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西生敎會 福音의 始作 ★
"蔚山郡 西生敎會가 成立하다. 初 에 朴次俊이 信敎하고 新坪敎會에 來往하더니 信者 日加하여 禮拜堂을 新築하니라."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 P300-11면>에 이렇게 기록되어있다.
1.서생교회의 지리적 입지
서생교회는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울산남노회) 소속된 교회로 울산광역시 울주군 서생면 진하들길6-3에 위치하고있다. 북쪽은 회야강을 끼고 있으며, 인근에 온산읍 강양리. 삼평리를 접하고 있고 서쪽은 온양읍과 경계하며, 남으로는 기장군 장안면과 접하며, 동으로는 동해에 접한 진하 해수욕장과 명선도 그리고 한반도에서 해가 가장 먼저 뜬다는 간절곶 등대가 있다. 한편 남서쪽에 성내마을 뒷산 일명 봉화성에(해발200m) 왜성이 산정동북면 산록에 계단식으로 약4.2km 세워진 성이다. 1593년(선조26년)에 왜장 가토기요마사(加藤淸正 )가 축성한 성으로 울산광역시 문화재자료제8호로 보존하고있다. 대동지리지에 의하면 동안군을 울산광역시 남쪽 50리 지점에 있는데 본래 신라의 生西浪이며 서생포진(西生浦鎭)을 설치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서생면은 1962년11월21일 동래군에 편입되었다가 1973년 1월 1일 양산군 관할에서 1983년 2월15일자로 울산광역시 울주군에 복귀하였고 1945년해방 이전에는 면소재지가 진하리에 있었다. 진하리는 인근 화정.서생리와 인접하여 동일 생활권을 이루고있다. 서생교회가 설립되어 소재한주소가 진하리151번지였고.다음이 서생리 448 번지에 신축 이전되었고 현 주소는 세 번째이다.
2.서생교회 설립 전 후의 시대적 배경
역사를 소급해서 1884년(고종21년)에 김옥균을 비롯한 급진개혁파가 개화사상을 바탕으로 조선자주독립과 근대화를 목표로 일으킨 갑신정변이 일어났고, 그 이듬해 1885년 4월 5일 에는 미 북장로교선교사 언더우드 목사와 미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부부가 인천제물포 항을 통해 정식으로 기독교복음이 이 땅에 상륙하고,1893년 동학농민혁명이 천도교주축으로 전라충청도에서 일어났으며,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여 러시아가 패배하므로, 만주와 한국지배권을 두고 세계1차대전의 전초전이 되었고. 1905년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위해 강제로 체결한 <을사조약>.1907년 평양대부흥집회가 있었고. 1910년 <한일합병조약>으로 대한제국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통감인 데라우치마시타케가 형식적인 회의로 일본제국의 식민지로 만드는 시대 속에 미국을 비롯한 외국 선교사들이 밀려들어와 국내 혼란기에 함께 기독교복음이 확산되어 들불처럼 번져가는 효시가 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환경에 맞춰 호주 장로교 선교부가 부산 동구 좌천동을 기점으로 수많은 선교사들에 의해 울산 까지 복음의 경로를 따라 호주선교사들이 믿는 하나님의 복음이 서생교회를 이루게 했다.
3. 초기 복음이 울산땅으로 전파된 경로
1) 미 북장로교선교부의 부산을 기점으로 한 울산순방 경로
윌리암베어드(1862-1931)선교사의1)<선교일기>에부산에 정주하면서 부산과 경남과 경북을 네차례나 순회전도한 사실을 “1893년 4월15일부터 5월18일 까지 서경조전도사와 같이부산을 떠나 동래.삼량진.밀양 청도. 대구. 상주. 안동. 의성. 영천. 경주를 돌아 울산을 거쳐 다시 부산으로 돌아가 1,200리의 긴 전도 여행을 했다.“그렇다고 하면 베어드 선교사의 울산순방전도 여행이 초기 울산복음에 영향을 미쳤음을 인정하지 않을수없다.. 역시 미북장로교 선교부 소속인 안의와(1867-1929)선교사를 빼놓을수없다.그는 1895년 5월29일 부산에 입국하고 2년후인 1897년 대구로 이동하여 미 북장로교선교지부를 설립했으며 경북지역에 많은교회를 설립했다.
2) <윌리암 베어드의 선교일기> 이상규 교수 저. p 78 인용
울주군 두동면 은편교회 김재영씨가 쇠부리장사차 대구까지 왕래하던중 안의와선교사2)에게 전도를 받아 1899년에 은편교회가 설립되었고 울주군 두서면 전읍교회도 1901년 안의와 선교사에의해 설립된것을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 p89면>에서 총회 보고된 자료에 의하면 “울산군 전읍교회가 성립하다. 선교사 안의와. 조사 서성오전도로 김재영.김용주.이성옥.김현가.정차만.이기연.최위백 등이 信主하고 대밀리에 이전하니라” 미북장로교 선교부는 1891년부터1914년까지23년간21명의 선교사를 부산에 파송하여 선교사역을 감당했다.
3) 호주 장로교선교부의 부산을 기점으로한 울산순방 경로
호주장로교 첫 선교사로 내한한 데이비스 선교사가 부산에서 천연두와 폐결핵으로 순직한 후 두번째 파송한 멕카이목사부부.미혼선교사 멘지스.페리.퍼셋 5명의선교사는 1891년 10월12일 부산에도착하여 부산진 좌천동에 호주선교부 부산진지부를 설치하고 4) 선교
부가 활동하기 시작했다.이어1892년 3차로 미혼선교사 무어.(1895년12) 브라운(1868-1954)1894년5월20일 아담든
목사(1860-1915). 1900년10월29일 왕길지목사(1868-1939)부부와 세자녀.1910년 2월21일 맥켄지목사(1865-1956). 1912년 예원배목사(1880-1971) 파송까지 호주선교부는 78명의 선교사를 부산경남지방에 파송하여 선교활동을 펼쳤다. 미혼선교사 멘지스.페리.퍼셋.무
어.1895년에 입국한 브라운까지 미혼선교사들은 치료와 예방접종 그리고 위생과 의료봉사할동으로 점차 주민들과 친숙해지면서 선교의무를 감당했는데 병영교회의 설립자 이희대씨는 울산에 오기전에 이미 부산진교회의 신자였고 평소 따뜻하게 대해주며 가르쳤든 멘지스여선교사와 가까웠고 멘지스외 미혼여선교사를 울산에 초청하여 동네부녀자들에게 복음을 제시하고 후에 브라운선교사도 합류하여 온산읍 목도와 청량면 학동에 까지 전도하여교인이 늘어나게 되었다고한다.
한편 손안로선교사의 활동사역지는 1차 부산. 기장. 서생. 양산. 언양. 울산.병영.감포..장기.경주(1895-1901)2차부산.마산.함안.의령.진주.고성.통영.거제(1901-1914)이며, 왕길지선교사는 선교지탐색차 기장.서생.울산.언양.병영.경주.포항(1900-1905) 1911-1938년 부산.울산.기장.서창.언양.울산.병영.경주.포항을순방하였고.맥캔지선교사.동래.기장.서생.온양.울산(1912-1916). 예원배선교사 부산.언양.양산.김해(1914-1915) 사역지 동래.양산.밀양.울산.(1922) 부산.해운대.기장.서생.울산(병영.은편.반천.장검.전읍..천전.월평.보은)(1929-1942)으로 호주선교부의 울산선교경로는 1)부산좌천동지부에서 동래를 거쳐 양산.밀양.언양.울산을 종점으로의 경로와
2)좌천동지부에서 동래.서창.언양.울산. 경주.감포.장기까지이르는 경로와
3)좌천동지부에서 해안가로 해운대.송정.기장.일광. 서생. 울산에 이르 는 세가지경로를 이용하여 울산선교의 거점을 보여주고있다.
호주선교부의 선교의 연대는 1891년-1942년 까지 51여년간 부산.울산지역복음화에 생명을 내걸고 헌신하신 선교사님들의 숭고한 복음전파의 열정으로 100년이 넘은 오늘교회가 13개처교회가 오늘날 600여교회로 성장하였다. 이처럼 호주선교사들, 특히 왕길지.맥캔지.예원배선교사의 수없는 선교 순회방문(1900-1942)이 울산지역에 가장 많은 영향력을 끼친것으로 평가된다.
4.서생교회를 설립한 박차준씨의 결혼과 복음의 관계
1) 박차준씨의 가계와 혼인 행차
울산시 울주군 서생면 진하리 151번지에 살던 박윤달씨와 최금례씨 부부의 가정은, 당시 2남 차준 3남 문준. 4남 성준. 장녀 순남. 차녀 순란 4남 2녀를 둔 다복한가정으로 있었는데, 그 가운데 둘째아들 차준씨가(20세) 혼기가 차서 여러곳에 혼담이 오고 갔으나 마땅한 규수를 찾기 어려운 차에 마침50여리떨어진 기장군 일광면 신평리에 능주구씨댁 19세난 구연호(부인 이진찬)씨의 맏딸 구향란(19세) 규수가 있어 맞선을 보게되었다 . 9월에 맞선을 본뒤에 쌍방간에 혼약을 맺자하여 마침내 길일을 택하고 혼사일자를 잡았는데 그해 동짓달 초이레날로 택일하고 그러니 1905년 11월 7일로 쌍방잡으니 혼사일이 겨우 두달정도 남았었다.관례를 따라 신평규수댁에서 혼례를 치르기로하고 신부가 시가댁 신행은 해묵이로 하기로 약정했다 그러니 결혼 3년차에 우귀키로 약정하고 양가는 혼사 준비에 분주했다. 마침내 혼례일이 되어서 신랑 박차준은 대마를 준비하여 타고 혼주어른과 상객들과 함께 아침 일찍 50리길을 떠나 한걸음으로 신평마을 어귀에 들어서니 온 동내가 “중추의관”어르신 맞딸 혼례라고 반겨주었다. 말을 타고오는 신랑을 보고 신랑이 잘생겼다고 아이들이 조잘대며 따른다. 잔치집 신부댁 대문에 당도하니 마당에 쳐 놓은 채양아래 축하객은 상을받고 음식을 나누며 예식을 기다린다. 드디어 정한 시간에 신부집 마당에 명석을 깔고 대례상을 놓고 혼례가 시작되었다. 대례식이 끝나고 신랑신부 한 방에들어가 신부의 족두리를 신랑이 벗겨주고 대청마루에서 폐백을 드리고 사돈간에 덕담을 나눈뒤에 폐백 뒷음식을 상자마다 포장하여 말짐에 실은 후 이틀동안 처가댁에 머물렸던 신랑은 3일만에 장모님의 사랑도 뒤로하고 귀가 했으나 신부를 두고 온 마음은 좀 처럼 안정이 힘들었다. 얼마후 설 명절후에 건어물로부터 선물꾸러미를 준비해서 처가댁으로 가서 장인.장모님 처가식구를 뵙고 어르신들 안부도 전하고 한 이틀 머문뒤에 다시 하직 인사를 나누고 상객들은 떠났다. 신랑은 처가댁 절차에따라 새신랑 다루는 일에 참여하여 여러 절차를 거치면서 처가댁 식구들게 밉상을 부리기도했다. 본가로 오니 섭섭하기 그지없었다.
어느듯 세월이 빨라 신부는 임신하게되었고 만삭이 된 신부는 가을도 다거둔 시원한 동짓달 스무이레날(1906년) 초 저녁에 큰 고통없이 순산에 살림밑천 첫 딸을 순산케 되어 온 처가댁 식구들이 기뻐했다. 외조부 되신 구연호씨는 자기대에 첫 손녀를 보게되어 기뻐하시며 외손녀의 작명을 하셨는데 永(길영) 淑(착할숙)영숙이라지어 부르시고 무척이나 기뻐하셨다.
2) 구연호씨가 호주선교사 왕길지 목사로부터 복음을 받다.
구연호씨 가정에 외손녀 박영숙이 세칠을 지난 어느날 호주 선교사인 왕길지목사가 방문하여 “예수는 우리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리사 피 흘려 돌아가셨는데 그 피로 우리는 죄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는다“말씀하시며 구선생님과 온 가족이 예수믿고 구원을 받으라“고 하니 “예. 예수 믿겠습니다”라고 대답하시고 그 날로부터온 식구가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게 되었다.왕길지선교사님 일행을 극진히 대접하고 친 밀한 대화를 나누고 난뒤기장으로 떠나셨다. 그 이후 구연호씨는 십수명이 넘는 동네 사람들을 예수믿게 전도하고 주일이면 구연호씨댁에 모여 호주선교사 왕길지목사님과 정덕생조사를 모시고 예배를 드렸는데 점차 모이는 사람들이 많아서 자력으로 신평예배당을 신축하고 주일이면 예배당에서 예배를 보기 시작했다고 한다.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2권>p187면에 의하면 “1912년 동래군 신평교회가 설립하다.초에 선교부 왕길지. 조사 정덕생 전도로 구연호와 수십 여인이 일시 신도하고 예배당을 신축하니라”라고 총회에 보고된 기록이 보존되고있다.구연호씨 묘비에는 <서기1906년 기독교 복음신봉. 5개 교회당 설립>이라 기록되어 있다.
3) 박차준씨는 장인 구연호씨로부터 복음을 전수받다.
박차준씨는 첫딸 박영숙을 얻고부터 신평 처가댁에 자주 들렸다.1906년 연말경에 장인 어른 으로 부터 호출을 받고 신평 처가댁으로 단숨에 갔다. 그 날 따라 처갓집 대접이 장모님으로부터 극진히 대접받고 장인 어른께서 자기방 사랑채로 사위를 부르시고 영숙이 세칠후에 호주선교사 왕길지목사로부터 복음을 받은일과 손녀가 태어나서 예수믿게되어 큰 축복을받게됨을 자초지종 말씀하시고 내가 믿는 예수를 함께 믿자고 요청하셨다.박차준씨는 장인께서 소상하게 믿게된 일을 듣고 예수믿겠노라고 대답했다.앞서 복음을 받은 장모님.처 구향 란씨도함께 기뻐하며 그 날로부터 믿는 도리를 배우며 가족이 예수를 믿게되었다.장인께서 왕길지 선교사님이 주일 오게되니 목사님을 통하여 믿는 도리를 배우라 말씀하시고 왕길지선교사님 말씀잘듣고 주일을 보고 돌아왔다. 아울러 왕길지 선교사님께서 서생교회가 설립되면 적덕생조사와 같이 가서서생교회를 돕겠다고 약속해주셨다. 본가에 돌아온 박차준씨는 우선 부모님들께 예수믿게된 동기를 말씀하시니 부모님들도 함께 믿기로 약속하고. 동네친구 박동하에게 전도했더니 부부같이 믿겠다고 약속해주었다. 강건너 이웃마을에 사는 정소식.김미동.박춘동내외도 예수믿겠다고 약속받았다. 무려 10여명이 넘는 사람이 새신랑 박차준씨에게 약속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이 아닌가. 박차준씨는 본가 사랑채 초당으로 쓰고있는 방을 수리하여 기도소로 정하고 1907년 3월17일 주일부터 날자를 받고 장인께 연락을 드렸드니 왕길지선교사님과 정덕생조사와 함께 오겠다는 전갈을 받고 약속한 모든분을 초청하여 왕길지목사의 설교로 서생기도소 설립예배를 드렸다.20여명이 넘는사람이 모여 예배를 드리니 서생교회의 시작이였고 구연호씨는 사위 박차준씨가 이렇게 예수믿고 서생기도소를 설립함에 큰 감동을 받았다고한다.
구연호씨는 개회예배에 앉을 자리가 없어 마당에 앉아 예배 보는 모습을 보고 마음에 감동을 받아 딸이 우귀하기전에 예배당을 건축해야겠다고 마음에 작정하고 돌아갔다. 그해 초가을 신평으로부터 연락이왔다. 박서방집 대문밖 텃밭에 12평 예배당을 착공하자고 연락을 받고 그날로부터 박차준씨는 (서생면진하리151번지) 텃밭에 땅을 파고 예배당 공사를 시작했다.친구 교인들과 예배당 공사를 하니 더욱 힘이났다. 공사를 시작한지 두달쯤 되었을때는 예배당 윤곽이 뚜렸이 드러났다.장인 구연호씨는 사위가 예수믿고 서생교회를 설립하고 딸 구향란이 첫손녀와 같이 시집으로 우귀해가니 기념교회로 건축하여 서생교회에 기증 하게되었으니 얼마나 감사한일이 아닌가.
4) 신부 구향란씨가 복음과 함께 시댁으로 우귀하다.
신부 구향란씨는 친가에서 첫딸 영숙을 얻고 순산후 세칠뒤에 친가에서 복음을 받고 이제 시가로 우귀하게되었으니 하나님의 축복이 얼마나 큰지!드디어 시댁으로 신행길에 나셔야했다. 1908년 4월14일 따뜻한 늦은 봄날 3년 해묵이로 신행에 앞서 정들었던 식구들이며 길러주신 어머니 까지 두고 신랑따라 시댁으로 가려하니 마음이 너무울적해서 전날 밤에는 친정 어머니를 붙들고 한없이 울었다. 친정 식구들의 부축을 받아 가마에 올라앉는데 쪼작 걸음마로 딸 영숙이도 함께 가마에 탔다.친정 식구들을 뒤로하고 신랑 박차준씨를 따라 50리 신행길이 시작되었다.친정 아버님과 상객.대반도 함께 떠났다. 몇차례 로정에서 쉬었다가 해가중천에 기울때 쯤 진하리 어귀에 이르니 마을사람들이 반겨맞아주며 시댁에당도하니 큰 잔치로 신부를 맞이해주었다.구연호씨는 손녀 영숙 손을 잡고 쪼작걸음으로 대문에 들어서니 하객들이박장대소하며 신부와 아기를 맞이해 주었다.상객들을 사랑방에 모시고 차린음식으로 대접하며 사돈과 덕담을 나누고50리 먼길이라 일직 일어나 행차에 나서는데 친정 아버님을 배웅하는 신부는 눈물로 하직인사를 나누었다.
5) 서생교회의 시작
1910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에 기록된데로 서생교회설립자 박차준씨는기장군 일광면 신평리 신평교회 장인 구연호씨로부터 복음을 전수받고 예수를 영접하였으며 시대적으로 어려운 역사적 환경속에서도 조금도 외적 구애를 받지않고 순적히 주님의 지상명령에 순종하여 교회를 든든히 세워갔으며 년륜이 짧은 신앙생활에도 불구하고 초기에 거뜬히 서생교회를 세워가심에 감사하지 않을수없다.복음을 받고 3년도 채 안되는 기간에 많은 사람을 교회로 인도하고 예배당 까지 건축하여 교회의 사명을 이루어가심에 감사의 갈채를 보내고 싶군요. 당시 많은 교회들이 선교사님에 의해 이루어 진 교회가 많은데 유독 서생교회는 성령의 역사가 강하게 작용하여 믿은지 얼마되지않은 구연호씨 께서사위되신 박차준씨에게 복음을 전수하여 세운 교회로 하나님의 섬리하심의 역사를 감사치 않을수없다.
박차준씨는 서생교회의 초대영수로“ (경남노회 각 교회제직명부<1924>)의하면1920년대에조사자료로 울산군서생면진하리교회 영수 박차준“으로봉직하셨으며 1928년자료에 영수 박동하씨로 신임 영수로 추대되었다.1924년 평동(대송)교회를 맥캔지선교사께서 설립
하고 추대홍 영수께서 섬기다 1928년경에 서생교회와 합병하였으며 1924년7월1일 제17회경남노회록에의하면 “울산 서생교회에 다니는 우봉리교인들이 강을 건너 다니는 형편이 심히 곤란하고 또한 교인수도 많사오니 분립 허락하여주시기 원하오며”로 청원하여 1925년경에 우봉교회로 분리독립하였고.1944년 6월 조선총독부 강제명령10개조항중 제2항에 의거하여, <교회를 병합하여 한 지역에 한 교회를 만든다>로 당시 노회장 김길창목사는 우봉교회를 매각하여 그 대금을 총독부에 납부함으로, 일시에 예배당을 잃고 부득불 우봉교회 교인들은 다시 서생교회와 합병하여 서생교회에 나가게되었고, 1945년 8월15일 해방으로 인하여 다시 우봉교인들은 온산면 우봉리 김미동영수님 주택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 조선예수교장로회 경남노회록에 기록된 서생교회에 대한 기록은 아래와 같다.
1.1920년 12.15일(제10회)부산시찰보고:서생평동 두교회에 노인주조사시무키 원하오며.
2.1923년1월10일(제14회) 임성옥목사는 울산서생교회와 평동교회에 각각 조사로 시무케하였으며.
3.1925년12월29일(제20회) 서생교회조사최종수씨는사면.울산서생부근3처 교회와 기장 5처교회에서 월봉30원으로 우명범씨를 조사로 청원허락요청.
4.1927년7월5일(제23회) 울산서생,우봉.평동3처교회에 박석만씨를 조사로
※ 홍성만 조사의 글 (1928년-1931년)
*1928년부터 1931년(4년)간 울산서생교회외 5처교회를 공동목회한 홍성만조사의 글을 아래와같이소개한다(서생교회.우봉교회.남창교회.덕하교회. 방어진교회5개처 교회) 11) 서생지방으로 목회지를 옮겼다.울산동해안으로 나가 울산지역의 서생.우봉.남창.덕하.방어진 등 5개교회를 시무하였다영수한분.남여집사 수명식이었고 주일학교 아이들이 10여명.주일 출석교인 이 20여명가량이였다. 과거에 좀 왕성하였으나 전도사들의 잘못으로 핍박을 받아 약하게 되었다고하였다.그 동쪽으로 한 오리쯤 되는곳에 우봉교회가 있었다.영수1명.남녀집사가 수명. 이곳에 오게된것은 당시 성경학원 동문인 손양원전도사가 나병원교회파송으로 울산남창에 와서 전도하여 신자가 7-8명을 얻어 남창교회를 설립하고 있는 중이였다.(1928~1931) 그 주변에 있는 교회들이 아주 약함을 알고 그 교회들을 모아 한 전도사 구역을 만들어서 나를 추천, 소개하였다. 그래서 그 지방으로 가게 되었다 서생교회는 오래된 교회였다. 해변이라 어업과 농업을 겸하고 있는 곳이다.명씩있고 출석교인이 한 10여명 되는 약한 교회였다...(중략)... 다음 해에는 서생교회에 거주하게되었다. 그 곳에3-4년을 시무하였다고 기억한다. 이곳 목회중 1931년 봄에 평양신학에 입학하였다.한 학기를 공부하였다.당시 교회를 시무하면서 신학공부를 하려면 1년에 한 학기(3개월)만 허용되었다.신학교는 한 학년이 3학기씩이였고 3년간이였다. 그래서 목회하면서 신학교를 졸업하려면 9년이 소요되었다.이러한 상황에서 나는 결국 신학을 한 학기만 하고 포기하였다.
6) 셋째 따님 박영선 권사 후손이 서생교회를 지켰다
박차준영수님의 후손으로 셋째 따님이신 박영선권사(朴永善) 남편정석남집사(鄭錫南)님이야기를 빼어 놓을수없다 어려운 서생교회를 위해 친정 가족들이 부산으로 사업을 따라 박건종동생(부전교회)1952년경에 이거하시고 숫한 세월동안 서생교회를 묵묵히 헌신해 오시다가 진하리151번지 소재 예배당을 서생리448번지로 이전 신축한것도 모두 담당하셨다. 장남되는 정성환(鄭聖漢)씨가 부산상업고등학교시절 배구대표선수로 활동하다가늑막이발생하고 내장에 다발증세로 난치병이 발생하여 입원 했던 부산적십자 병원으로부터 사형선고와 같은 의술로는 불가능하니 장지를 준비하라는 통고를 받고 사경을 해매였으나. 퇴원하여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으로 기적같이 건강을 회복하고 서생교회의 초대 장로로 1988년도에 장립하여 서생교회의 어렵던 시기에 주님의 교회를 충성스럽게 헌신하였고 그 때부터 서생교회 당회가 조직되었으며 정성한 장로는 2010년3월12일 하나님의 부르심을받아 소천하셨다.
지금은 부인 권찬화 권사님 슬하에 2남1녀를 두고 장남 정도영집사.차남 정재영집사. 장녀 정미경(부산) 자녀들이 대를 이어 서생교회를 섬기며 봉사하고 있다. 정석남집사는 당시 아들 정성한 장로가 기적같이 치유됨을 보고 지난날을 회개하고 교회당 부지(서생리448번지)를 기증하고 교회당 건축에 크게 기여하여 새 예배당을 신축하였고 그 후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정석남집사님과 정성한장로 부자는 교회앞과 후손들 앞에서 훌륭한 신앙의 본을 남기셨다 .
※ 注記
“서생교회 복음의 시작” 필자는 서생교회 설립자 박차준 영수님의 장녀 박영숙집사의 장남 김종익장로(울산교회 원로장로)이며 외조모님 구향란집사 구증, 어머니 박영숙집사(울산교회).의 구증과 마즈막 육녀 박복순권사(부전교회.2015년도 소천) 구증으로 기록되었고 박차준영수님의 손자박상문집사(부산 새한교회), 손녀 박금옥 전도사(부산 하늘샘교회)와 사녀 박막숙권사의 삼남 김의영장로(부전교회). 정성한 장로의 장남 정 도영집사(서생교회)의 협력으로 기록하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