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잡기가 ____________!!
집이나 상가의 터를 잡을 때는 반드시 지형상의 기운을 고려해야 합니다.
특히 상가의 경우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유동인구가 얼마나 많으냐에 따른 소위 `목'만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학문적 으로도 생각 해봐야 할것입니다.
가령 능선에 심어 놓은 나무를 예를들어 볼까요 십중팔구는 인근의 평지보다 볼품이 없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집터를 잡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집에 우환이 겹칠 경우, 주위 사람들이 그 집은 "터가 드세서 그런다"는 말을 종종 하는데, 이는 일리가 있는 말이다.
물론 먼저 집히는 것이 수맥이기는 합니다만. 수맥의 영향력은 평지나 산꼭대기이거나 간에 별 차이가 없는 것이니까요.
그러나 터의 경사가 심하거나 능선에 자리잡고 있으면 더 좋지 않지요.
겨울의 삭풍마저도 제대로 막지 못하는 허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니까요
따라서 경사가 심한 곳이나 능선은 전망시설이나 공원 등의 용지로 활용하는 것이 바람직 할 것입니다. 본란에서는 주로 수맥과 관련된 터잡기를 살펴 보기로 하겠읍니다.
수맥과 양택은 상극 지하수를 개발하려면 수맥을 탐사하여 수맥이 이중, 삼중으로 겹치는 곳이 아주 적격일뿐더러 맞춤인 자리인 것이지요 .
각기 다른 수맥의 교차지점을 파 내려갈 경우 엄청난 양의 지하수를 머금은 수맥을 발견하리라는 것은 명약관화한 사실 이니까요.
그러나 만약 바로 이런 지점이 집자리, 그것도 잠을 자는 안방에 자리잡고 있다면 아연실색할 노릇일 것입니다. 집짓고 3년이라고나 할까요 이런곳에서 원기 약한 사람이 이사 가서 살 경우 그 결과는 엄청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사의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시름시름 앓아 눕거나, 급기야는 흉가(凶家)가 되기 십상이니까 말입니다.
유럽 에서는 이런 교차지점을 "암이 걸리는 집'이라고 규정한 예도 있으니까요. 아무튼 우리 인류문명을 태동시키고 만물의 근원인 물이 때로는 우리 인간을 궁지로 몰아 넣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은 아이러니컬 하기만도 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증상의 병은 아무리 신통한 의사라고 할지라도 신통한 처방전이 나오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할것입니다.
사실 수맥에서 기인된 질병들은 의사의 처방전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어떤 부위가 가시적으로 손상된 것도 아니기 때문에 수맥의 파괴력에서 빚어진 질병은 역으로 수맥만 피하면 회복의 전기를 마련할 수도 있다는 것이니까요.
. 잠자리가 문제다.
인간의 수면상태는 무의식의 상태로 들어가는 것이지요 숨만은 정상적으로 쉬고 있지만, 모든 생각과 행동을 중단하기 때문에 전신이 이완되어 있어 무력하기 그지없는 상태이지요. 외부로부터의 사소한 충격에도 무방비 상태가 될 수밖에 없게되지요. 특히 수맥이나, 전자파 등은 가히 치명적일것입니다.
주요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고 봅니다. ==
수맥으로부터의 피해이다. 한번 잠자리가 정해지면 바꾸는 경우가 드물게 되지요. 따라서 수맥에 잠자리가 노출된 사람은 지속적으로 그 피해를 받을 수 밖에 없다라는 것입니다.
그 초기증상은 대개 불면증이나, 악몽 등으로 나타난다고 합니다. 편두통이나 류머티스등을 호소하는 경우도 있는데, 장기화 되면 중풍이나 암 등의 불치병으로 악화 되는 수가 있으므로 조심 해야 한다고 합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수맥을 피하는 것이 좋읍니다.
좁은 방안에서도 잠자리 위치만 약간 바꿔주면 괜찮은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예를들어 잠자리 중 허리부분이 수맥에 노출되어 있던 사람이 잠자리의 위치를 약간 바꿔 주니까 요통이 사라진 경우도 있었읍니다.
잠자리를 바꾸는 것이 여의치 않으면 침대 밑바닥에 접지시킨 동판등의 수맥 차단 장치를 하는 것이 좋읍니다. ==
전자파를 조심해야 합니다.
특히 주거 공간이 좁은 우리나라의 경우 사람이 자는 안방에 각종 가전제품이 많이 있는데, 이는 위험천만한 것입니다.
가전제품에서는 수맥에 버금가는 인체에 극히 해로운 전자파가 발생하는데, 이 또한 수면시에 그 피해가 가중 되므로 방안의 각종 가전제품은 침실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실제로 전자파의 폐해를 연구한 어느 학자에 의하면 TV 바로 곁에서 하루 저녁을 자는 남자의 경우, 40회 연속 음주하는 것과 같은 정도의 생식작용을 저하 시킨다고 했읍니다.
전자파에 노출되었을 때 나타나는 주요 증상은 빈혈, 어지럼증, 아침에 일어나기 힘들 정도의 만성피로 증후군입니다.
컴퓨터 또한 많은 전자파가 발생된다는 점을 감안하시여 거실 등으로 위치를 옮기는 것이 좋읍니다. 컴퓨터로 작업을 많이 하는 분들은 공기 순환에 유의해야 합니다. ==
땅속에서 지표를 통해 발산되는 파장(예를 들어 방사선파, 음의전류등)인 지전류가 흐르지 않는 곳이면 좋겠읍니다. ==
지구의 축인 남극과 북극에서 인체에 미치는 어떤 영향력으로 인하여 남쪽이나 북쪽에 머리를 향하고 수면을 취하면 피로감이 더 있다고 합니다.
따라서 동쪽으로 머리를 향하여 잠을 청하는 것이 좋다라고 합니다. ==
화장실이나 물을 담아 두는 어항 등은 가급적 잠자리에서 먼 거리에 둔어야 합니다. 물 자체도 수면상태에 있어 인체에 해롭지만, 각종 전자파가 물을 선호하여 모이기 때문에 잠자리 근처에 물을 놓아 두는 것은 아주 위험하다고 합니다.
== 방안 공기는 항상 약간 시원하다 싶을 정도의 온도를 유지하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
겨울철에는 자주 환기를 시켜 방안의 먼지는 물론 전자파를 외부로 발산 시키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요대기는 두툼한 것보다 등을 평평하게 해줄 정도의 두께가 좋다고 합니다.
간혹 목욕탕이나 해수욕장 등에서 보면 허리가 굽은 사람들이 많은데, 일상생활에서 자세에 신경을 쓴 것도 건강 유지에 상당히 중요하다라고 봅니다.
지기(地氣) 지기(地氣)의 한계와 수맥의 파괴력이 미치는 높이와 땅이 남녀로 비유되면서 여러 가지의 양분론적 대립의 비유법이 파생되었읍니다. 하늘은 아버지, 땅은 어머니에 견주어졌지요.
땅을 여성으로 상징한 것은 궁극적으로 풍요를 의미한다라고 봅니다.
사실 우리 인간은 태초부터 땅에 의지하여 살아왔지요. 물질적인 면에서 땅이 우리에게 주는 효용가치는 실로 엄청나다고 봅니다.
그 이용방법 또한 인간의 지혜와 어우려져 숱하게 개발 되었다라고 할것입니다. 집이나 농토, 도로 등 우리 생활은 땅과 분리해서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인 것입니다.
그러나 정신적인 면에서 우리는 우리가 사는 이 땅에 대해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읍니다. 그것은 다름아니라 우리 인류가 땅에서 많은 혜택을 누리고 있는 만큼 땅에 대해 애착을 갖고, 이해하고 사랑하면서 살자는 것입니다.
농부가 기름진 땅을 만들어가며 식량 자원을 얻는 반면, 땅을 오염시켜 가면서까지 돈벌이에 골몰하는 사람들이 있읍니다.
자연환경을 파괴 해 가면서까지 설치한 골프장이나 여러 위락시설들이 그렇다라고 봅니다. 이러한 시설들이 다 나쁘다는 것은 아님니다.
그 자체를 지금 당장 어떻게 하자는 것도 아님니다. 하다못해 자체 정화 시설만이라도 제대로 갖추어 다른 땅까지 오염을 시키지 않으면 된다라는 것이지요.
공해를 배출해내는 공장들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땅에 애정을 가지고 소중하게 다루어야만 오늘을 사는 사람들에게 축복이 기대된다는 점인 것입니다.
건축업자들에게는 단독주택보다 아파트가 각광을 받고 있을 것입니다. 좁은 땅의 효율이 제고 되니 그럴 수밖에 없다라고 하겠이요.
그러나 고층 건물일수록 효용성 이야 극대화 될지 모르지만, 땅에서 나오는 지기(地氣)가 멀어진다라고 봅니다. 최근들어 제기되고 있는 고층건물에 사는 사람들의 건강 문제도 바로 이 지기와 연관이 있다고 합니다
학문에 의하면 우리 인간이 거주하기 알맞은 건물의 높이는 웬만큼 자란 가로수의 나뭇가지 높이인 2-3층 정도가 적합하다고 했읍니다.
간혹 수맥 때문에 고층건물을 선택했다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읍니다. 그렇지만 이는 대단히 잘못된 생각인 것입니다.
수맥의 파괴력은 건물의 고저장단을 따지지 않기 때문인 것입니다. 아파트 1층에서 세로로 된 균열을 보았다면, 꼭대기층도 틀림없이 그런 상태일 것입니다.
이렇듯 수맥의 파괴력이 미치는 영향은 실로 공포에 가깝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것입니다. 그러나 미리 겁먹을 필요는 또 없읍니다.
만물의 영장인 우리 인간은 수맥 정도는 어느정도 피할 수 있는 지혜를 가지고도 있으니까 말입니다 . 다만 알고도 실천을 하지 않기 때문에 종종 피해를 입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수맥과 건강에 대한 외국의 연구자료 책 'Earth Radiation' - Kathe Vachler (지구 유해방사파) (케테 바흘러) 평생에 걸쳐 14개국 3000여개 주택의 11200명의 침실을 조사 오스트리아女史---!! 30년간 수학교사로 자기가 가르치는 아이들이 능력이 있었음에도 학업 성적이 부진한 요인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그 원인을 밝히려고 수맥 · 자기맥 등 지구 유해 방사파를 연구하기 시작 하였는데 학습 능력 저하 뿐만 아니라 癌환자 발생에도 결정적인 요인이 된다는 사실을 실증적으로 밝혀 냈었읍니다.
1. 예방조치와 다우징(유해파 탐사)을 통하여 생활에 도움이 되는 일은 정말로 가능 하다 할것입니다. 만성피로, 간장, 우울증등이 있는 환자는 병원 치료와 함께 침대를 옮기거나 작업 장소를 조금만 바꾸어도 도움이 된것입니다.
두통의 경우 약물의 장기 복용은 꼭 부작용이 있게 마련인 것입니다. 아기가 잠을 못자고 칭얼대며 계속 울어대고 방밖으로 자꾸 나가려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인 것입니다.
아기의 에너지를 빼앗아가는 이미지의 영향에서 벗어나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어 주는게 중요하다 하겠읍니다. 암환자는 수술로 큰 도움을 받게 되지만 치료 과정에서 그의 쉼터와 잠자리를 관찰하여 옮겨주면 치료에 더 효과적이다고 할것입니다.
내과의 에게도 외과나 다른 전문의와 마찬가지로 진단과 치료시 회복이 잘되지 않을 경우 숙련된 다우저와 상의하는게 좋다라고 합니다.
양심적인 의사는 환자가 고열이 나고 붓는 등의 증상만을 치료하는게 아니고 근본적인 원인을 규명하여 그를 제거하려고 시도를 한다고 합니다. 진실로 다우징(유해파 탐사)은 질병의 치료에 유용헤게 사용될뿐 아니라 예방에도 크게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부인과 분야 에서도 임신중의 태아성장, 유산, 조산, 출산시의 난산등을 예방 하는데 여러 가지로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조산으로 인한 고통은 참으로 심각한 것으로 이에 수맥과 관련된 많은 사례들을 보아왔읍니다. 출산시 수맥위에서는 힘을 주려해도 잘 되지 않음으로 절개 수술을 하게되는 경우가 많다라고 합니다.
오-링 테스트로 설명하면 이해가 쉽습니다.
2. 경제적인 이득 류마티스나 여러 질병으로 본인들의 고통은 물론이고 경제면에서도 손실은 매우 크다고 봅니다. 수맥 탐사는 건강에 도움을 주고 경제적으로 거액의 의료비를 절약하게 할것입니다.
3. 암과의 연관성 암에 대하여는 매우 심각한 것으로 순환계 질환과 마찬가지로 주요 사망원인으로 되었읍니다. 최근 통계에 의하면 세 사람중 한 사람은 결국 암으로 죽는다는 것입니다.
구스타프씨는 1930년대에 수맥과 암의 상관성을 연구 하였었읍니다. 바바리 아시의 암사망자 54명은 보건당국의 명단에 따라서 조사해보니 놀랍게도 수맥과 일치하였다고 합니다.
그후 더 연구하여 책으로 펴냈다는 것입니다. "Earth Rays Pathogenic Agents in Mness and in Cancer"라는 책입니다 *
의사들의 견해 ① 그는 30년간 외과의로서 암치료를 해왔는데 환자들중 대지의 영향(수맥과 자기맥)을 받지않은 환자는 거의 없었다고 스위스 메디칼 · 저널지에 기고 하였읍니다.
그는 암은 잠자리, 작업장등 장소에서 생기는 병이라고 확신하고 있읍니다. 그러나 흡연, 화학 물질도 합세하는 기본 요인들인 것입니다.
② 맨프레드 · 커리(의학박사) 암환자는 수술후에 반드시 수맥등이 없는 곳에서 기거해야하며 특별한 식사요법이 필요하다고 썼읍니다.
조셉 · 이이셀(의학박사) 유명한 종양(암)학자인 그는 의사들이 보도록 "More Cancer After Cancer(암과 그 전이)"라는 책을 썼읍니다.
암의 증식과정은 수맥등의 교차면에서 잠자는 것이 중요한 원인이 된다는데 대하여 깊은 연구를 하였읍니다. 그
의 동료 의사들은 환자가 수술하기 전에 자던 잠자리를 반드시 옮기도록 권유한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읍니다. 그렇치 않으면 수술한 효과가 나타나기 어렵다고 주지시키고 있읍니다.
④ 디-터 · 아쇼프(의학박사) "암과 수맥의 영향에 대한 질문들"이란 기사에서 그는 "수십년간 어려운 암연구에서 암의 원인중에 중요한 한가지를 발견했다"라고 썼읍니다.
지구 방사선(수맥)은 암의 원인으로서 과학적인 범주에 포함시켜야 된다고 강력히 주장하고 있읍니다. 그는 돌트문트 강연에서 "30명의 중환자들 침대를 UKW기기로 검사하였던 결과 수맥등이 전혀없는 장소에서 잠을 잤던 사람은 한명도 없었다.고 햇읍니다
⑤ 말부르크 의사회장인 람보오박사는 암환자의 잠자리를 기기로 측정해보니 모두가 수맥등의 교란 지대 위에서 잤다는 결론을 얻었다고 발표하였읍니다.
그런것의 영향이 없는 장소의 사람들은 건강하게 살고 있다고 합니다.
⑥ 코디씨는 르하브르지역에서 7년간 10,000회의 측정결과를 발표하였읍니다. 암환자들이 침대 위에는 수직의 이온성 방사선이 발견 되었으며 이것이 암발생의 원인이 된다는 사실은 이미 세계 각지에 인식이 되어있다라고 했읍니다. (Vertical Ionizing rays)
⑦ 디터 · 아쇼프박사는 처음으로 물리학적 측정을 위하여 혈액을 전자식 오시레이터로 검사한 사람입니다. 전자적 진동을 일으키는 혈액형은 예외없이 수맥등의 위에서 자거나 일해온 사람이고 자기적 진동하는 사람은 좋은 장소에서 생활하였고 건강한 사람이라고 단정하였읍니다.
이와같은 실험에는 뮤니히의 모렐박사, 로셍박사, 로다흐박사, 알프렛박사등이 참여 한것입니다.
그의 실험은 " 전자기적 혈액검사법"이란 강의록에 실려 있었읍니다.
⑧ 하-트만 박사는 암환자들의 잠자리를 초고주파 검출기로 실험하였읍니다. 결과를 보면 암환자들은 모두가 강한 수맥등의 위에서 잠을 잤다고 기록하였읍니다.
⑨ 한스 · 슈만씨는 자연요법 학자로서 잠자리만 옮겨도 본인이 인식 할 정도로 상당한 호전반응을 보였다고 합니다.
그의 저서인 "생물학적 방법을 통한 성공적 암치료"에서 여러 가지 사실들을 설명하고 있읍니다. 필자는 500여건의 암환자에 대한 사례들을 여러 다우저(수맥탐사)들의 협조로 조사하게 되였었읍니다.
아파트의 같은 줄에서 여러명이 암에 걸려있는 사실도 관찰 되었읍니다.
이는 가설이나 억측이 아니고 사실인 것입니다. 역자도 국내에서 비슷한 사실을 듣게 되었읍니다. 12층 아파트인데 같은 수직선상에서 3명의 암환자가 생긴예가 있었읍니다.
⑩ 필자는 1979년 바덴 · 바덴에서 열린 종양(암)회의에 초청을 받아 의사들에게 내가 조사한 암과 수맥의 사례들을 슬라이드로 보여주면서 토론도 하였읍니다.
많은 의사와 과학자들이 자발적으로 관심을 갖게 되었고 암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가지는 태도였읍니다.
이 다우징(수맥탐사)문제는 잠자리를 옮기는 것만 능사가 아니고 의료 정책에도 반영시켜야 국가적 사회적 이익이 되고 보험회사도 더 많은 흑자를 내게 될 것입니다.
⑪ 독일의 두 대학, 하이델베르그의 보건학회, 뮤니히의 공과대학등은 동식물을 이용하여 수맥등이 지나는 곳의 영향을 연구하였고 앞에서 언급한 내용들을 확인도 하였읍니다.
암은 확실히 대지의 영향과 관계가 있다고 햇읍니다.
⑫ 현대의 암연구는 신체의 저항력을 향상 시켜야한다는 결론을 얻게 되었고 암학회의 토론주제가 된바 있읍니다.
74명의 이스라엘 암연구자들은 같은 성명을 낸바도 있읍니다. 몸에 이상 세포가 생기면 스스로 알아서 파괴 하지만 이미 발병 되었으면 그렇게 인식하지도 파괴하지도 못한다고 합니다.
암세포는 따라서 무제한 성장한다고 합니다.
암환자에게 저항력을 증대시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합니다.
4. 암과 대지 유해파의 영향 암, 그리고 폴립, 근종 등 종양있는 150명의 환자들을 찾아내어 잠자리를 조사 하였읍니다.
수맥이나 자기맥이 2개 이상 겹치는 곳에서 기거한 사람들이 100%로 밝혀 졌읍니다. 한 줄기가 지나는 곳에서는 암환자가 없었다고 합니다.
W는 수맥, C는 자기맥이다. W C W*C*C 69명 C O W*X*C 10명 W x C 39명 WWCC 7명 C x C 13명 계 150명 W x W 12명 150명의 사례는 통계상 의미가 있으나 추가로 350명의 종양환자들을 다시 조사 해보았으나 역시 같은 결과였다고 햇읍니다.
물론 여기서 강조해야 할 점은 화학 물질이나 다른 발암 요인도 많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것입니다.
5. 구체적인 제안
① 대지의 유해파가 미치는 영향에 관한 문제는 정통의학에 반영되어 교과 과정의 일부가 되어야 하고 일반인의 인식도 바뀌줘어야 합니다.
② 이러한 지식은 일반에게 널리 전파되어 건강생활에 도움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봅니다.
③ 학교에서는 선생님들이 생물학 시간에 반드시 교육하여 국민 보건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삼각주(三角洲)에서의 주거문제 강을 따라 여행을 하다 보면 삼각주(三角洲)를 만날 수 있읍니다.
혹자들은 땅이 기름지고 풍광이 좋다는 이유를 내세워 거기에 주택이나 별장을 짓고 살면 원이 없겠다는 얘기를 필자에게 해오곤 합니다.
일고의 가치도 없는 얘기인 것입니다. 외면상으로야 그럴 법 하지만 수맥의 `수'자만 알아도 삼각주가 좋은 터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명확히 알 수 있을것입니다.
생각해 보자. 대자연의 순리에 따라 도도히 흐르는 물을 제대로 흐르지 못하게 하는 삼각주에 와 부딪히는 보이지 않는 힘을 말입니다. 삼각주는 경작지나 유원지로 적합할것입니다. 이 경우에도 기거하는 것은 금물인 것입니다.
자동차가 많이 다니는 도로 주변도 마찬가지입니다. 항상 외부로부터 눈에 보이지 않는 압력을 받고 있기 때문에 우리 인체에 좋을 리가 없다라는 것이지요.
누누이 하는 얘기이지만, 수맥의 파괴력을 과소평가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땅을 가르고, 건물에 균열이 생기게 하는 수맥이 약하기만 한 우리 인체를 파괴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않될것입니다. 아무리 수맥이 강한 지역이라도 생기 있게 활동 하고 있을 때에는 별 피해가 없다라고 느낄것입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그곳에서 기거하게 되면 까닭없이 병의 인자를 지고 사는 신세를 면치 못 할 것입니다.
다세대주택 건축시 동판을 설치(사례) 필자는 몇년 전에 다세대(빌라) 주택을 지어 분양하려는 건축주에게 수맥에 대하여 이야기를 해주면서, 입주하는 사람들의 건강을 고려하여 수맥이 지나가는 만큼은 동판을 깔아주도록 요청한 적이 있었읍니다.
처음에는 "대형건물에 동판을 깔았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며 부정적인 의사를 표명하던 그 건축주는 내말을 듣고는 흔쾌히 승낙 했었던 것입니다.
내 자신에 관한 일은 아니었지만, 필자는 그 건축주가 대단히 고마웠읍니다. 왜냐하면 설계에도 없는 동판을 시공 하다보면 당연히 건축비가 더 소요되는데다,자신이 살 집이 아닌 분양용 주택이었기 때문에 보통 사람 같으면 필자의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하기 십상이었던 것일겁니다.
접지동판을 설치한 그 건물이 완성된 후 필자는 건물의 내부와 외부를 오락가락하며 수맥탐사를 실시했봤읍니다.
동일한 수맥인데도 동판이 깔린 내부와 동판이 없는 외부의 반응이 확연히 구분되었었읍니다. 그 건물은 필자의 집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읍니다.
따라서 오죽했으면, 필자가 사전에 건물주를 찾아가 설계도면에도 없는 동판을 깔아보라고 권유했었을까요. 동판을 깔면, 수맥의 파괴력이 어느 정도 차단된다는 사실이야 확신을 하고 있던 터여서 그 건물 내부에서는 거의 수맥이 흐르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 할 때까지만 해도 필자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읍니다.
그러나 동일 건물에서 동판을 설치한 곳과 그렇지 않은 곳의 균열 정도가 현저하게 다른 것을 발견하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읍니다.
한편으로는 접지시킨 동판을 깔게 하기를 역시 잘했구나 라는 안도감이 들었읍니다. 만일 필자가 수맥이 지나가는 지점에 동판을 설치하게 하지 않았다면 그 건물의 수명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칠게 뻔했기 때문이었읍니다.
그 당시만 해도 유일하다고나 할까? 수맥 방지용 재료는 동판만을 강조했으나 몇 년이 지난 요즈음은 특수 차폐천 이나 전기콘센트에의 접지를 이용한 매트까지 나와 있는 실정이니까 말입니다.
수맥상식이 널리 알려진바 어떤 아파트 단지가 아예 [수맥 차단 아파트] 하는 타이틀을 내세우고 분양에 들어간 것을 보면 이 분야의 종사자로써 조그만 보람을 느낍니다.
어떤 방식을 채택 할것인가는 전문이와 상의해 보시기를 바랄뿐이면서요------!!
수맥의 기를 차단 함으로써 간단히 피할수있는 액운인 것을 그대로 앉아서 대수럽지 않게 여겨 버리면서 당한다라고 하는것은 참으로 하늘을 쳐다보며서 후회해 보앗자 소용이 없을 뿐더러 시간은 늦엇을 것이며 지각이 없는 사람이 될것인가-----!!
우리는 더한번 고려해 보면서 지혜있는 삶을 영위하자는 것일 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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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人間)이란 !! 선영(先靈)을 편하게 모시며 법수에 적합한 주택과 아파트에서 거주하면서 본인은 물론 후손(後孫)들을 복(福)되게 하기 위해서 풍수지리학(風水地理學)은 반드시 알아야 한다라고 생각합니다 .
저 유명한 명(明)나라 초기(初期)의 명사(名士)서선계(徐善繼)와 서선술(徐善述) 쌍둥이 형제(兄弟)는 자기부모(自己父母)의 유체(遺體)를 길지(吉地)에 모시고자 평생(平生)동안 250여종(餘種)의 풍수지리책(風水地理冊)을 연구(硏究)하고 많은 현장(現場)을 답사(踏査)한 끝에 저술(著述)한 冊을"인자수지"(人子須知)라고 이름하였읍니다.
인자수지(人子須知)란 문자(文字)그대로 사람의 아들(人子:모든사람)이반드시(須:꼭)알아야(知)한다는 뜻이지요 그것은 기술(旣述)한바와 같이 조상(祖上)과 본인과 후손(後孫)을 복(福)되게 하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즉 사람이 살면서 나름대로들 만족을 찾아보자는 것이지요
이해가 쉽게 예를본다면 휴대폰은 그많은 전파(電波)속에서 그 휴대폰과 상응(相應)하는 전파만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우리의 몸은 조상(祖上)의 유전자(遺傳子)를 이어받고 있기 때문에 선영(先靈)으로부터 발산(發散)된 영기(靈氣)에 휴대폰과 같이 감응(感應)한다고 생각하면 한편 쉽게 이해가 될것입니다
우리 산 사람도 아니 본인들도 거처(居處)가 쾌적(快適)하고 아니 집과 사무실 상점내외부가 말인것이다 기분(氣分)도 좋을뿐더러 건강(健康)에도 이로운 것과 같이 조상(祖上)을 길지(吉地)에 모시게 되면 조상(祖上)의 영혼(靈魂))이 그 길(吉)한 지기(地氣)를 받아 편안(便安)하실 것이며 그 길지(吉地)에 계신 선영(先靈)으로부터 길(吉)한 영기(靈氣)가 발산(發散)하여 자손(子孫)들에게 감응(感應)케 되어 자손(子孫)들이 길(吉)하게 된다라는 것을 조상(祖上)대대로 부터 수천년(數千年)동안을 아니 지금도 경험(經驗)해온 현실(現實)인 것입니다.
소직(小職)은 공직생활과 건축업과 운수업을 곁들여 해보면서 무안한 수난과 고비를 체험하게 되면서 너무나 많을 것들을 자신이 행동했었던것 외의 반응을 받게된 결과들을 받아가게 되면서 해석들을 하게 된것일 것입니다
그러면서 "나" 라는 위치와 살아옴을 되돌아 보게 되면서 주변의 뿌리를 생각케 하드란 것이지요 그러는 단계에서 선인들이 평생을 아니 계절적으로 절기 마다 챙기시며 관리하신 관심도를 나도 생각하게 하면서 위선사업이 나에게 이어진 위치가 되어 가드란 것이지요
속헌에 알이야 면장을 한다 랍시고 직장생활 만을 정년하게 돼면서 까지 와중에 부수적으로 건축업이다 운수사업이다 가족과 나는 분주한 현실에 충실했을뿐 우리 전식구들의 배려와 그늘에서 살아오면서 나의 힘과 지해인 능력으로만 알고 살아왔었지 언제 풍수지리 공부를 했어봤어야 덕으로도 알았을게 아니겠읍니까 말입니다
그래도 직장내에서 틈틈이 시간 나는대로 명당과 생활풍수 란 한권의 책으로 부터 이해를 돗구기 시작 하면서 그에따른 서적들을 즐겨하게 되어지면서 구독 하게되어지고 찾는게 고서적 취급점 이라든가 제일큰 서점만을 골라 다니면서 역학,풍수지리학(風水地理學)을 모아둔 꼬너에서 현실성에 적합한 저서집들이란 거이 완독을 하다싶이 하게 되면서 부터 나에겐 더한 욕구심이 생기더란 것입니다
전문식견을 구축하면서 골격을 세워봤으면 하는 욕구심 말입니다 자신이 생기드란 것이지요 대학을 이제사 또 달리 등록케 하면서 전문교수분게 개인 지도를 받게 까지 되어가드란 것이지 뭐겟읍니까
그러니까 80년도 부터니까 25 여년을 풍수지리란 책에 매달려 보면서 연구(硏究)해 오고있는 것이지요. 그런대 풍수지리학(風水地理學)이란 나에게 그리 간단(簡單)한 학문(學問)이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먼저 풍수지리학(風水地理學)의 원리는 형기(形氣)와 이기(理氣) 둘이지만, 그것이 세분(細分)되면 그 종류(種類)도 많고, 또한 그것의 전개(展開)란 복잡하게 엉크러저서 매우 어려워 질뿐더러 참으로 재미도 있어지면서 현장과 병행하여 구산하느 라니 참으로 심오 할뿐더러 오묘 하다는 학문인 것임을 깨달케 하드란 것이지요.
小職이 참고문헌(參考文獻) 50 여종(餘種)의 서적(書籍)을 耽讀하고 各處 현지(現地)답사(踏査)란 먼저 서울과 대전 국립묘지 일것이며 창덕궁 고궁 청와대 등지로 부터 명인들이신 삼성 이건희 생가와 다 거론할순 없어도 위정자 분들과 제벌 집안들의 사무실과 거처란 더욱더 호기심을 갖게 하면서 생가란 생가와 선영들의 묘소는 묘소는 다찾아봐지게 되면서 학술적인 면을 이해하게 되어 지더란 말인 것입니다
그렇게 이것이 경지가 아닌가 하고 생각도 해 보아왔지만 지금도 나에겐 가장 어려운 점이란 풍수지리학(風水地理學)의 최종단계(最終段階)인 좌향법(坐向法)이 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음택(陰宅 : 墓地)뿐만 아니라 양택(陽宅: 住宅이나 官公署의 터)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음택(陰宅)이나 양택(陽宅)의 길지(吉地)를 구득(求得)하였다 할지라도 재혈(裁穴) 특히 좌향(坐向)을 절못 선택(選擇)하게 된다라면 용상팔살(龍上八殺)이나 황천살(黃泉殺)을 범(犯)한다거나 분금(分金)을 잘못 선택(選擇)한다라면 발복(發福)은커녕 패가(敗家) 망신(亡身)과 절손(絶孫)을 당하게 되뿐더러 관공서(官公署)라 할지라도 악순환을 격게됨을 보아왔으며 들어왔으니 말이다
두렵고 어려운 일이라고 나는 거듭 말하고 싶을 뿐인것입니다.
그것은 아무리 좋은 라디오나 TV 를 가졌다 하더라도 다이알이나 채널을 잘못 맞추어 듣기싫은 소리와 보기 흉한 화면(畵面)만 계속 시청(視聽)하게되면 지겹다 못해 신경질이 날것이고 이것이 싸이고 쌓이면 감당(勘當)하기 어려운 정신질환(精神疾患)도 나타나는 것과 비슷 하다라고나 할까요---?
그런대 그렇게 중요(重要)한 좌향법(坐向法)을 이해(理解)하기도 어려 우려니와 이해(理解)했다 하더라도 새월과 년새와 시일(時日)이 지나게 되면 잊혀지기 쉬워서 이것을 복습(復習)하고 이 법칙(法則) 저 법칙(法則)을 맞추어 보기란 참으로 힘들고 어려운 일인것입니다.
그래서 그 좌향법(坐向法)을 컴퓨터 식으로 편람화(便覽化)하면 설혹(設或)그 이기(理氣)일부를 잊었다 할지라도 편람(便覽)만 보면 쉽게 해답(解答)을 얻을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으로 우선 각좌향별(各坐向別)수구(水口)의 길흉(吉凶)을 일목요연(一目要 然)하게 정리(整理) 편람화(便覽化)하여 답산(踏山)때 마다 휴대(携帶)하고 사용(使用)함으로써 그렇게 편리(便利)할 수가 없을뿐더러 간산을 해보면서 느낀 사실이지만 법수에 맞다라는 자리는 정확하드란 것입니다 .
小職은 평소 어디를 외출할시는 적은 가방에 坐向의 便覽과 폐철을 들게만 된다라면 陰宅이나 陽宅에 法數를 確然하게 說明해 들일뿐더러 地勢를 理解시켜들이면서 吉地選定에 自信感이 들게된 入場인 것입니다 .
先祖분과 堂代는 물론 後代를 生覺하시면서 何時何處라 할지라도 聽許만 해 주신다면 기꺼히 공부로 삼으면서 서슴없이 뛰어 갈것을 맞이하며 約束들이고저 함인것이며 감히 설문을 올려 들이면서 인사을 올입니다.
불혹의 노래 선후배 형제자매 여러분 더한 넒은 양찰이 있으시기를 바라 맞이하면서 많은 지도 편달과 체칙을 바라겠읍니다 그럼 부디 건승하시며 한번쯤 뿌리를 되돌아봐 가시길 감히 올려들여 봄니다 感謝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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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라 풍수 원조(元祖) 도선국사
15. 우리 나라 풍수 원조(元祖) 도선국사(道詵國師) 도선(道詵)은 신라 말 덕흥왕 2년(827년) 지금의 전라남도 영암군 월출산 아래에서 태어났다. 속성은 김씨 혹은 최씨라고 전해지고 있으며 호는 옥룡자(玉龍子)다. 그가 태어나고 자란 전라도 해안지방은 당나라와 교역이 활발했던 곳으로 당의 선진 문물을 빨리 받아들일 수 있는 교역의 요충지였다. 당시 당에서 유행하던 풍수지리설도 다른 지방보다 빨리 이 지방에 전래된 것으로 추측되는데 도선이 자라면서 풍수지리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이와 같은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다.
도선은 15세에 지리산 화엄사에 들어가 승려가 되었고 불경을 공부하여 4년 만인 문성왕 8년(846년) 대의(大義)를 통달하여 신승(神僧)으로 추앙 받았다. 이때부터 수도 행각에 나서 동리산(桐裡山)의 혜철(惠哲)을 찾아 무설설무법법(無說說無法法)을 배웠으며 23세에 천도사(穿道寺)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당시의 선승(禪僧)들은 가르침을 베푼 스님의 인가를 받으면 그 스님을 떠나서 혼자서 전국 각지의 명산대첩을 떠돌아다니며 고행을 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자연히 산하에 대해서 많은걸 보고 배울 수 있어서 지리에 대한 안목을 넓힐 수 있었다. 우리 나라에서 유명한 풍수사들이 대부분 스님이었던 것은 이와 같은 이유 때문이다. 풍수지리에 통달한 도선이 전국을 답사하면서 한반도 산천의 순역(順逆)을 삼국도(三國圖)로 그려 작성하였다. 이것은 산수의 형세에 따라 명당을 설정하고 그 곳을 중심으로 작성한 삼한(三韓)의 지도다.
신라말기 혼란기에 지방호족들은 대부분 자신이 거주하고 있는 지역을 명당으로 내세워 자신들의 세력을 과시하고 세력 확장의 명분으로 삼았다. 이 때문에 경주 중심의 전통적인 신라의 국토관(國土觀)이 와해되고 국운은 날로 기울어 갔기 때문에 도선은 신라의 국운을 회복하기 위하여 전 국토에 비보사찰을 건립하고 허약한 땅에는 탑을 세웠다. 그는 국가를 운영하는 원리로서 비보풍수사상(裨補風水思想)을 내세웠는데 이것이 중국에서 수입된 풍수와 다른 한국의 자생 풍수다. 현존하는 풍수지리 이론서들은 대부분 중국에서 발간된 것들인데 땅을 고쳐 쓸 수 있다는 내용은 거의 없다. 도선은 이 비보풍수로 전국을 답사하면서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고 결함이 있는 땅은 사찰을 세우거나 탑을 세워 보완 해 주었다. 이러한 비보풍수는 다음 일화로 유명하다.
도선 국사가 백두산에 올라갔다가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송악 근처를 지날 때 왕건의 아버지 왕륭(王隆)이 새로 집을 짓는 것을 보고 "제( , 느릎나무)를 심을 땅에 왜 마(麻, 삼베)를 심었을까?" 하자 왕륭이 도선을 극진히 대접하고 자문을 구하였다. 도선은 뒷산에 올라가 산수의 맥을 살펴보고 위로는 천문(天文)을 보고 아래로는 시수(時數)를 살핀 다음 말하기를 "송악산의 맥은 멀리 임방(壬方)에 있는 백두산에서 출발하여 수모목간(水母木幹)으로 뻗어내려 와서 마두(馬頭)에 떨어져 명당을 일으킨 곳이다. 그대는 수명(水命)이니 물의 대수(大數)를 따라 집을 육육(六六)으로 지어 삼십육구(三十六區)로 만들고 송악산이 험한 바위로 되어 있으니 소나무를 심어 암석이 보이지 않게 하면 천지의 대수가 부응하여 명년에는 반드시 신성한 아들을 낳을 것이니 이름을 왕건(王建)이라고 짓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였다. 도선의 말처럼 1년 후 왕건이 태어났으며 그는 장차 성장하여 후삼국을 통일하고 고려를 세워 태조가 되었다.
도선 국사가 풍수설을 누구한테서 배웠는가 하는 설은 여러 학설이 있다. 도선이 죽은지 252년이 지난 고려시대에 최유청이라는 사람이 지은 비문에 의하면 도선이 출가하여 지리산 구령에 머물 때 세상을 피해 숨어사는 이상한 이인(異人)에게서 배웠는데 그 이인은 도선에게 모래를 쌓아 산천의 순역(順逆)을 보여 주면서 풍수를 전수했다고 한다.
또 다른 주장은 도선이 당나라에 유학하여 승려인 장일행(張一行)에게서 배웠다고 한다. 일행(一行)은 선종 계통의 승려로 당나라 조정에서 우리 나라의 이조판서에 해당되는 이부상서(吏部尙書)라는 높은 벼슬에 있던 사람으로 벼슬을 버리고 입산 수도하여 천문지리에 정통한 대학자가 되었다. 그는 당 현종의 칙명으로 승 홍사(泓師)와 함께 진나라 사람 곽박(郭璞)이 저술한 금낭경(장서)을 해석했는데 산수의 형세를 설명하면서 실제 사례를 드는 실증법(實證法)을 사용하였다. 그는 또 중국의 국토를 남쪽부터 북쪽까지 위도를 측량하여 <구당서(舊唐書)>, <율역지(律歷志)>, <천문지(天文志)>를 저술하였으며, 당나라 전체를 지세에 따라 양자강 유역은 화식지지(貨殖之地, 재화가 많이 나는 땅), 황하의 중상류 지역은 용문지지(用文之地, 학자가 많이 나오는 땅), 사천과 산서 지방은 용무지지(用武之地, 무장이 많이 나오는 땅)로 나누어 자연 환경을 관찰하는 등 지극히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사람이었다.
그러나 도선은 신라 덕흥왕 2년(서기 827년)에 태어나 효공왕 2년(서기898년)까지 살았고, 일행은 당 현종 때 인물(서기 712년-756년)로 도선과는 약 100년 정도 시대 차이가 난다. 또 도선 전기(傳記)에도 당나라에 갔었다는 기록이 없기 때문에 도선이 당나라에서 일행한테서 풍수지리를 배웠다는 것은 잘못된 것으로 본다. 도선이 불교에 입문하였을 때는 신라 귀족 중심의 불교인 교종(敎宗)이 쇠퇴하고 일반 대중을 상대로 각 개인이 스스로 사색하여 진리를 깨닫는 다는 선종(禪宗)이 보급되고 있는 시기였다. 선종은 대부분 당나라에 유학한 승려들에 의해서 유입되었는데 그들은 선종을 일반 대중에게 전파하기 위한 수단으로 풍수지리를 이용하였다.
그런데 그들이 당나라에서 배운 풍수지리는 일행의 지리법(地理法)이었다. 도선의 스승인 혜철도 당나라에 유학을 다녀왔는데 아마 도선이 스승과 다른 선승(禪僧)들에게 중국의 풍수이론을 간접적으로 배우게 된 것으로 추측된다. 당시 풍수지리를 배운 많은 선승들과 그 이전에도 한반도 전역에는 한국의 자생 풍수가 있었을 텐데 왜 도선을 우리 나라 풍수의 원조(元祖)로 보는 것일까? 도선은 한반도 전역을 답사하면서 경험을 통하여 국토에 대한 각종 비기(秘記)와 답산가(踏山歌)를 남겼을 뿐만 아니라 한반도 산천의 형세를 유기적으로 파악했다. 즉 단순히 풍수지리 이론의 적용이 아닌 국토 공간에 결함이 있는 곳을 보완해주기 위해 인공 산을 만들고 제방을 쌓고 비보사탑을 세워 기울어져 가는 국운을 회복하려고 노력하면서 독특한 한국의 풍수사상을 정립했기 때문일 것이다.
도선은 37세가 되던 경문왕 4년(서기 864년) 지금의 전라남도 광양군인 희양현(曦陽縣)에 있는 백계산(白鷄山) 옥룡사(玉龍寺)에 35년간 머물면서 전국에서 구름처럼 모여드는 학도들을 가르치다 효공왕 2년(898년) 72세로 입적하였다.
그의 풍수지리 사상은 고려와 조선시대를 통하여 우리 민족의 가치관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신라 효공왕은 죽은 도선에게 요공국사(了空國師)라는 시호를, 고려 현종은 대선사(大禪師), 고려 숙종은 왕사(王師)를 추증했고, 고려 인종은 선각국사(先覺國師)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의종은 비를 세웠다. 도선에 관한 설화가 옥룡사 비문 등에 실려 있으며 도선의 저서로는 <도선비기(道詵秘記)>, <도선답산가(道詵踏山歌)>, <송악명당기(松岳明堂記)>, <삼각산명당기(三角山明堂記)> 등이 전한다고는 하나 진짜로 도선의 것인지 아니면 후대에 누군가 도선의 이름을 도용하여 작성한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참고서적> 이몽일 저 `한국풍수사상사` 명보문화사 신광주 저 `정통 풍수지리 원전 1권` 명당출판사 최창조 저 `한국의 자생풍수 1권` 민음사 한동환, 성동환, 최원석 공저 `자연을 읽는 지혜(우리 땅 풍수기행)` 푸른나무 무라야마지쥰(村山智順) 저 최길성 역저 `조선의 풍수`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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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도선국사(道詵國師)의 국역진호설(國域鎭護說) <무라야마지쥰(村山智順) 저 최길성 역저 `조선의 풍수`에서 발췌하였습니다.>
국역진호설이란 국가 영토의 기운이 과한 것은 진압하고 결여된 것은 보호해준다는 뜻으로 도선국사의 독특한 학설이다. 아래 내용은 도선국사실록에 소개된 것으로 조선 영조 때 중간(重刊)된 것이며 저자 미상이다.
문장은 한문이며 문체는 화려하지 않다. 저자명을 밝히지 않고 조선조를 아조(牙彫)라 표현한 점으로 보아 조선조에 들어와서 작성된 것이며, 문장에 능통하지 않은 자가 민간에 전하고 있던 도선 설화를 기록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여하튼 이 책은 영조 19년에 중간된 인본(印本)으로서 당시 민간 신앙계에 이 국역풍수 신앙이 중추를 이루고, 많은 신봉자를 보유하고 있었던 것을 추측하게 해준다.
도선이 가난한 조선을 구제하고 바람기를 빼고 방기(邦基, 나라의 기초)를 굳게 하여 백성을 안전하게 하고자 하였다. 우리나라의 지형은 행주(行舟, 항해하는 배)같은 것이고, 태백산 금강산이 그 머리이고, 월출산, 영주산이 배 꼬리이며, 부안의 변산이 그 타( :배의 방향을 잡는 키)이다. 영남의 지리산은 배의 노이며, 능주의 운주산이 선복(船腹, 배의 중앙부분)이다. 그런데 배가 물에 뜨는 것은 물건이 있어 배의 머리와 꼬리 등과 배를 눌러 주어야 하고, 타즙( 楫, 키와 배 젖는 기구)으로 진로를 잡아야 선체가 흔들리지 않고 가라앉지 않는다. 이에 사탑과 불상을 세워서 위험한 곳을 진압해야 한다. 특히 운주산(전남 화순군 도암면) 아래 완연규기( 糾起, 지세가 꿈틀거리듯 일어나는 곳)하는 곳에는 별도로 천불천탑(千佛千塔)을 설치하여 그 등과 배를 실하게 하였다. 또 금강산과 월출산에는 탑을 건조하여 정성을 다했다. 이 두 산이 행주(배)의 수미(首尾, 배 머리와 꼬리)이고 가장 중요하다고 했기 때문이다. 월출산을 소금강이라고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진압(鎭壓)을 끝낸 도선은 지팡이를 짚고 천리 길 여정에 올라 팔도강산에 발자취를 남기지 않은 곳이 없었다. 도선은 국토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절을 둘만한 곳은 절을 세웠고, 절을 둘 만한 곳이 아니면 부도(부처)를 세우고, 탑을 세울 곳이 아니면 불상을 세우고, 결함이 있는 곳을 보충하고, 비뚤어진 곳은 바로 세웠다.
또 월출산 천왕봉 아래에 보제단(普濟壇)을 설치해 매년 5월 5일에 제사를 지내 복을 기도하고 재앙을 물리쳤다. 이리하여 그 후 조선의 지리에는 변화가 나타나 산의 흐름은 계곡이 아름답게 되고 지맥이 꿈틀거리는 곳이 변하여 부(富)를 모으게 되고 나라에 분쟁의 우환도 없이 사람들이 한탄할 일도 없었다. 고려가 삼한을 통일한 것도, 조선조가 북방을 개척해서 육진(六鎭)을 설치 영토를 확장하는 등 국운이 발전한 것도 이 도선의 진호(鎭護)의 힘에 연유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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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이중환의 택리지는 한반도를 노인의 형상에 은유하였다. <이중환의 택리지(擇里志) 산수총론(山水總論)> 대저고인(大抵古人) 대체로 옛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위아국위노인형(胃我國爲老人形) 우리 나라는 노인의 형상이며
이해좌사향(而亥坐巳向) 해좌사향으로서
향서개면(向西開面) 서쪽으로 향하여 앞이 열려있어
유공읍중국지상(有拱揖中國之狀) 중국에 읍하고 있는 형상이므로
고자석친닐어중국(故自昔親 於中國) 옛날부터 중국과 친하고 가까이 지냈다.
이차무천리지수(而且無千里之水) 그리고 천리되는 물이 없고
백리지야(百里之野) 백리되는 들판이 없는 까닭에
고불생거인(故不生巨人) 옛날부터 큰 인물이 나지 못하였다.
서융북적여동호여진(西戎北狄與東胡女眞) 서쪽, 북쪽, 동쪽의 오랑캐와 여진족이
무불입제중국(無不入帝中國) 중국에 들어가서 왕이 되지 않은 나라가 없는데
이독아국무지(而獨我國無之) 우리 나라만 홀로 그런 일이 없으며
유근수봉역(惟謹守封域) 오직 강토만 조심스레 지켜 오면서
불감의타(不敢意他) 감히 다른 뜻을 품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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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고서(古書)에 나타난 팔도의 인물 비교 조선시대 지리학자들은 조선 팔도의 풍수지리적 해석을 하면서 땅이 인간의 심성에 미치는 영향을 논하였다. 우리 나라에서는 인걸(人傑)은 지령(地靈)이라 하여 지리인성론(地理人性論)이 발달해 왔는데 학자들 사이에 상당한 의견의 일치점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오랜 세월이 지난 오늘날에 그대로 수용할 성질의 것은 아니다. 농경사회에서 산업화 사회로 변화하면서 수많은 인구이동과 지역간 교류가 활성화되고 문화공간이 확산되면서 과거와는 비교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점을 이해하고 여기서는 풍수지리를 공부하는 입장에서 참고만 하기를 바란다.
1) 나학천(羅鶴天)의 팔도 인물평 임진왜란 때 이여송의 지리참모로 조선에 왔던 두사충(杜師忠)의 사위인 나학천은 중국 남경의 건주(建州) 출신으로 장인과 함께 조선에 귀화한 인물이다. 그는 조선 팔도의 형상을 인체와 동물에 각각 비유하여 팔도의 인물평을 하였다.
.함경도는 인체에 비유하면 머리(頭,두)이고, 동물에 비유하면 장어다 함경도 사람은 우직하지만 지혜를 가졌다. <우직지협(愚直知夾)>
.평안도는 인체에 비유하면 얼굴(面,면)이고, 동물에 비유하면 매다. 평안도 사람은 의지가 강하고 용감하며 날쌔다. <견강용예(堅剛勇銳)>
.황해도는 인체에 비유하면 손(手,수)이고, 동물에 비유하면 소다. 황해도 사람은 느리고 어리석어 용골 차지 않다. <우준무실(愚蠢無實)>
.경기도는 인체에 비유하면 가슴(胸,흉)이고, 동물에 비유하면 범이다. 경기도 사람은 앞에는 억세고 뒤로는 부드럽다. <선용후유(先勇後柔)>
.강원도는 인체에 비유하면 갈빗대(脇,협)이고, 동물에 비유하면 꿩이다. 강원도 사람은 자기 거처에 가만히 있고 아는 것이 부족하다. <칩복지단(蟄伏知短)>
.충청도는 인체에 비유하면 배(腹,복)이고, 동물에 비유하면 까치다. 충청도 사람은 행동이 경솔하지만 용맹스럽다. <부경용호(浮輕勇豪)>
.경상도는 인체에 비유하면 다리(脚,각)이고, 동물에 비유하면 돼지우리다. 경상도 사람은 어리석고 순하고 질박하지만 참된 기질이 있다. <우순질신(愚順質信)>
.전라도는 인체에 비유하면 발(足,족)이고, 동물에 비유하면 원숭이다. 전라도 사람은 속임이 많고 교활하고 가벼우나 예술성이 있다. <사교경예(詐巧輕藝)>
2) 청담(淸潭) 이중환(李重煥)의 팔도 인심론 <택리지(擇里志) 복거총론(卜居總論), 인심(人心)편>
무엇으로서 인심을 말할 것인가? 공자께서 "마을의 풍속이 착하면 아름다운 것이 된다. 아름다운 곳을 가려서 살지 아니하면 어찌 지혜롭다 하리오."하시었고, 옛날 맹자의 어머니가 세 번이나 집을 옮긴 것은 아들을 훌륭하게 가르치고자 함이었다. 사람이 살 고장을 찾을 때에 그 착한 풍속을 가리지 않으면 비단 자신에게 뿐만 아니라 자손에게도 해가 있어서 반드시 좋지 못한 풍속이 스며들 우려가 있다. 그러니 살 곳을 가리는데 그 땅의 세상 풍속을 보지 아니하면 안 된다.
우리 나라 팔도 가운데 평안도 인심은 순후(醇厚)하여서 제일이요, 다음은 질실(質實)한 경상도 풍속이다. 함경도는 오랑캐와 접경하여 백성이 모두 굳세고 사나우며, 황해도는 산수가 험악한 까닭으로 백성들이 거의가 사납고 모질다. 강원도는 산골짜기 백성으로 몹시 불손하고, 전라도는 오로지 교활함을 숭상하여 그른 일 에 움직이기 쉽다. 경기도는 도성 밖의 야읍(野邑)은 백성들의 재물이 시들어 쇠하였고, 충청도는 오로지 세도와 재리(재리)에만 따른다. 이것이 팔도 인심의 대략이다. 그러나 이는 서민을 두고 논한 것이요, 사대부의 풍속에 이르러서는 또한 그렇지 않다.
3) 정조 때 규장각 학자인 윤행임(尹行恁)의 팔도 백성의 성격 .함경도 사람은 이중투구(泥中鬪狗)로 진흙 속에 개들이 싸우는 격으로 강인한 의지와 인내력이 있다. .평안도 사람은 맹호출림(猛虎出林)으로 사나운 호랑이가 숲 속에서 나오는 격으로 용맹하고 과단성이 있다. .황해도 사람은 석전경우(石田耕牛)로 돌밭을 일구는 소와 같은 격으로 고난을 이겨내는 근면성이 있다. .경기도 사람은 경중미인(鏡中美人)으로 거울 앞에 선 미인 격으로 이지적이고 명예를 존중한다. .강원도 사람은 암하노불(岩下老佛)로 바위 아래에 앉아 있는 부처님 격으로 누가 알아주든지 말든지 자기 할 일을 해 나간다. .충청도 사람은 청풍명월(淸風明月)로 깨끗한 바람과 밝은 달 격으로 풍류를 즐기는 고상한 면이 있다. .경상도 사람은 태산교악(泰山喬嶽)으로 크고 높고 험한 산 격으로 웅장하고 험악한 기개가 있다. .전라도 사람은 풍전세류(風前細柳)로 바람에 쉽게 흔들리는 버들 나무 가지 격으로 시대에 민감하게 적응하면서 살아간다.
4) 성호 이익과 청담 이중환의 영호남 인물 비교 영조 때 실학자 성호(星湖) 이익은 그의 저서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경상도는 산수가 모두 취합하고 바람 소리와 풍기(風氣)와 습관 또한 흩어지지 아니하며 옛날 풍속이 그대로 지켜져 명현(名賢)이 배출되는 국내 최대의 길지인 반면
전라도는 산수가 모두 산발체(散髮體)를 이루면서 흩어져 나가 국면(局面)을 이루지 못하므로 그 지방에는 재주와 덕행이 드물고 인정도 고약하다 하였다. 반면에 청담(淸潭) 이중환(李重煥)은 그의 저서 택리지(擇里志)에서 전라도의 풍속이 노래와 여색, 부(富)함과 사치를 숭상하고 사람들이 흔히 영리하고 경박하며, 기교를 다하여 문학을 중요시하지 않는 까닭에 과제(科第)에 현달한 자는 경상도에 비해 떨어지나 인걸은 지령인지라 역시 전라도에도 인재가 적지 아니하다. 고봉 기대승은 광주인이고, 일재 이항은 부안인 이고, 하서 김인후는 장성인 인데 모두 도학(道學)으로써 이름이 있었다. 제봉 고경명과 건재 김천일은 다 광주인 인데 모두 절의(節義)로 이름이 있고, 고산 윤선도는 해남인 이고, 묵재 이상형은 남원인으로 모두 문학(文學)으로서 이름이 있었다.
장군 정지와 금남군 정충신은 나주인과 광주인 인데 장수(將帥)로 이름이 있었고, 찬성 오겸도 광주인 이고, 의정 이상진은 전주인 인데 재상(宰相)으로 현달 하였다. 그리고 문장가(文章家)로서는 고부의 옥봉 백광훈과 영암의 고죽 최경창이 있고, 우거(寓居)로서는 부윤 신말주가 순창에 살았고, 이상 이계맹이 김제에 살았고, 판서 이후백이 해남에 살았고, 판서 임담이 무안에 살았다. 단학(丹學)으로서는 도사 남궁두가 함열인 이고, 청하 권극중은 고부인 인데 또한 방술을 수련하여 유명하다. 이들은 모두 공명 정대하고 사내답게 뛰어나 명성을 후세에 남긴 사람들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