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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매일 기획특집
이재창 시인, 남도문학 현장을 가다 (25) - 소설가 이상문
월남전 몸소체험, 문학적 끼 지닌 작은 거인
쉼없이 언덕의 정상 향하는 시지프스적 장인
6.25와 분단, 학생·노사문제 정통소설로 묘사
80년대 소설 현실주의적 발전에 크게 기여
2003. 11.05(수) 00:00
소설가 이상문(李相文, 56)씨는 체구는 작지만 당당한 위엄을 지닌 작은 거인이다. 월남전을 자원해서 전쟁터를 누빈 문학적 끼와 펜 끝에 실려 있는 강한 카리스마는 그를 그렇게 불리게 하고도 남는다.
그는 한마디로 6.25와 분단 상황으로 비롯되는 한국현대사의 현장, 당대 한국 현실의 환부인 학생운동과 노사문제, 월남전의 아픔 등을 정통적인 소설의 방법론으로 잡아 올리는 장인적 유형의 작가다.
또한 그는 80년대 한국문단의 대표적인 작가 한 사람으로 뽑힌다. 그의 소설이 80년대 소설문학의 현실주의적 발전에 한 몫을 기여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소설은 사건의 고리에 맞물린 이야기의 재미를 뛰어나게 함유하고 있다. 주제, 구성, 문체를 교과서적 방법으로 엮어내는 소설의 모범답안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 프로메테우스적 파격과 모험을 통한 스스로의 행로 개척과는 다른 자리에 있는 그는 시지프스적 몸가짐과 자세를 지녔다. 정상에 힘겹게 올려놓은 돌이 아래의 원위치로 돌아가면 다시 그것을 밀어 언덕의 정상에 올려놓는 쉼 없는 작업을 계속하는 시지프스. 그는 그러한 자세를 많이 닮아 있다. 한마디로 생각 속에서 가닥이 잡힌 사람 사는 삶의 이야기를 소설이라는 그릇에 담아 감동이란 자리에 올려놓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한다.
그럼 그의 대표작으로 불리는 등단작 ‘탄흔’과 ‘황색인‘, ’방랑시인 김삿갓 등의 작품 속으로 들어가 보자.
흔히들 지금 우리의 소설들은 서사구조가 부족하다고 말한다. 모든 새로운 사상과 방법은 시간이 흐르면서 낡아지기 마련이다. 변증법적인 변화와 발전이 요구되는 것도 그러한 이유이며, 과거 한시대를 풍미했던 소설가들의 작품이 새삼 귀중하게 여겨지는 것도 그러한 이유다. 그의 등단작 ‘탄흔’은 단지 옛일을 회상하거나 추억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탄탄한 서사구조 등을 통해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문학의 위기 혹은 풀어야 할 과제에 대한 해답을 발견하는 과정일 수 있기 때문이다.
‘탄흔’은 작품의 시선이 월남에만 국한하지 않고 나의 과거인 6.25때의 어머니의 인생을 조명함으로써 더욱 효과를 배가 시키고, 진주군과 현지 여성 관계, 그리고 그들 사이에 태어난 아이를 부각시킴으로서 강한 주제의식을 던져준다.
조상병의 과거와 현재, 응엔 쩌이 탄의 과거와 현재는 한국의 과거와 현재, 베트남의 과거와 현재로 대응된다. 아무리 서럽고 억울한 일이 생겨도 울음같은 건 절대로 울지 않을 것 같은 여인을 통해 자신에게 아무런 관계가 없는 남의 얘길 하듯 바라보는 시선은 반휴머니즘이 아니라 자신이 처한 상황이 역사적 의의까지를 숙고하는 객관적인 시선을 가리킨다. 독자는 얽히고 설킨 이야기를 통해 베트남과 한국의 현실에 새롭게 눈뜰 수 있게 한다. ‘탄흔’에서 보여즌 베트남 전쟁은 결코 남의 나라 전쟁이 아닌 우리 스스로 깊숙이 개입한, 우리를 비쳐주는 거울로 바라보게 만든다.
“우리의 젊은이들을 약 8년간에 걸쳐 30만명이나 보내서 3천여명이나 죽게 했는데도, 실종자(포로포함) 하나 없었다는 전쟁, 미군만 1만여명의 실종자가 있어서 계속 송환되고 있는 베트남 전쟁이, 우리 한민족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황색인’의 서두에서 작가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등단작 ‘탄흔’에 이어 베트남전쟁에 대한 작가의 지속적인 관심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 소설은 베트남과 한국의 상황에 대한 역설적인 증언뿐만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주인공의 시선이 객관성을 잃지 않고 있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라는 이념의 대결 현장에서 그 어떤 이념의 한편에서 사태를 바라보게 될 때 그릇된 결과를 내놓기 쉽다. 그래서 작가는 이런 위험을 피하기 위해 제 3의 세력을 소설 속에 포섭해 두었다. 이러한 설정은 6.25 역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두 이념의 대립이라는 관점이 아닌 제 3의 시각, 민족적 비극이라는 통합적이고 객관적인 관점으로 봐야한다는 걸 보여준다.
황석영의 ‘무기의 그늘’이 고발적 성격을 강하게 지니고 있는 반해 박영한의 ‘머나먼 쏭바강’은 로맨티시즘이 강하게 묻어 있다. 이 둘 사이에 ‘황색인’의 존재한다고 보면 된다.
이처럼 ‘황색인’은 베트남전쟁을 통해 한국 근대사의 여러 단면을 결집시켜 우리가 잊고 있었던 현실의 문제점을 클로즈업시키고 있다. 베트남 전쟁은 남의 나라 전쟁이 아니라 우리의 현대사에 잠재해 있는 전쟁이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일깨우고 있다.
기존의 베트남 제재 소설과 다른점은 베트남 전쟁을 통해 교훈적 의미를 찾는다거나 전쟁 현장의 비참함을 강조한다거나 베트남이라는 이국의 정서를 환기한다는 따위의 흔히 기대할 수 있는 소설적 효과를 노린 것이 아니라 베트남에서 일어났던 일들이 우리에게 일어났고 일어나고 있고 일어날 사실이라는 점을 가족사와 사회사적 맥락에서 다시 구서하려고 시도한 점이다. 작가의 야심이 그렇게 야무지고 단단하기 때문에 소설의 구성이 복잡하게 얽힌 듯이 보이지만 그 복잡함을 풀어나가는 착상의 패기와 시각의 날카로움은 더욱 돋보인다. 한마디로 베트남 전쟁과 우리의 현실을 동일한 차원에서 서술한 뜻깊은 작품이다.
역사를 보는 시각의 폭을 넓히는데 성공한 ‘황색인’이 한 걸음 더 나아가 제3세계를 보는 시각과 결부될 수 있을 때 독자는 ‘황색인’으로서의 유대감이라는 단순한 인식을 넘어서 ‘민족인’과 ‘세계인’의 정체 확인을 할수 있을 것으로 본다.
분단문제는 그의 작품 곳곳에서 발견된다. 그의 작품 ‘살아나는 팔’‘숨은 그림 찾기’‘천하대장군’‘남겨진 한판’‘바늘 도막 하나’‘여름 휴가’ 등은 직접적으로 분단당시의 사건을 형상화가기 보다는 분단으로 말미암은 현재의 삶의 파탄을 반영하고 있다.
또한 직.간접적으로 학생운동과 그와 관련된 정치적 사태를 다루는 작품들로는 ‘1972년 10월 21일’‘生態’‘편지’‘放生’‘은밀한 배반’ 등이 있고, 역사적 모순들이 인간들을 억압하고 있는 양상을 노사문제로 풀어낸 작품은 ‘적’‘새로 들었던 장 하나’‘1987. 상황-0’ 등이 있다. ‘영웅의 나라’에서는 반미운동을, ‘그는 결코 쓸쓸하지 않다’‘편지’에서는 광주민중항쟁을 묘사하고 있다.
그가 최근에 발간한 ‘방랑시인 김삿갓’은 1만2천여장에 이르는 방대한 작품으로 그가 6년여의 노력끝에 완성한 대작이다. 이 소설은 수많은 지혜를 담은 99가지의 이야기들로 짜여있다. 재미와 지혜의 길따라 김삿갓은 36년의 세월을 방랑하면서 많은 여인을 사랑하게 되나 그가 가슴에 담고 있던 사랑은 오직 하나, 평생동안 잊지 모한 한 여인을 향한 지독한 사랑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김삿갓은 그동안에 2백여편의 시를 짓게 되고, 우리의 옛노래 30여편이 어우러지고, 고려, 조선조와 당.송대의 명시 1백80여편이 곳곳에 자리잡고 있다. 이 소설을 더욱 빛나게 하는 것은 중국의 사서삼경을 비롯한 동양의 고전 속에서 가려뽑은 2백1개의 유명 문장들이 적재적소에서 촌철살인적인 구실을 톡톡히 하고 있다.
‘누군들 별이 되고 싶지 않으랴’에 실린 9편이 작품에서는 90년대라는 시대상황이 안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를 정면에서 다루고 있다. 분단상황에서 오는 월남한 자와 그들의 후손이 겪는 크고 작은 개인적 고통과 급격한 산업사회로의 이행과정에서 오는 가치관의 붕괴, 노인문제와 빈부갈등, 거기에 따른 뿌리 뽑힌 자들의 다양한 삶과 민주화 과정에서 희생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는 작가는 역사가보다 강하고 진실해야 한다는 것, 현실이 어려울수록 더욱 그래야 한다고 말한다. 현실적으로 다소 불만족스럽다 하더라도 궁극적으로는 자유의 확대에 대한 희망과 믿음에 의한 작업, 그런 실천적 노력에 의해서 우리 역사의 흐린 하늘에 작은 우산 하나를 펴든 것 쯤으로 자부하고 싶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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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문씨는 1947년 12월18일 전남 나주시 세지면 성산리에서 태어났다.
그를 문학이라는 길로 접어들게 한 것은 세지남초등학교 5학년때 문예반에 들면서부터다. 그것은 순천히 막연한 그리움 때문이었지만 그를 지금의 그가 대한민국의 내노라하는 소설가가 되게한 최초의 시발점이었다.
초등학교 시절이 문예부 선생님이 들려주던 시조와 원두막을 지키면서 끝없이 그를 찾아오던 그리움은 학교 옆에 있던 만화대본집에서 박기당이며 김종래 같은 만화책을 주로 읽었다. 그 당시는 동화집이 귀해 그것을 구해 읽는다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당시 동네에서 마을사람들이 대본을 쓰고 매년 하던 연극공연은 그에게 많은 자양분을 공급해 줬다.
그는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집안이 영산포로 이사를 하면서 영산포중학교에 입학했다. 중학시절 3년동안 공책 두권 분량의 시를 쓰기도 했으며, 읍내에 있는 서점에서 시집이며 소설책을 사다가 읽곤했지만 자신이 문학인이 되겠다는 꿈을 갖지는 않았다.
광주로 고등학교 진학을 위해 왔지만 명문고 입시에 낙방하고 재수를 하면서 삼촌이 사다준 문예지 몇권을 틈틈이 읽었다. 그 때 그는 문학이란 어떤 것이다라는 형체를 느끼기 시작했다 한다. 다시 전기에 실패하고 후기고인 광주살레지오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그는 쟁쟁한 학생 문사들을 만나게 된다. 그들은 벌써 당시 유명하던 학원지에 몇 번씩 입상한 관록을 가지고 있었고, 또 학생문사들의 이름을 줄줄이 외우는 등 그를 주눅들게 하곤 했다. 그는 항상 그들의 뒷전에 밀려 있었고, 그 설움을 이겨내기 위해 숨어서 책을 읽고 글을 써서 가명으로 투고를 시작했다. 그때 입선자 명단을 수차례 보면서 혼자 기뻐하기도 했다.
2학년이 되면서 시와 산문 두가지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공부를 시작했다. 3학이 되면서 입시준비에 바뻐지면서 그는 대입공부에 전념하기로 작심하면서 이제가지 써놓은 작품중 단편소설 한 편을 골라 K대학교 전국고등학생문예작품 현상모집에 응모해 특선을 받았다. 그때 비로소 문예반 친구들이 놀라와하면서 그를 인정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어쩌다 운이 좋아서 그랬겠지 하는 눈치들에 오기가 발동했다. 거기서 그는 진짜 자신의 실력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다시 두 번째 도전은 Y대학교에 소설 한 편을 응모했고 거기서 당선의 영예를 안자 비로소 친구들이 그의 실력을 인정하곤 어엿한 학생문사로서의 위상을 지니게 되었다. 당시 광주 남녀 고교생들이 만든 문학동인인 ‘석류’에 끼어 활동하게 된 것도 그때부터다.
그는 현상문예며 각종 백일장에서 입상을 하며 1967년 동국대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하게 된다. 고교시절 입상의 자신감으로 그는 대학 2학년때 3개신문사 신춘문예에 소설을 응모해 최소한 두 곳에서는 당선총지서가 날아오리라는 자신감에 차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한 작품만이 최종심사에 올랐을 뿐 두 작품은 흔적도 없이 낙방하고 말았다. 그 비참한 심정은 그를 더욱 시건방지게 만들어서 기성문인과 신춘문예에 대한 불신감을 갖기도 했다.
그래도 그때 그는 1년에 예닐곱편의 중단편을 쓰는 열정을 가지고, ‘실험’이라는 동인을 만들어 활동했다.
그 무렵 대학가는 거의 매일 시위에 힙싸이고 있을때 그는 3학년1학기를 마치고 69년 군입대를 하게 된다. 그는 일등병이 갓 진급하면서 70년 월남 파병 지원을 해 월남에서 2년간을 십자성부대에서 근무하게 된다. 그때 그는 비로소 작가가 되어서 전장에서 보고 느낀 것들을 세상에 알려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세계의 자유와 평화’라는 말 속에 숨겨진 수많은 허방다리들을 보면서 치를 떨었던 것이다.
월남에서 근무하면서 그는 잊지 못한 여고생 한명이 있었다고 회고한다. 2년내내 문예지와 소설책을 구해서 보내줬던 것이다. 그는 그 여고생 덕으로 전쟁터에서 책을 옆에 두고 지낼 수 있었고, 또 등단작인 ‘탄흔’을 쓸 수 있었다고 말한다. 이 작품은 쓰고 10여년을 묵혀둔뒤 1983년 월간문학 신인작품상에 당선돼 작품활동을 하게 된다.
귀국해서 제대한 그는 유신이라는 귀신에게 여지없이 정수리를 얻어맞고 알수 없는 무력감에 휘말려 소설 한편을 쓸 수 없었고 책이 읽혀지지 않았다고 한다.
졸업과 함께 직장을 다니면서는 글쓰는 일에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그때마다 대학선배인 홍신선 시인이 만날때마다 글을 쓰지 않는다고 힐책을 했다. 직장생활 8년째가 되면서 5.18민중항쟁이 터졌다. 그때 그는 다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2년여를 지내면서 1983년 월간문학으로 등단을 하게 된 것이다.
등단나이 36세, 조금 늦게 발을 내딛은 이유를 그는 “소설을 쓰지 않으면 삶의 고통을 해결할 수 없다”는 절박감과 문청시절부터 믿고 격려해주던 주위사람들 때문이었다고 밝힌다.
직장생활으 10년간은 어쩌면 그에게 고난의 시기였던 셈이다. 그러나 그는 등단한 뒤 마치 봇물 터지듯 끊임없이 이야기를 쏟아냈다. 지난해엔 ‘방랑시인 김삿갓’을 10권으로 묶어내고, 88년엔 석달사이에 1천6백매의 ‘황색인’ 원고를 써내 베스트셀러가 되는 왕성한 괴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그는 황색인을 쓴 인연으로 90년 소설 속의 실제 여주인공인 뚜익을 찾아서 베트남을 다녀와 스포츠서울에 연재하고 ‘베트남 별곡’으로 묶어냈다. 또 그해 제2차 베트남 취재여행을 다녀와 부산일보에 8개월간 연재 끝에 ‘혁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를 책으로 묶었다.
이 두차례의 취재여행과 참전시절의 기억을 엮어서 ‘아, 남지나해’라는 4부작 소설을 4권으로 발간하기도 했다.
이렇듯 그는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끈질기고, 아름답고, 가슴아픈 월남과 그의 인연이 문학으로 승화되어 나왔다고 말한다.
그의 저서로는 ‘황색인’‘살아나는 팔’‘영웅의 나라’‘품어야 맛인데’‘은밀한 배반’‘자유와의 계약’‘계단없는 도시’‘여자를 찾다 만난 여자 그리고 남자‘’태극기가 바람에 흩날립니다‘’춤추는 나부‘’너를 향해 쏴라‘’방랑시인 김삿갓‘’누군들 별이 되고 싶지 않으랴‘ 등을 출간했다.
1987년 중편 ‘숨은 그림찾기’로 대한민국 문학상을, 88년 단편 ‘적’으로 윤동주 문학상, 90년 장편 ‘자유와의 계약’으로 동국문학상, 2003년 창작집 ‘누군들 별이 되고 싶지 않으랴’로 펜문학상을 수상했다. 현재 한국제지공업연합회 이사장, 동국대 문예창작과 겸임교수로 있다.
글 ; 이재창 편집부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