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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예수가좋다오 원문보기 글쓴이: (일맥)
박옥수씨목사의 이단성 연구
박 광 현 박사(Th.D)
기독교이단연구대책협회
1. 박옥수씨의 프로필
1. 1944년 경북 선산면 노량동 105번지에서 박재득씨와 최수만씨 사이에 4남 1녀중 셋째 아들로 태어남
2. 유, 소년기 선산장로교회를 다님.
3. 고향에서 중학교 3년을 중퇴함
4. 1951년 대한예수교장로회 경북노회에서 목사 안수.
5. 장로교목사가 외국인 선교사에게 침례를 받고 다른 교리를 전파한다하여 1962년 제명처분.
6. 미국인 독립선교사 딕 욕(Dick York)과 화란인 선교사 길기수(Case Glass), 데릭 얼(Derek Earl)등이 1961년 대구에서 운영하는 성경학교에 주식회사 세모의 유병언과 극동방송에서 물의를 일으키고 구원파로 등장했던 권신찬(청강생?)과 같이 공부함.
7. 권신찬, 유병언과 함께 “기독교복음침례회”(세칭 구원파) 조직.
-'당신은 구원 받았습니까?''거듭났습니까?' 따져 묻다가 확실히 대답 못하면 가르쳐 자기들이 구원시킨다고 한다. 그래서 별명이 “구원파”이다.
8. 권신찬 계열의 유병언 계열과 나눠진 후이요한(본명 이복칠)과 함께 “대한예수교 복음침례회”로 간판을 바꿈.
9. 구원파 계열 중 가장 많은 물의를 일으키며 많은 활동을 하고 있음
10. 신학적 배경이나 체계가 없고 어떻게 목사가 되었는지 알 수 없음(자신의 말로는 1960년대 초 "믿음의 방패 선교회"의 딕 욕(Dick York)선교사에게 받았다고 한다.)
11. 1962.10.7 ‘죄 사함과 거듭남의 비밀’을 주제로 전국 순회집회 시작.
12. 1980년대 ‘대한예수교 복음침례회’ 대구중앙침례교회 목회함. 후에 ‘대한예수교 침례회’로 변경
13. 1987년 32명이 죽은 오대양사건과 관련된 세모운영하다 그 사건 후 서로 갈라진 후 십자가가 없는 교회만 운영.
14. 관악구 봉천동의 ‘대한예수교 침례회’ 서울제일교회를 활동무대로 삼음.
15. 현재 ‘대한예수교 침례회’ 대전 한밭중앙교회를 중심 본거지로 활동
16. 기쁜 소식선교회 조직운영
17. 기쁜 소식사(출판사) 운영하며 ‘기쁜소식’(월간)지를 발행
18.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측(1992년 77회 총회)을 비롯 이단으로 규정
2. 구원파의 약사
1. 1961년 4월 미국인 독립선교사 딕 욕(Dick York)의 영향으로 “복음을 깨달은” 유병언씨와 1961년 11월 네델란드 선교사 길기수(Case Glass)씨의 영향으로 “죄 사함을 깨달은” 권신찬씨에 의해 대구에서 구원파가 시작되었다.
2. 권씨와 유씨는 장인 사위의 관계로 이들 선교사들을 통해 구원을 “깨달은” 두 지도자는 1963년경부터 선교사들과 관계를 끊고 독자노선을 추구하였으며 해를 거듭할수록 성경을 왜곡함으로 이들의 교리는 변질되어 갔다.
3. 한편 항간에 큰 물의를 일으키며 죄 사함과 거듭남의 비밀을 설교하고 있는 박옥수목사는 체계적 신학 배경이 없는 딕 욕(Dick York), 길기수(Case Glass), 데릭 얼(Derek Earl) 등 독립선교사들이 대구에서 운영했던 “성경학교”에서 유씨와 함께 공부하다가 1960년대 초반에 그와 결별하고 대구 중앙교회를 독립 목회하던 사람이다.
4. 1982년경부터 전국 주요 도시에서 대한 예수교 침례회의 간판을 걸고 활동하고 있으며 딕 욕(Dick York)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5. 장인, 사위 관계를 맺은 권씨와 유씨는 대구, 안양, 서울, 인천 등지로 활동무대를 넓혀 가다가 1966년 2월 권씨는 극동방송의 전신인 국제복음주의 방송(HLKX)에 방송목사로 부임하여 ‘은혜의 아침’ 프로를 통해 “회개와 믿음(trust)"이 빠진 “깨달음과 시인”에 의한 “구원의 복음”을 전파했다.
6. “청취자들 중에 수천 명의 사상전환자들이 생겨났다”( '우리의 걸어온 길' p 1). 청취자들을 중심으로 1969년부터 1982년까지 구원파는 '평신도 복음 선교회' 라는 간판아래 활동하였다.
7. 1970년대 초 석유파동으로 극동방송 운영이 어려워지자 구원파 측은 한국어 방송을 전담하는 조건으로 1972년 당시 방송을 운영하던 TEAM(국제 복음주의 동맹)선교회 측과 방송운영에 참여할 것을 계약했다.
8. 3대째 장로교인으로 8년간 목회를 하면서도 양심에 평안이 없이 갈등하다가 “복음을 깨달았다”는 권씨는 자신의 경험을 근거해 연일 “기존 교회의 새벽기도, 예배의식, 주일성수, 십일조 ,장로 집사제도는 율법적”이라 비난하면서 “율법과 죄책감과 종교에서 해방 받을 것”을 설교했다.
9. 1974년 2월 기장, 예장, 성결교, 하나님의 성회, 구세군, 복음교회 등은 공동으로 “권신찬 목사의 행위가 시정되지 않을 경우 극동방송 청취를 거부하는 운동을 벌이겠다는 질의서”를 극동방송국장에게 발송한다(기독공보, 1974. 3. 30).
10. 이에 당황한 TEAM 선교부 측은 여러 차례 숙의 끝에 극동방송 탈취 음모를 꾸미던 구원파측 직원 11명을 1974년 7월 30일자로 해고했다.
11. 구원파의 운동방향을 총지휘하던 한국 평신도 복음선교회의 교주 유씨는 모임의 구심점을 상실했다고 판단, 교인이 운영하던 부실 기계자수 회사 삼우 트레이딩을 인수, 교인들의 헌금으로 회사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12. 막대한 헌금을 사업에 투자하는 것을 반대했던 지도자 이창범 목사(인천)가 1978년에 500여 교인과 집단 이탈했고, 1983년에는 구원파 자체 내에서 안수를 받은 이복칠(이요한)목사가 역시 권신찬, 유병언계의 사업운영을 비판하다가 집단폭행을 당하고 전국 5천여 교인과 함께 이탈했다(이 사건으로 구원파 교인 5명이 대전에서 구속되었다).
13. 1980년 정부의 무인가 신학교 정비에 대한 정책이 공표됨과 아울러 구원파 측은 1981년 1월 '기독교 복음 침례회' 창립총회를 서울 용산구 삼각지 서울 교회당에서 가졌다며 일간신문을 통해 교단 창립공고를 발표하였다.
14. 이에 자극된 이복칠씨는 서울 방배동에 본부를 두고 '대한예수교침례회' 라는 교단 명칭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박옥수씨도 '대한 예수교 침례회 중앙교회' 라는 간판을 내걸고 대전시 변동을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교세를 넓혀 나가고 있다. 변동 주유소 옆에 위치한 '한밭중앙교회' 가 바로 이들의 본부 교회로 알려져 있다.
15. 현재 구원파의 교세는 국내에 130여개 지역교회, 미국, 캐나다, 독일의 주요 도시, 남미 아르헨티나와 브라질 등에 50여개 지역교회가 퍼져 있는데 미국 LA를 중심한 남가주 지역에서는 10년째 권 씨의 설교가 TV를 통해 매 주일 아침 방송되고 있다.
16. 한편 미국의 주요 도시와 캐나다의 토론토 등 8개 대도시에도 매주 30분씩 TV설교가 방송되어 꾸준히 교세를 확장해 나가고 있다.
17. 구원파에서는 침례교 세계대회가 서울 올림픽 경기장에서 열리기 직전인 90년 8월 5~12일에 서울 올림픽 공원에서 22회 하기 수양회를 가졌는데 2만여 명이 참석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18. “구원받은 교인들은 한 데 모여 생활해야 한다. ” “떨어져 있으면 휴거하지 못한다. ” “우리 생전에 이 세상은 끝나게 된다. ”“예루살렘 성전이 다 완성되고 있다.” “적 그리스도가 출현하면 인(문신)을 새겨야 필요한 생활용품을 구하게 되는 그날이 온다. 이 인을 받게 되면 휴거할 수 없다. 그러므로 교인들이 자급자족할 수 있게 땅을 산다. 공장을 짓는다. 삼우 회사를 도와야 한다.
19. 유씨는 고등학교 졸업의 학력을 가진 사람이지만 그림, 조각, 설계 등은 물론 다양한 호신술을 겸비한 다재다능한 인물이다. 권씨나 유씨는 본래 나쁜 뜻으로 구원파를 만들었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그들의 의도 가운데는 선량한 뜻이 포함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20. 이들의 사상은 서서히 사단의 압력을 받아 오도된 성경해석으로 부패 할대로 부패해 썩은 냄새를 발하고 있다.
이런 이단은 우리나라에서만 출몰하는 것이 아니다. 미국, 영국, 아프리카 등 다른 곳에서도 거짓 선지자는 계속 일어났다가 사라져 간다.
21. 로이드 죤스 목사는 이단의 생성과정을 다음과 같이 진단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과거의 이단들은 매우 선량하고 양심적인 사람들을 통하여 일어났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세계 역사는 이 모든 이단들이 얼마나 교활하며, 성경의 전체적인 메시지의 상관관계와 믿음 사이의 평형을 유지하지 못한 나머지, 마귀의 압력을 받아 한 가지 특정한 측면을 지나치게 강조하다가 계속 궁지에 몰리게 되면 결국에 가서 진리와 모순되는 얘기를 하는 입장에까지 도달하여 하나의 이단으로 전락하여 가는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2. 박옥수씨의 이단성
1. 예정을 부인한다.
대개의 이단들이 공통적으로 다 부인하며 개신교 중에도 알미니안주의자들 중에 예정을 부인한다.
2. 한번 깨달으면 다시 범죄도 없고 회계할 필요가 없다.
3.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다.
그러기에 행함을 주장한 야고보서는 잘못이라고 한다.
4. 시간을 내어 기도하는 일을 폐지한다.
따라서 새벽기도회나 철야기도회가 없다.
5.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구원 받았다고 한다.
6. 구원 받은 날짜를 알아야한다.
구원받은 날을 생일을 알듯이 알아야한다고 하나 사실을 생일을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 부모가 일러주어서 성장한 후에 알게 된 것 뿐이다.
7. 기성교회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루터를 인용하여 설명한다.
8. 교회헌법 무시한다.
성경 외에 교회헌법이 필요없는 것처럼 주장하면서도 자신들에게도 교리가 있다.
9. 세례를 인정하지 않는다.
다시 침례를 받아야 한다고 자신이 목사가 된 후 다시 침례를 받았다.
10. 성직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목사라고하며 그들끼리는 서로 형제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한다.
11. 회집장소를 집회소라고 한다.
과거에는 모이는 곳을 교회라 하지 않고 집회소라 하였으나 지금은 ‘예배당’이라 하는 구원파가 있는가 하면 교회 간판을 거는 곳도 있으나 이는 개인을 지칭한다.
12. 주일 성수를 안 한다.
기성교회처럼 그들도 따로 예배를 드리면서도 주일성수를 하지는 않는다.
13. 성탄절을 지키지 않는다.
그들도 그날 모이고 나름대로 준비한 행사를 한다.
14. 구약과 신약을 분리하여 율법과 복음으로 나눈다.
15. 연옥설을 지지한다
16. 삼위일체론이 신관이 다름.(성경과 교회사적 이단임)
17. 모임 시 여자들은 머리에 힌 수건을 씀.(카돌릭같이.않그런 파도 있슴)
질문자에 따라 박옥수경력만 알리면,
구원파는 1961년 미국 독립선교사 딕욬(Dick York)에 의해 시작되었다.
박옥수는 선교사들이 운영하던 대구 성경학교에서 권신찬목사의 사위 유병언과 공부했다.
1982년경 부터 전국 순회하면서 강연하고 있다.
이들이 교회간판을 걸기 시작한 동기는 1980년 정부에서 무인가 교단 신학교를 정비하였기 때문이다.
소위 구원파라는 이단들이 있다.
소위 오대양사건으로 이들의 정체가 세상에 드러나기 전까지 아무도 그들이 알려지지 않았었다. 요즈음은 소위 박옥수목사라는 사람이 대규모 체육관 집회를 함으로 알려지기 시작하였으며, 그 박옥수목사의 저서인 "거듭남의 비밀" 혹은 "죄사함의 비밀"이라는 책을 통하여 상당히 빠른 속도로 그 세력을 확장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이들에 대해서는 그 교리와 신학이 구체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고 있다. 현재 이들은 소위 구원파로 알려진 오대양파와 위에서 언급한 박옥수계열, 또 세모유람선과 스쿠알렌이라는 건강식품으로 알려진 세모(권신찬계열), 이요한계열등 몇가지로 분류되어지는데, 이들의 교리와 신학은 거의 흡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매우 이상한 것은 유사한 교리를 갖고 있으면서 서로가 서로를 구별화하고 비판한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몇 년전 메스컴을 시끄럽게 하였던 오대양사건으로 알려진 구원파와는 다르다는 차별화를 알리기 위함일 것이다.
이들은 정규적인 신학과정이 아니라, 소규모적인 성경공부모임을 통하여 주관적인 성령체험을 하면 목사안수를 하여 주었다고 전해진다. 그러한 논리라면 성령체험이란 목사안수를 주는 사람의 주관적인 판단에 의한 것이 되어진다. 다시 말하면 성경을 가르치는 사람의 주관적인 교리와 신학을 인정하며 순종하는 사람이 성령체험이라는 과정으로 표현되어질 수도 있다. 즉 목사가 되는 조건이 너무 주관적이며 임의적이다. 특히 박옥수와 권신찬, 이요한등의 주장이 거의 유사한 것은 모두 딕욕이라고 하는 미국의 독립적인 침례교회의 한 선교사로부터 함께 성경모임을 통하여 배웠기 때문인데, 이들의 신학은 은연중 워치만 니에게서 부분적으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되어지며, 아주 유사한 부분이 발견되어진다. 물론 부분적으로 그들의 교리는 조금씩 차이가 나는데, 분열되면서 그들 나름내로의 교리롸 견해가 추가된 것으로 보여진다. 특히 미국의 독립침례교회중에서는 워치만 니나 위트니스 리에게 영향을 받은 경우가 종종 있다.
또 박옥수목사의 학력에 대한 이야기가 문제가 되어지는데, 그가 중학교 중퇴라는 것이다. 물론 학력이 다른 것보다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는 할 수 없다. 다만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 학력이란 것은 해석의 뒷받침이 되어지는 중요한 조건이 되어질 수가 있다는 점을 우리는 중요시하는 것이다. 올바른 신학은 최소한의 학문적인 배경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최근에 박옥수계열의 구원파가 체육관 집회를 통하여 세력을 확장하고 있다. 더욱이 굿모닝증권의 회장이 박옥수계열의 교회에 다니며, 홀트 아동복지회의 회장도 이들 교회에 출석함이 알려져 충격을 주고 있다.
먼저 이들의 특징적인 교리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대략적으로 알아본다.
1. 회개는 단 한번만 하면 되며, 반복적으로 회개하라는 것은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이 되므로 구원받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소위 그가 말하는 이것이 죄 사함과 거듭남의 비밀이다.
그렇다면 자신의 일상적인 죄를 뉘우치는 회개를 하지 않는 것이 구원의 조건이 된다는 뜻이 되기 때문에 이러한 주장은 대단히 위험한 이단적인 주장이 되어지며, 어떤 죄를 저질러도 무방하다는 도덕폐기론이 되어질 수도 있다. 즉 박옥수계열의 구원파는 거듭남의 단회적인 회개(죄씻음)와 성화라는 과정을 통한 반복적인 회개에 대해 정확한 구별을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 진다.
2. 이러한 단회성 회개(처음 믿음)가 곧 구원이므로, 성도는 자신이 몇 월 몇 일에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과연 궁극적으로 구원의 주는 누구이며 누가 심판을 하는가?
또 예수를 믿음으로 이미 받은 구원의 현재적인 의미만을 유일하게 강조하는 것은 올바른 성경적 구원관이 아니다. 이것 역시 구원이라는 개념을 정확히 잘 모르기 때문이 빚어진 결과로 보여진다.
3. 일반교회의 성전(특히 성전건축)이라는 단어의 개념을 매우 비판하며, 이 비판이 때로는 상당한 효과를 가져 온다. 왜냐하면 초대형교회의 무분별하고 사치스러운 성전건축이 여론의 비판적 대상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원파의 교회는 과연 건물이 없이 천막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는지 묻고 싶다. 과연 성전의 정확한 개념이 무엇인가?
4. 십일조가 율법적이라고 비판한다. 이 비판도 매우 효과를 가져오게 되는데 구원파는 십일조를 비판하기 때문에 전혀 물질적인 헌금과 무관한 깨끗한 교회라는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은 과연 성도들에게 헌금을 일체 받지 않는가? 또 이들은 일반교회가 십일조를 구원의 조건인 것처럼 가르친다고 과장하는데, 과연 어느 일반교회가 십일조를 구원의 조건이라고 가르키는가?
5. 일반교회는 율법적인 구원관을 갖고 있으므로 그것을 벗어나는 것이 곧 구원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어떤 일반교회가 율법을 지켜야만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키는가? 대한민국의 정통교회는 모두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얻을 수 없으며,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친다. 이들은 새벽예배, 십일조, 주일성수등이 율법주의라고 주장하는데, 어느 교회도 그것이 정상적인 정통교회라면 새벽예배나 십일조나 주일성수가 구원의 조건이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또한 새벽에 예배를 드리지 않아야만 종교에서 벗어나는 것이고, 주일성수를 하지 않아야만 하며, 십일조를 내지 말아야만 율법주의를 벗어나는 것이라고 가르치는 곳이 박옥수의 구원파라면 오히려 그 저의가 상당히 의심스럽다.
이러한 문제점에 대해서 상세하게 살펴보자....
1. 회개와 믿음
회개란 용어가 단회적으로 사용되어질 때에, 그 "회개"란 용어는 믿음과 같은 의미가 된다. 우리가 예수를 영접하고 믿을 때에, 예수의 십자가 보혈이 나에게 죄사함을 주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는 말은 믿음을 말하며, 하나님을 향하여 방향수정을 하라는 것이 곧 회개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미 믿는 자에게 "회개하라"라는 용어가 사용되었을 때에는, 일상적인 방향수정이나 잘못을 뉘우치며 돌이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여 예수를 처음 믿을 때의 회개는 하나님을 믿고 거듭나는 것을 의미하며, 그 때의 회개는 "불신이라는 죄로부터의 돌이킴"이라는 방향전환을 말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이러한 회개와 믿음은 분명 단회적이다....
그런데 박옥수목사는 이 단회적인 "회개"와 성화적이고 일상적이며 반복적인 "회개"와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은 분명히 이러한 단회적 회개와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회개를 모두 언급하고 있으며, 일반 교회의 정통신학에서도 이점을 분명하게 가르키고 있는데, 중생(거듭남)의 의미인 단회적 회개는 오직 한번이라고 이미 가르키고 있다. 박옥수목사는 이것을 "거듭남의 비밀" 혹은 "죄사함의 비밀"이라고 주장하는데, 그것은 이미 비밀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즉 박옥수목사가 이러한 거듭남과 죄사함을 "비밀"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그가 신학을 체계적으로 공부한 적이 없는 자로서, 정통신학에 대해서 무지하기 때문으로 보여진다. 그 증거로 거듭남의 단계에서의 회개는 단회적이라는 정통신학적인 증거를 올린다.
새 생명을 심어주는 것으로 해석되는 중생은 결코 반복될 수 없다. 엄밀한 의미에 있어서의 회심도 또한 반복될 수 없다. 이것은 중생의 변화가 인간의 의식생활에서 처음 밖으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
이다. 동시에 반복되는 회심에 대하여도 말할 수 있다. (루이스 벌콥, 기독교 신학개론 256쪽)
따라서 최초의 믿음과 회개는 생애 중 단 한번 있는 일이고, 그 일이 일어날 때 참된 회심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믿음과 회개의 마음의 자세는 회심때 단지 시작될 뿐이다. 그 때의 그 자세는 그리스
도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동안 지속되어야 한다. (웨인그루뎀, 조직신학 중권, 345쪽)
루이스 벌콥과 웨인그루뎀은 장로교의 조직신학 학자로서 대표적인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장로교와 더불어 양대산맥이라고 하는 감리교 요한웨슬레의 견해를 들어보자....
이 회개(중생후의 회개)는 칭의에 선행하는 회개와는 아주 다른 것입니다. 여기서 회개는 죄책이라든가 정죄라든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의식이라든가 하는 것들과 연관되지 않습니다. 또 하나님의 사랑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습니다. 이는 성령의 역사로 일어나는 깨달음이니 곧 우리 마음 속에 아직 남아있는 죄를 깨닫는 것입니다.....곧 육에 속한 마음입니다. 중생한 사람들 속에서도 그것이 남아있으나 지배하지는 못합니다.(웨슬레 조직신학 199-200쪽)
이와같이 신학책을 인용하는 목적은, 신학이 성경말씀보다 진리라는 것을 말하고자 함이 결코 아니라, 박옥수목사의 "비밀"이라고 하는 주장이 얼마나 정통신학에 대해서 무지한가를 말하고 함이다. 즉 박옥수목사가 말하듯이 결코 비밀이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박옥수는 비밀이라고 주장하는가? 물론 뒤에서 이것에 대해서 성경적인 예를 통하여 구체적으로 증명하겠다. 즉 장로교나 감리교나 모두 구원파가 알려지기 훨씬 전부터, 예수를 믿을 때의 "회개"는 단회적이라고 이미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즉 박옥수목사의 가장 중요한 이단성은, 성화적인 개념의 반복적인 회개에 대한 정확한 뜻을 잘 모르면서, 회개하면 구원을 잃는다고 가르치는 것에 있다. 그는 정통신학이 믿음시의 회개와 중생 이후 성화의 회개에 대해서 구별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비밀"이라고 말하고 있었으며, 그보다 더욱 심각한 문제점은 중생(거듭남)이후에서도 "회개하지 말라"는 주장에서 더욱 발전되어 "회개하면 구원을 못받는다"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구원파의 주장이 왜 틀린지, 그 이유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이미 언급하였듯이, 예수를 믿는다는 말과 회개한다는 말은 같은 것이다. 불신이라는 죄로부터의 방향전환이 곧 하나님을 향한 방향전환이 되어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크리소스 톰은 믿음과 회개는 동전 양면과 같다고 하였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행2:37)
위의 구절에서 "회개하라"는 말은 곧 "믿으라"는 말과 같다. 삭개오의 회개는 믿음이 병행된 회개였으며, 당연히 믿음이 배제된 회개만을 뜻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즉 "회개케 하는 믿음"이며 "믿게하는 회개"일 것이다. 이러한 헬라어의 "회개하다"는 단어는 "메타노에오"가 주로 사용되어졌다.
결론적으로 구원파의 주장중에 "예수를 믿을 때에 한번만 회개하면 된다"는 주장은 크게 잘못된 주장이다. 그것은 마치 "예수를 한번만 믿으면 된다"는 주장과 같으며, 소위 믿음의 유지나 지속성이 필요없는 도덕폐기론이 되어질 수도 있으며, 예수를 믿으면 실제로 죄가 없어지므로 완전한 의인이 되어진다는 주장은, 더 이상 성령의 인도와 보호가 필요없다는 주장이 되어진다. 그러한 주장은 마치 예수를 처음에 한번만 믿고, 그 다음부터는 예수를 더이상 안믿어도 구원을 받는다는 뜻과 다를 바가 없다. 그렇다면 일반교회의 성도였다가 이단종교로 개종한 사람도 구원을 받는다는 것인가? 즉 믿음을 유지할 필요성과 일상적인 회개를 반복적으로 할 필요성을 착각하는 주장이 바로 구원파의 주장인 것이다.
계시록 2-3장을 보자.
일곱교회에 대해서 성령께서는 "회개하라"고 말하고 있으며, 그 단어는 모두 "메타노에오"이다. 그 교회들은 이미 예수를 믿는 교인들로 처음 믿음의 회개와는 구별되어진다. 그 멧세지는 모두 이미 믿는 자들에 대한 범죄에서 회개하고 돌아오라는 경고이다.
에베소교회
에베소교회는 처음 사랑을 버렸다.(2:4) 그래서 회개(메타노에아)하고 처음 행위(사랑)을 가지라고 권한다. 그런데 박옥수 구원파는 회개할 필요없다고 한다.그러므로 구원파의 주장은 거짓교사의 미혹하는 영이 되어지며, 주의해야만 하는 이단이 되는 것이다.
버가모교회
버가모에는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었다(2:14) 즉 타종교의 우상사상이다. 성령께서는 회개하라고 하신다(2:16) 그런데 구원파는 회개하면 안된다고 한다.
두아디라교회
두아디라교회는 음행과 우상숭배을 한다.(2:20-21) 물론 성령께서는 회개할 기회를 주신다....그러나 회개치 않으면 큰 환난 가운데 던지움을 받는다(2:22)
사태교회
살았다하나 죽은 교회이며 온전하지 못하다.(3:1-2) 더러운 옷을 입은 자가 몇명이 있다(3:4)
성령께서 회개하지 않으면 도적같이 임하신다고 책망하신다(3:3)
과연 성령님 말씀대로 회개하여야만 하는가? 아니면 구원파 주장같이 회개하지 말아야만 하는가?
라오디게아교회
참지도 덥지도 않은 미지근한 신앙을 갖었고, 부자이기에 구제사업을 전혀 하지 않는다(3:15-17)
그래서 성령께서는 그냥 회개가 아니라 "열심을 내어" 회개하라고 권한다(3:19)
회개하는 자는 보좌에 앉게해 주신다고 하신다(3:21
그런데 박옥수는 죄사함의 비밀이 회개하지 않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성경은 왜 교회들에게 회개하라고 말하고 있는가?
여러분은 주님의 보좌에 앉기를 원하는가? 아니면 박옥수 옆자리에 앉기를 원하는가?
구약에서도 그러한 경우는 있다. 욥은 의인이었으나, 욥이 하나님을 뵈었을 때에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욥42:5-6)
구원파의 주장대로라면 의인이었던 욥은 자기 죄를 회개하였으니, 구원을 잃어야만 한다. 그런데 욥은 구원을 잃지 않았다.... 구원파에서는 욥이 구원을 잃었다고 가르키는가?
주기도문을 보자....예수님이 가르켜 주신 일상적인 기도문이다. 우리가 매일 일용하는 양식에 대한 감사기도까지 포함되어 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즉 우리가 우리 형제자매들에게 죄를 사하여준 것과 같이, 예수님도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신다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우리 형제들이 회개하면, 하루에 일곱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예수님 역시 우리가 회개하면 우리 죄를 하루에 일곱번이라도 반복하여 용서하여 주신다는 것이다.
만일 하루 일곱번이라도 네게 죄를 얻고 일곱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눅17:4)
윗 구절에서 회개는 "메타노에오"라는 당어가 사용되었다. 만일 그 "메타노에오"가 처음 믿음을 말한다면, 일곱 번을 믿으라는 이야기가 되어진다. 즉 그 회개는 믿음의 단회적인 회개가 아니라, 일상적이고 반복적인 회개가 분명하다. 우리가 우리에게 일상적인 죄를 지은 자에게 일곱 번을 용서하듯이, 주기도문의 용서도 그렇게 하여주신다는 것이다..... 박옥수계열의 구원파는 주기도문을 회중기도문으로 외지 않는다. 그들은 주기도문은 암송하라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지만, 그 때문이 아니라 주기도문이 그들의 교리와 다르다는 것이 그들이 주기도문을 암송하지 않는 그 이유일 것이다.
히브리서의 기자는 "죽은 행실로부터의 회개와 하나님을 향한 믿음"(히6:1)을 첫 번째 기본적 요소로 언급하였다. 즉 회개(명사형: 메타노이아)라는 말이 반드시 믿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죽은 행실로부터의 회개(메타노이아)에도 사용되어진다는 것을 말한다.
고린도후서에서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에게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고후7:10)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미 믿는 고린도교인들에게도 "회개"(메타노이아)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지 근심을 하는 고린도교인들에게 그 근심이 곧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라는 뜻이다. 즉 일상적인 삶 속(성화)의 반복적인 회개를 의미한다.
바울은 또 디모데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보내는데,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으로 다투기를 즐겨하며, 주님의 뜻을 거역하는 몇몇 교인들에게 "회개하라"고 경고하고 있다. 그 회개함이라는 용어도 명사형 "메타노이아"이다.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저희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저희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바 되어 그 뜻을 좇게 하실까 함이라(딤후2:25-26)
위 성경본문은 회개하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박옥수목사 역시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회개하지 말라"고 마귀와 동일한 주장을 하고 있다.
바울은 자기가 "죄인 중에 괴수"라고 하지 않았는가? 박옥수는 이 동사의 시제가 과거라고 주장하는데, 이 동사는 과거가 아니라 현재동사이다.(헬라어: 에이미 = am)
과거이든 현재이든지, 상식적으로 생각하여보면, 바울이 과거에만 죄인이었다고 말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로마서 7장17-25절에서 바울은 자신에게 아직도 죄가 남아있음을 고백하는데, 그렇다면 바울은 구원을 잃었단 말인가? 구원파의 주장을 인정하자면 성경의 인물들이 모두 구원을 잃는다.... 사도요한과 그의 서신을 받았던 소아시아교회의 성도들도 모두 구원을 잃는다....욥도 구원을 잃으며, 바울도 구원을 잃게 된다.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 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1:8-10)
요한은 영지주의자라고 불리는 거짓교사들과 이단들을 조심하고 경계하라는 목적으로 소아시아교회의 교인들에게 이 서신을 쓰게 된다. 우리가 죄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며, 진리가 없는 사람들이라는 이야기이다. 구원파는 이러한 것을 회개가 아니라 "자백"이라고 궤변을 늘어 놓는다. 또한 우리가 죄를 자백하면 미쁘고 의롭기 때문에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신다고 하였는데.....죄가 있으니 죄를 자백하는 것이 아닌가? 박옥수목사의 주장에 의하면, 이미 예수를 영접한 자들에게는 더 이상 죄가 없다고 하지 않았는가? 죄가 없는데도 자백을 하여야 한다는 주장은 스스로 모순을 드러내는 것이 된다. 죄가 없는데도 죄를 자백하여야 하며, 하나님께서는 없는 죄를 자백하면 미쁘고 의로우사 없는 죄를 사하여 주시는가? 박옥수목사와 구원파 교인들은 없는 죄를 자백하고 죄사함을 받는가?
또 우리가 죄없다하면 하나님을 거짓말로 만드는 것이라고 하였는데, 구원파의 주장을 따르자면 예수를 믿는 자에게 이미 죄가 없다고 하였고, 그야말로 하나님을 거짓말로 만드는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또 자백은 해도 좋고 회개는 하면 안된다는 주장은 말장난이 아닌가? 일반교회가 새벽에 눈물 콧물 흘리며 울고 불고 하는 회개에 대해서 박옥수 구원파는 조롱하며 비난하는데, 회개란 단어의 뜻을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일반교회는 새벽에 눈물과 콧물을 흘려야만 회개를 하는 것이라고 결코 가르키지 않는다.
울어도 좋고 울지 않아도 좋으며, 새벽에 회개하여도 좋고 저녁에 회개하여도 좋다. 울부짖어도 회개이고 조용히 반성하여도 회개이다. 박옥수목사는 자신의 궤변을 합리화시키기 위하여 일반교회의 회개의 개념을 왜곡, 과장하여 비난하고 있다. 어느 일반교회가 회개의 정의에 대해서 "새벽에 울고 불고 하는 것"이라고 가르치는가?
이미 정통신학책을 인용하였다시피, 일반교회는 거듭남(중생)의 단회적인 회개와 성화과정의 반복적인 회개의 두가지 개념에 대해서 분명히 가르키고 있다. 즉 거듭남은 단회적이라는 것도 분명히 가르친다.
또 예수의 십자가 희생은 단 한번의 제사라는 것은 주일학교 학생들도 아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구원파의 주장과 같이 과연 자신의 죄를 회개하면 죄인이 되므로 구원을 받지 못할까? 이에 대해서 성경적인 증거를 더 살펴보자....
"다윗이 인구 수를 조사한 후에 그 마음에 자책하고 여호와께 아뢰되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이제 간구하옵나니 종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내가 심히 미련하게 행하였나이다 하니라"(삼하24:10, 대상21:8)
그렇다면 인구조사를 하고 자신의 죄를 회개한 다윗은 구원을 받지 못하였다는 말인가? 이 성경본문에 대해서 이상하고 구구절절한 변명을 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이 원하지 않았던 인구조사에 대해서 회개한 다윗은 구원을 잃었는가? 또 우리아의 아내를 빼앗은 범죄를 저지른 후에, 다윗은 선지자 나단에게 자신이 죄를 범하였다고 회개하는데, 다윗은 하나님께 죄를 범한 것을 인정하였으므로 구원을 잃었는가?
"다윗이 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하매"(삼하12:13)
이 사건에 대해서 다윗은 시편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다윗의 시, 영장으로 한 노래,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한 후 선지자 나단이 저에게 온 때에)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 대저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시51:1-4)
다윗은 자신에게 죄가 있다고 하였으니 구원을 잃었는가? 다윗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였으니 구원을 받지 못하였는가? 박옥수목사의 주장대로라면 다윗은 구원을 잃어야만 한다. 박옥수목사의 주장대로라면, 구원을 받은 다윗은 죄가 없어야만 하며, 온전한 의인이므로 회개하지 말아야만 한다. 그런데 왜 다윗은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라고 고백하였으며, 자신의 죄를 말갛게 씻겾달라고 하였으며, 깨끗이 제하여달라고 하였는가? 다윗은 인구조사 후와 우리아를 범하고 난 후, 두 번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였으므로 박옥수목사의 주장대로라면 분명히 구원을 잃게 된다.
또 주님은 베드로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는데, 베드로가 닭 울기 전에 주님을 세 번 부인할 것에 대해서 말씀하셨고, 그것을 "돌이킨 후에"(when you have turned back) 네 형제를 굳게 하라고 하셨다. 예수를 이미 영접한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그날 저녁에 통곡을 하며 돌이키게 된다.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22:32)
"돌이키다"는 단어는 "에피스티렙호"로서 물리적이고 신체적인 행위적 돌이킴이라는 뜻도 있지만,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방향수정도 의미하며, 그럴 경우에는 "회개하다"는 의미를 갖는데, 예를 들면 아래의 본문에서 "에피스트렙호"는 예수를 믿는 처음 믿음을 의미하기도 하고, 베드로와 같이 죄를 돌이키는 돌이키는 방향수정적인 회개를 의미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저희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에피스티렙호) 하겠음이니라"(눅1:16)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메타노에아) 돌이켜(에프스티렙호) 너희 죄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행3:19)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 부인하기 전까지 믿음이 없었으므로 구원을 못받았는가? 결코 그렇게 말할 수 없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믿음이 생겨나기 위하여 기도한 것이 아니라, 베드로의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다고 말씀하였기 때문이다. 주님은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 부인하고 난 후에, 다시 예수님을 믿으라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시몬의 경우를 보자. 성령의 능력을 돈을 주고 팔라고 하다가 사도들에게 큰 핀잔을 받는 장면이 사도행전에서 언급된다.
"시몬도 믿고 세례를 받은 후에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 다니며 그 나타나는 표적과 큰 능력을 보고 놀라니라"(행8:13)
이 구절에서 혹 사람들은 시몬이 과연 예수를 진정으로 믿었는가 하고 반문할 수 있을 것이다.
.시몬은 세례를 받은 뒤 필립보를 따라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시몬이 믿고 세례를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 다녔다"고 기록하고 있다. 공동번역은 "마침내는 시몬까지도 믿게 되었다"라고 번역하였고, 영어성경은 Then Simon himself believed also 라고 번역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베드로가 시몬에게 거짓말을 하였다고 볼 수 있는가? 이다. 베드로는 시몬에게 "악함을 회개하고 주께 기도하라"고 하였으며 "혹 마음에 품은 것을 사하여 주시리라"고 하였다는 점을 우리는 잘 알아야만 한다.
박옥수목사의 경우에는,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지만, 베드로는 "악함을 회개하면 사하여 주시리라"고 말하고 있다. 베드로사도와 박옥수목사 중에서 누구의 견해가 옳은가? 시몬은 분명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은 사람이었으며, 전심으로 사도빌립을 따라 다니다가 그가 주께 범죄하였지만, 베드로는 그에게 "회개하라"고 말하였다는 것이다. 만일 박옥수 구원파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베드로는 그에게 회개하라고 말할 필요조차 없는 것이다. 베드로는 분명히 악함을 회개하라고 말했으며, 주께서 사함을 주신다고 말했다.
이 성경본문은 "회개"(메타노에아)라는 용어가 예수를 처음 믿는 단회적인 신앙만을 반드시 의미하지 않는다는 분명한 증거가 되어진다. 그 단어의 헬라어는 "메타노에오"이기 때문이다. 베드로는 범죄한 시몬에게 분명히 그 죄를 회개하라(메타노에아)고 하였으며, 그 말은 예수를 처음 믿으라는 의미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너의 이 악함을 회개하고(메타노에아) 주께 기도하라 혹 마음에 품은 것을 사하여 주시리라"(행8:22)
우리는 그 다음이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만일 시몬이 진정으로 회개하고 기도하였다면 주님은 시몬의 죄를 사하여 주었을 것이며, 만약 진정으로 회개치 않았다면 죄사함을 받지 못하였을 것은 당연하다. 베드로사도가 시몬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고 보기 때문이다.
다음 성경구절은 "돌이켜 회개하라"고 하였는데, 왜 "모든 죄"에서 떠나라고 말하였는가?
즉 다음의 "돌이키는 회개"는 믿음을 포함하겠지만, 모든 패악과 타락과 범죄라는 "모든 죄"로부터의 회개도 의미하는 것이다.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들아 내가 너희 각 사람의 행한대로 국문 할지라. 너희는 돌이켜 회개하고 모든 죄에서 떠날지어다. 그리한 즉 죄악이 너희를 패망케 아니하리라." (겔18:30)
박옥수목사는 죄를 회개하면 죄인이 되어서 구원을 잃는다고 하였는데, 다음 성경본문은 하나님께 죄를 자복하고 죄악을 숨기지 않고 죄를 아뢰면 주께서 죄의 악을 사하여 주신다고 기록하고 있지 않은가?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시32:5)
박옥수계열의 구원파의 주장을 정리하자면 아래와 같다.
"회개하면 죄인이 되므로 구원을 못받는다" "한번 예수 믿고 죄사함을 받으면 죄가 실제로 전혀 없어지므로 온전한 의인이 되어진다"
그런데 지금까지 살펴 본 바와 같이, 성경은 정반대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지 않은가? 박옥수목사가 주장하는 거듭남의 비밀이란, 겨우 성경에 기록된 것과 반대되는 것을 의미하는가? 왜 박옥수목사는 "비밀"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가?
내가 내 마음을 정하게 하였다 내 죄를 깨끗케 하였다할 자가 누구뇨?(잠20:9)
하나님 한분 외에 선한 이가 없느니라(눅18:19)
죄가 있다고 하였던 아래 성경구절을 기록한 기자들은 모두 구원을 잃어버렸는가?
선을 행하고 죄를 범치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아주 없느니라.(전7:20)
범죄치 아니하는 사람이 없사오니....(왕상8:36)
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시14:3)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고 (롬3:8-9)
주의 목전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시143:2)
2. 의인과 죄인
예수를 믿으면 죄인이라는 신분이 의인이라는 신분으로 바뀐다는 것은 당연하다.
그것을 "의롭다함을 얻음" 혹은 "의롭다함을 받음"이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는데, 우리는 이것을 신분상의 변화라고 한다. 즉 실제로 죄인이 의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죄인임에도 불구하고(하나님께서 우리를) 의인이라고 불러 주시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 입장에서 보면 "의인이라고 불러 주심"이 되겠고, 우리들 입장에서 보면 "의롭다하심을 얻음"이 되어질 것이다.
먼저 우리는 죄사함, 속죄라는 용어를 잘 파악하기 위하여 구약의 제사에 대해 살펴보자.... 어린양을 희생양으로 삼아 그 양에게 죄를 전가시킨다. 과연 구약의 유대인들이 짐승으로 대신 제사를 지냈다고하여, 그 죄가 실제로 없어질까? 그들은 결코 온전한 의인이 되지 못하였다. 다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죄에 대한 책임(죄책)을 용서하여 주셨다. 즉 죄를 가리워 주시는 것이며 심판을 면제해 주시는 것이다. 죄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정죄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속죄"를 가르키는 대표적인 구약의 히브리 단어는 "카파르"인데 그 단어는 "덮다, 가리우다"를 의미한다. 구약에서의 궁극적인 죄의 속죄는 희생제사였으며, 신약에 있어서도 궁극적인 죄의 속죄는 그리스도의 희생에 그 초점이 맞추어진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그의 피로 인한 화목제물"(롬3:25)이라고 말하였는데 "화목제물"이란 단어는 헬라어 "힐라스테리온"으로 이 단어는 하나님의 진노를 풀어드리는 "희생제물"을 가르킨다. 세례요한은 예수를 보고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1:36, 참고:고전5:7 유월절양)라고 말하였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우리 죄를 위하여"(고전15:3) 죽으셨으며, 인간의 죄값을 치루기 위하여 돌아가셨다(사23:5) 바울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다"(고후5:14)라는 것을 21절에서 "우리를 대신하여"라고 설명하고 있다.(참고:갈3:13, 우리를 위하여 저주 받은 바 되사) 무엇보다도 예수님 자신이 자신의 온 목적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마20:28)이라고 직접 말씀하셨으며, 최후의 만찬에서 자신의 몸과 피를 영원한 제물로 말씀하셨던 것이다. (이것이 내 몸이니라) 바로 이것이 대속(代贖)의 의미가 되어진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 이심이라."(마1:21)
우리 죄인들이 온전한 의인으로 정말로 바뀐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위하여 돌아가신 것임을 잊지말자.
그의 피흘림으로 인하여 우리 죄가 덮어진 것이며, 사함을 받은 것이며, 우리가 의롭다함을 얻은 것이다.
성경을 잘 정독하여 보자.....죄가 정말로 없어져서 실제로 온전한 의인이 된 것인지, 아니면 죄가 가리워지고, 의롭다하심을 얻고, 사하심을 받은 것인지 말이다.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은 사람의 행복에 대하여 다윗의 말한 바,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롬4:6-8)
우리들이 정말로 의인이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로 인하여 "대신" 화목제로 희생하였기에, 우리 죄가 "가리우심을 받고", 또 "죄를 인정치 아니함"을 받은 것이다.
다음 성경구절을 보자.... 우리는 의롭다하심을 얻은 것이다.
"우리로 저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3:7)
"내가 자책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고전4: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롬3:24)
아주 분명하게 설명하는 구절이 있다. 사람은 다 거짓되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의롭다하심을 주시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 그럴 수 없느니라 사람은 다 거짓되되 오직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기록된 바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함과 같으니라(롬3:4)
이 "디카이오마"(의롭다하심을 얻음: 칭의)는 법적인 용어이다. 즉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리는 법적신분의 무죄선언을 말한다. 우리가 죄를 졌음에도 불구하고 법정에서 무죄선언을 받았다면, 우리는 신분상으로는 죄인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심판을 면책시켜 주시는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 그것이 바로 구원인 것이다. 그래서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가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가 되어진다. 의인이 되었으므로 살게 된 것이 아니라, 의인은 믿음으로 인하여 살게 되었음을 잊지말자.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노라. (롬8:1)
예수를 믿고 거듭나면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죄가 다 사함을 받는다. 당연하다. 그 의미는 죄에 대한 심판을 면책하여 준다는 의미이다. 죄가 실제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죄함"이 없는 것이다.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과 같이 실제로 온전한 의인이 되어 장래 죄도 짓지 않게 된다는 것이 아니라..... 장래에 죄를 짓는다고 하여도 죄에 대한 심판이 면제된다는 것을 말한다. 그 조건은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어야만 한다.
성경은 우리가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서도, 죄의 소욕을 따르지 말라고 도처에서 경고하며 권면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 실제로 온전한 의인이 된다면, 성령의 인도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성경은 우리가 육체로 있는 한, 우리는 항상 내면속에 죄의 법과 성령의 법, 두가지를 함께 갖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그러한 투쟁의 과정이 곧 성화라는 과정이며, 그래서 성령의 인도와 도우심이 필요한 것이다. 바울같은 사도도 로마서를 기록할 당시에 자신에게 육신의 법, 즉 죄의 법이 있음을 고백하고 있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7:25)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롬7:21-23)
아래 성경본문에서 바울은 자신의 속에 죄가 있으며, 원치 않는 악을 행하고 있다고 구체적으로 고백하고 있다. 바울도 죄가 있다고 하였으니 구원을 잃는가?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롬7:17-20)
인간은 누구든지 하나님 보시기에 완전한 의인은 없다... 기독교인이든지 헬라인이든지 유대인이든지 말이다. 만일 하나님이 의인만을 구별하여 구원하신다면 아무도 구원을 얻지 못한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얻으면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 어디 서리요"(벧전4:18)
예수를 믿었다하더라도 그가 실제적으로 온전한 의인이 되는 것이 아니다. 믿음으로 인하여 살게 되는 것이며, 정죄함이 없는 것이다. 그가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그를 의인이라고 불려 주시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구원이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임을 감사하는 것이다. 우리가 의인이 되었기에 구원을 받는다면, 거듭남(중생) 후에 성령의 인도와 보호는 더 이상 필요조차 없어진다.
그 죄와 허물을 덮고 가리기 위하여 다른 대안을 필요로 하였던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게 되는 것이다..... 바로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는(히9:22) 속죄의 원칙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다.
3. 나는 몇월몇일에 구원 받았다는 구원파의 주장
구원이란 하나님의 주권적 사역이시다. 또 심판이란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구원의 확신을 갖는다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가 몇월몇일에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의미인가? 구원파의 주장에 의하면 단 한번만 회개하면 두 번 다시 회개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며, 즉 그들의 구원받은 날짜는 그들이 처음 믿고 회개한 날이 되어진다는 것이 뻔하게 눈에 보인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박옥수 구원파의 교리를 알게된 날을 의미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라.(고후13:5)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구원의 확신을 가지지 못한다면 그것은 매우 곤란한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믿음에 대한 확증이 없이 무조건 나는 이미 구원을 얻었다고 하는 것은 매우 곤란하다. 그리고 이러한 주장은 곧 일반교회는 구원이 없으며(반복하여 회개하라고 하니) 자신들 거듭남의 비밀을 아는 구원파만이 구원을 이미 받은 것이라는 주장과 일맥상통하게 연결되는 것이다. 즉 박옥수목사가 주장하는 거듭남은 더 이상 회개치 않는다는 것이며, 그 비밀을 아는 자만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되어진다. 박옥수목사의 주장대로라면, 일반교회는 회개를 하여야 한다고 하니 구원이 없다는 것이다. 즉 구원의 조건이 "회개를 안하는 것"과 "죄가 없다고 하는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회개를 하면 구원을 잃고 회개를 안하면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한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비밀"이란 말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기독교인을 다음과 같이 넷으로 구분할 수가 있을 것이다.
1. 나는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확신하며, 실제로 구원받을 사람.
2. 나는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확신하지만, 실제로는 구원을 받지 못하는 사람.
3. 나는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구원을 받을 사람.
4. 나는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도 구원을 받지 못하는 사람.
구원의 확신이란 1번과 3번의 경우에 절실히 필요한 것이다. 구원의 확신이란 개인적, 주관적인 것이 아니며, 믿음의 확증이 되어야만 한다. 그냥 내가 구원을 받는다고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내가 예수를 믿으므로 나는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되어야 한다. 과연 누가 구원의 하나님인가?
우리는 예수를 믿음으로 이미 구원을 얻은 것이요(과거시제), 예수를 믿고 있으므로 현재 구원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며(현재시제), 우리가 끝까지 예수를 믿는다면 종말적으로 부활과 영생의 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미래시제). 다시 말하여 "구원"이란 하나의 과정이며 길을 의미한다.그런데 일상적인 회개를 하라고 하면 죄인임을 스스로 고백하는 것이기에 구원을 잃는다는 궤변은 "죄사함의 비밀"이 아니라 "무지의 비밀"이 되어진다.
즉 구원이란 "믿음의 현재적인 과정의 연속"이어야만 한다.
대부분의 구원의 과거적 시제를 나타내는 성경구절은 수동형으로 표현되어 있으며, 현재진행적으로 나타내는 성경구절은 능동적인 형태로 표현되어 있음을 알 수가 있다. 너무도 당연히 "믿음으로 인하여" 구원을 얻는 것이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고....(엡3:17)
즉 현재 자신의 믿음을 전혀 확증하지 않고 무시하면서, 과거의 어떤 행위만으로, 혹은 내가 어떤 교회를 다니고 있으며, 어떤 비밀이나 어떤 주장을 알아야만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전혀 비성경적이다. 회개하지 않아야만 되는 비밀을 알아야 구원을 얻는다는 주장은 정말 코메디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믿음으로 인하여 죄의 형벌에서 해방된 것이며 죄의 면책에서 자유로움을 받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 하셨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요13:10)
이미 목욕한 자도 발은 씻는다.... 온 몸이 깨끗한 자도 발은 자주 씻어야만 한다. 이것이 주는 교훈은 과연 무엇인가? 우리는 예수를 믿음으로 죄씻음을 받았고 거듭나게 되었다. 당연히 두 번 죄씻음을 받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일상적인 성화적인 회개는 반복되어져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미 목욕한 자는 다시 목욕할 필요는 없지만, 그러나 발은 씻어야 한다고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셨다. 물론 예수를 믿는 자는 믿음이 지속되는 한, 결코 구원을 잃지 않는다.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골1:29)
이 구원의 확증을 알기 위하여 우리는 구원의 세가지 시제의 개념을 알아야만 한다.(구원의 세가지 종류가 있다는 뜻은 결코 아니며, 세가지의 시제적인 개념이 있다는 뜻이다)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우리는 이미 구원을 얻은 것이요(과거시제), 현재 구원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며(현재시제), 종말적으로 영생의 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미래시제). 다시 말하여 "구원"이란 하나의 과정이며 길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빌3:12)
우리가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믿음을 가질 때에 우리는 이미 구원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는"(롬10:10) 신앙의 확증이 필요한 것이다.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한다고 하여 천국에 다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마17:21)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하는 자기 자신의 믿음의 확증이 필요하다.
다음은 과거적인 시제의 구원을 말하는 성경구절이다.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엡2:5)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 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4)
이 구절에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라는 동사의 시제는 현재완료수동형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간과하면 안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이미 영생을 얻었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것이다.
바로 윗구절은 구원의 과거형 시제를 가르킨다.(이러한 성경본문은 매우 많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은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요일3:2)
십자가의 도는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
윗구절은 구원의 현재적 시제를 가르킨다. 이미 예수를 믿는 자는 지금 하나님의 자녀라는 법적신분을 갖게 된다. "구원을 얻는 우리"의 동사시제는 현재수동형 분사로 사용되었고 직역하면 "구원을 받고 있는 우리"라는 뜻이 되어진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롬5:9)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며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 (롬8:23)
이 구절은 미래적이고 궁극적인 구원을 말하고 있다. 바울같은 사람 마저도 장래의 몸의 구속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와같이 구원이란 과거, 현재, 미래의 시제를 초월하는 일련의 과정이며 길이다. 베드로는 그 궁극적이고 종말적인 구원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벧전1:9)
다시 말하자면 구원의 확신이란 나 자신의 믿음으로 말미암는 그 순간 순간의 현재진행형의 구원에 대한 연속적인 확증이어야만 한다.
즉 구원에 대한 확신이란 "믿음의 현재적인 과정"에 대한 확신이어야만 한다.
그것이 과거의 시제만을 생각하는 형태의 구원, 즉 현재시제의 구원을 전혀 무시하는 믿음의 확증이나 미래의 종말적인 구원만을 의미해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구원이란 하나님의 주권사역이며 인간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구원을 받는 것이다. 즉 현재 자신의 믿음을 전혀 확증하지 않고 무시하면서, 과거의 믿음만으로, 혹은 내가 어느 교회를 다니고 있다는 과거적인 사실만으로 내가 이미 구원을 얻었다고 단언하는 것은 구원의 확증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구원의 확신이란, 내가 지난 시간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로 믿었기 때문에 나는 구원을 이미 얻었고, 이 믿음으로 인하여 현재 구원의 길을 걷고 있으며, 이 믿음을 계속 유지할 것으므로 장래에 구원을 얻게 될 것이다라는 확증이 되어져야만 한다. 물론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러나 그 믿음의 주체는 언제나 인간의 몫이며 인간 스스로의 책임의 한계라는 것을 잊지말자.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지만, 예수를 안믿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
즉 나는 일단 예수를 믿게 되었으므로, 어찌되든 간에 나는 이미 구원을 얻었으며, 지금 나는 예수를 믿음으로 인하여 구원의 길을 걷고 있고, 장래에도 내가 예수를 믿는 믿음을 지속하게 되면 나는 궁극적으로 구원을 받음이 분명하다. 즉 믿음의 확증이 곧 구원의 확신이 된다. 혹 심한 사람들은, 나는 살인과 간음등 어떠한 범죄를 하여도 이미 구원을 얻은 것이라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고, 무엇을 하여도 무방하다는 주장을 하는데 그것을 도덕무용론, 혹은 도덕폐기론이라고 부른다. 그러한 논리라면 내가 만약 장래에 예수를 안믿게 되어도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이야기인가? 일단 예수를 믿고난 후에 사이비 이단이 되더라도 구원을 받는다는 뜻인가?
구원의 확신이란 맹목적이며 주관적인 확신이 아니라, 자기자신의 믿음의 확신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심판을 자기자신이 스스로 결정하여서는 곤란하다.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라"(고후13:5)
내가 진정으로 예수를 믿는다면 나는 이미 구원을 받았으며, 현재 구원의 길을 걷고 있으며, 분명히 나는 종말적으로 구원을 받는다. 즉 그러한 믿음이 전제가 된 구원의 확신을 가져야만 한다. 구원의 확신이란, 맹목적이고 주관적인 확신이 아니다. 즉 나의 구원은 나의 믿음에 의한 것이며, 내가 예수를 믿음으로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이 곧 구원의 확신이며 구원의 확신이 필요한 이유는 믿음의 지속성을 가질 필요성이 있기때문이다. 나는 몇월몇일에 구원 받았다....!! 그것이 기껏 박옥수목사가 주장하는 비밀을 알았다는 것이 되어서야 되겠는가? 구원의 시제성이 뜻하는 의미와 개념조차 모르고 무조건 구원의 과거적인 시제만을 구원의 전부라고 알고 있다면 너무나 우스운 일이 아닌가?
4. 성전
신약에 와서 믿는 성도의 몸이 성전이라고 불리는 것은 당연하다. 이러한 것은 성경적인 언급이며, 이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런데 오직 성도의 몸만이 성전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러한 주장은 아주 부분적이며 단편적인 문제가 되어진다. 그러한 주장은 자칫 오직 하나님은 다른 곳에는 거하지 않으시고 성도들의 몸 안에만 국한되어 거하신다는 주장이 되어지는데, 이러한 주장은 천국의 의미를 종말적인 의미로 전혀 배제하며 달리 주장하는 워치만 니와 위트니스 리로 계승되는 지방교회와 구원파들이 이에 속한다. 특히 지방교회는 사후(死後)에 가는 천국을 부정하며 교회를 천국이라고 본다.
아래 성경구절은 그들이 제시하는 성경적인 증거이다.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아 야곱의 집을 위하여 하나님의 처소(a dwelling place)를 준비케 하여 달라 하더니, 솔로몬이 그를 위하여 집(house)을 지었느니라.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does not live) 선지자의 말한 바 주께서 가라사대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뇨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행7:46-50)
하나님은 성전에도 계시지 않으며 손으로 지은 곳에는 계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문장에 대해서 하나님은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는 않는다고 해석하면 매우 곤란해 진다. 참으로 극단적인 견해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성경을 해석하면, 마치 하나님은 집, 교회, 건물, 사무실, 상가, 빌딩같은 손으로 만든 곳에 계시지 않는다고 해석되어지기 때문에, 오로지 자연상태에만 계시다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인공적이 아닌 곳, 산과 물과 들 같은 자연상태에만 계시는가? 특히 구원파들이 강조하려는 의도는 교회 건물이 성전이 아니며, 교회건물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면 구원파의 교회 건물에도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는 이야기가 된다.
과연 그럴까?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않는다"는 구절에서 "계시다"는 것은 헬라어로 "카토이케오"로서 "영원히 안주하다, 거주하다"(dwell. live)의 뜻이다. 즉 인간의 손으로 지은 곳은 하나님의 영원한 안주장소가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본문은 다윗이 하나님의 처소를 준비하게 해달라고 하였고, 솔로몬이 하나님을 위하여 집을 지었는데, 사람의 손으로 지은 곳에는 하나님이 영원히 안주하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사람의 손으로 만든 곳에 하나님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사람이 만든 하나님의 집이 하나님의 영원히 거하시는 집이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구약을 보면 하나님은 성전에 분명히 거하고 계신다..... 단 그 성전에 하나님은 계시지 않는다는 것이 결코 아니라, 그곳이 하나님의 영원한 안식하시는 처소가 되어질 수는 없다는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성전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천국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의 본문이 말하고 있는 의미를 더 읽어 보면, 사람들이 손으로 지은 곳도 모두 하나님이 지으신 것과 마찬가지라는 이야기이며, 하나님은 성전에만 살고 계시는 분이 아니라, 온 세상에 충만하신 분이라는 이야기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어떠한 성경도 오직 성도들의 몸만이 성전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위의 성경 본문 구절은 스데반이 유대인들에게 기독교를 변증하는 이야기이다..... 즉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에만 국한되어 하나님이 살고 계시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을 말하고자 함이며, 인간의 손으로 지은 건물에 하나님은 계시지 않으시다라는 의미로 말한 것은 절대로 아니라는 것을 먼저 이해하여야만 한다. 특히 지방교회는 온 세상에 충만하시는 부소부재하시는 하나님,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을 부정한다.
교회
물론 신약에서의 "교회"란 유형적이고 건물적인 교회를 말하지 않는다. 부르심을 받은 성도들의 회중, 모임이 에클레시아의 개념이 되어지기 때문이다. 마치 이러한 것을 일반교회는 숨기고 가르키지 않는 것으로 구원파는 매도를 하고 있는데, 엔만한 교회 주일학교 정도면 이러한 것을 모두 가르킨다. 교회를 가르키는 영어 Church는 헬라어 "퀴리아코스"에서 유래되었으며 "주에 속하다"는 뜻이다. 교회란 용어는 구약에서 "카알"이라고 표현되는데 이 용어는 "불러 모으다"라는 "회중의 모임"을 뜻하는 말이다. 또한 신약에서는 "에클레시아"라고 기록되어지는데 이 단어는 "에크"(....로부터)라는 단어와 "클레시아"(밖으로 불러내다)는 단어가 합성된 것이다. 즉 교회란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은 선택된 무리들의 모임"을 가르킨다.
또한 행7:38에서는 "광야교회"라는 용어가 등장한다. 즉 "애굽으로부터 광야로 불러내신 선택된 이스라엘의 회중"을 누가는 광야교회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며, 이스라엘의 광야생활은 곧 신약에서 교회를 예표하기 때문이다. 또 신약의 사복음서에서는 마태만이 유일하게 에클레시아, 교회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특히 베드로가 예수님을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였을 때에(마16:16), 예수님은 그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말씀하신다.(16:18) 즉 교회란 예수를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의 공동체가 되는 것이다. 교회의 개념은 아래와 같은 의미가 아닐까?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18:20)
수가라는 동네에서 사말리아 여인은 예수님께 이렇게 묻는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요4:20)
사마리아 사람들은 특정한 산을 성산으로 생각하고 있었고(신11:29. 27:12) 그곳만이 예배를 드리는 장소로 생각하였던 것이다.
반면에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만 하나님이 계신다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사말리아 여인은 장소(예배할 곳)를 말하고 있으며, 예수님은 장소가 아니라 시간의 개념(예배할 때)으로 말씀하신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요4:21)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4:23-24)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어느 곳에서나 계신다. 우리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릴 때에 하나님은 어느 장소에만 국한되어 계시며, 어느 장소에서만 예배를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신다. 즉 문제는 예배할 장소가 아니라, 예배할 때(시간)인 것이다. 우리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릴 때에, 우리는 영 안에서 하나님과 만나게 되는 것이며, 그러한 개념에서 우리의 몸은 성전이 되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몸이 성전이 되어지는 참의미가 아닐까?
"성 안에 성전을 내가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계21:22)
히브리서는 하늘의 성전이 원래부터 있던 것이며 이 땅의 성전은 단순한 모형이라고 하였으며(히 8:5;9:24), 또한 천상 교회는 승리한 교회의 총회라고 하였다(히 12:23). 요한계시록에서 하늘의 성전은 거대하게 영성화된 요한의 구도 중 일부이며, 하늘의 교회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충성스러운 백성들의 모임이다(계 14:1). 새 예루살렘에는 성전이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임재가 곧 성전이기 때문이다.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계21:3)
즉 자신들의 교회만이 참교회라고 하는 자들은 예수를 만나기 전 수가성의 사마리아 여인과 같다. 즉 그러한 주장을 하는 자들은 자신들만이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다시 말하여 오직 자신들만이 부르심을 받는 성도라고 주장하는 것이 되므로 이단이 된다. 유형적인 참교회란 없다. 지상의 유형적인 교회는 하늘의 참교회의 한 모형일뿐이다.
누구든지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 그것에는 어떤 비밀도 없다. 그것이 복음이며 기쁜 소식이다.....
5. 성전의 개념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전3:16-17) 본문에서 성전이란 개념은 두가지의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1. 하나님이 계시는 곳
2. 거룩하게 구별되는 곳
위의 성경 문장을 보면 그 두 개념이 설명되어 있다.
1. 성령 하나님이 너희 안에 거하신다.
2.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다.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다는 단어는 "오이케오"이다. 이 의미는 (집을) 점유하다, 거주하다, 동거하
다는 뜻(to occupy a house) 을 가진다. 앞서 이야기하였듯이, 우리가 성전이라는 개념은, 하나님이 우리 성도의 안에만 국한되어 살고 계시는 것은 아니며 우리 몸이 하나님의 영원한 안식거처가 된다는 뜻은 아니다. 하나님은 무소부재하시며,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으시며 어느 곳에서나 편재하신다. 다윗은 하나님의 편재성에 대해서 이렇게 노래하였다.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나이다(시139:8)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사6:3)
물론 편재성이라는 속성으로 인하여 하나님이 우리 안에도 거하신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로지 우리 성도의 몸만이 성전이라고 하는 주장, 즉 성전하나님이 오직 우리 안에만 계신다는 국한적인 개념을 비판하자는 것이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뒤에서 다시 다루게 될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하늘에 거하신다는 것이 언제나 명확한 성경적인 기록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야곱을 벧엘에서 만나시고 모세는 시내산에서 만나셨듯이 어떤 특정한 장소를 선택하시곤 하였던 것이다. 우리가 성전이라고 불리워지는 이유는, 이미 우리가 위에서 살펴 보았듯이 첫째, 성령하나님이 우리에게 거하시기 때문에, 또 둘째, 우리 성도가 거룩하게 구별되어지기 때문에 우리 몸이 성전이라고 불리워지는 것이다.
우리 성도의 몸이 성전인 것은 분명히 맞지만, 구원파의 주장과 지방교회의 주장은 "하나님은 교회 건물에 계시지 않으며, 오직 성도의 몸 안에만 계신다"라는 개념으로,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분명히 우리 몸이 성전인 것은 맞지만, 오직 성도들의 몸 안에만 하나님이 계신다고 하면 그것은 하나님을 공간적으로 제한하는 것이 된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시면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여...."라고 주기도문을 가르켜 주셨는데 그렇다면 예수님이 거짓말을 하셨다는 것인가? 성경은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하늘"을 하나님이 계시는 장소적인 개념으로 언급하고 있으며, 주님은 하나님의 보좌 우측에 계신다고 하지 않는가? 또한 예수님은 성전을 보시고 "내 아버지의 집"이라고 하시지 않았는가?
"성"이라는 개념, 즉 거룩이라는 개념이 말하는 히브리어 카도쉬와 헬라어 하기오스에 대하여 우리는 이해하여야만 한다.
고전3:17에서 "거룩"이라는 단어는 헬라어 "하기오스"이다.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저희와..."(고전1:2)
윗 성경구절이 "성도"의 정의가 된다. 즉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부르심을 받은 자들"을 가르킨다. 그 "성도"를 가르키는 헬라어 단어가 바로 "하기오스"이다.
또 "거룩하여지고..."라는 단어는 수동완료형의 "하기아조"가 된다.
거룩이라는 용례는 "하나님께 속한"이라는 개념이며 "구별되다"를 의미이다.
거룩이란 말은 영어로 "Holly"(성) 이다.
히브리어 카도쉬, 헬라어 하기오스는 원래 "자르다, 구별하다"는 뜻을 갖고 있다.
성경, 성가, 성전, 성령, 성부, 성령....이 모든 "성"의 개념은 "거룩"이라는 뜻이며, 이 말의 뜻은 "구별되다"는 뜻이다.
성경은 일반 책과 구별된 책이며, 성가는 일반 노래와 구별되는 구별된 책인 것이다.
이 단어의 용례는 "하나님께 속한 것"이란 개념에 사용되어 진다.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고,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니(롬11:16)
"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도(벧전3:5)
"제사하는 처음 익은 곡식 가루가 거룩한즉 떡덩이도 그러하고(롬11:16)
"모든 형제도 너희에게 문안하니 너희는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고전16:20)
즉 신약에서도(구약에는 그 용례가 너무 많음으로 생략함) 떡덩이도, 입맞춤도, 부녀들도 모두 거룩하다고 불려진다.
구약에서는 제사장의 옷(레16:4)과 십일조(신26:13)까지 거룩하다고 하였으며, 거룩한 시간(출20:8) 도 있었다.....
제사를 드리는 거룩하게 구별된 물건에 접촉하는 것도 거룩하다고 불리워 졌다(출29:37)
어떻게 떡과 옷같은 물질이 거룩할 수가 있는가?
즉 하나님께 소속된 것은 모두 거룩이라고 불리워졌던 것이다.
모세에게 계시하신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은 "거룩한 땅"이라고 불려졌다.
"주께서 가라사대 네 발의 신을 벗으라 너 섰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라(행7:33)
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만남에 있어서 특별한 장소를 선택하였을까? 하나님은 온 세상에 편재하시며 또 하늘보좌에 계시는 분임이 분명하지만, 야곱에게는 벧엘(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이라는 장소에서 만났고, 모세에게는 거룩한 땅에서 만나셨으며, 하나님께서는 성전에 대해서 "내 이름이 거기 있으리라"고 말씀하셨던 것이다.(왕상8:29)
다윗이 성전을 짓게된 동기가 무엇일까? 다윗은 하나님의 성전을 지을 것을 생각하고 나단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왕이 선지자 나단에게 이르되, 볼지어다 나는 백향목 궁에 거하거늘 하나님의 궤는 휘장 가운데 있도다"(삼하7:2)
그러자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부터 오늘날까지 집에 거하지 아니하고 장막과 회막에 거하며 행하였나니, 무릇 이스라엘 자손으로 더불어 행하는 곳에서 내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먹이라고 명한 이스라엘 어느 지파에게 내가 말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위하어 백향목 집을 건축하지 아니하였느냐고 말하였느냐"(삼하7:6-7)
하나님은 이스라엘 어느 지파, 어느 누구에게도 집을 건축해달라고 말한 적이 없었다. 하나님은 사람의 손으로 짓는 곳에서 살고 계시는 분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이름은 곧 그의 임재를 상징하므로, 하나님은 다윗에게 이렇게 말씀을 하신다.
"저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삼하7:13)
신약에서도 성도가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불리워진 것은, 성도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하게 구별되어지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언제나 하나님께 속한다는 개념은 거룩이라고 불리워졌던 것이다.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행26:18)
"또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럽게 하였다 하니(행21:28)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마4:5)
"이는 아론의 아들들의 이름이며 그들은 기름을 발리우고 거룩히 구별되어 제사장 직분을 위임받은 제사장들이라"(민3;3)
"너희는 내게 거룩할지어다 이는 나 여호와가 거룩하고 내가 또 너희로 나의 소유를 삼으려고 너희를 만민 중에서 구별하였음이니라"(레20:26)
"거룩히 구별할 땅과(겔48:21)
"그 아들 엘리아살을 거룩히 구별하여(삼상7:1)
회막은 Tent of meeting이라고 불렸는데 그곳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백성을 만났던 장소였기 때문이다. 장막과 성전은 모두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으로 인식되어졌던 것이다.
"여호와여 주의 성산에 거할 자 누구오니이까?"(시15:1)
하나님과의 인간의 직접적인 만남은 곧 궁극적인 심판을 의미하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하나님과 대면할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영적교류인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난다.
요한복음1장14절의 "거하시매"는 "스케노오"로서 "거하다. 장막을 치다"는 뜻이다. 계시록의 하나님의 장막이라는 단어도 "스케네"이다. 임마누엘이란 단어 역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의미가 아닌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2:19)
예수님은 사흘동안에 그의 몸을 일으키겠다(부활)고 말씀하심으로 인하여, 주님은 그의 몸을 성전이라고 하셨다.
또 주님은 성전을 "만인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셨고(마21:13. 막11:17. 눅19:46), 성전을 "내 아버지의 집"이라고도 하셨는데, 구약의 제사 의식이 곧 예수의 예언적인 모형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눅2:49)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요2:16)
그러나 우리 교회도 당연히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며, 또 구별된 곳이다. 하나님께 거룩한 예배를 드리는 곳이기 때문이다. 단 우리가 주의할 것은, 오직 교회에만 하나님이 계시다고 하면 안된다.... 또 구약의 성전의 개념과 동일하게 생각하여 교회를 하나님의 안식처소(하나님이 거주하시는 곳)의 개념으로만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은 당연히 교회에 계신다. 또 예배를 드리는 곳은 거룩하게 구별된 곳이며 거룩한 성도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기 때문에 성전이라고 불리워질 수가 있다. 교회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임재하는 장소이다. 그래서 교회 건물은 일반 건물과 구별되어지며, 하나님께 속한 곳이다.
즉 교회건물이 성전이라고 불리워지는가 안불리워지는가는, (1) 교회에 하나님이 계시는가? (2) 거룩하게 구별된 곳인가 아닌가하는 관점에서 보아야만 할 것이다. 그것이 성경적이다. 물론 교회 건물에만 하나님이 계시다고 한다면 그것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지만, 우리의 예배처소이며 하나님이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는 장소적 개념으로서, 교회는 성전이라고 불리워진다고 하여도 전혀 잘못된 것은 없을 것이다. 교회는 성전이라고 불려질 수 있으며 교회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임재한 곳이지만, 다만 교회만이 성전이 아니며, 오직 교회만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장소라고 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2. 그러면 무엇이 문제인가?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 박옥수씨는 다른 이단자들과 마찬가지로 기성교회를 비난하고 공격한다. 이는 자신의 교리나 주장을 합리화하기 위한 이단들의 특성이다.
둘째 십일조를 드리는 것을 비판하고 기도의 필요성을 부정하고 주님이 가르치신 주기도나 우리가 고백하는 사도신경을 부정한다.
셋째 기성교회의 목사나 장로, 집사나 권사등 직분자들을 공격하므로서 반교회적인 행태를 일삼는다.
넷째 잘못된 구원관을 가지고 있어 깨달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여 많은 신자들을 혼란케 하고 성경을 왜곡해석하여 회개가 필요없다고 주장한다.
다섯째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불신자에게보다 오히려 기성 신자들에게 더 많은 것처럼 선전하여 구원받은 신자들을 구원받지 못한 자로 만들어 자신들에게 와야 구원이 있음을 강조한다.
여섯째 가족중 한사람이 그곳에 빠지면 온가족에게 자신들의 교리를 강요하고 듣지 않을 경우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협박하고 가정을 파괴하는 반사회적인 일들을 자행하고 있다.
3. 가장 문제되는 구원관의 이단성문제
1) 구원은 깨달음을 통하여 받는다고 한다. 죄사함과 거듭남의 비밀이라는 책을 통하여 보면 "죄사함을 깨닫고" "복음을 깨닫고" "중생을 경험하고" "거듭남을 체험하고" 하는 말들은 모두가 깨닫고 거듭나야 구원을 받는다는 논리를 주장한다. 그래서 육적생일을 기억하는 것과 같이 영적생일을 기억해야 구원받은 증거라고 한다. 그래서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진리와 전적으로 다르다. 구원은 성령의 역사로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지 깨달음의 결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2) 그리고 박옥수는 회개를 계속하는 것은 구원받지 못한 증거라고 한다. 회개라는 말은 돌이킨다는 말로서 하나님을 거역하고 마귀에게 속했던 자가 하나님께로 한번 돌이키는 것이기 때문에 어 이상 돌이킬 필요가 없다고 한다. 따라서 미래의 죄까지 다 사했으므로 회개를 계속하는 것은 사죄의 확신이 없기 때문이라고 하며 아직 지옥의 자식이라고 단언한다.
회개라는 말은 "에피스트로포"라는 돌이킨다는 말과 "메타노이아" 마음을 고쳐 먹는다는 말이 있다. 박옥수는 원죄와 자범죄를 구분하지 못하고 단회적인 회개(구원을 위한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회개)와 반복적인 회개(성화를 위한 회개)를 알지 못하고 있으며 또한 심각한 것이 구원받은 후에는 죄를 짓지않는다는 것을 주장한다. 그러기에 회개할 필요를 못느끼고 기도의 필요성을 부정하며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가운데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것같이 우리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라는 말씀 때문에 주기도까지도 부정하는 것이다.
3) 자기가 죄인이라고 고백하면 지옥간다고 주장한다. 천국은 의인이 가는 것이고 지옥은 죄인이 가는 곳이기 때문에 스스로 의인이라고 해야만 천국을 간다고 한다. 만일 이들의 말대로라면 사도 바울도 지옥에 간 것이 된다. 왜냐하면 바울은 "나는 죄인중에 괴수라" 고 고백했기 때문이다.(딤전 1:15/현재시제) 신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앞에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인데 이것은 하나님의 인정하시는 법정적인 의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날마다 성령안에서 성화되어 가지만 신자 자신은 하나님앞에서 죄인이라고 고백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내가 의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교만일 수 있다.
"구원파에 말하는 구원은 깨달음으로 사람의 죄가 완전히 사함을 받아 천국행 티켓을 따 놓은 것이라는 거짓된 확신과 평안을 주고 있지만 구세주 되시는 주님을 영접하도록 인도하지 않고 있다"고 구원파에 빠졌다가 나온 정동섭교수는 말하고 있다.
4. 성도들을 미혹하는 계략들
박옥수계열의 전도자들은 주로 다른 이단들과 마찬가지로 기성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여 접근을 한다. 그리고 구원을 받았느냐는 질문을 하여 우물쭈물 대답이 시원ㅍ치 않으면 구원을 못받은 증거라고 매도하고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 언제 어디서 받았느냐고 다구쳐서 당황하게 만든다. 이들의 접촉단계는 일단계가 구원의 확신과 사죄의 확신문제를 들고 나온다. 계속되는 질문에 어지간한 확신이 없으면 혼란을 일으키게 된다.
이단계는 교인들이 육체적으로 힘겹게 생각할 수 있는 새벽기도,십일조,예배당건축,목회자 우대등 기성교회의 약점과 부정적인 면들을 부각시켜 흔들리게 만든다.
삼단계는 그리스도의 재림의 임박성을 강조하여 공포심과 죄의식을 불러 일으킨 다음 그들의 구원공식에 따라 해방감을 준다. 양심의 가책으로부터 해방감, 율법의 억압에서 해방감,종교에서의 해방감을 맛보게 하는 것이다.
이들의 전도수법에 사용하는 질문 10가지가 있다.
첫째 귀하의 이름이 하나님의 생명책에 기록된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습니까?
둘째 귀하는 거듭났습니까? 셋째 성령님이 마음속에 계심을 믿습니까?
넷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것이 확실합니까? 다섯째 귀하는 의인입니까?
여섯째 모든 죄가 용서되었습니까? 일곱째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생활은 아닙니까?
여덟째 구원받은 것이 확신되어 집니까? 아홉번째 재림의 주를 영접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열번 째 구원의 근거가 어디에 있습니까? 이다.
이들은 자신이 이단으로 정죄를 받지 않기 위해서 기존교회와의 동질성을 강조하면서 한편으로는 자신들의 우월성을 드러내며 기성교회 교인들을 미혹하기 위해서 정통교회를 정죄하는 두 개의 얼굴을 하고 있다. 그들은 대외선전용 교리와 실제 자신들만의 믿는 교리가 다르다는데 이단의 사특함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단에 미혹이 되지 않기 하여 성도들은 구원의 확신 사죄의 확신 교회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말씀에 굳게 서야 할 것이다
구원파의 교리비판
구원파는 다른이단과 마찬가지로 대외선전용 신조와 대내 교육용 교리를 함께 가르치고 있다. 예를 들어 그들이 제시한 12신조(성경, 삼위 하나님, 죄, 구원, 교회, 재림, 천년왕국, 지옥, 천국 등 주제에 대한 신조)의 내용은 복음주의적 기존 교단의 신앙내용과 별 차이가 없는 것으로 되어 있다. 새길 1990년 11, 12월 p 32).
문제가 되는 것은 이 집단 지도자(권신찬씨와 유병언 씨)가 성경이 아닌 본인의 경험에 근거해 가르치는 해괴한 주장과 가르침이 전통적인 기독교 신앙에서 너무나 이탈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권 씨는 자파 교인들에게 “우리의 이 신앙생활은 일반 교회생활과는 아주 틀리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교량, 1989년 3월 p 15).
그러면 우리나라 최대의 교단인 대한 예수교 장로회 총회에서 1984년 9월 이미 이단으로 규정한 바 있고 1990년 11월 구원파 실세 (주)세모 사장 유 씨에 의해 고소당해 구속되었다가 풀려난 바 있는 본인이 1984년 석사 논문에서 이단으로 규정한 바있는 세칭 “구원파” (복음침례회)가 왜 이단인지를 항목별로 제시해 보기로 한다.
권신찬 씨는 정통교단의 비난으로부터 스스로를 변호하기 위해 썼던 '세칭 구원파란?' 이라는 제목의 책에서 “누구든지 우리가 주장하는 진리가 성경에 위배된다고 생각한다면 얼마든지 우리를 비판해도 상관없다”고 호언한 적이 있다.(p 15)
필자는 어느 특정인을 공격할 의도로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이 집단의 가르침이 많은 가정을 파괴하고 사회적 해악을 끼치는 “다른 복음”곧 거짓된 가르침에 해당된다고 믿기 때문에 그들의 가르침(교리)을 성경에 비추어 비판하자는 의도에서 구원파의 가르침을 비판하는 것임을 거듭 밝힌다.
1. 성서관
최삼경 목사가 그의 최근 논증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단 논쟁은 성서해석학적 논쟁이다. 그들도 신구약 성경의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라 말하며 성서의 권위를 강조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들이 모든 정통 기독교단에서 준수하고 있는 역사적 문법적 신학적 해석에 대해 알지 못할 뿐 아니라 체계적 신학교육을 무시한 채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이단사상을 부각시키기 위해 우화적 해석(allegorical interpretation)을 일삼고 있다는 데 있다.
예를 들어, 권 씨는 기도와 예배를 부인하기 위해 말라기 3장 16절을 문맥과 관계없이 “성도들과 함께 주님의 일을 위해 서로 상의하고 의논하는 성도의 교제는 참으로 중요한 기도가 되는 것이다” (권신찬, 한국일보, 1989. 3. 22, 전면광고)라고 해석하고 있다. 하나님께 드리는 새벽기도, 합심기도, 금식기도 등 개인적인 기도는 필요없고 구원파 교인들끼리 사업과 교회일을 논의하는 교제가 기도를 대신한다는 억지해석이다.
한편 유병언 씨는 “성도의 교제를 통해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어 간다”는 그의 선입관을 강조하기 위해 요한복음 14장 6절의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자가 없느니라”에 “나”는 “교회”즉 구원파 교회를 나타낸다고 영해하는 것을 서슴지 않고 있다('알파에서 오메가까지, 제4권).
그들은 성서본문의 의미를 끌어내어 석의(exegesis)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본문에 집어넣어 해석하는 데 익숙해 있어 이들의 설교는 우화적인 해석과 억지해석(eisegesis, 벧후3:16)으로 가득 차있다.
구원파 지도자들의 엉뚱한 성경해석 사례를 더 확인하기 원하는 분은 필자의 논문 “구원파와 남침례회의 비교연구”(침례신학대학 대학원, 1984)를 직접 참고하기 바란다.
구원파에서는 신구약 성경을 주로 예언서로 취급하고 있다. 구약의 예언이 주로 예수님에게서 성취되어(요5:39)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게 되었고 예수 재림에 대한 예언들이 성취되고 있다는 것은 정통교회에서도 모두 공감하는 진리이다. 그러나 권 씨와 유 씨는 설교의 내용 대부분을 구원과 교회 종말에 할애하고 있다. “하나님의 뜻을 다(whole, complete counsel of God, 행20:2)”전하지 않을 뿐더러 그 내용이 거짓되기 때문에 이단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시한부 말세설을 주장하는 이들은 자신들이 운영하는 여러 출판사를 통해 '임박한 대환란' '세계독재자와 666' 카운트다운 예수재림과 휴거' '한계에 도달한 인류역사' '인류파멸의 징조와 중동사태' '위험한 지구' 등의 책을 출간할 뿐 아니라 말세의 징조를 수록한 스크랩 북을 만들어 전도용으로 활용하고 있는데 이는 그들에게 사실상 성경에 버금가는 권위를 지니고 있다.
자신들만 복음의 진리를 간직하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는 이들은 교인들에게 자파지도자들의 설교집과 종말을 주제로 다룬 책만을 읽게 할 뿐 정통교단에서 나온 신앙서적은 읽지 못하게 한다. 이는 그들이 부르짓는 복음이 보편타당성이 있는 진리가 아닌 “다른 복음”즉 거짓된 복음임을 스스로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2. 하나님관(삼위일체론)
권 씨는 삼위일체 교리를 부인하면 이단이라면서, 그들의 신조에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로 계심을 믿는다고 말하고 있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이들이 정통교회의 입장과 별로 다를 것이 없는 것 같다.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구원파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기도와 예배를 부인하거나 이를 교제 로 대치시키고 있다는 점이다.(기도관에서 언급하겠지만) 권 씨는 “하나님의 일을 맡은 자만이 기도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반드시 기도해야 한다는 법은 없다”고 말하면서(세칭 구원파란?, P 104) 설교를 마칠 때 하는 형식적인 기도에서도 권 씨나 유 씨는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한 적이 없다고 언제나 “주님”께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함으로써 삼위를 구분하는 것이 별로 중요하지 않음을 암시하고있다.
모든 정통 교단의 크리스챤들은 기도할 때 사도 바울과 같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한 성령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는 것”(엡2:18)이다. 그러나 그들의 기도에는 하나님 아버지가 언급되는 적이 없다. 유 씨는 교회를 “성령의 몸”이라 칭하기도 하고 요한복음 14장 6절이나 15장 5절을 강해할 때 예수님을 성령이나 교회와 동일시하기도 한다. 어버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 성령 하나님을 구분하는 것은 구원파 지도자들에게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다음으로 구원파에서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이 영이 시라는 사실이다. 구원파 지도자들의 설교를 들어보면 그들은 하나님을 추상적이고 비인격적인 영으로 거론하며 세계역사를 주관하는 이신론적 존재로 부각시키고 있다. 하나님은 영이시지만, 인격적인 영(personal spirit)' 이시다. 구원파의 신관에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하나님의 인격성이 빠져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권 씨는 “지성이나 감정이나 의지로써 영이신 하나님과 접하려는 것은 불가능하다”(양심의 해방, p 9)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존재로서 의지적인 회개와(지정의를 포함한) 전인격적인 믿음(신뢰)을 통하여 하나님과 관계를 맺게 되는 것이다.
구원파는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하는 것에 비해 하나님의 임재성을 말하지 않고 있다. 구원파는 초월적 힘으로써 예언을 성취하시는 이신론적 하나님을 부각시키나 성도들의 기도를 듣고 역동적으로 성도의 생활에 개입하시는 인격성을 부인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그들의 설교를 듣거나 읽어보면 예수님의 신성은 강조되고 있으나 인성은 거의 무시되고 있다.
성령은 넌세계적으로 두루 운행하시며 진리의 영으로 죄를 깨닫게도 하시고 구원하시고 인도하시는 사역을 하시지만 구원파의 성령님은 한국에 머무르고 있으며 구원파 내에서만 집중적으로 역사하고 있다고 그들은 믿고 있다.
모든 이단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서 탈선하고 있다. 구원파는 하나님의 인격성(personality)대신 영성(spirituality)만을 부각시키고 예수님의 인성보다 신성이나 초월성만을 강조하고 성령의 보편적인 역사를 부인하고 제한하는 것이 특징이다. 비인격적인 힘(impersonal force)이 되시는 하나님을 신봉할 때 그러한 편협된 신을 믿는 이들의 행동과 생활은 비인격적으로 나타나게 마련이다. 구원파 지도층은 그들을 비판하거나 집단을 이탈하는 이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기도 하고 그들을 세상법정에 고발하여 구속시키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3. 구원관
이미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기독교 복음 침례회' 는 “죄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 “깨달음에 의한 구원” “율법과 종교에서의 해방(자유) ”을 강조하기 때문에 세상사람들은 그들에게 구원파, 깨달음파, 중생파, 구원깡패 등의 별명을 붙여 주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고 세상에 오셨다(눅19:10).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신다(딤전2:4). 구원의 복음을 전하기 때문에 이단이라면 기독교의 모든 정통도 이단이라 규정해야 마땅할 것이다. 구원파를 이단이라 단언하는 것은 그들이 전하는 구원이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이 아니라고 보기 때문인 것이다. 교회사나 성서신학의 기준을 모르는 평신도들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들의 가르침에 현혹(미혹)되어 넘어가는 이유는 그들이 성서적 용어를 정통 기독교와 다른 의미로 사용하기 때문인 것이다. 이단은 구원, 종교, 기도, 예배 등의 단어를 기존 교회와 전혀 다른 의미로 사용한다. 그러면 구원파에서 말하는 구원이 왜 성경이 말하는 구원이 아닌가를 살펴보기로 하자.
1) 구원의 조건
첫째로, 구원파의 구원에는 의지적인 회개와 결단이 빠져있고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인 만남이 빠져있다. 그들의 가르침에 의하면 사람은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구원파의 두 지도자 권 씨와 그의 사위 유 씨는 몇대 째 장로교인으로 율법에 얽매인 종교생활을 하다가 1961년 11월 18일과 1962년 4월 7일에 각각 “복음을 깨달았다”고 한다(양심의 행방, 영혼을 묶는 사슬 참조). 문제는 이들의 구원(중생체험)이 성경에 근거를 두었다기 보다 두 지도자의 경험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들은 성경말씀에서 자신들의 죄가 용서된 것을 깨달았다고 말하고 있지만 이들의 주장은 성서적 규범과 교회사에 나타난 선배 성도들의 회심경험에서 이탈되어 있음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구원파 소속 교인들은 전도 대상자에게 “구원 받으셨습니까? ”라는 질문으로 대화를 시작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미 그들과 접촉해 본 분들은 공감하겠지만 그들은 기존 교인들을 만나면 먼저 ① 당신은 거듭났습니까? ② 당신은 완전히 중생했습니까? ③ 당신은 지금 죄가 있습니까, 없읍니까? 등의 질문을 던져 구원의 확신에 대해 혼란을 일으킨다. 제 2단계로 기존 교회의 약점을 들추어(예를들어 교인들이 육신적으로 힘겹게 생각할 수 있는 새벽기도, 십일조, 성전건축, 목회자 우대 등의 부당성을 지적함) 기성교회를 부정하게 한 다음, 제 3단계로 그리스도 재림의 임박성을 강조하여 공포심과 죄의식을 불러 일으킨 다음 그들의 구원 공식을 따라 해방감을 안겨 준다. 양심의 죄책감으로부터의 해방 율법의 억압에서의 해방 종교에서의 해방을 맛보게 하는 것이다.
두 지도자가 율법적인 종교생활에도 불구하고 확신과 안식이 없는 교회생활을 했었기 때문에 자신들의 경험에 근거하여 기존 교회에서 공통적으로 행하고 있는 예배행위, 십일조, 헌금, 장로 집사제도, 주일성수, 율법을 지키려는 노력 등을 모두 종교라고 규정하며 율법과 종교에서 해방받는 것이 바로 구원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기존 교회에 대한 반작용으로 타당성이 없는 개인적인 종교관을 만들어 낸 것이다.
성경에서도 예수님께서 “죄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한다고 했고 바울도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구속(救贖) 곧 죄사함을 받았다”(엡1:7)고 했다. 따라서 구원파에서 말하는 구원은 극히 성서적인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구원의 첫 단계인 중생의 체험을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행20:21)" 을 통하여 하나님과 개인적이고 살아있는 관계를 맺는 것으로 제시하고 있다. 기독교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개인적인 대면이요, 만남이며 관계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적인 구주로 영접함으로 즉 그를 구주와 주님으로 신뢰하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개인적이고 살아있는 관계를 맺음으로 크리스챤(예수님의 제자)이 되는 것이다(M. T. Rankin). 성서적인 믿음, 즉 구원받게 하는 회심은 지, 정, 의를 포함한 전인격적인 존재인 인간이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과 만나는 사건이다.
구원파의 구원에 가장 두드러지게 빠져있는 것은 의지적인 회개와 의지적인 위탁(commitment) 으로서의 믿음(trust)이다. 구원받는 믿음에는 진리에 대한 인식과 지식적인 동의와 의지적인 위임(위탁)이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구원파의 구원관에는 의지적인 위임(내맡김)으로서의 믿음과 의지적으로 죄에서 돌이키는 회개(repentance)가 빠져 있다. 회개와 믿음(행21:20)은 초대교회 사도들로부터 교회사 전체를 통해 모든 성도들이 구원의 두가지 기본 조건으로 제시해 왔다. 그러므로 죄가 용서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음으로 구원받을 수도 있지만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는 구주 예수님을 만나고 그를 따르기로 결심하는 것이 없이 크리스챤이 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워치만 니(Watchman Nee)의 삼분설에 영향을 받은 권씨는 사람의 인격을 영과 혼과 몸으로 구분해 설명하면서 “영이 하나님을 접하는 것은 양심으로만 알 수 있다”(양심의 해방)고 강변한다. 계속해서 그는 “영을 자기의 인격적인 활동과 혼돈하며 인격의 일부인 이지(理知)나 감정이나 의지로서 영이신 하나님과 접하려는 것은 불가능하다”(p 9)고 주장한다. 신앙생활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의지적인 회개(돌이킴)와 결단이다. 예수를 믿기로 결심하고 영접하는 것은 의지의 작용이다. 예수님께서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마4:1),“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망하리라”(눅13:3)고 말씀하셨다. 바울도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행17:30)고 설교했고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고후7:10)를 말씀하셨다. 베드로도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죄사함을 얻으라”(행2:38)고 구원의 조건으로서의 회개를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구원파에서는 회개가 빠진 피동적인 깨달음에 의한 구원을 전하고 있다.
구원파에서는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자범죄로 인한 죄책감보다 아담의 죄로 인한 원죄를 더 강조한다. 따라서 회개가 필요없다고 말하며 회개를 언급할 때도 “회개는 죄인이 하나님께로 인도되는 것”이라며 “죄사함이 회개에 앞선다”고 특이하고 엉뚱한 주장을 하고 있다.(임박한 대환란, p 145)
빌리 그래함(Billy Graham) 목사님이 말씀하신 대로 회개에는 “하나님 앞에서 느끼는 죄책감과 하나님을 모독했다는 죄의식이 앞선다. 그리고 의지의 작용에 의한 죄로부터의 방향전환을 동반한다. ” 회개는 죄의 종에서 하나님의 종으로 돌이키는 의지적인 결단이다. 구원파의 구원에 빠져 있는 것은 바로 이 회개이다. 회개는 천국의 열쇠이며 죄사함은 천국에 이르는 관문이다.(빌리 그래함, 불타는 세계 p 218)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기 위해 죽으셨다”(벧전3:18).
중요한 것은 죄사함을 받았다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적극적인 의를 덧입었다는 사실이다. 문제는 하나님과 나의 전체적인 관계이다. 내가 죄를 회개하고(막1:15)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함으로(요1:12)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관계가 회복되어 나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게 된다.
구원파에서는 일반 정통교회에서 하는 것처럼 예수께 나오라(마11:28),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라(행2:38: 16:31), 예수를 접법하라(요1:12)고 말하지 않는다. 구원을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으로 간주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다 이루어 놓은 구원을 수동적으로 깨달으라고 몰아칠 뿐이다.
구원파에서는 하나님이 영이 되시기 때문에 복음의 진리를 듣다가 깨달아지면 인간의 영 즉 양심에 해방과 자유가 온다고 가르친다. 즉 그들은 두 지도자의 회심경험을 따라 꼭 같은 깨달음의 관문을 통과해야 구원받은 것으로 인정한다.
하나님은 영이실 뿐만 아니라 인격을 지닌 영(Personal Spirit)이시다. 성령은 지성과 감정과 의지를 통해 역사하신다. (멀린스, 조직신학 원론, P446) 우리는 권 씨의 주장과는 반대로 지성 (intellect)과 감정(emotion)과 의지(volition)를 포함하는 회개와 믿음(신뢰)을 통하여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를 맺는다(빌리 그래함, 하나님과의 평화 p 163)
복음을 깨닫고 시인하고 믿음으로(롬10:9, 10) 구원을 받는다고 하여 깨달음과 믿음을 하나의 조건으로 부각시키는 구원파는 18세기에 나타났던 믿음주의(Sandemanianism)가 부활한 것으로 이는 거짓된 평안과 안식을 심어주기가 쉽다(로이드 죤스, 로마서8:5~17 강해 p 207).
2) 구원의 확신, 날짜
둘째로, 구원파에서는 신자는 반드시 구원의 확신이 있어야 하며 거듭난 날짜와 시간, 장소를 알고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구원파의 두 지도자 권 씨와 유 씨가 했던 회심의 경험이 참 구원에 이르게 하는 중생의 경험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너무나 분명한 경험이었다. 그래서 권 씨는 “당신이 거듭난 그 날짜를 잊어 버린다 해도 그날은 꼭 있어야 할 것이다”(종교에서 해방, p 75)라고 주장하게 된 것이다.
그럴듯한 주장이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하나님의 역사를 크게 제한하는 편협된 의견에 지나지 않는다. 구원의 확신이 없다고 거듭난 크리스챤이 아니라는 증거는 성경 어느 곳에도 없다. 마틴 로이드 죤스가 말한 대로 “당신은 확신이 없어도 크리스챤이 될 수 있다. 그러나 크리스챤으로서 당신은 확신을 갖고 확신을 누려야 한다”(롬7:1~8:4강해 p 296).
구원파는 전도 대상자가 기존 교회 교인인 경우 그의 구원을 의심하게 한 다음 과거의 교회생활이 헛된 종교생활이었음을 인정하게 한다. 그 다음 여러 성구를 통해 강한 죄의식을 느끼게 해준다. 그 다음 영원한 속죄(죄사함)에 관계되는 성경구절을 읽게 해 죄사함을 깨닫게 함으로 확신을 안겨준다는 것은 앞에서 거론한 그대로이다. 그러나 교회에 다니지 않는 불신자에게 접근할 때에는 방법을 달리한다. 개인전도나 5~7일 동안 계속되는 “성경강연회”를 통해 이스라엘을 둘러 싼 중동정세와 환경오염(공해), 인구폭발, 기아 등 긴박한 시사문제를 거론하여 하나님의 예언대로 이루어져 가는 시사현실을 직시하게 함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게 만든다.
“성경은 사실이다”라는 강연제목은 그들이 즐겨 쓰는 문구이다. 그들은 세계종말을 시사하는 신문 잡지 기사를 수록한 각종 “스크랩 북”을 동원하여 대환란과 예수재림의 임박함을 강조해 전도대상자에게 공포의식과 위기의식을 느끼게 유도한다.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 앞에 죄책감을 느끼게 된 사람은 그들이 즐겨 사용하는 “구원 구절”을 통해 “복음을 깨닫고”양심의 평안과 자유함을 경험하게 한다. 그런데 이들의 전도대상자 가운데는 강한 죄책감과 위기의식이 느껴지지 않아 여러해 고민하는 이도 있고 임박한 대환란에 대한 거듭된 설교를 듣고도 확신이 서지 않아 “구원 노이로제”에 걸린 채 공포와 불안 속에서 방황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정통교회에서도 사람이 구원받기 전에 하나님 앞에 성령의 책망을 통해 자신이 죄인임을 깨달아야 할 필요성을 강조한다. 그러나 우리는 죄를 깨닫는 심각성의 정도가 다양함을 인정한다. 어린이와 어른의 감동이 다르고 기질에 따라 죄책감을 경험하는 것이 다를 수 있다. 그런데 구원파에서는 죄책감의 정도가 심각해야만 소위 복음을 풀어 그들의 구원공식에 따라 구원의 확신을 심어준다. 성령은 또한 구원파 교회에서만 집중적으로 역사하기 때문에 꼭 같은 구원간증을 해도 그들의 교제권 안에서 깨달아야만 “구원받은 형제, 자매”로 인정을 받는다.
이 문제에 대해 미국 풀러(Fuller)신학교의 종교심리학 교수 사무엘 써더드(Samuel Southard)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는 예수께서 사람들을 여러가지 다른 방법으로 불렀음을 인정할 수 있다. 우리가 섬길 주님은 오직 한 분이나 우리는 다양한 회심의 경험을 통하여 그에게 나오게 된다”(회심과 크리스챤의 인격, p 11). 요한이나 빌립, 안드레, 루디아같은 이는 조용히 그리스도를 따르라는 부름을 받았던 예로 생각할 수 있고 바울이나 삭개오, 빌립보 간수같은 이는 문자 그대로 극적인 회심을 한 예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3) 한번 회개로 족한가
셋째로, 구원파의 구원관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영원한 속죄를 받았으니 다시는 회개할 필요가 없다는 그들의 주장과 관계된다. 권 씨의 주장을 들어보자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히 9:12)는 말씀처럼 과거의 죄뿐만 아니라 현재의 죄, 미래의 죄까지도 단번에 영원히 사해진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죄가 단번에 영원히 용서된 것을 믿어 구원에 이른다... 그러면 구원받은 후의 죄는 어떻게 되는가? 요한1서 1장 9절의 말씀대로 죄를 자백하는 것이다. 사람에게 지은 죄는 사람앞에, 하나님께 지은 죄는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자백해야 한다. 그러나 구원 이후의 죄가 영혼의 구원 이후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권신찬, “성경대로 믿는 신앙 ” 목회와 신학 1991년 3월호).
구원받은 신자는 매일매일의 생활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면 깨끗하게 될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생활이나 행동에 잘못된 것을 깨닫고 버려 나가게 되는 것이다(권신찬, 종교에서 해방 p 112).
구원파에서는 종교라는 말과 율법, 의인, 죄인, 기도, 예배 교회 등의 낱말에 대해 기존 교회와 이해를 달리 한다.
권씨는 '종교에서의 해방' (일류사, 1977)이라는 책을 써서 자신의 율법관 및 종교관을 밝히고 있는데 종교와 복음을 임의적으로 구분을 하면서 그는 “종교는 사망이다. 다른 종교는 물론 기독교도 종교이다. 하나님께서 주신 구약의 율법은 종교를 가리키는 것이다. 기성교회는 종교이다”라고 말하면서 율법과 종교로부터 해방받을 것을 호소하고 있다. 기성 교회를 종교라 규정하고 자신들을 복음으로 유도하는 것이다.
성경에서는 종교와 복음을 구별하여 말한 적이 없다. 사도행전 17장과 25장에 나오는 “종교”는 권 씨의 주장처럼 부정적 의미로 사용되지 않았다. 종교(religion)는 라틴어의 religio에서 유래한 것으로 “창조주와 인간을 한데 묶는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지 권 씨의 주장대로 “구속하고 속박한다”는 의미로 쓰이고 있지 않다.
종교와 복음을 나누어 놓고 심지어 기독교도 종교라 하여 자신은 기독교 밖에 있는 것처럼 위장할 것이 아니라 참 종교와 거짓 종교 하등 종교와 고등 종교로 구분하는 것이 더 타당하지 않겠는가?
구원파에서는 또 죄인과 의인의 개념을 정통교회와 달리하고 있다. 그들은 구원받은 후에는 회개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로 전도대상자에게 죄인이냐 의인이냐를 물어서 죄인이라고 하면 천국은 의인만 가는 곳이요 지옥은 죄인이 가는 곳이니 “당신은 지옥에 간다”고 말한다.
물론 우리는 예수님의 속죄 은혜를 받을 때 의롭다 함을 얻는다(롬3:22~26).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고전6:11). 하나님의 자녀는 신분적으로, 위치상으로 의인임에 틀림없다. 예수의 공로 때문에 죄인을 의인으로 여겨 주시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용서받은 죄인일 뿐 여전히 죄를 짓는다.
사실 참된 의미의 의인이 아니면 죄인이란 고백이 불가능한 것이며 또한 참된 의미의 죄인이란 고백이 없이 참된 의미의 의인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믿음으로 의인이 되었음을 강조하던 바울은 성숙한 크리스챤으로서 자신을 “죄인 중에 내가 괴수”라고 고백하고 있다(딤전 1:15). 13절에서는 자신을 훼방자요 행악자였음을 과거시제로 밝히고 나서 내가 죄인 중에 괴수라고 고백할 때는 현재 시제를 쓰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문풍지 창에 난 구멍을 통해 햇살이 비칠 때 방속의 먼지가 드러나듯이 예수를 믿은 후에(참빛을 모신 후) 성령의 빛에 인간의 본래적인 죄가 더욱 드러나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라”고 몸부림치게 되는 것이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이는 누구나 내면적으로 점증하는 죄의식을 갖게 마련이다”(로이드 죤스, 로마서 8장강해 p 187).
권 씨가 영향을 받았다고 시인하며 존경하는 워치만 니(Watchman Nee)는 “신자가 신령하게 되면 될수록 그의 양심은 더욱 더 예리한 경계 태세를 취한다. 세상에 어떠한 크리스챤도 더 이상 죄를 고백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신령한 사람은 없다”(영에 속한 사람, 2권 p 180)고 말한 바 있다.
권 씨가 구원받은 후의 죄는 자백해야 한다는 말은 성서적으로 옳은 말이나 문제는 그들이 개인기도 생활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구체적인 죄)를 자백(고백)하는 적이 없다는 데 있다. 자백은 하나님께 대한 은밀한 자백 사적인 자백(요일 1:9), 상호자백(행5:16) 그리고 공개적 자백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는데, 정통교단에서는 경우에 따라 합당한 자백을 하도록 가르치고 있다. 구원파 교인들은 마음 속에 자동적인 자백(고백)이 이루어지는지 모르나 하나님께 기도를 통해 죄를 고백하는 적이 없으며 피차간에 자백하는 것에 대해서도 거론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주장하는 말과 실제 행위가 전혀 일치하지 않는 것이 이단의 공통적인 특징인 것이다.(마7:20)
권 씨는 “겉사람의 행위에 대해서는 자백이 있어야 하다”고 말하면서도 요한일서 2장 1절에서 그 죄에 대해서도 예수님이 대변해 주신다고 말씀해 주셨기 때문에 정죄가 없는 것은 확실하다”( 세칭 구원파란?, p 92 )고 말해 사실상 개인적 자백이 필요 없다고 가르친다. 그래서 그는 구원파 대내 교육용 설교집에서 “하나님께 용서해 달라고 매달릴 필요가 없다. 하나님이 용서해 주시든지 않든지 그것은 우리의 관심거리도 아니며 문제도 되지 않는다”(서로 사랑하라, p 92)고 단언하고 있는 것이다.
4) 율법과 은헤
넷째, 구원관과 관련하여 구원파가 크게 잘못되어 있는 것은 율법에 대한 이해이다.
권 씨는 말한다: “성경은 율법이 죄를 깨닫게 한다는 것을 확실히 말하고 있다.(롬3:20) 율법이 없이는 죄를 깨닫을 수 없고 죄를 깨닫지 못하면 은혜를 받을 수 없는 것이다율법으로 인하여 자신이 심판을 받고 지옥에 갈 수 밖에 없는 죄인이란 사실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성경대로 믿는 신앙)
최근 권 씨는 구원파의 가르침의 타당성을 변호하기 위해 쓴 글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율법을 완전히 성취시켜 끝내신 것이다. 만일 율법이 끝나지 않았다면 사람은 하나님의 의를 받고 그 앞에 의롭다. 함을 받을 수가 없다”고 그럴 듯한 변증을 하고 있다. 성경은 크게 율법과 은혜가 나누어 진다고 말하면서 권 씨는 “누구나 거듭난 이후에 육신의 생활이 주님의 십자가에 한번 처리되어야 한다. 그것은 바로 요단강을 건너는 것을 의미한다... 주님의 십자가에 피흘려 죽으심은 두가지 뜻이 있다. 죄를 사해 주시기 위해 피흘려 주신 것과 죄를 짓는 육신을 멸하기 위해 십자가에 우리를 함께 죽이신 것이다”(성경대로 믿는 신앙)고 주장했다.
율법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죄인됨을 깨닫고 구원의 은혜를 받게 된다는 말은 맞는 말이고 성경의 명확한 가르침이다. 권 씨의 문제는 율법으로부터의 해방, 양심의 해방, 즉 은혜를 지나치게 강조하여 율법무용론을 주장하는 데 있다. 성경을 잘못 이해하면 믿음과 행위 사이에 갈등을 낳을 가능성이 크다. 행위중심의 율법주의 신앙생활을 하면 교만과 절망의 양극을 오가는 추와 같은 크리스챤이 된다. 반면에 단번에 일시적인 성화, 위치적인 성화 즉 거룩함과 의로움이 자신에게 전가되었으니 성화를 위한 회개(자백)가 필요없다고 은혜와 믿음만을 강조하면 도덕폐기론에 빠질 위험이 있고 윤리적 생활이 약화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구원받은 성도는 단회적 회개로 족하다. 하며 구원파에서는 성화를 위한 자백기도마저 부정한다. 얼마나 편리한 종교인가 그러나 이 얼마나 무서운 멸망케 할 이단(destructive heresy, 벧후2:1)인가!
권 씨는 로마서 7장의 남편과 아내로 비유된 율법과 성도의 관계를 논하면서 “이제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했으니” 구원받은 성도는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이제 무서운 폭군인 율법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을 지킬 의무가 없게 되었다는 무서운 자기 복음을 권 씨는 만들어 낸 것이다.(종교에서의 해방 p 43) 우리는 은혜아래 있기 때문에 율법과의 관계는 끝장났다는 것이다.
성경은 율법이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다고 선언한다.(롬7:12) 사람이 율법을 법있게 쓰면 율법은 선한 것인 줄 안다고 바울은 말했다.(딤전 1:8) 바울은 신자가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고 말한 후에 율법의 적극적인 위치를 말하고 있다.
바울은 율법과 관계가 없는데도 왜 죄를 짓는 자기자신에 대하여 그토록 괴로와 했는가(롬7:24) 구원받은 후에는 율법이 필요없게 되었다면 구원받은 후의 죄는 무엇으로 죄인줄 알 수 있다는 말인가 알 필요도 없는가 율법에 비추어 죄를 짓지 않으려고 할 필요도 없다고 하는 말인가? 율법 폐기론자들(antinominianism)인 구원파의 가르침과는 반대로 사도요한은 계명(율법)들을 지킬 필요성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킬 때에 이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사랑하는 줄을 아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요일 5:2~3)
하나님은 우리를 율법의 정죄와 형벌에서 구원한 것이지 율법의 교훈과 윤리적 규범에서 마저 해방시킨 것이 아니다.
이미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구원파는 그들의 목적 달성을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1972~3년 극동방송 한국어 방송을 담당하다. 전국교회의 빗발치는 항의에 의해 그들의 이단성을 만천하에 드러내자 그들은 1974년 불법적으로 방송국을 탈취하려다. 전원 해고당했고 그들을 비판하던 탁명환 국제종교문제 연구소 소장을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는가 하면 1981년 1월에는 이복칠 씨를 비롯한 일보 교인들이 헌금을 사업에 유용하는 건신찬 씨와 유병언 씨를 비난했을 때 이복칠 씨를 감금 폭행해 5명이 구속되기도 했었다. 최근에는 1968년 부터 1977년까지 권 씨와 유 씨의 측근에서 홍보와 통역을 담당하다. 교리적 갈등으로 이탈해 정상적인 신앙의 관점에서 구원파를 비판해온 본인을 명예훼손으로 몰아 구속시키기까지 했었다. 독자 제위께서 이미 아시는 바와 같이 필자는 1990년 11월 23일부터 12월 7일까지 2주일 동안 구속됐었다.
바울은 “형제가 형제로 더불어 송사할 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고 고린도 교회를 힐책했다.(고전6:6) 그들이 정통교단에 소속된 지도자들을 수시로 고소하여 법정 투쟁을 벌이는 것은 그들이 구원받지 못한 불신자 즉 이방인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를 뒷바침하기라도 하려는 듯 권 씨는 '인류역사와 하나님의 교회' 라는 그의 저서에서 “크리스챤은 세상 윤리와 도덕을 초월한 윤리와 도덕의 기준에서 살아야 한다”(p 162)고 그의 도덕폐기론적이고 율볍폐기론적인 입장을 밝히고 있다. 로마서 7장을 강해하면서 로이드 죤스 목사는 “구원의 최상의, 궁극적 목적은 우리의 성화 곧 우리가 거룩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에 오신 것, 그리고 그가 이곳에 계실 때 하신 모든 것, 그의 죽으심과 장사됨, 부활, 승천, 성령을 보내심은 단 하나의 목표를 지니고 있는데 그것은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는'(엡1:4) 것이다. 이것이 구원의 궁극적인 목적이다”라고 했다.(p 88) 구원파의 교리는 성서에서 말하는 은혜의 복음을 간교하게 혼돈시키는 기독교 이단에 해당하는 것이 분명하다. 로이드 죤스 목사의 말씀을 들어 보자.
크리스챤은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는 말처럼 크게 오해되고 있는 말씀도 드물다. 이 말씀을 크리스챤은 더 이상 율법과 상관이 없다거나 율법에 대해 더 이상 생각할 필요도 없고, 읽을 필요도, 더 이상 관심을 가질 필요도 없다는 의미로 이해하는 이들이 있다. 이것은 심각한 오류가 아닐 수 없다.
우리가 율법에 대해 죽었다는 말은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도덕적인 율법과 그 도덕적 요구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 아니다. 이것은 가장 위험한 도덕률 폐기론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수 있게 하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누구든지 이 계명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마5:17~19)고 말씀하셨다. 크리스챤은 결코 율법에 작별 인사를 해서는 안된다. 우리가 더 이상 구원의 수단으로 율법아래 있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율법을 지키고 존귀히 여겨야 할 것이며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이를 행해야 한다.(로마서 7장 강해 p 27)
권 씨는 “구원받은 신자”는 매일매일 생활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깨끗해지고 거룩해 진다고 말한다. 그리고 유 씨는 성도의 교제 자체가 정상적인 예배라고 억지 주장을 하고 있다.(알파에서 오메가까지 제5권 p 290) 즉 금식이나 기도, 절제, 희생, 봉사같은 것은 필요없고, 오직 말씀과 교제를 통해 깨끗한 생활을 할 수 있다고 이색적인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에 정통교회에서는 초대교회의 전통을 따라 말씀과 교제 이외에도 침묵(묵상), 금식, 기도, 희생, 봉사, 찬양, 예배, 근검 절약 등을 통해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성화의 생활을 추구해야 한다고 가르친다(Dallas Willard, The Spirit of Discipline. Harper & Row, 1989).
후에 더욱 분명히 드러나겠지만 구원파는 이 모든 것을 부인한다. 예수님은 “거짓선지자들을 삼가라...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7:15~20)고 말씀하셨다. 거짓된 교리 다른 교훈은 거짓된 행위와 그릇된 생활을 낳는다. 구원파가 정통인지 이단인지는 그들의 가르침과 생활의 열매에 꼭같이 나타나고 있다.
5) 개인과 교회(성화가 빠진 구원)
우리는 크리스챤의 생활이 중생(칭의)으로 시작해서 두렵고 떨림으로 이루어가는 구원 즉 성화과정을 거쳐 예수님 재림시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화되는 영화의 삼단계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구원의 삼단계가 다 중요하지만 하나님께서 특별히 관심을 갖는 것은 우리의 성장과 성숙 즉 점진적 성화과정이다.(롬8:29; 히12:28; 벧후3:18; 빌2:12). 권 씨도 “구원받은 신자는 매일 매일의 생활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면 깨끗하게 될 수 없다”라고 생활이 변화되어야 할 필요성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구원파 지도자는 신앙생활의 책임을 교회에 전가시킴으로서 사실상 개인적 성화의 필요성을 부정하고 있다. 이들의 이단성은 다음과 같은 주장에서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개인은 신앙생활을 할 수 없다. ”(권 씨 주장)
“개인은 죄사함받은 경험이 있을 뿐 성령이 계신 곳은 교회이다. ”(유 씨 주장)
“하나님의 계획과 선택, 예정은 전적으로 (구원파)교회를 목표로 한 것이지 개인의 구원문제를 목표로 한 것이 아니다. ”(권 씨 주장)
성경은 신앙생활에서 시작과 성장과정과 완성단계가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구원파는 중생(시작)과 영화(완성)를 소속 교인들에게 확신시키면서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 간다(working out)" (빌2:12)는 의미에서의 성장과정은 “성도의 교제 즉 구원파 교회”에서 하는 것이지 개개인 크리스챤이 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권 씨는 “(구원파)교회가 크리스챤의 사생활의 구심점”이라고 주장한다.
후에 교회관에서 더욱 명쾌하게 드러나겠지만 구원파에는 지도자와 그를 중심으로 이뤄져 가는 교회가 중요할 뿐 소속교인 개개인은 거룩한 삶을 추구할 책임이 없다. 다시 말해서 그들의 이단성은 그들의 독특한 구원관 뿐만 아니라 오도된 교회관에서 비롯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침례교, 하나님의 성회, 구세군 등 교회의 역사성을 인정하는 정통교단에서는 성도 각 개인의 책임을 강조한다. 바울 사도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라”(골1:28)고 했으며 기회 있을 때마다. 성도 개개인이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 자기의 은사를 따라 지혜롭게 생각하고 봉사하라고 권면했다(롬12:3~8).
참 기독교 신앙은 개성을 북돋워준다. 이단은 각자의 개성을 약화시키고 개성보다 집단을 강조한다. 구원파 지도자들의 가르침에 의하면, 개인은 신앙생활을 할 수 없고, 성도가 예수 안에 거하는 것, 성령 충만을 받는 것, 성도의 교제, 성령의 기름부으심, 새 계명이 이루어지는 것, 성장하는 것,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 등 신앙생활 일체가 성도의 교제 즉 (구원파)교회를 통해 이루어진다.
필자도 그들의 가르침을 그대로 믿고 가정을 뒤로 하고 그들의 교회를 “삶의 구심점”으로 삼고 온갖 정열을 쏟은 적이 있었다. 72년부터 77년까지 서울에서의 나의 “가정생활과 직장생활”은 “교회생활”을 위해 존재했었다. 그들의 가르침을 따라 세뇌되는 가운데 그렇게 사는 것이 성서적인 생활이라고 확신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성경은 가정과 직장과 교회 내에서의 개인의 생활이 모두 중요하다고 가르친다(엡4~6장). 유 씨는 고린도서, 에베소서, 로마서 등에 나오는 “너희”는 모두 개인이 아닌 교회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해석하며 따라서 성령충만을 받을 책임을 개인이 아닌 “몸”(구원파교회)에 전가시킨다. 그러나 성경의 전체적인 강조점은 그룹이나 집단이 아닌 개인의 책임에 주어지고 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교회생활 분야의 고전으로 일컬어지고 있는 '그리스도의 지체(Body Life)' 의 저자 레이 스테드만(Ray Stedman) 목사는 교회와 개인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크리스챤 각자 속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거하시므로 크리스챤은 자기 안에 살아 계시는 그리스도의 생명과 품성을 드러내야 한다. 교회를 향한 이러한 부르심을 성취할 책임은 모든 참된 크리스챤 각자에게 주어져 있다. 크리스챤 각자가 부르심을 받았고 성령님이 그 안에 내주하고 계시며 이 세상 속에서 그 부르심(소명)을 성취하도록 기대되고 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 전체를 통하여 들려주고 있는 아주 분명한 음성이다. 교회의 증거의 표현은 때에 따라 집단적으로 나타날 수도 있으나 그렇게 할 책임은 언제나 개인에게 있는 것이다.
4. 기도관 및 예배관
우리 기독교는 기도로 출발해서 기도로 진행되고 기도로 막을 내리는 종교라고 할 수 있다. 기도는 사랑하는 두 인격, 즉 창조주 하나님과 신자 사이에 오가는 대화이다. 예수님의 생애와 사역이 이를 보여준다. 예수님은 침례(세례)받으실 때 기도하시니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렸다고(눅3)했으며, 40일 동안 광야에서 기도하심으로 공생애의 첫출발을 하셨고 최후 십자가에서 기도하심으로 막을 내리셨다. 또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기 전에 몸소 기도하심으로 모범을 보이셨다(눅6:12; 마14:23; 막1:35). 기도는 영혼의 호흡이며 우리 신앙생활에 필수적이고 기본적인 요소로 간주되고 있다. 믿음과 기도를 통하지 않고 하나님과 가까워질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구원파 지도자들은 기도에 대해 어떻게 가르치는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구원파는 하나님관, 기독론, 인간론, 구원론 등 모든 분야에서 성경과 정통적인 기독교의 범주를 이탈하고 있다. 그러나 구원파의 이단성(heretical nature)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곳은 그들의 기도관과 예배관이라 할 것이다.
1) 기도관
우선 권 씨와 유 씨의 기도에 대한 견해를 들어보자 성경은 호흡이 있는 자마다.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말한다. 그러나 권 씨는 “거듭나기 전에 하는 기도는 새벽기도나 철야기도, 금식기도, 통성기도 등 어떤 기도든지 간에 인간의 종교적 본능의 발산에 불과한 것으로 하나님과 관계가 없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한 걸음 나아가 그는 “새벽기도는 옛날부터 한국사람들이 젖어있던 미신적인 종교성의 발로라 아니할 수 없다”고 강변한다.
권 씨의 편견에 의하면 “기독교 역사상 신령한 생활을 한 분 중에 새벽기도를 해서 그렇게 된 분들의 예가 다른 나라에는 없다. 인간의 선행도 신비적인 욕심도 전부가 하나님 앞에서는 가증한 것이며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이다. ”
유 씨는 “기도란 마음에 있는 것을 원하는 것”이라 정의하며 “진정한 기도란 성도의 교제로부터 시작된다”고 가르친다. “기도를 해라 해서는 안된다. 새벽기도는 필요없고 시간을 내어 기도하는 것도 필요없다. ” 다시 말해 그들은 형식적인 기도를 일체 배격한다. 권 씨는 또 “기도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고 교회안에 일을 맡은 사람이 하는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기도해야 한다는 법은 없다”고 말해 새로운 교리를 만들어 냈다. 그들의 주장은 정상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크리스챤이라면 쉽게 분별할 수 있는 독선과 궤변을 내포하고 있다.
기도에 대한 구원파의 주장을 종합해 보면 죄 문제를 해결한 거듭난 자만이 기도할 수 있으며 기도는 형식과 관계없이 마음속으로 하는 것이며 기도는 개개인이 하는 것이 아니고 교회를 대표해서 일을 맡은 자들만이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육신의 필요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필요없고 성도의 교제가 기도를 대신한다는 논리이다.
기도에 대한 구원파 측의 주장은 한국의 기존교회교파들의 기복적이고 율법적인 기도 성향에 대한 반작용으로 나온 것이다. 그러나 성서의 가르침에 비추어 볼 때 구원파의 가르침은 엄청난 무지를 드러내고 있으며 너무나 많은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
구원파에서는 구약의 사무엘과 모세의 예를 들어 일을 맡은 자만 기도할 수 있다고 했는데 이는 권신찬의 왜곡된 교회관에서 나온 발상이다. 반면에 정통교회에서는 신구약 여러 인물과 예수님의 모범과 가르침을 따라 크리스챤 각자가 무시로 성령안에서 깨어 기도할 것을 가르치고 있다. 구원파의 권신찬은 기도의 모든 형식이 이교도의 제사의식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했는데 머리를 숙이고 무릎을 꿇고 서서 또는 엎드리어 기도한 것이 모두 다 이교적인 행습이었는지 자문해 보아야 할 것이다. 정통교단에서는 구약의 성도들과 예수님, 바울, 그리고 신약교회의 모범을 따라 여러 모양과 형태로 기도에 힘쓸 것을 가르치고 있다. 미 남침례회 소속의 빌리 그래함 목사는 크리스챤이 영적인 건강을 위하여 지켜야 할 규칙을 열거하는 가운데 두번째로 기도의 비밀을 배우라고 권면하고 있다.
교회나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업적을 남기고 간 사람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기도의 사람들이었다... 너무나 바빠서 기도할 시간이 없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기도하지 않는 크리스챤은 무능력한 크리스챤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많은 시간을 기도로 보내셨다. 그는 때때로 산 위에 홀로 오르셔서 하나님 아버지와 영교하는 시간을 가지셨다. 주님께서 기도하셨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 기도해야 하겠는가?(하나님과의 평화, p 231)
구원파는 말라기서 3장 16절을 근거로 참다운 기도는 양심의 내적인 기도이며 “신도들의 교제가 바로 기도”라는 정의를 유도해 내고 있다. 소속 교인들끼리 모여 “모임의 일 즉 사업을 논의하는 것”이 교제이며 기도라는 논리이다. 그들의 지도자가 그렇게 깨달았으면 이것이 곧 진리가 된다. 그러나 이는 교회사상에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궤변이며 억측이다. 신자들간의 교제(사귐)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전혀 다른 차원의 활동인 것이다.
이들은 형식적으로 교회집회 때 기도할 경우가 있는데 지도자들은 언제나 “주님”께 기도한다. 성자와 성령을 거론할 때가 있지만 이들은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삼위일체의 교리를 부인하면 이단”이라 자인하면서도 예수님을 교회와 동일시하고 하나님 아버지를 기도대상에서 배제함으로 또 성자와 성령을 혼용함으로(유 씨는 교회를 성령의 몸이라 부른 적이 있다)사실상 삼위 하나님을 부인하고 있다.
2) 예배관
예배는 인간의 최상의 목표이다. 인간은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지음을 받았다. 죄는 예배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롬4:28) 우리의 죄문제는 해결되고 처리되었다. 이제 우리는 인간에게 알려진 축복 중 최대의 특권을 누리게 되었다. 예배를 대신하거나 대체시킬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예배는 하나님의 백성이 하늘과 땅에서 누리는 최상의 특권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을 인하여(시99:5; 96:8,9) 그리고 그분이 우리를 위하여 해주신 모든 일 때문에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한다.(계5:11~14).
그러나 구원파 교인들은 예수님을 마음에 모심으로 하나님과 인격적 관계를 맺음으로 신앙생활을 시작하지 않고 예수님이 이루어 놓은 영원한 구속을 깨달음으로 이른바 교회생활을 시작하기 때문에 일반 정통교회에서 드리는 예배를 드리지 않는다. 신앙생활의 출발점이 우리와 전혀 다르기 때문에 그들의 모임에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그의 존전에서 아버지 하나님을 앙모하고 경외심과 사랑을 표현한다는 의미의 예배가 빠져 있다. 그들은 자기들이 받았다고 착각하고 있는 구원을 노래하고 간증하고 지도자의 설교를 들으며 전도하고 교제하기 위해 모일 뿐 예배드리기 위해 모이지는 않는다.
구원파 지도자들의 예배에 대한 가르침을 직접 들어보자. 그들의 저술에 나타나 있는 예배관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형식을 갖춘 예배는 필요없다. “예배는 형식을 갖춘 의식이 아니라 영의 동작이다. 그러므로 예배하는 데 있어서 어떤 형식을 갖추느냐 하는 문제는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다. ”
예배는 성도간의 교제이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사는 관념도, 습관도, 의식도 아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는 성도의 생활, 성도들의 정상적인 교통이다. ”인간이 만든 예배당의 단상이나 가정제단 같은 것은 필요없다. “제단은 인간이 만들 수 없고 인간 자체의 활동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영원히 변챦는 완전한 제단과 제사는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다 이루어졌다. 어느 장소에서나 집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신 심령은 바로 제단이며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제물이다. ”
크리스챤은 자주 모여 교제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영이시라는 구원파의 주장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그러나 그분은 인격을 지니신 영적 존재자(Personal Spirit)로서 지적 감정적 자기 결정적 도덕적 존재자(멀린스, 조직신학원론 p 268)이시다.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남 사람은 누구나 구주와 주님이 되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경배(예배)하기 마련이다. 예배로 이어지지 않는 구원은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이 아니다.
구원파는 기존교회를 부정하면서도 한국교회가 초교파적으로 편찬한 찬송가를 사용하고 있다. 이들은 모일 때마다. 찬송가를 여러 곡 부르고 보통 비디오로 녹화된 권 씨의 설교를 듣는다. 그런데 특기할 것은 그들이 부르는 찬송이 그들의 교리의 강조점을 따라 성경, 구원, 확신, 교제, 교회, 재림에 관계되는 찬송만을 골라 부른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찬양과 경배, 기도, 헌신, 축도에 관한 찬송을 부르지 않는다. 구원파의 왜곡된 기도 및 예배관을 이해한다면 이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한마디로 말해, 구원파 교회는 구원과 죄사함을 노래할 뿐 구원해 주신 주님을 찬양하지 않는다. 성경은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골3:16), 항상 찬양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릴 것(히13:15)을 권면하고 있다. 로이드 죤스(Lloyd Jones) 목사님은 이단의 특징을 말씀하시는 중에 “이단은 믿음과 구원을 노래하나 참 믿음은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간파한 적이 있다. 구원파는 구원을 찬송하나 하나님을 찬양하지는 않는다.
5. 교회관
교회에 대한 가르침은 구원파의 이단성을 보여주는 여러 교리 가운데 핵심적인 부분이라 할 수 있다. 권 씨와 유 씨는 교회는 건물이 아니며 구원받은 성도들의 교제의 집합체라고 말한다(이것은 성경의 가르침과 일치되는 주장이다). “이제는 구원받은 신자안에 성령이 계셔서 교회(건물이 아닌) 곧 하나님의 집을 이루고 있다. 오늘날 교회시대에는 하나님이 교회안에 계신다. 우리가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 안에 사는 것 그것이 곧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이다. ”
이러한 사상 때문에 그들은 개인은 신앙생활을 할 수 없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이 이루어지는 것, 성장하는 것 등 신앙생활 일체가 (구원파)교회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가르친다.
이들의 이단성은 권 씨의 다음과 같은 발언에서 더욱 분명하게 나타난다.
기독교 역사가 내려 오면서 많은 기독교 학자와 신앙인들이 지은 책을 읽어 보았다. 그 책을 읽어 보면 오늘날 우리들이 성경 안에서 발견해내고 깨달아지는 근본적인 교회의 모습 참교회의 모습을 아직 아무도 정립해 놓은 글이 없다. 교회의 영광스런 모습에 대해 논한 것이 없다... 교회의 참 뜻은 성경 속에 특히 비밀히 감추어져 있는 진리로서 기독교 2천년 역사상 이 진리가 나타난 것은 극히 드문 일로 교회가 교회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 채 지내온 것이다.
이들은 이와 같은 독선적인 편견 때문에 성령의 역사가 예루살렘에서 출발하여 세계를 일주한 후 현재 한국에 머무르고 있다고 믿으며 그 성령은 오직 구원파 교회에만 집중적으로 역사하고 있다는 아집에 빠져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은 어느 한곳에만 국지적으로 역사하는 분이 아니고 전세계에 온누리에 두루 운행하시며 역사하시는 영이시다.
구원파 지도자들은 역사적인 그리스도의 교회와 기존교파 교회를 전면 부정하며 자기네 집단만이 영광스런 교회이며 하나님이 인정하는 참 교회라고 가르친다.
구원파에는 교회직이나 운영체제가 중앙집권적으로 되어 있으며 지도자의 언행을 규제할 가능성이 있는 장로나 집사직분을 세우지 않으며 오직 한두명의 지도자 밑에 많은 평신도(형제,자매)가 있을 뿐이다. 구원파의 역사적 배경에서 이미 언급한대로 이 두명의 지도자란 권신찬 씨와 그의 사위 유병언 씨를 일컫는 말이다. 보통 사람들은 연령이 위인 권 씨를 이 집단의 대표자로 인식하고 있지만 권 씨 자신은 그의 사위 유 씨를 한국의 유일한 영적 권위자로 확신하고 있다는 사실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권 씨는 자신이 소속해 있다가 축출당한 바 있는 대한 예수교 장로회 총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았기 때문에 자신은 사실상 목사가 아니라고 시인하면서도 자신을 복음 침례회 목사라고 소개하는 것은 흥미있는 일이다. 권 씨는 구원파 내에서도 새로 목사안수를 받은 적이 없다).
일찍이 “아무도 이 집단을 이단이라 부르지 못한다”라는 논문을 발표한 바 있는 (1973년 당시 TEAM 선교부 소속 선교사였던) 니일 필립핀(Neil Filipin) 목사는 다음과 같이 구원파의 조직을 묘사하였다.
구원파의 조직은 한 사람(현재는 유병언 사장)이 머리 역할을 하고 다른 주요 멤버들이 통제위원회로 봉사하도록 되어 있다. 그리스도가 몸의 머리가 되신다고 말하기는 하지만 그는 서울에 있는 “사무국”을 통해 지시하고 인도하며 방향을 제시한다.
이들의 교회에 대한 견해는 교주의 새로운 깨달음에 따라 새로운 뜻을 지니게 되었다. 구원파는 극동방송에서 물러난 후 1974년부터 대외 무역사업을 구심점으로 교회를 운영해 왔는데 월간 '현대종교' (1983 3)는 “유병언 사장이 주도하는 사업(삼우트레이딩)이 곧 교회이며 하나님의 일”이라고 한 그들의 가르침을 보도한 바 있다. 다음에 기사 일부를 참고로 인용한다.
유사장은 사업을 시작한 후 오늘까지 사업경영의 무리로 인하여 발생하는 적자요인과 무리한 사업확장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필요한 자금을 교회의 현금에 의존해 왔다. 1975년경부터 지방교회의 십일조는 서울로 끌어 올렸고 대전 무화동 꽃동네 모금운동, 병원짓기 모금운동, 수양관 건립모금운동 등 각종 돈 끌어 모으는 운동을 전개하여 왔다. 유사장이 여러 차례에 걸쳐 여러 명목으로 엄청난 액수의 돈을 성도들을 기만하여 끌어모아 거의 사업에 전용하였지만 그 내역을 밝힐 방도는 없는 것이다11
권 씨는 초창기로부터 사위 유 씨를 몸의 “입”, 성령에 의해 특별히 세우심을 받은 “기름부음을 받는 자”로 추대하여 왔다. 권 씨의 이러한 사상에 힘입어 일부 신도들은 1982년 하반기부터 유사장을 “예수”“메시아”“살아 있는 성령” 등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필자는 그를 우상시하며 추앙하고 따랐던 1977년까지 그를 “현대의 사도 바울”이라 믿고 외국인들에게 선전했었다. 예를 들어 필자는 1976년 유 씨를 대동하고 유럽여행을 하는 동안 서독의 기독실업인회와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에 있는 감람산교회에 그를 소개하면서 유 씨를 20세기의 대표적 지도자로 부각시킨 적이 있다. 물론 이것은 영적으로 눈이 먼 상태에 있던 통역자(본인)가 내린 그릇된 판단이었다.
이들의 특정인 신격화 운동은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시고 각 개교회가 독립적으로 책임있게 주님을 예배하며 순종한다는 미 남침례회를 비롯한 주요 교단의 입장과 너무나 극적인 대조를 보이고 있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구원파의 교회에 대한 가르침이 교회의 성격, 구성, 활동, 의식, 목적 등 모든 면에서 신약성서의 가르침과 역사적인 교회의 규범을 완전히 이탈하고 있다는 것이다.
6. 종말관
종말 즉 마지막 일들에 대한 가르침은 사망, 사망 후의 중간상태, 그리스도의 재림, 천년왕국, 부활, 심판, 그리고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의 종국적 상태 등으로 나누어서 고찰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그리스도의 재림과 천년왕국에 관계된 가르침만을 중점적으로 다루기로 한다.
첫째, 구원파에서는 “이 세상 마지막 때에는 칠년 대환란이 있고 환란 전에 주님의 공중재림이 있으며 이때 자던 성도들은 그리스도와 같은 영광의 몸의 형체로 부활하고 그후 살아남은 크리스챤들도 변화함을 입어 함께 공중에서 주님의 영 을 받게 된다”고 가르치고 있다. (영혼을 묶는 사슬, pp 242~243).
둘째, 구원파에서는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이 새로운 독립국가로 출범한 것, 67년 6일 전쟁으로 예루살렘을 탈환한 것, 세계정부의 실현가능성과 적그리스도 666의 출현징조 등 성경의 예언이 성취되어 가는 것을 볼 때 그리스도의 재림이 1980년대 안에 있을 것이라고 가르친다.
유병언과 권신찬은 그들의 설교집에서 이스라엘 국가의 독립 및 회복 666, EEC(유럽 경제 공동체) 등을 수시로 언급하면서 구약의 에스겔, 예레미야, 아모스, 스가랴, 이사야, 다니엘, 신약의 공관복음 가운데 마지막 때에 관한 부분, 데살로니가 전후서, 요한계시록 등을 인용하면서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박했음을 강조하고 있다.
권신찬은 그의 설교집에서 성령님이 구원파 형성초기에 유병언에 기름을 부어 사역자로 세우면서부터 “이스라엘 민족의 회복”이 그들의 중심 메시지가 되었다고 술회하고 있다.(인류역사와 하나님의 교회 p 310)
그러한 경험이 있은 후부터는 그 형제(유병헌을 말함)에게 그렇게 어렵던 성경이 풀리기 시작했고... 입을 열기만 하면 사람들이 진리를 깨닫는 것이었다. 또 하나의 커다란 변화는 그때까지만 해도 이스라엘 민족의 회복에 대해 언급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이러한 경험 후에 이스라엘 민족의 회복이 곧 성경을 성취시키는 하나님의 계획이라고 알려지기 시작함으로써 그것이 이 복음운동 (구원파)의 중심 메시지가 된 것이다.
7년 대환란이 있기 전 땅에 있는 그리스도의 몸(과거의 성도들을 제외하면 구원파 소속 교인들로 이루어진 공동체를 지칭함)이 들림을 받게 된다는 주장은 구원파에서 일류사, 중동문화사, 우정출판사, 도서출판 선구자, 평신도 복음선교회, 신아문화사 등 여러 출판사의 이름으로 1977년부터 출발한 '임박한 대환란'(상하권), '세계독재자와 666' '세계정부와 666' '카운트 다운 예수 재림과 휴거' '인류 파멸의 징조와 중동사태' '한계에 도달한 인류 역사' '이스라엘의 기적' 등 책제목에서도 잘 반영되고 있다.
셋째, 구원파에서는 그리스도의 지상재림(스14:4~5)으로 환란은 끝나게 되며 그리스도가 다스리시는 천년왕국이 건설될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들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이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롬11:25)이지만 교회가 들림을 받으면 이스라엘 즉 이스라엘 민족이 국가적으로 예수를 믿게 되리라고 가르친다. (서로 사랑하라 p 123)
넷째, 구원파 지도자들은 “이 천국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24:14)는 말씀을 자주 인용하면서 이 말씀이 성취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박했다고 가르친다.
이제 복음은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었으며 땅끝까지 전파되었다... 기독교는 전세계 모든 민족들에게 고루 알려져 있다(영혼을 묶는 사슬 p 200).
재림은 성경에서 중요하게 취급하고 있는 핵심교리 가운데 하나이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구약에서 선지자들의 주제가 되고 있으며 신약에서만 300회 이상 언급되어 있다. 매 25절마다 한번씩 재림이 거론되고 있는 셈이다. 마태 24~25장 마가 13장, 누가 21장은 장 전체를 재림론에 할애하고 있고 데살로니가 전후서와 계시록은 재림을 주요 주제로 다루고 있다.
재림에 대한 가르침은 성경의 열쇠로서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인식이 없이 우리는 그리스도의 왕의 직분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며 구원의 미래적인 측면이나 자연 및 동물세계의 회복에 대한 예언 등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재림은 또한 많은 편의 열쇠가 된다(시2, 22, 24, 45, 72, 89, 110장 등). 우리는 신약의 많은 귀절(마16:27; 요14:3; 살전4:13~18; 약 5:8; 히10:37; 계1:7; 22:12, 20)로부터 재림을 대비하라는 경고를 받으며 소망 중에 위로를 받으며 사별당해 슬퍼하는 자를 위로하도록 권고를 받으며 고난을 견디어 내라는 당부를 받으며 그리스도를 사모하며 경건한 삶을 사는 신자들이 축복과 상을 받으리라는 확신도 받는다.
구원파에서는 그리스도의 재림과 관련하여 이스라엘의 회복 및 시사적인 사태발전에 집중적인 관심을 쏟아 재림의 시기에 관한 하나님의 비밀을 캐는데 주력함으로 전도대상자와 소속교인들에게 절박한 위기의식과 공포감을 심어주고 있다. 구원파에서는 성경을 주로 예언서로 취급한다. 그래서 이들은 성경을 신문(新聞), 세상 신문을 구문(舊聞)이라 부르면서 1948년 5월 14일 이스라엘 독립이후의 중동사태와 세계적인 위기에 대한 신문이나 잡지 기사를 스크랩 북으로 만들어 이를 전도용 교재로 사용하고 있다. “임박한 대환란”을 강조하기 위해 만들어진 교인들의 스크랩 북은 성경에 버금가는 권위를 지니는 것으로 구원파 소속 교인들이 제작한 스크랩 북에 수록된 사진과 기사를 보는 전도대상자가 강한 공포감을 느끼며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존재를 시인하게 되면 구원파는 인간의 전적 타락과 죄인됨을 가르치고 그들의 구원공식에 따라 “복음을 깨닫게 한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구원을 받았다고 인정되는 교인들은 마지막 때에 한국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그리스도의 몸”에 지체가 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 재림시 공중으로 휴거된다고 가르친다. 따라서 구원파에서는 그리스도의 재림과 천년왕국에 대한 가르침이 소속교인들에게 선민의식과 집단우월감 및 안도감을 심어주는 심리적 진장제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크리스챤이 그리스도의 초림 및 재림에 대한 신구약 예언과 그 성취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성경이 마치 깨달음과 종말에 대한 교과서나 되는 것처럼 예언에 심취하는 것은 성경의 전체적인 가르침에 어긋나는 태도로서 크리스챤은 마땅히 “전체적인 하나님의 뜻”(the Whole Counsel of God)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로이드 죤스는 구원파와 같은 집단의 형태를 지적하면서 균형있는 신앙생활의 필요성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예언적 교훈에 대한 지나친 관심처럼 위험한 것은 없다. 현재의 세계정세에 있어서는 특히 그렇다. 어떤 사람들은 차츰 이 관심에 마음을 빼앗겨 정복되는 것 같다. 그리고 그들은 예언 이외에는 아무 것도 생각지 않고 설교도 하지 않는다. 이 예언적 교훈에 대한 지나친 몰두 이상으로 영혼에 대해 위험한 것은 없다. 러시아, 이집트, 이스라엘 및 그 밖의 나라들을 생각하면서 그리고 에스겔서 37, 38장이나 다니엘서 7~12장 그 밖의 예언적 관점에서 여러 시기나 경우를 계산하는 데 모든 시간을 소비하며 전생애를 투입하는 일은 쉬울 것이다. 한편 영적 의미에서는 당신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에 대해 점점 무관심하고 등한히 될 수 있다. 물론 예언적 교훈은 성경의 중요한 일부이고 크게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장래 세계에서 일어날 사건들에 너무 관심을 가지는 나머지 우리가 지금 살아야 하는 생애가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음을 자각해야 할 것이다. 여러가지 점에서 우리들의 일차적인 위험은 균형이나 조화의 감각을 상실하는 데 있는 것이다.
정통교단에서도 예수의 재림이 임박했음을 가르치나 재림연대와 날짜를 거론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재림에 대한 소망은 정통 기독교 교인들에게 “개인적인 봉사, 헌금, 선교적 열심, 현명한 조언”등으로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이행하도록 하는 자극제가 되고 있다. 사도 베드로는 주의 재림의 약속을 상기시키면서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벧후3:11, 12)고 권면하고 있다. 구원파에서는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신자 개인이 상을 받는 것이 아니고 교회가 상을 받는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교회(포도나무에 비유함)에 붙어있기만 하면 들림을 받는다고 가르친다. 한편 정통교회에서는 재림의 복된 소망이 개인의 거룩한 삶과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적 봉사를 자극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가르친다.
정통교단 안에도 전기천년왕국론자들이 상당수 섞여있기는 하나 그들은 구원파와 같이 “임박한 대환란”만을 설교 주제로 다루지는 않는다. 미 남침례회의 대표적인 신학자 멀린스(E. Y. Mullins)는 전기천년왕국론이 전 신약성경을 통해 가장 상징적이고 시적인 문헌에 속하는 계시록의 한 부분에 주로 근거하고 있다는 점, 부활한 성도가 정상적인 인간의 방법으로 태어나서 이 세상 사람들과 함께 천년동안 같이 살 수 있다는 주장이 모순을 내포한다는 점, 복음이 하나의 증거로 전파되어져야 한다고 주장함으로 피상적인 활동에 그친다는 점, 재림시까지 세상이 악화되어갈 것이라는 신념을 동반함으로 비관주의를 지향하게 된다는 점, 따라서 인간 편에서의 최고의 노력을 유발시키지 못한다는 점 등을 지적하고 있다. 한편 그는 구원파의 분리주의와 당을 짓는 태도 및 광신주의적 경향을 지적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전기천년왕국론은 부당하게 하나의 진리만을 강조하는 나머지 불가피하게 기타의 다른 진리를 강조하지 아니하며 따라서 크리스챤들 가운데서 분리적인 문제를 야기시키고 때로는 광신주의에 흐르는 경향이 있다.
11천년왕국이라는 주제를 놓고 크리스챤들간에 몇가지 상반된 입장과 주장이 있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마태복음에서 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신약성경 전체를 통해 미래의 환상에서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는 단 하나의 사건이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재림이다. 기타 모든 것은 이 사건에 종속되고 예속되어 있는 것이다. 역사적인 사건들 속에서 생기는 일이 많이 있지만 하나의 위대한 일이 있다. 많은 방해와 고난도 있지만 영광스럽고 갑작스런 승리도 있다. 적어도 하나의 부활, 하나의 심판, 하나의 영원한 왕국에 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재림하시기 전에 이 세상에 완전히 경건한 일천년 동안의 기간이 반드시 있을 것이라는 확실한 주장도 없다. 또 최후 심판 이전에 그리스도께서 부활한 성도들과 함께 일천년 동안 이 지상에서 문자 그대로 다스릴 것이란 확실한 보증도 없다.
Ⅴ. 맺음말
구원파의 이단성은 그들의 성서관, 하나님관, 인간, 구원, 기도와 예배, 교회 및 종말에 대한 가르침(교리)에서 고루 나타나고 있다.
구원파 지도자 권신찬씨와 유병언씨는 좋은 뜻으로 모임을 시작했는지 모르나 그들의 성서해석이 진리의 성령에 인도함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조직신학과 교회사를 무시하는 그들은 성경을 우화적으로, 임의대로 영해한다.
그들은 하나님이 영이심을 지나치게 강조하는데 비해 하나님의 인격성은 거의 언급치 않는다. 하나님의 초월성은 강조하나 그의 임재성은 무시하고 있다(그들의 하나님은 구원파 교회안에는 충만하게 거하시지만 개인에게 거하지 않으며 개인을 지키시거나 인도하는 분은 아니다). 따라서 구원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의 효능을 강조하고 그리스도의 신성은 강조하나 그의 인성은 격하되거나 소홀히 되고 있다.
구원파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이루어 놓으신 영원한 속죄를 깨달아 종교와 율법, 양심의 죄책감에서 해방되어 완전한 해방감을 누리는 것이 구원이라고 가르친다. 피동적 깨달음이 강조되고 있으나 그들은 정통교회처럼 구원을 “의지적인 회개와 인격적 신뢰(믿음)”를 통해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으로 이해하지 않기 때문에 개인적인 순종의 필요성과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을 섬기고 헌신하는 것에 대해 가르치지 않는다.
구원파의 구원은 양심으로 이미 이루어 놓은 속죄를 깨닫는 것이고 성서에서 말하는 구원은 우리의 전인격(지, 정, 의)이 포함된 회개와 믿음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사건이다. 성서에서 말하는 구원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며 대면이요 관계이다.
구원파는 자기네 교회를 통해서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다고 믿기 때문에 교회(교제)의 교리를 통하여 성경을 해석한다. 그래서 성도들의 교제, 즉 사업을 논의하는 것이 기도이며 예배라고 가르침으로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 즉 기도와 예배를 부인하고 있다.
전천년왕국설을 신봉하는 그들은 칠년 대환란 전에 교회 (구원파)가 휴거된다고 믿는다. 그들은 “우리 생전에 세상의 종말이 온다. 구원받은 교인들은 한데 모여 살아야 한다. 떨어져 있으면 휴거받지 못한다. 모임에 붙어 있는 자만 들림받는다”고 가르쳐 교인들을 집단생활로 유도하고 막대한 헌금을 저들이 운영하는 (주)세모 및 삼우트레이딩에 투자하게 한다. 전천년왕국설 환란전휴거설을 믿기 때문에 이단이 아니라 그들의 말세론을 가르치는 동기가 하나님의 말씀에서 이탈되어 있다는 데 문제성이 있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벧후3:11, 12). 우리가 경건함과 깨끗함으로 주님을 맞을 준비를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그런데 이단들의 강조점은 엉뚱한 데 주어지고 있다. 666, 적그리스도의 인을 받지 않으려면 돈을 바쳐 교회가 자급자족할 수 있어야 한다는 희한한 성경해석이다.
사도 베드로는 교회역사에 거짓 선생들이 계속 나타나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일 것이라고 경고하였다(벧후2). 하롤드 피켓(Harold Fickett) 목사는 베드로 후서 2장에 근거해 “거짓 선생은 대상자에 접근하는 방법이 사특하고 간교하며 호색적인 성향을 나타내며 탐심으로 금품을 착취하며 은혜로 구원받았다는 미명하에 율법의 권위를 무시하며 당돌하고 고집이 세며 메시지가 일관성이 없고 내용이 잡히지 않으며 사기성(이중성)이 있고 진실성이 없다”고 간파하였다. 이중 어떤 특징이 구원파 지도자들에게 적용되는지는 독자 제위께서 더 잘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구원파의 가르침은 1) 지금은 복음시대이므로 율법이 필요없다 2) 육은 더럽고 영만이 선하다 3) 크리스챤은 하나님의 은혜로 보호되기 때문에 육신적으로 어떻게 살든 구원에는 영향이 없다고 가르치던 니골라당(계2:6, 15)과 흡사하다 하겠다.
구원파는 초대교회를 어지럽히던 율법(도덕률)폐기론과 영지주의 사상이 새로운 가면을 쓰고 현대판 이단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봄이 좋을 것이다.
1. 구원관에 나타난 이단성
최근 들어서는 구원파 교인들 중에 10단계 질문서라는 것을 사용하는 자들을 본 일이 없다. 이 10단계 질문서를 비록 지금은 사용하고 있지 않더라도 그 질문 속에 구원 문제에 대해 저들이 주장하고 싶은 모든 내용과 기성교인들을 미혹할 수 있는 함정의 핵심이 다 숨어 있다. 그 질문은 이런 것들이다.
첫 번째 질문: 선생님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것을 확실히 알고 믿습니까?
두 번째 질문: 선생님은 거듭나셨습니까?
세 번째 질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것을 확신하십니까?
다섯 번째 질문: 의인입니까, 죄인입니까?
여섯 번째 질문: 모든 죄가 용서되었습니까?
일곱 번째 질문: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생활이 아닙니까?
여덟 번째 질문: 구원받은 것이 확신되어집니까?
아홉 번째 질문: 재림주를 영접할 준비가 되어있습니까?
열번째 질문: 구원의 근거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렇다면 이 점에 대한 구원파의 어떤 주장이 성경과 다른가?
(1) 회개의 개념이 다르다.
모든 이단들이 정통교회의 약점을 찾아 공격하고, 기성교인들의 체계나 확신을 뒤흔들어 자기들만의 구원을 주장하는 것처럼 구원파는 이 회개문제를 그렇게 사용하는 것이다. 즉 기성교인들이 회개하는 모습을 공격하기 위하여 새벽마다 울고불고하는 것이 회개가 아니라는 것이요, 또한 회개란 단어를 구원받은 후에 죄를 자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데는 적용시키지 않을 뿐만 아니라, 구원받은 자는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 논리적 근거는 이 것이다. 회개란 '돌이킨다'는 말로써 세상에서 하나님께로 한 번 돌이켰기 때문에 더 이상 돌이킬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다시 설명하면 이런 말이다. 회개란 오직 구원을 위해 돌이키는 행위로써 우리의 구원의 확신은 하나님께서 현재, 미래, 과거의 모든 죄를 다 사해 주셨다는 것을 받아들임으로만 가능한데 이미 사해준 죄를 또 다시 사해 달라고 울고불고 회개할 필요가 없으며, 그런 점에서 회개한다는 것은 사죄의 확신이 없는 증거가 된다는 것이요, 결국 울고불고 회개하는 자들은 구원받지 못한 지옥의 자식이라고 단정해 버리는 것이다. 또한 사람들이 자기의 죄를 고백할 때 죄인임을 고백하고 회개하지 않기 때문에 백 날을 울고불고 회개해도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정죄해버리는 것이 구원파이다.
*비판해 보자.
① 구원을 위해 필요한 회개라 구체적 죄의 고백이 없어도 죄인인 것을 고백하고, 그리스도께 돌이키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본다. 그 실례가 누가복음 23장 강도의 구원이다. 물론 죄인이 되었기에 죄를 짓게된 것이요, 죄는 보고, 죄는 깨달으며, 죄는 고백하나 죄인임을 깨닫고 죄인임을 고백하지 못하면 안 된다. 우리는 원죄를 가지고 태어날 때부터 죄인으로 태어났기에 죄를 짓는다. 그러나 인류에게 죄가 들어온 것은 죄를 지었기에 죄인이 된 것이다. 더욱이 구체적인 죄에 대한 참회하는 마음과 통회자복하는 마음없이 어떻게 죄인임을 알게 되는가? 죄에 대한 의식이 없이는 죄인에 대한 의식은 전혀 불가능한 것이다. 죄를 범하지 않는 죄인도 있는가? 없다. 구원파의 주장은 죄와 죄인의 관계를 잘 모르고 행하는 오직 기성교인을 미혹하기 위한 술책에 불과하다.
② 회개에는 지, 정, 의의 인격적인 요소가 다 포함된다. 죄에 대한 바른 깨달음이 있을 때 통회자복하게 되고, 눈물을 흘리게 되고, 그러므로 하나님께 돌이키게 되는 것이 아닌가? 구원파의 사람들은 회개란, "돌이키는 것이다."라는 말만 할 뿐이며, 구체적인 회개의 행위가 무엇인지 대답하는 경우를 본 일이 없으며, 오직 기성교회의 회개의 자세를 부정하려는 데에만 일치점이 있었다.
물론 통회자복하고 눈물을 흘린 그 행위가 죄를 씻는 것은 결코 아니다. 회개를 하면 회개의 행위가 죄를 씻는가? 아니다. 그리스도의 긍휼과 십자가의 보혈의 능력이 죄를 씻고, 죄를 사하고, 죄인을 용서하고, 구원하시는 것이다. 단지 회개란 죄 때문에 죽어버린 인간들이 구원받을 수 있도록 하나님이 만드신 사랑의 법칙일 뿐이다. 그러니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는 행위를 공격할 것이 아니라, 회개에 대한 성경적인 바른 깨달음이 없는 자기 연민의식의 눈물과 슬픔을 회개로 착각하는 교인들을 동정하고 바르게 가르쳐야 할뿐이다.
③ 회개는 한 번만 하는 것으로 회개를 거듭하는 것은 구원이 없는 증거로 보는 점이 비성경적이다. 구원을 위한 회개와 성화를 위한 회개에 대하여는 별개로 취급하겠다. 일단 구원을 위한 단회적 회개의 면만을 살펴보자. 하나님께서는 불신자가 예수를 믿고, 구원 받기를 원하는 간절한 마음만큼 구원받은 성도가 구원의 터에 머무르지 않고 성장하기를 똑같이 바라고 계신다. 그런 점에서 성장을 촉구하며 회개의 터(구원을 위한)를 닦지 말고 완전한 데 나아가라고 촉구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 나아갈지니라"(히 6:1-2). 원리적으로 볼 때 틀림없이 구원의 터를 두 번 닦을 수 없고, 구원을 위한 회개를 두 번 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구원파의 잘못은 구원을 위한 회개를 두 번 할 필요가 없다는 것과 연약한 믿음의 사람들이 여러 번 할 수 있다는 성도의 약점을 혼돈하고 있다. 성경 어디에도 그런 의미로 믿음이 약한 자들을 정죄한 곳이 있는가? 심지어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예수는 믿고 구원은 받았으나 아직 젖밖에 못먹는 어리아이를 가르쳐 육신에 속한 자(σαρκικοs)라고 했는데 구원파의 입장에서 보면 그들도 지옥의 자녀가 되지 않겠는가? (고전 3:1)
④ 구원파는 구원을 위한 회개와 성화를 위한 회개를 혼돈하고 있다. 그들은 구원을 위한 회개가 단회적임을 밝혔다. 그러나 성화를 위한 회개는 반복적이다. 이 말은 성화를 위한 회개와 구원을 위한 회개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말이 아니다. 회개 자체는 둘다 단회적이다. 용서를 구하고, 용서를 받는 사건 자체는 단회적이다. 그러기에 성경은 회개하라는 말을 제 1 단순과거형태로 나타내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이 같은 죄를 계속 범한다는 점에서 성화를 위한 회개는 반복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 만일 성경이 구원파의 말처럼 한 번 사죄 받은 후에는 미래의 죄까지 사함받았으니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면 필자도 그렇게 하겠다. 그러나 그것이 상식적으로 보아도 무서운 종교가 될 수 있는 것은 구원받은 후에는 어떤 죄도 죄가 아니라는 논리가 가능해지고 결국 살인, 간음 등 어떤 죄도 지을 수 있다는 말이요, 실질적으로 그렇게 적용시키는 구원파 교인들이 있다는 점이다. 즉 구원받은 후에도 죄를 지으나 그저 그 죄를 인정하기만 하면 된다고 한다. 참으로 성경의 가르침과는 하늘과 땅처럼 멀지 않은가? 다음의 성구 다섯 개는 분명히 같은 회개란 단어의 성화를 위한 반복적 회개임이 입증되는 결정적 성구들이다.
<다섯 개의 핵심 성구를 중심으로>
1. 시편 51편
박씨는 본 51편의 회개 또한 구원을 위한 회개로 보지 않는지 5절의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라는 말을 가지고 다윗이 원죄를 말하고 있지 않느냐고 했으며 더 나아가서는 어디에 다윗이 그 입으로 직접 자신의 죄를 열거하며 사해주기를 바랬느냐고 물어왔습니다.
그 물음에 저의는 오늘과 교회가 하나 하나의 죄를 들어 용서해 달라고 하는 것을 부정하기 위해서이고 회개는 한번으로 족하다고 말하고 싶은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잘못된 하나의 전제로부터 스스로 다음과 같은 모순을 낳게 합니다.
우선 다윗이 회개를 여러 번 했다는 말이 됩니다(본문, 삼하 24:10, 시편 32:5 등). 그러니 다윗은 구원의 확신이 없었다는 말이요 고로 다윗은 지옥에 갔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뿐만 아니라 본문에서 다윗이 자신의 죄를 스스로 고백한 내용이 없다고 하니 이 얼마나 성경을 모르는 소리인가. 그가 "죄과" "죄악" "죄"라고 한 말은 무슨 죄인가? 그리고 14절에서 "피흘린 죄"에서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또한 17절에 그가 "통회하는 마음"이라고 했는데 그것은 무엇인가?
2. 사무엘하 24:10
이곳에 나타난 다윗은 회개는 더욱 결정적입니다. 그가 직접 자신의 죄를 구체적으로 고백하며 사해주기를 구했습니다. "(인구조사 후에)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이제 간구하옵나니 종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했습니다.
구원파의 말대로라면 이미 사함을 받았는데 무엇을 또 사해 달라는 말입니까? 다윗을 또 다시 지옥으로 보내시렵니까?
3. 주기도문(마태복음 6장)
우리가 늘 암송하는 주기도문 중에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는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어쩔 수 없이 구원파들은 이 회개도 단회적인 회개로 볼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 가지 문제에 봉착되어 버립니다.
① 이 기도문 전체가 모두 반복되어야 할 기도라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한번만 거룩히 여김을 받을 수 없으며, 일용할 양식이 한번만 필요한 것도 아니며, 권세와 영광이 하나님께 한번만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죄사함이 기도만은 한번으로 족할 수 있겠습니까?
② 만일 이 회개가 성화를 위한 회개가 아니라면 구원 또한 유동적일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왜냐하면 구원받은 후에도 형제의 죄를 용서하지 못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때는 우리의 죄도 사함받지 못함이니 구원파의 말로하면 지옥에 가야 한다는 말이 됩니다.
③ 본문은 원어에 단수가 아니라 복수로 되어 있습니다. 이 죄는 복수로서 자범죄를 가리킵니다. 성경에서 주어가 복수일 때나, 구체적인 죄에 의해 나타내는 원죄를 말할 때를 제외하고 원죄를 나타낼 때 복수로 사용된 경우가 있는가 제시해 보십시오. 주기도문의 이 회개는 우리가 매일 해야 할 성화를 위한 기도임이 분명합니다.
4. 요한일서 1:8-9
먼저 본문을 살펴봅시다.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여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문은 얼핏 보면 구원에 대한 회개를 말하는 것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이 또한 그렇게 볼 때 3가지 문제에 봉착됩니다.
① 이 편지의 수신자는 불신자가 아니고 성도들이었습니다. 이 서신에서 요한은 이 편지를 받은 자들에게 "자녀들아" 또는 "아이들아" "형제들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성도들을 지칭하는 호칭들입니다. 성도들에게 또 다시 구원을 위한 회개를 가르친다는 것은 모순된 일입니다.
② 본문에 "우리가 죄를 자백하면"이라고 했는데 이 우리란 주어는 1인칭 복수로서 저자를 포함해서 하는 말입니다. 그러니 사도요한이 한번에 족한 회개기도를 또 하려 했고 또 성도들에게 가르쳤다면 사도요한은 지옥으로 보내야 할 것입니다.
③ 여기에서 사용된 "죄"란 단어 또한 복수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니 이 또한 성화를 위한 회개로서 구체적인 죄에 대한 회개를 가르치는 말입니다.
5. 끝으로 요한계시록의 교회들에 보낸 사도요한의 글입니다
요한계시록에 회개하라는 말이 12번 나오는데 대부분 구체적인 죄를 하나씩 지적하여 열거하고 있습니다. 본인이 들은 바로는 이들 구원파는 구체적인 죄의 고백은 구원을 위한 회개도 아닌 것으로 그것을 부정하였습니다. 물론 본인도 한두 가지 죄를 고백했다고 해서 그것으로 구원을 위한 회개가 다 되었다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어떤 자는 한가지 구체적인 죄의 뉘우침으로부터 시작하여 자기 전인이 죄인임을 알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죄에 대해 죄의식이 없이 전인적인 의미에서 죄인이란 의식은 불가능할 것이 아닙니까?
(2) 죄인과 의인의 개념이 다르다.
구원받은 후에 회개할 필요가 없다는 말과 같은 의미로 죄인이냐 의인이냐를 물어서 죄인이라고 하면 천국은 의인만 가는 곳이요, 지옥은 죄인이 가는 곳이니 지옥에 간다고 말한다. 물론 우리는 신분적으로 의인임에 틀림이 없다. 오직 예수님의 공로 때문에 죄인을 의인으로 여겨주시는 것이다. 더욱이 기억해야 할 것은 성도가 믿음으로 의인이 되었다고 해도 죄를 안 짓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죄를 짓는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감사 외에 뽐낼 것도 예수님의 공로 외의 자랑할 것도 없다. 그런데 구원파의 문제는 어디에 있느냐, 의인이냐, 죄인이냐를 물어서 "죄인이다"라고 하면 지옥의 자식으로 정죄해 버린다는 점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구속 역사를 거스리는 사탄적 궤계가 아니고 무엇인가? 욥의 세 친구는 하나님 편에서 욥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형벌을 받는다고 말하여 욥에게 회개를 촉구하다가 오히려 하나님께 책망을 들었다.(욥 42:7-9)
사실 참된 의미의 의인이 아니면 참된 의미의 죄인이란 고백이 불가능한 것이며, 또한 참된 의미의 죄인이란 고백이 없이 참된 의미의 의인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 피할 수 없는 성경적 증거가 믿음으로 의인이 되었음을 강조하던 바울은 자신을 죄인의 괴수라고 고백했다는 사실이다(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셨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 딤전 1:15). 13절에서는 자신이 훼방자요, 행악자였음을 과거시제로 밝히고 나서 죄인임을 고백할 때는 현재시제로 말했다는 것이다.
이단자들에게 어떤 성구를 말한들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겠는가? 특히 박옥수 씨와 그 수하의 모든 사람들은 이것이 과거시제였다고 주장하고 있으니 웃어야 할 것인가, 울어야 할 것인가?
(3)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사상이 다르다.
구원파의 사람들은, "구원을 받았습니까?"라는 질문을 때와 장소와 사람을 가리지 않고 묻는다. 아니 그렇게 묻는 것을 즐겨하고 있으며, 자신들의 최대 무기로 사용하는 것 같다. 10년만에 시아버지 장로님을 공항에서 만나자마자 첫 인사가, "아버님, 구원받으셨습니까?"라는 질문을 했다 한다. 필자가 아는 어떤 목사님에게, "목사님 구원받으셨습니까? 이제 보니 구원을 못 받으셨군요. 예수님을 영접하고 구원받으세요."라고 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대답을 못하거나 화를 내면 구원받은 자에게 구원 받았느냐고 묻는 데 대답을 못할 것이 무엇이며, 더욱이 구원받은 성도라면 화를 낼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아마 그래서 이들이 구원파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 같은데 그들 편에서 보면 영광스러운 이름으로 여겨야 할텐데 왜 교단이름을 아예 구원파라고 하지 않고, 역사적 정통성도 없이 침례교 이름을 도용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더욱이 그들은 구원의 점진성 같은 것은 아예 부정한다. 뿐만 아니라, 구원의 확신이 없는 구원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고 있다. 심지어 몇 년, 몇 월, 몇 시, 몇 분에 구원 받았느냐고 다그치는 것이 상례이다.
이 점을 하나님의 주권과 관계시켜 비판해 보자.
① 구원을 확증하지 못하면 구원이 없다고 하는 점이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하는 것이다. 구원을 받았으니 구원이 있고 구원의 확신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저들은 구원의 확신이 있으니 구원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성경이 구원을 확증하라고 할 때(고후 13:5), 구원의 확신이 구원을 좌우한다는 의미가 결코 아니다. 성경은 구원의 확신을 요구하나 예수를 믿고 있으면서도 확신이 없는 자들을 구원파처럼 구원받지 못했다고 말한 일이 없다. 그 경우가 위에서 언급한 히브리서 6:1-2의 말씀이다. 이 말씀을 구원받지 못한 자에게 주신 말씀으로 보게 되면 모순이 생기게 된다.
② 구원의 문제를 인간의 믿음의 측면에서만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하는 것이 된다. 성경은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믿음을 동시에 말한다. 즉 하나님의 전지성과 인간의 자유의지가 동시에 균형있게 나타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인간의 믿음을 촉구하지만 구원이 인간의 믿음의 대가라거나 인간의 공로라고 말하는 곳은 단 한 곳도 없다. 물론 성경은 하나님의 주권인 예정을 말한다고 해서(엡 1:4, 2:1) 인간의 의무인 전도나 믿음을 의심하지도 경시하지도 않는다. 분명 믿음으로 얻는 것이 구원이나 하나님의 주권을 잊어버리면 그것도 인간주의가 되어버리고 만다. "그런즉(우리의 구원은)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롬 9:16)고 하였다.
필자는 구원파의 교리를 구원관과, 교회관과 종말론의 측면에서 정통교회의 교리와 다르다는 점을 증명하려 한다. 그러나 그 핵심이 이 구원관에 있음을 기억하여야 할 것이다.
'기독교복음침례회', '예수교복음침례회', 또는 '대한예수교침례회'란 공식적인 명칭 외에 구원파란 이름이 저들에게 붙여진 것은 그들이 구원에 대한 질문을 핵심으로 정통교인들을 유혹하고 혼란에 빠뜨리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마치 구원에 대한 비밀을 자기들만 알고 있는 것처럼, 마치 구원을 받았으니 구원의 확신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구원의 확신이 있으니 구원을 받은 것처럼, 또는 좁은 의미의 구원 즉, 중생이 신앙생활의 전부인 것처럼, 심지어 자신들만 구원받은 무리인 것처럼 겸손으로 위장된 영적 교만과 오만을 떨기에 정통교회는 그들을 일명 구원파 이단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1. 구원관에 나타난 이단성
최근 들어서는 구원파 교인들 중에 10단계 질문서라는 것을 사용하는 자들을 본 일이 없다. 이 10단계 질문서를 비록 지금은 사용하고 있지 않더라도 그 질문 속에 구원 문제에 대해 저들이 주장하고 싶은 모든 내용과 기성교인들을 미혹할 수 있는 함정의 핵심이 다 숨어 있다. 그 질문은 이런 것들이다.
첫 번째 질문: 선생님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것을 확실히 알고 믿습니까?
두 번째 질문: 선생님은 거듭나셨습니까?
세 번째 질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것을 확신하십니까?
다섯 번째 질문: 의인입니까, 죄인입니까?
여섯 번째 질문: 모든 죄가 용서되었습니까?
일곱 번째 질문: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생활이 아닙니까?
여덟 번째 질문: 구원받은 것이 확신되어집니까?
아홉 번째 질문: 재림주를 영접할 준비가 되어있습니까?
열번째 질문: 구원의 근거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렇다면 이 점에 대한 구원파의 어떤 주장이 성경과 다른가?
(1) 회개의 개념이 다르다.
모든 이단들이 정통교회의 약점을 찾아 공격하고, 기성교인들의 체계나 확신을 뒤흔들어 자기들만의 구원을 주장하는 것처럼 구원파는 이 회개문제를 그렇게 사용하는 것이다. 즉 기성교인들이 회개하는 모습을 공격하기 위하여 새벽마다 울고불고하는 것이 회개가 아니라는 것이요, 또한 회개란 단어를 구원받은 후에 죄를 자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데는 적용시키지 않을 뿐만 아니라, 구원받은 자는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 논리적 근거는 이 것이다. 회개란 '돌이킨다'는 말로써 세상에서 하나님께로 한 번 돌이켰기 때문에 더 이상 돌이킬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다시 설명하면 이런 말이다. 회개란 오직 구원을 위해 돌이키는 행위로써 우리의 구원의 확신은 하나님께서 현재, 미래, 과거의 모든 죄를 다 사해 주셨다는 것을 받아들임으로만 가능한데 이미 사해준 죄를 또 다시 사해 달라고 울고불고 회개할 필요가 없으며, 그런 점에서 회개한다는 것은 사죄의 확신이 없는 증거가 된다는 것이요, 결국 울고불고 회개하는 자들은 구원받지 못한 지옥의 자식이라고 단정해 버리는 것이다. 또한 사람들이 자기의 죄를 고백할 때 죄인임을 고백하고 회개하지 않기 때문에 백 날을 울고불고 회개해도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정죄해버리는 것이 구원파이다.
비판해 보자.
① 구원을 위해 필요한 회개라 구체적 죄의 고백이 없어도 죄인인 것을 고백하고, 그리스도께 돌이키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본다. 그 실례가 누가복음 23장 강도의 구원이다. 물론 죄인이 되었기에 죄를 짓게된 것이요, 죄는 보고, 죄는 깨달으며, 죄는 고백하나 죄인임을 깨닫고 죄인임을 고백하지 못하면 안 된다. 우리는 원죄를 가지고 태어날 때부터 죄인으로 태어났기에 죄를 짓는다. 그러나 인류에게 죄가 들어온 것은 죄를 지었기에 죄인이 된 것이다. 더욱이 구체적인 죄에 대한 참회하는 마음과 통회자복하는 마음없이 어떻게 죄인임을 알게 되는가? 죄에 대한 의식이 없이는 죄인에 대한 의식은 전혀 불가능한 것이다. 죄를 범하지 않는 죄인도 있는가? 없다. 구원파의 주장은 죄와 죄인의 관계를 잘 모르고 행하는 오직 기성교인을 미혹하기 위한 술책에 불과하다.
② 회개에는 지, 정, 의의 인격적인 요소가 다 포함된다. 죄에 대한 바른 깨달음이 있을 때 통회자복하게 되고, 눈물을 흘리게 되고, 그러므로 하나님께 돌이키게 되는 것이 아닌가? 구원파의 사람들은 회개란, "돌이키는 것이다."라는 말만 할 뿐이며, 구체적인 회개의 행위가 무엇인지 대답하는 경우를 본 일이 없으며, 오직 기성교회의 회개의 자세를 부정하려는 데에만 일치점이 있었다.
물론 통회지복하고 눈물을 흘린 그 행위가 죄를 씻는 것은 결코 아니다. 회개를 하면 회개의 행위가 죄를 씻는가? 아니다. 그리스도의 긍휼과 십자가의 보혈의 능력이 죄를 씻고, 죄를 사하고, 죄인을 용서하고, 구원하시는 것이다. 단지 회개란 죄 때문에 죽어버린 인간들이 구원받을 수 있도록 하나님이 만드신 사랑의 법칙일 뿐이다. 그러니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는 행위를 공격할 것이 아니라, 회개에 대한 성경적인 바른 깨달음이 없는 자기 연민의식의 눈물과 슬픔을 회개로 착각하는 교인들을 동정하고 바르게 가르쳐야 할 뿐이다.
③ 회개는 한 번만 하는 것으로 회개를 거듭하는 것은 구원이 없는 증거로 보는 점이 비성경적이다. 구원을 위한 회개와 성화를 위한 회개에 대하여는 별개로 취급하겠다. 일단 구원을 위한 단회적 회개의 면만을 살펴보자. 하나님께서는 불신자가 예수를 믿고, 구원 받기를 원하는 간절한 마음만큼 구원받은 성도가 구원의 터에 머무르지 않고 성장하기를 똑같이 바라고 계신다. 그런 점에서 성장을 촉구하며 회개의 터(구원을 위한)를 닦지 말고 완전한 데 나아가라고 촉구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 나아갈지니라"(히 6:1-2). 원리적으로 볼 때 틀림없이 구원의 터를 두 번 닦을 수 없고, 구원을 위한 회개를 두 번 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구원파의 잘못은 구원을 위한 회개를 두 번 할 필요가 없다는 것과 연약한 믿음의 사람들이 여러 번 할 수 있다는 성도의 약점을 혼돈하고 있다. 성경 어디에도 그런 의미로 믿음이 약한 자들을 정죄한 곳이 있는가? 심지어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예수는 믿고 구원은 받았으나 아직 젖밖에 못먹는 어리아이를 가르쳐 육신에 속한 자(σαρκικοs)라고 했는데 구원파의 입장에서 보면 그들도 지옥의 자녀가 되지 않겠는가? (고전 3:1)
④ 구원파는 구원을 위한 회개와 성화를 위한 회개를 혼돈하고 있다. 그들은 구원을 위한 회개가 단회적임을 밝혔다. 그러나 성화를 위한 회개는 반복적이다. 이 말은 성화를 위한 회개와 구원을 위한 회개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말이 아니다. 회개 자체는 둘다 단회적이다. 용서를 구하고, 용서를 받는 사건 자체는 단회적이다. 그러기에 성경은 회개하라는 말을 제 1 단순과거형태로 나타내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이 같은 죄를 계속 범한다는 점에서 성화를 위한 회개는 반복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 만일 성경이 구원파의 말처럼 한 번 사죄 받은 후에는 미래의 죄까지 사함받았으니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면 필자도 그렇게 하겠다. 그러나 그것이 상식적으로 보아도 무서운 종교가 될 수 있는 것은 구원받은 후에는 어떤 죄도 죄가 아니라는 논리가 가능해지고 결국 살인, 간음 등 어떤 죄도 지을 수 있다는 말이요, 실질적으로 그렇게 적용시키는 구원파 교인들이 있다는 점이다. 즉 구원받은 후에도 죄를 지으나 그저 그 죄를 인정하기만 하면 된다고 한다. 참으로 성경의 가르침과는 하늘과 땅처럼 멀지 않은가? 다음의 성구 다섯 개는 분명히 같은 회개란 단어의 성화를 위한 반복적 회개임이 입증되는 결정적 성구들이다.
<다섯개의 핵심 성구를 중심으로>
1. 시편 51편
박씨는 본 51편의 회개 또한 구원을 위한 회개로 보지 않는지 5절의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라는 말을 가지고 다윗이 원죄를 말하고 있지 않느냐고 했으며 더 나아가서는 어디에 다윗이 그 입으로 직접 자신의 죄를 열거하며 사해주기를 바랬느냐고 물어왔습니다.
그 물음에 저의는 오늘과 교회가 하나 하나의 죄를 들어 용서해 달라고 하는 것을 부정하기 위해서이고 회개는 한번으로 족하다고 말하고 싶은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잘못된 하나의 전제로부터 스스로 다음과 같은 모순을 낳게 합니다.
우선 다윗이 회개를 여러 번 했다는 말이 됩니다(본문, 삼하 24:10, 시편 32:5 등). 그러니 다윗은 구원의 확신이 없었다는 말이요 고로 다윗은 지옥에 갔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뿐만 아니라 본문에서 다윗이 자신의 죄를 스스로 고백한 내용이 없다고 하니 이 얼마나 성경을 모르는 소리인가. 그가 "죄과" "죄악" "죄"라고 한 말은 무슨 죄인가? 그리고 14절에서 "피흘린 죄"에서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또한 17절에 그가 "통회하는 마음"이라고 했는데 그것은 무엇인가?
2. 사무엘하 24:10
이곳에 나타난 다윗은 회개는 더욱 결정적입니다. 그가 직접 자신의 죄를 구체적으로 고백하며 사해주기를 구했습니다. "(인구조사 후에)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이제 간구하옵나니 종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했습니다.
구원파의 말대로라면 이미 사함을 받았는데 무엇을 또 사해 달라는 말입니까? 다윗을 또 다시 지옥으로 보내시렵니까?
3. 주기도문(마태복음 6장)
우리가 늘 암송하는 주기도문 중에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라는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어쩔 수 없이 구원파들은 이 회개도 단회적인 회개로 볼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가지 문제에 봉착되어 버립니다.
① 이 기도문 전체가 모두 반복되어야 할 기도라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한번만 거룩히 여김을 받을 수 없으며, 일용할 양식이 한번만 필요한 것도 아니며, 권세와 영광이 하나님께 한번만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죄사함이 기도만은 한번으로 족할 수 있겠습니까?
② 만일 이 회개가 성화를 위한 회개가 아니라면 구원 또한 유동적일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왜냐하면 구원받은 후에도 형제의 죄를 용서하지 못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때는 우리의 죄도 사함받지 못함이니 구원파의 말로하면 지옥에 가야 한다는 말이 됩니다.
③ 본문은 원어에 단수가 아니라 복수로 되어 있습니다. 이 죄는 복수로서 자범죄를 가리킵니다.
성경에서 주어가 복수일 때나, 구체적인 죄에 의해 나타내는 원죄를 말할 때를 제외하고 원죄를 나타낼 때 복수로 사용된 경우가 있는가 제시해 보십시오.
주기도문의 이 회개는 우리가 매일 해야 할 성화를 위한 기도임이 분명합니다.
4. 요한일서 1:8-9
먼저 본문을 살펴봅시다. "우리가 죄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여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문은 얼핏 보면 구원에 대한 회개를 말하는 것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이 또한 그렇게 볼 때 3가지 문제에 봉착됩니다.
① 이 편지의 수신자는 불신자가 아니고 성도들이었습니다. 이 서신에서 요한은 이 편지를 받은 자들에게 "자녀들아" 또는 "아이들아" "형제들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성도들을 지칭하는 호칭들입니다. 성도들에게 또 다시 구원을 위한 회개를 가르친다는 것은 모순된 일입니다.
② 본문에 "우리가 죄를 자백하면"이라고 했는데 이 우리란 주어는 1인칭 복수로서 저자를 포함해서 하는 말입니다. 그러니 사도요한이 한번에 족한 회개기도를 또 하려 했고 또 성도들에게 가르쳤다면 사도요한은 지옥으로 보내야 할 것입니다.
③ 여기에서 사용된 "죄"란 단어 또한 복수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니 이 또한 성화를 위한 회개로서 구체적인 죄에 대한 회개를 가르치는 말입니다.
5. 끝으로 요한계시록의 교회들에 보낸 사도요한의 글입니다
요한계시록에 회개하라는 말이 12번 나오는데 대부분 구체적인 죄를 하나씩 지적하여 열거하고 있습니다.
본인이 들은 바로는 이들 구원파는 구체적인 죄의 고백은 구원을 위한 회개도 아닌 것으로 그것을 부정하였습니다. 물론 본인도 한두 가지 죄를 고백했다고 해서 그것으로 구원을 위한 회개가 다 되었다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어떤 자는 한가지 구체적인 죄의 뉘우침으로부터 시작하여 자기 전인이 죄인임을 알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구체적인 죄에 대해 죄의식이 없이 전인적인 의미에서 죄인이란 의식은 불가능할 것이 아닙니까?
(2) 죄인과 의인의 개념이 다르다.
구원받은 후에 회개할 필요가 없다는 말과 같은 의미로 죄인이냐 의인이냐를 물어서 죄인이라고 하면 천국은 의인만 가는 곳이요, 지옥은 죄인이 가는 곳이니 지옥에 간다고 말한다.
물론 우리는 신분적으로 의인임에 틀림이 없다. 오직 예수님의 공로 때문에 죄인을 의인으로 여겨주시는 것이다. 더욱이 기억해야 할 것은 성도가 믿음으로 의인이 되었다고 해도 죄를 안 짓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죄를 짓는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감사 외에 뽐낼 것도 예수님의 공로 외의 자랑할 것도 없다. 그런데 구원파의 문제는 어디에 있느냐, 의인이냐, 죄인이냐를 물어서 "죄인이다"라고 하면 지옥의 자식으로 정죄해버린다는 점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구속 역사를 거스리는 사탄적 궤계가 아니고 무엇인가? 욥의 세 친구는 하나님 편에서 욥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형벌을 받는다고 말하여 욥에게 회개를 촉구하다가 오히려 하나님께 책망을 들었다.(욥 42:7-9)
사실 참된 의미의 의인이 아니면 참된 의미의 죄인이란 고백이 불가능한 것이며, 또한 참된 의미의 죄인이란 고백이 없이 참된 의미의 의인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 피할 수 없는 성경적 증거가 믿음으로 의인이 되었음을 강조하던 바울은 자신을 죄인의 괴수라고 고백했다는 사실이다(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셨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 딤전 1:15). 13절에서는 자신이 훼방자요, 행악자였음을 과거시제로 밝히고 나서 죄인임을 고백할 때는 현재시제로 말했다는 것이다.
이단자들에게 어떤 성구를 말한들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겠는가? 특히 박옥수 씨와 그 수하의 모든 사람들은 이것이 과거시제였다고 주장하고 있으니 웃어야 할 것인가, 울어야 할 것인가?
(3)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사상이 다르다.
구원파의 사람들은, "구원을 받았습니까?"라는 질문을 때와 장소와 사람을 가리지 않고 묻는다. 아니 그렇게 묻는 것을 즐겨하고 있으며, 자신들의 최대 무기로 사용하는 것 같다. 10년만에 시아버지 장로님을 공항에서 만나자마자 첫 인사가, "아버님, 구원받으셨습니까?"라는 질문을 했다 한다. 필자가 아는 어떤 목사님에게, "목사님 구원받으셨습니까? 이제 보니 구원을 못 받으셨군요. 예수님을 영접하고 구원받으세요."라고 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대답을 못하거나 화를 내면 구원받은 자에게 구원 받았느냐고 묻는 데 대답을 못할 것이 무엇이며, 더욱이 구원받은 성도라면 화를 낼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아마 그래서 이들이 구원파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 같은데 그들 편에서 보면 영광스러운 이름으로 여겨야 할텐데 왜 교단이름을 아예 구원파라고 하지 않고, 역사적 정통성도 없이 침례교 이름을 도용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더욱이 그들은 구원의 점진성 같은 것은 아예 부정한다. 뿐만 아니라, 구원의 확신이 없는 구원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고 있다. 심지어 몇 년, 몇 월, 몇 시, 몇 분에 구원 받았느냐고 다그치는 것이 상례이다.
이 점을 하나님의 주권과 관계시켜 비판해 보자.
① 구원을 확증하지 못하면 구원이 없다고 하는 점이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하는 것이다. 구원을 받았으니 구원이 있고 구원의 확신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저들은 구원의 확신이 있으니 구원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성경이 구원을 확증하라고 할 때(고후 13:5), 구원의 확신이 구원을 좌우한다는 의미가 결코 아니다. 성경은 구원의 확신을 요구하나 예수를 믿고 있으면서도 확신이 없는 자들을 구원파처럼 구원받지 못했다고 말한 일이 없다. 그 경우가 위에서 언급한 히브리서 6:1-2의 말씀이다. 이 말씀을 구원받지 못한 자에게 주신 말씀으로 보게 되면 모순이 생기게 된다.
② 구원의 문제를 인간의 믿음의 측면에서만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하는 것이 된다. 성경은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믿음을 동시에 말한다. 즉 하나님의 전지성과 인간의 자유의지가 동시에 균형있게 나타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인간의 믿음을 촉구하지만 구원이 인간의 믿음의 대가라거나 인간의 공로라고 말하는 곳은 단 한 곳도 없다. 물론 성경은 하나님의 주권인 예정을 말한다고 해서(엡 1:4, 2:1) 인간의 의무인 전도나 믿음을 의심하지도 경시하지도 않는다. 분명 믿음으로 얻는 것이 구원이나 하나님의 주권을 잊어버리면 그것도 인간주의가 되어버리고 만다. "그런즉(우리의 구원은)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롬 9:16)고 하였다.
필자는 구원파의 교리를 구원관과, 교회관과 종말론의 측면에서 정통교회의 교리와 다르다는 점을 증명하려 한다. 그러나 그 핵심이 이 구원관에 있음을 기억하여야 할 것이다.
'기독교복음침례회', '예수교복음침례회', 또는 '대한예수교침례회'란 공식적인 명칭 외에 구원파란 이름이 저들에게 붙여진 것은 그들이 구원에 대한 질문을 핵심으로 정통교인들을 유혹하고 혼란에 빠뜨리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마치 구원에 대한 비밀을 자기들만 알고 있는 것처럼, 마치 구원을 받았으니 구원의 확신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구원의 확신이 있으니 구원을 받은 것처럼, 또는 좁은 의미의 구원 즉, 중생이 신앙생활의 전부인 것처럼, 심지어 자신들만 구원받은 무리인 것처럼 겸손으로 위장된 영적 교만과 오만을 떨기에 정통교회는 그들을 일명 구원파 이단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누구를 만나든지 "구원 받았습니까"라고 질문하기를 즐겨한다. 필자의 경험에 의하면 목사에게조차 구원받았느냐고 묻는 인간적인 무례함은 구원의 기쁨과 확신에서 오는 것으로 백번이라도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었으나, 동일한 구원의 고백을 하여도 구원받지 못했을 경험에 의하면 목사에게조차 구원받았느냐고 묻는 인간적인 무례함은 구원의 기쁨과 확신에서 오는 것으로 백번이라도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었으나, 동일한 구원의 고백을 하여도 구원받지 못했다고 정죄하는 사탄적 판단과 그 오만만은 용서하고 싶은 생각이 결코 없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구원파의 핵심교리는 역시 구원문제이다.
2. 교회론에 나타난 이단성
구원파의 교회론을 보면 이렇게 되어 있다. 먼저 구원파를 옹호하기 위해 쓰여진 신아문화사 발행 「세칭 구원파란」 제목의 책 표지에 보면 (한국편신도복음선교회 편집위원회 편저, 발행자 송일동, 1981. 5. 25. 발행), 우리는 무엇을 믿는가란 제목으로 자신들의 신조를 12가지로 나누어 소개하고 있는데, 제7항에서 교회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교회는 보이는 건물이나 인위적인 조직이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듭난 그리스도인들로만 이루어지고, 그것이 곧 그리스도의 몸이며 신부이다. 그리스도인은 그 몸의 자체이며 사랑의 교제 가운데 성령이 역사하셔서 그 몸이 성장함을 믿는다."
그런데 이것은 기독교복음침례회(권신찬, 유병언)의 것이요, 대한예수교침례회(속칭 이복칠 파 또는 이요한 파)의 신조를 보면 이렇게 되어 있다. 이요한 파에서 「생명의 빛」이란 잡지가 나오는데, 제3권 6호 87년 8월호에 보면 (편집인 이명원, 발행인 이행오, 발행처 대한예수교침례회), 제일 뒷면의 '우리는 이렇게 믿는다'에서 권씨의 12개항보다 두 개가 적은 10개항으로 나누어 자신들의 신조를 소개하고 있다. 그 중 일곱 번째 항에 가서 교회에 관해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교회는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의 성령의 하나되게 하심으로 서로 사랑하며 교제하는 무리이며 이들이 곧 그리스도의 몸이고 지체의 각 부분임을 믿는다" 이요한 씨는 권신찬 씨의 신조를 약간 변경한 것을 알 수 있다. 얼핏 보아서는 왜 이 같은 신조를 발표하게 되었는지, 또 정통교회 교회관과 무슨 차이가 있는지 모를 수 있다.
필자는 이들의 교회관을 좁게 비판하는 면에서보다, 넓은 의미에서 3개항으로 나누어 소개, 비판하고자 한다.
(1) 종교와 복음문제를 중심해서
권씨의 경우 자신의 가르침이 정통교회로부터 도전을 받을 수밖에 없음을 본인도 알고 있었다. 그는 「양심의 해방」이란 책 서문에서, "내가 왜 새삼스럽게 교회 지도자들의 그릇된 가르침을 지적하고 교회의 부조리를 비판하게 되었으며 개인이 영혼구원을 외침으로써 일부 기성교파 지도자들의 도전을 받게 되었는가?"라고 말하고 있다. 물론 이 책이 쓰여질 당시에는 일부 기성교파 지도자들에만 도전을 받았는지 모르겠으나 현재는 모든 교회로부터 도전을 받아 이미 이단으로 정죄받게 되었으니 그 점에 대한 변명이 따로 있어야 할 것으로 본다.
어쨌든 그가 기성 정통교회와 달리 자신의 교리체계를 세우는 데 그 핵심을 종교와 복음의 구별로부터 시작했다는 점이다. 「양심의 해방」이라는 책에서도 8향이 '종교에서의 해방'이란 제목이었고, 심지어 「종교에서의 해방」이란 책을 써서(일류사, 1977. 11. 21 발행) 자신의 교회관, 율법관 및 예배관을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 이요한 씨도 마찬가지이다. 이요한 씨는 어떻게든 권씨와 자신이 다르다고 하는 것을 주장해야 될 입장일 것이요, 또 그렇게 말하고 있다. 그러나 결국 권씨 편에서 보면 배반한 제자 밖에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생명의 빛」 제2권 3호 86년 1월호, 26페이지에 우종억 씨가 종교에는 구원이 없다라는 글을 썼는데 권씨의 종교와 복음에 대한 이론과 같다.
우선 이 점에 대한 권씨의 이론을 소개하고 비판하기로 하자.
① 종교는 사망이다 - 종교란 뜻의 라틴어는 릴리지오(Religio)로서, '속박한다' '구속한다'는 뜻으로 구속하고 속박하니 이는 복음과 반대되는 것으로 '사망'이다.
② 다른 종교는 물론 기독교도 종교이다 - 많은 다른 종교만이 아니라, 기독교마저도 종교로서 사람에게 속한 것으로 지옥이요, 오직 복음만은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서 천국이다. 실예를 들어보자.
"새벽마다 울리는 종소리와 함께 모여든 사람들의 울부짖는 기도 소리는 기독교 종교가 얼마나 사람들의 마음을 매고, 억압하고 있느냐를 보여주는 것이며, 그 밖의 모든 종교들은 그 종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의 양심에 강력한 명령으로 군림하여 사람들은 그 명령에 매여 억압되어 있습니다."(종교에서의 해방, 머리말에서)
③ 율법은 종교이다 - 하나님께서 주신 구약의 율법은 종교를 가리키는 것이다. 율법은 외면적인 것이요, 복음은 내면적인 것이다. 모든 인생은 율법 앞에서 벌벌 떨 수밖에 없는데, 그러기에 율법은 종교이다(이 문제는 율법관을 중심해서 자세히 취급하겠다).
④ 기성교회는 율법이다 - 권씨의 경우 어떤 때는 자신들의 가르침과 정통교회의 가르침이 차이가 없다고 하기도 하고, 반면에 자신들의 가르침은 전혀 다른 것처럼 가르치기도 하여 이중적인 면을 보인다. 그러나 분명한 것만은 기성교회를 종교로 보고 자신들을 복음으로 유도하는 것이다. 예배에도 종교적 보고 자신들을 복음으로 유도하는 것이다. 예배에도 종교적 예배와 복음적 예배가 있다고 하는데(예배관에 대해서는 후에 자세히 취급하겠다), 이 종교적 예배의 범주에 기성교회 예배를 포함시키고 있다.
필자가 보기에는 자신이 이단으로 정죄 받지 않기 이해서는 동질성을 강조하며 구원파의 우월성을 드러내고, 기성교인들을 유혹하기 위해서는 이질성을 강조하여 정통교회를 정죄하는 두 개의 얼굴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보자.
"기독교 역사가 전해 내려오면서 많은 기독교 학자와 신앙인들이 지은 책을 읽어보았습니다. 그 책을 읽어보면 오늘날 우리들이 성경 안에서 발견해내고 깨달아지는 근본적인 교회의 모습, 참교회의 모습을 아직 아무도 정확하게 정립해 놓은 글이 없습니다."(불안에서 평안으로, 한국평신도복음선교회 편집, 일류사 발행, 1977. 7. 25. p.143) 우리는 여기에서 "참 교회의 모습을 아직 아무도 정확하게 정립해놓은 글이 없다"는 말에 유의해 보자. 오직 교회다운 교회는 권씨 자신에 의해서만 그 모습이 정립되었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정통교회의 입장에서 하나씩 비판해 보자
① 먼저 그가 종교와 복음을 구별한 것은 그 자신이 설정한 자기 논리의 전제로 보면 받아들일 수 있다. 사람마다 사용하는 언어에 내포된 의미는 조금씩 다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주관적인 사사이의 표현이 객관적으로 인정받으려면 어떤 한계를 벗어나서는 안된다. 권씨의 경우는 그 개념 설정마저 명료성 있게 되어있지도 않지만, 그것이 객관적인 보편타당한 선 안에서 인정될 수 없다는 점이다. 그것을 두 가지로 나누어 비판할 수 있다. 먼저 종교란 말의 언어학적 정의가 틀려 있다. 종교란 말의 라틴어 릴리기오(Religio)란 말을 구속한다, 속박한다는 뜻이 아니라, '삼가 경의를 표한다'는 뜻과, '다시 결합한다'는 뜻으로 보는 두 가지 설이 있는데, 권씨의 정의와는 둘 다 거리가 멀다. 선입관적 전제에 의해 논리를 전개하면 권씨와 같은 넌센스가 생길 수밖에 없을 것이다.
② 그 다음은 언어학적인 면이 아닌, 성경 속에서 종교와 복음의 구별이 없다는 점이다. 언어학적 구별은 무론 사상적 구별도 없다. 오히려 성경에는 권씨의 주장처럼 종교란 말을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행 17:22). 그런 점으로 볼 때, 종교와 복음으로 나누어 놓고 심지어 기독교도 종교라고 하여 자신은 기독교 안의 무엇인지 기독교 밖의 무엇인지도 모를 전설 속에 나오는 귀신나라 같은 소리를 할 것이 아니라, 참종교와 거짓종교로 나누어 보아야 더 보편타당하지 않겠는가? 필자가 보기에 저들은 각자 자기교단의 명칭을 가지고 있으면서(기독교복음침례회, 예수교복음침례회, 대한예수교침례회 같은) 교회란 건물이나 인위적 조직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자기 도끼로 자기 이마를 찍는 행위와 같지 않은가? 조직을 부정하고, 조직을 만들고, 제도를 부정하고, 제도를 만들었다. 이 말이 기성교회가 건물을 중심한 교회관을 가지고 있는 잘못된 교회관을 공격하기 위해서 만든 칼이라고만 생각했을 뿐이지 자신의 목을 스스로 베어 낼 무기란 점을 왜 모르는가?
필자는 감히 말할 수 있고, 충고하고 싶은 말이 있다. 구원파는 그의 거짓된 복음에서 해방되어 참 기독교 종교로 돌아와야 한다. 그 때에 불안에서 해방되어 평안을 얻을 것이요, 이단자의 양심에서 해방될 것이요, 위험한 지구에서 구원될 것이요,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실 그 때에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
(2) 율법관을 중심해서
이단의 특징은 정통교회와 비슷하나 다르고, 같은 단어를 사용하나 그 뜻이 다르고, 같은 말을 하나 그 목적이 다르고, 그 결과가 다르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많은 부분은 정통교회의 교리와 같기도 하다.
이 율법관에 있어서 다른 결정적 부분만 소개하고 비판하기로 하자.
① 구원파는 실제적인 도덕폐기론자이다. 구원파의 어느 누구도 펄쩍 뛸 말이다. 종교란 표면적으로는 항상 선한 옷을 입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틀림없이 구원파에 속한 사람들은 도덕폐기론에 빠질 수밖에 없고, 또 빠져 있다.
성경에는 모순이 없고, 갈등이 없다. 바울의 이신칭의 사상과 야고보의 신학이 모순되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을 잘못 이해하면 믿음과 행위 사이에 갈등을 낳을 가능성이 크다. 행위중심의 신앙 생활을 하면 교만과 절망의 극을 오가는 추와 같은 기독교인이 된다. 반면에 행위와 관계없는 공상적인 은혜와 믿음만 강조하면 도덕폐기론에 빠지게 되고, 윤리적인 면이 약화된다. 그것은 은혜파에 속한 교회나 교인들의 생활양상이다. 복만 강조되고, 은혜만 강조되고, 윤리가 무너진다. 그런데 구원파는 틀림없이 후자에 속한다. 구원받은 성도는 단회적 회개에 족하다고 하고, 더욱이 성화를 위한 회개를 부정하고 있는 점을 볼 때, 자연스러운 결론이 아닐 수 없다. 이 얼마나 편리한 종교이며 무서운 종교인가?
② 구원파는 율법폐기론자이다. 그의 도덕폐기론과 상통한다. 권씨는 로마서 7장의 남편과 아내로 비유된 율법과 성도의 관계에 대해서, "이제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했으니"의 내용을 들어 구원받은 성도는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한다. 이곳에서 권씨는 이제 무서운 폭군인 율법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을 지킬 의무가 없게 되었다는 무서운 자기 복음을 만들었다(종교에서의 해방, p.43).
성경적인 비판을 해보자.
① 바울은 율법 안에서 죽었다고 말하고 이어서 율법의 적극적인 가치를 말하고 있다.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13절까지는 과거시제로 말했으나, 14절부터는 현재시제로 말하고 있다. 즉 구원받은 후에 율법의 지옥 정죄는 벗어났으나, 아직도 율법의 효용 아래 있다는 말이 된다.
아니 그보다도 사실 바울은 율법이 죄를 알려주는 것으로 죄로 더욱 죄되게 하는 것이라고 말했는데 그가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 율법 아래 있을 때는 그토록 죄인이란 의식을 가지지 못했다는 점이다. 오히려 은혜의 법을 알고 난 후에야 사실 율법의 죄를 깨닫게 하는 그 기능도 살아나게 된 것이 아닌가. 그런데 왜 구원받은 성도는 율법을 지킬 필요도, 율법이 주는 갈등도 없어야 한다고 권씨는 말하는가.
② 권씨의 말로 하면 바울은 율법과는 관계가 없는데도 죄를 짓는 자기 자신에 대하여 왜 그토록 괴로워했는가(24절). 왜 그의 심령에 율법으로 인한 영적인 전쟁을 느끼고 있는가. 심지어 죄를 짓는 자신이 괴로워 디모데전서 1:15에서는 자신을 죄인의 괴수라고까지 했는가. 죄를 죄되게 하는 율법이 죽었는데 죄에 대해 그토록 괴로워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③ 구원받은 후에는 율법이 필요없게 되었으니 구원받은 후에 짓는 죄는 무엇으로 죄인지 알 수 있는가. 알 필요도 없는가. 아니면 죄를 짓지 않으려고 할 필요도 없다고 할 것인가. 도둑질, 간음, 부모공경, 탐심, 살인 등등의 죄를 어떻게 무엇으로 알겠으며, 또한 권씨의 마에 의하면 구태여 죄를 짓지 않으려고 할 이유도 없지 않겠는가? 그리고 구원받은 자이기에 거짓말을 좀 했다고 해서 지옥에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세칭 구원파란, p.34-35) 단지 하나님께서 그들의 육신만 치셨을 뿐이지 영혼을 치시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 이요한 씨의 의견도 같다.
이것을 이렇게 해석하고 적용한다면 재미있는 논리가 생긴다. 최근 들어 오대양 사건과 권씨와의 관계에 대해 논란이 많다. 이요한 씨는 자신은 권씨와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는 중에 권씨는 사업을 하나 자신은 안 한다는 점을 들고 있다. 권씨는 자기가 사업을 할 수밖에 없는 성경적 이유를 또한 밝히고 있다(불안에서 평안으로, pp.149-157). 그런데 이요한 씨는 이 점에 대해 권씨를 공격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권씨와 같은 교리에서 구원받은 그가 사업을 좀 한다고 해서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받은 구원이라면 권씨 계열의 사람들이 사업을 하는데 무엇이 문제이며, 혹 사업을 하다 본의 아니게 돈 문제가 생기고 혹 돈을 좀 먹었다고 해도 구원지상주의적인 구원파의 입장에서 볼 때, 아무 문제도 없을 것이다. 더욱이 권씨의 입장이 이해가 안 된다. 오대양 사건의 박순자 씨와 관계가 없다는 것을 애써 증명하려고 할 이유가 무엇인가? 돈 관계에 있었던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관계가 없다고 할 이유가 무엇인가? 더욱이 그들이 자살을 했다고 한들 아니면 타살이라고 한들 그들의 육체밖에 멸망할 것이 없을 텐데 무슨 문제가 있는가?
(3) 예배관을 중심해서
권씨는 예배는 구원받은 자의 특권이라고 한다(세칭 구원파란, pp.22-23). 기도도 구원받은 자들만이 하는 것이라고 하다(같은 책 pp.99-104). 권씨는 예배란 형식을 갖추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죄사함으로 말미암아 얻은 구원의 체험에서 나오는 감사의 제사인데 예배의 자격이 없는 예배는 마귀를 섬기는 것과 같은 것으로, 행위에 의해 드리는 가인의 예배요, 참예배는 복음적인 것으로써 기쁨과 감사 속에 구원을 경험한 자가 드리는 예배로 아벨의 예배라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종살이 때는 예배가 없었고, 예배드릴 장소도 없었는데 바로와 인연을 끊고 난 후에야 예배를 드릴 수 있다는 것이다.
비판해 보자.
구원받지 못한 자가 참예배를 드리지 못함은 옳은 말이나 성도들의 예배를 통해 신앙이 연약한 자나, 아직 구원은 얻지 못했을지라도 구원을 사모하는 자들과 심지어 불신자들마저도 구원의 소식을 듣게되는 법인데, 그것을 마귀를 섬기는 것과 같다고 했으니 이 또한 기성교회의 예배를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 아닌가?
권씨가 볼 때 권씨의 교회에 구원받지 못한 자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마귀예배가 아니겠는가?
더욱이 곡물로 드린 가인의 예배가 행위에 의해 드리려던 종교적인 예배의 모형이라 하여 성경해석적인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은 선입견으로 성경을 본 결과이다. 만일 가인이 드렸던 예물이 곡물이었기에 문제가 있었다면 왜 하나님께서 레위기 2장에서는 소제의 규례를 주셨는가? 가인의 제사는 믿음이 없었던고로(히 11:4), 그 정성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또한 권씨는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예배가 없었다고 하니 얼마나 성경을 모르는 말인가. 그리고 바로가 애굽에서 하나님께 예배한 것은 하나님을 애굽의 신과 같이 취급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이 또한 성경을 모르는 말이다. 물론 그들은 바로 때문에 드리지 못했을 뿐이지 그들에게 예배가 없었던 것도 아니고, 그곳에서 예배를 드리면 예배가 아닐 수도 없다. 그들은 하나님께 기도했는데(출 2:23, 신 26:7), 이것이 예배가 아니고 무엇이며, 그리고 처음에 애굽에 건너갔을 때, 드린 제사는 제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무엇이 이들을 이토록 교만하게 만들었는가? 무엇이 이들을 이단으로 만들었는가?
무엇이 이들을 참 교회를 떠난 사교로 만들었는가? 하나님을 말하고 하나님께 심판을 받을 것이다. 성경을 말하고 성경의 정죄를 받을 것이다.
3. 종말론에 나타난 이단성
지금을 가리켜 말세라 한다. 어떤 이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말세지말이라고도 한다. 사용하는 용어는 동일해도 그 의미는 전혀 다른 것일 수도 있다. 어쨌든 지금을 가리켜 '말세'라고 하는 데 이의를 제기할 기독교인이 없을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과 사도시내부터 임박한 하나님 나라를 가르쳐 왔기 때문이다.
지금이 종말이라면 이 종말의 때에 종말론의 정립보다도 더 요청되는 신학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종말론만큼 우리로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것이 또 없었다. 그리하여 복음주의적 신학자들마저도 이 부분에 대하여 연구하기를 회피하고 침묵을 지켜 왔음을 교회사를 통해 쉽게 알 수 있다. 지금도 이 종말론은 마치 신학교가 아닌 기도원이나 부흥회를 통하여 그 전통이 전수되고 있고, 이부 감정주의적, 신비주의적 부흥사들이나 심지어 이단자들의 전용 특허물이 되어 버렸음을 한국 교회는 수긍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 종말론이 맞았느냐, 틀렸느냐 또는 그것이 정통적인 것이냐를 따질 기준도 없이 종말론을 가르치고 설교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말세에 신령한 종으로 자처하고 있고, 또 그렇게 인정되고 있는 형편이다. 그러다보니 일부에서는 종말의식을 강조하는 것만으로 이단자 내지는 준이단자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게 되었다. 이런 현상이 생기게 된 이유는 종말론의 난제성 때문이라고 본다.
한국교회는 종말론 연구나 가르침을 이단의 전용물로 만들어서는 안될 시급한 사명 앞에서 조심스럽고 적극적인 연구를 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그런데 누구보다 가장 종말의식을 극대화시키는 자들이 바로 이 구원파이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1) 종말론에 대한 권신찬, 이요한, 박옥수의 차이점
이요한 씨나 박옥수 씨는 자신들은 권신찬 씨와 다르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 실질적으로 다를 수 있고, 다른 요소를 발견한다. 예컨대 초대교회로부터 큰 논쟁의 초점이 되어 온 믿음과 지식의 문제에 있어서 권씨와 이씨는 입장이 다르다. 이씨는 요한일서 강해설교 테이프에서 아는 것이 믿는 것보다 앞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근거는 요한일서 4장 16절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라는 말에 두고 있다. 그런데 권씨는 "앎보다 믿음"을 강조했다(알파에서 오메가까지, 한국평신도 복음선교회, 1979, PP. 142-144). 물론 이 논쟁은 교회사 속에 반복되던 난제였으며, 결국 참된 지식은 참된 믿음 없이는 불가능하나 또한 참된 믿음은 참 지식이 있어야 함을 가르친 어거스틴의 말로 집약된 사실을 저들이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것은 깊은 의미의 논쟁의 초점이 되지만 이곳에서는 피하려 한다.
어쨌든 권씨가 세운 교리 체계를 탈피하여 가능한 한 자기체계를 세우고 싶은 자가 이씨일 것이다. 아니, 이 점에서 박씨는 더욱 그러할 것이다. 그런데 종말론에 있어서도 이씨와 권씨의 입장은 차이가 있다. 그 중의 하나가 그 유명한 다니엘 9장에 나오는 70이레에 대한 입장이다.
우선 그 하나만 예를 들어보자. 물론 뒤에서 집중적으로 소개, 비판하겠으나 권씨는 이 70이레 문제에서 그 연대계산의 기점을 주전 440년대로 잡고 있으나, 이씨는 고레스 원년을 주전 538년으로 이씨보다 훨씬 전으로 잡고 있다는 점이다. 일단 이 글에서는 복잡성을 피하기 위해 이씨의 말을 무시하고 권씨의 말을 중심해서 소개해서 비판하도록 하려 한다. 단지 이씨가 대답할 만큼의 진실과 용기가 있다고 믿어지지 않으나 이씨는 왜 권씨의 이론을 수정했는지 밝혀주기를 다시 요청해 볼뿐이다. 그런데 박씨의 경우에는 종말론에 대하여는 기록된 글이나 테이프를 접한 일이 없다. 필자의 추측으로는 아직 거기까지 체계를 세울 힘의 여유가 없는 것같이 보인다.
(2) 종말의식을 강조한다고 해서 이단이라 할 수는 없다.
이단의 피할 수 없는 공통된 특징은 종말을 통한 위기의식의 고조를 들 수 있다. 권씨야말로 그런 점에서 두 번째 가라면 서러워할 대표적인 이단이다. 그가 쓴 책 제목이나 그 목차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잠시 잠깐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위험한 지구」, 「가는 자와 남는 자」, 「임박한 대환란」, 「세계정부와 666」, 「인류의 파멸의 징조와 중동사태」 등등의 제목들을 들자면 끝이 없다. 이화여대 교수요, 문학박사인 장윤호 씨가 「위험한 지구」란 책 표지 뒷면에, '권하는 말'을 썼는데 다음과 같다.
"권신찬 목사가 지은 「위험한 지구」는 바로 우리 나라 사람이,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본격적으로 위의 여러 가지 문제점을 성경말씀에 따라 저술한 우리 나라 최초의 책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이 위험한 지구에서 지구는 왜 이렇게 위태로워져가고 있고, 인류는 왜 이다지도 위협을 겪고 있는지, 그 원인은 어디에 있고, 그 원인에 따라 어떠한 결과가 나타날 것인지 하는 데 대한 명쾌한 해답을 얻을 수 있다. 급변하는 세계 정세 속에서 모든 것이 우연하게 발생하고 종결지어 진다고 생각하기에는 너무나 엄청나고 정확한 증거가 성경말씀 속에 있음을 깨닫게 한다. 오늘날 사는 우리들로 하여금 믿음과, 믿음을 통한 생활이 무엇인지를 일깨워주는 책이라 확신한다."
그는 권씨를 기독교인으로서 성경적 종말론을 정리한 최초의 한국인으로 묘사했다. 권신찬 씨가 쓴 종말론에 대한 책들 중에 가장 대표적인 책은, 「위험한 지구」란 책으로 '가는 자와 남는 자(휴거)'란 소제가 붙은 책이다(중동문화사, 1980년 1월 1일 발행). 이 책에 의하면 곧 3차대전이 일어날 것을 지적하고, 더욱이 책 끝 부록에는 1980년 1월 14일 타임(Time)지의 표지와 1980년 1월 머드나이트 크라이(Midnight C교)지에 나온 예루살렘 대회장의 조감도 그림까지 넣어서 예루살렘성전 재건을 중심해서 신약시대의 끝을 예언하고 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에 종교별 성전이 건립될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는 성전을 재건한다고 하면 그들의 시대가 되는 것이며, 신약시대(이방인의 때)는 끝이 나는 것입니다."(위험한 지구, 부록 p.7)
그렇다면 이처럼 종말의식을 강조하는 것이 이단이란 말인가.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종말을 가르쳐야 할 것이다. 그런데 3가지 전제 아래에서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 첫째, 성경만큼만 강조해야 한다. 둘째, 그 목적이 성경적이어야 한다. 셋째, 그 내용이 성경적으로 옳아야 한다. 그렇게 볼 때 필자는 권신찬 씨의 종말론이 다음의 두 가지 점을 지적하고 싶다.
(3) 권씨의 종말의식의 고취는 그 목적이 잘못되었다.
권씨가 몸서리치도록 말세를 강조하는 데는 하나님 나라 건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왕국건설에 있는 것임을 증명하는 첫 번째 이유는 그의 그릇된 교회관을 들 수 있다. 그는 교회를 사랑함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불안에서 평안으로, 하권, 한국평신도복음선교회, 1977, pp. 147-148), 다른 교회관 속에 자기들만이 참된 교회로 자처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1962년 경북노회 제71회 임시 노회에서 목사 면직을 받았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80년에 발행한 「위험한 지구」라는 책 뒷면에 저자 약력이 나왔는데 1950년에 대한예수교장로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은 것을 그의 경력으로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다. 안수 받을 때까지만 장로교가 교회였으며, 그를 면직할 때는 교회가 아니란 말인가? 그리고 교회의 유형성을 전혀 부정하는 그가 도대체 그의 경력에 이 안수 받은 것을 기록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렇다면 면직 받은 것도 기록해야 하지 않는가?
그보다 더욱 잘못된 목적으로 종말론을 사용하는 것은 그가 하고 있는 사업을 보면 알 수 있다. 권씨 자신은 자신이 사업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으로 합리화하고 있지만, 교회가 사업을 하는 것까지는 그 자신의 체계에서 용납된다고 하더라도 사업 자금 조달을 위해 노력한다. 생긴 사건들을 볼 때, 분명히 그 목적이 잘못된 것이다(탁명환 저, 기독교 이단연구, p.225). 이 점에 대해 가장 크게 공격할 수 있는 자가 있다면 이요한 씨라고 생각한다. 어찌하여 이씨는 침묵을 지키고만 있는가?
(4) 권씨의 종말론은 그 내용이 잘못되었다.
주장하는 방법, 범위 그리고 목적이 옳다고 하더라도 그 내용이 잘못되었다면 모든 것이 잘못된 것이다. 권씨는 여러 책에서 이 지구가 멸망할 것을 성경과 연결시켜 설명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한 마디로 보면 오늘날 세대주의적 종말론을 그대로 흉내내고 있다. 세대주의적 종말관에서 구원파의 핵심인 구원교리의 옷을 입혀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몇 군데 인용해보자.
"하나님의 경영에 의한 역사를 시기적으로 크게 나누면 주전과 주후로 나뉘고, 세분하면 아담으로부터 약 2천년까지는 시작의 시대이고, 그 후 2천년 예수님의 탄생까지가 선민의 시대이며, 주후 곧 신약은 서기 70년부터 1,900년간의 이방인의 때이고, 다음 환란의 7년간 주님 재림 후 1,000년간이 평화의 기간으로 되어 있다."(위험한 지구, p.4).
"그러므로, 신약시대는 거의가 이방의 시대로 경륜되어 있다. 누가복음 21:24에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이방인들에게 밟히리라고 예수님은 예루살렘은 멸망을 예언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시한부이며 다시 이스라엘의 것이 될 것을 말씀하신 것으로, 1967년 6일 전쟁은 1,900년간 지배되어 오던 이방의 세력에서 신·구 예루살렘이 회복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예루살렘 시에 제3의 성정 재건인데, 이미 모리아산 근처에 건축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사건은 역사에 있어서 결정적인 순간에 찾아오게 된다. 그 때가 바로 어떤 사람들이 이 지상에서 사라지는 기현상이 일어나는 때인데, 그것은 육신의 변화로써 창조의 완성이며, 또 다른 어떤 사람들에게는 육신의 멸망의 시작이며,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이 다시 돌아보시는 선민의 시대가 되는 것이다.
다니엘 9:24 이하를 자세히 읽으면 7년간 환란의 기간이 오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다니엘이 포로 생활 중에서 예루살렘을 위하여 기도했는데 그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있었다. 예루살렘과 이스라엘의 국가적인 기간은 주전 440여 년 전 페르샤왕 때부터 시작하여 70주로써 결정이 되었다. 70주는 490년을 의미한다. 에스겔 4:6에 보면 1일은 1년이라고 했다. 499년에 죄가 끝이 나고 예언이 다 성취되고 현재의 역사가 끝이 나는데, 69주인 483년에서 이스라엘민족의 역사는 중단될 것을 말했다. 7주와 62주만에 왕인 예수님이 탄생하시고 또 죽으실 것을 예언했고, 로마에 의하여 멸망된 후, 최후에 로마의 부활인 적그리스도에 의하여 1주가 올 것을 말해서 그것이 7년 대환란이고, 이스라엘의 때가 된다. 그것이 이방인이 구원받을 수 있는 이방인의 때가 끝나는 것을 의미한다."(위험한 지구, PP.5-6)
그리고 같은 책 부록에서 미드나이트 크라이(The Midnight Cry)란 잡지의 예루살렘 성전 착공 소식을 소개하면서 이제 그 성전완성을 기점으로 역사가 다 끝나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이 건물을 회당이라고 칭하지만 하나님은 마지막 때에 예루살렘 어딘가에 '성전'으로써 나타날 건물에 대하여 말씀하시고 계신다. 이런 성전은 현재 존재하고 있지는 않지만, 이 예루살렘 대회당은 바로 그 환란시의 성전이 될 것이라는 추측이 점차 확실해지고 있다. 시간적인 요인과, 현대 건축술로 미루어 보건대, 그 건물은 아마도 적그리스도가 언약을 굳게 정할 때(다니엘 9:27), 완공되어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날로부터 매일 제사가 회복되는 날까지 단지 220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다니엘 8:23-24, 9:27)."(위험한 지구, 부록 pp.10-11).
이 점을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이 성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성경예언 연구자들에게 아주 중요하게 여겨지는 이 환란시의 성전에 관련된 몇 가지 사항들을 열거한다.
① 적그리스도는 이 성전에서 많은 거짓 이적 행위를 행할 것이다.(데살로니가후서 2:1-12)
② 적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한 언약을 그가 다시 굳게 정하고, 그의 중요한 활동들의 대부분이 여기에서 재연될 것이다.
③ 그는 예루살렘을 회복하여 중건토록 명령할 것이다.(다니엘 9:25)
④ 그는 제사와 성찬을 시작하도록 허용할 것이며, 또 다시 중지하라고 명할 것이다(다니엘 8:23-24, 9:27).
⑤ 그는 이 성전에서 앉아 자신을 하나님이라 선포할 것이며, 자신은 인간들이 경배하도록 허락된 유일한 신이라 선포할 것이다(데살로니가후서 2:4)
⑥ 이 성전에서 그는 하나님을 모독할 것이다(요한계시록 13:5).
⑦ 이 성전의 지성소 내부에 그의 형상대로 만든 상을 두고 경배토록 할 것이다. 다니엘은 이 형상을, "황폐케하는 자"라고 말하고 있다(다니엘 8:11-14, 9:27, 마태복음 24:15, 요한계시록 12:6, 13:14-15).
⑧ 예수는 이 상이 그 성전에 나타나는 것을 보거든 산으로 도망하라고 유대인에게 말씀하고 계신다(마태복음 24:15-20).
⑨ 예수님의 발이 감람산 꼭대기에 닿을 때, 예루살렘에 대지진이 일어날 것이며 모든 성벽이 무너질 것이다.
비판해 보자
넓게 비판하자면 세대주의적 종말론이 비판되어야 하고, 세밀하게 비판하자면 하나씩 분석·비판해야 한다. 필자는 곧 한국의 종말론을 적극적인 면에서 정리할 날이 있을 것으로 보고 그때 세대주의적 종말론에 대한 적극적인 비판을 하도록 하겠다. 일단 권씨의 겨우 큰 전제가 잘못된 점만을 비판하는 것으로 이 글을 맺으려 한다.
① 연대를 계산하는 방법이 잘못되었다.
한결같이 종말론을 강조하는 자들 속에는 말씀 앞에서 겸손을 찾기 어렵다. 자신의 해석과 하나님 말씀을 동등하게 여겨버리므로 하나님 말씀에 대한 우리 이해의 필연적인 기준과 개연적인 기준을 구별하지 않고 있다. 하나의 전제가 잘못되면 자연히 나머지도 잘못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그 전제에 보편타당하고 객관적인, 그리고 역사적인 성경해석을 하지도 못한 채 바로 그 기준을 적용하고, 응응하니 평신도들은 그 말씀이 맞았는가, 틀렸는가를 생각해 볼 여지도 없이 끌려 다니며 거짓된 교리에 생명을 걸고 마는 것이다.
권씨의 연대계산이 맞으려면 가장 먼저 다니엘 9장의 해석에서 1일을 1년으로 보는 그 해석이 옳아야만 할 것이다. 다니엘 9장의 70이레만큼 이것이 옳다고 정의를 내리기 어려운 부분이 성경 주 어디에 있는가? 그런데 1일을 1년으로 보는 이 견해는 에스겔 4:6에 근거하고 있는데, 그것을 이 다니엘 9장의 70이레 문제에 적용시키려면 다음의 문제가 생기게 된다.
㉠ 성경의 모든 예언은 1일을 1년으로 계산해야 한다는 말이 된다. 권씨는 성경의 모든 예언에 대하여 1일을 1년으로 계산해야 한다고 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렇게 주장하는 자도 없다. 그렇다면 다니엘 4장에서 느부갓네살왕의 일곱 때를 중심해서 1914년에 예수님이 영적으로 임했다는 여호와 증인의 해석과 다니엘 8장의 2,300주야를 2,300년으로 계산하는 안식교의 해석이 틀리다고 말하기 어렵게 된다. 어떻게 에스겔 4장과 다니엘 9장이 연결되는지를 밝히고 1일을 1년으로 계산할 때와 그렇지 못한 때의 기준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 길이 없다.
㉡ 1일을 1년으로 잡을 때, 70이레의 시작 연대를 잡을 길이 없다. 같은 계산 방법을 통하여 이요한 씨는 그 기준을 고레스 원년인 538년으로 잡았고, 권씨는 440여 년으로 잡았다. 만일 이씨처럼 앞의 연대로 잡으면 계산상 모순이 발생하고, 권씨처럼 후의 연대를 잡으면 성경해석적인 모순과 연대계산상의 모순을 둘 다 낳게 된다. 이 점을 살펴보자.
② 연대를 계산하는 기준이 잘못되었다.
같은 다니엘 9장의 70이레 문제에 3가지 기준점이 생겼다. 첫째는 안식교인들의 아닥사스다 7년 주전 457년(사실은 458년임)으로 보는 견해가 있고, 둘째는 세대주의자들의 아닥사스다 20년으로 주전 445년이요, 셋째는 고레스 원년인 538년으로 보는 견해이다. 앞의 두 가지는 1일 1년설을 따르고 있으며, 셋째는 1일 1년설을 비교적 취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세 가지 기준점이 나온 공통점이 무엇인가 하면 다니엘 9장의 '예루살렘 건축령'이란 역사적 근거이다. 예루살렘 건축령이 예루살렘 성읍 건축령인지, 성건건축령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에 따라 본문해석도 그 기준도 달라진다. 그러나 둘 다 포함시켜 볼 때, 예루살렘 건축령이 오직 네 번 내려졌는데, 즉 고레스 원년 538년, 다리오 2년 520년(완성은 516년), 아닥사스다 7년 458년, 아닥사스다 20년 445년이 그것이다. 필자는 만일 1일 1년설을 취하려면 차라리 445년 보다 안식교의 457년이 더 타당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점에 대한 논쟁은 그만두고 권씨의 이론만 비판하자. 권씨의 기준은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 다니엘 9장의 예루살렘 중건령이 성전 중건령인지, 성읍 중건령인지 밝히지 못하고 있다. 권씨는 기준을 잡을 때는 성읍 건축령으로 잡았는데(아닥사스다 20년의 명령은 성전과는 관계가 없는 성벽 건축령이었으니까) 그것을 적용할 때는 1980년대의 예루살렘 성전 건축과 연결시키더니만 그것을 다시 그 성전을 이용하여 성읍을 재건할 사탄의 역사와 연결시켰다(위험한 지구, 부록 p.14).
㉡ 25절 한 절의 '예루살렘 중건령'의 예언을 두 가지로 사용했다. 그 하나는 연대의 기준을 잡을 때 사용하여 445년으로 잡았고, 그것을 말세에 예루살렘 성전이 완성된 후 사탄에 의해 예루살렘 성읍을 재건한다는 미래의 예언성취의 측면에서 사용했다. 그 근거를 밝힐 길이 없다. 물론 그 기준을 아닥사스다 20년의 영으로 잡은 것도 틀렸지만 본문은, '예루살렘 중건령이 날 때부터' 69이레 후에 기름부음 받은 자가 나타난다고 했으니, 오직 연대의 기준을 잡을 때만 사용되는 말이다.
㉢ 연대의 기준이 왜 주전 445년으로 잡혀야 하는지 설명할 길이 없다. 예루살렘 성전 및 성읍과 관계된 명령은 4차에 걸쳐 있었는데 왜 성읍 보수 명령이 내려진 445년으로 잡아야 했는가? 저들이 그렇게 밖에 할 수 없는 그 이유는 간단하다. 1일 1년 설의 비교적 합리적인 해석처럼 보이는 유혹을 이기지 못한 증거요, 그 계산법에 의해 예수 그리스도의 출현과 맞출 수 있는 연대는 주전 440여 년이 되어야 하니 결국 아닥사스다 20년의 조서를 취하게 된 것일 뿐이다. 더욱이 권씨는 그 연대마저 445년이라고 하지도 못하고, '주전 440여 년 전부터 시작하여'라고 했는데, 그 점도 분명하지 못한 해석이다. 1일을 1년으로, 69주는 483년이며, 70주는 490년이라고 하는 명확한 연대계산이 명확하지 못한 데서 출발한다면 역시 모두 명확하지 못한 것이 될 뿐이다. 그런데 이 세대주의적 해석은 차라리 안식교의 해석보다 더 못한 것이 되어버린다.
사실 이 세대주의적 해석은 한국 교회를 가장 넓고 깊게 사로잡고 있는 종말론으로서 1000년 왕국이니, 144,000이니, 2000년이니 하는 숫자놀음에 불과할 뿐이며, 이중 심판교리가 나오게 되고, 구원마저 다원적인 것이 되어버렸다. 더욱이 권씨의 경우 예수께서 우리를 떠나가신 것처럼 성령도 가시는 날이 온다는 반삼위일체적이요, 반성경적인 희안스러운 주장까지 하게 되었다(위험한 지구, pp.26-28).
후기: 구원파를 경계하라
양의 탈을 쓴 이리와 같은 이단의 특성을 가장 잘 살린 이단 중의 이단이 소위 '구원파'이다. 그런 점에서 요즈음 권신찬 씨나 이요한 씨 보다 박옥수 씨가 더욱 한국 교회에 위협적인 존재로 나타난다. 많은 기성교회 목회자들 중에 구원파와 깊이 관계가 되어 있는 자를 알지 못한 채 그들과 교제하고 있으며, 심지어 그들을 교회 단상에 세우는 경우가 많다. 그 중에 하나가 박옥수 씨 파에 속해 있는 평신도 선교사 김성준 씨이다. 현재 남미 아마존강에서 선교를 하고 있으며, 도움 없이 스스로 선교한다고 자처함으로 기성 교회로부터 많은 인정과 동정을 받고 있다.
어쨌든 구원파 경계해야 한다. 더욱이 그릇된 종말론을 인용하여 하나님 나라 건설이 아닌, 구원파 이단 왕국건설에 힘쓰는 이리 떼에게 양들을 빼앗기지 않도록 복음의 울타리를 든든히 쳐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