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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를딛고서는길(7) - 절망(3) 사무엘상 1장 1-8절
<절망(3) : 나로 인한 타인의 절망> 하나님의 역사임을 인정하라
한 10년 이상 된 것 같은데 배우 김명민과 이지아 주연의 베토벤 바이러스를 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그 드라마의 배경에는 걸출한 두 명의 지휘자가 등장합니다. 한명은 노력파인 주인공 강건우, 한명은 강건우의 라이벌 천재 정명환입니다. 마치 모차르트와 살리에르처럼, 마치 제갈량과 주유처럼 정명환은 놀면서도 항상 저만치 앞서가는 모습으로 성장을 하는 반면, 강건우는 늘 노력에 노력을 거듭해야 했던 것입니다. 늘 강건우는 그렇게 타고난 정명환을 부러워했고 질투를 하면서 늘 자기보다 한발 앞서나가는 정명환을 바라보면서 절망도 하고 좌절도 하면서 끝까지 그를 뛰어넘기 위해라기보다는 뒤처지지 않기 위해? 따라잡기 위해 부던히도 노력을 했던 것이지요? 그렇게 노력하고 노력한 그는 정명환도 인정하는 세계적인 지휘자 강마에가 되었고, 자기가 노력해서 세운 그 음악의 기준이랄까 틀을 지켜내기 위해 철저하고 엄격한 지휘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보십시오 살리에르는 모차르트 때문에 죽습니다. 삼국지의 주유역시 제갈량으로 인해 절망을 느끼고 하늘을 원망하며 죽음을 선택했다면, 강건우는 정명환으로 인해 시시각각 절망을 느끼면서도 쫓아가도 쫓아가도 넘을 수 없는 벽을 그래도 붙잡으며, 그와의 관계를 잘 유지하며 자기만의 음악 세계를 완성해내었던 것이지요. 그랬던 그가 자신과 이름이 똑같은, 그러나 어린 시절 정명환과 같은 이야기, 지금 악기의 조율 상태가 1/8정도 음이 높다는 등, 절대음감을 가진 천재 강건우를 만나면서, 또다시 질투심을 느끼기도 했지만, 두루미라고하는 여주인공과 함께 그의 음악세계가 따뜻해지는 그런 한국형 이야기가 그려졌던 것이지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일까요? 여러분, 많은 분들이 동의하지 않으시고 부인하시겠지만, 늘 여러분의 존재 자체가 누군가에게는 절망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아니 오늘도 우리는 누군가의 존재자체로부터 절망을 경험합니다. 수많은 아이들이 엄마 친구의 아들, 엄마 친구의 딸의 존재 때문에 늘 비교를 당하고 절망을 경험하는 것이지요? 나와는 전혀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이 땅에 함께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아무리 노력해도 닿을 수 없고 나는 어떻게 발버둥을 쳐도 얻을 수 없는 것들을, 한번만 만져보고 싶고 누려보고 싶은 것들은 저들은 별것 아닌 것처럼, 하찮은 것처럼 대하며 살고 있는 모습을 마주하기도 하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우리는 절망에 빠지곤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도 절망의 이유가 됩니까? 수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누군가의 약함을 부족함을 갈망을 이해하지 못한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의 모든 감정을 이해해주시고 체휼해주실 수 있는 우리 예수님이 계신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저 인간은 죽었다 깨어나도 모르는 나의 아픔을 예수님은 이미 아시고 우리 곁에 오셔서 우리를 위로해주시니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은 내가 의도하였든 의도하지 않았든 누군가에게 절망의 감정을 주게 되는 것에 대해서 생각을 해보려고 합니다. 나의 성공이, 나의 잘됨이 누군가에게는 아픔이요, 상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 이미 알고 계시지요?
특별히 이제 조금 있으면 수능시험이 있고, 합격자발표가 있는 것입니다. 요즘은 전화로 확인을 하고 홈페이지로 확인을 하니까 조금 덜한데, 제가 학교에 다닐 때는 합격자 명단을 커다란 건물 벽이나 게시판을 만들어서 세워두었던 것이지요? 그날 그 자리에서 많은 사람들의 희비가 교차하는 것입니다. 누구는 아무리 찾아도 자기 이름이 없어서 울며 되돌아서고 주저앉는데, 누구는 합격했다고 기뻐하고 헹가레를 치고 맛있는 것 먹으러 가자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좀 속상한 기억이 제게도 있습니다. 저희 군목들이 9주 훈련을 마치고 임관을 준비할 때 티오에 따라서 육군, 해군, 공군으로 나뉘어지는 것입니다. 가장 인기 있는 곳이 이제 공군, 그 다음이 해군, 그 다음이 육군인데, 저는 애시당초 육군을 생각했기 때문에 아예 지원도 안했는데, 공군과 해군에서 복무를 해보겠노라고 역시 많은 목사님들이 몰렸던 것입니다. 서로 공군군목, 해군군목이 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던 중, 이름도 생각나는데 밝힐 수는 없고 한 목사님이 다른 여러 목사님들 가운데 해군 군목으로 제비가 뽑혔던 것입니다. 그랬더니 “오예! 하나님 감사합니다. 아싸! 야호! 제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여기가서 나 해군되었다고 저기가서 나 해군되었다고 막 떠들고 자랑하고 전화하고 제 체감시간이 한 30분 정도는 난리도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좋은 일이니 기뻐하고 축하하는 것이 맞는데, 그 분의 경솔한 행동과 언행은 천주교 신부들, 불교 법사들, 그리고 예수님을 믿고 있던 훈육 장교와 훈육대장 앞에 참 부끄러운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다른 분들은 기도응답도 못 받는 목사고, 하나님이 사랑하시지 않는 목사가 되버리고 말았던 것이지요? 참 저분이 법사나 신부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부족한 제가 이렇게 해군에 복무하게 되어서 송구합니다. 제가 여러 목사님들의 마음까지 받아 최선을 다하는 해군 군목이 되겠습니다.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조용히 좀 뭐 이렇게 기뻐했으면 그렇게 모두에게 축하받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여러분, 목표를 이룬다는 것, 원하는 것을 얻어낸다는 것은 우리에게 행복과 기쁨을 주는 일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우리가 목표를 이루는 순간, 동시에 어김없이 찾아오는 불편함이 있는 것입니다. 특히 경쟁구도에서 이겼을 때, 혹은 누군가의 것이 확실시 되던 것이 나에게로 넘어오게 되었을 때, 여러분, 그때 경험하는 불편함 감정은 오늘 나를 나쁜 사람으로 만들어버리고 마는 것이지요? 특별히 다른 사람의 것이 될 수도 있는 것을 오늘 내가 빽이 있고 힘이 있어서 그것을 정당한 방법이 아닌 다른 루트를 통해서 얻고 나면, 정확히 말해 가로채고 나면, 여러분, 그 자리, 그 승리는 참으로 개운치 않은 것이 되는 것입니다. 나로 인해 절망감과 상실감을 얻어야만 하는 사람들, 그로인해 괴로워할 사람들을 생각하면 오늘 나의 이 승리는 참으로 죄스럽게 느껴지게 되는 것이지요?
물론 이 세상의 논리에서 약자는 도태되고 경쟁에서 뒤처지면 결국 그놈은 그거밖에 안되는 인생이었던 것이라고 이야기를 하겠지만, 그렇게 저들은 아랑곳없이 저 앞을 향해 뒤돌아보지 않고 또다시 경쟁구도에 뛰어드는 것이 맞겠지만, 아뇨,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렇지 않은 것이지요? 내가 정당하게 얻은 기쁨 중에서도 마냥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없는 우리가 아니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승리 뒤의 불편한 감정이 오늘 우리가 생각해보고자 하는 나로 인해 타인이 겪게 되는 절망에 관한 것입니다. 오히려 내가 의도한 것도 아닌데 왠지 뭔가 내가 잘못한 것 같고, 내가 지금 얻어 누리고 있는 것을, 내게 주어진 것을 다시 반납하고 내 놓아야 할 것 같은 그런 기분, 그런 마음의 무거움이 어느새 우리를 짓누르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찾아오는 불편한 감정은 어떻게 다스리고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어떠한 태도를 가지고 우리에게 주어진 승리를 대해야 할까요? 오늘 그 이야기를 사무엘상을 통해서 해보려고 합니다.
첫 번째, 상대방의 절망 앞에서 우리가 가장 주의해야할 것은 교만입니다.
오늘 읽으신 본문에는 엘가나라고 하는 한 사람이 등장하고, 그의 두 아내, 한나와 브닌나의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여러분 잘 아시다시피 한나가 첫 번째 부인이요, 브닌나가 두 번째 부인인데, 브닌나는 자식으로 인해 기쁨을 누리고 있는 반면에, 한나는 아이를 낳지 못해 늘 격분하게 되고 울게 되는 나날을 보내게 되었던 것입니다. 브닌나가 자식으로 인해서 기쁨을 얻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입니다. 여인이 건강하여 아이를 낳는 것은 이 땅의 많은 여인들이 하는 일인 것이지요? 그런데 이 일이 오늘 한나에게는 절망스럽고 원망스러운 일이었던 것입니다. 왜 나에게, 왜 나만 모든 사람이 다 할 수 있는 것을 못하는 아픔을 주셨습니까? 이처럼 남들 다 하는 것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기에 오히려 더 절망스러울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럴 때, 오늘 우리의 평범하고 일상적인 것이 누군가로 하여금 절망이고 아픔이고 고통이 되게 할 때, 여러분 오늘 우리 하나님은 어떻게 우리가 행동하기를 원하실까요?
오늘 브닌나는 반면교사로서 우리 가운데 소개되고 있습니다. 자기로 인해 누군가 절망을 경험하게 될 때 어떤 태도를 취해야 했는지 브닌나를 통해서 소개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자, 보십시오. 당연한 일입니다. 브닌나가 결혼을 해서 자식을 낳고 기쁨을 얻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의 곁에 한나가 있었던 것이지요? 아이를 낳고 싶어도 낳지 못하는 여인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한나 앞에 브닌나는 자식이 없는 한나를 괴롭히고 업신여겼던 것이지요? 아브람의 아내 하갈이 임신을 하고 여주인 사라를 멸시했던 것을 기억하시지요? 오늘 브닌나가 똑같은 실수를 저질렀던 것입니다. 물론 한나를 갑절로 사랑했던 남편의 태도가 원인제공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시대적인 상황으로 보더라도 대를 이을 자식을 여럿 낳은 브닌나는 이미 집안에서의 자리와 남편의 사랑을 어느 정도 확보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만큼 여유가 있고 한나의 마음을 돌보아줄 수 있는 위치였음에도 불구하고 오늘 브닌나는 한나의 마음을 이해해주지 못했던 것입니다. 자식이 없어 늘 소외감 느끼고 미안함을 가지고 죄책감까지 가지고 있을 한나를 걱정하고 배려하려는 남편의 마음을 오히려 더 시기하고 질투하고 고통스러워하는 상대방의 절망 앞에서 오히려 그 아픔을 가중시켰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나의 성공과 상대방의 절망 사이의 간극은 결코 작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의 존재를 기억하고, 그 앞에서 교만함과 우쭐함을 갖지 않는 것만으로도 이 간극은 갈등으로 번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다시말해 상대방의 절망 앞에서 교만하지 않을 수만 있어도 문제는 생겨나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나의 기쁨을 기쁨으로 누리되 절대 자랑과 교만이 되지 않도록 해야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물론 내가 교만하지 않더라도 오늘 나의 존재 자체를 상대방이 시기하고 미워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저 살리에르와 강건우, 주유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그 시기심을, 질투와 미움을 이해해줄 수 있어야 합니다. 거기에 대고 “아무리 노력해도 너는 나를 따라올 수 없어”라든가, 저 에디슨의 일화처럼, “천재의 1%의 영감은 99%의 노력으로 따라올 수 없다”는 망언만큼은 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교만하지 않고 우쭐하지 않고 자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바로 욥의 제로감사가 여기에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어쩜 그렇게 하나님은 설교가 이어지도록 하시는지 매번 놀라는 것이지요? 보십시오. 교만은 직접적으로 자신을 자랑하는 것, 상대방을 멸시하는 것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아주 초보수준의 교만인 것입니다. 레이먼드 크래이머라는 사람이 『예수 심리학』이라는 책을 썼는데 신약성서에 등장하는 교만을 이렇게 정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아닌 자신의 능력을 믿는 것이 교만입니다. 상대방을 무시하거나 스스로 우쭐한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자신의 성공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교만입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오늘 우리가 상대방 앞에서 교만하지 않을 수 있는 비결은, 하나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내게 주신 것이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은 것이 없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주시지 않은 분도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것을 인정하면, 내게 주신 것을 우쭐해 할 이유도 없고, 저가 가지지 못한 것을 우습게 여길 수도 없는 것입니다. 모든 것은 저의 잘못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신 때문인 것이지요? 그렇게 생각하면 어떻게 생각이 이어지게 됩니까? 오늘 저에게 자식이 있고 나에게 자식이 없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히려 더욱 조심하게 되고 배려하게 되고 생각하게 되겠지요. 경솔하게 다 내가 한 것인양 자랑하고 우쭐하지 않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모든 사람보다 육신으로 뛰어난 사람이었지만 그가 저 거들먹거리는 유대인들 앞에서 자랑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15:10)
팔복 세 번째 시간 말씀드렸지요? 상대방의 코를 납작하게 해주고 싶은 순간이 찾아오더라도 여러분, 온유한 자가 되시길 바랍니다. 내 힘을 천박하게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고하신 뜻 앞에 통제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힘을 비롯한 내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자유롭게 쓰시고 일하실 수 있도록 맡겨드리시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상대방이 겪을 절망, 그로 말미암는 불편함으로부터 조금은 자유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가 교만함을 버리게 되면, 나의 성공과 기쁨을 하나님의 역사, 하나님의 은혜로 인정하게 되면, 나로 인해 절망에 빠진 사람 역시도 위로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가 나만의 능력으로 성공을 이루었다고 자랑하고 과시하면 상대방은 그만큼 자신의 무능함과 부족함에 자괴감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성공이 내가 잘나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하심이요, 은혜라면, 상대방 역시 더는 자기 자신을 나와 비교하며 학대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내가 누리고 있는 기쁨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겸손하게 고백한다면, 상대방도 자신의 상황이나 환경, 조건들을 탓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여쭈어 볼 수 있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겸손하게 잘 처신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이 여전히 나에게 반감을 가질 수 있습니다. 마치 주유처럼 “왜 하늘은 주유를 내시고 또 공명을 내셨습니까?” 왜 하나님은 저 사람만 도우시고 나는 돕지 않으셨을까? 하고 의심을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상대방이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 고개를 들고 여쭙기 시작하면, 여러분이 이런 의구심과 오해도 서서히 풀리게 됩니다. 왜요?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을 찾고 구하는 자에게 반드시 지혜와 깨달음을 주시는 분, 꾸짖지 않고 후히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사55:6,8절)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약1:5)
오늘 한나가 오늘 이 절망을 어떻게 극복하는지 보십시오. 한나는 자신의 상황을 하나님께로 돌리는 것입니다. 그로 하여금 성태치 못하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알고 하나님께로 나아갔던 것입니다. 인간 브닌나에게 복수하거나, 남편 엘가나에게 매달렸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 심정을 통하며 기도했던, 그 마음의 슬픔을 아뢰었던 것입니다. 그랬더니 그 절망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하나님 역사해주셨던 것이지요?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시40:1-2)
남편 엘가나의 갑절의 위로를 뒤로하고 한나는 하나님께 애통하며 기도함으로 오늘 마침내 주시는 하나님의 응답을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기도하며 낳은 아들 사무엘을 통해 이스라엘을 회복하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엘리제사장을 통해서 고통과 절망을 가지고 당신을 찾아온 한나에게 응답을 주십니다.
“엘리가 대답하여 이르되 평안히 가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네가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니 이르되 당신의 여종이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하고 가서 먹고 얼굴에 다시는 근심 빛이 없더라”(삼상1:17-18)
여러분, 교만을 버리고 모든 것을 하나님의 역사로 인정하시는 것입니다. 상대방도 하나님의 역사로 인정하고 하나님께로 나아갈 때, 그 모든 절망과 슬픔을 기도로 바꾸어 하나님을 부르짖어 찾을 때, 하나님은 역사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저의 절망을 기쁨으로 근심을 찬송으로 바꾸어 주시는 것입니다. 언제요? 오늘 내가 교만하고 우쭐하지 않고 하나님의 역사로 이 은혜를 누리고 있음을 인정하고 고백하게 될 때, 모든 관계가 회복되고 새로운 기쁨을 허락해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 앞에 사람 앞에 늘 겸손한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이 모든 결과와 승리가 하나님의 섭리요, 은혜요, 역사임을 인정하게 될 때, 우리는 상대방에 대한 미안함으로부터, 죄책감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게 됩니다. 조금 바꿔 말씀드릴까요? 오늘 우리의 승리와 오늘 우리의 기쁨이 하나님 앞에서 정당하게 얻은 것이라면, 더는 저 상대방에게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되겠다는 것입니다.
교만함의 문제를 하나님 앞에서 해결하셨다면, 다음으로 우리가 해야할 일은 헛된 감정에 에너지를 소진하지 않도록 우리의 마음을 다잡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의해야할 감정이 바로 “괜한 미안함”입니다. 교만하지 않고 겸손함을 유지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한 일인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작정 미안해할 필요도 없습니다. 만약 다른 사람의 것을 의도적으로 훔쳐오거나 교활하게 수를 써서 내 것을 삼은 것이라면 얘기가 다르겠지만, 오늘 그 모든 과정에서 정당하고 경쟁했고 정당하게 노력했고, 정당하게 결과를 쟁취한 것이라면 그렇게 하나님께서 나에게 허락해 주신 것이라면, 오늘 내가 얻은 승리와 결과에 대해서 상대방에게 더는 미안해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자리와 승리와 결과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선물을 받고서는 계속해서 다른 사람에 대한 미안한 마음과 죄책감만 가지고 주저 앉아 있다면, 그렇게 그 사람만 바라보며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머물러 있다면 하나님의 마음은 어떠실까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 승리, 그 기쁨, 그 결과, 그 놀라운 선물을 주신 이유는, 그것을 가지고 기뻐하며 세상으로 나아가 선을 끼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라는 뜻이실진대, 오늘 우리가 죄책감으로 의기소침하고 웅크리고 있다면 그것은 뭔가 잘못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인간편에서 인정하지 못하겠다고 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 무례한 모습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로 인해서 절망을 경험하는 사람에 대해서 안타까움을 가질 수는 있어도 그것 때문에 오늘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와 선물을 홀대하고 내팽개쳐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내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며 손사래쳐서도 안될 것입니다. 미안함이 감사함을 덮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선물받은 자로서의 책임감이 죄책감에 밀려나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감사함으로 빚진 자의 마음으로 오늘도 주어진 자리에 더 열심을 내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저 죽어가는 사람들 앞에서 생명을 허락받하 하루를 더 살게 된 우리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할 태도일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는 살아있으면 있을수록, 숨을 내쉬고 들이마실 때마다 죄를 짓고 악을 행하는 이기적인 인간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기대하시는, 오늘도 저 사람의 것이 될 수도 있었던 것을 나에게 맡겨주시는, 하나님의 그 마음을 여러분 꼭 헤아려드릴 수 있는 복된 분들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에는 특별한 기대가 있습니다. 오늘도 죄책감과 미안함에 오늘 우리의 할 일의 자리에 서지 못하시면 안됩니다. 주저앉아 있지 마시고, 오늘 내게 맡기신 것을 감사하며 그리고 빚진 자의 책임감을 가지고 오늘도 최선을 다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시는 복된 분들이 다들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았던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사도바울인데 이렇게 고백합니다.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롬1:14)
사도바울은 오늘 그가 누린 모든 혜택, 바리새인중에 바리새인, 가말리엘 문하에서 공부한 것, 태어날때부터 로마의 시민권자 된 것, 그렇게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한 것, 그 모든 것을 모든 사람에게 빚으로 여기며 채무자가 빚을 갚아나가듯 그의 생애, 핍박하는 자기를 도리어 사도를 삼아주신 하나님을 위해서, 그리고 오늘 죽어가는 영혼들을 위해서 다 사용했던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 주신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나는 아무리 뒤져봐도 이런 찌질한 것들밖에 없어” 라고 이야기 하지 마시고, 오늘 내게 주신 그것으로 하나님 앞에 영광 돌리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는 한 달란트받은 사람의 심정이기가 쉽습니다. 아뇨, 한 달란트도 어마어마한 것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시는 것입니다. 불평하고 불만하고 땅에 묻어두어서는 안됩니다.
아닌게 아니라 오늘 우리가 보고 듣고 만지고 느끼고 말하고 쓰고 타고 누리고 있는 것들을 보며 너무나도 부럽고 절망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주일에도 말씀드렸지만 이 자유 대한민국에 태어났다는 것 한 가지 만으로도 우리는 인류를 향한 어마어마한 빚을 지고 있는 것입니다. 어마어마한 책임감 속에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이 모든 것을 허락하신 하나님 아버지께 언제나 모든 것에 감사하시고 그 사실로 인해 행복하시고, 내 모든 것 주님 주신 것, 주님을 위하여 사용하시는,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부요한 자가 되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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