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를 쓰는 인생(7) 영원한 우정 사무엘상 18. 1-4
“그 날에 사울은 다윗을 머무르게 하고 그의 아버지의 집으로 다시 돌아가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였고”(삼상 18:2)
돌멩이 하나로 거인 골리앗을 쓰러뜨림으로 이름도 없던 양치기 소년이 일약 국가적 영웅으로 부상합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8형제의 귀염둥이 막내로, 조용히 혼자 별을 보며 양들을 돌보는 한적함을 누릴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오늘 다윗은 그곳에 있던 이스라엘의 모든 장수들, 군대장관들은 물론이요, 왕까지도 능가하는 영웅으로 모든 백성의 마음을 사로잡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를 죽이는 사람은 왕이 많은 재물로 부하게 하고 그의 딸을 그에게 주고 그 아버지의 집을 이스라엘 중에서 세금을 면제하게 하시리라”(삼상17:25)
순식간에 찾아온 인기와 명예는 다윗에게 기회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엄청난 위기이기도 했습니다. 다윗은 아직 이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를, 얼마나 무섭고 험난한 인생의 급류속으로 자신을 몰아갈 것인지를 전혀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 순간, 하나님은 다윗의 인생을 위해 가장 아름다운 만남을 예비해두고 계셨습니다. 그 장면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기를 마치매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니라”(삼상 18:1)
먼저 사울의 아들, 왕자 요나단이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생각해봅니다. 사울의 세 아들 중 맏이로 태어났습니다. 사울의 후계자로 왕위를 이을 가능성이 확실했던 황태자 요나단, 그는 다윗이 등장하기 훨씬 이전부터 아버지를 능가하는 용사요, 넉넉한 인품을 가진 리더로, 사람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었습니다.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아군이 수세에 몰렸을 때 그는 단신으로 적진에 뛰어들어 블레셋의 전사 20명을 홀로 쓰러뜨리고 패색이 짙던 전쟁의 승기를 돌려놓았던 적이 있었습니다. 사울은 그 때 전 군에 아무것도 먹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그것을 홀로 몰랐던 요나단은 꿀을 조금 찍어 먹습니다. 그래서 사울이 격노하고 군법으로 자기 아들을 처결하려고하자, 전 군사가 들고 일어나서 요나단을 살려달라고 청원하는 것이지요? “백성이 사울에게 말하되 이스라엘에 이 큰 구원을 이룬 요나단이 죽겠나이까 결단코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여호와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옵나니 그의 머리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할 것은 그가 오늘 하나님과 동역하였음이니이다 하여 백성이 요나단을 구원하여 죽지 않게 하니라”(삼상14:45) 그만큼 요나단은 용사요,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인물이었던 것입니다.
요나단은 나이도 다윗보다 십수 년은 손 윗사람이요, 다윗이 존재도 없던 시절부터 이미 전 이스라엘이 차세대 지도자로 점찍어 놓고 눈여겨보던 유명한 영웅이었던 것입니다. 아마 소년 다윗에게 들려오는 요나단 왕자에 관한 소식은 아마 젊은 사춘기 소년에게, 이 시대 아이돌 같은 영웅이요, 우상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데 대단한 존재였던 요나단 앞에 오늘 다윗이 등장했던 것입니다. 두려움을 모르던 용사 요나단의 가슴에도 거대한 공포를 심었던 거인 골리앗, 그 골리앗 앞으로 이 소년이 갑옷도 벗어놓고 칼도 내려놓고 돌멩이만 쥐고 가는 것이지요? 그렇게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달려나가는 소년 다윗을 보면서 요나단은 기가찼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소년의 손에서 날아간 돌에 거인 골리앗이 쓰러져버렸고 그 손에는 어느새 골리앗의 칼과 머리가 들려진 채로 사울에게로 돌아왔던 것입니다.
“다윗이 그 블레셋 사람을 죽이고 돌아올 때에 그 블레셋 사람의 머리가 그의 손에 있는 채”(삼상17:57)
전쟁이라면 신물이 나도록 겪었던 영웅 요나단의 경험과 상식으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승리를 오늘 다윗이 얻어냈던 것입니다. 바로 그때입니다. 인물은 인물을 알아본다고 했던가요? 그 즉시 요나단은 다윗이 보통 인물이 아님을 알았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신이 임한 특별한 용사인 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일전에 요나단이 단신으로 그의 병기잡은 자와 함께 블레셋 진영으로 돌격해 들어갈 때 이런 말을 했었습니다.
“우리가 이 할례 받지 않은 자들에게로 건너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이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삼상 14:6)
그런데 이제 간신히 10대 중후반 정도밖에 안된 어린 다윗이 골리앗을 향해 달려가면서 외쳤던 말이 거의 비슷한 것입니다.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삼상17:47)
요나단이나 다윗이나 인간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에 철저하게 의지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지만, 요나단이 보기에도 다윗의 믿음은 차원이 다른 믿음이었습니다. 자신은 아직 골리앗 같은 무서운 적을 향해 하나님만 의지하며 달려나가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지요? 똑같은 신앙도 “하나님께서 일하실까 하노라” 하고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하고는 차원이 다른 것이지요? 요나단은 지금 단순히 혜성처럼 나타난 싸움의 천재를 보고 있는 정도가 아니라, 태산과도 같은 믿음을 지닌 하나님의 사람을 보았던 것입니다. 훗날에 요나단이 이런 말을 합니다.
“요나단이 그에게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 아버지 사울의 손이 네게 미치지 못할 것이요 너는 이스라엘 왕이 되고 나는 네 다음이 될 것을 내 아버지 사울도 안다 하니라”(삼상23:17)
그렇습니다. 다윗의 등장은 이스라엘의 왕이 바뀌고, 왕조가 바뀌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요나단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이 두 사람의 관계가 현실적으로 얼마나 어려운 우정이었는지를 생각해보게 되는 것이지요. 다윗은 사위임에도, 사울이 죽이려고 수십 년을 군사를 이끌고 혈안되어 찾을만큼, 자신의 왕조, 자신의 아들 요나단의 자리를 위협하는 인물이었던 것입니다. 아뇨, 이미 자기의 자리도 위협하는 인물이었습니다. 요나단에게 사울이 화가 나서 했던 말을 찾아볼까요?
“사울이 요나단에게 화를 내며 그에게 이르되 패역무도한 계집의 소생아 네가 이새의 아들을 택한 것이 네 수치와 네 어미의 벌거벗은 수치 됨을 내가 어찌 알지 못하랴 이새의 아들이 땅에 사는 동안은 너와 네 나라가 든든히 서지 못하리라 그런즉 이제 사람을 보내어 그를 내게로 끌어 오라 그는 죽어야 할 자이니라 한지라”(삼상20:30)
사울은 좀 둔해서 좀 늦게부터 다윗을 적대시하기 시작합니다. 언제부터 였습니까? 전쟁을 마치고 돌아오던 날, 승전가라고 불러지었던 여인들의 노래를 기억하시지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여인들이 뛰놀며 노래하여 이르되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한지라 사울이 그 말에 불쾌하여 심히 노하여 이르되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그가 더 얻을 것이 나라 말고 무엇이냐 하고”(삼상 18:7-8)
그리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하나님이 아닌 사람을 주목하고 시기하고 질투하시 시작하는, 그로말미암아 내 자리가 위험하다는 생각속에 사는 사람의 결국을 말입니다. 함께 읽어볼까요?
“그 날 후로 사울이 다윗을 주목하였더라 그 이튿날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사울에게 힘 있게 내리매”(삼상18:9-10)
무슨 말씀입니까? 사람을 주목하면, 하루가 채 되지 않아, 이튿날부터 악신에 들린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이 아닌 늘 하나님을 주목하시는 생애가 되시길, 우리에게 주신 이웃을 미워하고 시기하는 일이 없는 우리가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보통 남자들끼리의 우정은 비슷한 나이나, 비슷한 처지, 특히 어렵고 힘든 가운데 동고동락하면서 시작됩니다. 그렇게 시작했던 뜨거웠던 우정도 어느 정도 성공해서 힘이 팽팽해지면 어떻게 되나요? “니가 가라 하와이~”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우정이 유지되기가 어려운 것이지요? 그런데 다윗과 요나단의 경우는 처음부터 대단히 현실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기적처럼 시작되었던 관계입니다.
생각해보겠습니다. 왕이 늙고 병들면 후계자 자리를 위한 눈치작전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아니 조선왕조를 보세요, 왕이 아직 쌩쌩한데도 벌써 왕자들끼리 외척들끼리 권력승계를 위해 암투가 벌어지는 것입니다. 음식에 약을 넣고 누명을 씌우고 단 하루도 맘 놓고 길을 나설 수도 잠자리에 누울 수도 없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냥 놔두면 다음 대권을 승계할 요나단입니다. 싸움터에 나가면 적군에게는 두려움을 아군에게는 경외심을 불러일으킨 용사 요나단입니다. 그런데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변수가 어느 날 갑자기 등장했으니 바로 골리앗을 쓰러뜨린 다윗입니다. 한 번의 싸움으로 사울과 요나단이 수없는 전투를 통해서 이뤄낸 명성을 단박에 엎어버렸습니다. 아버지 사울이 주목하고 죽이려는 시도가 여러 번 이었을만큼 그는 거대한 도전이었고 부담스러운 존재였던 것입니다. 아마 처음 다윗이 요나단 앞에 서게 되었을 때 수많은 병사들이 숨을 죽이고 이 두 영웅의 만남을 지켜보았을 것입니다. 나이로나, 지위로나, 혈통으로나 가까이 범접할 수 없는 요나단은 이 다윗의 승리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 궁금해하며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지켜보던 모든 사람이 모두다 놀랄만한 일이 벌어집니다. 대개는 그 어린 싹을 철저하게 짓밟아두거나, 실력의 차이나 힘의 차이, 신분의 차이를 확연하게 깨닫게 해주고, 언감생심 기대나 욕심을 품지 못하도록 단단히 단도리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요나단은 전혀 반대였습니다. 오늘 다윗을 향해 아주 견고한 콩깍지가 씌워졌던 것입니다. 1절 다시 한번 볼까요?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기를 마치매 요나단의 마음이 다윗의 마음과 하나가 되어 요나단이 그를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니라”
여러분 여기에서 말하는 ‘하나가 되었다’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카솨르’는 튼튼한 끈으로 동여매 풀어지지 않는 것을 뜻합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서로 알고 지내던 사이인 것처럼, 언젠가 이런 일이 있었던 것 같은 데쟈뷰같은 느낌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믿음의 용사가 또 다른 믿음의 용사를 만났을 때 느끼는 반가움, 동지의식, 뿌듯함과 기쁨이 있었던 것입니다. 모든 것을 내 주어도 아깝지 않은 만남, 그래서 요나단은 그 자리에서 언약을 맺습니다.
“요나단은 다윗을 자기 생명 같이 사랑하여 더불어 언약을 맺었으며”(삼상18:3)
구약성경에서 “베리트”, 즉 언약이라는 말의 원뜻은 “자르다(cut)"인데, 언약 당사자들이 쪼개진 짐승 사이를 지나감으로써 언약 파기시 이렇게 죽음을 면치 못한다고 서로 확인하는 것에서 유래된 단어입니다. 즉 이 언약, 베리트는 생명을 담보로 하나님 앞에서 행하는 엄숙한 의식이었던 것입니다. 삼국지에 나오는 도원결의 술먹고 같이 죽자고 한 것에 비할 수 없는, 그리고 결국은 그렇게 지켜지지도 않았던 결의가 아닌,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가장 거룩하고 뜨거운 약속이었던 것입니다. 이 언약을 깨면 하나님이 그 몸을 나누시리라는 그 심판과 형벌을 각오하는 것이었습니다. 처음 본 사람하고 하는 약속치고는 참으로 엄청난, 요즘말로는 어마무시한 약속을 오늘 다윗과 요나단이 맺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요나단은 그 언약의 증표로 자기가 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 다윗에게 주고 군복과 칼과 활, 띠까지 벗어줍니다. 읽어볼까요?
“요나단이 자기가 입었던 겉옷을 벗어 다윗에게 주었고 자기의 군복과 칼과 활과 띠도 그리하였더라”(삼상18:4)
무슨 뜻인가요? 좋아서 주고 싶어서 주는 정도가 아닙니다. 겉옷은 왕자의 신분을 상징하는 옷입니다. “이 사람은 나 요나단, 황태자와 진배없다”는 선언입니다. 자신과 동격의 신분, 아니 그 이상도 될 수 있음을 인정하는 파격적인 예우가 오늘 요나단으로부터 다윗에게로 베풀어졌던 것입니다. 나는 왕자의 옷을 벗고 저는 왕자의 옷을 입었으니, 어찌보면 이것은 이제 다윗의 신하가 되겠다는 무릎꿇음의 다른 표시인 것입니다. 군복과 칼과 활과 띠를 벗어주었다는 것은 황태자로서 그리고 왕 다음의 군대 수장으로서, 모든 군사들 앞에서 새로운 젊은 영웅의 위치를 견고히 세워준 것입니다. “이 사람은 전 군의 존경과 복종을 받을 영웅이요, 장수”라는 무언의 그러나 모두가 알 수 있는 그런 선언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두 번이나 반복합니다.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사랑하여” 그 자신의 생명처럼 사랑했다는 뜻으로 자기 희생을 전제로 한 이타적인 사랑입니다. 이 때부터 요나단은 실제로 다윗에게 목숨보다 더한 우정을 베풉니다. 철저하게 다윗편에 서서 자기 아버지의 반대편에서서 아버지한테 욕을 들어가며 다윗을 두둔하고 옹호하고 끝내 그 아버지의 손아귀에서 다윗을 안전하게 이스라엘 밖으로 탈출시켜내는 일을 감당했던 것이지요? “화살이 저 앞에 있지 아니하냐! 빨리 달음질 하라!” 그리고 훗날 다윗은 요나단의 전사 소식을 듣고 이때를 회상하며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내 형 요나단이여 내가 그대를 애통함은 그대는 내게 심히 아름다움이라 그대가 나를 사랑함이 기이하여 여인의 사랑보다 더하였도다”(삼하1:26)
여러분, 앞서 말씀 드렸듯, 오늘 요나단의 사랑이 얼마나 상식을 초월한 것인지를 우리는 알 수 있어야 합니다. 다윗의 등장은 아버지 사울과 자기 가문, 베냐민 지파의 몰락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시간이 가면서 다윗의 인기는 더해만 갑니다. 하나님의 영이 그 위에 머물러 백성들 사이에 신망이 더 높아집니다.
“다윗은 사울이 보내는 곳마다 가서 지혜롭게 행하매 사울이 그를 군대의 장으로 삼았더니 온 백성이 합당히 여겼고 사울의 신하들도 합당히 여겼더라”(삼상18:5)
그런 지경이니 아직 자신이 나이도 많고 조직도 있고 추종자들도 많을 때 새파란 신참 다윗을 짓밟거나 강력한 견제시스템을 돌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나단은 아버지 사울과는 달리 젊은 영웅 다윗을 질투하거나 견제하기를 깨끗이 포기하고, 그를 사랑하고 오히려 존경하기로 결심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요나단의 이런 모습을 이 나라에서, 특별히 정계와 재계에서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리고 모든 직장에서 또한 학계와 교계에서도 볼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더욱 이 나라를 위해 기도해야할 일입니다..
사랑하는 하일교회 성도님들, 오늘 요나단의 모습에서 저는 진정한 자유인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자기 개인의 욕심이나 야망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 진정으로 옳고 거룩하고 탁월한 것이라면, 특별히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면, 모든 인간적인 생각을 버리고 축복하고 인정하고 세워주고 사랑할 수 있는 마음, 여러분 이것이 바로 오늘 요나단을 통해 사울과 비교하며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우리가 소유하기를 바라시는 마음이요, 태도인 것입니다. 시기하고 미워하고 질투하고 헐뜯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마음을 소유하게 될 때, 우리는 상대방이 잘되는 것에 배아픈, 사촌이 땅을 사도 배아픈 그런 사람이 아니라, 내 일처럼 축복하고 함께 기뻐할 수 있는 사람, 영원한 우정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나보다 나은 상대방을, 그리고 나보다 못한 상대방도 사랑하고 존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는 이 마음이 있으십니까? 그리고 이렇게 사랑하며 교제하고 계십니까? 이런 좋은 벗들을 소유하고 계십니까?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해서, 아무런 친구도 없이 외롭게 홀로 무주공산을 지키고 살아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더 따뜻하고 깊이 있는 우정을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있어야 합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아무리 대단한 인물이요, 하나님이 지키시는 자라고 해도, 하나님께서 오늘 요나단이라고 하는 좋은 벗을 그 곁에 두어 돕지 않으셨다면, 벼랑 끝에선 다윗의 그 험난한 인생의 순간들을 무사히 넘기기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시대가 안타까운 것은 참으로 탁월하고 유능한 젊은 이들이 야심을 위해서, 일에 바빠서, 소중한 우정을 맺질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일촉즉발의 전쟁터에서 목숨걸고 나아가는 길에 내 등뒤를 맡길 수 있는 동료가 없는 것입니다. 모두가 적이거나 이용해야할 대상일 뿐인 것이지요. 이런 우정은 하루아침에 생겨나지 않습니다. 곤드레가 되도록 술먹고 죽어야 만들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시간과 정성을 들여 하나님 앞에서 말씀 안에서 기도하며 오늘도 거대한 현실 속에 용기있게 뛰어 들어가 싸우는 중에, 목숨을 건 훈련과 실전의 경험들 속에서 하나하나 만나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소위 잘나간다는 사람들의 고민 중 가장 많은 것이 무엇입니까? “진정으로 내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가 없다”는 것입니다. 솔로몬 역시 1000명의 후궁 중에 마음을 둘 여인이 없었습니다. 그저 저 아가서에 나오는 얼굴빛이 검은 여인 하나만 오늘 솔로몬이 마음을 나눌 수 있고 그리워했던 진정으로 사랑했던 여인이었던 것이지요? 군중 속에 고독, 그 매일 매일 벌어지는 자연산과 양식이 어우러진 육해공의 화려한 잔치와 연회 속에서도 솔로몬은 늘 외로웠던 것입니다. 무수한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고 지혜를 나누고 칭찬을 받지만 조금도 그 공허를 채울 수 없었습니다. 다윗과 솔로몬의 차이가 여기에도 있는 것이지요? 그 지혜로운 왕, 그 마음을 다 듣고 헤아릴 수 있는 탁월한 왕 솔로몬은 친구가 없었습니다. 목숨을 나눌 수 있는 친구 한 사람이 없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오늘날 교회가 마음을 터놓을 수 없는 곳이라는 글을 읽었습니다. 가장 근본적인 성담론을 금기시하고 성에 관한 이야기는 혼전순결 뿐이고, 수련회에서 하는 회개기도는 야한 동영상을 보았다고, 못 참고 자위했다고 용서해달라고 하는 것들이 대부분이라고, 너 그거 죄다! 회개해라!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다! 말 꺼내기가 무섭게 죄인으로 몰아세우고 색안경을 있는 대로 끼고 바라보는, 그래서 두 번 다시 고개들고 찾아올 수 없는 곳이 되어버린 교회는, 이미 참새가 집을 짓고 제비가 새끼둘 보금자리가 되지 못하고 있다는 글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외국인 노동자는 어디가서 이야기를 해야하고, 저 성 소수자, 동성애자들은 어디가서 이야기를 해야하고, 알콜 중독자는 어디가서 이야기를 해야하냐고, 남자친구와 잠을 자게 되어 하루 하루가 무서운 여고생은 어디서 이야기를 해야하고, 죽을만큼 인생이 고통스러운 사람들은 어디서 이야기를 해야하고, 저 세월호 자식들을 잃은 부모들은 어디가서 이야기를 해야하냐고 말입니다.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이셨는데, 그들과 먹고, 그들과 웃고, 그들과 늘 함께 지내셨는데, 우리는 그 죄인들이 이 땅에 발도 붙여서는 안된다고 너희는 입다물고 숨어서 조용히 지내라고 윽박지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도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주셨음을 감사함으로 받고 고백하는 사람들인데, 우리는 그렇게 죄인으로 지옥의 자식들로 몰아세워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오늘까지도 교회를 등지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선과 악, 의와 죄를 이야기 하기 전에 함께 부둥켜 안고 치료부터하고 위로와 진정부터 할 수 있는 사람들이어야 할텐데, 일단 살려 놓고 따져야 할텐데,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 분을 닮아야 할텐데, 아직도 죄인인데 위로와 회복을 명령하신 하나님을 닮아야 할텐데, 아브라함 이후로 4000년이 넘도록 참고 계신 그분처럼 우리도 오늘 오래 참고 기다리고 인내해야할텐데, 오늘도 도끼를 치워주시는 그분을 닮아야할텐데...
우리는 어느새 저 율법교사들, 바리새인들처럼 종교불랑배가 되어있는 것입니다. 저 양날 선, 날카로운 말씀을 마구잡이로 들이대며, 가뜩이나 상채기나 고통스러운 이들을 죄인으로 피투성이를 만들어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도 아무런 친구가 없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지요? 내 자식도 나에게 고민을 이야기하지 않고 숨기고 있는 것입니다. 곪아터져서 해결할 수 없어 드러나야만 알게 되는, 그 때까지는 죽어도 숨겨야만 하고 말해서는 안되는 세상, 가만히 있어야 중간은 간다고 말하는 세상을 도대체 누가 만든 것이냐는 것입니다. 교회가 문닫고 교회가 차디차고 교회가 침묵을 강요해온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의 이웃들은 아무도 내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없는, 너무나도 외롭고 힘든 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 불빛이 이 동네에만도 다섯 개 여섯 개가 되어 가는데 말입니다. 편의점보다 교회가 더 많다고 하는 이 시대 사람들의 심령은 더 죽어만 가고 있는 것입니다. 죄인들의 교회가 언제부터 그렇게 의인들의 교회가 되어서 문턱이 높아져버린 것입니까? 낮은 곳에 임하시는 주님을 우리는 얼른 뒤쫓아야 합니다. 산위에서 산 아래로 내려가시는 주님을 얼른 따라내려가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은 아니신가요? 말 못한 이야기들이 너무 많아서 가슴이 너무 무거운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교회가 들어주어야지요? 목사가, 장로가, 권사가, 집사가 들어주어야지요? 들어만 주시면 됩니다. 듣는 것까지만 하시면 됩니다. 제가 비전스쿨에 가서 공부를 하는데 자꾸만 답을 자기가 주려고 하는 조장님을 만났습니다. 제가 견디다 못해 지난 주부터 조별 모임을 안하고 옵니다.
여러분, 답을 주려고 하면 안됩니다. 찾아가는 과정에 함께 해주시면 됩니다. 곁에서 응원해주시면 됩니다. 기도해주시면 됩니다. 답을 주는 사람? 어느 누가 무슨 답을 누구에게 어떻게 뭐라고 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 교만이 어디 있습니까? 답은 예수님께서 그에게 직접 주실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이제부터 답을 주려고 하는 부담감을 벗어버리시고 자유하시길 바랍니다. 우리의 할 일은 안아주는 것입니다. 얼마나 힘들고 얼마나 무섭고 얼마나 괴롭냐고 공감해주는 것입니다. 함께 울어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친구라고 부르셨습니다. 친구는 답을 말해주기 때문에 친구가 아닙니다. 친구는 내가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 함께 해주기 때문에 친구인 것입니다. 나를 믿고 기대하고 바라봐주기 때문에 친구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예수님께 아주 잘해서 친구라고 불러주셨을까요? 우리가 이뻐서 친구라고 저 하늘을 버리고 이곳까지 와주셨을까요? 우리 맘에 드는 사람만 친구, 우리 맘에 드는 사람만 이웃하라고 예수님은 단 한 번도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이방인들도 그렇게 하지 않냐며 반문하셨을 뿐입니다.
여러분, 이웃의 범주를 친구의 범주를 넓혀보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진정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교회, 진정으로 찾아와 속 깊은 이야기를 하며 울고 갈 수 있는 우리 성도님들이 다들 되시길, 함께 힘이 되고 위로가 되는 복된 신앙의 동료들이 다들 되시길 내 모든 것을 벗어주어도 하나도 아깝지 않는 그런 친구들이 우리 하일교회에서 생겨나게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천국은 겨자씨 한 알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크게 자라나서 새들이 깃드는 나무가 천국 입니다. 새들이 와서 무슨 이야기도 조잘조잘 할 수 있는 곳, 그 깃을 쉬고 새 힘을 얻어 날아갈 수 있는 곳, 참새도 보금자리를 얻고 제비도 새끼 둘 제집을 얻는 넉넉한 곳이어야 합니다. 매몰차게 죄인으로 몰아세워 내 쫓는 곳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이 어떠한지, 오늘 우리 몸이 교회라고 성전이라고 하시는데 따뜻하고 넉넉한 품이 오늘 저와 여러분, 하일교회의 모습이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