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다리는 마음’의 작가 김민부 시조론 초등국어교육전공 20057139 여유경 Ⅰ. 들어가며 김민부의 시를 처음 읽은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더 정확하게는 그의 시를 처음 읽은 것이 아니라, ‘그의 유고 시집을 처음 샀던 것은’이라는 표현이 더 걸맞겠지만. 고등학교 문학회에서 글줄이나 읽고 시를 끄적 거리기를 좋아하던 나는 ‘기다리는 마음’을 쓴 천재 시인 김민부의 유고 시집이 발간되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서점으로 달려가 그의 시집을 샀었다. 사실 그때는 그가 썼던 것이 시였는지, 시조였는지 정확하게 판단하지 못 하였다. 지금 생각에는 그가 열일곱에 썼다는 시조 ‘균열’이 너무 좋아서 외도록 계속 시를 읽고 제목도 비슷하게 나도 습작을 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도 내가 ‘시’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그 글들이 과연 시라 할 수 있을지, 내가 어떤 낱말들로 잔치를 벌였었는지 정확히 기억하지 못한다. 아니, 기억하지 못한다는 말 보다는 기억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 더 옳을 것 같다. 시가 아닌 것을, 시가 되지 못할 이야기들을 시라고 나는 굳게 믿고 있었을 뿐이니 말이다. 국어 전공하는 사람치고 왕년에 문학소년, 문학소녀가 아니었던 사람이 누가 있으랴마는 사람의 생각은 또 내 기억의 한계를 벗어나기 어려운 까닭에 ‘현대 시조 시인’에 대한 감상평을 적으라 하신 교수님의 과제에 갑자기 고등학교 때 읽었던 그 시조 한 수가 먼저 생각이 나서 김민부의 시조를 약력과 함께 개괄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Ⅱ. 시인 김민부의 약력 김민부는 1941년 3월14일 부산 수정동에서 부친 김상필과 모친 신정순 씨 사이의 6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산 성남초등학교를 거쳐 고교 2학년 때인 1956년 8월 첫 시집 『항아리』를 내었다. 본명은 "병석"(炳錫)인데 일제시대 호적 잘못으로 중학시절부터 "민부(敏夫)"라고 불렀다. 스스로 "아이노꼬"(혼혈아)라고 할 정도로 깊숙한 눈에 저음의 목소리, 이국적인 마스크를 한 이 소년은 실은 코흘리개로 누런 코를 닦지 않고 윗입술로 받치고 다녔다고 그의 옛친구 조용우(전 국민일보 회장)씨가 회고한 적이 있다. 그는 영남의 명문 부산고교 2년 재학시절에 동아일보 신춘문예(1957년)에 시조「석류」로 입선, 3학년 때 한국일보 신춘문예(1958년)에 시조「균열」로 2년 연속 당선되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던 천재다. 그는 고교시절 부산시내에서 한다하는 문학지망생들을 모아 <죽순> 동인(뒤에 <난> 동인으로 개명)을 만들어 그 대장노릇을 하고 다녔다. 그는 고교시절 부산·경남은 물론 전국의 문예콩쿨을 휩쓸어 이 땅에 불란서의 천재시인 랭보 같은 존재가 되었다. 고교생이 일반 무대에서 신춘문예로 당선된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다. 그는 부산고 역대 문예부의 전설의 주인공이 되어 있었다. 김민부는 문학뿐 아니라 실제로 학과공부도 잘 하였다. 그는 초등학교를 두 번이나 월반하고 월반 당시 시기를 놓쳐 구구단도 잘 못 외우고 수업시간에 필기도 잘 하지 않았음에도 공동출제 중학교 시험에서 부산시내 최고점수를 받을 만큼 천재였다. 고교에서는 문학에 빠져 제대로 공부를 하지 않았음에도 제 천재성을 믿고 서울상대를 지망하였으나 낙방하자 서정주, 박목월이 있는 서라벌예대에 특기생으로 들어갔다. 서울의 서라벌 예대와 동국대에서 유학한 뒤 21세 때부터 부산에서, 그 다음엔 서울에서 방송작가 생활을 한다. 부산에서 초기 "자갈치 아지매" 원고를 쓰는 등 탁월한 문재로 방송가에서 매일 2백장의 원고량을 메우는 인기 작가였다. 하지만 그건 그에게 "이탈"이었다. 친우들에게 그는 "진실로 참 글을 쓰고 싶다. 단 한 편만이라도"라고 고백했다고 한다. 그러던 그는 72년이 기울던 10월의 어느 날,연말특집 방송원고 3천장의 부담감에 예민해 있던 그는 집안일로 불편한 심기가 돼 석유난로를 발로 찼다고 한다. 그의 집은 불탔고, 그때 입은 화상으로 그는 이틀 뒤 숨을 거뒀다. 많은 친우들이 "천재 시인의 때 이른 죽음"이라고 표현하는 31세의 애석하고 아까운 요절이었다."둔중한 몸피, 소탈한 외모와는 달리 정결한 감성을 지닌 시인"(시인 박응석의 말)은 이 땅에 잠시 머문 동안 고작 60편의 시만 남기고 떠났다. Ⅲ. 김민부의 시 세계 나는 때때로 죽음과 조우(遭遇)한다 조락(凋落)한 가랑잎 여자의 손톱에 빛나는 햇살 찻집의 조롱(鳥籠) 속에 갇혀 있는 새의 눈망울 그 눈망울 속에 얽혀 있는 가느디 가는 핏발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의 창문에 퍼덕이는 빨래…… 죽음은 그렇게 내게로 온다 어떤 날은 숨 쉴 때마다 괴로웠다 죽음은 내 영혼(靈魂)에 때를 입히고 간다 그래서 내 영혼(靈魂)은 늘 정결(淨潔)하지 않다 (序詩 全文) 위의 서시는 그가 스물일곱이 되었던 1968에 낸 ‘나부와 새’라는 시집의 序다. 첫 시집 항아리를 통해 전통 서정을 노래하던 그는 이제 번뜩이는 재능을 모던한 필치로 변모시켜 존재와 심연에 육박 하면서, 어둠과 죽음을 남김없이 읊는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고대했던 윤동주의 서시에 그의 시를 관통하는 ‘부끄러움의 미학’이 담겨져 있다면 김민부의 서시에는 검은 그림자 속에서 발버둥 치며 순수한 영혼을 꿈꾸었던 시인의 마음이 여과 없이 담겨 있다. 마치 시인 기형도가 스스로를 사랑하기 위해 애썼으나 ‘난 단 한 번도 내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하고 고백할 수밖에 없도록, 철저히 외롭고 소외된 자신의 페르소나를 시 속에 감추어 두었던 것처럼. 그가 15살에 낸 시집 『항아리』에서 다음과 같이 자신이 꿈꾸는 시 세계를 표현하고 있다. 산문적인 요소와 감각적인 경험세계를 배제함으로써 순백한 경지에서 감동의 미를 추구하는 것이 나의 시정신이기도 했다. 발레리가 감동을 주로 하던 순수시론을 쓰고 후기에 이르러 그 자신이 순수의 실제성을 부정한 것은 순수시의 세계를 현대적 위치에서 본질적인 파악을 기도한 것이 아니겠는가. 이처럼 그는 순수 서정을 자기 시의 출발점으로 하고 있다. 거기서 '내면적인 고전선율'(즉 시조)을 추구하고 그 궁극의 심상을 찾아 방황하면서 차츰 탐미주의적 감각주의와 모더니즘 경향으로 이행한다. 그는 시조 5편, 자유시 58편 총 63편의 시를 남겼을 뿐인데 이 시들은 대부분 허무적이고 부정적이고 하강적, 여성적 이미지와 감각적이다 못해 관능적인 시어들로 충일해 있다. 그의 시에는 "죽음" 또는 그와 유사한 시어(빈사, 역살, 꽃상여, 저승, 무덤 등)가 유달리 많이 나오고, "육체"와 "영혼", "황혼", "일모", "노을" 등도 자주 나온다. "달빛"과 "하수구"도 단골인데 "새"가 유일한 그의 긍정이요 희망이다. 고교시절에 이미 시 쓰기가 끝나버린 이 시인에게는 인간의 유위성이 한낱 죽음으로 내닫는 허무로밖에 보이지 않았는지 모른다. 김준오 교수는 그의 시를 평해 단형 소품에 뛰어나다고 하면서, "언어절약의 짧은 호흡은 원론적으로 말해서 사상과 감정의 절제에 등가가 되어 시의 어조를 넋두리의 차원으로 전락시키는 법이 없다."고 한다. 그의 시는 형식상 길든 짧든 대개 시조의 음보에 편승하거나 시조가락의 옷을 입고 있다. 그의 (자유)시는 시조로 분류해 볼 수 있는 부분이 많다. 그의 시는 두 유형으로 나눠볼 수 있다. 초기시는 전통적인 가락을 바탕으로 한 자연시가 많은데 이는 50년대 시류를 탄 것이라 할 수 있다. 시적 대상도 산양, 산그늘, 들꽃, 산, 바다, 피리, 성지 등이며 시조「균열」,「석류」등도 이때 씌어졌다. 시조가락을 탄 시상의 율동과 절제와 압축에서 뿜어져 나오는 시적 힘은 허무적이고 영탄적인 내용까지 웅혼하게 만든다. 그래서 전편(全篇)에 외재율이 충만하여 장시를 읊는데도 무리가 없고 단시에서는 더욱 빼어난 효과를 거두고 있다. 가요시「기다리는 마음」(전통3음보)도 크게 이 부류에 속한다고 하겠다. 신라 눌지왕 때 신라는 백제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고구려와 일본에 왕자를 파견해 군사 원조를 요청했다. 일본과 고구려는 이들을 인질로 강금해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했다. 이때 충신 박제상은 볼모로 잡혀있는 왕자를 구하러 일본에 건너갔다. 그는 신라에서 도망쳐 왔다고 속여 일본 왕의 신임을 얻은 뒤 왕자를 탈출시킨다. 그러나 뒤에 이 사실이 탄로나 갖은 고문을 당하게 된다. 그때 일본왕은 박제상의 고국을 향한 충정에 탄복해 일본에 귀화할 것을 권유한다. 그러나 그는 ‘차라리 신라의 개나 돼지의 신하가 될지언정 일본의 신하는 돼지 않겠다.’는 단호한 자세를 보였다. 결국 그는 발바닥 껍질이 벗겨진 채 화형을 당해 죽고 만다. 한편 신라에 남겨진 그의 아내는 남편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다가 지쳐 망부석이 되고 만다. 이것이 바로 김민부의 시 ‘기다리는 마음’의 모티브가 된 망부석 설화다. 일출봉에 해 뜨거든 날 불러주오 월출봉에 달 뜨거든 날 불러주오 기다려도 기다려도 님 오지 않고 빨래소리 물레소리에 눈물 흘렸네 봉덕사에 종 울리면 날 불러주오 저 바다에 바람불면 날 불러주오 기다려도 기다려도 님 오지 않고 파도소리 물새소리에 눈물 흘렸네 장일남이 곡을 붙여 가곡으로 많이 불린 이 노래는 고등학교 음악 교과서에 불릴 만큼 유명하다. 지금도 부산 송도 암남공원 가는 길목, 푸른 비단결의 바다를 사이에 두고서 영도 봉래산을 비켜나며 해가 뜨고 달이 뜨는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는 망부석 같은 시비가 있다. 사람이 외로워도 그냥 저냥 사는 것은 기다림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기다림을 이토록 쉬운 말로, 이토록 절절하게 풀어낸 시가 또 있을까. 그 기다림은 외로운 산모퉁이에 홀로 서 있는 망부석의 슬픈 사연이라고 해도 좋고, 이산가족의 아픈 애환이라고 해도 좋다. 기다림이 소중한 것은 기다림이야말로 '없는 자'나 '잃어버린 자'에게 유일한 희망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는 그리움과 기다림에 지친 사람에게 위안을 주는 시다. 시 형식으로 볼 때 이 시는 자유시도 정형시도 아니다. 이 시의 각 행을 보면 8·5조 가락인데 4행으로 된 2연의 이 시는 각 연의 3행까지 한 자의 예외도 없이 8·5조가 반복되다가 마지막 행에 가서 9·5조로 변조되어 있다. 8·5조는 크게 7·5조로 볼 수 있기 때문에 이 시도 7·5의 한 조류로 볼 수 있다. 7·5조는 흔히들 왜색조라고 하나 그 7은 3·4조, 8은 4·4조가 합쳐진 것으로 우리의 3·4·5조가 일본으로 건너간 것이 7·5조로 둔갑하여 역수입된 것이다. 그런데 3·4·5조는 원래부터 우리 시조의 가락이다. 이 시를 잘 보면 시조의 율조와 형식을 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각 연의 1, 2행은 시조의 초장, - 2행은 1행의 반복으로 봄 - 3행은 중장, 4행은 시조의 종장으로 대치해 볼 수 있다. 물론 자수는 틀리지만 각행은 전통시조의 4음보로 읽히고 시상의 진행과 의미의 확장, 장구법(章句法)이 시조를 닮아 있다. 특히 3행까지 똑같은 보폭으로 반복되던 리듬이 4행 둘째 구 ‘물레 소리에’ 및 ‘물새소리에’ 에 와서 변조된다. 이 변조가 시조의 반전법(反轉法)을 그대로 차용하고 있는 것같다. 그러니 이 시는 알게 모르게 시조의 율격과 가락이 바탕이 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나는 사실 유명한 애창곡 ‘기다리는 마음’이라는 시보다는 그의 시조 ‘균열’이 가장 마음에 든다. 그가 쓴 시 중에 同名異作도 있다. 『裸婦와 새』라는 그의 제2 시집 속에 나오는 또 하나의 「균열」이라는 자유시가 그것이다. 제목이 그러하듯 주제와 시상도 크게 다르지는 않으나 후자가 조금 더 관능적이고 시의 품위가 전작만 못한 듯 느껴진다. 균열 달이 오르면 배가 곯아 배 곯은 바위는 말이 없어 할일 없이 꽃 같은 거 처녀 같은 거나 남몰래 제 어깨에다 새기고들 있었다. 징역사는 사람들의 눈 먼 사투리는 밤의 소용돌이 속에 파묻힌 푸른 달빛 없는 것, 그 어둠 밑에서 흘러가는 물소리 바람불어……,아무렇게나 그려진 그것의 의미는 저승인가 깊고 깊은 바위 속 울음인가 더구나 내 죽은 후에 세상에 남겨질 말씀쯤인가
그저 외우려고 하지 않아도 나지막히 이 시조를 읊조리고 있노라면 그저 외워지는 시다. 남의 글에 대한 평에 인색한 미당 서정주 시인마저도 "그 시 참 좋다!"고 흡족해했던 시다. 김민부의 나이 17세 때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었던 바로 그 작품이기도 하다. 나는 이 시를 읽노라면 등골이 서늘해지는 오싹한 느낌을 받는다. ‘언어를 부리는 재주란 바로 이런 것이구나!’ 하는 옅은 질투심마저 느껴진다. 이 시는 우선 읽으면 뭔가 색다르고 좋긴 좋은 것 같은데, 얼른 이해되지 않는다. 그래서 인터넷을 검색해보고 시조 평론을 들추어봐도 누구든 아직 이 시에 대해 명확히 해설한 글을 보지 못했다. 그의 시가 순수시의 서정성과 모더니즘적 현상주의의 양면성을 가지고 있음은 대충 파악된 통론이나 아직 김민부를 정확히 심층 있게 분석한 평론은 나와 있지 않은 것 또한 사실이다. 대부분의 요절한 시인에게 붙여진 찬사가 그러하듯 그의 드라마틱한 삶과 죽음에 대한 추측과 억측이 그의 평론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의 시는 읽히기는 편안하게 읽히지만 의미를 해석해보고자 하면 난해함에 선뜻 의미가 다가오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러기에 그의 전기적 삶에서 그 단서를 찾아보려는 노력도 이해가 되지 않는 대목은 아니다. 김준오(부산대학원장·문학평론가) 교수는 "그의 경우 시와 삶은 엄격히 분리되며 그의 시 세계는 사회 역사적 현실이 배제된 순수한 서정의 세계일 수밖에 없다"고 하였지만 시인 박구하의 해석은 이와 조금 다르다. '균열'은 바위와 관련이 있고 그 바위는 금이 간 바위다. 무구한 바위는 세상의 때(垢)에 찌들은 아픔을 제 몸에다 새기며 본래의 형상이 찌들어도 수용하고 감내하면서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이다. 김민부는 자기가 처한 현실을 떠난 순수서정을 모색했다고 하지만 무릇 작품이란 그 제작연대와 무관치 않다며 그의 시를 사회적 상황 속에서 해석한다. ‘배를 곯는다’는 것은 단순히 "배가 고픈" 것과 다르다. 배고픔이 일상처럼 단련되어 있어 배가 고파도 배고픈 줄 모르는 절대 기아의 경지를 말함이다. 이 작품이 쓰여 질 당시엔 너나없이 배를 곯았던 어려운 시기였다. 전쟁과 기아 속에서 허덕이는 조국, 이 조국은 순진한 처녀로 환치되고 바위로 육화되어 동족상잔의 아픔을 남몰래 새기고들 있었다. 제 몸에 상처를 내는 일 말고는 아무 할 일 없는 암담한 현실에 시인은 전율하고 있는 것이다. 이데올로기로 갈라선 한쪽의 승리는 달리 보면 다른 쪽의 패배가 아니던가. 열락과 슬픔을 동시에 가져다주는 현실은 시인에게 이율배반의 자위행위로 인식되고 있다. 시조「균열」첫 수에는 '바위'와 '달'과 '처녀'가 등장한다. 달빛은 배곯은 처녀의 내밀한 꽃내 위에서 착종(錯綜)한다. 열강의 이해가 상충하는 암담한 조국의 현실에서 따라가고 싶어도 갈 수 없고 남고 싶어도 남을 수 없는 절박한 상황, 이 상황에서는 떠나는 자는 목숨 걸고 떠나고 잔류자는 남아서 할 일없이 제 어깨에 그 아픔을 새길 수밖에 없다. 그렇게 새긴 아픔은 주름처럼 금이 가고 그 금에는 세월 따라 때(垢)가 낀다. 이 "때"는 김민부 시에서는 대단히 중요한 개념이 된다. 그의 시작(詩作)의 전 과정은 어쩌면 이 "때"를 세척하기 위해 하는 "빨래" 작업에 연결되어 있는지 모른다. 둘째 수는 이미 당도한 죽음의 세계이다. 서로 다른 고향에서 징역처럼 끌려온 병사들은 이유도 없이 서로가 서로를 죽여야 하는 절체절명에 빠진다.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오매"하고 죽는 놈이나 "엄마"하고 죽는 놈이나 사투리는 사투리지만 그것은 일본말도 중국말도 아닌 분명 우리말이라는 것이 시인을 절망케 하는 것이다. 동족끼리 알아듣지만 알아들을 수 없기에 '눈 먼 사투리'가 되는 것이다. 이 슬픈 진실은 전선의 밤, 그 소용돌이 속 푸른 달빛에 파묻히고 마는 것이다. 그리하여 죽긴 죽되 그냥 죽지 못하고 아무 것도 없는 어둠 밑에서 흘러가는 물소리로 남는다. 이 죽음은 셋째 수에 가서 비로소 의미가 부여된다. 그녀가 기다리는 오막살이로 죽어서도 시적 자아는 다리를 절룩이며 가고 또 가는 것이다. '전환하는 하늘', '변조하는 하늘' 아래에서 언제까지나 어디까지나 가야 한다. 왜? 그것은 조국이라는 바위에 이름 없는 금 하나 새기기 위해서다. 그래서 시인은 죽어서도 그냥 죽지 못한다. 이 산하 어디에도 널려있는 바위들에 새겨진 저 무수한 균열들은 바로 그러한 눈먼 죽음의 서러운 자기 확인에 다름 아니다. 그러나 확신은 못한다. 그래서 '내 죽은 후에 남겨질 말씀쯤인가' 하고 시인은 반문하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지금 김민부 시인은 우리 산하 어디에선가 눈 부릅뜨고 배부른 우리, 남북대립에서 남남갈등으로 끝도 없이 이어지는 또 다른 동족상잔을 지켜보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내 생각으로는 박구하의 평론은 지나치게 그의 시를 사회적 의미로 확대 해석한 경향이 없지 않은 것 같다. 왜냐하면 그가 시작에 몰두한 십대 후반부터 이십대까지의 나이는 시적 자아인 주체와 시적 대상인 객체를 분리할 만큼 스스로를 객관화하며 詩作을 할 상황이 못 되었을 것 같다는 것이 첫 번째 이유요, 둘째는 그의 시가 대부분 어디에 모티브를 두었던 철저히 개인적이며 내면의 자아에 몰두했던 흔적이 여럿보이는 까닭이다. 그가 남긴 또 한편의 자유시 ‘균열’은 다음과 같다. 균열 할 일 없는 바위는/ 제 몸에다 새기고 있었다 몇 마리의 새가 날아간 / 슬픈 궤적(軌跡)과 바람에 헝클어진 꽃의 형상(刑賞)…… 무구(無垢)한/ 처녀의 아랫도리/ 살과 살이 눌러 뒤틀리는 그 강인(强靭)한 선(線)을…… 어깨짬에/ 허리, 뱃대기에/ 지천(至賤)으로 그려놓고 달밤이면/ 제 희열(喜悅)에 전율(戰慄)하는 저 암담한 「오나니」…… 첫 번째 시조와 제목도 똑같고 시상도 별로 다른 것 같지 않다. 다만 쓴 연대가 다르고 후자가 좀 더 관능적이다. 그러나 그 작품 완성도를 놓고 볼 때 자유시의「균열」은 시조의 그것보다 후퇴한 느낌이 있다. 사실 뒤에 김민부는 좀 더 다듬지 못하고 성급히 이 제2시집을 낸 것을 후회하고 모두 회수하였다고 한다. 미처 회수치 못한 시집 몇 권이 지금까지 시정에 돌아다닐 뿐인데 끝내 그는 새 시집으로 대치하지 못하고 영영 가버린 것이 아쉽다. 나는 김민부의 후기시보다 고등학교 때 썼던 초기의 작품들이 더 느낌이 좋다. 왼편의 시 ‘석류’는 동아일보 신춘문예 가작(1957년)으로 장일남이 곡을 붙인 시다. 흔히 말하는 수줍음과 그리움의 표상인 석류에 대한 보편적 정서를 고교생답게 소박하게 드러낸 작품이다. 앵도라진’은 도대체 어떤 입술 모양일까? 사전에는 ‘노여워서 토라지다’라는 뜻의 ‘앵돌아지다’가 있다. 그러나 ‘앵도라진 입술’ 하면 조금은 엉뚱하게도 ‘앵두’(본래 ‘앵도(櫻桃)’에서 왔다)의 이미지로 다가온다. 아마도 그 붉은색 하며 동그랗고도 작다란데다가 오므린 듯한 과실의 생김새가 마치 토라진 모습으로 비치는 연유에 있을 것이다.1) 이 작품은 이보다 10년 전에 발표된 조운의 시조 「석류」 "보소라 임아 보소라 빠개 젖힌 이 가슴"이라는 이미지를 많이 닮아 있다. 조운의 시조 ‘석류’는 “보소라 임아 보소라 빠개 젖힌 이 가슴”이라 하며 종장을 마물렀는데 이 시인 역시 “이제야 가슴 뻐개고 나를 보라 하더라.” 하며 종장을 매만진다. 아마도 고교생이었던 시인이 습작 시절, 조운의 시구로 시작 연습을 하였지 싶다. 그래도 비슷한 시구를 다듬은 시인의 언어적 감각은 조운과 김민부가 사뭇 다르다. 글쎄, 어느 쪽이 더 시의 맛이 나는지는 독자의 기호에 따라 다르겠지만, ‘불타오르는 정열’과 ‘남몰래 숨겨온 말 못할 그리움’을 숨기지 못하고 드러내고야 마는 열일곱 천재 소년의 언어를 부리는 鬼才가 아직 덜 익은 과일처럼 풋풋하나 깊고 그윽한 향을 품는 경지에까지 이르지 못하였다면 절제와 균형이 느껴지는 조운의 시조는 과연 가람 선생과 쌍벽을 이룰만하지 않은가하고 조심스레 입을 닫는다. 항아리 1 항아리는 질항아리는 이울리는 배꽃을 이슬 젖은 가슴에 안겨두고 구름을 이고 꽃별을 마시며 눈물 젖은 자욱을 이어간 선(線)들의 어울림 바람에 작은 나래를 숨긴 그 속으로 흐르는 그윽한 소리 소리 초록 배암의 상처 처량한 고요로 굳은 가슴에 안겨두고
그러나 석류와 같은 시기에 쓴 ‘항아리 1’이란 시는 고교생의 의식수준을 이미 넘어서 있다. 더 이상 석류를 보며 그리움에 애를 태우는 소년이 아니다. 전쟁과 가난으로 허덕이는 가망 없는 민족이 그의 망막에 들어온 것이다. 그러나 그에 대한 아픈 교감만 있지 그는 아직 상아탑 안에 있을 뿐이다. 아무 담을 것도 없는 서러운 '항아리'에 꽃이나 꽂고 지는 꽃을 날카롭게 바라보고 있을 뿐 아직은 그 의식이 허무에 가 닿지는 않고 있다. 시 전편에 아직 육탈치 못한 영혼의 울부짖음이 작품마다 치열하게 배어있다. 이에 비해 후기시는 철저히 인간적이다. 자기인식과 존재에 대한 의문과 고뇌로 가득한, 그래서 비교적 난해한 시편이 주류를 이룬다. 그가 처한 현실과 추구하는 이상의 괴리에 고뇌하고 그 고뇌는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시로 전이된다. 이제 항아리는 더 이상 무엇을 담거나 꽂아두는 용기가 아니다. 제 '떫은' 피를 받아 익히는 제단이 된다. 계절은 내가 가까이 하기엔 너무 멀리 있고 할일 없는 나는 '찻잔 속에 남은 죽음'이나 핥으며 술픈 '외도'나 한다. 이런 본의 아닌 쾌락주의는 「조춘」같은 극단의 탐미적인 시를 슬기도 한다. 눈만 뜨면 부딪치는 소외감과 무의미한 삶에 저항하는 길은 이렇게 처절할 수밖에 없었다. 김민부의 후기 시는 대체로 이렇게 암울한 빛깔의 존명시로 일관되어 있다. 어둠이 깊을수록 새벽이 가깝다고 했던가. '대단하지도 않은 물질주의가 사람들의 눈망울마다 토라홈처럼 번창하는 시대'(『나부와 새』후기 중에서)에서 그는 가을의 '슬픈 외도'를 통증으로 느끼면서 겨울 날 기러기 떼도 '꽃상여'에 실어 떠나보내고 흔들리는 '은빛도어의 손잡이'를 잡고 '가로등'에 불을 켠다. 젊은 날 어지간히 헤매던 정신적 편력도 이제 끝내고 싶다. "가을이 올 때마다 나는 내 목숨을 줄이더라도 몇 편의 시를 쓰고픈 충동에 몸을 떨었다." 라고 고백한다. 드디어 참 글을 쓰기 위해 '십리쯤 시오리쯤 밖에서' 새벽을 향한 어떤 기별을 받는다. ..... 이제 잊었지만은 요즈음도 네 기별을 듣긴 듣는다 이 가을/ 날 쳐죽일려고 마른 번개로/ 마른 번개로/ 치긴 치지만 십리쯤 시오리쯤 밖에서/ 헛치고 십리쯤 시오리쯤 밖에서/ 아드득 이를 가는 섬광으로만/ 섬광으로만/ 오는 기별을... (「기별」 후반부) 그러나 새로운 시의 세계로 나아가려고 다짐하는 단계에서 이 시인은 돌연한 죽음을 맞게 된다. 자기를 '쳐죽이려고' 달려온 '마른 번개'를 피하지 못하고 '십리쯤 시오리쯤' 밖에서 죽음을 맞은 것이다. 시인 특유의 감성으로 어떤 '기별'을 듣긴 들었는데 그 기별이 그의 문전에 당도하기도 전에 수취인이 수취불능을 자초한 것이다. '앞으로 더 많이 외롭고 더 많이 사랑하고 더 위대한 미아가 되리라' 다짐하던 그는 평생 서른 한 번째의 가을을 다 못 채우고 갔다. 찍다만 영화필름이라 할까. 다 못 돌린 영화랄까. 한 천재의 시극(詩劇)은 이렇게 허무하게 막을 내린 것이다. Ⅳ. 나오며 지금까지 살펴본 김민부 작품을 전반기, 후반기로 나누어서 살펴보았다. 그의 작품은 대체로 전통의 시조 율격에 바탕을 둔 시조 가락의 옷을 입은 것이 많고 시조로 보기 어려운 자유시의 경우도 넓은 의미에서 시조로 분류해 볼 수 있는 부분을 많이 가지고 있다. 고등학생 시절 이미 신춘문예에 당선되었던 작품들, 균열, 딸기 밭에서, 고사 등을 통해서 전통적 율격에 바탕을 둔 자연주의 작품을 많이 볼 수 있었고, 이는 당시 1950년대의 작품 경향에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었다. 이 당시 작품의 특징은 시조 가락을 탄 시상의 율동과 절제와 압축에서 뿜어져 나오는 시적인 힘과 허무적인 내용의 어우러짐이 작품의 형식과 내용을 구성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후기로 갈수록 순수 문학 작품으로의 회귀를 꿈꾸었지만 끝내는 개인적, 혹은 사회적인 이유로 순수 문학보다는 방송극본이나 원고 등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야 했던 여타의 조건들이 내면의 허무함과 관능에의 지향으로 나타나 암울한 빛깔의 색채를 띠고 있음은 개인적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조금만 더 수정을 고치면 시적 완결성이 한층 높아질 작품들을 뒤로 하고 갑자기 세상을 떠야했던 시인의 개인사적 불행은 걸출한 시조 시인을 한 명 더 남기지 못한 우리 시조 문단사의 불행과 다름이 아니다. 소위 대가(大家)라 일컬어지는 작가들을 작품을 면면히 살펴보면 초기에 주로 번뜩이는 언재(言才)와 기지, 그리고 삶에의 도전 의식 등이 소름이 돋도록 드러나는 패기있는 작품을 선보이는 경우가 많지만 - 미당의 ‘자화상’이나 백석의 초기 詩作들- 또한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하게 되면 多作을 하게 됨에 따라 촌철살인의 생을 관통하는 관조적 지혜를 느끼도록 하는 작품도 많이 볼 수 있는데, 김민부의 작품은 이 긴 여정을 통과하지 못하고 조금 더 많은 작품을 볼 수 없다는 것이 참으로 안타까운 점이라 할 수 있다. 요절해서 천재가 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정말 천재라서 하늘이 그 재주를 탐하여 일찍 하늘나라로 가는 사람도 있다고 들었다. 김민부의 초기 시들을 보면 마냥 그가 요절했기에 ‘천재’라 불렸던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고, 또 이른바 ‘신춘용 작품’들이 명성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도 없지 않은데, 그가 열다섯을 남짓한 나이에 감히 신춘문예에 덜컥 당선된 그 작품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어린 나이에도 기성 시인 못지않은 문재를 타고난 것을 알 수 있었다. 사람의 미래는 정해진 것이 아니요, 생각하는 대로 흘러간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내 삶의 페이지는 대부분 검은 색이었다’고 고백한 기형도나 序詩에서부터 때때로 죽음과 조우한다고 고백했던 김민부, 그들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죽음으로 내몬 것은 아니었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