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80년(고종 17) 수신사 金弘集이 일본에서 가져온 황준헌(黃遵憲)의
朝鮮策略을 고종에게 바쳤다. 이 책의 내용은 조선은 중국·일본·미
국과 연합하여 남하하는 러시아 세력을 막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후
그 주장에 동조하는 대신들에 의하여 개혁정책이 추진되고, 외국과의
교섭이 빈번해지자 이에 자극을 받은 朝野에서 비판과 반대의 소리가 높아졌다. 이때 영남유림이 문회, 향회, 도회등 조직적인 회합을 거쳐 척사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운동은 4차에 걸쳐서 진행되었는데 이만손(예안)→김조영(바래미)→김석규(영주 우금,무섬,선성김씨)→김진순등이 소수로 활동하였다. 1차 소수 돈와 이만손은 퇴계 이황의 후손으로 안동 예안 출신이다. 난은 이동포…→ 조부 만와 이이순→ 父 소계 이휘병을 통하여 이어졌다. 돈와 이만손의 5대 조부 이수겸(바래미의 단사 김경온의 사위)은 이인좌의 난 때에 의병장으로 활동하였으며 조부 만와 이이순(바래미의 일지와 김택동의 외손자)은 은진현감을 역임하였다. 또한 이만손의 동생 이만희가 퇴계 이황의 종손으로 入后되었다. 1차 소수 돈와 이만손과 제소자 역암 강진규<<진주강씨,예조참판, 춘양/백초 강하규(북청부사)의 동생>>가 유배되자 다시 2차로 척사운동을 전개하였다. 2차 소수 성환 김조영(바래미)은 그의 선대가 문과와 생원, 진사를 통하여 사족의 지위를 유지해 온 영남의 대표적인 사족 가문이었다. 성환 김조영의 증조부 해와 김희택(바래미)은 사도세자 전례문제로 일어났던 정조16년 영남만인소를 실질적으로 주도하였다.
성환 김조영의 족숙(族叔)으로 척사(斥邪)제설(諸說)초(抄)록(錄)을 쓴 노원 김철수(바래미,식헌 김희락의 孫)는 김조영이 영남만인소에 참여하여 출발하는 날에 구호(口號)로 만인에게 치도(治道)와 학문은 요․순과 공자․주공을 진술하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제3차 소수로 활동한 치암 김석규는 영주 두암리 출신이며 본관은 선성김씨이다. 김조영과 김석규가 다시 유배되자 4차로 김진순등이 이 운동을 전개하였다. |
1895년 10월 을미사변 11월 단발령 의병활동 전국적 확산
1896년1월17일 봉정사 면회
1896 창의 촉구 통문 각처에서 날아들어(삼계안동통문이 가장 빨라 위와 같은 위치에 있었기 때문)
1896년1월17일 안동향교18일 20일 10.000명 운집
수좌에는 김도화와 임원 김흥락 유지호등의 호유 유도성 유지영 유난영등의 병유 참여 유곡의 권세연 의병대장 추대됨
이부분은 각문중이 지원하에 궐기한 가장 규모가 큰 의병으로 만인소로 만인소와 위정척사 만인소 정재란 구심점으로
일어난 문중의 지원이 대규모로 일어난 가장 큰 규모의 의병활동이었음
이 안동의병의 의미는 많은 문중의 지원과 유생 유림층에서 주도한 것이란 사실이며 만인소란 것이 역활을 하지 않았다면
단지 산발적인 의병활동이었을 것입니다
또한 이시기를 기점으로 노론전행이란 억눌린 파에 대한 투쟁이 외세의 배척인 척사로 승화해가는 변화를 일으킨다는 점에서
분수령이되는 역사적인 사건인 것입니다
닭실 권씨문중 하회 류씨문중 무실전주 류씨문중 각천원 내압 800원 금계 바래미 500원(해저는 내압의1/5규모임) 법흥 고성 이씨
각500원 그밖의 문중은 400원씩 부담) 만인소와 정재의 연장선
***이부분에서 해저는 김진림(정재문인인 건수의 2째 아들 호림과는 9촌 형 건수의 첫째 아들은 정재문하 호림도 할아버지가 삼산 유정원 주손 홍기의 장인은 정재의 손자 유지호의 아들(의병서기참여)인 참모 유연박 호림의 할아버지의 동생인 시수의 아들도 의병참여로 건국훈장 받아(호림과는 5촌 족숙)
***이것은 별도 :위와 같이 문맥과 인연들이 얼퀴면서 종래 닭실위주에서 대산 이상정과 정제가와의 인연들이 매우 많아짐****
***상기 의병의 성격은 유림 말하자면 양반 유생들이 주도한 것으로 봉화출신 의병들은 유곡의 권세연(창의 대장)옥련(소초장)
김진림(내방장 정재문인인 건수의 2째아들),
김하림(서기)의 증조부는 삼산가이며 정재 유치명의 문인이자 내압 김대락의 동생인 학문이 매우 높은 김소락과 동서지연 무실 수정재 유정문가는 처가댁, 춘양 법전의 강심 강황 강봉원은 정재 유치명의 문인으로 참여
***봉화의 변천사 안동도호부 관활 봉화현1895년 안동도호부 봉화군 1896년 경상북도 봉화군
내성현 춘양현 소천현은 1906년까지 안동부의 속현
가문으로 본다면 만인소와 정재문하 닭실 무실 법전 김흥락(내압도 정재문하) 유지호(정재아들) 의병대장 이만도 또한 봉화출신이며 정재문인
만인소로 단합되고 죽음을 불사하는 선비정신 위정척사 서로간의 연락망구축과 단합된 힘.....
영남 쪽의 의병활동들은 만인소와 정재에서 찿아야 할듯 합니다
이런 의병사상 바래미의 의병참여 위정척사사상들이 물론 호림의 행동 배경일 것이며 당연히 심산 탄생에 영향을 준것으로 보아야 할것입니다
필자가 소설을 쓰는지 핵심만을 연결해보니까?
전혀 무지한 상태에서 그려보니까 이런 것들이 보입니다
裁-李象靖-南漢朝-柳致明-金興洛-權相翊-權命燮
-宋相燾
-李在敎
-宋基植-
-曺兢燮-金鏞源
-朴章鉉
-金東鎭-權相用
-白性薰
-權泰春
-李善和
-全奎斗
-李中濯
-李榮春
-全河璧
-金基洛
-徐錫龍
-裵永縉
-金龍圭
-李炳稷
-金鎭哲
-李鍾河
-金克源
-李晩燾-金浩直
-金道鉉
-李 鐸
-李中均
-宋基植
-白淵鎭
-金秉宗-
-宋準弼
-金時洛-金秉宗
-崔正基
-白南璹
-白淳悳
-白淳慶
-白淳志
-李錫萬-李龍朝
-柳廷鎬
-李中業-李棟欽
-李相龍
-邊斗建
-邊奎建
-金象鍾
-李中轍
-權象鉉
-柳昌植
-柳淵龜
-柳淵楫
-朴載憲
-金大洛
-金鴻洛
-金東三
-金瀅模
-金誠一-張興孝-李徽逸-李玄逸-李 裁-李象靖-南漢朝-柳致明-金道和-柳寅植
-宋基植
-金萬周
-柳昌植-柳寅植
-鄭昌朝
-金鴻洛
-洪義欽
-白重鎬
-白重珏
-白相玄
-河謙鎭
-柳鳳輝
-金寅洙
-金容禧
-李壽岳-李謙浩
-李鉉奎
-李壽巖
-李敦禹
-李晩慤-李中轍
-柳必永-金獻周
-李致休-李聖弼-李愚鎬
-李錫永-李濟相-李鼎相
-李承斗
-李炳憲
-李周相
-李瀚相
-李箕相
-權五均
-李承烈
-李正弼-
-李誠弼
-李承泰
-李憲弼
-南 皐-柳廷鎬
-白淳悳-白燦宗
-南孝源-南秉模
-南公壽-南孝順-南炳基
-白基東-白宗運
-白肇運-白淳愚
-朴載華
-白淳悳
-白宗運
-李壽華
-李廷模
-金垈鎭-金常壽-金秉宗
-金相鎭-金秉宗
-金養鎭-金翰洛
-權秉燮
-南秉模
-權璉夏-金景洛
-李晩燾
-李晩규-李忠鎬
-黃基道
-李秀榮-
-安昌悅
-柳肯鎬
-朴時默
-金鎭華
-朴致馥-李道復
-金衡七
-朴宗厚
-呂大驃
-裵善源
-黃在英
-金魯善
-柳基鎬
-金麟燮-尹胄夏
-李種杞
-申翼浩
-李深在
-權玉淵
-權斗泳
-申綸錫
-權世淵
-權喆淵
-姜 楗
-裵貞祚
-權胄煥
-沈斗煥
-崔 澐
-李晩雲
-南基麟
-柳致碻
-柳致游
-權泳夏
-張祿遠-洪祐錫
-李晩德
-朴載祐
-柳徽文
-金宗文
-金養休
-徐孝源
-康 儼
-趙承洙
<대산 이상정 私淑>-張福樞-張升澤
-張錫穆
-宋浚弼
-張錫英
-張相學
-曺兢燮
-李德厚
-李基馨
-宋興來
-張心澤
-張錫빈
-張允相
-張錫龍
-辛泳學
-尹胄夏
-李正基
-琴海圭
-張志淵
-金誠一-張興孝-李徽逸-李玄逸-李 裁-李象靖-鄭宗魯-李源祚-李震相-郭鍾錫-金 榥
-河謙鎭
-李漢龍
-李存후
-李寅梓
-金昌淑
-河禹善
-李炳憲
-權相圭
-송상도(한주 이진상은 특별한 스승이 없다는데 잘도 끼워 넣어)
1)왕성하게 교류했던 대산 이상정(택동은 동주로 활동)과 희락 희소 희문 희용 희주 희성...등은 뛰어난 문하로서 사림의 추앙과
영남에서 중요한 위치 확보함
조실부모하고 고아가된 남한조는 해저의 김진동(유년 시절을 대부분 외가인 바래미에서 김진동에게 사사 받으며 성장)에게 사사 받았으며 이상정의 문화로서 정통학맥의 연결고리를 한다(박문수가 단사공이 바래미에서 서책1만권을 돌파중이라한 단사공의 아들인 김진동에 대한 연구가 필요한 부분) 정재의 스승
***단사공의 1만권 서책 돌파중이란 함축적인 의미는 바로 공부하는 분위기일 것임
정재의 스승역활(이상정의 외증손으로 이상정의 수제자인 유장원에게도 사사받음)
20살까지 류장원에게 사사받음(류 장원은 대산의 뛰어난 문하)
30살까지 남한조에게 사사받음(남한조 또한 대산의 빼어난 문화)
이론적인 바탕은 대산과 정재의 위정척사등으로 이론적인 무장을 하고 이것이 만인소로 뭉쳐진 힘들이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빠지자 의병활동의 단초역활을 하지 않았을까합니다(바래미는 이의 중심에 있었음)
2)200년 잛은 기간에 이루어낸 벼슬과 독립운동(작은 거인) 최고의 명문가가 500년에 이룬 역사를 200년만에 이룬 비밀연구
3)바래미인들의 삶(충과 효 퇴계정통학맥 계승)
4)심산을 있게한 마을
1)생가고향의 역활과 심산탄생의 비밀(탄생부터도 파리장서와 유림단사건 그후로도 끝까지 심산과 함께함)
(생가로서 절손과 고난 그리고 처음부터 끝까지 심산과 함께함)
2)정재의 위정척사와 만인소정신이 호림의 탄생배경(심산의 탄생 비밀은 가장 크게는 아버지와 어머니다)
바래미 마을의 큰 키워드는 남한조와 심산을 있게한 만인소 정신이 아닌가함
(김한동 김진동 심산 만인소 송암 단사정 이상정의 문하 희락 희소 희주 희구(?) 희성 희문외 희의 전성시대)
호림과 교림(영자와 림자의 의병활동)
심산과 남한우 북순우로 불리던 홍기
만회고택터에 헐려진 집들 그대로 보전되었다면 호림과 심산의 생가집(경능창백의 집이기도 함)진림이란 내방장의 집
홍기와 정진을 탄생시킨 현만회고택(복원도 하고 싶다 영주에서는 사실 김자인댁은 하나도 사진등의 증빙 자료가 없어서
김자인댁을 기억하시는분의 기억을 토대로 87억을 들어서 복원한단다)문화의 시대이니까
***마을도 마찬가지 의병활동으로 가세가 기우려 부자였던 가옥이 헐려진 하림공의 집들등 많은 아쉬움이 남는다
다음으로 소테마들은
개암과 팔오헌 심산생가고향 암행어사와 송암 암행어사와 단사정 독립운동이 맺어준 인연(향산고택 한들 정재종택 인동 남산종택과 인연이 맺어준 독립운동 닭실과 춘양 만산고택 )
문맥(스승과 제자)과 혼맥 지도 작성(명문가의 독립운동 로드)
바래미 하계(향산고택) 내압 무실(정재) 임청각 닭실 춘양(혼맥과 문화 인맥등이 만들어 낸 독립운동가(집계 연구와 중심적인 활동사 조명)
다음이 의식주 문화 복원임
바래미는 철저히 일본에 처음부터 끝까지 국권회복을 위하여 맞어오면서 완전히 에너지가 소진되었으며(일대는 의병활동지원과 참여 다음세대는
일차파리장서에서 이차유림단 그리고 심산과 끝까지 함께함으로서 또한 마지막 세대들은 학생운동과 적색운동 노동운동등으로
신간회와 민립대학건설의 중추적인 역활을 담담함으로서 한국독립운동사에 모든 것을 보여주며
이로 인해서 절손과 파산된집들 이거한 집들 아직도 어려운 삶을 지속하는 집들이 많아
이로인해서 우리의 역사를 재대로 챙기지도 못하고(의병활동한 조상분도 못챙겨) 바래미의 의병활동사 삼일운동 활동사
외에도 이승만시대와 6.25을 격으면서 제대로 챙기지 못한 역사지만 더 늦기전에 남은 흔적 일부라도 챙겨두어야 하지 않을까
바래미 비석 건립에서 화영이 빠진이유?(의병활동인 듯 연구대상)
************1 독립운동의 시발인 만인소(이부분에 중점 연구)와 위정척사(목숨을 담보한 선비사상과 단합된 힘의 출구)
목숨을 담보한 선비정신 연구
결집된 힘의 출구인 위정척사의 시발점(사상과 진행과정등)
영남만인소의 출발을 제시했던 삼계통문(임자일록) 문중의 단합된 힘
정재의 장헌세자 추존상소로 더욱 구심점을 가속화
황준원의 조선책략을 계기로 위정척사 만인소 본격화(인맥등에서도 바래미의 주도적인 역활)
************2 의병활동사와 만인소(정재와 정재문인으로) 일세대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직면하자 정재문인으로 대거참여
************3 심산 생가로서(심산의 중요사상과 행동 병행해서)
***심산의 국가관과 사상(국가에 대한 사상 나라가 없음에 과 김유신)
***심산활동 1)파리장서란 2)유림단이란?
1)심산탄생의 비밀(호림사상과 활동 바래미의 사상적 배경과 분위기와 어머니 인동장씨)
2)심산의 정신적 물질적인 지주역활
3)심산의 파리장서의 참여시의 활동사 이세대
4)이차유림에서의 바래미의 활동사 삼세대
5)끝까지 혈맹으로 함께한 심산을 지원한 흔적 조명
6)중추적인 역활을 한 독립운동가의 삶을 살아온 홍기 흔적 조명
7)단발과 창씨 의관등의 의미와 중소지주계층의 삶 조명
8)심산과 시(창수시)문학세계
************4 4세대의 흔적들(적색운동 학생운동 병영집단 탈영 민립대학 신간회 노동운동)
5 독립운동이 맺어준 인연 혼맥으로 본 독립운동 지도
바래미 하계 내압 한들 닭실 임청각 만산가 오록가 인동장씨종가
작은 거인 바래미를 보면 독립운동 전체가 보인다
바래미 독립운동사를 보면 첫째 의병활동이며 진림은 내방장(높은 지위)하림은 서기에서 재편때 높아져
다음으로 심산파리장서 창우 순영 건영이며 이 당시에도 홍기 경능 창백 한식...외 많은 분들이 참여하였으며 노인들만 6분으로 전해지니 몇분 누락된듯(바래미는 서명자만 의도적으로 3분을 한 것임)
이차유림단 뇌식 헌식 한식(비밀 경찰요사 참고 심산유고 참고 우림(비인정),창근, 창희(비인정),창백, 홍기등이며(이분들중 우림이 빠진 듯 우림 한식에에 대해서 좀더 조사해야
다음으로 독서회인데 창신 중문 덕기 중열(비인정) 중헌(비인정) 나머지 2분도 조사해야
마지막으로 일제 징집에서 집단 탈출후 일본에 항거한 중욱 대학생으로 참여한 창엽과 고등학교2학년으로 참여한 정진 외 순흥으로 이거한 하영(건국훈장)그리고 노동운동에 참여한 창백의 아들 만기등임
신간회 민립대학건설등을 합하면 더욱 많아짐 보림 우림 창돈 창근 만기(노동운동과 신간회)
거문적인 독립운동임
교림 또한 개암과 일지와공(택동)의 후손으로 심산을 돕는 것은 당연함
또한 심산의 생가터이자 주도적인 역활을 한 해저 송록서원에서 늦게나마 심산의 기념비가 세워짐은 뜻깊은 일이며 송록서원에
기념비가 세워지면서 혈연의 고향인 해저에 세워지는 뜻깊음과 동시에 혈연의 조상인 팔오헌을 제향하는 곳에 심산을 기념하는
탑을 건립하는 것은 더욱 더 의미 있는 일일 것입니다 일이다
***먼저 바래미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것이 심산의 활동인데 심산에 대한 탄생비밀과 정신적이고 물질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바래미와 생가 큰집인(상징성을 내포함)일지와공의 후손인 재인은 후손이 없어서 만회고택에서 양자감 그래서 사실은 만회고택은 일지와공의 큰 집격으로 여겨졌고 일지와공의 큰집으로서의 역할을 해옮 심산의 생가터는 만회고택터이며(같은 지하이니까)
바래미가의 퇴계정맥을 대산 이상정 남한조 정재 안동좌수 만인소등이 바래미 역사에 문화이던 혼맥이던간에 많은 영향을 준 키워드이며 23살에 동강종가로 양자간 호림은 바래미 사상이 형성된 분으로 보시면 될 것임
누가봐도 바래미인이고 바래미 사상에 충실함
연이은 생가 부친상에 300리길을 달려오면서 울부짓던 효성
타협하지 않는 성격 빈부를 차별하지 않던 명월가의 정신 의병을 일으키려던 사상적인 배경등이 바래미인으로서 인격체가 형성된 것이며(효와 충 명월루의 가훈도 충효임)
이런 사상적인 것을 심산이 물려 받은 것으로 보인다(심산유고)
바래미 생가는 정신적으로도 고향생가 역활을 하고(심산은 신주를 바래미 생가터로 옮길것을 가족들에게 당부한 기록도 심산유고에 나온다
물질적으로도 홍기의 역활로 가장 많은 자금을 지원해(사실 아무것도 몰랐다 그래서 많았던 일제시대의 토지매매문서를
쓰레기통에 다갔다버려) 작은 집인 교림가는 2만원을 지원한 것으로 얘기함(해저서는 해저보다 많은 지원을 한 것으로만 알고있음 교림가와는 서로 지속적인 교류함) 일차와 이차 그리고 그후에도 심산에 대한 지원과 교류가 지속된듯
(사실 대부분 알고 있지만 명월루는 예전부터 집 뿐이지 돈은 없는 집) 경능 창백(사촌)의 만기는 신간회와 노동운동으로
진림은 의병활동(내방장으로)학생인 정진은 고등학교 2학년생으로 태극단을 조직하고 독립운동에 나서
호림의 생가형인 흥림의 장자는 손이 끊어져 창백의 아들 만기는 신간회와 노동운동에 참여 구속됨에도 심산과 창백의 독립운동으로 집안은 풍지박산이 되었음에도 혜택도 없이 어려운 삶은 지속하고 있있다 많은 집들은 핍박으로 바래미를 떠나
(명예라도 돌려드려야 하지 않을까?) 의병 내방장을 역임한 진림 이런사실 조차 몰랐고 해저 바래미가 500원의 의병활동자금을
지원한 것 또한 전해 듣지도 못해(이것이 이승만 대통령의 산물임)
필자가 이제보고 찿아낸 것입니다
홍기의 유집과 관찰등들을 보면 대부분이 독립운동가들의 보고이며 그당시 심산 활동의 전모를 파악할 수있는 귀한 자료임에도
(심산활동의 중심인물들(수십명)의 내력을 관찰할수 있는 중요한 역사적인 기록)임에도 자꾸만 헐어가는 귀중한 역사적인사료들을 해석도 않고 그대로 방치해야 하는 것인가?
일제강점기 유림의 독립운동 근거지였던 경북 봉화지역의 파리장서 탑비 건립을 위한 탄원 서명운동에 전체 군민의 두배에 달하는 6만1천여명이 동참한 것으로 확인됐다.
19일 봉화군에 따르면 지난 3월1일부터 4월10일까지 봉화군 한국유림단 독립운동 파리장서 탑비 건립추진 위원회와 봉화군이 공동으로 전개한 파리장서 탑비건립 탄원 서명운동을 최종 집계한 결과 봉화군민 및 재외 출향인, 독립관련 인사 등 전체 군민수(3만4천여명)의 두 배에 달하는 총 6만892명이 서명에 참여했다.
이에 따라 박노욱 봉화군수는 지난 17일 오전 국가보훈처를 방문, 이 탄원 서명록과 운동사 방증 문헌 사본을 이경근 국가보훈처 보훈선양국장에게 전달했다.
이 자리에서 박노욱 군수는 봉화군은 파리장서 운동의 총본산이자 파리장서운동의 초안을 작성하고 발원한 역사 현장의 유래와 관련사업의 당위성 등을 설명하고 조속히 사업이 완수될 수 있도록 국비 지원 등 제반 조치를 취해 줄 것을 건의했다.
서명록을 전달하고 나서 박 군수는 18일 군청직원 간부회의에서 “봉화군에 파리장서 탑비 건립을 위한 탄원 서명운동에 전폭적인 지지와 성원을 보내준 봉화군민과 출향인사 그리고 독립운동 유공 인사, 학생 등 한분 한분에게 충심으로 진심 어린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며 담화를 발표하기도 했다.
박 군수는 “6만1천여명의 열화 같은 성원에 힘입어 봉화에 전국 최고의 한국 유림단 독립운동 기념탑비와 건립한 지 오래돼 허물어져 가는 봉화 충혼탑비의 재건립 사업을 추진하는데 온 정성을 쏟겠다”고 말했다.
봉화군은 국비 확보(국가보훈처)가 이뤄지면 총 4억원을 들여(국비 1억2천만원ㆍ도비 1억ㆍ군비 1억8천) 2013년 1월부터 12월까지 봉화읍 해저리 230-1번지(송록서원 앞) 부지 3천415㎡에 한국유림독립운동 파리장서비 건립 사업을 추진할 계획이다.
파리장서 비석과 주변정비사업 등이 추진될 이사업은 청소년 및 일반인 대상의 유림문화 체험행사(충효예절, 서당 성년식 등)시 역사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된다.
또 바래미, 닭실마을 등 지역내 고택, 정자 등 유교 문화유적과 연계한 관광자원으로 활용되며 도심내 지역주민이 함께 쉴 수 있는 호국공원으로 활용된다.
먼저 해저가 이루어낸 약200년의 역사를 보면 일제 당시에도 가구수가 전체111가구467명 의성김가86가구(401명)으로 아주 적은
마을에 속한다 (비밀경찰요사 참고)이 마을이 이루어낸 역사는 벼슬에서도 독립운동사에서도 기록적인 역사를 쓴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벼슬 대과와 사마시 정확한 집계중(단기간 데이타로는 아마 전국 최고일 듯) 독립운동가도 국가공식인정15분이나 이도 참여하신분들은 수십명이다(거문적인 참여)
이도 바래미역사의 중요한 부분이다
일차장서보다 더어려운 환경에서 전개된 이차유림 그후에도 변함없이 심산을 지원하고 거문적으로 젊은층 학생 독립운동까지 연결된 해저 바래미 마을(의병에서부터 화영과 진림 하림공부터 4대가 지속적으로 거문적으로 독립활동에 나선 바래미이다)
일부 가문은 핍박으로 이거하고 일부가문은 절손된 가운데 아직도 어렵게 삶은 영위하면서도 긍지를 잃지 않는 자랑스런 바래미 마을 나라를 위해서 함께 행동했음에도 자료미흡등으로 등록되지 못한 분들에게도 미흡하나마 이로 대신하고자합니다
또한 바래미가 어느 곳보다 치열하게 심산활동의 가장 중심에 있었으며 혈연의 고향과 정신적인 버팀목과 물질적으로도
가장 큰 역활을 했음에도 사실 너무나 소외되고 있음은 안타가우며 재조명이 필요한 사유이기도 할것입니다
바래미의 독립운동사에서의 역활은 의병활동의 단초 역활을 한 만인소를 삼계서원에서 첫발의(목숨건 대열에 나섬)
정재등을 매개로 바래미가 항상 중심에 위치하며 만인소의 중심에 위치함(임자일록을 번역하면 새로운 사실이 많이 출현될듯)
독립운동의 키워드도 대산 이상정 남한조 정재와 만인소 의병활동 호림탄생에서 찿아야 할듯
1)바래미 독립운동사는 물론 의병활동으로 시작되지만
2)심산과의 인연에서 출발한다고 볼 수 있어서 심산의 활동과 해저 바래미의 나타난 기록들과 행동들을 재조명할 필요
있을 것으로 보인다
심산이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은 물론 스승으로 모시던 곽종석 한주 이진상외...을 들수 있을 것이나 심산유고에 나오듯이 어머니의
의연한 행동거지와 아버지의 *******효와 충 실천사상등과 목숨을 담보한 만인소선비정신과 의병활동********** 영향을 많이 받은 것 또한 사실이다(이부분은 정재와 대산 이상정등의 사상과 몸을 사리지 않는 만인소정신등이 (해저의 사상들 은연중에 몸에 배여)가장 큰 영향을 주지 않았나합니다 만회고택의 가훈도 충효이다
먼저 호자림자의 태생과 행동거지는 다음과 같으며
해저에서 23살에 동강주손으로 양자간 사연 또한 아래와 같다
(양자간 사연에 대한 것은 독립운동가이신 아베정진이 약1달간 심산의 병상을 지키면서 들는 얘기다)
1)심산의 부친인 우자 림자의 바래미에서의 집과 양자에 얽힌스토리(고증된 기록과 비하인드 스토리)
비하인드 스토리의 내막은 당시 철저한 감시속에서 기록으로 남기지 못한 점으로 아래에서 사례를 들어 설명할 것임
양자에 얽힌스토리정리 해저에서는 둥지리 양자라고 대부분 해저에서는 알고있고 전해듣고 있으나 그렇지 않다
동강과 개암의 관계에서 시작된다(스토리)
동강의 손이 끊어지면서 양자를 구하기 위해서 전국을 떠돌던 중 같은 값이면 일가가 좋지 않는가?
내압에서 구하지 못하고 해저로 들어와 해저는 그당시 영정조 이후로도 막강한 세를 과시하든 곳으로
명월루에서 귀거하면서 동네를 살피던 중
마침 차림은 허술하고 지게를 지고 오는(그 당시 가세가 허술함)우림을 보고 차림은 허술하나 눈이 빛났다함
양자를 달라하니 우림의 부친들이 택도 없는 소리말라며 한양으로 올라감
(사실 그때 아주 부유했다면 누가 양자에 응했겠는가?)
조상의 맥을 잊지 못하는데 살아서 무엇하는가라며 단식투쟁 (명월루에서 무릅 꿁고 빌었다고도 함 이부분은 전해지는 얘기)
마을 회의가 열리면서 산송장 치루게 생겼으니 한양에 간분들을 불려내려서 설득시키면서 양자로 보내게된것임
(이 얘기는 부친이신 정자 진짜 께서 심산의 병실을 한달간 지키면서 들은 얘기임)
그외에도 동강의 인품을 짐작할 수 있는 남명조식과 장군의 딸인 부인과 읽힌 스토리을 함께 하였으나 그당시 녹화를 해두지 않았 아쉬움을 남긴다
심산의 바래미 살던 곳 밝히자면 현재 만회고택 터 옆에 밭으로 된부분인데 지금도 대지로 되어있으나 집을 헐고 밭으로 사용함
선군자 하강부군(김 호림) 소개(바래미 만회고택터는 생가기준으로 호림과 심산 경능 창맥 내방장 진림 홍기와 정진을 생가고향이다)
1842년 4월14일 안동부 해저리에서 탄생했으며 개암 팔오헌 후손으로 통덕랑을 지낸 지영과 어머니 함창 김 참판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만회고택과 호림의 집안은 일지와 공과 재인을 조상으로 두고 있다 일지와공은 만인소의 소수로 추대되어 활동했던 집안과 혈맹이다 당연히 몸을 사리지 않는 정신을 가졌던 분이며 바래미는 전체가 만인소의 중심에 있었다 호림의 고조부는 바로 만인소를 삼계서원장으로서 의병활동의 단초가 된 만인소를 영남에 통문으로 띄운 분이며 목숨건 만인소의 선비정신은 의병활동의 단초가 됨은 물론이다
이의 중심에 바래미가 있었다
23살에 성주 동강주손으로 양자감 (23살이면 이미 사고와 인격이 완성된 후 였으므로 사고나 행동거지에서 철저히 바래미의 인으로 봐도 무방함)
바래미 사상은 정통 퇴계학문과 가장 큰 동주영향은 무실 정제와 대산 이상정이 문하나 혼맥등으로 가장 많이 얽혀
명망을 나타내는 안동좌수와 별감도 마찬가지이다
만회고택은 일지와공의 후손으로 사실 심산의 생가 큰집으로 봐도 좋을 것입니다
홍자기자가 역활을 함은 당연하며 큰 금액을 지원한 것으로 전해지는 교자림자도 마찬가지 일지와공의 후손으로
심산을 지원함은 당연하다 정신적 물질적으로 가장 큰 역활을 한 것은 또한 당연하다
(그당시 닭실과 해저는 안동소속으로 그후 변경되었으나 안동과의 교류가 혈연적으로 지역적으로 많았고 또한 그만한 힘을
간직한 것으로 보여 심산이 유숙한 명월루를 방문한 권상원장 왈 우리 몇사람이 안동과 예안을 책임지겠으니 그대는 바로 가라)
이 말뜻은 우리 몇이서 좌도를 책임지겠다는 듯이며 대표를 방문하여 서명 받는 일을 하겠다는 뜻일 것입니다
***채산 권상규는 홍기제문에 유림대표를 심방하고 대의를 강론하고 서명 받는 일을 주선하다라고함 독립운동가공훈록(보훈처 마찬가지임)
선군자 하강부군 호림(1842년 바래미에서 출생)
심산을 낳은 것은 하강부군이 38살때임
23살인 1865년 동강종가로 양자감
1)효성이 뛰어났으며 양쪽부모들에 대한 효성이 뛰어남 생가부모의 연이은 상을 당하여 300리길을 달리면서 울부짖어 여러번 기절했다 깨어남
1870년(호림나이 28덟)1883년(호림나이41살)연이은 부모상 4년간 300리길을 바쁘게 쫓아다니며...
호림나이14살에는 이휘병의 만인소가 1880년부터는 위정척사 만인소가 이어지던 시기(바래미는 중심지)
23살까지 바래미인 그후로도 상당부분 바래미 생활
2)일상 언어와 행동사이 체험하면서 공부함(실천의 중요성)
3)농민의 어려움도 깨우쳐줌(평등사상의 소유자)
4)1895년 섬나라 도적이 시끄럽게하고 우리왕비를 시해하고 단발령을 내리자...........격문을 돌리고 의병을 일으키려함(만인소 정신)일지와공의 아들인 희성은 삼계서원장(호림의 고조부)을 역임하면서 만인소 발의 바래미 의병참여시작
심산나이 17곱살 이를 보면 아버지의 영향이 아닌가?
5)옳바른 선비사상구현(임금에게 상소과정)***********이는 심산유고 하강부군편을 참조(비리와 전혀 타협하지 않는 성격으로
옳바른 말을 즐거하고 타협을 모르던 바래미 선조의 행장을 보시면 될것임 그래서 야당으로서 귀양도 많이감))
어머니 인동장씨의 굳센행동(심산을 옳바로 이끌어) 심산유고 참고 몇번이나 바로 세워
나라잃은 심산은 한때 미치광이 행동(어머님의 선도) 어머니는 인동장씨로 여헌의 인동장씨는 영남7대명가(명가라해서
벼슬등으로만 명가라하지 않는다 선행과 민중을 선도하거나 국가의 위급시 함께한 흔적등)
가족 때문에 머뭇거릴 때도 단호한 가르킴으로 선도함
때는 그동안의 위정척사(대산이상정 무실정제 김흥락등과 혼맥과 문하등으로 많이 얽힌듯)....이전의 위정척사가 척사를 극복하는 과정으로 독립운동으로 하나둘 승화해가는 과정을 밟는 듯(나라를 잃으면서 상당한 변혁기를 맞이함)
변화(승화과정)
***1)단합된 힘(10000명의 유생)이 발판되어(기존의 유림은 현실참여보다는 주자학적인 유림)정치참여
삼계통문과 만인소(당시의 해저는 한동과 희자 전성시대로 막강한 힘을 과시함)삼계서원의 위치 재조명
만인소와 정재 추숭상소와 조선책략 몇차례에 걸친 상소(바래미와 바래미 인맥주도)
2)의병활동(가장 빨랐던 통문(안동 삼계통문) 당시는 닭실의 석학들 왕성함(권상익 권세연과 권상원장외)
바래미와 진주 강씨 곽면우 또한 춘양등에서 살아 (망미대의 만산과 울분 달래)
그 당시의 선비들도 그 이후에도 마찬가지지만
오직 유학만을 숭상하던 사상(단발령이나 창씨등은 극렬반대하나 나라일은 유림의 도로 보지 않아)대표적 전간재 휼륭한 선비며 유림이다만 다만 그당시 오로지 유학을 숭상(주자학적 유림)
또한 현실도피 계층이 가장 많았던 것으로보인다
일제에 타협하던 유림등으로 나누어 질것입니다
위정척사란 외세를 배척하는 것으로 그당시 정보다 파를 중시하거나ㅣ유교이념(전간재로 대표되는 주자학적 순수유림등이 나라보다 앞선 측면이 없지 않았을 것입니다만 이러한 것들이 조선책략을 계기로 척사운동으로 변화하며 만인소의 단합된 힘이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빠지자 의병활동등으로 나타나(독립운동사상의 변천사 와 당시 심산의 버팀목 역활을 한 중소지주 계층의 삶과 행태 재조명과 단발령과 창씨등에 극력 반대하면서 문을 닫고 우리 것을 서당에서 교육하며 우국충정의 시를 읆조리면서 일제에 항거한 생활을 영위한 심산의 주요기반 역활을 한 선비들의 삶을 재조명 할필요)
이런 유림의 행동거지는 파리장서를 계기로 한단계 업그레이드되며 계파를 초월하고 척사를 극복하면서 침약자인 일본에 대한 국권회복으로 전환함을 보여준다
1)단발의 의미와 창시의 의미 재조명(단순한 주자학적인 의미인가 민족의 정신적인 의미인가?외
이부분에 대해서는 심산관련서적에서도 조명한 적이 없어
단발령 창씨는 어떤 의미였으며 우리에게는 무었이었던가?
일본은 왜 이런 기획을 한것인가....
왜 극력 반발한 것인가?
이제 해방이 되었으니 김홍기는 국법으로 머리를 깍으라면 깍겠다함
고려에서 조선으로 들어오면서 배불 숭유정책등으로 정신과 제도개혁으로 지배계층을 바꾸어 일본도 양민계층으로 지배계층을 변화를 기한 흔적들이 매우 많습니다 여기에 토지개혁까지 가세함 이것은 지배계층의 변화와 사상의 변화를 동시 기획하는 것입니다(동양척식회사의 폭탄투척사건의 의미는?)
동양척식회사는 어떠한 역활을 했는가?
왜 동양척식회사가 대상이었나?
정신과 물질을 함께 바꾸는 것입니다
일본은 이를 위해서 어떤일을 했으며 우리는 어떻게 항거했는가등
(이런 것은 본인의 개인 생각으로 그냥 참고만)
그리고 선비들 또한 적극 참여층(단발령과 창씨 절대반대 독립운동 적극참여 층의 행태와
일본에 비협조하며 현실도피적인 선비계층(주로 문을 닫고 우거함)
문을 닫고 후학을 기른 층등의 재조명
파리장서 약사에서는 중세주자학의 보편주의와 조선후기 실학자들이 제기한 민족주의가 동도서기론적 계몽주의를 거쳐서 파리장서에서 완전히 극복됨을 의미한다함(물론 완전극복으로 보기는 어려워)
심산의 자조p71 조국이 없으매(조국에 대한 생각을 잘드려낸다)
건영가옥에서 수십인이 모여서 회식후 (경찰들이 닥쳐서 협박(심산과 홍기가 해혹함)
1)85권장 상원만사(닭실)명월루 방문(심산이 뜻맞는 분 몇분과 명월루에 모여 유숙하고 다음날 권상원장을 맞이하여 권상원장이
안동좌도와 예안은 우리 몇이서 전적으로 책임지겠다함(이런 것이 중요함은 물론이다 안동과 예안을 방문이나 통문으로 또는 대의를 강론하고 서명 받는 일을 주선하다라고 나옮) 아마 서명한 것보다 어려운 일일것임
***이것을 보시면 서명하지는 않았으나 일차파리장서부터 바래미인들은 대거 참여함 붙잡혀 들어가서 고문 받은 분들은 홍기 경능창백외 2명이 더있음
2)104권순겸 상익이 준시에 차운 이만도의 처남(명월루에서 파리장서 초안 작성한 것으로 나와)
이부분은 앞으로 연구할 과제 명월루에서 창수시회에 삼일절 이전으로 보이는데(해사의 피살시점을 고려한다면 창수시에 해사란
호와 우자를 쓴 심산의 야우와 9우등으로 흔적이 나오는데 전문가의 감정이 필요한 부분이다 창수시회에 청산 권상익은 청산이란 호가 뚜렸하며 닭실 권정환씨는 청산의 글씨가 맞다고함
3)125어머님 기일에(타고난 효성을 본받아)
4)131회포서술 손덕부 후익에게 보이다(심산의 사돈으로 심산의 핵심적인 일 도맡아 후익의 딸인 심산의 둘째 며늘이는 심산의 지령서 전달했으며 후익은 홍기와 서신왕래가 많아 명월루에는 3번정도 방문함)
5)조선민번개정 창씨에 극력 반발하면서 일본은 씨의 나라(창씨를 거부하는 것 또한 민족정기를 지키는 일)
유림에서는 우리의 정기와 미래를 위해서 또한 일본의 항거하는 뜻으로 단발령과 특히나 창씨에서는 극력 저항함
(끝까지 홍기도 단발령과 창씨를 하지 않음)
6)150신라를 읽고 김유신이 당나라를 업은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민족주의 사고를 대변함)
위정척사와 신탁반대로 나타남(민족주의 사상을 나타냄 )
7)151 신탁통치반대(민족자주사상을 드려내)
8)1995년 성균관이 친일파에 점거된것을 한탄(이승만의 프랑스처럼 일제를 청산하지 못해서 민족정기를 세우는 것에 실패함)
이제 지나간 일이지만 프랑스등 대부분의 나라는 그당시 부역한 사람들은 합당한 죄를 물어 단죄함 역사를 정리하지 않는 나라는 대한민국 뿐이다
대한민국의 최고 명문중의 명문 오성대감가는 지금 어떻게 되었으며 일본에 부역한 이들은 호의 호식하면서도 부역의 댓가로
획득한 토지까지 찿겠다고 재판까지 하는 현실이다
이래서야 민족의 정기가 바로 서겠는가하는 것입니다
9)171권은필 상용만사(권세연의 아들) 명월루방문 충제 근사록 간직 형님아우 모두 고비에 임했어라 구절로 보아서는 형제분들이 참여는 했으나 구속되지는 않은 듯 대부분 심산유고를 보면 참여한 분들에 대한 고마음과 행적을 표시하고 있어 닭실 의병대장을 역임한 권세연 후손 채산 권상규도 마찬가지 후손임)
***이차유림단 사건에도 40대 8명이 주동5명수혜(구속자는 구속여부라 8명중 김창희 우림 등이 빠진듯 황소50마리 값전달
(이부분은 공식적인 기록은 아님)
10)당파사람을 탄식함(당이60개 난립 정치참여 경계)이부분은 홍기의 행보와도 똑같음(정치 비참여와 자숙강조)
11)278손덕부 후익 만사
12)63족숙 태시 헌식만사
13)63족숙은필 뇌식만사
14)94해상의 여러족친 탁여 한식 아저씨 순도 창순 회부 창근형님 경능창백 아우 노일창도 아우 순우 홍기 조카를 그리워하며
옥황은 깊이 취해있으니 어느때 술을 깰까(일본으로 부터 언제 독립) 바래미 출신 독립운동가들로 이인물들은 심산유고에서 안부를 묻는등 가장 빈번하게 나오는 바래미 인물들임
14-1)이소근 원일의 고림유거에 차운(원일은 홍기와도 교류) 이원록 형
15)100족숙참봉인직 교림 만사(택동의 자손으로 만회고택계로 개암 팔오헌의 후손이며 순응으로 이거 일차장서시 순흥갑부로 심산이 방문시에 해저보다 더 많은 돈을 내었다고 전해짐 만사란 것은 그때의 고마움에 대한 표시 또한 홍자기자는 순흥가와의 서신등으로 교류가 있었음을 보여줌(순흥가의 효행과 초군정사건으로 순흥에서 명망가집안으로 이름나)순흥은 상거래등으로 바래미의 부자와는 차원이 다름(현재는 가세가 기울어 후손이 그당시 증거를 찿던중 은행에서 집을 저당으로 자금을 일부 마련한 것을 찿았다함 논문등으로 발표된 듯) 일지와공의 후손으로 만회고택의 작은 집격 은행에 담보제공 경찰신문조서등이 나와 순흥 교림가에서는 약2만원을 지원한 것으로 전해짐 해저에서 전해지는 말로는 해저보다 많이 지원했다함
현재도 김뇌식 가에서는 예전에 3000원 전재산을 담보제공을 하면서 문제되었던 땅 일부등이 산업은행에서 이제야 찿겠다고 나섬)
순흥 김자인댁은 만석군 부자로 배꼻는 분 감기걸린분 김자인댁으로 가라는 말이 있을 정도의 만석군이며 명망 높은 집안이었으며 일본이 고의로 파산시킨 것으로 보고 있음
내선비를 찿아 몇번이나 산하를 넘었던가란 문맥으로 봐서 몇번 만났다는 얘기임
15-1)권 순겸 상익 차운p104 닭실 독립운동가
15-1)족형 창우 만사 개암주손p86 독립운동가
16)p113순도 창순 형이 찿아와 함께 읊다 의리가 산과 같아 험난하고 어려운 세상길 함께 다 밟고 다녔지 조금만 기다리면 죽지만 않는다면 시대의 편안함을 들으리)
17)족제 노일 창도 만사 팔오헌 9세주손
18)족숙 탁여 한식만사(바래미 독립운동가
19)족질 순우홍기만사(1919년 이전에 이미 마을 분들과 잘알고 지냈음을 의미 그당시 시국을 논하면서
일찌기 순우를 찿은 날 바다위 정든 고향마을
날이면 날마다 닭잡고 밥지어 여러일가들을 성대하게 만났디 의분이 복받치어 고금을 논하고........
이글의 뜻은 순우를 삼일운동 이전에 벌써 만나서 시국을 논하고 서로를 잘알고 있었음을 나타내며 일가들도 이미 교분으로 알고 있었음을 뜻한다
심산이 바로 교자림자를 방문하고 바래미로 와서 일가들의 모임을 가지는 것이 그때 처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일 것임
(해저란 창근족숙을 방문하면서 심산은 형님하면서 격의 없이 들어오든 곳임)
19-1 손공산 준필에게 224)
20)282손덕부 후익 1940년 해저를 거쳐서 대구로 돌아와 명월루 여러번 방문함(교류) 시회등으로도 여러번 만남
284 창씨 거부한 일로 경찰에게 곤욕 문자까지 수색당해 창씨 개와 양을 어떻게 구별하나
20-1)장 치양 세명(인동종손)1919년
21)339족형 윤겸창조께 사월리 종중에 믿을 사람이 없다....병든 아내와 어린자식을 부탁할 곳없고.사당의 신주를 받들고서 해저로 옮겨 가족들에 당부해두어
생가 고향인 해저로 언급함
22)341종제 경능창백에게(생가사촌인 경능창백과는 지속교류 심산의 누이들과도)동강종가에서는 거의 가까운 촌수도 없었음
탁여 회부 순도 순우 안부 물어 율시를 써보냄
23)342순우홍기에게 상처와 심산의 형편 하소연
24)352족숙 이회 김우림 김황 중요한 인물로 나중에 심산 유고정리(명월루에 서신에서 10년전에도 방문했고 선조서적인 천유당유고 5권도 명월루에 보내옮 서신교류
25)352이회 김우림 김황 다섯지방의 비를 바꾸는 일 해저와 금계와 상의하라(심산의 핵심인물 홍기와 교류함)
26)3531928년 이미 식구들에게 고향인 봉화 해저땅으로 사당을 받들어 옮기라고 당부해두었습니다
27)족숙 이회 김우림(김황) 아호지방의 창씨 물결 홀로 지키어 한지방을 진정시켜
28)368 족숙 이회황 교위공과 칠봉공 비석 해제 중의에서 제견해에 일치를 보아(해저문중과의 지속적인 교류를 나타냄)
29)370족제 창신에게 20대 독서회사건 주역 바래미 독립운동가 참판댁후손 자네가 감옥에 갇혀있어 헌식(애족장)의 상사
*************독서회 마찬가지로 5명이 참여 3명수혜 중헌과 중열2분 누락 마찬가지 구속기준이라
30)371족제 창희 창기에게 창희은 남호고택 주손으로 신간회 그리고 자금전달등 연락책등으로 활동이 많이 눈에 띄나
당시 남호가에서는 한집에 한사람이면 되지 야야 그만두라 했답니다(퇴계가 쓴 사무사(덕불고) 현판대로 생각함에 사특함이 없고 덕이 있으면 외롭지 않다는 명망과 덕을 실천한 명문가 독립운동가로도 남호와 비록 공식인정은 못받았으나 그의 아들 김창희도 여러곳에서 활동한 흔적이 또렸하다 심산유고는 대체로 그당시 활동에 대한 고마움을 표시하는 글귀가 또렸함
뇌식의 상에 걷지 못하고 감시자까지 붙어서
30-1)아들 환기1923 북경에 있을 때
31)494족질 순우 홍기 영전에1955 자네가 있을 때는 문중과 나라에 대들보와 기둥이 있었고 자네가 없음에 온갖 도깨비들이 빙거(의지할 데가 없어서) 혼란스럽다
32)족제 창희 영전에 p495
32)622 전간제 파리장서 서명추진일 거부(호국유림이전의 유림사상을 극명하게 드려낸 일)조명
33)해사 김정호(피살됨)중요한 인물로 정보통이며 심산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로 파리장서전에 창수시에 서명한 흔적 보임(명월루)
P670선군자 호림 하강부군 유사679까지
34)680벽옹73년회상기 벽옹에서 우라 불려도 좋다 개명함 명월루 에서 창수시회 대 심산은 여러번 참여 유림대표들 역시 참여함
해방후 창수시에 야우 9우등으로 표시된것이 심산의 창수시 아닌가함(전문가 감정필요함)
심산은 해방후에도 가장 많이 순우를 찿고 방문함(심산관련 독립운동가 유족인 권세연의 손자인 권정환님과 광복절에 우연히 동행하면서 들은 얘기임 창수시회 직접참여시 경북유림에서 많이 참여해서 창수시회를 개최했다고함) 그당시 아버지인 권상용 소수서원 원장 역임과 함께 왔다함
심산 약사
1)성기가 곧고 남에게 지지 않아(우리는 꼬장 꼬장이라하는 데 심사할배 기질과 유사함)조상인 일지와공의 만인소정신(만인소는 해저 주도)
부모에게서 계급차별과 농민의 어려움(문벌타파와 노예해방
2)부모1896년 별세 창숙나이18세
어머님의 가르침 대현의 종손으로 거상을하면서 에없음이 이지경에 이르러 아버지의 혼령이 있다면 내가 자식을 두었다고 하기를 어찌 좋아하겠는가? 깨우침 얻어
상을 마치고 만구 이종기 면우 곽종석 대계 이승희 회당 장영석을 찿아봅고 경서의 뜻을 질문하여 감발한 바가 많았다
(일지와공의 외증손인 이휘병의 만인소와 희성의 만인소 삼계서원 첫발의 정재사상과 정재문화 해저도 주축으로 의병활동참여 이미 이런의식과 의병활동 격문과 의지 드려내 :호림공)
이때 억센도적이 국경을 압박
심산은 세속의 학자가 한갓 성리의 깊은 뜻을 말할뿐 나라를 구제하는 시급한 일을 하지 않는 것을 병통으로 여겼다
이는 거짓선비다라고 말함
일진회 매도 인재양성을 통한 학교설립추진 실패(청천서당등)
방탕한 생활(미쳤다)
어머님의 교화 학문후 천천히 광복도모하라(고비마다 어머님의 옳바른 훈도)
공부에 매진함(이때가 심산이 학문을 완성한 시기임) 빠른 시기에 학문을 완성함(해저의 명석한 타고난 두뇌가 작용한듯)
1919년 삼일운동 유림의 나라에서 유림이 빠진 것을 통탄하며 어떤 방법으로란 해사의 질문에 심산은 이미 준비한듯
해사에게 파리장서를 언급함
거창의 곽종석 김황(김우림)을 만나서 자세히 보고 파리장서 부탁함 김우림은 편지상으로 10년전 홍자기자 방문) 기암 이중업(향산 이만도의 아들로 이고 이동흠의 부친 이동흠은 홍기의 사돈)해사 김정호(명월루 창수시에 서명됨)벽서 유준근 집에서 각 지방연락방도 상의
심산옹은 경상도를 맡아
옹은 바로 순흥으로 가서 족숙 교림(일지와 공의 후예로 만회고택계로 만인소의 소수의 처남인 일지와공의 후손 )을 방문
(방문의 목적은 첫째 자금마련과 연락 좌도 고동시킬 방안등임)
교자림자는 한때 배고프면(감기들면) 순흥 교림에게로 가랄 정도의 순흥갑부임(해저보다 많은 자금을 받았다고 전해짐)
순흥으로 이거했으나 팔오헌의 후손이며 만회고택 작은집임(일지와계) 순흥에서 효와 초군정으로 유명 해방전 교림의 부친은 일본 헌병에게 살해당해 교림이 복수하여 벼슬을 하사받음 일지와공의 후손으로 혈족인 심산을 돕는 것은 당연함
교림가에서는 2만원으로 전해짐 경찰조서기록과 은행담보로 돈을 빌린 일부 기록 다른 서책을 참고한 것이라함
사재를 털어넣은 초군청과 독립운동으로 눈에 가시 같은 교림을 일본이 고의 파산시킨 것으로 보고있음(만석
꾼 부자)
심산은 경남북 기암(이중업)은 충남북 맏아
심산은 석탄을 지나면서 김동진장을 보고(영주지방의 김동진으로 홍기와의 교류와 서신)좌도를 고동시킬 방도 부탁
안동해제에 이르러(해제는 안동임) 족형 창근 창순 족숙 한식 뇌식과 족질홍기등 여러사람과 더불어 좌도 각지방 인사와 연락할 것을 의논하니 다 쾌하게 응락하였다(안동에 통문을 보내라 특히 항상 해저는 거문적인 지원을 약속하고 실행함)
하루는 낮에(며칠 유숙한 듯)문파친척 수십명이 족제 창도집(팔오헌9세주손)에서 회식 왜경 들이닥쳐서 심산옹을 끌어 후원으로 가서 옹의 행방을따지며 협박 공갈하니 정회를 풀 뿐이고 딴뜻은 없다
홍기군도 해혹시키니 행장을 챙겨서 빨리 떠나라함
그날밤에 뜻맞는 두세사람과 함께 홍기집(명월루)에 모였는데 낮일로 두려워하며 안동 예안방면 걸음을 힘껐 말렸다
다음날 닭실 권상원장을 맞이해서 서로 의론하니(명월루로 권상원장이 방문했다는 얘기)
풍색이 좋지않을 때 좌도한판은 우리 몇사람이 전적으로 책임 질것이니 자네는 자중함이 좋겠다
(그당시 닭실과 해저는 혈연으로 맻어져 심산도 마찬가지 또한 그 당시 안동을 움직일 힘 또한 있었던 것으로 알려짐)
해저만 해도 안동좌수가 13명 별감9분이(19문과와 18사마시) 나온 마을임(200년의 짧은 역사)
안동과 예안을 맏기고 왜관으로 감
성주집에 들려 어머님을 배알함
이번 거사와 이번 걸음은 진실로 너의 뜻이나 노모를 생각하지 말고 힘쓰라
(노모는 경북 7대 명문가의 하나인 인동 장씨 가문 출신 다시 사위를 인동장씨 종가 작은집 장세형을 맞이함)
(여기에서 닭실의 권상원장과 김홍기외 핵심들이 심산일들의 주축들임을 알것임)
의병활동가인 석학 채산 권상규옹은 홍자 기자 순우가 유림대표를 심방하고 대의를 강론하고 서명받는 일을 주선하다라고
쓰고 있음 일차 유림에서부터 주도적인 역활을 했음을 나타내는 것
705기암(이중업 홍기의 사돈인 설송체의 대가이며 추월한수정을 쓴 이고 이동흠의 부친 마찬가지 독립운동가)벽서 백은이 학살상항등 보고
해사 김정호(명월루 창수시에 해사가 뚜렸함)강도피살 우에 대한 것은 해사와 함께 나오는 창수시가 1편 나머지는 9우 야우등으로
단독으로 나옮(심산의 창수시가 맞을 경우 3.1운동전에도 방문한 흔적이 된다(전문가의 판단을 받아야 한다)
유준근장 간재전우(유림대가) 파리장서 보내는 일은 선비가 순도하는 의리는 실로 머리를 깍는 사람의 복국운동과는 관련이 없다
파리장서집요 반대함(순수유림)
순도한다는 도는 무슨도인가?
파리장서 서명부분에 대해서는 바래미는 3분(나이드신분 당시 바래미의 대표하시던 분들)이 서명했으나 심산이 더이상의
서명은 말렸다고 전해짐 또한 파리장서시에 홍기와 창백외 일차유림에서도 서명 받는 일등으로 파리장서에 참여함
파리장서 중국으로 떠남
파리장서 감옥행 홍자기자도 10일간 감옥생활 한듯 (서명하지 않아서 빨리 풀린듯) 안종훈편참고
파리장서후 전라도
김상희를 영남으로 보내 자금 모집(자금마련은 꾸준히 이루어진 듯 밑도 끝도 없이 길림성에서 누구를 만나라
구절을 보면서 이런 것이 그런 유관편지 아닌가함(국학진흥원 얘기)
김병환 만주등은 오록 쪽이 아닌가함
746환기(편지 겉봉투 보관중)가족은 겨우 생명보존 국내 인심이 모두 죽어서 응하지 않음을 보고
(집에 편지가 옥천으로 되어서 해저서 이거한 순도집이 아닌가함)
환기는 자금을 모집한 흔적이 심산유고에서도 나옮
그때 우당과 내몽고 황무지 20만평을 사서 군대양성 둔병제도로 10여년 힘을 길러 일본에 대항
(이것이 이차유림단의 목적이다)
748이를 위해서 심산은 곽종석의 문집 발간시기을 이용 이봉로 김화식 .... 국내잠임
족숙 김황 경남(명월루 방문부자 편지교류)
김화식 봉화사람 의성)
***김화식은( 바래미 독립운동가인 김헌식이 1925년8월 대구에서 김창숙의 취지문을 전달협력구함(독립유공자 공훈록15권 국가보훈처 또한 손후익 이재락 이동흠 김동진등과 자금마련을 위해서 수차례회동이라함 대구 권상경 자금모집중 체포됨)
정수기를 봉화로 보내 손진수 후익부자는 진행방향강구(후익은 서신교류와 명월루3번 방문)후익은 심산의 사돈지연으로 많은 역활을 한인물로 홍자기자는 제문을 씀
이차유림에서는 일차 때는 비밀유지와 일할 분들을 남기고했다함 더이상의 서명은 심산이 말렸다고함 실질적으로 더욱 더 어려웠던 이차유림에서는 젊은 40대가 주축이되어서 다시 거문적인 활동(상징적인 60대후반 이상이 대표서명)
***종제창백이 매부 이길호 편지전달(친가인 해저와의 교류가 지속됨을 나타냄(창백 서신 명월루에 있음
고령에 있는 이씨에게 시집간 누이동생과 본가(해저)소식을 알려
화장환 정수기 이태호 김화식(바래미 김헌식이 포섭 봉화 소란 의성인) 송영우 곽윤 종제창백(바래미 심산의 생가사촌 각지에 나누어 파견
서울에10일 머물러
753 백성의 기운이 죽어 냉담하게 거절 겁나서 불응 응하는 자가 있더라도 몇 사람의 노자정도
기호지방과 관서지방을 포기 영남 최후 일전 결행
11일 대구행 족숙 김헌식 매부 이영로 및 이기주 이동흠 이종흠 (다량의 서신 이동흠은 받은 서신만60통 홍기의 사돈)형제들 찿아와(이동흠의 편지는 많은 것들이 편지 봉투에서는 이동흠 편지로 볼수 없는 것들이 많아
12월 헌식(바래미)종제창백 생가 4촌) 수기 종흠 동흠(홍기 사돈들) 화식(봉화 의성 헌식이)포섭)홍묵 영로 제인들을 안동 예안 영주 봉화 상주 서산 영양 영천 경주 양산 울산 청도 밀양 성주 고령 창령 합천 진주 의령 함안 마산 부산등 지령서와 편지를 써서 보내(지령서를 보낸 것)
김홍기 국가보훈처 공훈록을 보면 지령서를 남호고택에 전달하여 협조구하며 2000원 받음 후 남호고택의 김뇌식과 자금마련 활동에 함께 나서기를 결정하고 만산고택의 강필(홍기의 외숙)을 방문하여 2000원을 받아서 합이4000원을 동래에 은거하던 심산에게 전달했다고 나옮(이것은 시간상으로 정확하게 일치)지령을 받고 해저 40대 젊은이도 함께 하기로 한듯
마을에서는 40대 젊은이 8명이 주동하여 해저 마을에서만 5000원을 전달한 것으로 전해진다(이것은 그당시 참여했던 분들이
말로서 전해온 사실임(공식기록은 12500원이나 실제로는 3만원정도 거둔 것으로 알려져(자세한 것은 모름)
해저마을과 홍기의 역활이 더해져 실제로 성과는 후익과 바래미 마을이라고 함
울산 언양냇가 자동차사고
울산입암(손진수 후익부자 마중 전력간호
족제 김창희 (바래미 독립운동가 합이 3,000원을 낸 김뇌식의 아들)자금전달로 간듯 해저 우리일가들 전력으로 호응하겠다는 뜻을 알려와
***사실 이차유림사건은 일차보다 환경적으로나 모든면에서 아주 어려운 환경이 었으며 일본의 감시와 핍박이 심한
때였음에도 불구하고 일차에서도 거문적인 지원 더욱 어려웠던 이차유림단에서도 더욱 적극적으로 인원을 포섭하고
조그마한 마을이 감당하기 어려운 금액들을 각출하여 다시 거문적인 지원에 나선다
일차 모금금액은 모르겠으나 이차유림에서 해저가 낸 금액은 5000원 강필(만산고택가지 합한다면 7000원임
그당시 해저마을 의성김씨는 86가구 뿐이다
거문적인 지원약속을 일차에서 서명하고 자금지원 서명받는 일주선등의 중심 활동
이차유림에서도 이 조그마한 마을 해저와 같았다면 실패란 없었을 듯하다
(물론 바래미 마을 말고도 심산의 역활 중심인물들을 포섭하고 권상경등 바래미 외의 인물들에게도 자금모집을 강행한 점으로 보아 바래미의 역활은 그보다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길호로 부터 창백이 와서 감시가 심함을 알려(생가 혈연들과 서로 연락됨)
중국으로 다시 돌아감
금액이 턱없이 모자라 황무지 개간이 어려워
모든면에서 정신적 물질적인 지원자 역활을 한 해저 바래미의 독립운동사는 그이후도 심산관계도 지속됨을
보실 것이지만 그후에도 거문적으로 일제에 항거 독서회사건 신간회 민립대학 설립 태극단사건 학생의거
일제 병영에서 집단적으로 탈출 항거등으로 나타나
(이것에 대한 것은 나중에 자세히 언급함)
독립운동가 김홍기의 유집 (모든 심산의 중요인물들과 교류하고 독립운동의 정신을 함양하고 고무시켰던
홍기 기려수필진에서 발문을 받아간 홍기의 글에서는 30명의 젊은이들이 고문등으로 매타작 젊은 원혼이라 표현함
3대에 걸쳐서 전문중 30명이상이 독립운동에 매달린 마을 해저 바래미
(뒤에 기록은 지면상 나중에 다시 씀)
759 석오 백범 이공과 함께 국민의 기운이 죽은 것을 설명하고 의열단에 주어서 친일무리를 박멸
이것이 나석주가 식산은행 및 동양척식회사에 폭탄을 던진 사건이다 왜경 많이 사살후 자살
해방후 60개정당난립 정당가입권유 물리쳐
홍자기자는 남북과 동서로 나뉘어서 혼란스러울때 봉화 내성에서 모이게해서 자숙할 것을 강론하여
화를 예방했다라고 함
후에도 심산과 동료들과 변함없는 의리를 보여주었던 할배홍기
남에게도 이런 사실들을 전혀 알리지 않았다
창수시회가 열리고 심산이 많이 참여하고(닭실 권정환씨증언) 유집을 보면 대부분 심산에서 중심 인물이었으며 외에도 후대의 교육 독립운동고무(시에도 나타나)
막연히 마을에서 독립운동의 산실은 명월루이다 거점이다라고 해서
사실 자세한 내용은 몰랐습니다만
고향에 내려와서 국학진흥원에 할아버지의 간찰등을 기탁과정에서 참으로 많은 사실들이 드려나고
홍기와 바래미 해저가 중심역활을 한것이 나타납니다
심산활동의 본질은 여운형과 김구 등이 아니며
유림들의 나라 찿기이며 유림정신의 투철한 선비정신
옳바른 선비정신의 재조명이며 그당시 목숨걸고 활동한분들의 역사가 재조명되는 일일 것입니다
해방후에도 심산은 창수시회 이승만의 부정선거에 반기를 들면서도 명월루에 일주일 머물러
할아버지 상에도 조문 미국과 면담때도 불려올려 평생 억지로 미군이 워낙풍채가 좋고 기이한 모습이라 한장의 사진을 찍었다함)
김창엽
1941일본 중앙대학 법문부3년재학중 김규엽 이종환과 학생조직결성 민중에 자기 계획전달
일본확보정보바탕
민족의식고취와 농촌계몽12월8일 태평양전쟁 일제가 반드시 패망 전단지 살포
해저 김중욱1945년 1월 일본군 탈출 중국군 장교로 일본 항거 중국군 총대장 덩신중장 휘하에서 유격전치름
(명월루 홍자기자에 사사받음 심산이 참여한 창수시회 당시 심부름했다고 닭실 권정환씨 말함
일화로는 그당시 홍자기자에게 배운 한문실력으로 글을 써보여서 동료들중 바로 장교로 임명되었다함)
흑색자유연합
참판댁 후손으로 김창신(덕영 손)의 주도아래 김중문 김덕기 실형(2명은 구속기준이라 제외됨)
조선민립대학관련 홍기교류인물 김창근 김창돈 김보림[희소→우수→윤영(이만손의 사위)→창식],권태영 김창희 강필 김사민
***김창백(심산관련) 김동진을 동지로 영입
신간회 봉화지부 김만기 김창도 김창희등 참여
민립대학 설립등 홍자기자 교류인물들
김창근 집행위원장 절친독립운동가 김창돈 강필(외숙) 소석 권태영 시교류 많아 김보림(서신교류 많아 )김창희(남호 김뢰식의 아들
심산관련 김창백 김동진을 동지로 영입
신간회 김만기(김창백의 아들 김태섭(오록종손 홍기의 처남 김창희 김뢰식의 아들 김만기는 노동운동으로 형을 삶
(노동운동이나 노동운동을 통해서 일본에 항거한 것으로 봐야)
김창희는 신간회 민립대학설립 심산의 자금전달과 지원사항 논의 비밀경찰요사에도 등장함(남호고택 김뇌식의 아들
위의 분들 또한 홍기와 유관인물들이며 서신교류등이 많았던 인물들이며 독립운동과 관련된 일들을 주로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문을 닫는 경우(우거함)
현실참여로 가산을 정리하고 만주로 이거해 학교를 설립하고 교육에 힘쓰는 일
독립운동등에 적극 참여하는 일등으로 나타나
파리장서의 초안을 작성한 부분에 대해서는 사실 나도 아베정진도 모른다 할배 홍자기자가 어디 드려내 놓는 분도 아니니
다만 아무런 근거없이 쓰여지지는 않았을 것이다고 보고 조사중
위에나오는 성주출신 송준필을 보면 곽종석 심산 장영석 권상익등과도 교류한 분이고 또한 파리장서의 핵심 주동인물인데
그의 일기를 번역해서 실기편찬위원회에서 책을 발간한 것에서 그의 일기에서
송준필에 대해서 홍기가 교류한 것은 현재 편지에 대한 답장으로 날로 들어오는 제자들 중에 지결을 받들어 당을 책임질
쓸만한 동량이 있는가하는 것이다
여기서 의문점 몇가지
1)전혀 홍기의 존재를 몰랐을 것으로 보이는데 어떻게 명월루가 초안을 작성한 곳이라한 점 또한 누구보다 파리장서에 대해서 잘알고 있었을 것이란점(아베 정진도 모르는 사실임) 이번기회에 밝혀야할 사실 아닌가?
2)권상익이 명월루에서 작성한 것이란점( 해저 명월루는 심산생가의 큰집격으로 심산을 대표한점 그당시의 사실 동강종가는 상당히 허술하였음)
이중업이 바로 이차장서를 권상익에게 부탁한점(이중업은 홍기의 사돈인 이고 이동흠의 아버지)
3)당시 송준필은 심산과 파리장서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이란점(곽종석 장영석등과도 교류한 인물이란점)
4)당시 파리장서 초안들이 몇군데서 쓰여진점
5)삼일운동직후 해사 김정호가 대안을 묻는 말에 심산은 바로 파리장서를 대안으로 제시한점(이미 준비하고 있었음을 보여준 사례 아닌가함)
6)기려수필집의 저자 송상도가 유언을해가면서 가지 발문을 받아간점(마찬가지로 곽종석 장영석 권상익등과도 교류한 것으로 나타난다
대구 경북 항일독립운동사 광복회 발행 182
곽면우가 안것은 1919년2월19일 곽연과 문하인 김황을 서울로 보내
김창숙 서울도착 2월25일
3월1일직후 해사와의 대화 이미 파리장서를 대안으로 바로 제시한점(이미 어느정도 준비함을 보인듯)
곽연 김황 윤하충 김정호와 김건등과 독립청원서를 보내기로하고
영남의 곽종석과 호남의 간재 전우를 대표로 할것
청원서는 곽종석에게 일임할것
필요한 자금마련을 할것
3월20일 다시 서울서 만나기로하고 곽종석은 장영석에게 청원서 작성부탁
문하의 선비 김황과 권명섭? 김수에게도 청원서를 짓게했다
김황만이 지었다
국권회복단의 조극섭도 단의 통령 윤상태의 부탁으로 독립진정서를 지어 장영석에게 보임
성주의 송준필은 다른사람에게서 듣고 국민에게 깨우침을 주는 글을 지었다
경상도를 담당한 김창숙은 동지를 규합하고 장영석 송준필도 만나 청원서 초안을 준비하였다
대표자 곽종석은 장영석과 김황의 글중 김황의 글을 취하여 야간수정 파리로 보낸 정식장서 확정
***송준필도 청원서를 준비한 것으로 보이는데 권상익이 명월루에서 작성했다고 한다
***파리장서 초안을 곽면우가 초안하지 않았음
***송준필의 일기 원본을 봐야 될 듯
해저바래미 모두가 독립운동의 산실이자거점으로 여겨온 명월루와 홍자 기자
유집과 활동들을 살펴보면서 틀림이 없음을 확인했습니다만
명월루의 파리장서의 진실도 지속적으로 그 근거를 추적하여 밝혀보려고 합니다
만약 아니라면 심산이 얘기하듯이 아닌 것을 취하는 것은 안될 일일 것입니다
물론 위상을 고려하여 장석영과 김황이 초안한 것을 김황의 글을 취하여 일부 수정한 곽면우의 안으로 밀고 곽면우의 파리장서가 최종적으로 정통성을 가진다고 보는데는 의심할바 없습니다만
역사의 사실들이 어떠했는가를 바로 알고 바로 잡는 것 또한 우리들이 해야할일들 아닌가?
독서회사건은 주동자인 김창신의 자제인 두기할배가 쓰시면 될듯합니다
아베 정진의 흔적과 기록에 대해서는 이미 전체가 확보되어 있어서 더이상 필요하지 않으며(여기서는 생락)
위의 독립운동관련 사료와 기록들을 유관 집안에서 먼저 모아주셔야 할듯합니다
(간찰등에서도 많이 나오나 워낙에 분실과 유실된 자료들이 많고 한동안 1936년 이전의 자료들은 환경상 대부분 남기지 못한듯
있는 것들이라도 한테 모아서 국학진흥원등에 보내서 해석 받는 것들이 필요하지 않을까합니다 중요한 서신으로 보이는 것들이
내용을 남기지 않는 것도 많아
또한 관련자료와 함께 마지막 선비정신에 투철했던 선비들의 유품인 간찰등과 각문중에서 보내온 서적들로 유림에 대한 연구와 심산의 사상 바래미 역사연구하는 공간을 만드는 것 또한 의미 있지 않을까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유관 자료와 행적들을 한테 모으는 작업들이 먼저 이루어져야할 것입니다
창수시와 주로 안으로 지어왔던 가사문학도 마찬가지이다
남은 시편들만 모으는 작업만해도 방대하고 휼륭한 문화 콘텐츠가 되리라보며 명월루에서 시한편을 짓고
서로 합창해서 읊어보는 체험 또한 정말 휼륭한 체험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우선 독립운동에 대한 모든 기록과 사료들을 모아야한다
(독립운동가의 시와 간찰등은 우리집에도 많으나 정말소중한 문화콘텐츠 앞으로 시대는 문화의 시대이니 만큼
그냥 심산의 비석을 세우기만해서야 의미가 없다 실체로 체험하고 행적을 살피도록 해서 그당시 생활상과 정신등....을 느끼게 하여야한 비로서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바래미의 독립운동사는 물론 바래미 역사의 한부분이며 우리조상들의 흔적 벼슬과 행적 높은 학식등을 감안하고
독립운동부분까지 감안한다면 사실 이보다 더한 명문들이 어디 있겠습니까만은 우리는 우리 것이 좋은 줄 모른다
*******아래부분은 김홍기의 간찰에서 나타나는 내용으로 집에서도 김원일의 편지봉투등장 이육사집안과도 교류했음을 보여주는 내용임.
카피가 되지 않아
해제
1) 한정(寒亭): 진사 박종무(朴從茂)의 유덕을 추모하여 반남박씨 삼락당 문중에서 영주시 가흥동에 건립한 하한정(夏寒亭)을 가
리킨다. 넓은들과긴강을앞에두어상쾌하고환하므로더운여름에도항상청량하다하여이름지었다고한다.
2) 원일(源一)형의 일: 1930년 연말에 일어난 대구격문사건으로 이육사 형제들이 일제 경찰에 체포된 사건을 가리킨다. 이 일로
삼형제가체포되어셋째이원일은초죽음이되어풀려났다. 아래 103. 이원기(李源祺) 간찰 참조.
아래는 순흥 제일의 갑부이자 ( 내려오던 얘기로는 순흥 청다리 밑에서 주워 왔다는 슬픈 고사외에도
배 골는 분들은 순응...에게로 가라 바로 팔오헌공의 후손이자 택동의 후손으로 순흥가(우림등)와의 서신 또한 발견된다
(해저보다 더 많은 자금을 건너졌다고 전해들음)
택동은 우리의 큰집격인 지평댁으로 만회고택의 큰집이자 만회고택에서 양자를 들어서 혈연으로는 작은 집으로도 통한다
물론 개암 팔오헌 자손이며 택도의 자손이다
이차유림단사건 (일차유림후 일제의 모진탄압등으로 )국내 활동들이 주춤하는 가운데서도
40대8명이 앞장서서 황소50마리 5000원을 김지사께 전달
의진의 임원 봉화의 독립운동사44 안동의 소피록
대장 권세연
부장 곽종석(미취임)
참모 류연박(파리장서에도 참여함)이상기 류선영 권병화
내방장(홍기의 할아버지의 친동생)김진림 김진의 ****홍기의 유집을 보면 일찌기 조실부모하고 진림에게 사사 받은 기록이 나온다
외방장 좌익장 우익장 선봉장 돌격장 유격장 석격장 척후장 초모장도서기 서기 김하림(바래미 독립운동가
사실 우리 모두가 몰랐다 김대락의 동생인 김소락과 동서지간인 김하림은 조직개편 때 중군장등의 위치 확보
당사자였던 명월루도 김홍기의 독립운동과 워낙 실체를 드려내지 않는 성격 대부분 명월루를 독립운동의 산실이다라고 하였으나
구체적으로는 말하지 않았음
예전의 분위기는 내세우지 않았던 미덕도 작용한 것이며 야야 한집에 독립운동가 한분이면 되지 하지말라
만인소가 의병활동의 단초가되는 것은 아래 사실도 참고될것임
***임진왜란을 본다면 일본의 춘추전국시대와 전쟁 그리고 통일 춘추전국시대의 내부적인 충돌이 통일을 맞이하여
내부적인 힘을 분출할 필요성이 있었다 이것이 바로 임진왜란의 빌미를 제공한 것으로 보는 시각도 많음을 볼때
혼맥 또한 독립운동사에 무엇보다 중요함을 보입니다
혼맥과 문맥 바래미의 가계도도 보시면 그런 연결고리가 중요하게 작용했음은 물론입니다
***닭실은 두째처도 하계(향산가와의 연)인동 남산종택(심산의 사돈가) 전주류씨 정제종택(류지호 류연박 류동시가 독립운동이나 2분은 자료미흡(아래참고)류연즙도 교류됨 독립운동이 맺어준 인연인 듯합니다(인연이 맺어준 독립운동과 독립운동이 맺어준 인연)
또한 무실류시 문중은 만인소와 남한조 혼맥(삼산가와 정재가)로 연이 많이 작용하며 정재사상과 영향을 많이 받는 듯
조회 11 추천 0 2013.12.14. 08:21 http://cafe.daum.net/buyingpoint/1vO3/10267
일제에 항거한 독립운동가가 가장 많이 배출된 문중 - 영남 의병의 중심에 정재 류치명의 문인이 주축을 이루었고, 안동 의병의 중심에는 무실 류씨가 있었다. 1895년 안동의소파록(安東義所爬錄)에는 조직과 간부 46명의 이름이 적혀 있는데 그 중 8명(參謀- 柳淵博. 中軍將- 柳 琓. 都書記- 柳廷鎬, 柳必永. 書記- 柳淵楫, 柳晦植. 出令- 柳憲鎬, 柳昌植)이 우리문중에서 나왔다. 파록에 이름이 나오지 않지만 당시 70세 노령으로 안동의진을 조직하고 지원하는 본부지도자로 洗山 柳止鎬(정재의 아들) 西山 金興洛(정재의 문인 - 학봉 종손)의 활동이 이긍연의 일기와 김도현(영양 의병대장)의 기록에 뚜렷이 나타난다. 義兵大將- 權世淵은 定齋 柳致明의 문인이며, 2차 의병대장 金道和 역시 정재 문인이다. 또 다른 기록에는 류연각, 류연익, 류연영, 류벽호,류시연, 등의 활동이 돋보인다. 진성이씨 주촌파 종손 이긍연의 일기에 류연각이 조총 39정을 가지고 왔더란 기록이 있으며, 1896년 4월 17일(음)자에는 박실에 적병이 들이 닥쳐 柳 세 사람을 잡아가서 두 사람은 총살당했다는 기록이 있다. 류연영, 류연각 두 사람의 제삿날이 4월 17일임을 볼 때 이 두분이 확실한 것 같다고 ‘안동 무실마을’이란 책에 김희곤 교수의 기록이 있다. 의병활동에는 많은 자금이 필요했지만 그 자금은 각 문중에 배정하였는데 그 실적은 무실 류씨, 닭실 권씨, 하회 류씨가 각각 1,000냥, 내앞 김씨 800냥, 금계와 해저의 의성김씨, 법흥의 고성 이씨가 각 500냥, 그밖의 문중은 각각 400냥을 부담했다. 안동의병으로 星南 柳時淵 장군은 전국에서 가장 장기간에 걸쳐서 적극적으로 투쟁하여 큰 전과를 올렸음을 지나칠 수 없다. 그는 안동 의진의 소모장과 2차 김도화 대장 을 도와 선봉장을 맡았다. 태봉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고 그 뒷수습을 감당했고, 영양 의진의 김도현 대장, 영덕 의진의 신돌석 대장과 연합작전을 펼치면서 안동 청송 진보 영양 영해 영덕 삼척에서 1911년 만주로 망명한 날까지 활약하였다. 경주 분황사에서 영남의병 지도자의 회의에서 영남의병대장으로 류시연을 추대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성남의 활동은 의병활동 이후에도 만주 독립군 활동을 계속했고 1912년 군자금 모금을 위하여 몰래 귀국했다가 영주 반구 장터에서 체포되어 1914년 1월 29일 교수형으로 순국했다. 그의 의병활동은 병영에서 읽혀지는 ‘육군’이란 월간지에 연재되었고 KBS라디오 국군의 방송 시간에 ‘다큐멘터리 의병대장 류시연’이란 프로그램으로 오래도록 방송되기도 했다. - 협동학교와 사회계몽운동의 중심에는 東山 柳寅植이 있다. 동산의 교육과정 개혁운동은 1904년부터 시작하여 1907년 임하면 천전리에서 협동학교(協東學校)를 개교하고 유교경전 중심에서 탈피하여 수신, 국어, 지지, 역사, 외국지지, 한문, 작문, 미술, 대수, 지리, 체조, 창가, 화학, 생물, 동물, 식물, 박물, 등 17교과를 도입한 경북 북부지역 최초의 고등학교였다. 여기에는 보수 유림의 반발이 많았으나 동산의 개혁의지가 크게 작용했다. ※ 1910년 7월 18일 오후 3시경 안동 영주 예천지역에서 활동하던 무장 의병 18명이 난입하여 김기수 교감 안상덕 교사 이종화 서기를 살해하는 큰 변괴가 있었으나 용기를 꺾지 않고 교육을 지속 하였으나, 그해 8월 22일 국권이 강탈 달하고 류인식, 김대락, 김동삼, 이상룡 등이 주동하여 12월 말에 100여명이 만주로 망명하고, ※ 1913년 임동면 수곡동 한들의 정재 종택으로 옮겨서 재차개교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는 정재 종택 건물을 협동학교 교실로 무상제공이라는 종손 柳淵博의 크나큰 배려와 교장 柳淵甲, 교감 柳東泰의 지극한 정성으로 1915년 제 2회 졸업식을 맞았다, 류인식은 자금 조달을 위하여 일시 귀국하여 고향의 토지를 매각하는 도중 일경에 체포 구금되었다가 석방되었으나 건강이 좋지 않아서 1917년부터 학교 경영을 하면서 안동지방의 계몽운동을 이끌어 간 주역의 위치에 있었다. 1919년 제 4회 졸업생을 배출하고 3 ․ 1 운동의 챗거리 만세운동이 협동학교에서 준비 추진되었음을 빌미로 강제 폐교되었으나, 정재 종택에서 우리 문중이 그 중심에 있었다는데 그 의미는 대단히 크다 할 것이다. - 3․1 운동의 챗거리 만세운동 중심에는 우리 문중이 있다. 임동면 만세운동은 정재 주손인 류동시(柳東蓍)가 광무황제 장례식에 참석했다가 서울의 만세운동을 목격하고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수중에 숨겨서 귀향하여 대책회의를 열고 숙부인 류연성과 협동학교 류동태, 이규호 등과 논의하여 3월 15일 챗거리 공동타작마당에서 류연성, 류교희, 류동수, 박재식, 박진성 등과 洞별 책임자를 정하고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는 협동학교에서 준비되었다. 그 때 참가했던 어른들의 말씀에 의하면 태극기를 만들기 위하여 안동장에 두 사람을 파견하면서 동시에 점포에 들어가지 말고 두 가지 물감을 동시에 구입하지 말고 한 번에 많은 량을 사지 않도록 당부해서 보냈다고 하였다. 3월 21일 오후 2시경에 500여 명이 만세를 부르기 시작했고 일본인 순사 우치다가 시위대를 막아섰으나, 우치다와 권태석 순사보를 제압하고 주재소에 들어가서 경찰의 무기를 모두 빼앗아서 우물에 넣어 못쓰게 만들었으며, 면사무소를 공격하여 각종 서류를 파기하고 건물도 부수었다. 일본인 순사에게 태극기를 들려서 동네마다 찾아다니면서 만세를 불렀다. 시위는 새벽 2시가 넘도록 계속되었으며, 이날 만세를 부른 전체 인원수는 1,000명이 훨씬 넘었을 것이라 전한다. ☀ (천안 독립기년관에도 안동의 3.1운동 부분에 편항 1,000명. 예안 500명이 게시되었음) 다음날 임북면(사월) 시위에도 그 다음날 영양 시위에도 참여한 분이 있었다. 이때에도 정재의 손자 류연성의 활동이 가장 두각을 나타냈다. 柳淵成은 일경에 체포되어 대구 감옥에서 6개월 동안 재판을 받으면서 옥중에서 만세를 여러 차례 불렀다고 한다. 류연성은 징역 7년을 선고받고 7일 만에 순국했으니 그간의 고초가 얼마나 심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류교희와 류동수는 징역 6년을 선고받았다. 이는 독립선언서에 기록된 민족대표 33인에게 3년 이하의 형이 선고된 점과 비교할 때 시위가 얼마나 격렬했는지를 감지할 수 있는 대목이다. - 파리장서에 서명 3․1 운동 직후 유림단에서 파리강화회의에 우리의 독립을 요구하는 장문의 청원서를 보낸 일을 제 1차 유림단 의거라 하는 데 이 장서에 직접 서명한 사람은 137명이며 안동 사람은 5명(한들에 柳淵博, 삼산에 柳必永, 하계에 李晩煃 내앞에 金秉植 금계에 金瀁模) 인데 우리 문중 어른 2인이 들었음은 주목할 부분이다. -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을 지낸 旦洲 柳 林 선생 협동학교를 졸업하고, 챗거리 3․1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고 중국으로 가서 중경의 임시정부 요인으로 활동하다가 국무위원에 취임하여 활동하셨다. 광복 후에 한국독립당 당수로서 자유당 독제정치를 규탄하는데 앞장서서 투쟁했음. 수유리 4․19 묘지에 안장 ※ 독립운동자로 포상된 무실 류가 어른들 은 22인 독립운동자로 포상된 무실 류가 어른들
※ 자료 미비로 포상되지 못한 무실 류가 어른들은 62인 - 의병 19 인 柳德永 柳鳳熙 柳止鎬 柳昌鎬 柳淵楫 柳淵永 柳淵覺 柳淵翊 柳東翊 柳璧鎬 柳 琓 柳孝淵 柳承洛 柳承鎬 柳鎬輯 柳淵燐 柳晦植 柳憲鎬 柳廷鎬 柳翊鎬 - 협동학교 3 인 柳東泰 柳淵甲 柳周熙 - 3․1운동 13 인 ※ 단순가담자를 포함하면 500명이상 柳基萬 柳基福 柳基泰 柳淵泰 柳宗稙 柳東馥 柳淵琦 柳晩秀 柳春欽 柳致得 柳景發 柳璣永 柳東蓍 (중심에는 柳淵成) - 파라장서 1 인 柳萬植 (柳必永, 柳淵博을 도움) - 청년운동, 노동운동 사회 계몽 운동 10 인 柳 淵建 柳淵述, 柳周熙 柳東著 柳震杰 柳敎黙 柳東徹 柳基萬 柳基一 柳淵和(중심에는 柳寅植) - 해외항일 3 인 柳廣鎬 柳基東 柳淵德 - 군자금 모금 2 인 柳淵福 柳淵益 - 참가분야가 불분명한사람 12인 柳東植 柳東範 柳淵龜 柳淵鱗 柳顥集 柳東烈 柳淵一 柳淵模 柳康鎬 柳晩植 柳淵運 柳禹洛 ※ 여러 분야에서 활동하신 분이 많아서 중복된 경우가 있음. 합 계 84인 ※ 3·1운동 단순가담자 500명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