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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5월 31일(금) 저녁 7시, 종로3가 낙원상가 4층 낙원홀 강의 텍스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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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적 무교회사상의 전개
노평구의 민족 이상
‘무교회사상’이란 제목이 생소하게 느껴질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 용어는 노평구가 《성서연구》 제471호(1996년 11월)에서 했던 말이다. 노평구는 〈한국에서의 무교회사상의 전개〉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철학, 사상, 종교, 예술 등 정신적인 일은 언제나 민족 독자적으로 전개되기 마련이다. 그래서 이것이 해당 분야의 인류적인 전개에 기여하게 된다. 이것이 인류사에서 각 민족 존립의 신적인 섭리의 깊은 근거가 되는 것이며, 모든 민족사의 궁극적인 사명이기도 하다. 세계사에서 민족의 존립과 흥망성쇠는 오로지 이 민족 사명의 성취 또는 몰이해나 거부와 깊이 관련된 것이다. 우리 무교회의 민족 독자적인 전개는 이것이 외부 또는 기독교 내지 세계사에 대한 기여에까지 이르지 못하면, 그것은 또한 우리 자신, 우리 민족 자체에 대한 기여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각자 신앙인으로서 이에 대한 분명한 책임을 느껴야 할 것이다.
노평구의 원대한 포부와 민족 이상이 뿜어나온다. 무교회라는 또 하나의 교회를 만들어 그 우물 속에 기어들어가 안주하려는 태도가 아니다. 무교회를 발판 삼아 세계로 뻗어나가려는 젊은 기백이다. 노평구가 이 글을 썼을 때 83살이었다. 이기백 교수의 말처럼 “영원한 청년 노평구 선생”이다.
노평구는 무교회사상이 세계사에 이바지하지 못한다면 민족에 대해서도 이바지할 수 없게 된다고 했다. 헤겔이 《역사철학》에서 말한, 각 민족의 세계사적 사명을 염두에 두고 한 말씀이다. ‘행동行動 반경’이란 말이 있다면 ‘사고思考 반경’이란 말도 가능하다. 선생의 ‘사고 반경’은 기본값이 ‘우주와 세계’였다.
노평구는 ‘우리 무교회의 민족 독자적인 전개’가 그 선결 조건이 되어야 한다고 한다. 아울러 그 책임은 김교신·노평구라는 무교회 지도자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모든 무교회인이 “각자 신앙인으로서 이에 대한 분명한 책임을 느껴야 한다”라고 했다.
《진리와 독립》
1960년에 노평구가 편집 책임을 맡아 간행한 《진리와 독립》에 ‘우리 무교회의 민족 독자적인 전개’의 구체적인 실행 방안이 제시되었다. 《진리와 독립》은 1960년 1월부터 8월까지 제8호를 간행하고 중단된 월간잡지다. 필진으로는 유희세(수학, 시편), 이재각(교육, 요한복음), 주옥노(교육, 성서일반), 김정환(교육학), 유정식(영문학, 밀턴·칼라일), 이환(불문학, 파스칼), 김동길(역사학자, 미국사), 구본술(의사, 과학), 조요한(희랍철학, 플라톤), 고병려(영문학, 마가복음), 손정균(안과의사), 이지성(외교관, 대만전문가), 송석중(영문학, 브라우닝), 지명관(종교학), 김종길(철학, 칸트), 송인호(물리학), 구건(생물학, 곤충학), 김선양(교육학), 강기철(문명비평), 장기려(의사) 등이다. 영문학, 철학, 교육학 등 인문학자들이 주를 이루지만 의사도 있고 물리학자, 생물학자 등 자연과학자도 보인다.
노평구는 잡지 〈창간기〉에서 다양한 전문 분야를 가진 필자들의 집필 자세를 이렇게 밝힌다.
다만 원고 작성에서 서로 주고받은 주의 사항으로, “원고는 소위 감상이나 학술논문으로는 되지 말고, 어디까지나 각자의 공부와 연구가 뼈가 되고, 공부 시의 감상 내지 우리의 현실과의 관련에서 하는 계몽적인 발언과, 적더라도 소화된 결론 등을 살로 할 것. 그리고 필자의 전체 입장은 성서 연구이건, 신앙 발표건, 기독교 문명이건 기타 모든 문제에서 언제나 활달한 개신교 신앙 위에 설 것” 등을 이야기하였다.
간단히 말해서 ‘기독교 신앙과 전공에 기반한 계몽적 글쓰기’를 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신앙과 학문의 합금’을 실천해달라는 주문이다. 학문적 진리를 탐구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하던 노평구의 평소 태도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대략 20명의 필진이 꾸준히 8호까지 글을 이어갔다. 무교회 진영에 현재 이런 필진이 존재하는가 돌아보게 된다.
달란트가 땅에 묻힐까 고민한 밀턴
무교회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신학’보다는 ‘고전’을 중시한다는 점이다. 신학에서 얻을 수 없는 통찰과 방향성을 고전에서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밀턴(1608~1674)은 무교회주의의 선구자인 동시에 무교회 진영의 중요한 고전이다. 우치무라 간조는 밀턴이 영국 기독교의 토대를 놓은 인물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밀턴의 시 〈실명失明의 노래On his blindness〉에는 시인이 시력 상실로 인해 달란트를 신앙적으로 살려낼 수 없게 될 것을 염려하는 장면이 나온다.
내가 더 이상 앞을 볼 수 없음을 생각하니
이 어둡고 넓은 세상에서 내가 살 날의 반도 아직 지나지 않았구나.
그리고 숨겨두면 죽고 마는 한 재능이
나와 함께 쓸모없이 머물고 있다. 나의 영혼은
그 재능으로써 창조주를 섬기기를 열망한다.
그분이 돌아와 나의 삶을 꾸짖는 일이 없도록.
“하나님은 나를 앞 못 보게 하시고는 낮의 노동을 강요하시는가?”
나는 어리석게 묻는다. 그러나 인내는
나의 불평을 막으며 이내 대답한다.
“하나님은 인간의 행위나 재능을 원치 않으신다.
그분의 순한 멍에를 가장 잘 견디는 자가 그분을 가장 잘 섬기는 것. 그분의 나라는
장엄하도다. 천천의 천사들이 그분의 명령을 받들어
육지와 대양으로 쉼 없이 내달리고 명령을 전하거니와,
그저 묵묵히 서서 기다리는 자들 또한 그분을 섬기는 이들이다.”
밀턴은 1644년(36살)부터 왼쪽 눈이 서서히 안 보이기 시작했고 1652년(44살)에는 두 눈을 완전히 못 보게 된다. 청교도혁명의 동지인 장로파(교회주의자)의 ‘배신’에 따른 충격이 실명의 주요 원인이다. 1644년 이후 죽는 날까지 그는 무교회주의 노선을 걷기 시작한다. 〈실명의 노래〉는 밀턴의 23편의 소네트 중 한편으로, 완전히 시력을 잃은 후 쓴 시로 보인다.
밀턴은 앞을 못 보게 된 것을 생각하며 불평하고 있다. 호메로스, 단테를 능가하는 위대한 시인이 되고자 했던 청년에게 실명이란 축구 선수가 두 다리를 잃은 것과도 같은 비극이었다. 그는 마태복음 25장 14~30절을 인용해, 달란트 곧 그의 문학적 재능이 시력 상실과 더불어 땅에 묻혀 쓸모없게 되었기 때문에 괴롭고 슬프다고 한탄한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은 나를 앞 못 보게 하시고는 낮의 노동을 강요하시는가?”라는 ‘어리석은 질문’을 던진다. ‘낮의 노동’이란 밀턴이 가진 문학적 재능을 발휘한 창조적 활동을 뜻한다. 그래서 그는 절망 가운데 절규하며 하나님께 항의한다. 이때의 밀턴은 구약성서의 욥과도 같다.
그러나 이때 그의 내면에서 음성이 들린다. 그것은 절망의 끝에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계시요, 암흑의 심연에 비치는 하나님의 빛이다. 즉 하나님은 인간의 재능이나 업적이 필요치 않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증거로 행위나 업적을 내세울 수 있지만, 그것이 구원의 보증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저 묵묵히 서서 기다리는 자들 또한 그분을 섬기는 이들”이라고 한 것은 우리의 구원이 행위나 업적 아닌 믿음에 의한 것임을 말해준다.
공부도 노력도 다 쓸데없다는 뜻으로 오해하기 딱 좋은 말이다. “믿고 구원”을 염불 외듯 하는 신앙병 환자들이 얼씨구나 환영할 말이다. 반지성과 무지성을 자랑거리로 삼는 열매 없는 쭉정이 신자들에게는 좋은 핑곗거리다. 하지만 “예수는 유물론자”라고 했던 김교신의 말을 떠올려 본다. 김교신은 열매 없는 신앙, 결과 없는 믿음을 질타했다.
밀턴은 믿음을 강조했지만 신앙병 환자는 아니었다. 실제 삶에서도 훌륭한 열매를 맺었다. 앞 못 보는 장애인 상태에서도 끝내 달란트를 살려 영문학 사상 최고의 업적을 남겼다. 행위로 구원을 보증받기 위함이 아니었다. 은혜에 대한 “감사에서 우러난 자발적 노력과 헌신”이었다. “나무도 좋고 열매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열매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열매로 나무를 아느니라.”(마태복음 12:33)
현대 사회에서는 ‘달란트’를 ‘전공’으로 바꿔 표현해도 좋을 것이다. 밀턴은 하나님에게 받은 달란트를 살리지 못하는 무익한 종이 될 것을 진지하게 고민했고, 그 결과 신앙과 전공의 위대한 합금을 이룩했다. 노평구가 말한 ‘기독교 신앙과 전공에 기반한 계몽적 글쓰기’의 훌륭한 표본을 밀턴의 삶에서 본다.
김교신과 함석헌의 신앙과 학문
‘신앙과 학문의 합금’은 1세기 전에 이미 출발했다. 김교신은 《성서조선》 제61호부터 함석헌의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제62호(1934년 3월)에는 〈조선지리소고〉를 게재했다. 30대 초의 지리학자와 역사학자가 같은 시기에 나란히 무교회 신앙을 바탕으로 학문적 결과물을 세상에 내놓았다. 신앙과 학문의 합금을 보란 듯이 성취했다.
김교신은 〈조선역사〉가 한국 개신교 선교 반세기 만에 이룩한 최대 업적이라고 평가한다. 〈조선역사〉가 연재되기 시작한 1934년은 마침 개신교 선교 50주년이 되던 해였다. 50주년을 축하하는 각종 행사가 여기저기서 열리고 있었다. 김교신은 축하의 핵심 내용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병원을 짓고, 교육사업을 진행하고, 계몽 활동도 좋다. 하지만 이런 모든 ‘사업’은 김교신이 보기에 ‘피상적인 일’이었다. 이런 일은 50년까지 걸리지 않아도 가능하고, 부득이하면 접목(接木)해도 되고 빌려와도 무방하다. ‘눈에 보이는’ 사업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눈에 보이는’ 교회도 대단한 게 아니다. 하지만 ‘진리’는 다르다.
〈일기〉 1934년 5월 17일. 함 선생의 〈조선역사〉를 그 진가대로 참으로 인식함은 후대 사람들의 임무인가 싶다. … 오직 그리스도의 말씀이 조선 흙에 떨어져서 그 씨가 발아 성장하여 개화 결실함에는 50년을 요하여야 한다. 우리는 커다란 사업보다 충실한 결실을 못내 장하게 여기는 자이다.
함석헌의 〈조선역사〉는 ‘사업’이 아니다. ‘교회’도 아니다. 사상(思想)이며 사관(史觀)이며 진리(眞理)다. 정신적 결과물이다. 그리스도의 씨가 조선 땅에 떨어져 50년 만에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은 것이다. 김교신은 “만일 기독교 전래 50년 만에 기독교적 견지에서 본 〈조선역사〉를 쓴 사람이 출현하지 않았다면 얼마나 적적한 일이었을까”라고 결론지으며 안도한다. 〈조선역사〉가 없었다면 한국 기독교 50년은 허망했을 것이라는 의미다.
함석헌의 〈조선역사〉에 대한 김교신의 예찬은, 병원, 교육사업 등 외형적 사업에 치중하는 한국 개신교와 사뭇 결이 다르다. 함석헌을 칭송한 김교신은 〈조선지리소고〉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자기 글을 스스로 평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할 수 있다. 〈조선역사〉에 못지않은 진리의 열매라고.
하나만 꼽는다면 반도적 성격론과 환경결정론을 학문적으로 극복했다는 점이다. 한국사학자들이 식민주의사관에 관해 본격적으로 연구하고 문제 제기한 건 광복 후의 일이다. 이기백이 〈식민주의적 한국사관 비판〉을 처음 발표한 것은 1961년이었다. 그런데 〈조선지리소고〉는 1934년에 발표되었다. 광복되기 11년 전, 식민지 시대의 한복판에서 반도적 성격론에 대한 학문적 비판을 시도했다는 사실이 놀랍다. ‘조선 김치 냄새나는 기독교’의 기치를 내걸었던 지리학자 김교신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낳은 값진 열매다. 예배당 건물이 아닌 우주와 역사를 교회로 보는 무교회주의적 문제의식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두 사람의 업적은 한국 기독교사에서 매우 진기한 사례에 속한다. ‘지성’이니 ‘이성’이니 하는 단어를 사용하면 사색이 되며 ‘지적 교만’이란 딱지를 붙이곤 하는 ‘무지성’ 한국 교회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열매다. 하나님을 교회 안에 가두고, 교회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우물 안 개구리’ 교회주의자에게 우물 밖의 일상생활과 전공 학문 영역은 신앙과 아무 관련 없기 때문이다.
김교신과 함석헌을 무교회사상가라고 불러도 좋을 듯하다. 교회 안에 갇히지 않은 신앙, 우주와 역사를 교회로 삼는 무교회이기에 이런 결과가 가능했다. 현대는 고학력 사회다. 인구 상당수가 대졸 또는 대학원 졸업자다. 각기 전공이 있으니, 기독교 신앙의 진리를 자기 영역에서 적용하고 구현하려는 노력이 뒤따르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김교신은 식민지 시대를 살았다. 당시 조선의 문맹률은 80%에 달했다. 열악한 시대 조건 속에서 온몸을 던져 학문을 연구할 겨를도 없었다. 《성서조선》 발간 이외의 일은 사치로 여겼을지도 모른다. 그런 열악한 조건에서도 〈조선지리소고〉라는 정신적 열매를 남겼다. 만일 그가 살던 시대 조건이 식민지 조선이 아니었더라면, 그리고 평화롭고 안정된 사회였다면, 전공 학문에 집중해 ‘신앙과 학문의 합금’에 더 큰 결과물을 산출했을 것이다.
김교신의 앞길을 가로막았던 시대적 한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무교회 구성원 중 대부분이 학사, 석사, 박사다. 지금은 식민지 시대도 아니고, 절대빈곤의 시대도 아니다. 문맹 시대도 아니다. 프로는 결과로 말한다. 나무는 열매로 평가받는다. 무교회 신앙은 아마추어 동호회가 아니다.
태양을 바라보지 말라
20세기 최고의 호교론자로 불리는 영문학자 C. S. 루이스는 기독교 신앙을 태양에 비유했다.
저는 태양이 떠오른 것을 믿듯 기독교를 믿습니다. 그것을 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에 의해 다른 모든 것을 보기 때문입니다.
태양을 바라보는 게 아니라 그 빛으로 세상 만물을 본다는 말이다. 그의 말은 밀턴이 《아레오파기티카》(1644)에서 한 말과 매우 비슷하다. 밀턴은 16세기 종교개혁 이후 확립된 프로테스탄티즘이 향후 어떤 방향성을 가져야 하는지에 대해 충고한다.
우리는 우리의 빛을 자랑합니다. 그러나 태양을 지혜롭게 바라보지 않으면 태양은 우리를 후려쳐서 어둠 속으로 빠뜨립니다. … 우리가 보는 빛은 영원히 쳐다보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 빛에 의해 우리의 현재 지식에서 멀리 떨어진 것들을 계속해서 발견토록 하고자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태양을 정면으로 바라보면 눈이 부셔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 빠진다. 누구나 아는 상식이다. 밀턴이 이런 말을 한 이유는 종교개혁자들이 밝혀준 빛을 영원히 바라보기만 해서는 안 되며, 그 빛으로 앞을 비춰 진리의 외연을 확장하려고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한 것이다. 밀턴은 ‘우리가 츠빙글리와 칼뱅이 비춰 준 섬광을 너무 오래 바라본다면’ 완전히 눈이 멀어버릴 거라고 경고한다.
밀턴을 통해 한국 무교회의 두 가지 문제점이 보인다. 첫째로, 한국 무교회의 거인인 김교신·노평구에 대한 무관심이다. 밀턴은 츠빙글리와 칼뱅의 섬광을 오래 바라보지 말라고 했지만 무교회는 김교신·노평구의 섬광을 아예 바라보지 않는 것 같다. 무교회 바깥에서 김교신 연구가 쏟아져 나오지만, 정작 무교회 내부에서는 뒷짐을 지고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하고 있다. 학계 일각에서 김교신에 대한 부당한 음해와 공격을 가해와도 논거를 세워 반론을 제기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아니, 그런 공격이 있는 줄도 모른다. 그야말로 무관심 그 자체다.
둘째로, 당연히 김교신·노평구가 비춘 빛으로 진리의 외연을 확장하려는 노력도 찾아보기 힘들다. 밀턴은 진리의 빛으로 삶의 모든 영역을 조명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 빛에 의해 우리의 현재 지식에서 멀리 떨어진 것들을 계속해서 발견’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말이다. 특히 고학력 사회인 현대 세계에서는 각자의 전공 영역에서 ‘개혁’이 필요하다.
밀턴의 말은 활달한 개신교 신앙 위에 서서 성서 연구이건, 신앙 발표건, 기독교 문명이건 기타 모든 문제에 관해 계몽적 글쓰기를 해야 한다고 역설한 노평구의 말과 정확히 일치한다. 김교신·노평구가 밝혀준 무교회 신앙의 빛으로 새로운 지식과 진리를 발견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노평구가 언급한 ‘무교회사상’을 수립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김교신·노평구를 진지하게 연구해야 한다.
거인과 난쟁이
독서가인 노평구는 가끔 괴테 연구를 인용하면서 “괴테와 보통 사람의 차이는 보통 사람과 원숭이의 차이와 같다”라고 말하곤 했다. 서양정신사에 거인이 둘 있는데, 기독교에서는 아우구스티누스가, 비기독교에서는 괴테가 있다는 말도 했다. 절대자 앞에서는 모두 하찮은 죄인이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상대 세계에서는 사람이라고 다 같은 사람이 아니다. 거인이 있고 난쟁이도 있다.
김교신, 노평구 선생은 각각 20세기 전반과 후반을 대표하는 한국 기독교의 거인이다. 무교회 진영은 두 거인의 어깨에 올라서려는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노평구는 우치무라 간조가 ‘사상가’라면 김교신은 ‘신앙인’이라고 했다. 우치무라에게 일본 냄새가 나서 찜찜하다면 김교신에게서는 진짜 조선인이라는 실감이 난다고 했다. 송두용은 김교신을 한국무교회의 사도행전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 이상이다. 한국 기독교의 사도행전이라고 봐야 한다.
야나이하라 다다오의 《개혁자들》에 일본을 구약의 이스라엘에 견준 대목이 나온다. 하지만 20세기 전반 일본제국은 이스라엘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아시리아였다. 동아시아에서 구약의 이스라엘에 상응하는 나라를 찾는다면 수난의 역사를 이어온 한국 아닌가. 이런 의미에서 “조선산 기독교”를 체현한 김교신은 우리 민족의 축복이다. 귀하게 여기고 탐구해야 한다.
김교신에 관한 이런저런 자료를 읽다 보면 김교신을 가장 깊이 이해한 인물은 노평구였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김교신의 ‘영혼의 지성소’를 들여다본 거의 유일한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인물이 인물을 알아보는 법이다. 거인이 거인을 알아본 것이다. 김교신·노평구, 두 거인을 모르는 자는 난쟁이다.
역사학 연구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는 사료를 제대로 ‘읽어내는’ 일이다. 이게 어려운 이유는 ‘읽어내기’보다는 고정관념과 선입견을 제멋대로 ‘읽어넣기’ 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무교회 그룹에서 이해하기 힘든 말이 있다. “김교신·노평구는 좋지만 무교회란 말은 싫다”라는 말이다. 김밥 옆구리 터지는 소리다. 정신분열증이다. 무교회가 아니었다면 김교신·노평구도 존재할 수 없었음을 말아야 한다. 김교신·노평구에게 섣불리 ‘읽어넣기’를 하지 말고 ‘읽어내려고’ 해야 한다.
교회에 속해있으면서 무교회에 애정을 갖는 분들이 있다. 그들이 한국 무교회를 바라보는 시선은 차갑고 냉소적이다. 김교신·노평구 같은 훌륭한 스승을 둔 그룹이면서 그 수준이 오타쿠 모임으로밖에 안 보인다는 지적이다. 노인들의 소일거리, 취미생활 수준이란 뜻이다. ‘방구석 여포’란 말이 있다. “집 안에서만 삼국지 여포처럼 기세등등한 사람”이란 뜻이다. 오늘의 한국 무교회를 말하는 듯하다.
한국 무교회에는 ‘Why?’라는 질문이 필요하다고 본다. 왜 무교회인가? 왜 김교신인가? 왜 노평구인가? 노평구는 “한국 교회는 숫자는 많으나 콘텐츠가 없으니 무교회에서 채워줘야 한다”라고 누누이 강조했다. 지금 무교회에 콘텐츠가 있는가? 콘텐츠 생산 능력이 있기는 한가? 오늘 당장 우리에게 필요한 질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