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승대(搜勝臺)
2011. 9. 18.
수승대(搜勝臺)유래
이곳은 경상남도 거창군 위천면 황산리 황산마을 앞 구연동이다. 옛날 삼국시대에는 신라와 백제의 국경시대였고 조선때는 안의현에 속해 있다가 일제때 행정구역 개편으로 거창군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곳에 있는 수승대는 옛날 삼국시대 때 백제의 국세가 쇠약해져서 멸망할 무렵 백제의 사신을 이 대에서 송별하고 돌아오지 못함을 슬퍼하며 송별하였다 해서 수송대(愁送臺)라 하였다. 그후 조선 중종때 요수 신권(樂水 慎權)선생이 은거하면서 구연서원(龜淵書院)을 이곳에 건립하고 제자들을 양성하였고 대의 모양이 거북과 같다하여 암구대(岩龜臺)라 하고 경내를 구연동(龜淵洞)이라 속칭함과 동시에 대위에 축을 쌓아 솔을 심고 대밑에 보를 만들어 고인 물을 구연(龜淵)이라 하였다. 서기1543년 퇴계 이황(退溪 李滉)선생이 안의현 삼동을 유람차 왔다가 마리면 명승리에서 급한 정무로 환정하면서 이곳에 오지 못하고 대명을 수승대(搜勝臺)라 고칠 것을 권하며 사율시(四律詩)한수를 보내니 요수 신권선생이 대면에 새겼다. 이 경내에는 구연서원(龜淵書院) 사우(祠宇) 내삼문(內三門) 관수루(觀水樓) 전사청(典祠廳) 요수정(樂水亭) 함양제(涵養濟) 정려(旌閭) 산고수장비(山高水長碑)와 유적비(遺蹟碑)등이 있는데 이는 전유림과 거창신씨 요수종중에서 공동 관리하고 있다.
요수정(樂水亭)
요수정은 요수 신권(樂水 慎權, 1501~1573)선생이 풍류를 즐기며 제자를 가르치던 곳으로 1542년 구연재와 남쪽 척수대 사이에 건립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고 그 뒤 다시 수혜를 입어 1805년 후손들이 현 위치로 이건하였다. 요수선생은 조선시대 유학자로 학문에 뜻이 깊어 널리 성현을 찾아 배웠으며 벼슬을 멀리하고 안분낙도(安分樂道)에 힘썼다. 돌아가신 뒤에는 구연서원에서 배향(配享)하도 있다. 요수정은 정면 3칸, 축면 2칸의 규모로 자연 암반을 그대로 초석으로 이용하였다. 정자의 마루는 우물마루 형식이고 사방에 계자난간을 둘렀다. 종보가 있는 5량 가구로 가구의 짜임이 견실하고, 네 곳의 추녀에는 정연한 부채살 형태의 서까래를 배치하여 세부장식에서 격조 높은 정자건물의 양식이잘 반영되어 있고, 특히 추운 산간지역 기후를 고려하여 정자 내부에 방을 놓는 등 지역적 특성이잘 반영된 거창 지역의 대표적 건축문화재이다.
거북바위
구연서원 관수루(龜淵書院 觀水樓)
경상남도 거창군 위천면 황산리 769
관수루는 요수 신권(樂水 慎權), 석곡 성팽년(石谷 成彭年), 황고 신이수(黃皐 慎守彛)선생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하여 사림이 세운 구연서원의 문루로 1740년(영조 16년)에 건립하였다. 관수(觀水)란 ‘맹자(孟子)“에 ”물을 보는데(觀水) 방법이 있으니, 반드시 그 물의 흐름을 봐야 한다. 흐르는 물은 웅덩이를 채우지 않고는 다음으로 흐르지 않는다.“고 한 말을 인용한 것으로 군자의 학문은 이와 같아야 한다는 뜻으로 이름 지었다. 누각은 일반적으로 군현의 관아 소재지의경치가 수려한 곳에 세워서 고을의 현감이나 중앙의 관리들이 일정한 날을 택해 인근 선비들을 불러 시회(詩會)나연회를 열기도 하고, 평소에는 고을 사람들이 올라 쉬거나 더위을 피하는 장소로 이용하였다. 따라서 누각은 고을을 상징하는 대표적 건물이 되기 때문에 사찰의 대웅전 앞이나 향교와 서원의 입구에 세워 그 건물의 격을 높이는 역할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