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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삿갓 - 김병연(金炳淵)의 생애(生涯)와 시(詩)
김 삿갓 - 김병연(金炳淵)의 생애
김 삿갓 - 김 병연(金炳淵)은 1807(순조7)년에 경기도 양주에서 김 안근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안동 김씨이고, 자는 난고(蘭皐)이며, 별호는 김 삿갓(金笠)이라고 한다.
그가 다섯 살 때, 평안도 선천 부사였던 그의 할아버지 김 익순은 홍경래의 난을 진압하지 못하고 투항한다. 그 죄로 그의 집안은 멸족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노복의 도움으로 형 병하와 함께 황해도 곡산으로 피신하였다가 후에 멸족에서 폐족으로 사면되어 형과 함께 어머니에게로 돌아간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 김 안근은 역적이 되었다는 사실에 화병을 얻어 죽고 만다.
아버지의 장례를 치른 후 어머니는 자식들이 멸시받는 것이 싫어 강원도 영월로 집을 옮기고 숨어서 살았다.
어린 병연은 그 사실을 모른 채 자랐고, 다섯 살 때부터 배우기 시작한 글에서 뛰어난 솜씨를 보였고, 열 여 살에는 사서삼경에 통달하였으며, 특히 시 쓰기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그는 과거제도의 하나인 백일장에 응시하여 <논정가산 충절사 탄김익순 죄통우천(論鄭嘉山 忠節死 嘆金益淳 罪通于天)>이라는 시를 지어 장원급제한다. 그것은 결국 자기의 할아버지 김 익순을 탄핵한 것임을 어머니를 통해 알게 된 그는 조상을 욕되게 한 불효와, 역적의 후손이라는 불충의 자책에 빠져 처자식을 둔 채로 방랑의 길에 오른다.
그때가 그의 나이 20세 무렵이었는데 그는 푸른 하늘을 볼 수 없는 죄인이라고 삿갓을 쓰고 죽장을 짚은 채 방랑생활을 하였다.
그는 금강산 유람을 시작으로 각지의 서당을 주로 순방하고, 4년 뒤엔 일단 귀향하여 1년 남짓 묵었다. 이때 둘째 아들 익균을 낳았다.
그리고 다시 고향을 떠나 서울, 충청, 경상도로 떠돌았다. 도산서원 아랫마을 서당에서 몇 해 동안 훈장노릇도 하였다. 그리고 또 다시 전라도, 충청도, 평안도를 거쳐 어릴 때 자라던 곡산의 노복 김 성수 아들집에서 1년쯤 훈장노릇을 하였다.
충청도 계룡산 밑에서는 자기를 찾아온 아들 익균을 재워놓고 도망하였다가 1년 만에 또 찾아온 그 아들과 경상도 어느 산촌에서 만났으나, 이번에는 심부름을 보내놓고 도망쳤다. 3년 뒤 경상도 진주에서 또다시 아들을 만나 귀향을 마음먹었다가 또 변심하여 이번에는 용변을 핑계로 도피하였다.
57세 때 전라도 동복에 쓰러져 있는 것을 어느 선비가 나귀에 태워 자기 집으로 데려가 거기에서 반년 가까이 신세를 졌다. 그 뒤에는 지리산을 두루 살펴보고 3년 만에 쇠약한 몸으로 그 선비 집에 되돌아와 한 많은 생애를 마쳤다.
뒤에 아들 익균이 유해를 거두어 강원도 영월군 의풍면 태백산 기슭에 묻었다.
김삿갓 - 김병연(金炳淵)의 시(詩)
김 병연(金炳淵)의 장원급제 시詩
논정가산 충절사 탄김익순 죄통우천(論鄭嘉山 忠節死 嘆金益淳 罪通于天)
일이세신금익순一爾世臣金益淳(대대로 임금을 섬겨온 김익순은 듣거라.)
정공부과경대부鄭公不過卿大夫(정공鄭公은 경대부에 불과했으나)
장군도리농서락將軍桃李농西落(농서의 장군 이능처럼 항복하지 않아)
열사공명도말고烈士功名圖末高(충신열사들 가운데 공과 이름이 서열 중에 으뜸이다.)
시인도차역강개詩人到此亦慷慨(시인도 이에 대하여 비분강개하노니)
무검비가추수계撫劍悲歌秋水溪(칼을 만지며 이 가을날 강가에서 슬픈 노래 부르노라.)
선천자고대장읍宣川自古大將邑(선천은 예로부터 대장이 맡아보던 고을이라)
비제가산선수의比諸嘉山先守義(가산 땅에 비하면 먼저 충의로써 지킬 땅이로되)
청조공작일왕신淸朝共作一王臣(청명한 조정에 모두 한 임금의 신하로서)
사지영위이심자死地寧爲二心子(죽을 때는 어찌 두 마음을 품는단 말인가.)
승평일월세신미升平日月歲辛未(태평세월이던 신미년에)
풍우서관하변유風雨西關何變有(관서 지방에 비바람 몰아치니 이 무슨 변고인가.)
존주숙비노중련尊周孰非魯仲連(주周나라를 받드는 데는 노중련 같은 충신이 없었고)
보한인다제갈량輔漢人多諸葛亮(한漢나라를 보좌하는 데는 제갈량 같은 자 많았노라)
동조구신정충신同朝舊臣鄭忠臣(우리 조정에도 또한 정충신鄭忠臣이 있어서)
저장풍진입절사抵掌風塵立節死(맨손으로 병란 막아 절개 지키고 죽었도다.)
가릉노리양명정嘉陵老吏揚名旌(늙은 관리로서 구국의 기치를 든 가산 군수의 명성은)
생색추천백일하生色秋天白日下(맑은 가을 하늘에 빛나는 태양 같았노라.)
혼귀남무반악비魂歸南畝伴岳飛(혼은 남쪽 밭이랑으로 돌아가 악비와 벗하고)
골매서산방백이骨埋西山傍伯夷(뼈는 서산에 묻혔어도 백이의 곁이라.)
서래소식개연다西來消息慨然多(서쪽에서는 매우 슬픈 소식이 들려오니)
문시수가식록신問是誰家食錄臣(묻노니 너는 누구의 녹을 먹는 신하이더냐?)
가성장동갑족금家聲壯洞甲族金(가문은 으뜸가는 장동壯洞 김씨요)
명자장안항렬순名字長安行列淳(이름은 장안에서도 떨치는 순淳자 항렬이구나.)
가문여허성은중家門如許聖恩重(너희 가문이 이처럼 성은을 두터이 입었으니)
백만병전의부하百萬兵前義不下(백만 대군 앞이라도 의를 저버려선 안 되리라.)
청천강수세병파淸川江水洗兵波(청천강 맑은 물에 병마를 씻고)
철옹산수괘궁지鐵甕山樹掛弓枝(철옹산 나무로 만든 활을 메고서는)
오왕정하진퇴슬吾王庭下進退膝(임금의 어전에 나아가 무릎 꿇듯이)
배향서성흉적취背向西城凶賊脆(서쪽의 흉악한 도적에게 무릎 꿇었구나.)
혼비막향구천거魂飛莫向九泉去(너의 혼은 죽어서 저승에도 못 갈 것이니)
지하유존선대왕地下猶存先大王(지하에도 선왕들께서 계시기 때문이라.)
망군시일우망친忘君是日又忘親(이제 임금의 은혜를 저버리고 육친을 버렸으니)
일사유경만사의一死猶輕萬死宜(한 번 죽음은 가볍고 만 번 죽어야 마땅하리.)
춘추필법이지부春秋筆法爾知否(춘추필법을 너는 아느냐?)
차사유전동국사此事流傳東國史(너의 일은 역사에 기록하여 천추만대에 전하리라.)
이 시는 김 삿갓 - 김 병연이 과거제도의 하나인 백일장에 응시하여 장원급제한 시다. 결국 모르고 자기의 할아버지 김 익순을 탄핵한 시다. 어머니를 통해 사실을 알게 된 그는 조상을 욕되게 한 불효와, 역적의 후손이라는 불충의 자책에 빠져 처자식을 둔 채로 방랑의 길에 오른다.
피좌노인비인간披坐老人非人間
피좌노인비인간披坐老人非人間(저기 앉은 늙은이 사람 같지 않다)
의시찬상강신선疑是天上降神仙(마치 하늘에서 내려 온 신선 같구나.)
슬하칠자개도적膝下七子皆盜賊(슬하 일곱 아들들 모두 도적놈일세,)
투득천도헌수연偸得天桃獻壽宴(천도 복숭아를 훔쳐다 잔치에 올렸네.)
황해도 산골 어느 노인의 회갑연에서 푸대접을 받으며 말석에서 술 한 잔 얻어먹은 김삿갓은 이 시(詩) 한 수로 좌중을 웃기고 울린다.
기구起句에서 "저기 앉은 늙은이 사람 같지 않다" 고 하자, 사람들은 이해를 못해 어리둥절해한다. 이어
승구承句에서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신선 같구나." 라고 하자, 환갑노인은 입이 떡 벌어졌다.
전구轉句에서 "슬하 일곱 아들들 모두 도적놈일세." 라고 하자, 좌중이 갑자기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김 삿갓은 못 들은 척 잠자코 있다가, 마침내
결구結句에서 "늙은 부모에게 효도하려고 천도복숭아를 훔쳐다 잔치에 올렸네." 라고 하니 그 대목에서는 모두가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한다.
이 칠언절구 한 수로 김 삿갓은 극진한 대접을 받았음은 물론이다.
이십수하삼십객二十樹下三十客
이십수하삼십객二十樹下三十客(스무나무 아래 서른 -서러운- 나그네에게)
사십촌중오십객四十村中五十食(마흔-망할 놈의- 동네에선 쉰밥을 주는구나)
인간개유칠십사人間豈有七十事(세상에 어찌 이런 일이 있으리오)
불여귀가삼십식不如歸家三十食(고향집에 돌아가 설익은 밥을 먹으리라.)
이 시는 김 삿갓이 함경도 어느 부잣집에서 걸식을 하다 냉대를 받고 나그네의 설움을 그의 뛰어난 재치와 풍자로 한문 숫자를 이용하여 표현한 시이다.
二十樹 : 스무나무는 느릅나무과에 속하는 나무 이름.
三十客 : 三十은 '서른'이니 '서러운'의 뜻. 서러운 나그네.
四十家 : 四十은 '마흔'이니 '망할'의 뜻. 망할 놈의 집.
五十食 : 五十은 '쉰'이니 '쉰'의 뜻. 쉰 밥.
七十事 : 七十은 '일흔'이니 '이런'의 뜻. 이런 일.
三十食 : 三十은 '서른'이니 '선(未熟)'의 뜻. 설익은 밥.
차죽피죽화거죽此竹彼竹化去竹
차죽피죽화거죽此竹彼竹化去竹(이 대로 저 대로 되어 가는 대로)
풍타지죽랑타죽風打之竹浪打竹(바람 치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반반죽죽생차죽飯飯粥粥生此竹(밥이면 밥, 죽이면 죽, 이 대로 살아가고)
시시비비부피죽是是非非付彼竹(옳으면 옳고 그르면 그르고, 저 대로 맡기리라.)
빈객접대가세죽賓客接待家勢竹(손님 접대는 집안 형세대로)
시정매매세월죽市井賣買歲月竹(시장에서 사고, 팔기는 세월대로)
만사불여오심죽萬事不如吾心竹(만사를 내 마음대로 하는 것만 못하니)
연연연세과연죽然然然世過然竹(그렇고 그런 세상 그런대로 지나세.)
한자의 훈訓을 빌어 절묘한 표현을 하였다.
此 이 차, 竹 대나무 죽 : 이대로.
彼 저 피, 竹 : 저대로.
化 화할 화(되다), 去 갈 거, 竹 : 되어 가는 대로.
風 바람 풍, 打 칠 타, 竹 : 바람 치는 대로.
浪 물결 랑, 打 竹 : 물결치는 대로.
부부아립등허주浮浮我笠等虛舟
부부아립등허주浮浮我笠等虛舟(가뿐한 내 삿갓이 빈 배와 같아)
일착평생사십추一着平生四十秋(한번 썼다가 사십 년 평생 쓰게 되었네.)
목수경장수야독牧堅輕裝隨野犢(목동은 가벼운 삿갓 차림으로 소 먹이러 나가고)
어옹본색반사구漁翁本色伴沙鷗(어부는 갈매기 따라 삿갓으로 본색을 나타냈지.)
취래탈괘간화수醉來脫掛看花樹(취하면 벗어서 구경하던 꽃나무에 걸고)
흥도휴등완월루興到携登翫月樓(흥겨우면 들고서 다락에 올라 달구경하네.)
속자의관개외식俗子依冠皆外飾(속인들의 의관은 모두 겉치장이지만)
만천풍우독무수滿天風雨獨無愁(하늘 가득 비바람쳐도 나만은 걱정이 없네.)
조부를 탄핵하고 불효와, 역적의 후손이라는 불충의 자책에 빠져 처자식을 버려둔 채로 떠도는 방랑의 길에 언제나 벗이 되어 주며 비바람에도 몸 을 보호해 주는 삿갓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했다.
객수소조몽불인客愁簫條夢不仁
객수소조몽불인客愁簫條夢不仁(나그네는 쓸쓸함에 잠을 이룰 수 없는데)
만천상월조오린滿天霜月照吾隣(찬 서리 둥근 달이 나를 비추고 있구나)
녹죽창송천고절綠竹蒼松千古節(푸른 대나무와 소나무는 천고의 절개를 지키지만)
홍도백리편시춘紅桃白梨片時春(붉은 복숭아 하얀 배꽃은 봄에 잠깐 피고 진다네)
소군옥골호지토昭君玉骨胡地土(천하절색 왕소군도 죽어 뼈는 흙이 되고)
귀희화용마외진貴姬花容馬嵬塵(양귀비의 고운 모습도 말발굽의 티끌이도다)
세간물리개여차世間物理皆如此(세상사는 이치가 모두 그와 같은데)
막석금소해여신莫惜今宵解汝身(그대는 오늘 밤 옷 벗기를 아까워하지 마소)
원주 근처 어느 주막에서 하룻밤 유숙을 하는데 그 주모가 또한 과부 인지라 김 삿갓은 그 옛날 중국의 사대 미녀 중의 한 사람인 왕 소군과 양귀비를 빗대어 천하절색 미인이라도 죽어나면 모두가 흙으로 돌아가는데 젊은 나이에 절개를 지키려고 애쓰느냐며 노골적으로 유혹하는 시다.
가련행색 가련신可憐行色 可憐身(가련한 행색의 가련한 몸이)
가련문정 방가련可憐門前 訪家憐(가련의 문전에 가련을 찾아왔도다.)
가련차의 전가련可憐此意 傳가憐(가련한 이 마음 가련에게 전하니,)
가련능지 가련심可憐能知 可憐心(가련은 능히 가련한 이 마음 알리라)
가련이라는 기생에게 애틋하고 가련한 정을 호소하는 듯, 가련이를 놀리는 듯.
추미애가정신병秋美哀歌靜晨竝
추미애가정신병秋美哀歌靜晨竝(가을날 곱고 애잔한 노래가 황혼에 고요히 퍼지니)
아무래도미친년雅霧來到迷親然(우아한 안개가 홀연히 드리운다.)
개발소발개쌍년凱發小發皆雙然(기세 좋은 것이나, 소박한 것이나 모두가 자연이라)
애비애미죽일년愛悲哀美竹一然(사랑은 슬프며, 애잔함은 아름다우니 하나로 연연하다)
한자의 음을 보면, 정신병, 미친년, 개쌍년, 애비애미 죽일년. 아무래도 김 삿갓의 속이 뒤틀렸던 거다. 욕을 한 시다.
서당내조지書堂乃早知
서당내조지書堂乃早知(서당은 일찍부터 알고 와보니)
방중개존물房中皆尊物(방안에는 모두 높으신 분들이라)
생도제미십生徒諸未十(생도는 모두 10명도 안되는데)
선생내불알先生來不謁(선생은 나와 보지도 않는구나)
내조지, 개존물, 제미십, 내불알, 김 삿갓의 속이 또 한번 뒤틀린 거다.
시시비비비시시是是非非非是是
시시비비비시시是是非非非是是(옳은 것 옳다하고 그른 것 그르다함이 꼭 옳진 않고)
시비비시비비시是非非是非非是(그른 것 옳다하고 옳은 것 그르다 해도 옳지 않은 건 아닐세.)
시비비시시비비是非非是是非非(그른 것 옳다하고 옳은 것 그르다 함, 이것이 그른 것은 아니고)
시시비비시시비是是非非是是非(옳은 것 옳다 하고 그른 것 그르다 함, 이것이 시비일세)
어허, 그려요, 그려요.
부부아립등허주浮浮我笠等虛舟
부부아립등허주浮浮我笠等虛舟(가뿐한 내 삿갓이 빈 배와 같아)
일착평생사십추一着平生四十秋(한번 썼다가 사십 년 평생 쓰게 되었네.)
목수경장수야독牧堅輕裝隨野犢(목동은 가벼운 삿갓 차림으로 소 먹이러 나가고)
어옹본색반사구漁翁本色伴沙鷗(어부는 갈매기 따라 삿갓으로 본색을 나타냈지.)
취래탈괘간화수醉來脫掛看花樹(취하면 벗어서 구경하던 꽃나무에 걸고)
흥도휴등완월루興到携登翫月樓(흥겨우면 들고서 다락에 올라 달을 구경하네.)
속자의관개외식俗子依冠皆外飾(속인들의 의관은 모두 겉치장이지만)
만천풍우독무수滿天風雨獨無愁(하늘 가득 비바람 쳐도 나만은 걱정이 없네.)
조부祖父를 탄핵하고 시작한 방랑생활放浪生活. 언제나 벗이 되어 주며 비바람에도 몸을 보호해 주는 삿갓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했다.
그리해서 '병연炳淵'은 그 이름과 함께 사라지고 말았다. 이때부터 이 시인은 '병연'이란 이름을 스스로 숨기고 잊어 버렸다. 그리고 삿갓을 쓴 이름 없는 시인詩人이 되었다. 그가 읊은 자신의 '삿갓'시는 표연자적飄然自適하는 자연과 풍류風流 속의 자기운명自己運命을 그린 자화상自畵像이었던 거다.
차호천지간남아嗟乎天地間男兒
차호천지간남아嗟乎天地間男兒(슬프다 천지간 남자들이여)
지아평생자유수知我平生者有誰(내 평생을 알아줄 자가 누가 있으랴.)
평수삼천리랑적萍水三千里浪跡(부평초 물결 따라 삼천리 자취가 어지럽고)
금서사십년허사琴書四十年虛詞(거문고와 책으로 보낸 사십년도 모두 헛것일세.)
청운난력치비원靑雲難力致非願(청운은 힘으로 이루기 어려워 바라지 않았거니와)
백발유공도불비白髮惟公道不悲(백발도 정한 이치이니 슬퍼하지 않으리라.)
경파환향몽기좌驚罷還鄕夢起坐(고향 길 가던 꿈꾸다 놀라서 깨어 앉으니)
삼경월조성남지三更越鳥聲南枝(삼경에 남쪽지방 새 울음만 남쪽가지에서 들리네.)
월조越鳥는 남쪽 지방의 새인데 다른 지방에 가서도 고향을 그리며 남쪽 가지에 앉는다고 한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나타내는 말로 쓰였다.
사각송반죽일기四脚松盤粥一器
사각송반죽일기四脚松盤粥一器(네 다리 소반 위에 멀건 죽 한 그릇.)
천광운영공배회天光雲影共排徊(하늘에 뜬 구름 그림자가 그 속에서 함께 떠도네.)
주인막도무안색主人莫道無顔色(주인이여, 면목이 없다고 말하지 마오.)
오애청산도수래吾愛靑山倒水來(물 속에 비치는 청산을 내 좋아한다오.)
산골의 가난한 농부 집에 하룻밤을 묵었다. 가진 것 없는 주인의 저녁 끼니는 멀건 죽. 죽 밖에 대접할 것이 없어 미안해하는 주인에게 시 한 수를 지어 주었던 거다.
사당동리문사당祠堂洞裡問祠堂
사당동리문사당祠堂洞裡問祠堂(사당동 안에서 사당을 물으니)
보국대광성씨강輔國大匡姓氏姜(보국대광 강씨 집안이라네.)
선조유풍의북불先祖遺風依北佛(선조의 유풍은 북쪽 부처에게 귀의했건만)
자손우류학서강子孫愚流學西羌(자손들은 어리석어 서쪽 오랑캐 글을 배우네.)
주규첨하저관각主窺檐下低冠角(주인은 처마 아래서 갓을 숙이며 엿보고)
객립문전탄석양客立門前嘆夕陽(나그네는 문 앞에 서서 지는 해를 보며 탄식하네.)
좌수별감분외사座首別監分外事(좌수 별감이 네게는 분에 넘치는 일이니)
기병보졸가당당騎兵步卒可當當(기병 보졸 따위나 마땅하리라.)
김 삿갓을 내쫓은 주인은 나그네가 갔나, 안 갔나, 확인하려고 갓을 숙이고 엿보는데 김 삿갓은 문 앞에 서서 인심 고약한 주인을 풍자하고 있는 거다
곡목위연첨착진曲木爲椽檐着塵
곡목위연첨착진曲木爲椽檐着塵(굽은 나무로 서까래 만들고 처마에 먼지가 쌓였지만)
기간여두근용신其間如斗僅容身(그 가운데가 말만해서 겨우 몸을 들였네)
평생불욕장요굴平生不欲長腰屈(평생 동안 긴 허리를 굽히려 안했지만)
차야난모일각신此夜難謀一脚伸(이 밤에는 다리 하나도 펴기가 어렵구나.)
서혈연통혼사칠鼠穴煙通渾似漆(쥐구멍으로 연기가 들어와 옻칠한 듯 검어진 데다)
봉창모격역무신封窓茅隔亦無晨(봉창은 또 얼마나 어두운지 날 밝는 것도 몰랐네.)
수연면득의관습雖然免得衣冠濕(그래도 하룻밤 옷 적시기는 면했으니)
임별은근사주인臨別慇懃謝主人(떠나면서 은근히 주인에게 고마워했네.)
어느 시골집에서 비를 피하며 지은 것으로 궁벽한 촌가의 정경과 선비로서의 기개가 엿보이는 시다. 누추하지만 나그네에게 비를 피할 수 있도록 베풀어 준 주인의 따뜻한 마음에 감사하고 있는 거다.
허다운자하호멱許多韻字何呼覓
허다운자하호멱許多韻字何呼覓(수많은 운자 가운데 하필이면 '멱'자를 부르나.)
피멱유난황차멱彼覓有難況此覓(그 '멱'자도 어려웠는데 또 '멱'자를 부르다니.)
일야숙침현어멱一夜宿寢懸於覓(하룻밤 잠자리가 '멱'자에 달려 있는데)
산촌훈장단지멱山村訓長但知覓(산골 훈장은 오직 '멱'자만 아네.)
김 삿갓이 어느 산골 서당에 가서 하룻밤 재워 달라고 하니 훈장이 시를 지으면 재워 주겠다고 하면서 시를 짓기 어려운 '멱'覓자 운을 네 번이나 불렀다. 이에 훈장을 풍자하며 재치 있게 네 구절을 다 읊었던 거다.
종일연계불견인終日緣溪不見人
종일연계불견인終日緣溪不見人(골짜기 따라 종일 가도 사람을 못 보다가)
행심두옥반강빈幸尋斗屋半江濱(다행히도 오두막집을 강가에서 찾았네.)
문도여왜원년지門塗女媧元年紙(문을 바른 종이는 여와 시절 그대로고)
방소천황갑자진房掃天皇甲子塵(방을 쓸었더니 천황씨 갑자년 먼지일세.)
광흑기명우도출光黑器皿虞陶出(거무튀튀한 그릇들은 순임금이 구워냈고)
색홍맥반한창진色紅麥飯漢倉陳(불그레한 보리밥은 한나라 창고에서 묵은 것일세.)
평명사주등전도平明謝主登前途(날이 밝아 주인에게 사례하고 길을 나섰지만)
약사경소구미행若思經宵口味幸(지난밤 겪은 일을 생각하면 입맛이 쓰구나.)
‘여왜女媧’는 중국 전설에 나오는 천지를 만들었다는 인물.
‘천황天皇’은 전설에 나오는 고대 중국 임금.
서행기과십삼주西行己過十三州
서행기과십삼주西行己過十三州(서쪽으로 이미 열세 고을을 지나왔건만)
차지유연석거유此地猶然惜去留(이곳에서는 떠나기 아쉬워 머뭇거리네)
우운가향인오야雨雪家鄕人五夜(아득한 고향을 한밤중에 생각하니)
산하역려세천추山河逆旅世千秋(천지 산하가 천추의 나그네길일세.)
막장비개담청사莫將悲慨談靑史(지난 역사를 이야기하며 비분강개하지 마세.)
수향영호문백두須向英豪問白頭(영웅호걸들도 다 백발이 되었네.)
玉館孤燈應送歲옥관고등응송세(여관의 외로운 등불 아래서 또 한 해를 보내며)
몽중능작고원유夢中能作故園遊(꿈속에서나 고향 동산에 노닐어 보네.)
오야五夜는 오경五更으로 오전 3시부터 5시까지이다.
우하만야별하최遇何晩也別何催
우하만야별하최遇何晩也別何催(만나기는 왜 그리 늦고 헤어지기는 왜 그리 빠른지)
미복기흔지복애未卜其欣只卜哀(기쁨을 맛보기 전에 슬픔부터 맛보았네.)
제주유여초일양祭酒惟餘醮日釀(제삿술은 아직도 초례 때 빚은 것이 남았고)
습의잉용가시재襲衣仍用嫁時裁(염습 옷은 시집 올 때 지은 옷 그대로 썼네.)
창전구종소도발窓前舊種少桃發(창 앞에 심은 복숭아나무엔 꽃이 피었고)
염외신소쌍연래簾外新巢雙燕來(주렴 밖 새 둥지엔 제비 한 쌍이 날아 왔는데)
현부즉종처모문賢否卽從妻母問(그대 심성도 알지 못해 장모님께 물으니)
기언오녀덕겸재其言吾女德兼才(내 딸은 재덕을 겸비했다고 말씀하시네.)
시집 온 지 얼마 안 되는 아내의 상을 당한 남편을 대신하여 지은 시이다. 아내가 떠난 집에 제비가 찾아오고 복숭아꽃이 피니, 아내를 그리는 정이 더욱 간절해짐을 표현했던 거다.
각파난동조却把難同調
각파난동조却把難同調(처음 만났을 때는 어울리기 어렵더니)
환위일석친還爲一席親(이제는 가장 가까운 사이가 되었네.)
주선교시은酒仙交市隱(주선酒仙이 시은市隱과 사귀는데)
여협시문인女俠是文人(이 여자 협객은 문장가일세.)
태반금기합太半衿期合(정을 통하려는 뜻이 거의 합해지자)
성삼의태신成三意態新(달그림자까지 합해서 세 모습이 새로워라.)
상휴동곽월相携東郭月(서로 손 잡고 달빛 따라 동쪽 성곽을 거닐다가)
취도락매춘醉倒落梅春(매화꽃 떨어지듯 취해서 쓰러지네)
주선酒仙은 술을 즐기는 김 삿갓 자신.
시은市隱은 도회지에 살면서도 은자같이 지내는 사람.
이백李白의 시 '월하독작'月下獨酌에 "거배요명월擧杯邀明月 대영성삼인對影成三人"이라고 하여 달, 자신, 자신의 그림자가 모여 셋이 되었다는 구절이 있다.
술을 좋아하는 시객詩客이 아름다운 기녀와 대작을 하며 시로 화답하고 봄밤의 취흥을 즐기는 풍류시다.
오복수운일왈수五福誰云一曰壽
오복수운일왈수五福誰云一曰壽(오복 가운데 수壽가 으뜸이라고 누가 말했던가.)
요언다욕지여신堯言多辱知如神(오래 사는 것도 욕이라고 한 요임금 말이 귀신같네.)
구교개시귀산객舊交皆是歸山客(옛 친구들은 모두 다 황천으로 가고)
신소무단격세인新少無端隔世人(젊은이들은 낯설어 세상과 멀어졌네.)
근력쇠모성사통筋力衰耗聲似痛(근력이 다 떨어져 앓는 소리만 나오고)
위장허핍미사진胃腸虛乏味思珍(위장이 허해져 맛있는 것만 생각나네.)
내정부식간아고內情不識看兒苦(애 보기가 얼마나 괴로운 줄도 모르고 )
위아랑유포송빈謂我浪遊抱送頻(내가 그냥 논다고 아이를 자주 맡기네.)
요임금이 말하기를 “아들이 많으면 근심이 많아지고, 부귀하면 일이 많으며, 장수하면 욕된 일이 많아진다.” 고 했다.
오복五福의 첫째는 장수長壽라 하나 늙으면 버림 받고 외로워지니 요임금이 이를 알고 장수長壽는 다욕多辱이라 했던 거다.
팔십년가우사년八十年加又四年
팔십년가우사년八十年加又四年(여든 나이에다 또 네 살을 더해)
비인비귀역비선非人非鬼亦非仙(사람도 아니고 귀신도 아닌데 신선은 더욱 아닐세.)
각무근력행상궐脚無筋力行常蹶(다리에 근력이 없어 걸핏하면 넘어지고)
안핍정신좌첩면眼乏精神坐輒眠(눈에도 정기가 없어 앉았다 하면 조네.)
사려어언개망녕思慮語言皆妄靈(생각하는 것이나 말하는 것이나 모두가 망령인데)
유장일루선선기猶將一縷線線氣(한 줄기 숨소리가 목숨을 이어가네.)
비애환락총망연悲哀歡樂總茫然(희로애락 모든 감정이 아득키만 한데)
시열황정내경편時閱黃庭內景篇(이따금 황정경 내경편을 읽어보네.)
김 삿갓이 노인의 청을 받아 지은 것이다. 기력이 쇠해서 근근히 살아가면서도 도가道家의 경전을 읽으며 허무虛無에 심취한 것을 읊었다.
외연신세은관개畏鳶身勢隱冠蓋
외연신세은관개畏鳶身勢隱冠蓋(솔개 보고도 무서워할 놈이 갓 아래 숨었는데)
하인해수토조인何人咳嗽吐棗仁(누군가 기침하다가 토해낸 대추씨 같구나.)
약사매인개여차若似每人皆如此(사람마다 모두들 이렇게 작다면)
일복가생오륙인一腹可生五六人(한 배에서 대여섯 명은 나올 수 있을 테지.)
꼬마 신랑이 갓을 쓰고 다님을 조롱했다. 솔개를 무서워할 나이에 몸을 가릴 만큼 큰 갓을 썼으며, 몸집은 대추씨처럼 작은데 벌써 새신랑이 되었음을 표현했다.
가련문전별가련可憐門前別可憐
가련문전별가련可憐門前別可憐(가련의 문 앞에서 가련과 이별하려니)
가련행객우가련可憐行客尤可憐(가련한 나그네의 행색이 더욱 가련하구나.)
가련막석가련거可憐莫惜可憐去(가련아, 가련한 이 몸 떠나감을 슬퍼하지 말라.)
가련불망귀가련可憐不忘歸可憐(가련을 잊지 않고 가련에게 다시 오리니.)
객침조소몽불인客枕條蕭夢不仁
객침조소몽불인客枕條蕭夢不仁(나그네 잠자리가 너무 쓸쓸해 꿈자리도 좋지 못한데)
만천상월조오린滿天霜月照吾隣(하늘에선 차가운 달이 우리 이웃을 비추네.)
녹죽청송천고절綠竹靑松千古節(푸른 대와 푸른 솔은 천고의 절개를 자랑하고)
홍도백리편시춘紅桃白李片時春(붉은 복사꽃 흰 오얏꽃은 한 해 봄을 즐기네.)
소군옥골호지토昭君玉骨湖地土(왕소군의 고운 모습도 오랑케 땅에 묻히고)
귀비화용마외진貴妃花容馬嵬塵(양귀비의 꽃 같은 얼굴도 마외파의 티끌이 되었네)
인성본비무정물人性本非無情物(사람의 성품이 본래부터 무정치는 않으니)
막석금소해여거莫惜今宵解汝拒(오늘 밤 그대 옷자락 풀기를 아까워하지 말게나)
왕소군은 한나라 원제元帝의 궁녀. 흉노 땅에서 죽음.
마외파는 안녹산의 난이 일어났을 때 양귀비가 피난 갔다가 죽은 곳.
김 삿갓이 전라도 어느 마을을 지나다가 날이 저물어 커다란 기와집을 찾아갔다.
주인은 나오지 않고 계집종이 나와서 저녁상을 내다 주었다.
밥을 다 먹은 뒤에 안방 문을 열어보니 소복을 입은 미인이 있었는데 독수공방하는 어린 과부였다.
밤이 깊은 뒤에 김 삿갓이 안방에 들어가자 과부가 놀라 단도를 겨누었다.
김 삿갓이 한양으로 과거 보러 가는 길인데 목숨만 살려 달라고 하자 여인이운을 부르며 시를 짓게 하였다.
일보이보삼보립一步二步三步立
일보이보삼보립一步二步三步立(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가다가 서니)
산청석백간간화山靑石白間間花(산 푸르고 바윗돌 흰데 틈틈히 꽃이 피었네.)
약사화공모차경若使畵工模此景(화공으로 하여금 이 경치를 그리게 한다면)
기어림하조성하其於林下鳥聲何(숲 속의 새소리는 어떻게 하려나.)
김 삿갓에게 있어 자연은 단순히 보고 즐기는 대상이 아니었다. 방랑의 동반자요 거처가 되었으니 발길 닿은 산천경개山川景槪는 모두 그의 노래가 되었다.
화가가 아름다운 봄의 경치는 그릴 수 있겠지만 숲에서 지저귀는 새들의 울음소리는 어떻게 그려낼 수 있겠는가.
강비적벽범주객江非赤壁泛舟客
강비적벽범주객江非赤壁泛舟客(강은 적벽강이 아니지만 배를 띄웠지.)
지근신풍고주인地近新豊沽酒人(땅은 신풍에 가까워 술을 살 수 있네.)
금세영웅전항우今世英雄錢項羽(지금 세상에 영웅이 따로 있으랴, 돈이 바로 항우이고)
당시변사주소진當時辯士酒蘇秦(변사가 따로 있으랴, 술이 바로 소진이지.)
신풍新豊은 한대漢代의 현縣 이름으로 좋은 술이 나왔다고 함.
항우項羽는 유방과 함께 진나라를 멸망시킨 영웅.
소진蘇秦은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에 말 잘하던 유세객遊設客이다.
지금 김 삿갓이 놀고 있는 강은 소동파가 적벽부赤壁賦를 읊었던 그 적벽강은 아니지만 땅은 맛있는 술이 나왔던 신풍과 닮았다.
오늘날의 세상은 돈만 있으면 항우 같은 힘을 낼 수도 있고 술에 취하면 말 잘하는 소진도 될 수 있다.
길주길주불길주吉州吉州不吉州
길주길주불길주吉州吉州不吉州(길주, 길주 하지만 길하지 않은 고장.)
허가허가불허가許可許可不許可(허가, 허가 하지만 허가하는 것은 없네.)
명천명천인불명明川明川人不明(명천, 명천 하지만 사람은 밝지 못하고)
어전어전식무어漁佃漁佃食無漁(어전, 어전 하지만 밥상에는 고기 없네.)
어전은 함경도 명천군 기남면 어전리이다.
길주는 나그네를 재워주지 않는 풍속이 있어 허가가 많이 살지만 잠자도록 허가해 주지 않고, 어전漁佃은 물고기 잡고 짐승을 사냥한다는 뜻인데 이 동네 밥상에는 고기가 오르지 않음을 풍자한 시이다.
청춘포기천금개靑春抱妓千金開
청춘포기천금개靑春抱妓千金開(청춘에 기생을 안으니 천금이 초개같고)
백일당준만사공白日當樽萬事空(대낮에 술잔을 대하니 만사가 부질없네.)
홍비원천이수수鴻飛遠天易隨水(먼 하늘 날아가는 기러기는 물 따라 날기 쉽고)
접과청산난피화蝶過靑山難避花(청산을 지나가는 나비는 꽃을 피하기 어렵네.)
김 삿갓이 어느 마을을 지나가는데 젊은이들이 기생들과 놀고 있었다.
김 삿갓이 부러워하여 한자리에 끼어 술을 얻어 마신 뒤 이 시를 지어 주었다.
피좌노인불사인彼坐老人不似人
피좌노인불사인彼坐老人不似人(저기 앉은 저 노인은 사람 같지 않고)
기중칠자개위도其中七子皆爲盜(슬하의 일곱 아들은 모두 도둑놈이로다.)
하일하시강신선何日何時降神仙(어느 날, 어느 시에 신선이 내려오셨던가.)
절취천도선양친窃取天桃善養親(불로장생의 천도복숭아를 훔쳐와 잘 봉양하도다.)
김 삿갓이 북도지방을 방랑하던 어느 해, 어느 날, 어느 때였다. 어느 마을, 어느 큰 집 앞을 지나노라니 사람들이 많이 모여 떠들썩하였다.
그 집 영감의 회갑잔치가 한창이었던 거다. 김 삿갓은 그 집 마당으로 들어갔다. 사랑방에는 나이도 많은 상객층上客層이, 마루에 젊은 중객층中客層이, 멍석을 깔아놓은 마당에는 노소가 섞인 하객층下客層들이 둘러앉아 잔치음식들을 먹고 있었다.
거지처럼 행색이 초라한 김 삿갓은 서슴지 않고 마루로 가 거기 떡하니 걸터앉아 태연스럽게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러자 어느 취객醉客이
“이봐! 거지꼴에 어딜 앉아있는 거야?“
“거지는 사람이 아닌가?!”
김 삿갓은 분개하여 허리에 찬 필낭筆囊을 풀고 지필묵을 꺼내어
인도인가부대인人到人家不待人(사람이 사람의 집에 왔는데 사람대접을 안 하니)
주인인사난위인主人人事難爲人(이 집 주인의 인사가 사람답지 못하도다.)
라고 적어 사랑방으로 휙 던져 넣었다.
좌중이 글을 읽어보더니 모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혹여, 거지로 변장한 암행어사가 아닌가 싶었다.
하여, 그 집 맏아들이 공손한 말로
“손님 노여워 마시고 어서 올라오십쇼.”
하며 불러 올렸다.
김 삿갓은 아무런 말도 없이 사랑방으로 썩 들어갔다. 좌중은 동요하면서 앉았던 자리를 피해줬다.
감히 어느 한 사람도 말을 못 붙이고 잠잠해지며 어색한 공기가 방안을 감돌았다.
김 삿갓은 잘 차린 음식상을 대접받아 잘 먹고 나서는 그제야 주인 영감에게 인사를 했다.
사람이 좋은 주인영감은
“아까는 술에 취한 어느 손님이 실례를 범하였소이다. 젊은 양반이 무슨 곡절이 있는가본데 여기서 하루라도 푹 쉬시고 가십시오.”
한다.
김 삿갓이
“네. 고맙습니다.”
하자. 그 집 맏아들이
“우리 아버님이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아까의 실례를 용서하시고 수연시壽宴詩 한 수 지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하며 공손하게 청한다.
김 삿갓은 빙그레 웃으며 필낭에서 다시 지필묵을 꺼내었다.
좌중은 자리를 넓히고 종이를 펼치고 먹을 갈며 호기심으로 지켜봤다.
김 삿갓은 이윽고 쓰기 시작했다.
피좌노인불사인彼坐老人不似人(저기 앉은 저 노인은 사람 같지 않고)
기중칠자개위도其中七子皆爲盜(슬하의 일곱 아들은 모두 도둑놈이로다.)
이 것이 무슨 회갑잔치를 축하하는 수연시란 말인가. 아까도 사람을 무시하는 시를 지었기에 불쾌했지만 암행어사라도 되는가 싶어 어쩔 수 없었는데, 한 상 잘 얻어먹고도 욕설만 늘어놓으니 방약무인傍若無人한 그 태도가 불쾌하기 이를 데 없다.
원래 그 집 영감은 인심 좋고 글깨나 하는 양반인데 웬 거지같은 놈이 와서 모욕적인 짓거리를 해대니 좌중의 어느 팔팔한 노인이 보다 못해
“이런 고약한 놈이 있나. 그게 무슨 수작이냐? 당장 나가거라. 이 미친놈아”
하며 호령을 해댔다. 그 기세에 좌중이 모두 ‘죽일 놈’이라며 들고 일어났다.
김 삿갓은 태연한 태도로
“죽일 놈이건, 살릴 놈이건 쓰던 것이나 마저 써놓고 볼 일 아닙니까?”
하며 시치미를 뚝 떼고 다시 또 써내려갔다.
하일하시강신선何日何時降神仙(어느 날, 어느 시에 신선이 내려오셨던가.)
절취천도선양친窃取天桃善養親(불로장생의 천도복숭아를 훔쳐와 잘 봉양하도다.)
“아아!”
좌중에서는 감탄의 신음소리들이 터져 나왔다.
참으로 교묘한 시의 요술이었다. 이렇게 묘하고 훌륭한 수연시를 쓸 수 있는 사람이 좌중에는 없었다.
또다시 사과들을 하고, 새로운 술잔이 나오고
천재성을 자유자재로 발휘하는 시인의 심술궂은 장난으로 수연잔치는 더욱더 흥겨워져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