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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절 문화재와 자취
수성구 지역에는 2008년현재 총 45점의 국가지정문화재가 있고 총 6점의 대구시지정 문화재가 있다. 특히 이곳에는 대구국립박물관이 소재하고 있어 중요문화재들이 많은데 종류별로는 국보 3점,보물 16점,중요민속자료 26점이 국가지정문화재로 등록돼있다. 대구시지정문화재로는 유형문화재 3점,무형문화재 3점,민속자료 1점등 7점이 있고 문화재자료가 4점 등록돼있다.
시대별로는 지질시대 1개소,청동기시대 26개소,초기철기시대 2개소, 삼국시대 61개소, 통일신라시대 1개소, 고려시대 2개소, 조선시대 36개소, 근현대 5개소 등 135개소에 이르고 있다.
유적의 종류별로는 문화유산 가운데 유적을 보면 유물산포지가 12개소, 생활유적 중 주거유적이 26개소,기타가 16개소, 무덤유적 중 선사분묘가 17개소,고분이 25개소, 고려,조선묘가 3개소,산업생산유적 가운데 요업이 2개소,기타 1개소정치국방유적으로는 성곽이 2개소, 교통통신유적으로는 봉수가 1개소가 있다. 주거건축 1개소,유교건축 10개소가 있고, 기념물 가운데 비갈로는 선정비가 3개소, 충효비가 3개소,기타 2개소가 있고 자연유산으로는 노거수가 9그루,지질유산이 1개소 있다.
1,문화재
가, 유형문화재
*국립대구박물관소장 국보=금동여래입상(182호),금동보살입상(183호),금동보살입상(184호)
*국립대구박물관소장 보물=소림사오층전탑내 유물(325호)-금동제사리탑(325-1호),녹색유리배(325-2호),녹색유리제 사리병(사리제외325-3호),금은제수형장식구(325-4호),금동제원윤(325-5호),옥류-경옥곡옥,유리원옥,수정능옥,마노단옥,벽옥관옥(325-6호),은환(325-7호),향목(325-8호),목실(325-9),상감청자원형합(325-10)
*국립대구박물관소장 중요민속자료=진주하시묘출토유물(229호)-복식,장의,창의,저고리,치마,버선,속곳류,바지,요,이불,베개,멱목,모자,돗자리,빗점,옷감,파손된 옷(229-1호),서간문,곽주서,치부기록,곽주모친 내사돈 장남서,이남서,삼남사남서,출가녀서,미상(229-2호)
*대구시지정문화재
♦영영축성비(嶺營築城碑)=대구시유형문화재 제4호로 수성구 만촌동 산83-5 영남제일관 앞에 세워져있다. 이 비는 영조 13년(1737)2월에 대구성을 석성(石城)으로 쌓고 성을 축조한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처음 대구읍성은 토성으로 쌓았는데 오래되어 허물어진 것을 선조가 임란 직전 보수를 했으나 임진란이 일어나 왜적의 대구침입으로 허물어졌고 그뒤 남쪽의 방어를 위해 대구에 석성을 쌓아야한다는 공론이 있어오다 경상도 관찰사겸대구도호부사 민응수(閔應洙)가 조정에 건의하여 마침내 석성을 쌓게되었다. 이 비는 축성 이듬해 민응수가 비문을 짓고 백상휘(白尙輝)가 글씨를 써서 대구남문(영남제일관-현 동아쇼핑북동편)밖에 세웠었다.
그후 조선 고종 광무10년(1906)에 당시 일제 침략이 노골화하면서 일제의 앞잡이었던 대구군수 박중양(朴重陽)이 일제의을 돕기위해 대구성을 허물고 성돌을 유곽을 짓는 땅다지기에 집어넣었다. 당시 이 비석은 구관덕정 자리에서 구 달성군청(중구 동성로2가)부근으로 옮겼다가 대구향교 안으로 이건했고 1960년에 현위치로 이전한 것이다.
이 비에 의하면 영조12년 1월8일에 채석을 시작하여 4일후인 12일에 기초를 잡았고 체성은 4월25일에,여첩(女堞)은 6월6일에 완성했다. 주위의 총연장은 2,124보,성의 높이는 서남이 18척,동북이 17척,여첩은 819로 돼있다. 축성공사에 동원된 인력은 연인원 78,584명으로 이들은 대구부근의 잡색군(雜色軍)을 위시하여 대구-칠곡의 연군(烟軍),함길도 육진의 속오군(束伍軍), 산성의 아병(牙兵),경상도내의 승군(僧軍)들로 구성되었다.
♦대구부 수성비(大邱府 修城碑)=대구시 유형문화재 제5호로 수성구 만촌동 산83-5 영남제일관문 옆에 세워져있다. 이 비는 조선 영조조에 경상감사 민응수가 석성으로 쌓은 대구읍성이 그후 문루가 훼손되는 등 허물어지기 시작하자 고종 7년(1870)3월에 경상도 관찰사 김세호(金世鎬)가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시작하여 11월에 완공한 사실을 기록한 비이다. 당초 이 비는 대구읍성의 남문밖 영영축성비와 나란히 세웠는데 역사의 굴곡과 함께 그 위치가 바뀌었다. 이 비에는 성의 높이를 당초 보다 높이고 동서남북의 대문 문루도 고친 내용과 함께 준공을 축하하는 성대한 낙성연을 베풀고 수성사실을 정부에 보고하고유공자에게 포상한 사실도 함께 적었다. 비문은 관찰사 김세호가 지었고 글씨는 절충장군(折衝將軍)최석노(崔錫魯)가 섰다. 이 비는 고종 광무 10년(1906),친일 매국노 박중양에 의해 대구부성이 헐리고 난 뒤 1932년 대구향교 경내로 옮겼고 1980년 영남제일관문이 중건되면서 현위치로 옮겼다. 비의 몸체는 청색 화강암으로 가로 73cm, 세로 45cm, 높이 191cm이고 비석덮개는 팔작지붕형 황백색 화강암이며, 비석 받침은 장방형에 황백색 화강암으로 돼있다.
♦이공제비(李公隄碑) 및 군수 이후범선영세불망비(郡守 李侯範善永世不忘碑)=이 비들은 대구시지정 유형문화재 23호로 수성구 상동 182번지 이서공원 안에 세워져있다. 이공제비는 조선조 정조 즉위년(1776)에 대구 판관으로 부임한 이서(李漵-1732-1794)가 2년간 재임하면서 정조2년에 대구분지의 가창골에서 금호강으로 관류하는 하천의 상습적 홍수재해를 막기위해 사재를 털어 제방을 축조한 것을 기리기 위해 세운 송덕비다. 군수 이후범선영세불망비는 고종 광무2년(1898) 큰 홍수로 이서가 쌓은 제방의 하류부분이 유실되어 대구읍성이 위험에 처하자 당시의 대구군수 이범선(李範善)이 주민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고 국고로 짧은 시일에 보수공사를 마치고 주민의 걱정을 들어준 것을 기린 비다. 이 두 비석은 지방수령으로 재직하면서 치수에 힘써 백성들을 편히 살게해준데 대해 백성들이 스스로 세운 송덕비라는 점이 주목되고 특히 이들이 오늘날의 대구모습의 일부를 만든 인물이란 사실을 기록한데 의의가 크다.
이서가 대구판관으로 재직시에는 현재의 신천이 용두산-수도산-동산-달성공원앞-금호강으로 흘렀는데 이를 이서의 제방축조와 이범선의 보수공사로 현재와 같은 방향으로 물줄기를 돌렸고 새로 만든 내를 새내 혹은 신천(新川)이라했다.
이공제비는 1778년 제방을 완공하고 그해 8월에 세웠는데 비의 이름을 이공제라 한 것은 중국 송나라의 학자 소식이 항주자사로 있을 때 쌓은 제방을 백성들이 그를 기리기위해 소공제라 했던 전례에 따른 것으로 이 비를 이후제(李侯隄)라고도 불렀다. 그후 이 비가 유실되자 정조 21년(1797) 이 비를 다시 세우고 해마다 1월14일에 향사를 올렸다. 그러다 순조 5년(1805)에 기존의 비가 너무 초라하기 때문에 새로운 비를 건립해 현재까지 두개의 비가 전해지고 있다. 순조 때 세운 비는 그 뒤 유실되었다가 1987년 신천대로 공사 당시 수성교 서편 땅밑에 매몰돼있는 것을 발견해 다시 건립했다.
이들 비석은 중구 대봉1동 655번지 신천대로변에 세워져 있었으나 그 지역의 수목에 가리워져 잘 보이지 않아 이를 2000년 9월 6일 새로 조선한 신천동로변의 이서공원에 옮겨 주민들의 교육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나,무형문화재
♦고산농악
이 농악은 대구시지정 무형문화재 1호로, 수성구 내환동에서 자생하여 전승된 전통농악이다. 내환동은 고려시대부터 곡기(谷己)라 불리웠던 전형적 농촌 자연부락 마을로 각성받이 들이 살았고 서울로 가는 길목이었다. 이 농악은 이 마을이 개척될 무렵부터 생겨서 농악 본래의 소박성이 비교적 원형대로 보존된채 전승되고 있다. 이 농악은 주로 내환동의 음력 보름 동제(洞祭)때 연희되어 내려온 것인데 동제는 상당 중당 하당(上堂 中堂 下堂)의 자례로 지냈고 이 농악은 동제가 끝난뒤 동제왕복 길에 풍물놀이로 행해져왔다. 이 농악의 특징은 촌락의 노인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전통의 아름다움을 잃지 않고 마을단위의 향토색짙은 형태를 유지한 점이라 할 수 있고 특히 풍물놀이 과정에 나오는 “닭쫒기”놀이는 이 마을에만 있는 독특한 것이다.
본래 이 고산농악은 작고한 상쇠 장이만씨(남)에 의해 보존돼왔는데 그는 기본적으로 부락마치,조름쇠,굿거리,살풀이가락 등의 가락을 잘 칠 수 있었다고 한다. 그에 의해 전승된 고산농악의 매구가락의 네 과정은 다음과 같다.
1)부락마치(길매구가락)=4분박의 빠른 4박의 길매구가락이다. 꽹과리는 “갱갱갱개개개개 개개개개 개개개개...”하고 친다. 이 부락마치는 행진할 때 치는 가락이다.
2)조름쇠=4분박의 매우 빠른 4박의 가락이며 꽹과리는 네가지의 가락으로 이루어진다. 첫째 쇠가락은 ‘개개갠 개개갠 개개개개 개개갱갠지갠지 개개갱’으로 치고,둘째 쇠가락은 ‘개개갱 개개갱 개개개개 개개갱 개개갱’이며,세째 쇠가락은 ‘개갱개개갱 갱갱개개갱개개갱개개갱 개개갱개개갱’으로 치며,네째 조름쇠 쇠가락은 ‘갱갱갱갱 갱갱갱갱....’을 반복한다.
3)굿거리=굿거리는 4분박의 보통빠르기 3박자의 가락이다. 쇠가락은 ‘갱개갠 개갠개개갠 갱갱개개갠....’으로 친다.
4)살풀이=4분박의 보통빠르기 3박가락과 4박가락으로 이루어진 혼합박자이며, 꽹과리는 ‘갱웅웅 갱웅갱갱지갱갱갱갱’으로 치고, 다시‘개갱지 개갱지’하면서 친다.
한편 편성과 복색을 보면 상쇠와 중쇠 각1명,징 6명,북10명,징고 10명,소고(상모)14명과 포수 1명,양반1명,색시 2명,농기 3명,띙각 1명 등으로 돼있다.
연행은 총 8과전으로 구성되고 있다. 각 과정은 다음과 같다.
1)길매구=농기를 앞세우고 상쇠를 선두로 징,북,장고,상모,잡색이 먼저 놀이 마당으로 들어간다.
2)덩덕궁이(원진)=상쇠의 지휘에 따라 가볍게 뛰면 시계반대 방향으로 원진하고 이어서 태극을 만들기 위하여 원을 만들고 ,계속해서 태극무늬를 만들며 시계방향으로 돈다.
3)둘석(진굿)=원을 돌며 상쇠의 쇠꺽음에 따라 뒤돌아가기를 두 번 한후 상쇠가 다시 한번 쇠를 꺽으면 뒤로 돌아 두개의 동심원을 그린다.
4)춤굿(판굿)=상쇠의 덧배기 가락에 따라 원을 돌면서 각자 흥겹게 춤을 엮어 나간다.
5)닭쫒기=이는 다른 농악놀이에는 없는 특이한 놀이 형태로 상모팀 전원이 원 중앙에서 서로 손을 잡고 원을 돌면서 닭(각시와 양반)을 쫒는다.
6)방석말이(오방굿)=농기를 구심점으로 상쇠가 원을 돌면서 좁혀들어갔다가 다시 반대로 풀어나온다.
7)모내기굿=원이 풀어지면서 징,북,장고가 일열로 서고 ,이를 마주 보고 상모가 또 일열 종대로 서서 상모가 중앙에서 쇠를 치는 놀이다. 이는 모내기,모심기,김매기 놀이의 형태다.
8)법고놀이=상모,장고,북,징의 순으로 각 악기팀 전원이 원 중앙에 나와 팀별 놀이를 진행한다.
이같은 고산농악의 전승을 위해 내환동에서는 19세기부터 계가 조직되어 있으며 그 때 사용하던 계첩도 남아있다. 근래에는 1983년 제23회 전국민속경연대회에 참가하여 문공부 장관상(우수상)을 탔고 그 때 받은 상금을 기금으로 고산농악대를 조직하여 전승하고 있다.
♦욱수농악
대구시지정 무형문화재 3호로 수성구 욱수동에서 전승되고있으며 예능보유자는 김호성(金浩星)이다. 욱수농악의 유래는 1981년7월 경산군 고산면 욱수동이 대구시로 편입되면서 수성구에 들어온 욱수동에서 자생한 농악으로 과거 농업을 주로해온 자연부락이 그 배경을 이루고 있다. 욱수농악은 이 마을 동제당(洞祭堂)에서 해마다 정월 초사흘날 관례적으로 연희를 해오던 “천왕받이굿”에서 파생한 농악이다. 천왕받이굿은 동제당에서 신내림을 축원하는 굿인데 이 내림굿에 뒤따르는 판굿과 보름날의 구걸(지신풀이),그리고 달불놀이 때의 “마당놀이”가 한 묶음의 놀이틀이 되어 욱수농악으로 전승되어온 것이다. 그러던 것이 1970년대에 동제가 도시화과정에 중단되고 달불놀이는 입산금지이후 없어졌으나 농악과 지신풀이는 1963년부터 친목계를 조직하여 전승하고있다.
이 농악의 연행구성 가운데 ‘외따기’는 경상도 남부지방에는 드문 전형을 가진 놀이란 점이 특징이다. 쇠가락은 비교적 빠른 가락이 많고 잔가락이 적은 영남농악의 특징을 보유하며 특히 길굿의 가락이 독특하다. 욱수농악은 동제와 연관된 축원농악과 판굿 즉 연희농악이 복합된 농악이며 경상도 내륙의 농악은 농사굿이 많은데 비해 전체의 구성은 진굿에 가까운 농악이다.
예능보유자 김호성은 20세 때인 1948년께부터 경산군 압량면에 거주하던 김차동(金次東)에게 쇠가락을 배운 것으로 알려져있다. 김차동이 사망할 때까지 20여년간 마을의 구걸패 등에서 종쇠로 활약하였고 고산농악대에 종쇠로 활약하기도했다. 1985년 4월부터 6월까지는 새로 창단된 현대중공업의 농악팀 지도를 맡은 바 있다. 1989년에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이밖에도 예능보유자로 박원호(朴元鎬),이만방(李萬邦)등이 있다. 박원호는 욱수동에서 출생하여 이옥관(사망)에서 서병극(사망)으로 이어지는 전승자이다. 설상모 이만방은 13세때부터 이 마을의 상쇠였던 서병극을 따라다니며 끝법구를 치고 상모를 돌렸다.
욱수농악의 편성은 상쇠와 종쇠 각1명,법고 12명, 양박 1명,색시 1명,기수 2명, 징 6명, 장구 8명, 목나팔 1명, 포수1명, 농기수 1명 등이다.
복색은 편성에 따라 하는데 상쇠는 벙치를 쓰고, 흰옷을 입고 고 적 황 녹색의 띠를 양어깨와 허리에 두른다. 종쇠는 흰옷에 적 황 녹색의 띠를 양어깨와 허리에 두르고 벙치를 쓴다. 징은 흰옷에 적 황 녹색의 띠를 양어깨와 허리에 두르고 회색 고깔을 쓴다. 북과 장구는 징과 같은 복색을 한다. 법고는 흰옷에 적 황 녹색의 띠를 양어깨와 허리에 두른다. 목나팔으 징과 같은 복색을 하고 오동나무로 만든 나팔을 분다. 양반은 두루막을 입고 종이로 만든 정자관을 쓴다. 포수는 검은 옷을 입고 털모자를 쓰며 등에 망태, 꿩털, 토끼털을 메고 목총을 든다. 색시는 노랑 저고리에 붉은 치마를 입는다. 농기수와 기수는 징과 같은 복장을 한다.
연행은 모두 8개과정으로 구성돼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질매구(질굿)=쇠는 4분의 2박자로 치며 세가지 리듬으로 변주하는 이 마을의 독특한 가락을 보여주는 길놀이다.
2)천왕받이굿=동제당앞에서 신내림을 받는 굿이다. 주민들은 이 굿을 할 때 마치“천왕님 천왕님 처렁 처렁 내리소”하는 소리로 들린다고 한다.
3)둥글데미=대원들은 원형을 지어 상쇠가 ‘무정지겡이’, ‘허허깍깍’, ‘잦은모리’등의 세가지 가락으로 변주하면 대원들은 악기 장단에 맞추어 원무를 춘다.
4)마당놀이=ㄷ자형의 대형을 만들어 징,북,장고,법고잡이들이 각각 조별로 묘기를 보인다.
5)외따기=2열종대의 대형으로 마주 보고 앉은 대원들을 상쇠가 빠른 가락으로 Z자형으로 돌면서 징,북,장고,법고 순서로 끊어 차례로 일으켜 풀어나간다.
6)덧배기=상쇠가 춤매구 가락에 맞추어 흥겨운 장단으로 어깨춤을 춘다. 경상도 특유의 덧배기 가락을 가진 춤이다.
7)오방진=상쇠,중쇠,잡색이가 중앙에 원을 만들고 징, 북, 장고, 법고가 각각 네군데 원형을 그리며 오방진을 만들어논다.
8)덕석말이=똘똘말이라고도 한다. 농기를 가운데 세우고 전원이 질주하면서 자진가락에 맞추어 원진을 치고 또 풀면서 태극형을 그리는데 두군데서 밀집적 원진을 그린다.
욱수농악은 1963년부터 친목계를 조직하여 전승하고 있다. 특히 1987년 제28회 전국민속에술경연대회에서 문공부장관상(우수상) 수상을 계기로 욱수농악대를 조직적으로 육성하고 있다.
♦상감입사장(象嵌入絲匠)
대구광역시 무형문화재 13호로 수성구 두산동 2-2(천미사)의 김용운씨가 기능보유자다. 상감입사란 조금(彫金)의 기법으로 쇠나 구리 등의 금속표면에 홈을 파고 금선(金線)이나 은선(銀線)을 꺼워넣어서 장식하는 전통적 장식기법으로서 우리나라에선 입사(入絲)라고한다. 우리나라에서는 4세기경 무렵부터 철제무기류나 청동제 그릇의 표면에 금이나 은으로 입사장식을 한 공예품들이 많이 발견되어왔다.
입사기법이 가장 발달했던 시기는 고려시기로 청동향로(靑銅香爐)와 같은 뛰어난 불교공예품에 입사기법이 사용되었다. 이러한 전통적 고려시대의 입사기법은 계속 이어져왔는데, 조선중기이후에는 청동 뿐아니라 철제에 은입사를 해서 생활용품을 만들어 썼다.입사기법에는 크게 보아 두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고려시대부터 전해지는 전통적 청동은입사 기법으로 바탕 금속(청동)에 정(釘)으로 홈을 파고 그안에 은선을 박아넣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조선 중기 이래로 전래된 철입사로, 바탕금속(철)의 표면에 정으로 가로세로로 쪼아 거스러미가 일어나도록 한 다음 그위에 얇은 금 은판이나 선을 놓고 망치로 쳐서 금속에 붙이는 것으로 이본에서는 이른바“포목상감(布目象嵌)‘이라 부른다. 이 두가지 기법 중에서 상감입사는 조각장이 하는 경우가 많았고,입사장은 대부분 철입사를 담당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통일신라시대부터 상감입사와 얇은 금속판이 입사재료로 병용되었고, 고려시대에는 상감입사기법이 매우 발달하였다. 상감입사는 많은 시간과 고도의 기법이 필요하므로 귀족층의 기물에 쓰였고 조선중기 이후에는 쉽게 문양을 나타낼 수 있는 입사기법을 개발하여 일반에도 보급된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강점기에 접어들면서 조선시대까지 공조(工曹)와 상의원(尙衣院)에 속하던 입사장,조각장 등에 의하여 입사, 상감입사등의 공예기법은 이왕가(李王家)미술제작소의 장인들에의해 전승되었다. 김용운은 이러한 전통을 이은 상감입사장으로 여겨지며 기능보유자 김용운의 상감입사 공예품은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발전해온 동체와 두껑의 모양이나 크기가 같은 합구형식(合口形式)의 원형합과 같은 형식을 추구하여 인주함(印朱函),연초함(煙草函),향합(香盒),합(盒)등을 제작해왔다. 또한 사용된 재료는 동의 바탕에 전연성이 좋은 은을 구리와 합금하여 정으로 홈을 파내서 선이나 면으로 은실을 박아넣는 기법은 고려시대,조선시대 상감입사기법과 같다. 입사기법은 세공이기 때문에 그다지 많은 공구가 사용되지않으며 여러종류의 정과 망치가 주로 사용되고있으며 여성 장식용 금은상감입사 노리개 작품에서도 형태는 부드러운 나비, 달과 같은 곡선과 직선을 가미시켜 금재료 바탕에 배금선으로 소나무,학,구름,물결 등의 십장생문(十長生紋)을 사용해서 형태의 분위기는 한국적이면서도 현대적 감각을 보이고 있다. 김용운씨는 또 많은 공모전에 출품하여 입상했는데 1981년 전국공예품경진대회에선 대통령상 수상을 며비롯 대구공예품경진대회에서 연 4회의 금상을 입상하는 등 수많은 입상경력을 가지고있으며 1981년 기능올림픽,대구산업디자인전람회,대구관광공예품경진대회 등에서 심사장,심사위원을 역임했다.
다,시도기념물
♦사월동 지석묘군<사월동 지석묘(2)>
시도기념물9호로 수성구 사월동 469 지역에 소재하고 있다. 청동기시대의 선사분묘로 대구와 경산의 경계지역에서 남쪽을 향해 흐르는 욱수천 하류유역에 분포하는 지석묘군 가운데 하나다. 외형상으로 남방지석묘로 분류되는 형태이며 상석 4개가 밀집되어 남아있다. 욱수천과 남천이 합류하는 복합선상지에 위치하여 욱수천지역에서는 가장 보존상태가 좋다.
도시화와 더불어 대구-경산간 도로상에 면한 시지동과 사월동 사이에 있는 섬유공장 내에 4기의 지석묘가 이었으나 현재는 이곳이 택지로 개발되면서 시지보성타운이 들어섰고 이 주택단지 서편에 소공원처럼 조성되어 보존되고 있다. 이 곳 지형은 남쪽에 금호강의 지류가 합류하는 신매천이 흐르고,북쪽으로는 성동의 고산이 있을 뿐 주변은 넓은 충적평야다. 1호지석묘는 상석의 파괴가 심하며,형태는 판석형이다. 장축은 남-북향,상석의 크기는 길이 185cm,너비 147cm,높이 70cm이다. 하부에 3개의 지석이 있다.
2호지석묘의 형태는 부정형이며,크기는 길이 170cm,너비 110cm,높이 94cm이다. 장축방향은 남-북 방향이다. 하부에 지석으로 추정되는 석재가 일부 노출되어있다.
3호 지석묘의 형태는 장방형에 가까우며 상석 크기는 길이 237cm, 너비142cm, 높이127cm이다. 장축방향은 남-북향이다. 상석아래는 흙으로 매몰되어 지석의 유무는 분명치않다.
4호 지석묘의 크기는 길이 200cm, 너비cm, 높이 70cm이다. 하부에는 지석으로 추정되는 석괴가 일부 노출되어 있다.
라,문화재 자료
♦야수정(倻搜亭)
문화재 자료 14호로 지정돼있는 야수정은 수성구 상동 140-4에 위치한 조선조 때의 유교건축물로 1900년경에 건립된 진(秦)씨 문중의 재실이다. 이 건물은 일제침략기에 지어진 만큼 한일절충형의 과도적 양식을 특징으로 하고 건립당시의 규모는 정면 5칸,측면 1칸반의 재실 건물이었으나 나중에 개인의 사림집으로 사용하면서 증축을 하는 과정에 배면 부분 전체가 반칸씩 증축되어 겹집처럼 바뀌었다. 이 건물은 화강석 기단위에 원주형 정평초석을 놓고 전면 6주는 두리 기둥으로 ,나머지는 네모기둥으로 세운 소로수장 집이다. 마루를 장마루로 꾸미고 여모 중방 밑을 붉은 벽돌로 쌓고 건물의 전면 모두에 유리창문을 달았으며 방의 천장은 일식 천장에 우물반자로 마감하였다.
♦고산서당(孤山書堂)
문화재자료 15호로 수성구 성동 산22번지에 위치한 조선시대의 유교건축이다. 이 서당은 앞쪽으로 남천(南川)과 고산들판을 바라보는 성동의 서원골 야산자락에 자리잡고 있다. 현재의 건물은 1879년 4월 16일에 세워졌으나 이 서당은 적어도 1500년대이전에 건립되었는 던 것이 임진왜란 등 세월 따라 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파손과 중수가 되풀돼오다가 오늘에 이르렀다. 고산서당의 첫 건립이 1500년이전 이었을 것으로 보는 이유는 생몰연대가 1501-1570년인 퇴계 이황이 여기에서 강(講)을 했고 생몰연대가 1563-1633년인 우복 정경세가 역시 이곳에서 강을 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이 서당 뒤편에 남아있는 이 두분의 강학유허비(講學遺墟碑)와 아름드리 정자나무가 그 내력을 말해주고 있다.
이 서당에는 퇴계와 우복의 사후 사당을 지어 두분의 위패를 모셨으나 임란 때 소실되었고 그 뒤 조선조 숙종16년(1690)에 다시 사당을 지어 위패를 모시면서 고산서원이라 이름을 바꾸었으나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던 것은 공종 16년(1876) 지역 유림에서 강당만 다시지어 고산서당이란 이름을 붙여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유허비의 내용은 선조40년(1872) 우복 정경세선생이 대구부사로 부임하여 이 서당에 퇴계선생으로부터 <고산>이라는 재호와 <구도>라는 친필을 받아 걸고 강학을 해왔었던 사실을 적은 것인데 비문은 당시 현령으로 부임했던 이헌소(李憲昭)가 지어 고종9년(1872)에 세웠다.이 서당은 네모 꼴의 흙담으로 돼있고 건물은 납도리 위에 세 개의 대들보로 간결하게 짜맞춘 구조로 큰 대들보는 가운데가 굽은 목재와 막석까래를 사용해 자연스러운 모양을 내고 있다.정면 4칸,측면 2칸 규모로 가운데 2칸 마루를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이 있는 홑처마 팔작지붕이다.
고종연간에 서당을 중건한후 지역유림에서는 해마다 몇 번씩 이곳에 모여 강을 하고 장음례도 지내오다가 근래에 들어 매년 음력 4월 16일에만 유림 수백명이 모여 강을 하고 있다.
♦독무재(獨茂齋)
이 재실은 선비 하시찬(夏時贊:1750-1828)을 추모하기위해 그의 제자와 유림에서 세운 조선시대의 유교건물로 수성구 만촌동 188-1에 소재하는 대구시 문화재자료 17호이다.
독무재는 벼슬을 마다하고 학문연마와 제자교육에만 전념해 칭송을 받아왔던 유학자 하시찬이 생존시 학문과 강학을 했던 독무암서(獨茂巖棲)를 그가 세상을 떠나자 제자들과 유림이 학계(學契)를 만들어 그 자리에 그의 정신과 학덕을 기리기위해 다시 지은 건물이다. 그러나 이 건물은 당초 동구 효목동 경북주유소부근 경부철로 옆에 있었는데 1968년 4월 대구시 4차우회로 공사를 하면서 현재의 장소로 이건했는데 이 때 이전에 없던 경덕사와 장판각을 새로지었다. 장판각에는 그가 남긴 저서 팔례절요(八禮節要)와 열암문집(悅菴文集)의 판각이 보관돼있고 경덕사에는 매년 3월 상정일(上丁日)에 각처의 유림들이 모여 춘향(春享)을 지냈다.
독무재 경내에는 상당인 경덕사와 강당인 독무재가 나란히 배치됨으로써 좌묘우학(左廟右學)의 전형적 공간 기능 배치를 했으며 독무재는 정면6칸 측면 1칸반의 규모인데 가운데 2칸의 마루를 중심으로 좌우에 방이 있는 홑처마 맞배지붕의 건물이다. 전면에는 반 칸의 툇칸을 두었다. 또 박공양쪽에 풍판을 설치했고 가구(架構)는 3량가(三樑架)이며 만곡(彎曲)된 대량(大樑) 위에 제형판대공을 세워마룻대를 받았고 연목도 자연재를 그대로 사용했다.
이러한 건축양식은 대구에서는 조선시대의 고건축으로는 보기 드문 건물로서 대구를 대표할 정도의 조선시대의 유학자를 기념할만한 건축의 품위를 보여준다.
♦하효자 정려각(夏孝子 旌閭閣)
수성구 만촌동 389-9에 위치한 고려시대 이부시랑(吏部侍朗) 하광신(夏光臣)의 어머니에 대한 효행을 기리는 효자비로 대구시 문화재자료 제18호이며 대구 경북권에서 가장 오래된 효자비이다. 이 비는 1327년 하광신의 효행을 보고받은 고려 충성왕이 그가 살던 마을에 <효자고려이부시랑하광신지려(孝子高麗吏部侍朗夏光臣之閭)>라는 정려를 세우게함으로서 건립되었고, 그 위치는 달성 하씨(達城 夏氏)들의 종산(宗山)인 수도산 자락에 세워졌는데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 뒤 정조 5년(1781년)2월에 비신은 가로 68cm,세로 21cm, 높이 150cm 크기의 연청색 화강암으로, 받침돌은 장방형 황백색 화강암으로 만들어 만촌동 형제봉 기슭에 다시 세웠으나 일제 무렵 경부선 철도를 부설하면서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하광신은 달성 하씨로 시조인 중국 송나라 대도독 하흠(夏欽)의 증손자다. 하흠은 고려시대에 우리나라에 귀화해 정착했고 그의 아들 용(溶)은 고려를 침공하는 오랑캐를 무찔러 많은 공을 세웠고 그 공로로 달성군(達城君)에 봉해졌고 그 이후 대구지역에 하씨들이 집단적으로 살게되었다. 특히 용의 손자 광신은 어릴 때부터 효행이 지극한 것으로 널리 알려지게되었다.
그의 효행록 중에 감동적인 일화는 몇해째 중병으로 병상에 누워계시는 노모가 어느 추운 겨울날 갑자기 복숭아가 먹고싶다고해 이를 구해드렸다는 얘기다.
어머니의 청을 들은 광신은 얼음이 녹지않은 겨울에 어디가서 복숭아를 구해올 것인지 낙담을 하고 뒷산에 올라가 효성이 부족함을 한탄하며 혼자 고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어느새 날이 저물고 뒤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서 돌아보니 호랑이가 한 마리가 앉아 위협적 자세를 취하지 않고 그를 등에 타라는 시늉을 하더라는 것이다. 영문도 모르는채 호랑이 등에 올라타니 손살같이 달려 산중의 어느 외딴 오두막 집앞에 내려놓았는데 그집 문틈으로 불빛이 새나왔다. 문을 두드려 주인을 찾으니 마침 그집에 제사가 들었는데 제상 상위에 그렇게도 찾았던 복숭아가 놓여있는게 아닌가. 주인에게 자초지종을 얘기하고 복숭아 한개만 달라고 이마가 땅에 닿도록 절을 하며 간청한 끝에 복숭아를 얻어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에게 드렸다. 이렇게 지극 정성으로 간호를 했으나 끝내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장사를 지낸후 3년간 시묘했다고한다. 이같은 소식이 나라에 전해져 국가로부터 효자 정려를 받게된 것이다.
♦덕산서원(德山書院)
이 서원은 조선조 초기의 충신인 달성인(達城人) 서섭(徐涉)을 추모하기 위해 수성구 황금동 258번지 일대 서섭의 묘소 아래에 첨모재(瞻慕齋)란 당호로 건립했고 대구시가 이 건물을 문화재자료 19호로 지정했다. 그후 다시 그의 아들 감원(坎元)을 추가 배향하고 건물을 중수한 뒤 이건물을 덕산서원이라 개칭했다. 서섭은 호가 남은(南隱)이며, 달성서씨 판서공파의 파선조이다. 세종조에 문과에 급제하여 문종과 단종에 이르기 까지 벼슬살이를 했는데 대호군(大護軍)과 자헌대부이조판서(資憲大夫吏曹判書)를 역임했다. 그는 단종초에 왕족들과 간신들의 발호를 경계하여 척간소(斥姦疏)를 올려 개혁을 주장하다가 유배당하기도했다.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 단종을 폐위 살해하고 왕위를 찬탈하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그 때까지의 호 남애(南涯)를 남은으로 고치고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은둔 생활을 했다.
그뒤 후손들 조차 그의 행적을 모르고 있다가 1924년 그가 살던 옛집 낡은 천장에서 “문영월사변통곡(聞寧越事變痛哭)”, “문육신순절감음(聞六臣殉節感吟)”, 재적소시시(在謫所時詩)와 여손격재 조서(與孫格齋 肇瑞), 백형현감제문(伯兄縣監祭文)등이 포함된 유고와 행장이 발견됨으로써 그의 충절을 알게되었다. 이에 그이 후손들과 지역 유림들이 1926년 첨모제를 건립해 그를 주향(主享)했고, 이어 1994년 그의 아들인 감원을 배향(配享)하면서 덕산서원으로 개칭했다.
감원은 성종 때의 충신이며 성균생원으로 구언상소(求言上疏)를 올려 성종의 실정을 직간하였다가 심한 고문을 당한 직신인데 성종실록에도 상세히 기록되어 있고 문집도 간행되었다. 이 서원의 경내에는 위패를 모신 경의사(景義祠)를 비롯 방3칸 대청 1칸의 정침외에 동서의 존성재(存誠齋),구인재(求仁齋)와 남은 선생 시도비각(神道碑閣)이 함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