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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배기크리스천(7) 행함으로 보이는 믿음 야고보서 2장 14-19절
여러분께서 너무나도 잘 아시는 가나안땅으로의 입성장면을 한번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여호수아 3장 14-17절 먼저 읽겠습니다.
“14 백성이 요단을 건너려고 자기들의 장막을 떠날 때에 제사장들은 언약궤를 메고 백성 앞에서 나아가니라 15 요단이 곡식 거두는 시기에는 항상 언덕에 넘치더라 궤를 멘 자들이 요단에 이르며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물 가에 잠기자 16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그쳐서 사르단에 가까운 매우 멀리 있는 아담 성읍 변두리에 일어나 한 곳에 쌓이고 아라바의 바다 염해로 향하여 흘러가는 물은 온전히 끊어지매 백성이 여리고 앞으로 바로 건널새 17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요단 가운데 마른 땅에 굳게 섰고 그 모든 백성이 요단을 건너기를 마칠 때까지 모든 이스라엘은 그 마른 땅으로 건너갔더라” 아멘.
저와 여러분은 이 요단강 사건의 전말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에 이 요단강을 건너는 이야기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요, 결말을 모른다고 생각하고 이스라엘 백성의 입장이 되어보면 이건 뭐, 죽으라는 얘기와 다르지 않습니다. 아무리 따져봐도 충분히 건너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도저히 엄두가 안나는 상황입니다. 수영을 할 줄 아는 남자들은 뭐 어떻게든 건널 수 있다고 치자구요. 나머지는 어쩌라는 겁니까? 온 흙탕물이 언덕까지 넘치는 강물, 잘못 발을 디뎠다가는 급류에 휩쓸려 떠내려갈 수밖에 없는 그곳, 그 깊이도 가늠할 수 없는 여전히 그 위력이 강하여서 두려운 곳을 노인과 아이들과 여자들을 포함한 전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건너가라는 명령이 떨어진 겁니다. 여러분이라면, 하나는 업고 하나는 손에 잡고 간신히 걸리고 있는데 그 강물을 믿음으로 건너보시겠습니까?
그나마 그 명령을 내린 사람이 모세였다면 그래도 명령에 순종하기가 쉬웠을지도 모릅니다. 출애굽의 기적들, 광야에서의 이적들, 불뱀에 물렸다가 살아난 경험들과 반석에서 물을 내었던 사람, 여러 가지 이적과 기사를 베푼 사람이니까 뭐 그래도 한번 믿고 발을 내밀어볼 수 있을텐데, 여호수아는 아니거든요. 어떻게보면 낙하산으로 지도자가 된 사람인데 뭐하나 믿을 구석도 없었던 사람 아닙니까? 믿을 수 있다면 모세가 지명한 사람이라는 것, 모세가 안수해서 지도자를 삼은 사람이라는 것 밖에는, 하나님께서 모세 다음으로 세우신 사람이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겁니다. 그런 여호수아, 백성들에게는 어떤 기억이 있는 사람입니까? 다들 안된다는데, 같이 다녀온 열 사람이 안된다는데, 갈렙하고 둘이서 가나안땅 정복할 수 있다고, 저들이 우리의 밥이라고, 막 옷을 찢으면서 혈기를 부렸던, 그러면서 온 백성들에게 따져댔던 사람이 아닙니까? 신앙의 눈이 아닌 인간적인 눈으로는 참, 철없어보이는 인물이었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앞에서 고집피우며 뗑깡을 피웠던 것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 여호수아인 것입니다. 근데 그런 여호수아가 지도자가 되었고, 명령을 내리는 겁니다.
자신을 성결하게 하고 요단을 건너라.. 수3:5
그 명령에 첫발을 내딛기까지 얼마나 말들이 많았을지.. 상상이 되십니까? 불평과 불만에.. 나는 못한다며 때려죽여도 안간다고.. 위정자를 잘못뽑았다는 둥.. 모세의 눈이 틀렸다는 둥.. 모세였다면 저렇게 안했을텐데.. 지팡이로 쫘악 물을 갈랐을텐데, 그것도 못하나보다. 모세가 그립다는 등.. 죽은 모세를 다시 살려낼 수는 없는거냐는 둥.. 별의별 소리가 다 나왔을 겁니다.. 그런 백성들 앞에 지도자로 세워져 서있는 여호수아의 마음이 얼마나 심난했을지.. 상상이 되십니까??
근데요, 이 요단강 본문의 마지막인 4장 14절이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 날에 여호와께서 모든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여호수아를 크게 하시매 그가 생존한 날 동안에 백성이 그를 두려워하기를 모세를 두려워하던 것 같이 하였더라”(수4:14)
이 고난의 요단강이.. 고통스러웠던 요단강이.. 여호수아와 이스라엘백성을 하나 되게 만들어 줍니다.. 그 거리를 없애줍니다. 그 사이에 보이지 않던 불신을 요단강물에 씻겨내려가게 해주셨던 것이지요. 여호수아는 정녕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였음이 증명되게 되구요.. 드디어 이스라엘 앞에서 여호수아의 모든 권위가 세워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단 한 번의 사건이었음에도.. 그의 생존한 날 동안에 백성이 두려워하기를.. 모세를 두려워한 것같이 하였더라. 모세가 40년을 불신에 불신을 거듭하며 가까스로 인정받았던 그 지도자로서의 자격을.. 여호수아는 단박에.. 인정받습니다.. 한 번의 사건으로.. 여호수아는 출발선에서 벌써 모세만큼의 신뢰와 지지를 얻는 지도자가 될 수 있었던 겁니다.. 어떻게요? 그 순간에.. 하나님의 명령을 믿음으로 용기있게 행동에 옮겨냄으로 말입니다.
여러분, 공동체든 개인의 삶이든.. 산적해있는 고난이 멈추고.. 분열된 마음이 하나되고.. 멀어진 사이가 가까워지고, 무너진 신뢰가 다시금 회복되는 첩경은.. 다른 것에 있지 않습니다... 어디에 있습니까? 행동함에 있습니다.. 그것도 믿는 대로 행동하는 것에 있습니다.. 말씀대로 명령대로 행했더니.. 과연 하나님의 말씀이더라.. 과연 하나님의 명령이더라.. 과연 하나님은 살아계시더라.. 이것만 경험되면.. 모든 것은 해결됩니다... 공동체가 회복되구요.. 개개인의 신앙이 한 단계 도약하게 됩니다..
백성들이 선뜻 움직이지 않으니까.. 여호와의 법궤가 앞장을 섭니다.. 제사장들이 먼저 앞장을 섭니다.. 바로 여기에 믿음이 부족한 백성들을 믿음의 군대로 만드는 비결이 있습니다.. 모든 상황, 모든 순간, 모든 일에 있어서.. 제사장이 먼저 그 믿음을 행동으로 옮겨내는 겁니다.. 베드로도 어떻게 물위를 걷게 되던가요? 예수님께서 먼저 물위를 걷는 모습을 보여주셨을 때.. 그 연약한 인간 베드로도.. 물위를 걸어보겠다고 용기를 내게 되었고,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의 두려움으로 물에 빠지기 전까지 그는 그렇게 물 위를 걸어내지 않았더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은.. 성경이 기록한대로.. 택한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심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들 모두가.. 다 귀한 제사장들이 되셔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속한 모든 곳에서.. 크리스천들을 욕하고 비방하고 무시하는 사람들 앞에서... 오늘 우리가 제시한 생명의 길을 주저하며 걷지 않으려는 사람들 앞에서, 이제는 여러분들이 먼저 믿음으로 행동하는 모습을 보여주셔야 됩니다.. 아무리 요동치는 물결일지라도.. 그 위에 믿음으로 올라서는 용기를 보여주셔야 합니다..
또한 그렇게.. 하나님의 명령이라면서 올라서더니만.. 그 물결이 사라지고 마른땅이 드러나 그 위로 걷더라는 것을 그들의 두 눈으로 똑똑하게 확인시켜 주셔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그렇게 그 눈으로 확인을 해야.. 저들은 우리의 뒤를 따라 그 강물을 건너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저들도.. 우리가 누리는 마른 땅을 밟고 건너는 구원의 기쁨과 권리를 함께 누릴 수 있게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야 저들도.. 다음번에는 용기있게 물위에 올라서보고 싶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야만 저들.. 계속해서 광야에 머물러 살 수밖에 없는 이들.. 계속해서 출렁이는 물결을 보며 두려워하며 살 수 밖에 없는 이들이.. 가나안땅의 풍요로움을 맛볼 수 있게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경은 정확하게 기록합니다.. 여호수아의 명령대로 법궤를 멘 제사장들이.. 선두에 서서 나아가서.. 마침내 그 발을 넘치는 강물에 집어넣었을 때.. 그 발이 물에 잠기자.. 흘러내리던 물이 멈추고 쌓이기 시작.. 흘러가는 물이 끊어져서 마른땅이 드러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을 건넜다고 말입니다..
이 요단강을 건너는 기적에서 반드시 저와 여러분이 기억하고 있어야할 사실은 무엇입니까? 요단강물은.. 우리가 믿음으로 그 물위에 올라서기 전까지는 절대로 먼저 멈추고 먼저 갈라지는 일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아직까지도 우리들 앞에 있는 오래된 문제가 그 위력을 잃지 않고 출렁이고 있습니까?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서 아직까지도 우리는 가나안땅을 맛보지 못한 채 요단강 이편에서 저편만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이제는.. 주저하고 두려워하는 내 마음을 접으시고.. 이제는 하나님의 명령에 온전히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순종하다가 죽으면 하나님께 따질 것이라도 있는 것 아닙니까? 내가!! 하나님 말씀 순종했다가 죽은거 아닌교!! 책임지소!! 근데 순종도 못해보고 죽으면.. 고개도 못들고.. 덜덜 떨면서.. 하나님 내리실 처분만 기다려야 되는 것 아니냐는 겁니다.. 오늘 야고보는 이야기합니다..
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무슨 말씀입니까? 여호수아의 말을 믿기만 했다면.. 응~ 믿어!! 그러고 여전히 요단강앞에 머물러 있었다면.. 요단강을 건너는 기적은 경험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야고보가 이 편지를 쓰던 시절, 많은 크리스천들은 헬라문화의 영향아래 놓여있었습니다.. 헬라가 어떤 곳입니까? 상업이 발달하면서.. 먹고살 걱정이 없어진 사람들이.. 이제 슬슬.. 이런 저런 안하던 생각을 하기 시작했고 세상의 근원에 대한 질문을 비로소 시작했던 곳입니다.. 인간의 이성이 극대화되었던.. 그야말로 철학이 전성기를 맞았던 곳이 아닙니까?
그들에게 있어서의 믿음이라는 것이 그러했습니다.. 이론을 믿어주는 것이었고, 그 사람의 생각이 옳음을 인정해주는 것이었습니다.. 다시말해서, 그의 가르침이 훌륭하고 빼어나고 탁월하기 때문에 배우고 인정하는 것이지.. 그 사람처럼 되는 것을, 그 사람처럼 사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니.. 소크라테스같은 사람은 닭값을 외상으로 하고 그 많은 변론들을 했던 거고 그럼에도 존경을 받았던 거구요.. 죽으면서.. 그 외상값을 제자에게 갚아달라고 하고 죽을 수 있었던 것일 겁니다.. 생각만 옳으면, 말만 논리에 맞으면 되는 것이었거든요.. 그가 그렇게 말한 대로의 숭고한 삶을 살고, 그가 말한 이상향을 위해 노력하고 있느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은 시대가 바로 이 헬라시대의 특징이었던 겁니다.. 그런 영향을 이 야고보시대의 크리스천들이 받고 있었던 겁니다..
사도시대 많은 신앙의 선배들이 온몸을 던져서 보여온 믿음을.. 그들은 이제 머리로만 알고 머리로만 믿고 머리로만 존경하고 숭배하고 있었던 겁니다.. 기독교의 모든 복음과 교리와 진리됨을 인정하고 최고의 것으로 여겼던 겁니다.. 또한 그들에게 예수그리스도를 믿느냐.. 천국갈 것을 확신하느냐.. 그러면 믿는다고 확신한다고 대답은 제대로 했던 겁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그 진리대로, 그 말씀대로 살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겁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이 예수그리스도의 사상과 말씀만 믿으면 그만이지.. 그대로 살 필요를 느끼진 못했던 겁니다.... 그리고 그것이 당연하게끔 받아들여지던 시대였다는 겁니다.. 그런 크리스천들에게.. 야고보는.. 이제는.. 알고 있는 것과 행동의 일치를 말하고 있는 겁니다.. 알면 뭐하냐는 겁니다.. 알고 말만하면 뭐하냐는 겁니다.. 무슨 유익이 있으며.. 그것으로 무슨 구원을 얻겠냐고... 그 몸뚱아리가 움직이는 것까지 해야!! 진정한 크리스천인 것을 역설하고 있는 겁니다..
“15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18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 19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무슨 말씀입니까?
아는 건.. 지나가는 삼척동자도 심지어는 귀신도 안다는 겁니다.. 거기다 알량한 대책을 이야기 하는 것은.. 배부르게 하세요. 따뜻하게 하세요. 옷을 입으세요. 보일러를 트세요. 약을 사드시고 병원에 가세요. 누구든지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면 우리는 다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쥐들도 의견을 낼 수 있다는 겁니다.. 근데 문제는 뭐예요? 그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쥐가 없다는 겁니다.. 누구하나 내 하나밖에 없는 목숨 내놓으려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누구하나 손해보고 희생하려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빵을 사주고, 이불을 사주고, 기름을 넣어주고. 병원을 데려가 치료비를 내 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한분이심을 믿느냐? 귀신들도 아느니라.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옳고, 그렇게 하면 된다는 것은 알아요.. 근데.. 내 눈앞의 상황앞에서 우리는 모르쇠로 일관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 알고 있는 말씀, 믿고 있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도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 이것이 2000년전이나, 지금이나.. 하나도 변하지 않은 저와 여러분의 모습인 것을 오늘 하나님은 야고보서를 통해 저와 여러분에게 말씀하고 계시는 겁니다...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잘하는도다!! 하나님이 한분이신 줄 믿는 다고?? 그거 귀신들도 안다.. 그까짓 고백, 그까짓 알량한 고백으로 믿음있다고 말하고 있는 거냐?? 그건 최하급 믿음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18절 보십시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
믿음이 문제될 것이라곤 생각해본 적이 없는 저와 여러분에게.. 우리의 믿음이 문제가 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겁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 믿음은.. 행함으로 보일 수 있는 것이지.. 행함이 없이 무슨 믿음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손도 한 번도 안잡아주고, 편지도 한 장 안 쓰면서.. 입술로만 말로만 사랑한다고 하면.. 그 사랑이 무슨 사랑이냐는 겁니다.. 거짓사랑일 뿐이라는 겁니다.. 똑같다는 겁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 영혼이 없는 육체처럼.. 죽은 것이라는 겁니다. 움직이지 않고 행동하지 않는 너의 믿음, 나아가 너는 죽은 것이다. 선고입니다.
영화 밀양을 보셨습니까? 행함없는 믿음, 회개없는 구원 때문에 상처받은 한 여신도에 관한 내용을 다뤘던 영화입니다.. 신애라는 여 주인공의 아들을 죽인 살인범이.. 투옥됩니다.. 그리고 그를 찾아가 용서하고자 했던 신애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다며 평안하게 고백하는 살인범을 보며 분노합니다.. 예수님이 용서하시면 다야?? 그 폭주로 교회와 하나님에 대한 반항이랄까요? 복수랄까요? 뭐 그렇게 비뚤어진 여신도의 모습을 스크린에 담습니다.. 그러면서 이 땅의 기독교인들을.. 구원받았다고 말하는, 예수믿는다고 말하는.. 반성없는 크리스천들을 한번 꼬집어 주는 영화였는데요.. 어느 한 목사님이 써두신 영화평을 조금 읽어드리겠습니다.
스토리 속에서 신애는 아들을 잃어버린 고통과 절망을 교회를 통해 치유 받고 회복된 생활을 하게 된다. 영상에 담긴 교회의 찬양과 부흥집회, 성도들의 모습들은 일단 나쁘지 않은 모습으로 비춰지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신애가 아들을 죽인 유괴 살인범을 용서해주려고 감옥에 찾아갔을 때에 드러난 그 유괴범의 신앙 태도이다. 그는 어린이의 유괴 살인범으로서 감옥 속에서 어떤 괴로움과 번뇌의 시간을 가진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너무도 평온하고 안정된 모습을 하고 있던 그가.. “나는 이미 하나님의 은혜로 죄 사함과 구원을 얻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감옥에 갇힌 범인은 교도소 전도를 하는 전도자들을 통해 예수님을 영접하고 하나님을 믿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전도자들의 복음은 너무 쉽게만 이해되지 않았을까?
그들은 누구든지 회개하고 예수 믿고 세례를 받으면 구원을 얻고 천국에 들어간다는 복음 교리를 전했을 것인데, 그 복음 교리가 전체적인 구도로는 틀리지 않지만, 피해자에 대한 배려가 전혀 고려되어있지 않은 채, 무책임한 회개와, 감상적인 하나님의 은혜라는 불완전한 구원교리로 감옥에 갇혀있는 그 범죄자를 자기 최면에 빠져들게 하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회개에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마태 3:8)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전에 먼저 너희와 불화하거나 너희가 죄를 지은 그 사람에게 찾아가서 먼저 사과하고 용서를 빌고 와서 예배를 드려야 아버지께서 받으시는 예배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감옥 속의 유괴범에게는 그런 것이 생략된 ‘자기도취’의 구원과 은혜였던 것이다. 이런 신학이 한국교회의 주류 신학이 되고 있기 때문에 믿음은 좋아 보이는데 파렴치한 교인들이 양산되고 있는 것이라 생각된다.
물론 유괴범도 신애가 용서해주러 오기 전에 예수님을 믿고 죄 용서를 받고 새사람이 되어 마음의 평안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랬을 경우에라도.. 구원 받았기에. 그는 더욱 자기 죄에 대한 통렬한 반성과 회개를 통해.. 하나님이 용서하신 ‘은혜로운 용서의 서류’에 ‘피해 당사자의 용서의 도장’을 확인받기 위해 먼저 노력하고 더욱 죄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살았어야 했을 것이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리스도인들은 ‘용서 받은 죄인’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자기는 하나님께 용서 받았기 때문에.. 세상에서 아무에게도 빚 진 것이 없는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신애 같은 사람들’을 미치게 하고 허탈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실망하고 허탈해 하는 문제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구원 받고 은혜 받았다고 간증하며, 자기는 하나님을 믿노라 하는 자들이.. 너무도 파렴치하게..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고.. 거짓말 하고.. 이기적으로 뻔뻔스럽게 살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 모든 문제가 성숙이라는 주제와 관련된다고 본다.
우리의 믿음이 유치한 상태에 머물러 있으면 우리 자신은 은혜를 받았음에도 도리어 어떤 다른 사람들을 미치게 하고, 시험 들게 하고, 불신으로 떨어지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유치한 신앙인은 자기 마음은 편하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이기적으로 보여지고 그래서 더욱 절망감을 주는 교인으로 여겨질 것이다.
또한 우리가 성숙한 신앙으로 자라나지 않는다면 신애처럼 구원과 평안을 노래하다가도 정말로 용서하고 사랑해야 하는 현실 앞에서는.. 하나님 보다 자기 의를 더 앞세우므로 결과적으로는 하나님을 의심하고 대적하는 위치로 추락하게 되고 말 것이다.
영화 밀양(密陽)은 우리나라 기독교의 미성숙함을 보여주고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에 희망의 실마리가 있음도 보여주고 있다. 성숙한 기독교와 성도들은 아픈 사람들의 상처를 치유하고 병든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다. 그러나 유치하고 미성숙한 교회와 교인들은 값싼 은혜를 간증하며 도리어 상처 받은 사람들에게 좌절과 절망을 주는 파렴치한으로 비춰질 것이다. 우리나라 교회와 성도들의 믿음이 더욱 성숙되기를 바란다.
이 영화평은 야고보서의 핵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의 사항 하나를 더 이야기를 하고 있더라구요. 행함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그렇다고 해서..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벌이는 모든 행동이 다 긍정적이고 선한 결과를 낳는 것은 또한 아니다.. 영화에서 신애가 보이는 행동같은.. 미처 성숙하지 못한 믿음에서 나오는.. 어울리지 않는 용서와 감당하지 못할 사랑은.. 자칫하면 간신하게 얻게 된 연약한 믿음까지도 상하게 만들만큼 위험할 수 있음도 아울러 이야기 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진정한 크리스천이 되는 것, 참으로 어려운 일인 것 같습니다.. 믿음과 언행도 100%여야하고.. 그에 따른 행동역시 온전히 100%가 되어야.. 그 믿음으로 행한 행동이.. 아름답게 결실한다는 것 아닙니까? 그 분이 쓴 글 가운데 이 표현이 와 닿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운 용서의 서류에.. 피해당사자의 용서의 도장을 확인받는 것 이 두 가지 중에 어느 것 하나라도 빠지면.. 온전한 용서가 되질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도 저 수많은 피해자의 마음에 든 멍이 빠지지 않고 더 상처가 깊어져만 가고 있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피해자는 도장을 찍지 않았는데, 이미 도장을 찍은 것인양 제멋대로 대하고 행동하는 것이지요? 하나님 준비하신 서류도 아닌 것 같은 서류에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억지로 손을 끌어다가 지장을 찍어놓는 것 같은 그런 류의 이기적인 사과로 자신의 할 일을 다한 것인양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무슨 말씀을 야고보가 하고 있는 것입니까? 18절 다시볼까요?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약2:18)
하나님께 인정받은 믿음, 너에게 보여 인정받겠다는 것입니다. 그 인정받았다는 믿음, 나에게 보여줄 수 있는 진짜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인정받는 크리스천이.. 사람에게 인정받아야한다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께만 인정받고 사람에게 인정 못받는 것이나.. 사람에게는 인정받으나 하나님께는 인정 못 받는 것.. 이 두 가지 모두 제대로 된 크리스천이 아니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떠하십니까? 하나님과 사람들.. 모두에게 인정받으시는 크리스천이십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야고보는 분명하게 이야기합니다..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행함으로 인정받으십시오.. 믿음은.. 사랑은.. 고린도전서 13장, 모든 사랑의 모습은 행동입니다. 행동으로 나타나야합니다.. 행동으로 그 믿음을.. 그 사랑을 증명하십시오.. 그래서 이 땅에 내동댕이쳐져 있는 교회와 우리 크리스천들을 향한 신뢰와 기대를 회복하시길 바랍니다..
특별히 하일교회는 이런 소문이 났으면 좋겠습니다.. 그 교회.. 말 수는 적으나.. 그 말한 것은 반드시 지켜내는 교회다.. 그 교회라면 정말로 믿을 수 있다.. 그 교회는 온몸으로 복음을 증거하는 교회다.. 그 교회 교인들이야말로 이 시대 얼마남지 않은 크리스천의 자존심이다.. 진짜배기 그리스도인들이다.. 라고 말입니다...
이 놀라운 소문이.. 저와 여러분의 생전에 들려지길 소망합니다.. 끝까지 정직하시고, 끝까지 성실하시고, 끝까지 순종하시길 소망합니다.. 언제까지요? 하나님의 오케이 싸인이 떨어질 때까지요..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마침내.. 인정해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그동안의 설움과 아픔으로 인해 흘리는 눈물과.. 그래도 내가 하나님 앞에 믿음을 지켰노라고 흘리는 뿌듯함의 눈물로.. 우리의 인생의 한 폭을 멋지게 수놓으실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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