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애순 명창의 생애와 소리의 특징-박동실제 심청가 전승을 중심으로>
정대하(목포대 대학원 국문과 석사 2학기)
2004년 10월 20일
■연보
1924년(1살) 12월 26일 전남 곡성군 옥과면 옥과리 27번지에서 한상학과 임처녀의 8남매 중 일곱째로 출생했다.
1935(12살)~1938년: 담양군 지실마을 정각에서 박동실 사사
(춘향가의 이별가에서 어사출도까지, 수궁가 전판, 심청가 전판, 적벽가 초앞에서 활쏘는데까지)
1936년(13살) 일본 콜럼비아음반회사 유성기 음반 취입(박석기 김소희 추천)
단가 <뒷동산>, 춘향가 중 <이별가> 수궁가 중 <산신제 지내는데>부터 <녹수청산>까지, 남도민요 <강강술래> <쾌지나칭칭> 등을 박동실제로 녹음.(엘지미디어 전량 수입했으나 복각되지 않음)
1940년(17살)~1944년(21살):박석기가 이끌던 화랑창극단에서 활동
1942년 9월 만주개척촌위문연예단 공연(매일신보)에서 춘향가 부름
1944년(21살) 4월 21일:담양군 대전면 대목리 331번지 원무웅과 결혼(이혼 신고
일:1973년 2월 17일)
1945년 박동실씨가 주도하던 광주성악연구회에 가입
1945년(22살)~1949년(26살) 임방울과 그 일행에 합류, 곡성 남원 구례 순창 등지를 순회하며 다녔다. 임방울 명창과 인연을 맺게된다.
1950년 6월 정읍 공연에서 한국전쟁 만남. 임방울의 아이 임신 중
1950년(27살) 한국전쟁이 일어나 9.28 수복 이후 국악인들이 모여 만든 동일창극단 에서 임방울과 순회 공연에 나섬. 임방울의 딸 다리 출산.
1952년(29살)~1959년(36살):광주국악원 판소리 사범/35살 이후 개인교습소
1961년(38살):박녹주한테서 흥보가 사사
1973년~ 광주시립국악원 판소리 사범
1974년 전남도지방문화재(이후 광주시지방문화재-판소리 심청가)
■목차 구성
1. 한애순 명창을 주목하는 이유
한애순(1926~)의 심청가는 이날치의 것을 이어받은 것이다. 특히 스승 박동실을 통해 김채만제 심청가 전바탕을 보유하면서도 다른 바디가 끼어있지 않아 김채만제 특성을 고스란히 갖고 있다. 박유전-이날치-김채만-박동실로 이어지는 서편제 소리의 원형을 보유한 소리꾼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2..한애순 일가
호남검무를 잇는 한진옥이 친오빠다. 조부 韓奉進은 1922년 전북 순창군 금과면 내동리 225번지에서 옥과로 전적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한진옥은 금과면 내동리에서 태어나 11살 무렵 옥과로 옮겨온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부친 韓相學(1887~1939)은 해금 가야금에 능했던 무악 명인이었으며, 모친 임처녀 역시 전라도에서 알아주는 무당으로 한애순은세습 예술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한상학은 4형제(관옥 진옥 용옥 철옥)와 네자매(귀례 복례 애순 옥자)를 뒀다. 무계를 이었던 형 관옥(1909~)씨는 1923년 옥과면 율사리 출신 朴陽書(1908~?)와 결혼했다.
그런데 한애순은 옥과 출신인데도 1940년대에 순창에서 많이 살았다고 한다. 1945년 임방울과 그일행에 합류한 뒤 인연을 맺고 두달동안 순회공연 뒤 순창 친정집으로 돌아왔다고 말했다. 천이두,『명창 임방울』1998, 313쪽
3. 사승관계
4. 대중활동
1945년 해방 이후 광주에서 탄생한 성악연구회에는 박동실 오태석 조몽실 성원목 조동선 공기남 공대일 한영호 한갑득 한승호 안채봉 한일섭 김경애 한애순 공옥진 등이 창극 춘향전을 꾸며 광주에서 공연해 대성황을 이뤘다. 정범태, 앞의 책
5. 심청가 전승 내력
심청가는 박유전-정재근-정응민-정권진(조상현,성창순,성우향)으로 내려온 강산제 또는 보성소리에서도 독특한 창법으로 전승되고 있다. 심청가 사설과 장단은 한애순본과 정권진본을 비교해 유사성과 차이점을 분석할 수 있다. 문화재관리국, 『무형문화재보고서』
정병헌은 심청가를 비교하면서 신재효판, 정재근판(정권진), 이날치판(한애순)으로 한정했다. 최혜진은 김연수본-동편제, 한애순본-서편제, 정권진본-강산제로 나눠 심청가의 창본과 사설을 비교했다.
6. 한애순 소리의 특질
7, 맺음말
■의문점
1)왜 한애순 친청집은 순창으로 다시 이사를 갔을까?
순창 금과면에서 당골을 했던 모친 임처녀는 장판개 가족들이 이사올 무렵 옥과로 옮긴 점으로 미뤄 당골판을 사고 팔았을 가능성이 높다. 1940년대 장판개 사후에 또다시 순창으로 옮겨가진 않았을까?
2)한애순은 왜 지방 명창에 머물렀는가?
1964년 무형문화재 제도가 도입됐지만, 1974년에야 한애순은 심청가로 전남도지정문화재가 된다. 박초월 박녹주 김소희 등이 인간문화재가 된 것과 비교해, 무형문화재 제도가 오바탕을 중심으로 지정한다는 점 때문인가?
3)임방울에게 수궁가도 배웠을까?
한애순 명창은 인터뷰에서 임방울한테서 적벽가를 조금만 배웠다고 말했다. 그러나 각종 자료와 기록에는 수궁가도 배운 것으로 나온다.
■한애순 기록 자료와 책
1)송방송,『매일신문 음악기사 색인, 한국음악사학보 제9집
매일신문 42년 9월 3일자 만주개척촌위문연예단 일원으로 참가해 춘향가를 불렀다
한승호는 심청가를 불렀고, 한영숙은 살풀이 춤.
수행기가 42년 9월 15일과 18일자에 실렸다고 함
**김성혜 『조선일보 국악기사』 (1920~1940)나 이수정 『동아일보 국악기사』(1921~1940)에는 한애순 명창에 대한 기사가 보이지 않음.
2) 김명환 구술, 『내 북에 앵길 소리가 없어요』,뿌리깊은 나무, 1992
육이오 후에 보성얼 갔지.보성은 우향이 공부시길라고 들어갔지...중략...첨에야 한애순이한테 공부럴 좀 시켜봤어. 한 두어달 정광수 한테도 시켜보고
3)판소리연구 제2집
한승호 명창 대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