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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으로 찍는 사진
커다란 그릇에 담긴 물인냥, 안동댐 수문을 빠져나온 물은 흐르는지 멈추었는지 고요하기만 하다. 가을 햇살이 수면 위에 내려 앉아 반짝이며 놀고 있었다. 물길을 따라 늘어선 은행나무에는 아직도 노란 잎이 그대로인데 도로를 덮고 있는 은행잎들은 다들 어디서 온 것일까. 뿐만 아니라 상록수가 빽빽한 높지 않은 산 섶에 서 있는 불꽃 같은 단풍나무도 놀랍기만 하다.
며칠 전 텔레비전에서 올해는 고운 단풍이 없을 거라고 해 고운 가을 단풍 보기를 포기하던 차에 눈앞에 펼쳐진 아름다운 가을을 보고 믿을 수 없었다. 횡재가 아니고서야 이리 고운 단풍을 어찌 눈앞에 둘 수 있으며 날씨까지 11월 중순이 되었는데 이리도 따사로울 수가 있을까. 파란 물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니 노란 건 노래서 더 예쁘고, 빨간 건 빨개서 더 예쁘고, 초록은 초록이래서 더 예쁘다.
물들어 있는 단풍보다 물들어 가는 단풍의 오묘한 색상이 가슴을 흔들어 댄다. 온 산천이 물들어 가는데 흰색으로 당당히 서서 부드러운 느낌을 보내 주는 이름 모를 나무가 섞여 있는 모습도 참으로 대단한 광경이었다. 변하지 않는 흰색이 이미 변한 색을 더욱 곱게 보이게 하며 가을 산의 색깔을 풍성하게 만들고 있었다.
가을 정적이 깔린 오솔길에 먼저 와 있던 하얀 승용차 한 대가 조용히 출발을 한다. 보도에 깔려 있던 은행잎이 발딱발딱 일어서며 옆줄을 맞추어 쪼르르 자동차를 따라간다. 날개를 편 노란 병아리들이 어미닭을 따라가듯 앙증맞게 차를 따라가는 모양을 보고 차 안에서만 있을 수 없었다.
“우리, 한 번 걸어 보자.”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이구동성 합창을 한 소리였다. 노란 은행잎을 밟으며 걸으면 잃어버린 소녀 시절을 찾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을 다들 했는지 모른다. 가을 하늘을 이고 고운 은행잎을 밟고 서 보니 이곳은 우리들만을 위한 공간이 되었다. 보이는 곳곳에 머물고 있는 가을과 가을 볕 아래 물들어 가는 산천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품으로 들어 왔다.
구름 없는 파란 가을 하늘 아래 봄날 같은 따스함이 있고 소리 지르면 깨질 것 같은 고요가 곳곳에 깃들어 있었다. 차마 고요한 수면을 흔들지 못하는 미풍은 우리들 앞에도 선물을 주듯이 팔랑팔랑 은행잎 몇 장을 나비처럼 내려 주었다. 아직 마르지 않은 폭신한 은행잎을 밟아 보는 발밑의 감촉이라니…. 정말로 감사하기 짝이 없는 순간이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저만치서 팔을 벌리고 은행잎을 받으러 뱅뱅 돌면서 뛰어가는 친구는 이미 소녀 시절을 되찾은 것처럼 보인다.
“지금 우리가 바바리코트를 입고 있어야 하는데 그지? 이렇게 코트 깃을 턱 세우고….”
은행잎을 밟고 서서 뒤돌아보며 말하는 친구는 적어도 청춘 시절은 찾았나 보다. 붉어지고 조용히 익어 가는 늦가을 공간을 통째로 우리끼리 차지하고서 보는 이가 없다고 소녀 시절, 청춘 시절을 마음 놓고 찾아댄다.
차를 몰아 댐둑으로 올라와 단풍잎을 밟고 만수된 댐과 멈춘 듯 조용히 흐르는 긴 물길을 내려다보는 경치도 장관이었다.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반짝이는 하얀 수면, 숲 속에 숨었으나 우리들에게 들킨 선이 고운 정자들. 물따라 굽이도는 하얀 길, 시키지 않아도 소리 없이 살금살금 기어가는 한 대의 차, 차를 따라 곤두박질치는 은행잎, 그대로 한 폭의 그림이다.
멀리 선착장에 배들이 머리를 맞대어 모여 있고 먼저 올라 온 차에서 젊은이들이 작게 경쾌한 음악을 듣고 있었다. 한 순간 시름을 잊은 나도 젊은 기분을 찾은 것인지 주적대는 춤이 나왔다. 얼어 있듯이 잔잔한 파란 물길을 가로 질러 놓인 두어 개의 정겨운 다리와 우아한 자태의 월영교를 보고 부서지는 햇빛에 시린 눈을 비비다가 문득, 이 쪽에서 저 쪽으로 건너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고즈넉한 정적을 깨는 이가 아무도 없으니 햇볕이 살금살금 기어 내려와 은행잎에 내려 앉아 놀고 있는 것이 보인다. 몸을 뒤척이며 빨갛게 물들어 가는 단풍나무가 아직도 파란 채로 서 있는 옆의 나무에게 따뜻한 가을볕이 결코 오래 머물지 않을 것이라며 재촉하는 소리도 들린다.
한 친구가 방금 떨어진 빨간 단풍잎을 두 손으로 긁어모아 운전석 유리창 앞에 소복이 쌓아 놓고 정적을 깨뜨리며 깔깔 웃는다.
“이거, 오늘 차비다.”
항상 계산이 바르고 반듯한 이 친구는 오늘도 계산을 분명히 하고 싶어 뜻밖의 횡재를 하게 해 준 친구에게 고마운 마음을 표하는 것이다. 말하지 않아도 고마운 마음은 한이 없다. 이곳에 가끔 와 보긴 했지만 늘 댐의 아래쪽에서 머물다 식사나 하고 급히 돌아갔는데 소녀 시절, 청춘 시절을 찾게 해 주니 고맙지 않을 수가 없다. 단풍잎 차비를 흔쾌히 받은 친구는 안내하기가 바빴다. 이 친구는 아마 이곳을 먼저 와 보았나보다. 아니 먼저 와 보고 그 경관이 너무 좋아 우리들을 데리고 온지도 모른다.
“빨리빨리 봐, 어제 밤에 내가 와서 칠해 놨어. 사모님들 보라고. 저기는 공원이 될 거고…. 여기도 봐, 저기도 봐.”
친구의 손끝을 따라 보다가 단풍처럼 가슴이 물들었어도 맞은 편 산에 나 있는 하얀 길이 궁금해 그냥 오기 싫어 기어이 친구를 졸랐다. 월영교를 지나서 오던 길을 돌아보니 멀리서 조금 전에 우리가 머물던 곳도 한 폭의 풍경화가 되어 가을볕 아래서 고즈넉한 자태로 펼쳐져 있다. 아까 멀리서 보던 나무, 하얀 색으로도 위풍당당하던 나무가 우리를 반겼다. 이 나뭇잎은 앞쪽은 녹색이고 뒤쪽은 흰색이어서 우리 눈길을 붙든 것이다. 멀리서 우리에게 뒤쪽의 흰색만 보이게 한 것은 산 섶에서 부는 가을바람의 힘이었다.
손에 닿게 서 있는 낮은 나무가 우리들 앞에서 시시각각 물들어 가고 있다. 노란색 주황색이 한 잎에 다 모여서 빨간색으로 되어 가는 이 진기한 장면을 본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은행나무와 상록수를 한 그루씩 번갈아 심어 놓은 것은 또 누구의 생각인가? 노랑과 초록이 교대로 서서 산기슭을 돌아가는 모습은 아기자기함이 넘쳐 나 조경을 한 사람의 감각에 감탄이 끊이질 않았다.
“하필 오늘 카메라가 없어서 놓친다.”
늘 카메라를 갖고 다니던 친구가 오늘따라 카메라를 가져오지 않아 아름다운 색깔 앞에 설 때마다 안타까워했지만 후회한들 어쩌겠나. 이제 주부의 일상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인데. 카메라가 없을 땐 가슴으로 찍는 거다. 가슴으로 찍는 사진은 야! 야! 할 때마다 한 장씩 찍힌다. 일에 묻혀 사느라고 ‘나’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는데 가을을 보고 이리 마음이 설레니 우리, 아직은 괜찮은 여자들이다 라고 주고받으며 차를 돌렸다.
친구가 아름다운 안동에서 사위를 맞이해 참으로 다행이라면서 돌아오는 차 안에서 꺼내 보는 사진에 알록달록 안동 댐의 가을이 담겼다. 나비처럼 나폴거리며 은행잎을 받으러가는 마음, 바바리 코트 깃을 세우고 싶은 마음, 단풍잎으로 차비를 계산하는 마음, 아직도 우리에게 국화차 한 잔 사 주고 싶어 핸들을 돌리는 친구 마음이 찰칵찰칵 찍혔다. 친구들과 함께 해서 더 고운 색이 된 일요일 한나절의 가을이 ‘한 시간의 행복’이 되어 가슴에 찍혔다.
애처로운 삶, 가마우찌
9월이 되어 달력을 한 장 넘겨 놓고 보는 순간 낯익은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저물어 가는 주홍빛 여름 석양 아래 기기묘묘한 산봉우리가 겹겹이 서 있고 유유히 흐르는 강물 위에 멈춘 듯 떠 있는 좁다란 나무 배. 항아리처럼 생긴 주둥이 좁은 대나무 바구니를 뱃머리에 얹어 놓고 바싹 마른 어부는 바지를 둥둥 걷어 올린 채 가느다란 노를 강물에 담그고 서 있다. 물위의 경관을 그대로 물 속으로 품어 안은 강물은 더 없이 맑고 조용하며 조금 있으면 배의 앞뒤에 달려서 덜렁거리는 남포등에 불이 밝혀질 것만 같다. 달력의 사진은 한 번 다녀 온 뒤로 꼭 다시 한 번 가 보고 싶은 중국 계림의 이강 저녁 풍경이었다.
몇 년 전 중국 계림을 여행하면서 이강에서 배를 타고 두 시간 가량 강을 따라 내려가며 유람을 한 적이 있다. 강의 양쪽으로 늘어선 산들의 형체가 얼마나 신비롭고 형형색색인지 감탄이 그치지 않았다. 우리도 아름다운 자연의 일부가 되었던 경험은 지금 생각해도 행복한 기억이다.
이강에는 여행객을 태운 유람선 외에 이 가마우찌 배들이 멈추어 선 것처럼 한가롭게 물 위에 떠 있는 풍경이 보였다. 배 안에는 말이 없어 보였다. 피곤해 보이는 한 사람의 사공과 말 못하는 가마우찌 대여섯 마리가 동승한 배였으니 말이 오갈 리가 없다. 이 배는 통 대나무 대여섯 개를 이어서 묶은 납작한 배로 뗏목처럼 생겨서 고깃배로는 좀 불안해 보이지만 평소 이강의 물살이 고르고 흐름이 잔잔하기 때문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가마우찌가 순식간에 머리를 물 속에 처박으며 잠수했다가 잠시 후에 올라와서는 사공 앞으로 쪼르르 가곤 하는 것이 보였다.
그날 저녁에는 가마우찌 쇼를 관람하려고 저녁을 일찍 먹고 선착장으로 갔다. 낮에 본 새가 가마우찌라는데 가마우찌도 앵무새처럼 주인을 따라 말소리를 흉내내거나 시키는 일을 잘 하나보다 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그게 아니었다. 어둠이 내린 이강 어귀에서 우리는 허름한 배를 타고 강으로 나갔다. 이미 강에는 수많은 가마우찌 배들이 남폿불을 밝히고 쇼를 하고 있었다. 가마우찌가 물속으로 재빠르게 곤두박질쳐 들어갔다가 입에 물고기를 물고 나왔다. 관광객의 환호와 박수가 터져 나왔다. 어두운 밤, 말 못하는 새가 남폿불이 비치는 물속에서 움직이는 물고기를 순식간에 잡아냈다니 그 민첩성과 정확성이 놀라웠다. 잠시이지만 물속에서 잠수했다 나온다는 것은 가마우찌가 물속에서 헤엄을 친다는 말이고 도망가는 물고기를 좇아갔다는 증거이니 정말로 대단한 솜씨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부리에 물고기를 물고 날렵하게 뱃머리로 돌아온 가마우찌는 “나, 잘 했죠?” 하듯이 사뿐사뿐 주인에게 가서 부리를 내밀고 주인은 가마우찌 부리에 걸린 물고기를 받아 바구니에 넣는 것이다. 물고기를 주인에게 바친 가마우찌는 다시 제자리로 가서 흐르는 물을 뚫어지게 내려다보며 사냥 자세를 취했다.
“저 새는 목이 길고 너무 가늘어서 물고기를 삼키지 못하나 봐요.”
나는 가마우찌가 물고기를 먹지 못하는 희귀새인 줄 알고 가이드에게 물어 보았는데 돌아오는 대답을 듣고 잠시 머리가 멍해졌다.
“어두워서 보이지 않지만 자세히 보면요, 새의 목밑 부분에 올무가 감겨 있어요. 고기를 넘기려 하지만 올무에 걸려 못 넘기죠.”
입에 물려 있는 것이 아니라 반쯤 넘어가고 반쯤은 걸려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물고기를 잡는 대로 주인에게 갖다 바치는 게 아니라 넘길 때마다 고기가 목에 걸려 주인에게 가서 뽑아 달라는 것이 된다. 재주는 가마우찌가 부리고 고기는 사공이 가진다고 해야 하나. 넘기려다 걸려서 뽑아내는 고통은 얼마나 클까. 코끼리나 앵무새도 인간이 시키는 훈련을 받지만 코끼리는 덩치가 커서 재주를 부려도 애잔함이 없고 앵무새는 재롱을 부린 대가로 한없는 귀여움을 받으니 가마우찌와는 경우가 다르다. 물속에서 주인을 위한 사냥을 한다는 것도 불쌍한데 물고기를 삼켜 버릴까 봐 넘어가지 못하게 목에다 실을 감아 목구멍을 좁힌다니 가녀린 새를 상대로 한 인간의 잔인함이 너무 치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번 잘 잡으면 목의 실을 풀어 주고 한 마리 먹게 해 주지요. 그리고 쉬게 합니다. 그러면 다른 새가 또 교대를 하죠.”
새들이 자기들의 성과를 알고 칭찬을 기다리며 다음 차례를 안다니 가히 ‘쇼’라고 이름 지어도 충분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럼 훈련이 잘 돼서 다른 곳으로 날아가지는 않는 거냐고 물었더니 “발목에 실을 묶어 두었죠. 뱃머리에 묶여 있어요”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래서 낮에 본 가마우찌나 지금 보는 가마우찌는 사공 주위만 맴 돌았구나. 인간들의 이기심과 잔혹함은 어디까지인가. 슬며시 부아가 밀려 올라왔다.
우리가 탄 배는 강에 널려 있는 가마우찌 배들 사이를 지나갔다. 여기저기서 박수 소리와 밤을 가르는 환호 소리가 들려왔다. 또 어느 가마우찌가 재주를 부려서 물고기를 낚아챘을 것이고 주인은 새의 긴 목밑 부분까지 내려가 불룩해진 목에서 물고기를 뽑아내겠지.
물고기의 수확만을 생각하면 즐거운 일이지만 가마우찌의 삶을 생각하면 결코 즐거운 광경은 아니었다. 그 순간 노예가 된 날짐승이 측은하여 마음이 착잡했다.
“이곳의 어부는 힘 들이지 않고 고기를 잡아서 시장에 횟감으로 팔아요. 수입이 좋죠. 가마우찌가 단순히 새라기보다 돈을 벌어들이는 가족입니다.”
가이드는 덧붙여서 가마우찌가 힘이 날쌔고 값이 아주 비싸서 좋은 놈은 황소 값보다 높다는 말도 했다.
생계 수단이니 이 행위를 이해해 주어야 할까. 많은 돈을 들여서 기능이 우수한 가마우찌를 사는 것도 그들의 투자이니 어쩔 수 없지만 물속에서 헤엄을 칠 수 있고 날렵하다는 이유로 발이 묶인 채 목에 실을 감고 물고기를 잡아 올리는 가마우찌의 일생이 애처롭기 짝이 없었다.
‘고기를 잡게 하더라도 목에 실을 감아서는 안 되지. 치사하게 발목을 붙들어 매지 말고.’
이건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말 못하는 작은 날짐승을 상대로 할 페어플레이가 아니란 생각이 들어서 혼자 도리질을 하며 선착장을 나오니 매운탕 가게가 즐비하게 늘어서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가마우찌가 낮에 낚아 올린 물고기로 집집마다 매운탕을 끓여 호객을 하고 있었다. 값이 비싼지 우리의 여행 계획에 매운탕 시식은 없었고 가마우찌의 일생이 기구하게 보여 별로 먹고 싶지도 않았다.
여행에서 돌아와 책에서 찾아 본 바로는 가마우찌는 사람들에게 별로 유익하지 않은 물고기를 잡는다는데 그런 물고기로 끓인 매운탕이 맛이 있을까? 새가 잡은 고기여서 신기한 마음으로 재미 삼아 먹어 보는 것은 아닌지 알 길이 없다. 다만 가마우찌 쇼를 보이고 매운탕에까지 관광 상품으로 연결하는 아이디어가 가마우찌를 훈련시키는 일과 버금가는 일이라 생각되었다.
달력 속에는 가마우찌 세 마리가 마치 사람이 간격을 잡아 주고 앉힌 것처럼 고른 간격으로 앉아서 먼 곳을 바라보고 같은 포즈를 취하고 있다. 영리한 이 새는 사진 찍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 같고 그것이 오랜 훈련으로 날기를 체념한 센스라 생각되어 사진을 보고도 애처로운 마음이 일어난다. 9월 달의 달력 속에서 중국 제일의 관광지 계림 이강은 신선이 살고 있음직한 아름다운 풍광과 애처로운 삶의 가마우찌가 공존하고 있다.
겨울 선암사에서
모처럼 남도 여행길에 올라 해안선을 따라 흐르면서 해안 절벽에서 바다를 굽어보는 보리암, 향일암을 거쳐 순천 조계산 선암사로 발길을 돌렸다.
겨울 가뭄이 길었지만 긴 계곡에는 물이 흘러 계곡의 웅장함을 느끼게 했다. 왼편의 계곡과 오른편의 울창했던 산림 사이로 나 있는 완만한 경사길을 부드러운 흙을 밟으며 삼십여 분 올라가니 처마선 날렵한 강선루와 일주문이 보였다. 아담한 범종루와 함께 대웅전이 고즈넉이 겨울 산사를 거느리고 있었다.
산으로 둘러 싸여서 정적에 깃든 선암사 경내에 조심스레 몸을 두고 보니 고색창연한 산사는 발자국을 떼어도, 목소리를 내어도 정적이 깨어질 것만 같아 조심스러웠다. 선암사는 참으로 보기 드물게 소박하면서도 아름답고 귀태가 나는 정갈한 도량이었다.
경내를 싸 안 듯이 흘러내린 조계산 한 자락은 그늘에서 한가로이 여물을 씹는 누렁 소의 배처럼 넉넉하고 부드러운 품을 보이고 있었다. 지금은 속살이 보이는 저 산자락에 연둣빛 새싹들이 올라 온 후 영산홍, 진달래가 앞 다투어 터지는 봄이 오고, 단풍으로 불붙는 가을이 오고, 흐린 하늘을 뚫고 펑펑 눈이 오면 대웅전 앞뜰에 선 중생들은 그 선경을 어떻게 감당할까?
스님들이 선방으로 쓰는 무우전 담장 좌우로 오래된 홍매화, 청매화가 산사의 운치를 한결 높이고 마치 다정한 사람들이 어깨를 겯듯이 추녀가 닿을 듯 세워진 건축물은 잘 손질된 정원수와 어울려 더 없이 정겨운 자태이다.
매화꽃 잔잔히 필 것 같은 오솔길, 금방이라도 고운 아씨가 나올 것 같은 소담스런 통문, 천년 고찰 선암사에서 무엄하게도 나는 사대부가의 정원에 서 있다는 착각에 빠져 버렸다.
그러나 무엇보다 우리들의 마음을 끈 것은 선암사가 명승고적이면서도 나무의 결이 보일만큼 단청이 지워진 채로 있다는 것이다. 화려했던 단청이 지워진 채로도 관광객을 당당히 맞고 서 있는 천년 고찰의 우아한 자태를 보고 있자니 가슴 저 밑에서 진정 ‘그래야 한다’는 반가움이 솟구치며 오랫동안 찾아 헤매던 사찰의 진정한 모습을 찾은 기쁨이 일었다. 아니함만 못한 단청을 입은 사찰에서의 실망을 수 없이 보았기 때문이다.
‘단청이 없어도’가 아니라 ‘단청이 없어서’ 진정 빛나는 선암사와 ‘꾸미지 않아도’가 아니라 ‘꾸미지 않아서’ 진정 빛났던 내 옛 친구는 서로 닮았다고 생각되었다.
며칠 전 저녁,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다. 초등학교 동창생 정숙이를 아느냐, 오늘 저녁 정숙이가 온다는데 초등학교 동창들끼리 모여 저녁이나 같이 하자는 내용이었다. 전화를 끊고 앉은 자리에서 초등학교, 중학교 동창생이던 정숙이를 생각했다.
집이 같은 방향이라 가끔 같이 하교 할 때가 있었는데 그때마다 그녀는 반 쯤 가서 기계 소리 요란한 정미소 앞에 오면 ‘우리 집이야, 잘 가’하며 먼저 들어갔었다. 그녀는 정미소를 운영하는 부잣집 딸이었고 공부도 매우 잘 했다. 소박한 성격으로 특히 문학에 소질이 있었는데 중학교 때 그녀가 탈영병을 소재로 한 단편소설을 눈물로 읽은 후, 얼마 되지 않아 그녀에게 고민이 많다는 소문이 돌았다는 것이 그녀에 대한 기억의 끝이다.
결혼을 하고도 어쩌다 정미소가 있던 그곳을 지나면 문득 무를 먹으며 연명하던 탈영병과 정숙이가 생각났다. 어디서 살까. 무엇을 할까. 그때 그 소문은 아마 문학병을 앓고 있었던 게 아닐까. 대답을 얻지 못하고 정미소가 있던 자리를 지나치게 되면 정숙이도 탈영병도 잊어버리곤 했다.
생사를 모르던 옛 친구를 만나려고 외출 준비를 하는 마음이 설레고 바쁘다. 몇 십 년 만에 동창생을 만나니 그럴듯하게 차려입고 나가야 하는데 늘 편하게만 입어 왔던 처지라 아래 위 색깔이 잘 어울리는 근사한 옷도 없고 받쳐 신을 구두도 마땅치 않았다. 저녁은 전화 한 친구가 사기로 했는데 나는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에게 줄 선물 하나도 준비하지 못한 채 식당으로 갔다.
먼저 와 있던 친구들이 정숙이 이야기를 아는데 까지 주고받고 있었다. 현재 일본에서 문학 강의를 하는 교수라고 했다. 결국 문학으로 성공한 인생이니 지성과 품격은 기본일 테고 단단한 기반과 재력까지 갖추었을 것이니 화려하고 당당한 그녀의 출현이겠거니 하고 고대했다.
그런데 모두 어느 방에 있느냐고 중얼거리며 들어오는 그녀를 보고 나는 놀랐다. 우리는 시장에 갈 때도 그렇게는 안 입는데 명색이 일본 대학 교수라는 사람이 십 년은 더 되어 보이는 옷을 입고 나타난 것이다. 구색 맞는 옷을 찾으려고 쩔쩔매던 나를 나무라듯 색이 바랜 모자를 푹 눌러쓰고 낡은 스웨터 위에 누비 점퍼를 겹쳐 입고 전혀 화장기 없는 얼굴로 나타난 것이다. 그녀는 오천 원짜리 저녁밥을 감사하게 먹었고 하나하나 친구 이름을 확인하며 목젖이 보이게 웃어제꼈고 우리들이 자랄 때 쓰던 사투리에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그녀의 얼굴은 오늘만 화장을 하지 않은 게 아니라 ‘오늘도’ 화장하지 않은 것이며 모자 밑에 눌려 있던 짧은 머리도 퍼머를 한 적이 없는 검소하고 꾸밈이 없는 일상의 모습이었다.
그녀는 핸드백에서 자기가 번역한 책과 젓가락 받침 여섯 세트를 선물로 내 놓았다. 하나씩 나누어 가지며 많은 생각을 했다.
비행기 삯 외에는 한화를 단 십 원도 가져가지 않았고 접시 닦기부터 시작하여 숙식을 해결하고 언어를 배우고 문학을 전공하여 문학박사로 대학의 강단에 서기까지의 성공담을 찡한 마음으로 들었다. 우리들이 궁금해 했던 그녀의 고민은 문학병이 아니라 사실은 기울어진 가세였노라고 하는 솔직함이 신선한 충격이 되어 색을 벗은 채 서 있는 선암사 앞에서 되살아나는 것이다. 역경 위에 당당한 현재를 세운 정말 아름다운 인생을 만들어 가는 한 여자를 본 것이다.
화려하지 않는 옛 친구가 내면적으로 결코 초라하지 않았듯이 단청 벗어진 선암사를 결코 쇄락해 가는 사찰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단청 벗어진 선암사는 꾸미지 않아도 풍기는 단아하고 근엄한 자태가 있으며, 도량 도처에 천년 세월의 겹을 천년의 향기로 뿜어내고 있었다. 그래서 불심이 뭔지도 모르는 나 같은 중생이 한 순간, 숨기고 꾸미느라 피곤한 인생을 자초하다가 모처럼 가식의 옷을 벗을 수 있는 공간이라 확인하고 마음을 열고 무거운 가면을 벗어 던지며 나도 모르게 두 손을 모아 합장을 했는지도 모른다.
일행이 있어 곧 돌아서야 했지만 여유만 있다면 꼭 다시 찾아 와 보고 싶은 고찰, 선암사. 단청 벗어져 천년의 세월이 그대로 보이는 고색창연한 선암사는 그때도 그 간의 세월을 더 얹어서 고고히 있어 주길 바라는 마음이다.
홍콩 스케치
‘별들이 소곤대는 홍콩의 밤거리’를 상상하며 홍콩을 찾았다. 홍콩하늘에 별은 없었고 대신 밤거리에는 별같은 이야기가 많았다.
빅토리아 산정에서 홍콩의 야경을 보던 순간은 잊을 수가 없다. 건물의 1층부터 꼭대기까지 끊임없이 빛이 그라데이션 효과를 내며 흐르는 기이한 광경이 펼쳐졌다. 산정관광을 끝내고 산을 내려 올 때는 팩트림을 탔는데 45도 각도로 뒤로 몸이 젖혀져 뒤로 넘어질 것 같은 기분이 들고 창 밖으로 보이는 높은 건물들이 45도로 기운 채로 서 있어 불안감을 더 했다. 가까스로 멈추어 안도의 숨을 내 쉬려는데 비스듬히 서 있던 아파트가 우리를 향해 금방 쏟아지려는 게 아닌가. 순간 관광객들이 저도 모르게 “으악!” 소리를 지르며 몸을 피하다가 정신을 차려 보니 넘어지던 아파트가 멀쩡하게 서 있는 것이다. 죽을까 봐 겁냈던 우리가 우스워 마주보고 커다랗게 웃었다. 경사가 가파른 산의 착시 효과였다. 이 빅토리아 산은 과거 영국인들이 바다를 감시할 때 이용했다는데 경사진 이 길을 다닐 때는 현지인을 고용해 가마를 타고 다녔다니 지배자의 거드름과 가마꾼의 고생이 겹쳐져 보였다.
배를 타고 강 같은 바다 위에서 물과 빛이 어우러지는 야경을 보는 재미도 뺄 수가 없다. 오밀조밀 서 있는 높은 건물들이 끊임없이 새해 인사, 크리스마스 인사, 환영 인사로 깜빡거려 화려함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아파트나 건물에 조명 장치를 하여, 그것을 관광 상품으로 만들어 낸, 외화를 향한 그들의 노력이 필사적으로 보였다. 빌딩들이 만들어 내는 휘황찬란한 빛의 쇼는 환상 그 자체였고 늦은 밤 이층 무개차를 타고 빌딩 숲을 요리조리 빠져나가면서 건물들의 인사를 받자니 큰 접대를 받는 귀빈이 된 착각에 빠졌다, 홍콩에 온 보람을 반은 건진다는 백만 불짜리 아름다운 야경이었다.
야경은 환상적이었지만 주민들의 생활은 좀 달랐다.
“여기서는 결혼했다고 여자보고 밥하라고 하면 큰일 나요.” 가이드가 하는 말을 듣고 부러워했지만 실상은 여자들을 예우해서가 아니라 서민들의 집이 좁아서 집안에 안방이나 주방을 꾸밀 수 없으니 밥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8층 높이 여덟 평 아파트에 엘리베이터가 없다니 누가 무거운 장보따리를 들고 오르내리며 밥을 할 수 있을까. 더구나 대부분이 맞벌이라는데….
서민들의 소박함은 이루 말 할 수가 없었다. 식당에서 딸의 생후 한 달을 기념하는 파티에 온 가족들이 집에서 입는 차림으로 머리를 감지도, 빗지도 않은 모양새로 초대한 손님을 기다리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머리를 자주 감으면 복이 나간다고 믿기 때문이라는데 예부터 그곳이 물이 부족한데서 오는 문화일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상류층의 이야기는 꿈만 같다. 어느 갑부는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산꼭대기에 시가 9백 억짜리 4층 저택에 부인 네 명을 층별로 두고 산다고도 했다. 이렇게 빈부의 차이가 극심하고 부자들의 재력과 씀씀이가 시민 저항을 받지 않는다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들은 이야기로는 재벌의 총수들은 한 번씩 유괴되는 것을 각오하고, 유괴되면 몸값을 흥정하여 서로들 적정선에서 주고받고 하여 신체 손상이 전혀 없이 풀려 난다고 하는데 그것을 누구도 범죄로 생각하지 않고 돈 있는 사람이 돈 좀 쓰게 하는 풍속으로 받아들인다니 멋으로 보이기도 했다.
황대선 도교사원에는 소원성취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로 들끓었다. 그들의 소원은 로또 당첨, 도박, 경매에서 일확천금을 얻는 일이라고 한다. 사원 뜰에다 신문지를 펴고 준비한 음식을 차려놓고 꿇어앉아서 긴 향을 한 움큼 쥐고 수없이 절을 하다가 향로에 꽂았다. 향냄새가 많이 날수록 소원 성취가 된다고 믿으며, 일확천금을 바라면서 기도를 하는 모습은 간절하였고 정성스러웠다. 이들이 사원의 뜰에서 장시간 기도를 드릴 수 있는 것은 영상 5-7도의 따뜻한 겨울 날씨 때문이다. 약간 쌀쌀했는데 어깨를 움츠리면서 가이드가 무슨 큰 뉴스인양 전해 주었다.
“요즘은 정말 상당히 춥네요. 어제는 영상 8도여서 동사자가 두 명 있었습니다. 저번에는 영하 2도에 동사자가 사십 명이 있었고요.” 우리는 영상 8도에서 사람이 얼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소리내어 웃어버렸다.
책락콕 공항은 하루 4천 5백만 이용객에 게이트가 80개에 달하는 세계 최대의 공항으로 세계 비즈니스 경쟁 1위의 도시지만 풍수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효를 근본으로 하며 일류 학교를 선호하고 건강을 위한 음식 투자, 혐오 식품을 즐긴다는 것 등이 우리와 많이 닮아 있었다.
“그럼 개고기도 먹나요?” 하고 일행 중 한 사람이 물었다.
“잘 먹지요. 그런데 여기 사람들은 소문 없이 먹어요. 여기는요. 어린 개를 죽여 눌린 것을 제일 좋아해요. 광동 지방은 온갖 요리가 다 있어서 세계의 내로라하는 미식가들이 많이 찾아오고 날아다니는 것은 비행기, 땅에 것은 자동차, 물에 것은 잠수함만 빼고는 다 먹어요. 아, 참. 빨래도 빼고요.”
이름도 아름다운 홍콩은 자동차로 두 시간만 돌면 갈 곳이 없다고 했다. 좁다는 말이다. 그러니 산을 개발할 수밖에 없다. 저녁 식사를 하러 가는 길이 산에 설치된 야외 에스컬레이터를 두 차례나 연거푸 타고 걷고, 또 연거푸 두 번 탔으니 산등성이 이동을 야외 에스컬레이터로 했다는 말이 된다. 그들은 산을 우리네 평지처럼 활용하고 있었다. 이곳 사람들은 산에다 집을 짓는 일을 매우 잘 한다. 산등성이에 쭉쭉 뻗은 고층 아파트를 빽빽하게 짓고 저택을 지어 겨우 편도 1차선 도로만 내어 산모퉁이를 굽이굽이 돌아가는 길을 이용하고 있었다. 과거 영국의 지배를 받았을 때 영국인들이 해적을 감시하기 위하여 높은 산등성이에 집을 지어 거주한 이래 중국에 반환되면서 영국인들이 거주하던 집을 현지의 재력가들이 차례로 인수하면서 살게 되었고, 산으로 높이 올라 갈수록 집값이 비싸며 유명 인사들이나 스타들이 즐겨 산다고 하니 지구촌 사람들의 가치관도 각양각색이다.
산에서 내려다 본 시가지는 놀라울 뿐이었다. 건물은 대게 50층 이상 78층 정도의 주상 복합 아파트이고 대부분 건축의 꼭대기는 구름 위에 있으며 이들 건축물 사이의 거리는 편도 1차선 차도와 약간의 인도뿐이었다. 일조권도 조망권도 포기하며 형편에 맞게 살아가는 그들이 참으로 대단하게 느껴졌다,
아파트 하나하나의 모양은 마치 세워놓은 옥수수자루처럼 생겼고 중심 시가지의 모양은 쟁반에 긴 옥수수를 가득 세워 놓은 것 같다. 가이드는 우리나라가 홍콩의 이러한 주상 복합 아파트를 도입해 가서 서울에 보급했고 청마 대교를 본떠서 우리의 영종 대교를 건설했다고 했다.
중심가는 더욱 심했다. 건물들이 이마를 맞대고, 등을 맞대고, 어깨를 겨눈 듯 서 있는데 틈만 있으면 1미터의 공간도 두지 않고 더 높은 건물을 짓는 것이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 좁은 길에서도 자동차의 경적 소리나 교통 체증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며 음주운전이나 자동차 사고가 없다는 것이다. 경찰력 최고, 치안 최고, 교통법규 지키기 최고라서 그렇다지만 기사들이 아주 어렵게 면허증을 따서 모두 베스트 드라이버라서 그렇다고 했다.
어디선가 항상 건물이 탄생 중인 도시, 밀림처럼 고층이 많은 도시, 밤풍경이 기가 막히게 화려한 이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당연히 사치스럽고 빠릿빠릿할 것 같지만 너무도 수수하고 꾸밈이 없고 진득하여서 또 놀랐다. 달리는 버스 안에서 한 줄로 앉아 있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웃지도 않고 화나지도 않은 무표정의 얼굴로 앉아 있었다. 왜소한 체격의 그들을 보니 아름다운 도시의 시민으로 살고는 있지만 비싼 물가로 살기가 고달파 보인다. 이 도시에서 30여 평의 아파트가 십칠억 원 된다니 집 장만이 현실로 되는 서민이 얼마나 될까. 나 혼자의 생각이었다. 죽어서도 그들은 누울 땅이 없어서 비스듬히 선 채로 매장한다고 했다. 그래서 강시는 콩콩 뛴다나. 발이 저려서. 웃자고 한 이야기겠지.
도심을 지나다가 가이드가 학교를 가리켰다. 운동장은 농구 코드 장을 그린 것이 전부였다. 우리의 8학군과 비교되는 이곳은 70년의 전통을 가진 천주교 학교로서 입학하려면 1년 전에 입학원서를 내야하고 서류 심사로 부모가 이 학교 출신인가. 부모가 이 학교에 재직하고 있는가, 부모의 종교가 천주교인가를 보고 인터뷰 과정을 거친다고 했다. 유치원생도 국, 영, 수, 상식, 성경, 쓰기, 듣기, 음악, 체육을 A, B, C로 평가하여 이것을 초등학교 입학원서에 기록하고, 6시에 기상하여 7시에 학교 가다가 시장에서 아침을 사 먹고 학교에 가서 5시에 귀가한다고 했다. 유급 제도가 있어 국어, 수학, 영어가 평균점 이하이면 진급을 못한다니 우리나라 아이들보다 더 괴로운 유아기와 아동기 시절을 보내고 있는 듯하다.
명문 시립 학교의 입학 인터뷰 내용은 부모의 직업, 가정부, 차 종류, 태어난 병원을 묻는다니 부자만 뽑겠다는 말이어서 우리의 상식으로 이해가 안 되는 것이 허용되는 분위기가 놀라웠다.
홍콩은 쇼핑의 천국이라 했다. 야시장 쇼핑과 면세점 쇼핑, 짝퉁 쇼핑으로 나누어지는데 면세점의 명품관에서는 관세가 없어 약간 싼 편이라고 했지만 내 경제력으로는 윈도우 쇼핑만 할 수밖에 없었다. 엄청난 크기의 매장과 물량이었다. 이곳이 다이아몬드, 천연 진주, 밍크와 황금의 집산지이고, 보석세팅 기술 세계 최고라는 가이드의 말이 맞다면, 그리고 저 많은 물건들이 도매로 다른 국가에 팔려 나간다는 말이 맞다면 홍콩은 국제도시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사람 부대끼는 재미는 야시장에 있었다. 사람 빼고는 모두 가짜라는 야시장은 정말 재미있었다. 가짜를 가짜라 하고 싸게 파는데 얼마나 재미있는 공간인가? 옷, 그릇, 다기, 시계, 핀, 가발 장난감을 비롯해 없는 게 없다. 나는 발이 아프도록 시장을 오르내리며 구경을 했다. 명품과 거의 같게 만든 시계가 2달러이니 속은들 어떤가. 나도 시계 하나를 2달러 주고 현지 시각에 맞추어 샀다. 참으로 이상하다. 도대체 재료비와 인건비가 어떻게 되기에 2달러에 팔고도 남는 것이 있는가. 더구나 이곳은 자녀말고는 모든 물건이 수입품이라는데.
1997년 7월 1일 영국으로부터 중국으로 반환된 홍콩은 무역항으로의 위치가 좋아 세계 제일의 무역항이지만 명소는 없는 것 같았다. 그래서 인공적으로 꾸미고 만들고 심지어 살고 있는 집까지 겉을 전구로 꾸며서 야경을 연출하여 달러에 연결하는 그들의 노력이 존경스러웠다.
좁아터질 것 같은 땅이지만 함께 사려고 지혜를 짜 내는 도시, 100년간 영국이 지배하며 뿌리내린 서양 제도를 이용하여 동서양을 모두 보듬으며 필요한 것을 골라 이용하는 여유를 가진 도시, 동양에 있으면서 동양이 아닌, 그러나 서양은 더욱 아닌 도시로 느껴졌다. 빈부의 격차를 인정하면서 홍콩과 구룡 반도 사이에 펼쳐진 물결 잔잔한 호수 같은 바다를 닮아 평온하고 순진한 시민들이 사는 곳. 그래서 복잡하지만 따뜻하여 이웃 같은 외국. 이것이 2박 3일간 내가 본 홍콩이었다.
윤회를 믿는 사람들
-톤레샵 호수를 보고-
캄보디아는 우리나라 남한의 1.8배 크기이며 톤레샵 호수는 캄보디아 국토의 15퍼센트를 차지한다니 상상만으로 톤레샵 호수의 거대함을 짐작할 수는 없을 것이다. 직접 가보고 와서도 상상이 안 되긴 마찬가지다. 일부분만 보았기 때문이다. 기록에 의하면 우기 때는 그 면적이 경상북도에 가깝고 건기에는 경상남도에 가까워진다고 하는데 어느 쪽이든 비행기를 타지 않고는 호수의 면적을 실감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방금 지뢰 박물관을 다녀온 후라 착잡한 기분이 그대로여서 푸른 호수를 보면 마음이 씻길 거라고 생각했는데 호수로 이르는 강을 따라가면서 내 생각이 전혀 맞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톤레샵 호수는 메콩강이 황톳물을 운반하며 흘러들어서 강물이 밑을 알아볼 수 없는 붉은 흙탕물이었기 때문이다. 이곳은 붉은 진흙이 특별히 많은 곳이다. 불가사의한 앙코르 왓을 위시한 여러 사원들의 환조 조각이 부드러운 이암이었던 것도 이 나라에 많은 진흙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앙코르 왓이 세계 7대 불가사의라 했지만 내 눈에는 톤레샵의 진입로를 따라 늘어선 그들의 초라한 가옥과 붉은 톤레샵 호수 위의 수상 가옥에서도 인간이 삶을 지탱해 간다는 게 더 불가사의해 보였다.
세계에서 최빈국에 속하는 캄보디아에서도 최하위의 생활을 하는 그들의 집은 마른 야자수 잎으로 벽과 지붕을 만들어 비를 피하는 정도이며 바닥의 면적이 채 두 평도 되지 않을 듯했다. 이런 집은 만들기도 쉽고 이동도 쉬워 명절에 집을 비우면 통째로 없어지는 ‘집 도둑’을 맞는다니 아연함이 멈추어지지 않는다. 슬쩍 훔쳐 본 집 내부에는 실로 짠 그네와 잡동사니 같은 것만 몇 점 보일 뿐이었다. 붉은 강물이 흐르고 누런 먼지 바람이 불며 자주 씻지 않은 그들은 그 붉은 먼지를 마시고 뒤집어쓰며 숙명처럼 살아가고 있었다.
비린내와 찌든 냄새가 범벅이 된 포구에는 방금 잡아 온 고기를 사고 파느라 부산스러운데 우리는 통통배에 올라 타 톤레샵 붉은 물결 위로 흘러들어 갔다. 좌우로 이어지는 열대림은 위로 쭉쭉 무성하게 자라고 키 큰 나무 저만치 높은 곳에 헝겊이나 검불이 걸려 있는 것으로 보아 우기에는 저 높은 데까지 물이 찬다는 말이니 지금의 수면과 어림짐작으로 비교하면 우기와 건기의 강 수위가 3미터 이상의 차이가 생길 것 같다.
강가를 따라 고단한 인생을 살아가는 그들의 가옥이 꾸밈없이 서서 눈길을 잡았다. 보트 위에 얹혀진 집, 뗏목 위에 세워진 집, 타이어 위에 앉아 있는 집, 드럼통을 네 개 이어 붙여 놓고 그 위에 올라 앉은 집 등 수상 가옥은 모양새도 다양했다. 이들 집은 두 가지 공통점이 있었는데 하나는 모두들 수위를 봐 가면서 옮길 수 있고 긴 끈으로 옆에 선 나무에 단단히 묶어 놓아 떠내려가는 것을 막고 있었으며, 하나는 초라하기 짝이 없는 이들 집집마다 높은 선반 위에 불상이 모셔져 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부처님은 그들에게 최하의 생활만을 허락한 것일까. 최하의 생활을 해도 그들에게 부처님은 중요한 것일까. 혼자 주고받고 해 보았다.
한 꼬마가 집 베란다에 앉아서 양재기로 강물을 떠 올리고 있었다. 식수로 쓰기 위함이란다. 원 룸 같은 수상 가옥은 그 자리에서 낚시도 하고 빨래도 하고 오물도 버리고 화장실 볼일도 보는데 그 더러운 강물이 몇 시간 앉혀져서 식수가 된다니 보는 사람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물 반, 고기 반이어서 노를 저을 수 없었다는 전설을 가진 톤레샵은 아직도 민물고기가 800여 종이나 살고 있어 자국 내에서 소비하는 반 이상의 물고기를 잡아낸다니 가난한 그들에게 이 호수는 생명을 주고 먹을 것을 주는 생활의 터전이며, 수상민들은 이 호수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늙어가고 있는 것이다.
춥지 않은 날씨로 많은 옷은 필요도 없겠지만 갈아입을 옷을 따로 갖지 못한 살림살이는 지극히 단출한데 신기한 것은 집집마다 반짝거리는 냄비가 열 개이상 걸려 있다는 것이다. 반짝반짝 윤이 나서 도무지 그네들과 어울리지 않았다. 이들은 며느리를 맞아들이면 방안에다 커튼을 쳐서 원 룸을 투 룸으로 만든다는데 거기서 살아가자니 고부간의 갈등이 오죽하겠는가. 시어머니의 눈을 피해 며느리는 잠만 깨면 방을 나와서 애꿎은 냄비만 닦아 저토록 반짝인다니 이곳에서도 시집살이는 쉽지가 않은 모양이다.
우리들이 탄 배가 지나자 그 물살에 초라한 수상 가옥이 건들건들, 흔들흔들, 가만히 있는 집이 없다. 작은 집이 심하게 흔들려 그물 그네에서 자고 있던 아기가 깰까 봐 마음을 졸였는데 아기는 그대로 정신없이 잠에 빠져 있다. 오히려 흔들려야 더 잘 자고 저렇게 살아와 육지에서는 육지 멀미를 한다니 그들이 안쓰럽기도 했다.
갑자기 시끄러운 아이들 소리가 났다. 아이들이 양철 양동이 속에 타서 뱃놀이를 하기도 하고 물장난을 치면서 깔깔거리며 놀고 있었다. 다른 집과 비교해 지붕이 높고 견고해 보이며 하얀 페인트를 칠한 벽도 멋있어 보여 건물을 살펴보니 “everyone plays. everyone learns."라고 씌어진 간판이 보였다. 수상 학교였다. 운동장이 없어도 아이들은 강물을 운동장 삼아 뛰놀다가 우리들 배를 쳐다보고 놀기를 잠시 멈춘다. 그들의 눈에 우리는 부자 나라 국민으로 보였을까. 우리들의 가슴에 남은 기억 한 자락이 생각났다. 미국 사람을 보면 쵸콜렛을 달라고 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 그래서 우리는 그들에게 연민은 가질지언정 무시하거나 경멸할 수는 없었다. 물 위에는 학교 뿐 아니라 배에 얹혀 흔들리는 사찰도 있었고 몇 개 안 되는 생필품을 내 놓은 가게도 있었고 선박 수리 장도 있었고 서너 개의 화분을 내놓고 파는 집도 있었다.
가면서 좌회전을 했던가. 우리가 지금껏 지나 온 호수는 말하자면 주택가를 지나온 모양이었다. 갑자기 수중 열대 밀림을 벗어나 눈앞이 탁 튀는 넓은 곳으로 나오면서 우리는 깜짝 놀랐다. 분명히 호수이건만 파도가 밀려오고 저 멀리 완만한 곡선의 수평선이 보였다. 너무도 거대해 호수의 끝을 가늠할 수 없었다. 강에는 바다처럼 수많은 유람선들이 여유로이 유람을 하고 있었다. 붉은 강물이 만드는 수평선! 이 나라는 불가사의한 장면이 너무도 많다.
우리가 탄 배는 수평선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라며 물위에 잠시 멈추었다. 배가 쉬는 동안 언제 왔는지 두 사람이 겨우 타는 작은 배들이 떼를 지어 몰려와 배를 둘러싸고 과일을 들어 보이며 팔아 달라고 애원을 했다.
고물로 팔기 위해 지뢰를 캐다가 팔이 떨어져 나간 어린아이들이 팔 없는 빈 어깨를 내밀며 천원을 위해 몸부림친다. 때에 절은 옷을 걸치고 땟국물이 흐르는 바싹 마른 검은 얼굴로 필사적으로 천원을 벌기 위해 뱃전을 두드렸다.
“천원! 아줌마, 예뻐요. 천원!”
내가 예쁘다는 말에 기분이 좋아 한 장 쓰려는데 가이드가 말렸다. 한 장의 천원은 아깝지 않지만 그것이 몇 장의 천원으로 늘어날지 모르니 조심하라했다. 그들은 지식인과 부농이 박해받던 폴폿 정권 시절의 악몽 때문에 공부를 멀리하고 부를 바라지 않으며 인간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여유만을 위해 산다고 했다. 천 원 한 장 쓰지 않고 뱃머리를 돌리는 인색한 우리에게도 까맣고 반짝이는 두 눈으로 잘 가라고 손을 흔들어 준다. 천원을 써 주지 못해 염치없고 미안해서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유람선이 도는 코스의 반환점에 수상 가게가 있었다. 특산물과 수공예품을 진열하고 손님을 맞았는데 이 호수에서 잡은 것이라며 새우 요리가 나왔다. 먹으려고 들여다보니 수상족들이 물을 이용하는 상황을 본 지라 먹고 싶지 않았지만 꾹 참고 넘겨보았다. 새우의 맛은 고소했다.
돌아오는 길은 도대체 인간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그 수준의 밑바닥은 어디까지일까 하는 생각으로 마음이 복잡했다. 그들은 이제 더 내려 갈 곳이 없고 오를 일만 남았다고는 하지만 고여 있는 호수의 물처럼 그들의 고통이 빠져나가지 못하고 맴돌기만 하는 건 아닐까 하고 걱정이 되기도 했다.
그런데 천원 한 장 받지 못해도 그들의 얼굴은 어떻게 그렇게 맑을 수가 있으며 두 눈은 반짝일 수 있을까? 물건을 팔아주지 못해 미안한 마음에 주머니에서 껌을 찾아 선심 쓰듯 내밀었다. 껌 한 통을 받기 위해 서너 대의 고무대야 배가 몰려 들었다. 단 한 사람만이 쏜살같이 쟁취했는데 쟁취한 아이나 쟁취하지 못한 아이나 모두 만면에 함박 웃음을 짓는 그들의 순진함은 어디서 나온 것일까? 내 의문을 알아차린 듯 가이드가 말했다. 그들은 세계 빈국 4위로 살면서도 느끼는 행복 지수는 세계 5위라는 말을. 그래서 그들의 눈과 뺨에는 맑은 웃음이 그치지 않았나 보다. 행복이란 마음에 있는 것, 가진 것과는 별개라지 않는가.
그들이 흔들리는 물 위에 지은 초라한 집에서도 정성껏 모시는 불상은 그들에게 윤회를 가르친다고 했다. 윤회는 고통스런 현재가 내세에서는 바뀐다는 희망을 주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윤회를 믿으며 산다. 그들이 믿는 윤회는 그들에게 아픈 근대사를 잊게 하고 고통스런 현재를 이겨내게 하며 다음 생에 대한 행복을 꿈꾸게 하는 원동력이 되고 있었다. 정말, 내세에는 그들의 삶이 지금 꿈꾸는 삶으로 실현될까? 윤회를 믿고 오늘을 이겨내는 그들에게 반드시 그런 삶이 오기를 바란다.
작지만 큰 나라, 대만
해외여행을 하자는 의견이 있을 때마다 대만을 추천했지만 이왕 가는 김에 멀리 가자는 게 대세여서 번번이 묵살 당했다. 그래서 가까스로 가게 된 이번의 대만 여행은 정말 기대가 많았다. 구름 위에는 또 다른 세상이 있었고 눈부신 햇빛은 기내에서 흘러나오는 애절한 곡조의 중국 음악과 어울려 마음이 설랬다.
중정 국제공항에서 만난 가이드는 대만을 고구마 모양의 땅이라고 했다. 작은 땅에 2천 3백만 인구로 인구밀도가 매우 높으며 40여 개의 높은 산이 있고 제일 높은 옥산은 3,952미터로 한라산의 두 배 높이가 된다니 기울어진 국토의 표면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동쪽이 고산지대이고 서쪽이 평야 지대로 고구마 모양이 맞는 말이다. 그러나 내 눈에는 대만 영토 모양이 한 장의 나뭇잎 같게 보였다. 거대한 중국 옆을 지나가는 한 장의 나뭇잎. 그래서 약하고 외로워 보이는 작은 섬, 대만.
대만은 96년의 역사만을 가진 나라로서 1911년 중화민국으로 시작하여 1940년 대만으로 이동한 후 지금에 이르렀으니 오직 근대사만 있는 나라이다. 중국과의 분쟁으로 국제사회에서 통하는 국가명이 없는 불행한 나라가 되었으며 아테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선수가 자국의 국기를 쓰지 못하고 지방기를 올리고 울었다는 이야기에 우리의 과거가 생각나서 눈시울이 뜨거웠다.
대만은 본토 수복의 과제를 가진 것이나, 작은 나라라는 점, 국민소득 14,000불 정도, 효를 중시하고 교육열이 높으며 장례 문화가 복잡하다는 등이 우리와 많이 닮아 정이 가는 나라이다. 시차도 1시간 뿐이다.
대만은 또 북경어를 사용하며 2명당 1대의 오토바이 이용 인구로도 유명하다. 날씨가 덥기 때문에 15분 이상의 거리는 무조건 오토바이를 사용한다. 덕분에 교통 체증은 없었다. 수도 대북의 거리를 보고 있자면 도무지 미관을 생각하지 않고 외국 관광객을 의식하지 않은 듯하다. 모든 건물은 쓸 수 있는 데까지 쓴다며 일제가 남겨 놓은 건물을 아직도 국가 관공서로 사용하고 있어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우중충한 건물과 새 건물이 함께 어울려 있으며 도심 복판에 폐가 같은 아파트에 빨래가 나부끼고 있기도 했다.
“저 귀신같은 집은 40년이 넘었고요. 그런데도 잘 살고 있고요. 대만은요. 태풍이 잦고 연간 강수량이 3,000미리로 벽을 칠해도 금방 벗겨져서 보통 건물은 아예 칠도 안 해요. 그리고 경제만 신경 쓰고 관광에는 신경 안 쓰지요.” 우중충한 도시를 마음에 안 들어 하는 우리의 말을 듣고 가이드가 하는 말이었다. 하기야. 중국 사람들의 실속 챙기는 이야기는 잘 알고 있는 터였다.
대만 관광은 고궁박물관, 충렬사 교대식, 공자 사당, 중정 기념관 관람,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고궁박물관은 중국 5천 년의 역사를 볼 수 있는 박물관으로서 그 규모는 작으나 소장물의 수로는 세계 4대 박물관 중의 하나라고 했는데 소장한 유물이 모두 ‘자기네 것’이라는 것과 궁중에서 중국 황족들이 쓰던 것이라는데 매력이 있는 것이다.
1933년 일본군의 침략으로 보물의 도난과 국외 유출을 우려한 국민당은 이 보물들을 약 2만 상자에 나누어 담고 남경을 통해 상해로 옮겼다가 전쟁이 계속되자 전국에 분산 보관했다고 한다. 그 후 1945년 2차 세계대전의 종료와 함께 다시 베이징으로 모았지만 1949년 국민당이 중국 공산당에 패하고 대만으로 퇴각하는 길에 보물을 모두 옮겨와 1965년 임시로 국립 고궁박물관을 세우고 보관해 오늘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 많은 보물을 남쪽으로 운반하여 대만까지 오는데 드는 인적 희생과 고생은 얼마나 컸을까. 옮겨온 보물의 숫자는 70만여 점이라 했다. 너무나 방대한 물량이라 한꺼번에 전시 할 수가 없어서 중부 고산지대 중턱 지하에 보관해 두고 일 년에 만 점씩 바꾸어 가면서 공개한다고 하니 70만 점을 모두 관람하려면 70년이 걸려야 한다는 말이며 바로 지금 우리 앞에 전시된 품목은 70년 후에나 또 세상에 나온다는 것이니 그 대단한 수량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북경에도 고궁박물관이 있다지만 수량이나 가치로 보아 이곳과 비교할 수 없고, 중국사를 연구하려면 이곳을 반드시 찾아야 한다니 대만이 관광객 유치를 위해서 머리를 쓰지 않는 이유를 알겠다. 곧 국립고궁박물관은 대만의 자존심이라는 것이다.
고미술에 대한 식견이 좁은 내가 어떻게 그 아름다움과 신비함, 정교함을 다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큰 것은 크게, 작은 것은 한없이 작게, 정교함의 극치를 이루어 낸 작품들이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게 했다. 청동화로 안에 새겨진 글자의 완벽함, 뼈에 새긴 그림, ‘하와야’라고 불리는 배추 모양의 옥 조각품, 수많은 서화, 향나무로 만든 조각, 3대에 걸쳐 완성했다는 작품, 이루 말할 수 없는 진기한 미술품을 보고 필력으로 다 표현하지 못하는 나는 눈으로 보고 가슴에 그려 놓고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중국 도자기’하면 언뜻 울긋불긋한 화려한 색체를 연상하지만 사실은 15세기 청나라 이후부터 도자기에 색체가 들어갔다는 얘기며 중국 도자기의 15세기 전후를 비교한 서양 사람들이 도자기의 변화에 놀라 중국을 차이나로 부르게 되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충렬사는 우리의 국립묘지와 비슷한데 내전 당시 희생된 영령들을 모신 사당이었다. 마침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사병들의 교대식이 있었는데 나라마다 교대식은 흥미있는 볼거리지만 충렬사의 교대식은 총을 다루는 행동이나 절제된 행동 등이 매우 이채로웠다. 관광객들이 사병들의 발자국을 그대로 밟아 가며 웃기도 하고 같은 모션으로 걷기도 하면서 위패가 모셔진 사당 건물까지 따라갔다. 관광객들이야 생각 없이 웃으며 지껄이며 가고 있지만 총을 멘 젊은 사병들은 조국 수호의 결의로 얼굴이 얼마나 굳어 있는지 판문점에 선 우리의 아들들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애잔했다. 돌덩이만 한 영토에 살면서 거대한 바위 같은 본토를 수복하겠다는 힘겨운 과제를 가진 어린 청춘들이 안쓰러웠다.
대만에서 공자님을 모신 사당은 고장마다 있다고 했다. 공자님 초상화 뒤편에는 ‘有敎無類’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다. 모자란 실력으로 해석을 해보니 가르치는 데 있어서 부류를 두어서면 안 된다. 곧 아이들을 차별하지 말고 가르쳐라. 요사이 교육용어로 말하면 누구에게나 학습권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천 년을 두고 상용되는 교육철학을 가진 공자님이 정말 대단하다고 느껴졌다.
역사가 짧은 그들에게는 손문과 장개석만이 위인이라고 하는데 중정 기념관은 장개석 기념관을 말하며 7만 8천 5백 평의 대지 위에 국민의 성금으로만 지어진 건물이며 개인 기념관으로서는 세계에서 제일 크다고 했다. 장개석이 손문을 만나 힘을 기르고 대만에 정부를 수립하기까지의 이야기나, 대단한 가문의 딸 송미령을 부인으로 맞이한 계산 섞인 로맨스를 듣는 일이 매우 흥미로웠다.
장개석은 통치를 하면서 독재를 했지만 검소하였고 부정을 일소하는 모범을 보여 주었으며 무엇보다 국민들을 배부르게 해 준 사람이기 때문에 위인으로 추앙받는다고 했다. 송미령도 그랬다. 당대의 최고 가문에서 본처들을 밀어내고 들어왔지만 양귀비 이래 이어온 ‘정족 문화’에서 여자들을 해방시키고 사회활동을 열어 주고 남녀평등 시대를 열어 준 공을 인정받는다고 했다. 그래서 기념관을 지을 성금이 모금되고 정부에서는 국민의 성금으로 지은 기념관이라고 자국민에게는 일절 입장료를 받지 않는다니 그 국민에 그 정부다. 작은 땅에 살지만 대국의 혈통으로 그들의 기질은 규모가 크고 시원시원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들의 기질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건물이 있었다. ‘일공일’빌딩이라고 하는데 이 건물은 층수가 101층으로 높이는 508미터로서 세계에서 제일 높은 건축물이라고 한다. 불이 들어온 빌딩은 외벽에 ‘101'을 그리며 밤에 더욱 위용을 드러냈다.
“고궁박물관, 중정 기념관, 일공일 빌딩. 이 사람들은 한다고 하면 확실히 합니다.”
대만의 최고만 짚으면서 가이드가 말했다.
달리는 버스 안에서 가이드는 부지런히 우리에게 전해 주었다.
“여기 사람들은 도박을 좋아해요. 겨울에는 한국을 많이 가죠. 강릉에 가서 눈을 보고 스키를 즐기고 동대문 시장에 가서 에누리하면서 물건 사는 것을 재미있어 해요. 여기는 에누리가 없어요. 물건을 사고는 워커힐에 가서 몇 시간씩 도박을 하고 웬만큼 잃어도 꿈쩍도 안 해요. 참, 손님들 로또 복권 사 보셨어요?”
일행 중에는 아무도 대답하는 이가 없었다.
“여기 사람들은 누구나 다 사죠. 많이는 주 4회 정도까지 사는 사람도 있어요.”
그리고 계속하여 결혼 풍습에 대해 가이드의 말이 이어졌다. 결혼은 남자 측에서 돈 주고 여자를 사 오는 수준이며 딸이 곧 효녀여서 딸 많은 집 부모는 혼수 걱정 안하고 시집 보낸 후 딸들이 돈을 갖다 주어서 좋아한다고 했다. 기름진 음식을 많이 먹으니까 아침 식사는 죽으로 하며 그것도 집에서는 하지 않는다고 했다. 날씨 탓이려니 생각했지만 집에서 기름을 많이 쓰면 벌레가 생긴다는 이유라고 했다.
먼 산에 있는 공동묘지를 보고 장례 문화에 대해 물어 보았다.
“그들은 사후 세계를 믿어요. 그래서 7일장으로 하고 49제를 반드시 지내며 부장물을 아주 돈을 많이 들여서 정성껏 하지요. 부장물이 많아야 조상이 저 세상에서 기죽지 않고 지낸다고 믿거든요.”
상여도 아주 화려하며 음식도 매우 푸짐하게 한다는 말을 덧붙였다.
여행은 그들의 역사를 짚어 보는 것도 재미있지만 살아가는 모습을 보는 것도 재미있다. 사람 냄새나는 야시장을 한 바퀴 돌았다. 대만의 야시장은 먹자판이다. 손을 바쁘게 움직이며 저녁 장사를 준비하는 주인은 무뚝뚝하게도 구경하는 우리에게 사 먹어 보라는 눈길 한 번 안 준다. 여기의 장사들은 호객 행위를 하지 않으며 에누리도 없었다. 그들의 생각은 주인이 있으니까 손님이 오는 거라서 손님이 왕이 아니라 주인이 왕이라는 거다.
야시장은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아침을 죽으로 때우는 이유를 여기서 찾았다. 저녁을 먹고도 밤늦게 야시장에 나와서 야참을 사 먹으니 아침에 식사를 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이들은 하루 식사가 세 번이 아니라 네 번을 하고 있었다.
솥에서 나오는 건 빨래 빼고는 다 음식이 된다니 포장마차에 내 걸린 먹거리도 별별 것이 다 있었다. 못 보던 물고기, 알, 자라, 거북이 등등. 특히 많은 건 뱀이었다. 손가락만한 뱀부터 기둥 같은 뱀까지 크기도 가지가지, 색깔도 가지가지 아주 등이 조여들면서 근질근질하여 혼이 났다.
“뱀 드셔 보셨어요? 처음 보는 젊은이들이 미팅을 하고 바로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다가 뱀 먹으로 가죠. 여기서는 남녀노소 다 먹어요. 이들은 이것을 아무도 혐오 식품이라고 안 해요.”
뱀 이야기를 듣고 찡그리며 다니는 우리들에게 가이드가 사탕수수즙을 사 주었다. 제자리에서 즙을 짜서 주는데 시원하고 맛이 아주 좋았다. 사탕수수 나무를 말만 들었지 실제로 보는 것도 처음이었고 달콤한 맛을 보는 것도 처음이었다. 뱀이 우글거리는 유리 상자를 두어 발 옆에 두고 사탕수수즙을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다 마셨다. 바로 여행에서만 할 수 있는 멋이었다.
이곳은 우리와 반대로 교회는 산에 있는데 절은 시내 복판에 있었다. 용산사는 270년 되는 웅장한 사찰이었다. 이곳 사람들은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용산사를 찾는다고 했다. 알록달록한 과자와 과일 빵 같은 것을 정성껏 준비해서 신문지 위에 차려놓고 불가를 부르며 향 일곱 개를 두 손으로 모아 쥐고 수없이 절을 하며 돌다가 커다란 향료에 던져서 꽂는다. 그러고는 반달처럼 생긴 나무패가 소복 담긴 통을 정성스럽게 흔들다가 하나를 밖으로 나오게 던져서 그 패에 쓰인 숫자를 보아 두었다가 기도가 끝난 후 서랍이 많은 궤짝에 가서 아까 본 숫자와 같은 숫자가 씌어진 서랍을 열어서 그 속에 있는 종이에 적힌 풀이를 읽어 재수를 점치고 있었다. 자기 점을 자기가 보는 것이다. 주로 로또 복권을 사 놓고 당첨될까 안 될까를 점치는 것이라 했다. 일확천금의 꿈은 나라를 가리지 않나 보다.
대만은 넓지는 않지만 자연이 아름다웠다. 유황 가스가 안개처럼 피어나는 양명산 국립공원은 폭포와 호수를 품고 있고 백퍼센트를 자랑하는 유황 온천을 가지고 있다. 국립 야류 해양 공원은 침식 작용에 의해서 생긴 진흙 바위들의 세상이다. 기암괴석이 많으며 이들은 오랜 세월을 두고 물이 지나면서 바위를 갉아 내어 흡사 새 송이버섯을 수없이 세워 놓은 것처럼 보여 신기했다. 그 중에는 높고 긴 모자를 쓴, 오똑한 코에 긴 목의 여자 모습을 하고 있는 돌이 있는데 그 모양이 이집트의 여왕 네페르티티를 닮았다고 하여 ‘여왕 바위’라고 한단다. 대단한 조각가가 마음먹고 만든 것 같은데 그게 아니라 순전히 침식에 의한 것이라니…. 돌에다 어떻게 여왕의 온화하고 우아한 기품까지 불어넣었는지 자연의 힘이 정말 기막히고 오묘하여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약하고 외로워 보이는 한 장의 나뭇잎 같은 대만을 상상하고 대만을 찾았지만 실상은 속이 차고 베짱이 있는 통 큰 대국의 몸짓을 하는 나라였다. 경제적 여유가 있지만 물건은 쓸 수 있을 때까지 활용하고, 필요한 것은 받아들이되 내 것은 ‘내 것’이라는 이유로 소중하게 키우는 나라. 남을 의식하지 않고 속으로 속으로 꽉꽉 채우는 나라. 일본식 건물을 아직도 활용하며 생활에서는 서양 풍속을 받아들여 편리하게 지내는 나라. 2박 3일간 궁금증을 풀어 낸 대만 여행이었다.
젓갈 삭이고 마음도 삭이고
-달가람회 문학기행을 마치고
3월 1일 11시 40분 충남 강경역에 도착해 열차로 서울에서 내려오시는 일행을 기다리는 동안 대합실 한쪽 공간에 설치된 넓은 젓갈 판매장을 들여다보며 이번 문학기행이 곰삭은 젓갈처럼 인생을 삭히는 여행이 될 것이라 예감했다. 12시 40분, 각지에서 오신 회원과 열차에서 내린 회원이 반갑게 손을 잡으며 만난 인원은 18명이다. 여행은 누구와 하느냐가 중요한 것, 반가운 얼굴들이 만나서 ‘맛 따라 멋 따라 문학기행’을 시작했다.
첫 일정을 맛보기로 시작하는 점심 메뉴는 황복어탕이었다. 50년 전통의 맛을 자랑하는 태평식당을 찾았다. 일정 안내가 있은 후 상이 차려지기까지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이 그동안의 안부를 물으며 웃음 속에 즐거운 담소가 오갔다. 석우 김 준 박사님은 이 식당은 생황복만 쓰며 먹는 법은 복어를 먼저 건져 먹고 국물은 밥을 말아서 먹는 게 좋으며 특히 국물이 보약이라 하셨다. 배 색깔이 금빛 찬란한 황복어를 토막 쳐서 끓인 게 아니라 통째로 넣어 끓였고 육질이 쫄깃하면서도 부드럽고 국물 맛이 담백했다. 복을 다 먹을 때쯤 작은 뚝배기에 ‘애’라고 하는 내장탕이 나왔다. 처음 보는 것이라 신기한 마음으로 한 수저 떠 보니 순두부처럼 곱고 부드러운 맛이었다. 이어서 우어회 무침이 빨갛게 담겨 나왔다. ‘우어’는 관절에 좋고 눈이 밝아지며 피부에 좋다니 배는 부르지만 사양할 수가 없었다. 칼칼하면서 단맛 섞인 매운 맛으로 보기에 좋은만큼 맛도 빼어났고 입을 가뿐하게 해 주었다. 별미를 앞에 두고 정담은 한이 없지만 일정대로 멋을 찾아 나섰다.
오후 4시경 가람 이병기 선생의 생가에 도착했다. 전북 익산시 여산면에 위치한 가람 선생님의 생가는 선생님의 높다란 동상이 먼저 우리를 맞았다. 일제강점기 어려운 시기에 우리의 말과 글을 펜으로 지키시고 시조를 개척하신 선생님께 경건히 추모 묵념을 드리고 생가를 살폈다. 초가로 이엉을 얹은 조촐한 선비집 마당에는 주인을 대신 해 냉이 쑥 꽃다지가 마른 풀 사이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수령 200년의 탱자나무가 집의 운치를 더 하고 집 뒤를 싸 안는 푸른 대나무 숲은 흐린 하늘을 향해 쑥쑥 자라고 있어 선생님의 절개를 보는 듯했다. 안방, 사랑채, 고방채, 모정이 있는 가옥으로 화려하지는 않지만 정겨웠고 부엌 옆에 있는 장독대에는 많은 항아리들이 엎어져 있어 빈 집임을 실감케 해 숙연했다. 백일홍과 동백 고목을 물 속에 안은 장방형 연못가에 서서 그 옛날 마음을 적셔가며 민족을 위해 고뇌하신 선생님의 모습을 잠시 그려 보았다.
‘바람이 서늘도 하여 뜰 앞에 나섰더니….’
선생님께서는 바람 부는 날 이 연못가에 서서 ‘별’을 짓지 않으셨을까.
저녁식사를 위해 가는 길에 김 준 박사님의 고향 선배 김명수 장로님 댁에 잠깐 들렀다. 두루마기 차림의 장로님께서는 걸쭉한 사투리와 유머로 연신 우리들을 웃기시며 긴장을 풀어주셨다. 해풍 냉각 미, 뽕잎 자반고등어, 두 번 구운 김, 부안군 홍보책자 등 푸짐한 선물을 주셨는데 모두가 후배 사랑이란 것을 짐작하니 남자 분들의 두터운 정이 ‘멋’으로 다가왔다. 장로님께서는 할렐루야를 집대성하시고 글자체를 특허내시는 등 종교계에서 거목으로 활동하실 뿐 아니라 부안을 온몸으로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분위기상 선 채로 한 모금 받아먹은 부안 막걸리의 시원한 맛은 장로님의 따뜻한 마음과 함께 잊을 수 없다.
선물을 받아서인지 멋스럽게 살아가시는 어른을 본 때문인지 숙소를 찾아가는 길에 서산을 넘는 해가 한결 더 고와 보였다. 석양이 솔밭 사이를 환하게 비추더니 이내 바알간 불을 능선에 붙이며 곱게 넘어가고 있었다. 여정모텔에 짐을 풀고 저녁식사를 위해 다시 차를 탔다.
저녁은 곰소 바다횟집으로 늦은 시간이라 조용했다. 회는 동해안이 좋은 걸로 알고 있지만 서해안의 횟상차림도 특이했다. 회가 나오기 전에 동죽조개탕, 백합조개구이가 나오고 은박지에 싼 조개구이가 미각을 돋구었다. 소라, 게, 곤약, 쭈꾸미, 가오리 등이 나와서 해산물을 자주 접하지 못한 나는 보는 것만 해도 만족했다. 신입 회원 김두수 님의 인사가 있는 사이 커다란 회접시가 나왔다. 보통 회는 가늘게 채친 무 위에 얹혀 나오는데 이 집은 잔잔한 옥돌을 냉장했다가 깔고 회를 얹어내었다. 신선도가 오래갔다. 우럭, 농어회에 굴 가리비 멍게 해삼 피조개가 딸려 나와서 그 많은 종류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딱 한 잔만 소주를 하듯 딱 한 곡씩으로 여흥을 풀고 첫째 날을 마감하며 잠자리에 들었다.
3월 2일 둘째 날이 밝았다.
감사하게도 우리가 잔 숙소는 내소사 근처였다. 아침 식사를 위해 잠깐 걸었는데 돌담의 정취와 부드러운 바람, 꽃망울을 살찌우는 성급한 산수유를 본 것은 생각지도 않은 덤이었다. 일정에 없었지만 아침식사 시간을 절약해 내소사 경내로 들어갔다. 내소사를 안고 있는 등가산 봉우리는 바위와 솔이 어울려 태고의 멋이 보였다. 내소사는 백제 무왕 때 세워졌는데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찾아온 것을 기념해 이름 붙였고 원래 소래사로 불렀다며 입장권을 사는 사이 자경 전선구 선생님께서 자세히 설명해 주셨다. 일주문에서 천왕문까지 600미터를 이어선 전나무 숲길은 ‘함께 나누고픈 숲길’전국대회에 선정된 길로 너무도 아름다운 길이었다. 마른 갈잎을 밟으며 신선한 숲길을 걷자니 상쾌한 기분은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전나무 사이사이 개벚나무 단풍나무가 심겨져 있었고 길 우편으로 벚나무가 도열한 도로가 있어 물오르는 봄철이나 물드는 가을의 정경이 얼마나 색색으로 아름다울지 짐작이 갔다. 목탁소리 청아한 대웅보전은 단청이 없는 채로 단아하고 연꽃무늬 문살의 자색진 아름다움에 넋이 빠졌다. 시간에 쫓겨 돌아서는 길에 팽나무에 걸린 작은 팻말의 글이 보였다.
‘아니온 듯 다녀가세요’ 아무것도 남기지 말고 가달라는 간절한 부탁이다. 그런데 어쩌나. 다시 오고 싶은 마음 한 자락은 두고 가야겠는데. 까치들의 인사를 받으며 차에 올랐다.
길 양옆으로 싹이 올라 온 마늘 양파 뽑다 만 상추 배추들이 별로 춥지 않은 이 지방의 겨울을 일러 주었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광이 좋아 자경 전선구 선생님께 즉흥 시조 한 수를 졸라 봤다. 조르긴 했지만 설마 시조가 나오리라 기대하지는 않았는데
새벽 별 파란빛이 가득 쌓인 회색들판
반짝이던 서릿발이 화해처럼 녹아내려
아물히 봄을 켜드는 아지랑이 웃음소리.
-<들판>
절창이 아니신가. 세월이 가면 나도 즉흥시로 절창을 할 때가 있을까. 욕심이겠지.
바지락선이 점점이 떠 있는 조용한 바다를 끼고 있는 새만금 방조제를 둘러보고 변산반도 석정공원에 있는 신석정 시비를 찾았다. 목가적 시인이신 그는 촛불을 시작으로 10여 편의 아름다운 저서를 남기셨는데 시비에는 ‘파도’가 음각되어 있었다. 동행한 신군자 시인과 유강 고두석 선생님께서 시비를 쳐다보며 ‘파도’를 낭송하셨다. 숨을 죽이고 들었다.
“갈대에/ 숨어드는/ 소슬한 바람/ 9월이 깊었다. / …”
우뢰와 같은 박수소리가 나고 가슴으로 옮기는 감동을 맛보았다. 펼쳐진 바다를 향해서 시를 낭송하고 음미하는 이 장면은 시조를 사랑하지 않으면 있을 수 없는 광경이라 시조의 맛을 알고 인생의 멋을 즐기는 사람들 틈에 내가 끼여 있구나 하는 행복감에 잠시 젖었다.
황사로 뿌연 길을 헤치며 부안군 매창 공원에 안치된 매창묘를 찾았다. 매창은 선조 6년에 아전의 서녀로 태어나 기생으로 살면서 애끓는 사랑을 노래한 시 220여 편을 남겼으니 시조의 대가라 할 만하다. 전해오는 것은 54편 정도이며 ‘이화우’라는 이별의 아픔을 노래한 시비가 있었다.
이화우(梨花雨) 흩뿌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秋風落葉)에 저도 날 생각난가.
천 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매.
-<이화우>
이별은 언제나 아프고 슬프지만 전세나 후세에 누가 이만큼 절절한 이별의 아픔을 표현했을까. 공원 안에는 ‘임 생각’이라는 시와 생전에 마음을 나누던 유희경과 허 균의 시비도 있었는데 내 눈에는 38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가여운 매창의 치맛자락이 보이는 듯 해 어림없는 수준이지만 속으로 나도 한 수 읊어 보았다.
시향 따라 찾아 온 천리 남짓 매창 뜸엔
임 그리며 삭인 세월 침묵으로 흐르는데
이봄 또
외씨버선을
당겨 신는 여심이여.
-<매창 시비 앞에서>
점심으로 고창 풍천 장어를 먹기 위해 산솔 가든으로 향했다. 삼인교 하천에는 물길보다 더 넓은 갈대밭에서 갈대가 흔들리고 있었다. 풍천장어는 전북 고창군 선운산 일대에 서식하는 뱀장어를 말하며 작설차, 복분자술과 함께 선운산의 3대 특산물로 일컫는다고 한다. 장어 뼈튀김이 먼저 나왔는데 바삭거리고 구수한 맛이 좋았다. 잡젓과 밴댕이 속젓이 빠지지 않고 나왔고 풍천장어는 크고 굵은 편이며 곱게 썬 생강채와 같이 삭힌 깻잎에 얹고 장어소스를 얹어 쌈을 싸 먹으라 했다. 입안에서 감도는 고소하면서 부드러운 그 맛을 비길 데가 없었다. 김 준 박사님께서 식사 중 간간이 가르침의 말씀을 하셨다. ‘그리움의 시를 쓰자. 그러자면 사물을 볼 때 애정을 가지고 봐야하며 사랑으로 보라’는 요지였다. 우리들이 멋은 찾지 않고 맛에만 취할까 걱정이 되셨나보다. 예부터 풍천장어 한 절음에 복분자 술 한 잔이라 했다. 설동필 님께서 가지고 오신 빛깔 고운 복분자 술을 딱 한 잔씩 하고 우리는 식탁에서 김준 박사님의 ‘라파로마’를 청해 들었다. 그 연세에 그 노래를 아신다는 것도 멋이요, 부르신다는 건 더 큰 멋이요, 일정을 생각해서 한 소절로 끝내는 센스는 더 엄청난 멋이라 생각했다. 박수를 치면서 일어섰다. 미당 서정주 님의 생가방문을 위해서였다.
만약 봄이라면 동화 속 같이 보일 실개천을 건너 마당을 들어서니 동백나무 울타리가 정겹고 물 마른 두레박 우물이 빈 장독대와 함께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위채와 아래채로 된 단촐한 구조였다. 대문 없는 마당 끝에 바싹 마른 국화가 서 있었다. 가을이라면 어느 곳에 선 국화보다 의미가 깊을 텐데 말라서 보잘것없다. 나는 금빛 찬란한 노란색을 마른 꽃 위에 칠하고 그윽한 향기를 얹어 보았다. 그것이 시를 쓰는 사람들의 멋이 아니겠는가. 말라 틀어진 국화도 미당 댁 국화는 의미가 깊다.
이웃에 있는 폐교를 수리하여 미당 기념관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생전에 가족을 무척 중시하셨다는데 가족애가 시로 나타나 “국화꽃 옆에서”라는 걸작이 나왔을 것이다. 친일헌시를 읽는 마음이 매우 쓰렸고 친일변명을 하는 글은 더욱 마음이 쓰렸다. 하필이면 그 시대에 태어난 운명과 뛰어난 필력이 죄가 아니겠는가?
장성에는 여류시조시인 정춘자 선생님이 계셨는데 길목이라 잠시 들렀다. 인정을 담은 복분자 차를 내 주시고 하서 김인후 선생의 15대손이신 김병효 어르신과 함께 우리 일행을 필암 서원으로 안내해 주셨다. 필암 서원은 선조 23년 하서 김인후 선생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그의 고향에 세운 서원이라 했다. 대원군의 서원철폐정책으로 호남에서는 필암 서원만 남았다니 그 중요성이 대단한 것이었다. 현판은 현종 임금님의 친필이며 출입문에 해당되는 확연루를 지나면 공부를 하던 청절당. 유생들의 생활관인 동재와 서재가 있고 북쪽으로 사당이 배치되어 있었다. 경장각에는 인종 임금께서 하사하신 목죽도가 보관되어 있었고 편액은 정조대왕 어필이라 했다. 상상외로 진기한 문화재가 많아 볼 것이 많았으나 해가 기울어 아쉬운 마음을 달래야 했다.
기운 해를 뒤로 하고 장성댐에서 붕어찜을 마지막 식사로 마주 앉았다. 이 식사가 끝나면 헤어져야 할 사람들! 마음이 찡해 오는데 김병효 어르신께서 시조를 읊으셨다.
짚방석 내지 마라/ 낙엽인들 못 앉으랴/ 솔불 혀지 마라/ 어제 진 달 돋아 온다/ 아이야, 박주산채일망정/ 없다 말고 내어라.
어르신의 낭송은 또 다른 멋이다. 연세가 높으셔도 명문가의 자손은 멋과 향을 오래도록 지니시나 보다. 붕어찜에 시래기를 깐 것이 이채로웠는데 붕어도 맛이 좋았지만 시래기의 맛도 좋았다. 정춘자 선생님께서 특별히 주문해 둔 잣을 동동 띄운 솔잎차는 등에 기분 좋게 땀을 한줄기 내려주며 여행의 피로를 풀어 주었다. 솔잎차로 마지막 맛 경험을 마무리 하고 멋도 정리할 때가 되었다.
송전 회장님은 글 쓰는 정열과 끈끈한 정이 달가람회를 이끈다며 참석한 회원에게 감사의 말씀을 하셨지만 회원입장에서 생각하니 회장님이하 안내를 맡으신 유강 고두석 님이나 두레를 알뜰히 해 주신 고동우 사무국장님께 오히려 우리가 감사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었다. 젓갈이 삭아가는 고장에서 사유의 깊이를 더하며 인생을 멋으로 삭히는 문학기행을 마무리할 즈음 장성 댐 푸른 물에도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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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 읽고 갑니다. 다시 와서 읽으려합니다.
여울향님, 오랫만이네요. 자주 놀러오세요. 글도 남겨주시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