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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단 오르기
날아오를 수는 없었습니다
한 발 한 발 최선을 다해 올라야 했습니다
밑을 보지 말거라 어릴 적
고깔지붕 토담에 사다리를 놓아 주시며
아버지는 나에게
오르는 法을 가르쳐 주고 계셨습니다
참, 신기하지?
날개도 없이 높이 높이 오를 수가 있다니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르면서 사람들은
제 발등 찍히는 걸 눈치 채지 못 했습니다
조금 더 빠르고 조금 더 편하고 조금 더 쉬운 것이
조금 더 느리고 조금 더 힘들고 조금 더 어려운 것을
밑을 보지 말거라
계단을 오르며 이제 나는 나의 아이들에게
오르는 法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지금도 울창한 도심
공룡처럼 거대한 콘크리트 건물벽 속에는
하늘 향해 뚫린 어둡고 긴 터널이 있어,
마음만 바쁜 사람들을 태운 기차가
날마다 오르락 내리락 하고 있습니다
14,08,09
광화문
-농성-
搖之不動 이대로 앉아
面空坐禪 이라도 해야하나
철 든 지금
왜 이리 세상이 무겁고
세상이 왜 이리 어지러운지
조금 가벼워도
차라리 철 안 들었을 때가 더 좋았네
다들 아실 테지만
그때도 지금처럼 지구는 빙빙 돌았다네
하지만 이렇게 어지럽진 않았다네
지금 나는
萬民의 광장
人波 속 銅像처럼 서 있네
구피*
유리어항 속 구피들 참 재밌습니다 눈 크게 뜨고 보아도 보일 듯 안보일 듯 좁쌀만 한 것들 저 어디에 심장과 허파가 붙어 있고 부레가 달려 저렇게 물속에서도 숨 잘 쉬며 어린아이들 마냥 마음껏 뛰어 노는 지요 며칠 전 지인에게 몇 마리 분양받아 왔는데요 조석으로 때맞춰 밥도 줘야 하고 가끔 물도 갈아줘야 하고 조금 귀찮기는 하겠지만 이놈들 어항 속을 학교 운동장처럼 이리저리 신나게 뛰어 다니는 거 보는 재미만 하겠습니까? 어린 시절이 고스란히 떠오른다니까요 아침에 일어나 세수하러 가기 전 먼저 이놈들 뭐하나 궁금해 어항 앞으로 다가가 가만히 들여다보면 내가 주인인 건 어떻게 얼고 강아지처럼 귀신같이 물 위로 쪼르르 달려와 살살 아양을 떨면서 어리광을 부리는데 남았던 잠 확 달아나면서 환한 웃음 거저 얻는다니까요 얼른 그 기분으로 모이 몇 알 챙겨 주고 환한 하루 꼬리치러 가지요
*열대어(관상용)
매
바람의 그림자도 타버린
뜨거운 대낮
공중에
호흡 멈춘 점 하나
그의
날카로운 부리와 눈빛은
대지의 정곡을 마구 쪼아대고 있다
찰나
망막을 깨트리고
대지의 가슴 위로 곤두박질
빙 빙 돌던 하루가 비명 없이 멈춘다
가을 하늘
고대광실 눈부신 궁전을 세워 놓은 건
순전히 뭉게구름 이예요
저기 양떼 좀 보세요
어디 갈 곳 먼저 정해 두고 가는 것처럼
서으로 서으로 앞 다투어 달려가고 있어요
그 뒤로 조금 떨어져
은빛 막대 하나 달랑 들고 터덜터덜 걸어가는 건 혹시
이솝의 양치기 소년 아닌가요?
영원히 머물 수 없는 걸 이미 눈치 챈 텅 빈 오후
그 틈으로
청춘의 껍데기를 흠모하다
밤기차처럼 멈춰 선 여백의 은사시나무 숲 간이역
만화경 속 같은 오솔길엔
자전거를 탄 챙 넓은 캐플린의 소녀가
안개꽃 마을로 점점 멀어져 가고 있어요 차츰
흰나비로 변하면서 하얀 새털로 변하면서…
옛정
어스름 밤 팔당호 달이 뜨네
저 달 지면 떠나갈 다정한 사람이여
흐르는 이 눈물 어쩔 수 없네
잘 가시오 잘 가오 부디 안녕히
바람 잠든 호반 길 풀벌레 울고
다시 만날 그날은 기약도 없네
억새꽃 핀 팔당호 달이 뜨면
기약 없이 가버린 그 사람 생각나네
이제 우리 다시 만날 수 없어도
잘 계시오 잘 있소 부디 안녕히
둘이 걷던 호반 길 혼자 거닐면
떠나버린 그 사람 그리워지네
원대리
여보게, 우리 오늘 밤 별
볼일 없으면 자작나무 숲 가세
뭇 새들이 서둘러 제 집 찾는 저녁
잉크처럼 번지는 하늘 벗 삼아 숲 걷다보면
나 보다 키 큰 잡초들과 길섶 풀벌레 소리
소름 돋도록 스산한 밤새의 울움
낮게 깔린 안개가 귀신처럼 발목을 잡아도
숲 깊은 안으로 빠져들면 좋겠네
길 걷다 힘들면
잠시 멈추어 서서 까만 하늘도 보고
나무 사이 숨어있는 별들도 훔쳐보세
새벽 샘가 철없는 별 몇 멋모르고 내려와
정화수로 세수 한 뒤 가지에 총총 걸려있거든
따려하진 말고 하나 둘 셋……
세다만 가세
타오를 때 자작자작 소리 내며 우는 나무
마른 연기처럼 번지는 달빛 속 자작나무 숲
멀리서 보면 잘 빗은 아버지의 은은한 머릿결 같은
정지리 갈대밭
강 언저리에서 떠돌던 바람이
잠시 쉬어가려다
무심코 지나던 저녁 햇살에 놀라
도망치듯 달아난다, 가끔
길 가던 철새들이 제 집처럼 들러
안부를 묻고 근황을 살피다 황급히 날아가고
속은 비었어도 쉽게 꺾이지 않는 것들
맑은 날 안으로 안으로 녹색 혈관을 따라 들어가
층층 덮인 껍질 벗겨내듯 묵은 시간 벗겨내면
양파처럼 속 꽉 찬 시절도 있었을 터
바람 부는 날 갈대밭엔 속 비운 갈대들이
저희끼리 몸 비비며 츠크츠크 격음화로 운다
개에게 배우다
사람들이 빙 둘러 모여 있다
뒤로 걷는 개가 있다
뒷걸음으로 계단을 오르는 개 있다
보란 듯이 한 발 한 발 혼신을 다해
꼬리를 좌우로 더듬이처럼 저으며
위로 더 위쪽으로 오르는 개 있다
TV 속 어느 수의사는 말한다
직립보행 인간들도 뒷걸음으로 계단을 오르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 이라고
계단 아래 모인 사람들이 여기저기 박수를 친다
개는 주위의 응원엔 관심도 없다
한 계단 한 계단 최선을 다해
한눈 한번 팔지 않고 오르고 또 오른다
한 걸음 한 걸음 오르는 법을 가르쳐 주듯이
그렇게 다 오르고 나서
아래 있는 사람들에게 넙죽 엎드려 절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보았냐는 듯이
당당하게 살랑살랑 꼬리를 치는 것이다
기워 사는 집
어느 大木이 저토록 능란한 솜씨로
변변한 연장 하나 없이
공중에 찬란한 누각을 지을까
기우뚱 무거운 짐 하나 짊어지고
한 땀 한 땀 수를 놓듯 미로의 집
태어나 누구에게 배운 적 없어도
지도에도 없는 길 잘도 찾는다
거미는 불빛 아래 터가 명당인 걸 안다
날이 어두워지기를 기다려
고개 숙여 제 발등 밝히는 가로등과는
이미 오래전 모종의 거래를 끝냈다
이 사실을 모른 체
불빛에 세 들어 사는 것들이
멋모르고 몰려와 진을 친다
어쩌다 예측치 못한 바람의 날갯짓으로
벽에 금이 가고 지붕에 구멍이 생겨
비가 오면 온 방안 빗물이 새어들고
맑은 날 별이 훤히 내다 보여도 버릴 수 없는 집
늦은 밤
촉수 낮은 달빛이 살며시 담을 넘을 때처럼
숙연하게 받아드릴 때도 있는 것이다
해질 녘
거미는 바람에 데인 발자국을 옮기며
오르락내리락 구멍 난 지붕을 깁고 있다
꽃에게 취하다
술 취한 새벽 화분에 오므린 꽃 몇 송이 잘라 소주병에 꽂아 놓고 잠자리에 들었다 한동안 무릎 잘린 꽃들의 입에서 울렁울렁 신음이 새어 나왔다 이내 떫은 목구멍으로 썰물처럼 알싸함이 밀려왔다 지독히 역겨운 바다 냄새가 났다 늦게 안주로 먹은 꽁치구이와 왕새우의 살점이 삼킨 그대로 침대 위를 둥둥 떠다녔다 골목을 지나다 창문을 기어들어온 찬 공기가 허옇게 혀 꼬인 한숨으로 온 방을 짓눌렀다 스러지듯 겹쳐지는 방바닥의 격자무늬 시간이 지나도 흐린 눈동자 속 맥박의 도수는 점점 올라가고 자꾸 천장이 내려앉아 머리를 무겁게 짓눌렀다 쓰린 가슴 내밀어 기우뚱 등 굽히는 벽 시계바늘은 잠들어 있던 통점들까지 깨우며 비틀거렸다 셈이 흐린 늙은 괘종시계가 뎅뎅 열세 번 종을 칠 때 꽃들은 왝왝 쓴 입을 벌렸다 철없는 꽃잎 하나 붉은 얼굴로 떨어졌다
나는 꽃들의 통증에 물들어 갔다
나비무늬 햇살
눈 쌓인 시골집 싸리 울타리 넘어
나비 한 마리 기척 없이 날아든다
바람 숭숭 둘러놓은 집
무엇을 기억 해 서둘러 왔을까
먼 길 돌아온 고단한 날갯짓
비틀비틀 마당을 돈다
사립 옆 낡은 우물가 능수버들 섰던 자리
봄 마다 텃밭 가득했던 장다리꽃 그 자리
나는 볕 좋은 사랑 툇마루에 누워
낭창낭창 날갯짓만 따라 다녔다
처마 끝
고드름 끝에 녹아 떨어뜨리는 바람
철모르고 찾아와 준 나비무늬 햇살에게
나는 마루 한자리 내어 주었다
너도 꽃이다
봄바람이 팔랑 거린다
집 앞 마당귀
오래 묵힌 텃밭
꽃들이 불러들인 봄 속으로
나비가 가득하다
나비가 나풀나풀 춤춘다
꽃들이 살랑살랑 아양을 떤다
네발나비 한 마리
냉이꽃 머리털을 쓰다듬다가
꽃다지 긴 목을 흔들다가
민들레 귓속을 간질이다가
밭두렁에 갈겨놓은 개똥 위에
슬며시 내려앉는다
아, 개똥마저 꽃으로 피어나는 봄
개똥도 나비가 앉으니
꽃잎이 활짝 열린다
밤
쉽게 말해서 해진 후 세상이 흐지부지 검게 변하는 거
며칠 연거푸 비가와도 지워지지 않는 연탄 공장 앞마당 같은 거
뭔가 선명치 않아 긴가민가 톡 도드라지지 않고
금세 눈에 튀지 않아 깜빡 속을 수 있는 거 신비한 마술 같은 거
온 종일 방구석에 뒹굴뒹굴 하다가 밖에서 친구가 불러내면 먹은 그대로
입은 그대로 얼른 손으로 대충 머리만 쓱쓱 빗어 넘기고 나가도 좋은 거
훤한 대낮 같으면 죽었다 깨도 상상 할 수 없는 거
그래도 흉하지 않은 거
그래서 내가 참 좋아 하는 거
별을 낚다
빗물에 온 몸 씻긴 어둠이
강으로 스며들 때
은하에서 걸어 나온 별 몇
강물로 뛰어 든다
정적을 깨뜨리고
텀벙!
기우뚱 신음 하는 강
강의 비늘에 불이 켜진다
물속에도 가끔 바람이 부는지
기웃 몸 트는 물의 반란
소화 못한 별빛 뻐끔뻐끔 토해낸다
지문처럼 찍히는 물의 파문, 파문, 파문 ……
깊은 밤
끝내 숨지 못한 물고기자리 별 하나
강 위로 떠오른다
반짝, 물살에 걸려 파닥인다
비굴
시장 어물전 천장에
죄인처럼 줄줄이 묶여 있는 굴비들
사람의 눈길 피해 건덩건덩
매달린 이유 알 수 없어
동그랗게 눈 뜨고 세상을 웃고 있다
무슨 말 하고 싶었을까?
반 쯤 벌리고 다물지 못한 입
그래서 더 비굴해 지기 싫은 굴비는
사람들의 밥상에 올려 져도
끝까지 눈 치켜뜨고 먹히고 있다
삼성전자
해질녘,
우기 끝난 열대우림 아프리카 사바나
노을에 물든 대지가 아름답다 느낄 쯤
무엇을 보았을까?
갑자기 대 초원이 긴장하기 시작했다 그때
어슬렁거리며 클로즈업 되는 암사자들
그들의 눈빛이 수상하다 그럼, 그렇지.
누우 떼였다 건기 피해 폭풍처럼 이동 중인 수만 마리 누우 떼
암사자들은 서두르지 않는다
최대한 낮게 낮게 바람의 밑바닥에 납작 엎드려
면밀히 동태를 살핀 후
수풀 사이를 숨죽여 한 발 한 발 다가선다
이미 몸에 밴 본능으로 물 샐 틈 없는 간격의 그물을 치고
그들만의 눈빛 그들만의 호흡으로 차츰 포위망을 좁히는 것이다
갑작스런 공격에 놀라 허둥지둥 달아나는 누우 떼
몇 놈들이 쫓고 무리들은 달린다 나는 알고 있다
암사자들은 그 중 제일 어리고 약한 것을 택하여 집중적으로 공격 할 것이다
사정없이 덮칠 것이다 그리고
사바나에 노을이 쓸쓸히 지고 있을 것이다.
양수리 바람
지난 밤
운길산 골짜기에 모여 있던 바람은
동 틀 무렵 서둘러 강으로 달려간다
달리다 달리다가 숨이 차서
두물머리 앞 작은 섬에 다시 모인다
첫 새벽
물새 떼 앉아 놀다 간 자리엔
달빛의 여운처럼 물안개가 자라고
여독에 잠 설치고 일찍 눈 뜬 바람이
정적의 강가를 절룩이며 걷고 있다
졸린 눈 비비며 문빗장 여는 아침
강물 위로 부서지는 은파금파 햇발들
놀라, 물속으로 숨는 송사리 떼
바람은 강가 갯버들에 매달려 춤추고 있다
구름은 바람 손잡고 어디로 가는지
중천에 뜬 태양이 곰살갑게 세상을 바라보는데
사공 없는 빈 배는
바람의 분신처럼 물결에 흔들린다
남한강 북한강 두 물이 만나
한강으로 흐르는 물길을 따라
바람은 저무는 운길산 긴 그림자 앞세워
강둑길 강둑길을 말없이 달려간다
제부도
갈매기 없는 바다
석고처럼 굳어버린 섬
검게 타버린 심장에
다시 새살이 돋는 삼월의 갯벌
鹽氣 없는 바닷바람의 속내를
차마 바위는 말이 없다
겉잠자다 실눈 뜨고 하늘을 보는
영원히 깨어 있고 싶은 섬
창틀에 걸린 오후
내 방 창가
뉘엿뉘엿 서산을 넘던 태양이 삭은 뼈처럼 누워있다
기억의 뼈를 찾아 살결 사이사이를 헤집던 햇살이
생선가시처럼 내 눈을 파고든다
나는 뱀처럼 누워있다 놀라 허물 벗듯 일어나 창문을 연다
말더듬이 과수원 집 딸 열 여섯 소녀
뒷산 돌배꽃 향기 보다 진한 노을
포도밭 가시나무 울타리를 넘다
마른 풀숲 비탈에서 산꿩이 울면
새갱이* 샛길로 도망치던 낙조여
가는 귀 먹은 창밖으로
재잘재잘 하교하는 참새들의 수다
불쑥 누군가 사랑이라는 말에
저희끼리 까르르 홍조 피어오를 때
허, 내가 얼굴 내밀어 창밖을 보니
소녀들은 저만치 집 모퉁이를 돌고 있다
노을에 중독된 하루가 저물고 있다
*사강리(沙江里)의 어원
경기도 화성시 송산면 사강리
옥이
한
여름
까만 밤
호롱불 켜던
그 시절
시골집 앞마당
멍석 위
아랫집 옥이
열여섯
먼 별
빛
추신
간간히 바람이 불 때마다
나무는 노랗게 타들어가는 기침소리로
길을 열었다
터덜터덜 고단한 발목 추슬러
만삭의 능선을 넘는 은행나무 가로수
긴 여정 걸어온 노독으로
헝클린 머리 끄덕이며 기면증에 빠져 있다
꾸벅꾸벅 낙엽 몇 잎 떨구고 있다
이미 짜여 진 각본으로 제 빛깔 벗겨낸
시월의 모든 날짜들이 계절병을 앓는 시간
태어나 줄곧 누워있던 그림자가 일어나
비틀거리는 나무의 어깨를 토닥이며
황갈색 신작로를 걷는 저녁
먼 길 떠난 철새들의 빈 둥지에는
마른 솜털의 그리움이 가득하다
이제 옛일을 동경하는 것들은 모두 떠났다
이런 날은 둘이 길 떠나도 혼자일 것 같다
폐항
등댓불 꺼진 항구
비린내 사라진 포구엔 갈매기도 날지 않는다
날 갈지 않아도 선듯 면도날 같은 햇살
바다가 시름을 앓아도 파도는 모른 척 한다
13,09.07.00;40
九月
구월 하고도 엿새 아니
이레째네요
세월 빠른 건 진작 알았지만요
빨라도 너무 빠르네요
눈물 나려 하네요
옛 집 언덕 들꽃 생각나네요
한 잎 한 잎 일일이 들러
그곳 안부 묻고 싶네요
간만에 창문 열고 밤하늘 보네요
어렴풋이 낯선 별 몇 보이네요
달님은 어디로 숨었을까요?
신선한 바람 들어 오네요
아, 좋으네요
내일은 강가의 코스모스 구경 가고 싶으네요
귀로歸路
해 넘어간 마을 앞 소슬한 들녘
땅거미 내려 어슴푸레 지워지는 길
등불 밝혀 더듬더듬 옛길 가듯
달빛 좋아 한참 걷다 뒤 돌아보면
올 때 없던 길 하나 또 생긴다
풀잎 사이 이슬방울 매다는 별빛
낮게 드러눕는 길섶, 노란 달맞이꽃
풀벌레 소리 남겨두고 다시 저 먼 길
야윈 달빛 등에 지고 돌아오는 길
고양이처럼 기어오는 달맞이꽃 길
자갈치의 봄 너른골 15
삼월,
삼동에도 가랑눈 구경 한 번 하기 힘들다는 자갈치의 하늘에
눈꽃이 핀다
이미 만개한 눈꽃이 가득 날린다
폭설이다! 몇 해 만에 보는 풍경인가
귀한 손님 맞듯 반갑게 맞이하는 시장 사람들
대설 주의보 대설경보에도 함박웃음 한 바가지 쏟아 놓는다
갈매기횟집 옆 어물전 좌판 위에
나란히 누운 동태들이 언 눈을 휘둥그레 뜬다
비린내와 눈발을 가웃 뒤집어 쓴 천막들
드문드문 이빨 빠진 이누이트족 이글루 같다
댑바람에 기우뚱 몸 트는 백열등 환한 꽃잎 달아주고 있다
평생 눈을 제대로 앉혀보지 못했을 낡은 의자가
먼지 대신 눈꽃을 수북이 앉히고 있다
어느 틈에 시전 바닥에 잔뜩 쌓인 눈꽃 눈꽃들
쓸면서 밀면서 퍼내면서 모두들 허허
눈은 눈 때문에 눈 구경을 참 잘했다
오늘 장사는 공쳤어도 그래도 봄바람은 분다
나비
봄바람 햇살 등 떠미는 오후…
장다리꽃 밭에는 축제가 한창이다·
나비들의 축제다
나비들이 춤춘다 꽃들이 춤춘다
동요풍의 춤사위로 가뿐 꽃대궁 위에 앉는다
꽃들이 살랑살랑 아양을 떤다
나비는 어느 꽃에나 앉을 수 있다
들길 널브러진 냉이꽃
바람에 일렁이는 감자꽃에도
무심코 밭두렁 개똥 위에 앉는 나비야
차마 그 꽃에는 앉지 마라
바라보는 고소와 힐난의 눈빛들 부정하다
봄·바·람·에·둥·둥·나·비·가·떠·다·닌·다
흔들리는 것 모두가
바람을 안고 사는 것은 아니다
내 詩에 관하여
선 하나만 잘 그어도 반듯한 집 세워지고 점 하나만 잘 찍어도 어엿한 시가 되는 걸 의심하다 글 한 줄도 못쓰고 꿈을 꾼다 내 詩는 지느러미 없는 물고기다 힘없이 비틀비틀 물 위를 떠다닌다 내 詩는 향기 없는 꽃 벌도 나비도 찾지 않는다 내 詩는 대저울에 매달린 저울추다 졸린 내 눈꺼풀만큼 무겁다 그러는 사이 내 詩는 초조와 불안을 잉태하고 더디게 싹을 틔워 때 이른 꽃이 피고 설익은 열매를 맺어 뼈 없는 물고기를 낳는다 죄송해요 어머니 알 수 없는 기호로 위장하고 가장한 외람을
용서해 주세요, 어머니
용기를 주세요, 어머니
느티나무
늦여름
나른한 정오
먼 산 보며 하품하는 나무
그 아래서
그늘 덮고 한숨 자고 싶으다
자다가
악몽에 섬뜩 깨고 싶으다
다리에서 본 풍경
바람이
제일 먼저 지나는 다리
고개 숙인 가로등
긴 모가지 구부려 제 발등 보고 서 있다
늦은 귀가를 서두르는 불빛들의 행렬
실안개 풀리는 다리 밑 강물 위로
밤바람이 모인다
언제부터일까
정작 겉만 보고는 알 수 없는
칭칭 보호색으로 위장한 세상
한 치 앞 짐작할 수 없는 안개 밭
강가 어둠에 중독된 바람이 다리를 건널 때
늦게 귀가하는 자동차의 비명으로
고양이가 불빛 속으호 뛰어 들었다
그도 우리처럼 앞이 캄캄 했을까
누구 하나 멈추어 내다보지 않았다
흐르는 강은 아무 말이 없다
다리를 건너던 바람이 그 곳을 지나다 한동안 머물러
고양이의 피 묻은 털을 쓰다듬어주며
애틋한 눈빛과 울음을 감싸 안고
안개 내리는 무지개다리를 절룩절룩 건너가고 있었다
독살*
마을 근해
물 빠진 갯벌이 알몸으로 눕자
웅크린 돌들이 허리를 일으켜 세운다
어부들이 오래전 한 뜸 한 뜸 그물을 짜듯
돌 하나 돌 둘 정성스레 쌓은 성
저것은 어부가 파놓은 함정이다
그 덫에
멋모르고 걸려들던 물살들 물고기들
얼씨구 풍어로구나
어스름 밤 횃불 밝혀 덩실 춤을 추던 사람들
이제 그 시절 풍경은 어디 가고 없다
늦가을 뒷산 보면 울컥울컥 눈물 나거나
향유고래 등뼈 화석처럼 푸석푸석 변해가거나
원시적인 게 그리울 때도 있는 것처럼
봄날 아지랑이 보듯 아른아른 아련해지는 것
*독살; 돌로 담을 쌓아 밀물 때 들어온 고기를 썰물 때
빠져 나가지 못하게 하는 전통 어
마음을 짚다
보호막을 쳐도 속내 다 보여
일상의 깊은 주름까지 펴져서
상심한 마음 바람에 데인적 있다
붉은 바탕에 거뭇거뭇
등불 꺼진 자리에 걸터앉는 구름
어둠 속에도 그늘이 있어
삐걱삐걱 흐르다 엇박자에 비틀거릴 때
만추晩秋
축제가
막을 내린다
큭큭 웃어주는 나무들
붉게 오그린 손들이
춤추며 떨어진다
곤줄박이 한 쌍
빈 나뭇가지에 앉아
탁탁 가을을 턴다
12.05.02. 02:28
모르는 일
절차탁마切磋琢磨 조심누골彫心鏤骨 하여 딴 일 다 버리고 간만에 마음 굳게 먹고 詩 같은 詩 한번 써 보자고 책상 앞에 앉았지요 몇 분이나 지났을까요? 살살 머리가 지끈거리면서 온 몸 구석구석 마디마디 저리고 쓰리고 천둥 번개가 치고 지진이 일어나고… 왜 자꾸 눈꺼풀은 창틀에 걸린 늦은 봄 마냥 점점 무겁게 내려 앉던지요 봄 보다 여름이 먼저 와 기다리고 있는 살구나무 집 분이네 봉당 벌써부터 그늘이 좋은 살구나무 밑 삐돌이 검둥이 녀석 집 지킬 생각은 않고 연실 머리를 꾸벅꾸벅 추켰다 내렸다 추켰다 내렸다 조 녀석을 그냥…
민들레
겨우내 햇빛 좋은 봄날 기다려
솜털 보송한 얼굴 뽀얗게 내미는
밟아도 밟아도 일어나는 노랑머리 꽃
밟혀도 밟혀도 일어서는 민초 닮은 꽃
기어코 가늘고 긴 모가지에
은빛 투명한 보름달을 거는구나
길을 가다 신기해서
뚝 꺽어 입으로 후우 불면
아이의 웃음 따라 까르르 날아갈
기억의 맨 처음
설렘 혹은 그리움
밀고 당기고
벗은 옷도 또 벗기는 한여름 땡볕
정자씨 부부가 잠시 쉬어가는 느티나무 그늘 앞 공터
두 마리 개가 서로 엉덩이를 맞대고 앞으로 뒤로 밀고 당기고
-아니 저놈들 뭐여, 멀건 대낮에 가만 누워 있어도 사타구니 땀이 차는 판에
-뭐긴 뭐여요 춤추는 거 아녀요 춤 브루스
-멀건 대낮은 무슨, 밤에도 못하는 놈도 있는데…
사내는 발끈해서 정자씨를 한번 흘낏 쳐다보다
금세 꼬리를 내린 채 벌게진 얼굴로
그늘까지 태워버릴 개들의 정사를 뜨겁게 노려 본다
-얼른 가요 괜히 하지도 못하면서 침 흘리지 말구…
남편은 입에 고인 침을 퉤 뱉어 놓으며 곁눈질로 발길을 질질 끈다
아내에게 쪼그라 들었다 개들에게 부풀어 오르는 오후
새 벽
누구인가
검은 망토에 복면 쓰고
불현듯 나타났다
유유히 사라지는 저기
꿈 속 無形의 잔영 같은
의문의 정체는
꿈을 꾸었다
지난 엄동에 얼어 죽은
어린 유충들이 다시 살아나
치욕의 어둠을 하얗게 썰고 있다
밖에 눈이 오는지
발이 시렸다
누구인가
벌레 먹은 동천에
새살 돋아 주러
야금야금 다가오는 저기
정체불명
투명의 그림자는
누가 이 아침
여린 꽃눈 틔우듯
조심스레 여는가
쉬
하지 마소
누가 들으면
등 뒤에서
언내 오줌 뉘는 줄
속닥속닥
은밀히
내 얘기 하는 줄
압구정
멀건 대낮
긴 생머리에 반 벌거숭이
여우 둘이
거리를 활보 한다
어디서 도망쳐 나왔을까?
철창을 물어뜯고 나왔는지
주둥이가 빨갛다
누구를 또 홀리러 가는 걸까
로데오거리 빌딩 숲을 헤치며
도심 속 도심 속으로
걸음발이 가볍다
12.05.13. 22:30
旅路
을씨년스럽습니다
오늘은 아침부터 쭉
두위봉* 구름 속에 꼭꼭 숨은 해님이
영 얼굴 내밀 생각을 안 합니다
날씨 탓인지 긴 여행 탓인지
온 몸 구석구석이 찌뿌둥합니다
집 밥이 그리운 때입니다
집 생각 하니 마음 보다 발이 먼저 앞서
길을 따라 나섭니다
지금은 사북 거쳐 정선쯤 지나는 길입니다
정선아리랑 후렴이 저절로 흥얼거려집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나를 넘겨주소
그사이 또 고개를 하나 넘습니다
*두위봉 ; 강원도 정선 사북 사이에 걸쳐있는 산
웃음을 벗다 (검은등 뻐꾸기)
요사채 옆
큰 참나무 숲
누구인가 저 소리
싹싹 깍고 싹싹 깍고
잠만 자고 잠만 자고
똥만 싸고 똥만 싸고
전설 속
게으른 수행으로 세상을 거르던
그 스님들인가
레레레라 레레레라
귀의 음역에 따라
다르게 들린다는 노랫소리 울음소리
명치에 숨어 우는 새소리에
나를 다 벗어 던진다
홀딱 벗고 홀딱 벗고
저 곳
유년의 강
먼 들녘 북소리 둥 둥
풀이며, 나무며, 꽃이며……
지나는 바람 한 줌 잡아 주머니에 넣었다가
누군가 그리우면 꺼내어 휘파람으로 붑니다
집 나가 돌아오지 않는
비둘기 한 쌍
이제
세상 중심 못 잡는 바람 앞세워
긴 여정의 초췌로 남루를 깁습니다
바람에 등 떠밀려 음표를 만들어
빛바랜 깃발 들고 달려오는
저 햇살로
지하의 방
한겨울에도 내 방 유리창엔
손때 묻은 흔적처럼 버즘이 피고
시누대 숲으로 도배한 생채기투성인
오래된 벽
유리 어항 속 물고기 한 마리
비늘은 없고 부레만 남은
붉게 충혈 된 눈알이 대숲을 떠다닌다
밤새 근강에서 떠돌던 바람이
창가로 모여드는 새벽
신열 앓듯 몸 뒤척이던 물고기여!
밤마다 내 정든 베개닢 적시던 눈물은
강물 되고 강물이 되고……
첫눈
첫차를 기다립니다
초겨울 새벽
어스름 잔영이 채 가시기 전
서둘러 별이 숨어버린 하늘은
이내 첫눈이라도 올 것 같았습니다
나는 터미널 대합실 긴 의자에
몸을 낮게 웅크리고 앉아
어떤 그리움에 눈 감았습니다
아, 먼 그곳
가시나무 울타리
뒷산 과수원집 눈 먼 소녀는
북향으로 낸 작은 유리창 밖으로
밤새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무엇이었을까요?
집 찾는 작은 새의 날갯짓 이었을까요?
먼 길 가는 바람의 몸짓 이었을까요?
삭풍에 난낭 터진 홀씨의 난무였을까요?
빙빙 도는 환각의 어지러움으로
나는 깨어 납니다
다시 저 곳 가려면
어디로 가는 표를 끊어야 할까요?
청춘
깊은 밤
검정산 위에 걸린 달이여
은하의 계곡으로 분산하던 별똥별아
절대 녹슬지 않을 그곳 저 불멸의 황금성으로 달려가자
잦은 밤샘으로
재 너머 어둠을 훔친 오명을 써도
이제 새벽이슬 촉촉이 젖을 때까지
들개처럼 배회하던 청춘은 없다
투정
못을 박는다
가끔 벽을 뚫다 맥없이 모가지가 꺾이기도 한다
다시 곧추세워 박아 봐도 반듯하게 벽을 뚫지 못한다
-무슨 남자가 그 것 하나 제대로 못해요!
입이 뾰족해진 아내가 밖으로 나가며
한마디 두드리며 했던 말
베란다 위 벽과 벽 사이 축 늘어진 빨랫줄
지난 밤 널어놓은 속옷들이
창틈 바람에 실룩실룩 몸 흔들고 있다
옷을 하나하나 벗겨내고 줄을 당겨
못대가리에 단단히 묶어 못을 박는다
옆으로 빗나가지 않도록
모가지가 꺾이지 않도록
점점 강하게 더 힘주어 꾹꾹 깊게 박는다
미리 아내의 입을 단단히 봉하려는 것이다
오늘밤 아내는
빨랫줄 보다 더 당당해진 내가 좋아
어쩔 줄 모를 것이다
팔월의 노을
저것 좀 보아
저것은 소리 없는 함성
만세소리 드높은 환희의 깃발
눈물로 얼룩진 분노의 절규
감열지처럼 타는 태양의 조화
희비를 긋는 어둠의 경계
그 선을 넘는 기러기 떼
줄
줄
줄
줄지어 추락 한다
붉은 달이 뜬다
폭설
몇 날 며칠
天空에서 흰 나비 떼가 나풀나풀 한 없이 날아온다
흰 새떼들이 날개 펴고 훠이훠이 끝없이 몰려온다
흰 말떼들이 네 굽 안고 사박사박 쉬지 않고 달려온다
와서 앞마당에 소리 죽여 앉는다
폭설 2
몇 날 며칠
쉬지 않고 눈이 내려 생활이 지루하다
세상이 눈사태로 발이 꽁꽁 묶였다
하루 종일 방에 누워 천장 보며 하품만 한다
머릿속이 온통 하얗다 편두통이 다 생겼다
창밖엔 여전히 눈이 내린다 아직도
솜뭉치 같은 눈발이다
점점 더 시름이 쌓인다
함지박
그놈 참
쭈욱
입 찢어진다
입이 귀에 걸렸다
알맹이는 남 다주고
속은 텅 비어도
해맑은 아이처럼
마냥 웃는다
흑백사진 속의 연가
책장을 정돈 하다
헌 책갈피에서 뛰쳐나온
흑백사진 몇 장
내 기억은 오래된 책장의 흠집처럼
해묵은 시간에 붙들려 벌서고 있다
어느 가을 오후 학교 운동장
방과 후 우리들은 플라타너스나무 그늘 아래
짱! 껨! 보! 편 갈라 둥글게 금을 그어
땅을 크게 넓히려다 가끔 멱 잡이를 하고
주먹다짐을 했다 그때,
우리들 원산폭격에 토끼뜀을 뛰어도
서산에 걸린 해는 좀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고
두 손 들고 오랜 시간 침묵하는 동안에도
서산의 해는 좀처럼 기울지 않았다
한참 만에 나타난 매부리코체육선생님
꿀밤 한 번 주면서 머리를 쓸어 주셨고
우리는 서로 얼굴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무슨 일 있었냐는 듯 손잡고 집으로 달려 갈 때
늦은 저녁 싣고 황급히 날아가던 하얀 비둘기 떼
그제야 서산으로 해도 기울었다
스마트폰
눈만 붙이고 있는다는 게 깜박 잠이 들었어요
발밑으로 냇물이 흐르는 꿈을 꾸었어요
발이 시려요
창밖 가로등 불빛 속으로 싸락눈이 내리고 있어요
분명 무슨 소리가 들려요
숱한 밤샘으로 침침해진 동공을 닦듯 싸락싸락 눈 쓰는 소리
어느새 위층 귀머거리 할아버진 마당에 나와
평생 들리지도 않는 눈 소릴 열심히 비질하고 있어요
이사 올 때부터 쭉 죽지 않고 돌아가던 벽시계가
거의 보름 째 약기운이 떨어져 한 곳만 가리키고 있어요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 건지 아무리 둘러봐도 꽉 막힌 벽
그래도 약 기운이 떨어지기 전엔 차박차박 소리를 내며
활기차게 하루치의 시간을 적절히 조제해 줬어요
그래요 일부러 죽인 거예요
군홧발 소리에 통 잠을 잘 수가 없었거든요
영원히 열릴 것 같지 않은 눅눅한 어둠에 길들여지는 기분
어때요?
여물지 않은 오후가 신경과민증을 앓고 있어요
그 때부터 였을까요?
나는 창가에 모여드는 노을 하나하나 더듬어
엄지손가락으로 꾹꾹 눌러 다른 세계로 빠져드는 꿈을 꾸곤 했어요
그래요 어둠의 온도를 측정해 보고 싶었어요
조금씩 커가면서 가지고 놀던 졸음이 스르르 무너지고 있어요
혹시 하는 안부에 스마트폰을 꺼내 대문을 열어요
어느새 싸락눈이 멈추었어요
그건 순전히 표백제를 전혀 쓰지 않았으므로
캄캄함 밤이예요
개밥바라기*
초저녁 서쪽 하늘 구름 사이로 반짝 빛나는 별
왜 하필 이름을 개밥그릇이라 붙였을까
아무리 눈 씻고 봐도 저 별이 개밥그릇은 아니다
날마다 개밥 챙겨주는 엄마는 알고 계실까
먹다 남은 음식 무심코 담아주던
투박하고 생채기투성인 사기주발이
검둥이가 하루 종일 구멍 나도록
반짝반짝 핥고 있는 개밥그릇이 별이라는 걸
검둥이가 차츰 어두워지는 마을 뒷산 먼 하늘에 대고
목청껏 짖고 있는 마알간 별이 개밥그릇이라는 걸
이제야 알겠다, 저 별이 유난히 빛나는 이유
* 해 진 뒤 서쪽 하늘에 밝게 뜬 별 (금성)
시 벗
머언 먼 하늘
홀로 여위는 붉은 달
기러기
줄줄 줄줄줄 줄
한곳 바라보며
산 넘고 물 건너
같은 길 가는
아무려면 어떻소
게 눈 감추듯
설악산 대청봉을 단번에 다녀오시다니
허, 이거 보시오 선생 정말 대단하시오
그런데 말이오 선생 뭐 좀 이상하잖소?
하지만 어떻소 다녀왔다는 게 중요하지
누가 그대를 나무라오 그런데 말이오 선생
내 그 말에 한 마디 거드오
나는 게 눈 감추듯
설악산 대청봉을 단번에 먹어 버릴까 하오
오래된 말(言)
오늘의 운세 같은 아리송한 말을 읽는다
학교 앞 단풍문구점에는 단풍나무가 없고
만물상 옆 영광상회 좌판에도 굴비는 없다
아이들은 하굣길 학교 뒷문 느티나무 아래 모여
고누를 두거나 땅따먹기를 하며 논다
깨알처럼 작은 글에 몰두한다
가끔 종이벌레들이 출현 한다는 지난 뉴스엔
紙面의 일부를 갉아 먹은 흔적이 속속 드러나도
대부분의 말들은 결론을 내리지 못한다
사실 朝刊에는 이미 들통 난 어제의 말들이
마스크를 눈 밑까지 가리고 모른 척 돌아다닌다
그러나 아무도 눈치 채는 이는 없다
기억 해 두고 한다한다 하면서
아직 하지 못한 일들이 주름살처럼 늘어난 건
오랜 일이 되어 잊혀 진 것들이 쌓인 그리움이다
졸린 대낮
오늘도 흑백 TV에선 살찐 소들이 둘러 앉아 연신
소화 안 된 말들을 되새김질하는 아주 지루하게 토크쇼가 진행 된다
전화벨이 울린다
사람들은 매번 속는 줄 알면서
다시 울타리 안으로 귀를 세운다
계륵鷄肋
길게길게끝날것같지않던무더위
지루하고짜증스런여름이간다네
누가그러데조석으로찬바람부니
가을온거라고근데정말간사한게
사람의마음맞더라막상간다니까
그냥괜히섭섭하기도하고아쉽데
평소관심도없던옆옆뒷집노처녀
날두고날두고머얼리시집간다는
소릴들은것처럼정말웃기네그치
죽은 척
저녁밥 먹다 어머니한테 한소리 듣고
방으로 들어와 창문을 여는데
달빛 따라 날아 들어온 풍뎅이 한 마리
빙빙 천장을 몇 바퀴 염탐하다 책상 위에 앉는다
허락도 없이 내 방에 들어온 놈을
얼른 쫓아 버릴까하다 가만히 가서 들여다보았다
그제야 놈은 뭔가 잘못 된 걸 눈치 채고
재빨리 몸을 움츠려 죽은 시늉 한다
다시 밖으로 내보낼 요량으로 손으로 툭 건드려보았다
다리를 배 밑으로 더 깊게 움켜 넣고
온몸을 돌돌 말아 아예 꿈쩍도 않는다
한 번 더 어서 달아나라고 조금 세게 쿡 밀쳐보았다
밤톨처럼 데구루…
정말 죽은 게 아닌가하고 덜컥 겁이 날 때
달빛이 너무 밝아 전깃불로 아셨는지
방문 앞을 지나시다 어머니가 또 한마디 하신다
놀면서 전기라도 아껴야지!
나는 이내 달빛도 전기세가 나오느냐 대꾸 하려다
삐쭉 튀어 나오려던 말을 접어 넣고
장난치던 손도 슬며시 내려놓고 조용히 죽은 척
그러는 사이 감쪽같이 사라진 놈
알고 보면 이 방도 내 방이 아닌데…
놈이 여섯 굽을 안고 정신없이 달아났을 창밖으로
책상에 모여 있던 달빛이 슬금슬금 빠져 나가고
있었다
치유
귀갓길 집 근처 쓰레기장을 지나다
전봇대 밑에 쭈그려 앉아 있는 그녀를 본 건
추적추적 가을비 내리던 늦은 저녁이다
기린모양 긴 모가지를 비스듬히 전봇대에 맡기고
힘없이 먼 데 쳐다보는 모습이 금세 쓰러질 것 같다
그냥 모르는 척 지나쳐 오려는데
자꾸 구멍 난 가슴이 눈에 밟힌다
온 몸이 생채기투성이다
가슴엔 드문드문 가뭄처럼 실금이 가고
겉으로 드러낸 몇 가닥의 힘줄도 맥없이 끊어져 있다
어느 성미 급한 초심자 마음에 금이 가 내팽개쳤거나
거실 벽에 목매달다 씁쓸히 떨어졌을 터
다시 수술대에 올려도 옛 모습을 찾기엔 어려워 보였다
젖은 몸 구석구석 닦고 또 닦았다
한 줄 한 줄 섬세하게 소리를 깁듯
한 땀 한 땀 잃어버린 빈칸을 채워나갔다
풀린 시간 매듭짓듯 마디마디 연결해 나갔다
가슴 한 쪽 분화구 같은 구멍 달고
평생 몸 밖으로 유서처럼 힘줄 드러내고 살아도
겉으로 티 안 내고 당당하게 노래하던 그녀
아픈 목 뭉친 근육 풀 듯 누를 때마다
챙강챙강 소리 내어 울어야 빛나는 그녀가
저 속 깊이깊이 숨겨 둔 울음 꾹꾹 참고 있다
마침내,
길고 긴 여섯 번의 수술이 끝났다
줄을 퉁기자 엉엉 소리 내어 운다
삼월 (천안함)
마을 공사장 앞마당에는 신용불량 바람이
가슴 뚫린 낙엽들을 마음대로 굴리며 다녔다
인부들은 춘분 지난 날씨의 외도에 침 뱉으며
마당 뒤편에 빙 둘러 모닥불을 피웠고
영문 모르는 새들은 하나 둘 마을 앞 솔밭에 모여
다시 불 바람의 향방을 주시하며 언 몸을 녹였다
뒤늦게 이상기류의 흐름을 눈치 챈 쥐들은
일단 소나기만 피하고 보자는 속셈인 듯
서둘러 빛바랜 우산을 펼쳐들며 변신을 꾀하려 했지만
때마침 마을 뒷길을 서성이던 늙은 고양이가 이내 알아보고
버려진 신문을 주워 읽다 놀라 하늘 보며 앙칼지게 울어댔다
언제 부풀어 터질지 모르는 고무풍선처럼
항·간·떠·도·는·소·문
나 너 없이 큰 소리로 할 말 다 못하는 말줄임표
턱 없이 눈 가리고 야옹 하는 세간의 허구
구석구석 찌든 때 하 세월 남모르게 숨긴 양심
모두 모두 깨끗이 씻어주는 거짓말 자동세척기 있다면
혼탁한 정신 말끔해질 때까지 빙빙 돌려
속 훤히 다 보이는 유리그릇 닦듯 박박 닦아주고 싶다
손으로 문지르면 뽀드득 소리 나도록
빈틈
동공이 흐릿해지는 대낮
비릿한 바람 뒹구는 재래시장 어물전
생선가게 안주인 눈꺼풀이 만근이다
파리채를 들고 앉아 연실 꾸벅 꾸벅
그때
목에 방울 단 나비 한 마리
생선가게 앞에서 왔다 갔다 시계불알처럼
안주인은 졸다가도 자꾸 신경이 쓰이는지
번쩍 정신 차리고 노려보는데
그럴 때 마다 가만 앉아
혀로 털 고르기 하는 척 먼 산 보며 하품하는 척
찰나
잽싸게 생선 한 마리 입에 물고
나풀나풀 정신없이 날아 간다
8부 능선 9부 능선 넘듯 담장으로 지붕 위로
뒤늦게 그 광경을 본 안주인
허둥지둥 일어나 밖으로 뛰어 나가며
야, 일루와 나비 이 나쁜 놈!
가느란 봄
송정동 산호빌라 담장 안 홍목련
괜한 심통 부리듯 뾰족 오므린 꽃
열일곱 소녀 입술 같다
잎 돋기 전 몽우리가 먼저 생겨
첫새벽 지독한 열병 앓더니
소문 없이 꽃문 활짝 열리더라
화장기 없는 대낮
붉은 속내 다 내보이며
하늘 향해 환히 웃는
한 잎 한 잎
봄빛 뭉그러지는 사월
길 위 낙서처럼 지워지더라
해바라기 추상
난해한 꿈이네
바람기 한 점 없는 칠흑의 밤
꺼져가던 불씨 다시 불끈 타오르는 꿈
푸른 달빛, 파란 외눈박이 도깨비의 장난스런 춤사위
육감이 무디어 웅크린 채 꼼짝 않는 늙은 고양이의 충혈 된 눈
터질 듯 농익어 음흉하게 변해가는 해바라기 형상의 정체불명 여인
오늘 밤 내내
내 꿈 속 따라다닌 귀신
옥이·2
까마득한옛날여름우리아랫집옥이
앞마당멍석위밤하늘먼별빛본다며
살며시내무릎에눕더라그러더니두
눈을살포시감는거야순간이거뭐지
나도모르게침이꼴깍그다음은비밀
동작 그만
동그라미를 그리려고 하는데 자꾸 네모가 그려졌다
아이가 안방 사과나무 벽지 위에 색연필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빨강 노랑 파랑 수많은 사과를 따라 그리고 있었다
좀처럼 모양이 되지 않았다
아이의 눈에 보이는 사과는 네모인가
가르쳐줘야하나 망설이다 가만 두었다
잠시 후
온 벽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아이의 걷잡을 수 없는 손길 따라 채워지는 알 수 없는 문자와 기호 붉은 민둥산 회색나무 그림자 아래 길게 드러누운 검은 강 히브리어의 구부러진 지팡이와 치켜뜬 날선 알타이어가 결국 커다란 분노가 되었다
아이 엄마가 방으로 들어서는 순간이었다
물고기의 표정
그녀의 입술에 키스해 주었다
신기해라
수족관 앞을 지나던 사람들이
수족관 앞으로 웅성거리며 모여들었다
다시
그녀가 많은 사람들의 시선에 이끌려
수족관 위로 천천히 고개를 숙여 입술을 뾰족 내밀었다
순간 물 위를 폴짝 뛰어오른 물고기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에 정확하게 키스해 주었다
사랑 없이 저게 되나?
제 눈을 의심하는 사람들의 틈에서
나는 물고기의 표정을 보았다
수천 방울 눈물로 집 지었을 사랑
아, 물고기도 감정이 있나 의심하며 돌아설 때
물고기가 뻐끔뻐끔 할 말 있는 듯
수족관 물 위로 살짝살짝 얼굴 내밀어
발을 동동 거리고 있었다
맛있는 풍경
꾀꼬리 운다
저 소리 달콤하다 못해 황홀하다
송홧가루 날리는 산사의 봄
뜨겁게 번져가는 농익은 戀歌라
아, 맛 깊다
미성으로 부르는 노래가 결국 애절한 절규라
뾰족한 이빨로도 채워지지 않는 달달한 오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