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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꽃쌈지,
리 태 근
작은 꽃쌈지 바람에 날리고
처녀는 남군님게 쌈지를 지어드리네
… ….
너무나도 익숙한 노래이다. 너무나도 듣기좋은 노래이다. 담배만보면 생각나는 노래, 처녀만보면 생각나는 노래, 그시절에 시집장가간 처녀총각들이 뜨거운 사랑을 고 백하는 유일한 력사의 견증자로 춘향과 리도령의 불타는 사랑의 불사조로 신성한 사랑의 정조로 아로새겨졌던 꽃삼지를 나는 영원히 잊을수없다.
아버지때와 할아버지때는 사랑을 어떻게 고백했는지 몰라도 형님과 누나들은 꽃 쌈지를 사랑의 유일한 견증자로 만들었다. 째지게 가난하던 세월에 색동비단천을 얻기란 하늘에 별따기였겠는데 칠색꽃무늬가 비낀 꽃쌈지를 정성들여 누비는 누나의 얼굴에 홍조가 비끼고 꽃쌈지를 받아않은 총각들은 가슴에 토끼라도 않은듯 심장이 울렁이게하던 작은꽃쌈지에는 한많은 사연이 엉켜있었다.
금년봄에 오십년이나 갈라졌던 형님을 만나려 조선에 갔다가 칠십고령에 오른 등곱쟁이 령감이된 형님이 장장 반세기를 보관했던 꽃쌈지를 나에게 넘겨주면서 고향 에서 아직도 형님을 기다리고있을 첯사랑 김미자에게 가져다 주라고 신신당부하는 것이였다.
김미자 와룡촌 와룡4대 입삐뚤이 김대장의 딸이였다. 형님이 꼬집는 추억을 따라서 어슴푸레 떠오르는 미자누나는 형님의 말처럼 달님햇님처럼 아름다운 녀인은 아니였지만 이목구비가 단정한 미자는 숲속에 홀로핀 개나리꽃처럼 수줍은 녀인인것만 사실이다. 온동네 사랑을 독차지 할만한 미인은 아니라는데 형님은 와룡판에는 미자만 한 춘향같은 녀인이 없었다고 끝까지 고집하는 것이였다. 두만강이 감도는 오랑캐령 넘어 아득히 뻗어간 백두산줄기에 잇대여잇는 고향 천리봉산기슭 봉밀하강반을 오십여 성산 애타게 찾는 형님의 석쉼한 목소리로 50년대에 힛트곡이였던 작은꽃쌈지 노래를 가사한자도 틀리지 않게 부르는것이였다. 작은꽃싸지 바람에 날리고…500도도 넘는 병사리굽같은 안경속에 움푹하게 패운 주름덮힌 눈가에 뜨거운 눈물이 하염없이 흐 른다…
저 눈물은 죽어도 잊지못할 첯사랑 미자만 그리워서 쾐히 흐르는게 아니였다. 조 선전쟁에서 사망한 형님의 똑똑한 소식을 알려고 찾아떠난 둘째형님까지 물우에뜬 종이배처럼 가담가담이어지던 소식이 끝내 종무소식이라 한편생 눈에 흙이들어 갈 때까지 눈을 감지못하고 저세상으로 떠나간 어머님을 잊지못해 애간장을 태우던 형 님이 동생앞에서 왕왕소리내여 흘리는 눈물에 두만강도 화답하는듯 세찬물갈기를 휘 날린다…
형님은 날마다 두만강건너 아침해 솟아오르는 오랑캐령넘어 아득한 북쪽하늘 아래 백두대간이 뻗어간 천리봉기슭 봉밀하강반의 외나무다리를 한시각도 잊은적이 없 었단다. 꿈이면 꿈마다 김미자가 항미원조 불구름이 흣날리는 전선으로 떠나는 형 님에게 꽃쌈지를 안겨주며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는 고향 봉밀하강반 외나무 다리목을 오락가락하며 소나무숲이 우거진 앞남산 혁명렬사기념비 앞에서 새하얀 옷고름 날리며 두손모아 싹싹비는 어머니의 가긍한 모습을 장장 반세기가 넘도록 한번도 잊어본적 없었다는 것이였다.
어머니와 더불어 미자가 그리워서 푸른물결 출렁이는 두만강언덕에서 오도가도 못 하는 눈물겨운 타향살이 신세를 한탄하며 보풀이일게 만지던 사랑의 견증자! 형님의 매마른 가슴에서 파랗게 살아있던 작은꽃쌈지를 오십년만에 나에게 넘겨주었다. 언 젠가는 앞가슴에 공훈메달을 번쩍이며 고향에 돌아와서 뜨거운 가슴으로 첯사랑을 힘껏않아줄 그날을 눈이헐게 기다렸을 미자에게 꽃쌈지 장본인에게 기어코 안겨 주 리라고 나를 손꼽아 기다려온 형님은 인젠 코앞도 흐리워서 보이지않는 등곱쟁이 꼬부랑 령감이 되였다.
남북조선도 평화로운 화합의길을 활짝열어놓고 판문점에서 금강산에서 그리운 혈 육들이 가슴을 털어놓고 포웅하는데 이건 씨다른 형제라고 마음대로 오고가지 못하는 영원한 이산가족을 만들줄이야. 그것도 한반도 평화를 위하여 목숨까지 서슴없이 바친 렬사가족인데도 떳떳한 공훈가속으로 떠받들리우지는 못할망정 정치운동의 풍운이 들 이닥칠때마다 <수정주의씨종자>라는 게딱지같은 사회관계가 얼굴에난 역겨운 칼자욱 상처로 점찍어놓아서 대학추천. 입당결혼 직업승급. 인생의 갈피마다 암초와 쑥대 갈대밭을 만들어 놓아서 창창한 인생을 두죽박죽 휘저어 놓았다.
조국의 안녕과 세계의 평화를 위하여 불구름이 흣날리는 보가위국 성스러운 전 쟁에 한목숨 다바친 형님을 본받아 조선의 복구건설에 한생을 다바친 둘째형님은 고향에 두고온 사랑하는 처녀에게 영원히 잊지못할 그리움을 남기고온 죄책을 않고 반세기가 넘도록 아득한 북녘하늘 우러러 어머니와 사랑하는 처녀를 잊지못해 눈이 헐었다는 칠십고령의 늙은령감이된 형님을 어머님을 생각하면 괘씸하기 그지없고 인 생의 굽이마다 암초만 만들어놓고 늙으신 부모님을 가냘픈 나의 어께우에 맏긴 두 형님을 뜯어놓고 십도록 괘씸하기 그지없지만 장장 반세기가 넘어서 부모님도 없고 미자도없는 피도 살도없는 뼈만 앙상하게 남은 현실을 바라보면서 나는 할말을 잃었다. 더구나 이미 저세상 사람이된 미자를 지급도 살아있는 첯사랑 령혼으로 간직하고 살 아온 형님을 바라보면서 갈비가 아릉거리는 형님의 앞가슴을 쥐여박으며 원망하랴 한탄하랴 책임지지못할 사랑을 배신한 형님을 끝없이 원망하노라니 갈대쑥대 흣날리는 고향마을이 새삼스레 떠오른다…
나의 아버지와 어머님은 모두 상처한 년장자들이였는데 아버지는 딸을 둘을 데 리고 어머님은 아들둘을 데리고 중년에 재혼한하였다. 대식품세월에 인민공사 <식 당노름>하는 모진세월에 어린처자 넷을 어린처자 여섯식구를 거느리는 아버지가 얼 마나 힘겨웠으면 비바람 눈보라를 헤치고 아츨한 톱틀에 올라서 죽을힘을 다해서 톱질 하고 어머님은 손에서 호미와 낫을 놓을새없이 땅을뚜지며 꿰지는 가난한 살림을 기워 보려고 무진애를 다 썼지만 가난과 재채기는 막지못한다고 배고파우는 구제비 새끼 들의 입을 달랠수가 없었다.
큰형님은 열여덥살을 넘기고서야 째지게 가난한 살림형편을 알고서 항미원조를 탄원해 나섰다. 항미원조를 가게되면 보조량과 보조부표가 나오고 세계평화의 떳떳한 공훈자가 되면 앞길이 탁 트일것이라고 굳게믿고 선뜻이 탄원해 나섰던 것이다. 열일 곱살 어린나이에 생사를 알수없는 항미원조 전선을 선택한 형님이 조선전쟁이 끝난지 오랜데도 그끝내 소식이없자 형님을 찾아온다고 달랑 목깡주머니 (그때는 뜨개실로 정답게뜬 세면도구 주머니가 성행하였음) 하나들고 집을 떠나갔다.
어머님이 칼바람에 손끝을 얼구며 북데기속에서 얻어낸 싸래기로 만든 시루떡을 배보자기에 차고서 형님이 떠나가서 돌아오지 않은 봉밀하강반 외나무다리를 건너서 앞남산 고개로 넘어갔다. 그날 어머님뒤에 처녀들속에는 꽃쌈지를 품고나선 그녀 미자 가 있었다, 포연이 흣날리는 전선으로 탄원해나선 총각을 바래면서 눈물흘리던 고개 길은 어디메냐 불같은 사랑의 맹세를 새겨놓았다는 고개길은 어디메냐
아! 세월도 무심하지 눈이 헐게 기다리던 미자가 언녕 저세상 사람이 된줄 모르고 오늘까지 작은꽃쌈지를 간직하고 있는 꼬부랑 형님을 뭐라고 위로한단 말인가
행여나 미자가 파파노친이 되였더라도 살아만 있으면 사진을 찍어서 보내련만 장장 반세기를 두고 두사람의 마음속에 절절한 그리움과 처절한 눈물로 얼룩이간 색 바랜 꽃쌈지 미자의 순결한 사랑이 고스란히 슴배여있는 력사의견증자 사랑의 유물을 나는 정중히 받아않았다.
한뜸한뜸 정성들여 누빈 바느실 자리는 새록새록 미자의 뜨거운 사랑의 숨결이 맥박치는듯 칠색무지개속에 인제야 만사시름놓고 활짝웃는 고향의 개나리 꽃이런가 수 줍은 미자의 밝은얼굴이 달님처럼 방실방실 떠오른다.
형님은 내말을 듣고서야 이미 저세상 사람이된 미자의 봉분이라도 찾아서 <사랑의 배신자>를 대표해서 술이라도 한잔 부어달라고 간청하지만 도시바람 외국바람에 산 산이 흣어져서 또다시 갈대와 쑥대가 흣날리는 고향산에서 미자의봉분을 찾을수 있 겠는지 떠도는말에 의하면 미자와 살던 정진이도 몹쓸병에 걸려서 언녕 저세상 사 람이 되였다고 하는데 당사가 원하던말던 사는게 귀찮으면 골회함도 남기지 않는 요즘 세월에 딸빢에 낳지못한데다가 남편까지 앞세운 미자산소가 있을리 만무하다는것이 불보듯 뻔한데 꽃쌈지를 않고서 일편단심 반세기를 두만강 푸른물결 굽이치는 오랑캐 령넘어 봉밀하흐르는 외나무다리를 잊지않고 미자를 그려온 형님의 가슴에 실망을 주랴 싶어서 무조건 그렇게 하겠노라고 대답하였다.
나는 중국에 돌아오자 말자 고향으로 미자찾으려 고향와룡으로 찾아갔다. 내 예 측이 틀린게 없었다. 미자도 미자와살던 정진의 자식들도 모두 외국으로 가고 없었다. 그래도 향여나하고 고향에가서 외나무다리를 찾아보니 해마다지는 큰물에 물곳이 옮겨진 봉밀하강반 그엣날 외나무다리는 간곳없고 구석돌 딩구는 강기슭에서 벅꾹새만 슬프게 울어댄다.
그래도 형님이 간절한 소원인데 미자가 살았다는 옛집이래도 찾아보자고 큰물에 씼기워서 여기저기 널려있는 게딱지같은 초가집들속에서 눈에익은 고향집터라도 찾 아보는데 낮설은 울바자와 정문에 색바랜 붉은주련을 여기저기 나붙어있었다. 여기살던 아무개는 어딜갔는가고 물었더니 네가 언제 여기서 살기나 했느냐하고 의아한 눈길로 쳐다보는 그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대답이 <부지도!>(不知道 )란다.
강산은 변한게 없는데 주인은 언녕 변했는가봐 우리형제들이 동년에 헝것뽈차던 학교마당에 멧대지 울음소리 넘쳐나서 이게 또 웬일이냐 물어보았더니 향진이 합병 하면서 형님과 미자 그리고 나를 졸업시킨 소학교가 멧대지 사양장으로 변했단다. 그 옛날 총칼들고 목숨바치며 일떠세운 향정부가 않았던 자리에 애급의 금자탑마냥 기독 교 예수십가가 하늘찌르고 꽃꽃이 솟아있는 내고향에서 형님이 그리는 미자와 고향 사람들의 따뜻한 인적기란 어디서도 더는 찾아 볼수없었다.
고향은 변했다. 형님을 바래던 고향의 앞남산에 옹기종기 모여않은 산소에는 그 옛날에 흔하게 반짝이던 개똥불도 지쳤는지 간곳없고 끼여끼여 한숨쉬는 깨까치 목 이맨 울음소리가 처량하기 그지없다. 빛바랜 혁명렬사 기념비에는 이빨빠진 톱날마냥 색바랜 이름우에 거미줄이 쳤는데 비바람에 그슬린 소나무밭에 잡초가 우거져서 들쥐 들이 락원이 되였다.
그래도 항미원조를 떠날때 큰형님이 마지막으로 비장한 눈길로 쓸어보던 혁명렬사 비석은 고향을 바라보며 운명하던 형님의눈에 어머님의 새벽안개를 헤치고 기념비를 찾아와서 제상을 차려놓고 형님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며 갈구리같은 손으로 비석을 어루쓸어 만지는 어머니모습을 마지막으로 새겨넎었을 혁명렬사 기념비는 쓴웃음을 지으며 안하무인양 무뚝뚝하게 바라만 보고있었다. 형님의 덕분에 같은 동년배들 중 에서 선두적으로 공천단원에 입대하는 영광을 지녔다. 공천단원에 입단하던날 황홀한 공산주의꿈을 않고 렬사기념비 앞에서 붉은넥타이를 매면서 공산주의 실현을 위하여 끝까지 싸우겠다고 다짐했건만 금방다진 맹세장이 마르기도전에 전레없는 문화대 혁 명이 터지자 <수정주의 새끼>라고 납작하게 투쟁받을 줄이야…
소선대원, 공청단원에 함께들었던 동년배들이 렬사기념비 앞에서 혁명렬사들의 피어린 력사를 영원히 잊지않고 공산주의 실현을 위하여 끝까지 싸우겠다고 맹세하던 일이 어제같은데 그리운 친구들은 다 어딜갔는지 억새풀이 무성한 혁명렬사 기념비 주위에는 아름들이 소나무들이 그옛날을 불러오는지 초가을 찬바람에 끝없이 설레인다.
스산한 가을하늘 아래 잠자리가 외롭게 날아예고 어디선가 새끼잃은 까투리 목 마 른 울음소리 애처롭게 들린다. 갈꽃이 흣날리는 비석거리에서 나는 형님의 언젠가 꼭 고향의 앞남산에서 가슴터지게 불러보고 십다던 작은꽃쌈지 노래를 조용히 불러본다 이시각 푸른물결 굽이치는 두만강 강가에서 눈물젖은 두만강 노래를 부르고 있을 꼬부 랑 령감을 그려보며 미자가 생전에 하얗게 부르던 목마르게 부르던 노래를 부른다….
작은 꽃쌈지 바람에 날리고
누나는 남군님게 쌈지를 지어드리네
누나는 남군님게 쌈지를 지어드리네 … …
2008년 6월5일 조선에 다녀온날을 기념하여
첫댓글 등곱쟁이..병사리굽 같은 안경....표현 너무 좋으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