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용두레 우물
박연희
그 속은 캄캄했고 풋풋했고 검은빛이 차올랐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우물물이 일렁거렸다. 검푸른 물을 두레박으로 퍼올리니 출렁출렁 따라 올라왔다. 한입 가득 마시면 맑디맑은 우물물은 은은한 흙내가 퍼졌다. 물맛은 달았다. 얼음장같이 차가운 물은 한여름에도 온몸을 흔들게 했다. 느닷없이 외갓집 우물이 떠오른 건 카페 ‘서희’에서 만난 우물 때문이었다.
설 이튿날 원주 박경리문학공원 옆에 있는 카페 '서희'에 놀러 갔다.
용두레 우물을 보았다. 물이 담기지 않은 마른 우물이었다. 자물통 달아 굳게 잠겨 있는 대문을 지나 담벼락 옆에 있었다. 소설 <토지> 속의 '간도 용정龍井이 유래된 곳, 원시적 형태의 마른 우물은 황야에서 구원을 갈망하는 심정을 나타냄 안내표지판에 이렇게 적혀있었다.
박경리 선생이 소설 <토지>를 집필했던 집이라고 했다. 담장 너머로 들여다본 집은 한겨울의 추위로 집도 나무도 얼어 있는 것 같다. 따뜻한 봄날이 오면 박경리 선생을 만날 수도 있고, 《토지》에 나오는 '평사리' 마을이 스멀스멀 다가올 것만 같았다.
카페에 들어가니 물이 가득 담긴 우물이 있었다. 벽면에는 박경리 선생의 책들이 꽂혀 있다. 돌, 나무뿌리, 샘솟는 우물의 물. 카페는 《토지》의 상징성인 땅이 가진 의미를 전체적으로 표현해서 꾸몄다고 했다. 물방울이 터트려지는 느낌을 주는 연주곡이 들려오며, 카페 손님들은 조용히 책을 읽고 있었다.
어두컴컴한 카페에서 나는 환상을 보았다. 막내 이모의 우물을 보았다. 더 어두운 모퉁이에서 이모가 물이 가득 담긴 양동이를 이고 걸어 나오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정신없이 빠져들었다.
해가 빠져 어두워지면 양동이를 들고 물을 길으러 갔다. 논둑길을 지나 우물까지는 한참을 걸어가야 했다. 우물에 도착하면 물을 한 두레박 길러서 나에게 마시게 하고 이모도 마셨다. 좋은 물이라고 했다. 한 살이 많은 이모는 외할머니같이 나를 보살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외갓집은 초등학생인 막내 이모가 안주인이 되었다.
무엇을 그렇게 간절하게 애타게 바라는 것일까? 이모는 캄캄한 우물속을 들여다봤다. 한참을 가만히 그렇게 하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나는 이모 등만 바라보고 있었다. 칠흑같이 어두운 우물은 무서워서 마주하기가 겁이 났다. 집으로 돌아올 때 물어보았다. 우물 속을 들여다보면 무섭지 않냐고. 이모는 그렇지 않다고 하며 무엇을 보았다고 했다.
부엌 앞 처마 밑에 큰 항아리가 묻혀있었다. 땅속에 묻혀있던 항아리속의 물은 한겨울에도 차갑지 않았다. 그 물은 외갓집의 생명수였다. 항아리에 물을 가득 채우면 밤이 깊어갔다. 나는 이모를 따라 같이 왔다 갔다 하면서 이야기를 많이 했다. 우리는 물을 길으면서 어른이 되어 간다고 생각했다.
외할머니는 돌아가시고, 딸 다섯 명은 결혼도 하고 직장을 구해서 다들 떠났다. 여섯째인 막내 이모 혼자 남아서 외할아버지와 살고 있었다. 옹구를 굽는 장인이셨던 외할아버지는 그때는 옹구 굽는 것을 그만두었고, 논농사와 딸기와 고추 농사를 지었다.
방학이 되어서 외갓집에 가니 새로 들어온 외할머니가 있었다. 젊은 외할머니를 외할아버지는 매우 소중히 여겼다. 젊고 예쁜 외할머니는 일년 살다가 농사지은 고추를 가지고 진보 장날에 팔러 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외할아버지는 그래도 마냥 기다렸다. 몇 달이 지나서 돈을 다 쓰고 다시 돌아왔다. 외할아버지는 큰소리를 내지 않고 묵묵히 맞아 주었으며, 전보다 더 분주히 바빴다.
새 외할머니는 몇 년을 더 외갓집을 들락날락하더니 나이가 오십쯤에 딸만 여섯인 외갓집에 아들 둘을 낳았다. 외할아버지 나이가 팔십이 가까웠을 때다.
이모는 늘 말했다. 외할아버지가 건강한 것은 '생명수' 때문이라고 했다. 농사를 짓고 일을 한 탓도 있지만, 논 한복판에 있던 우물에서 길러온 물을 큰 항아리에 담아 놓고 불순물을 가라앉혀서 마셨다.
그즈음 이모의 우물 속을 바라보는 시간은 점점 길어졌다. 새 외할머니가 들어와도 우물에 물 길으러 가는 일은 이모가 결혼하여 외갓집을 떠날 때까지 쭉 이어졌다.
어렸을 때 내 눈에 보이는 이모는 너무 힘들게 살아가는 줄 알았다. 나는 늘 생각했다. 이모는 무슨 희망으로 살아갈까? 하고. 지금 와서 생각하니 이모는 깜깜한 우물 속에서 어둠만 바라보지 않았다. 잔잔히 퍼지는 어두운 물속에서 생동감을 봤다.
카페에서 물이 가득 담긴 우물을 들여다보았다. 어렸을 때 무서워서 보지 못했던 것을. 양동이를 든 이모가 내 옆에 서 있다고 마음먹었지만, 나는 더 이상 이모 등 뒤에 숨지 않았다. 어둡지만 우물물은 끊임없이 움직이며 새로움을 주었다. 가슴 한가득 환희를 느꼈다.
"우물은 검은빛이 났다. 검푸른 우물물은 두레박에서 출렁거렸다. 맑디맑은 물에서 은은한 흙냄새가 퍼졌다. 물맛은 달고 풋풋했다."
한껏 즐거워서 말을 했다. 말이 성이 차지 않아 노래를 질러 불렀다. 노래를 그렇게 불러도 흡족하지 않아 차가운 물을 한 그릇 마시고 온몸을 떨 듯 춤을 추었다.
물 한가득 담긴 양동이를 이고 있던 이모의 힘든 모습이 서서히 사라졌다. 뒷모습이 편안해 보였다.
<<인간과문학>> 2024겨울_제48호
첫댓글 항상 시적인 수필을 쓰는 박연희작가님 부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