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트와 엔카 4부........총4부 (마지막....)
◎ 트로트가 엔카의 아류적 음악인가?
☞ 일본에서는 트로트를 일본 엔카의 아류 적인 음악으로 한국에 전해 졌다고 하는 말이 있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이것은 옳지 않은 주장이다.
1930년에 "유랑인의 노래"로 취입가수로 데뷔한 '채규엽'이 "하세가와 이찌로(長谷一郞)"라는 일본 예명으로 1932년 정월에 위 노래 <고가마사오> 작곡 <후지야마 이찌로> 노래를 "술은 눈물일까 한숨이랄까"라는 곡명으로 번안한 음반을 내게되는데, 이 일은 <한국가요는 일본 가요를 번안해 부르거나 모방한 것에 불과하다>는 오해와 주장이 등장하게된 원인이 되고 있다.
그러한 주장에 대한 반박의 근거는,
(i) 그 당시 일본가요를 번안해서 부른 것이 다수 있지만, 그러나 당시에도 이미 '김서정'이 작곡한 "강남달(원제:낙화유수)" "봄노래(원제:봄노래 부르자)" 그리고 '채규엽'이 작곡한 것으로 알려진 "유랑인의 노래"등 순수한 우리 창작가요도 다수 유행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영국, 미국, 스코틀랜드, 러시아, 찬송가등 외국곡에 가사를 붙여 부르는 일이 더 많았다고 한다.
이 노래들은 레코드 시대가 열리기 전부터 막간무대에서 널리 애창되고 있던 우리의 창작가요라는 점을 생각하면, 한국 가요가 전적으로 일본가요의 영향아래서 태어나고 성장했다는 주장은 옳지 않은 것이다.
(ii) 또한, '고가마사오'는 한국에서 청소년기를 보내며 자랐다고 전해지는데, 이 때 한국의 경기창,남도창, 그리고 서도창이나 민간 속요들을 상당수 알고 있었다고 한다.
이렇듯, 자연스럽게 몸에 배인 한국의 민요적인 요소가 '고가마사오' 자신의 작품뿐만 아니라 여러 가수들의 창법에 영향을 주었으리라는 생각된다.
(iii) 일본에 '고가마사오'가 있다면 한국에는 한국 트로트의 대부 손목인.전수린.김교성.박시춘이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의하면 한국의 작곡가 전수린과 고가마사오는 상당한 교우관계를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두 사람의 이런관계는 서로의 음악에 대한 정보를 나누게 되고 따라서 미래지향적인 노선 또한 닮았을 것이다.
1932년 가수 '이 애리수'가 '전수린'작곡의 [고요한 장안]을 [원정(怨情)]이라는 곡명으로 일본어판으로 발표했을 때, 일본 박문관(博文館)에서 출판하는 잡지 "신청년"에서 '고가마사오'의 "사케와 나미타까 타메이키까(酒 淚 溜息)"가 '전수린'의 "고요한 장안(원정)"을 표절했다고 비난했다.
가요평론가이자 작사가 '김지평'이 [권부에 시달린 금지가요의 정신사]에서 이들 두 곡을 악보로 대조해 분석한 바가 있는데, 두 곡은 모든 점에서 흡사한 점이 많다.
당시 한국에는 레코드 시설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이미 1926년경에 작곡한 [고요한 장안]이 1932년에 가서야 일본에서 [원정]이란 제목으로 '이 애리수'의 노래로 취입되어, 레코드로는 "사케와 나미타까 타메이키까(酒 淚 溜息)"가 한 해 먼저 나왔지만 실제로 한국에서는 [고요한 장안]이 극중에 막간가수의 노래로 그 이전부터 불려지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곡이 조선곡을 표절했다는 것이다.
또한, 일본의 음악 평론가 '모리(森一也)'는 당시 '고가마사오'가 조선에 살고 있을 때 들었던 '전수린'의 멜로디에 영향을 받았던 것 같다고 분석하고 있다.
이 사실은 일본의 유행가와 한국의 유행가가 닭과 계란의 관계처럼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상호간에 영향을 주고받으며 태동하고 성장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iv) 일본과 음악적으로 교류하기 이전인 1870년경부터 조선에서는 교회를 중심으로 서양음악이 가르쳐지고, 1910년경에 와서는 본격적인 음악학교들이 설립되어 이미 "조선 정악 전습소" "이화학당" "배재학당"등에서 서양식의 성악과 기악이 가르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이 시기에 이미 "시카고 음악학교"등 미국이나 구라파로 유학을 다녀오는 이들도 많았기 때문에, 창작가요를 작곡할 소양과 외국음악에 대한 정보를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트로트라는 음악이 일본의 엔카의 변형으로 한국에 전해 졌다는 주장은 타당하지 않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