 진별리
향토음식 : 칡국수, 보리밥, 용봉탕, 메기매운탕, 민물쏘가리회, 송어회,산채 비빔밥
등산코스
▶ 녹전리-내리지동마을-늡다리-칠용폭포-능선-선달산정상-늦은목이 -사기점마을 (11시간)
▶ 법흥사입구-구봉대산-계곡-법흥사(8.0km, 5시간)
▶ 관음사-계곡끝-당재-백덕산정상-용바위-관음사(9.4Km, 6시간)
▶ 법흥사-치미바위-허공다리폭포-정상-허공다리폭포-법흥사 (6.7Km, 4시간)
▶ 영월군 수주면사무소-법흥사입구-관음사절-고인돌-신선봉(백덕산) -사자산정상(8-9Km, 2:30)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