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드 강둑에서 바라다 본 카르카손 시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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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의 숨결 가득한 요새도시 카르카손 (Carcass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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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의 행선지는 디즈니랜드의 모델이 된 세계문화유산 중세의 요새 도시 카르카손이다.
카르카손은 툴르즈에서 TGV로 1시간도 걸리지 않을 뿐 아니라 중간에 정차역도 없고
또한 출발 시간도 이르다. 나는 머리를 굴려 예약도 없이 탔다가 벌금을 내고 말았다.
역을 나서니 인구 약 46,000명인 자그마한 도시는 영 낯설기만 하지는 않았다. 어림잡고 찾아
가다가 어느 가게에 들러서 길을 물으니 주인은 친절하게도 밖까지 나와서 방향을 가리켜준다.
고풍스런 길을 제법 가다 보니 오드 강이다. 눈앞에 영화 속의 한 장면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멀리서 보면 동화에 나오는 그림처럼 아름다운 성벽은 가까워질수록 어느 한곳도 빈틈을 찾을
수 없는 견고한 본래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긴 세월 동안 이곳에서 일어났을 수많은 이야기
들을 상상하게 한다.
견고한 요새 카르카손 성곽
카르카손 성
카르카손 성의 외곽 성문과 뒷 편의 내성
카르카손은 오드 강의 흐름에 따라 시테와 빌라스의 구 시가지로 나누어 진다.
오드 강의 오른쪽 유역에 가파르게 솟아 있는 구릉 (해발 450m)꼭대기에 자리 잡은 시테는
기원전 3,500년경에 인류가 살았으며, 기원전 5세기에 이베리아인들이 거주했던 곳이다.
그 후 로마 지배하의 갈리아인들의 차지가 되었다. 내벽은 오리크 1세가 서 코트족의 왕으로
재위하던 485년에 축조되었다. 508년 클로비스가 점령한 후로 726년에 아랍인이 이곳을 점령
했으며, 752년에는 단신 왕 피핀 3세가 점령했다. 카르카손과 베지의 자작이 생 나제르 대성당
(1096~1150)을 지었고 1,125년경에 콩탈 성이 내성벽 안에 들어섰다. 작은 탑, 망루, 총안을
갖춘 외부성벽이 루이 9세의 재위기간에 이어 그의 아들 필립 3세 때까지 축조되었다. 특히
필립 3세는 내부 성벽에 아름다운 나르보네 성문을 추가로 만들었다.
카르카손 성곽 내
카르카손 성곽 내
성곽 안에서 내다본 바깥
시테로 들어가는 도로상의 유일한 입구가 되는 그 성문에는 공격자들의 무방비 상태인 측면을
노리기 위해 지은 부리 모양의 돌출부가 있는 2개의 탑과 1개의 이중 망루가 있다. 이 요새를
둘러싸고있는 성벽은 거의 3km(외벽 1,650m, 내벽 1250m)에 달한다 루시용 지방이 1659년에
프랑스에 합병되면서 이 시는 변경요새로서의 지위를 잃고 쇠퇴하기 시작했다.
1844년 건축가이자 중세 연구가인 비올레 르 뒤크에가 대성당과 성벽을 재건하기 시작했는데
이 작업은 1960년 까지 계속되었다. 시테는 웅장한 성안에 좁고 구불구불한 아기자기한 거리
들로 이루어져 과거로의 여행을 초대해 준다. 그 곳에는 약 1,000여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다.
동심원 구조로 배치된 내 성벽과 외부성벽 사이에 난 길에는 훌륭하게 보존된 내부의 성채와
바깥의 푸른 전원지대 그리고 그 너머에 있는 오드 강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지금은 비록
횃불을 사용하지 않아 옛 풍경을 감상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성벽을 밝히는 현대적인 조명을
받아 아름답게 빛나는 이 도시의 야경은 마치 한 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케 할 정도다.
시테는 수백 년 동안 프랑스와 에스파냐의 국경 역할을 했다. 12세기에 축조된 쌩 나제르
대성당은 시테에서 가장 흥미로운 건축구조를 구비하고 있다.
내성벽과 외부 성벽 사이
성으로 들아 가는 성문(외부 성벽)과 내부 성벽의 나리보네 성문과 2개의 탑과 1개의 이중 망루
성으로 올라 가는 길에서 본 외부 성벽
성곽에서 바라 본 도시 풍경
시테의 생 나제르 대성당
생 나제르 대성당의 스텐인드 글라스
빌라스는 시테에서 반란을 일으킨 시민들이 성벽 밖으로 추방되면서 1,240년에 세워졌으며
1,355년 성채 점령에 실패한 흑 태자 에드워드에 의해 불태워졌다. 13세기의 생 뱅산 교회와
생 미셀 대성당은 화재 속에서도 보존 되었다. 카르카손의 유래는 프랑스 샤를마뉴 대제가
아랍 세력을 몰아내고 있었을 무렵, 성주인 사라센 왕 발탁의 부인 카르카스 (Carcass)는
프랑스 군에 포위당해 항복할 때 까지 성을 봉쇄하고 있었다. 이렇게 몇달이 지나자 성안에
남은 식량이라고는 돼지 새끼 한 마리와 한 줌의 곡식이 전부였다고 한다. 카르카스 성주는
이 돼지에게 남은 곡식을 먹인 후, 실수를 가장해 적군들 앞에 떨어뜨렸다. 프랑스 군은
돼지의 배에서 터져 나온 알곡을 보고 성 함락을 포기하고 퇴각했다고 한다. 이를 본 성주는
성의 모든 종을쳐 울리도록 하였다고 한다.
프랑스어로 종을 울리다가 sonne 이다. 성주의 이름 카르카스와 종을 울리다의 손의 합성어,
카르카스가 종을 울리다가 카르카손이다. 카르카손은 카르카스의 승리라는 뜻에서 붙은 이름
이다. 우리나라의 경기도 화성시 오산의 세마대와 같은 비슷한 내용이라고 볼 수 있다.
카르카손의 미디 운하
Midi 운하와 연결되는 툴르즈 가론느 강과 Neuf 다리
툴르즈 가론느 강과 Cupola gella Grave, St.-Pier
1996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남프랑스 운하 Canal du Midi는 툴르즈를 시작해
카스델로 다리, 카르카손, 트레브, 베지등의 도시를 거쳐 세트항을 통해 지중해로 흘러간다.
전체 길이 360km, 폭10m, 깊이2m의 이 대운하는 가론느 강을 지중해와 연결하는 대역사였다.
대서양과 지중해를 연결하는 셈이다. 루이14세 당시인 1667년 피에르 폴 리케의 주장으로 구체
화되기 시작해 1694년에 완공되었고, 수문, 수도교, 다리, 터널 등 총328점의 구조물이 함께
건설되었다. 보방 원수는 1686년에 2km의 연결운하를 새로 건설해 카르카손과 연결했다.
이 운하로 후일 산업혁명은 한층 가속화를 얻게 된다. 토목공사만의 놀라운 대역사였지만
주위 경관과 어우러진 구조물들은 이 운하를 하나의 예술작품으로까지 승화시켰다고 한다.
카르카손 시테의 광장
카르카손 시테의 거리
카르카손 시테의 거리
프랑스 철도노조의 파업으로 투르에서 사흘 동안이나 발이 묶였다.
보고 싶던 알비 (툴르즈 북서쪽 76km)의 툴르즈 로뜨렉 박물관과 붉은 벽돌 고딕 양식의
생 세실 대 성당에 가보지 못하고 성지 루르드로 향할 수 밖에 없음이 매우 아쉬웠다.
《 사진과 글 : 안 장 훈 》 www.purpleiri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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