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객>-성찬이 차린 최고의 성찬盛饌
-맛을 느끼는 것은 혀 끝이 아니라 가슴이다-
5년 전 '운암정'
대령숙수의 적통을 이어받을 새 주인을 가리는 두 제자의 대결이 펼쳐지고 있다.
재료는 중국 북송 시대의 시인 소동파가 '사람이 한 번 죽는 것과 맞먹는 맛' 이라고 극찬했던 '황복회'
봉주(임원희 분)는 국화 문양의 작품을, 성찬(김강우 분)은 바닷속을 날고 있는 학 문양의 작품을 내놓는다.
그런데 성찬의 회에서 '날카로운 작두에 서 있는 맛'이 난다는 심사위원.
"이 맛의 정체가 무엇이냐?"
그 순간 거품을 물고 쓰러지는 사람들.
이렇게 성찬과 운암정의 인연은 끝이 나고 운암정은 봉주의 것이 된다.
"이 칼의 진정한 주인을 찾아주십시오"
일본인 후지와라(무라카미 켄이치 분)는 자신의 조부로부터 물려받은 대령숙수의 칼을 한국에 반환하면서 조상의 죄를 사죄하는 의미로 '이 시대의 새로운 대령숙수 찾기' 요리 대회를 제안한다.
방송국 국장(박진영 분)은 VJ 진수(이하나 분)를 데리고 은둔 중인 성찬을 찾아간다.
소가 맘대로 마당을 돌아다니는 그저 평범한 시골 농가에서 맛있는 음식이라니, 반신반의하는 진수 앞에 '성찬 식품' 화물차를 타고 등장하는 성찬.
이어지는 성찬의 '시골 밥상 한상차림'은 내가 이 영화를 통틀어 가장 좋아하는 대목이면서 또한 이 이야기의 핵심 주제가 담겨 있는 중요한 시퀀스다.
항아리에서 막 꺼낸 잘 익은 김치와 장아찌들, 텃밭에서 따온 신선한 야채들, 된장으로 무친 나물, 호박 숭숭 썰어넣은 구수한 뚝배기 된장찌개, 야채 계란말이, 그리고 장작불로 뜸 들인 윤기 자르르한 가마솥 밥.
화려하진 않지만 자신의 음식을 원하는 이들을 위한 따뜻한 마음을 담은 소박한 요리.
"요리 대회 있는 거 알지?"
"대령숙수의 칼을 준다구요?"
낭중지추.
"저는요, 누가 내 음식 먹고 즐거워하면 그걸로 만족해요"
하지만 쉽게 포기할 진수가 아니다.
그리고 과거 운암정 후배인 덕기(정진 분)와의 재회.
"다시 시작하자, 형"
봉주는 자기 밑으로 들어오라며 성찬의 요리 대회 참가 포기를 종용한다.
그야말로 잠 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린 격.
"생각이 바뀌었어. 내가 누군지 보여 줄거야. 내가 최고라는 거 너한테 확인시켜 줄거야"
성찬은 결연한 목소리로 대회 참가를 선언한다.
그날 밤, 웬일로 정신이 맑아진 할아버지(정진 분)는 늦도록 잠 못 이루고 뒤척이는 손자의 머리를 말없이 쓰다듬는다.
가슴 뭉클한 장면이다.
이른 아침, 잠든 할아버지에게 큰 절을 올리고 대회장으로 떠나는 성찬은 소 여물 주기를 잊지 않는다.
5년의 은둔 생활을 끝내고 세상 밖으로 나가는 감격적인 순간이다.
1차 예선 주제는 조鳥
운암정의 봉주는 닭을, 성찬은 꿩을 고른다.
성찬을 못마땅해 하는 심사위원들에게 그는 진심으로 부탁한다.
"다시 시작하고 싶습니다. 도와주십시오"
1차 예선 통과,
집으로 돌아온 성찬은 '준치몸'을 달라고 떼쓰는 할아버지에게 정성껏 준치를 구워 주지만 할아버지는 이게 아니라며 기껏 구워 온 준치를 바닥에 던져버린다.
성찬은 '준치몸'이 토란대라는 걸 처음으로 알게 된다.
2차 예선 주제는 어漁
심사위원들에게 몰래 뇌물을 주는 봉주.
그리고 하필 성찬에게 주어진 재료는 황복(하여간, 뇌물의 힘이란!)
그렇게 성찬의 트라우마를 건드리는 봉주.
그러나 거기서 쓰러질 성찬이 아니다.
봉주와 성찬의 대결이 다시 시작된다.
"이겨라, 나처럼 평생을 후회하며 살고 싶지 않거든 그 놈을 이기란 말이야"
할아버지(김진태 분)의 뼈아픈 유지를 마음에 새긴 봉주는 오로지 '이기는 것'에만 집중한 나머지 더러운 편법을 쓰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5년 전, 성찬의 회에 복어독을 넣었듯이.
봉주의 온갖 방해에도 불구하고 성찬은 진수의 도움으로 구사일생, 2차 예선을 통과하게 된다.
드디어 본선, 주제는 우牛
끊어진 대령숙수의 맥을 잇는 의미있는 대회에서 성찬과 봉주는 그야말로 막상막하, 우열을 가릴 수 없는 최고의 요리를 만들어 낸다.
본선 두 번째 대결 적炙
본선 통과 10인 중 1등은 성찬, 결선행 티켓은 총 4장.
이제 그들은 새로운 과제인 '최고의 숯'을 찾아 '최고의 숯쟁이'인 사형수 성일(안길강 분)을 찾아간다.
"조용히 죽자, 자꾸 괴롭히면 귀신 되서 괴롭힌다"
몇 년째 매일 사형수 아들을 면회 왔다가 번번이 되돌아가는 어머니(이주실 분)의 가슴 아픈 사연은 관객들의 눈시울을 붉어지게 한다.
배곯는 어린 자식을 위해 몰래 가마솥에 고구마를 남겨 두는 엄마의 심경은 대체 얼마만한 슬픔일까.
자기가 만든 숯으로 엄마의 남자를 죽일 수 밖에 없었던 아들의 원망은 물갈나무 옹이처럼 단단한 마음 속 암종이었을 것이다.
그런 성일이 독방에서 성찬이 보낸 식은 고구마와 동치미를 먹으며 회한의 눈물을 쏟는다.
불질을 하다 눈이 멀어간 성일은 결국 화장장 불길 속에서 한 줌 재가 되어서야 그리운 어머니 품에 안길 수 있게 된다.
"그 아름다운 불꽃이 최고의 숯을 만들어 줄 겁니다. 행운을 빌어요"
어머니 대신 어린 성일을 품어준 늙은 물갈나무는 단단한 숯이 되어 누군가를 위한 불꽃으로 되살아날 것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은 이 세상 모든 어머니의 숫자와 동일하다"
그런데 성찬은 그렇게 힘들게 얻은 숯을 봉주에게 빼앗겨 버리고 만다.
훔친 숯으로 최고점을 받은 봉주, 두 사람의 점수차는 크게 벌어진다.
결선 과제는 소고기 정형定型
성찬은 전국의 우시장을 돌며 최고의 소를 찾지만 덕기는 선택을 망설이는 그를 이해할 수가 없다.
"형이 구하는 소는 세상에 없어"
그리고 이 영화에서 가장 슬픈 장면이 구현된다.
비가 내린다.
마루에 걸터앉은 성찬의 뒷모습에서 처연한 고뇌가 느껴진다.
"고사리 장마다. 고사리 장마 지면 바다로 나간 배가 못 돌아와. 고사리 장마 지면 그렇게 이별을 하는 게야"
할아버지는 성찬의 깊은 고뇌를 알아챈다.
성찬도 할아버지의 말뜻을 읽는다.
이심전심.
다음날 아침 성찬은 소를 이끌고 집을 나선다.
생사고락을 함께 했던 소는 성찬의 손에 이끌려 도축장으로 간다.
소 목에서 방울을 떼는 성찬, 그런 성찬의 손을 살며시 잡아주는 진수.
눈물을 흘리는 성찬의 마음을 안다는 듯 뒤를 한 번 돌아본 소는 묵묵히 죽음을 향해 걸어간다.
"약속해, 니 희생을 헛되게 하지 않을게"
이어지는 정형 장면은 박진감 넘치면서도 치열한 울림을 준다.
(리얼리티를 위해 두 배우는 실제로 상당기간 정형을 몸소 익혔고 그 실력을 이 신에서 유감 없이 발휘했다는 후문이다)
정형 점수는 동점, 그러나 뒤늦게 봉주의 소에서 발견 된 근출혈로 결함 판정이 나고 결국 마지막 시합으로 '대령숙수'를 결정하게 된다.
최후의 과제는 비전지탕秘傳之湯
곡기를 끊었던 순종 임금이 한 그릇을 다 비우는 내내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는 비전의 소고기탕의 실체는 과연 무엇일까?
방송 중, 성찬의 조부인 성현이 스승인 대령숙수를 독살했다고 만천하에 공개하는 봉주.
성찬은 5년 전 운암정에서 쫒겨난 그에게 할아버지가 끓여 주었던 고깃국이 문득 그리워진다.
슬프고 미안하고 억울하던 그의 마음을 따뜻이 녹여주던 할아버지의 고깃국.
"나 삼겹살 먹고 싶어, 해 줘~먹고 싶어"
(성찬이 할아버지를 업고 수풀 무성한 언덕길을 걸어가는 원경은 꿈결처럼 아름다우면서도 어쩐지 처연한 느낌을 준다. 지나친 아름다움은 때로 불길함을 동반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번에도 할아버지는 삼겹살이 아니라며 고개를 돌려 버린다.
성찬은 그것이 '양지 삼겹살'이라는 걸 덕기의 정육점에서 비로소 알게 된다.
비전지탕의 요리법을 몰라 전전긍긍하던 봉주는 우연히 할아버지 만식의 창고에서 요리법이 적힌 족자를 발견하고 뛸 듯이 기뻐한다.
그러나 봉주는 모른다.
그것이 1926년 순종 승하 직후 열린 연회에서 만식이 일본 관리로부터 하사 받은 '내선일체'의 비전이라는 것을.
성현이 만든 순종의 소고기탕을 맛 본 일본 관리는 크게 감탄하며 대령숙수를 부르지만 그는 스스로 자신의 손을 칼로 내리친다.
그렇게 그는 망국의 신하로서의 절개를 지켰던 것이다.
성찬이 먹고 싶다던 고깃국을 끓이다가 할아버지는 세상을 떠난다.
양지머리 삼겹살, 제주도 고사리, 그리고 준치몸...준치몸...
할아버지의 상식을 준비하던 성찬은 갑자기 눈물을 흘린다.
의문부호로 남아있던 소고기탕의 비밀이 거짓말처럼 풀리는 순간이다.
그렇게 할아버지는 '소중한 선물'을 손자에게 남기고 사연 많은 생을 마감한다.
할아버지 마지막 가시는 길, 정성껏 음식을 만들어 올리는 성찬.
사랑하는 할아버지를 위한 최후의 성찬이다.
진수는 운암정 서노인(공호석 분)으로부터 대령숙수의 죽음의 비밀을 전해 듣는다.
성현은 스승의 부탁으로 그의 음독을 도왔던 것이다.
스승이 세상을 뜬 후 그는 두고두고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게 된다.
8월 15일 결전決戰
"대령숙수의 칼은 살아있습니다. 마치 생명이 있는 것처럼 스스로 주인을 찾아가죠"
기고만장한 봉주 앞에 나타난 성찬.
그런데 성찬이 비전지탕이라고 내놓은 건 다름 아닌 '육개장'이다.
"남들에겐 그냥 평범한 음식이지만 제겐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남긴 소중한 선물입니다"
비웃는 심사위원들.
그러나 숟가락으로 국물을 뜨던 후지와라가 그릇을 통째로 들고 마시기 시작한다.
"이제야 알았습니다"
대령숙수가 임금께 올린 탕은 단순한 소고기탕이 아니라 '영원히 끝나지 않을 조선의 정신'이었던 것이다.
"제 조부께서는 그 때 드셨던 소고기탕을 육개장이라고 했습니다"
따지는 봉주에게 후지와라는 말한다.
당신의 할아버지는 그 요리법을 감추고 싶어했을 거라고, 그것은 한식에 일식을 가미한 '내선일체'의 비전이라고.
"축하합니다. 이 칼의 주인은 당신입니다"
할아버지 영전에 대령숙수의 칼을 바친 성찬은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간다.
'정의가 승리한다'는 평범한 진리는 얼마나 아름다운 가치인가.
김강우의 성찬으로의 완벽한 변신은 그 후로 한동안 그의 이미지를 '바른 생활 청년' 으로 각인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진수 어머니의 식당에서 우연히 마주친 진수와 성찬을 보고 "진수성찬"을 외치는 만화 '식객' 원작자 허영만 작가의 깨알 같은 숨은 그림도 재미있다.
글/배성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