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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늘 여행을 떠나기 전과 후로 나누어 매우 달라진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여행은 늘 그렇게 새로운 깨우침을 주었다.
4박5일의 제주 여행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태양은 여행기간 내내 스페인표였다.
얼마나 쾌청하고 강렬하게 내리쬐는지, 그 맑은 하늘과 태양과 바람이 나를 황홀하게 만들었다.
일도 했다. 제주도 테니스계의 영향력있는 인사들을 만나 취재도 하고 올레길도 걷고
가파도를 걷고 테니스도 하고 결국에는 한라산 백록담까지 성공적으로 등반을 했으니
이보다 더 좋을수가 없었다. 특히 공기좋은 곳에서 머물다 오니 감기가 뚝, 떨어졌다.
5일분 약을 지어갔는데 단 한봉지도 먹지 않았다. 해풍만 쏘이면 나는 만사형통이다. 몸에서 좋아라한다.
첫날,
아주 오래전부터 알았던 김승익씨가 공항으로 우리를 픽업하러 왔다.
50세부 베테랑에서 랭킹 1,2위 하시던 분이다. 그 당시 나 또한 국화부에서 랭킹 1,2위 했고
같은 그린스타에서 함께 운동을 한 멤버로 아주 오랫만에 뵙는 분인데 매우 친절하게 공항까지
마중나와 주셨다. 그분은 매우 개성이 독특한 분이다.
스스로 자신에 대해 자존감이 강하다고나 할까? 아무튼 다른 동호인과는 다르다. 그 분은 아마
얼추 나이가 65세는 되지 않았을까?
미리 예약한 자동차를 랜트해서 흑돼지집으로 갔다. 그 곳에서는 김승익씨와 함께 운동하는 클럽의
신회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도착하자마자 그 곳에서 대접을 받았다. 뜻밖의 귀인대접을 받으니
어리둥절해졌다. 다음날 클럽취재를 하겠다는 말씀을 드리고 헤어졌다.
우리가 묵어야 할 곳은 제주 공항에서 15분 정도 가야하는 외곽의 애월항 근처다.
첫날부터 술 석잔 마신 이유로 대리운전을 불러야했다. 이제는 여행 첫머리에 왜 자제를
해야 하는지 잘 안다. 여행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적당한 절제가 필수다.
마지막날까지 꿋꿋하게 버티기 위해서는 체력을 아껴야 하기 때문에 유선생은 맥주를,
나는 한라산 소주를 석잔씩만 마셨다.
밤 열시가 넘어가는 시간임에도 88세의 할머니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선물을 드리고 재워온 불고기를 드렸다.잘 걷지 못하셨으나 매우 영민하셨다.
공기가 좋으니 첫 밤, 방에서 약간 시골스런 팡이 냄세가 풍겨도 숙면을 할 수 있었다.
달콤한 해풍에 내 코와 목이 좋아라 환호성을 했다.
2일째,
일찍 얼어났다. 불고기를 구어 할머니께 밥상을 차려드렸다. 할머니는 잘 삼키지 못했다.
대충 식사를 마치고 곧바로 7번 올레길로 갔다. 그곳이 가장 아름답다고 소문이 난 코스다.
해변을 걷는 코스, 아름다운 풍광, 나를 유혹하는 바닷바람, 이보다 더 좋을순 없는 상태다.
무념무상, 모든 시름, 서러움을 다 날려버릴 판이다. 4월 대회준비하면서, 처음으로 시작한
재능기부하면서 속을 태웠던 어려움들이 씻겨나갈 판이다.
가만히 나 자신을 들여다보는 시간, 내 자신에 대한 탐구..
친구와 여행할때는 일부러 체면치레 말이 필요가 없다.
우리는 거의 하나처럼 서로에 대한 믿음과 신뢰, 눈빛 하나면 모든것이 통한다.
참으로 값진 시간이다. 말없이 파도소리를 들으며 해변을 걸었다. 누가 만든 올레길인지
자신을 성찰하며 침묵하며 걷기에 너무나 알맞은 코스였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나?
갑판포구에서 박노군씨가 기다리고 있노라고 전화가 왔다. 비행기표 구해주신 분이다.
두시간도 채 걷지 못했는데 그 이상은 별반 재미없는 코스라고
6번의 멋진 코스로 이동하면 된다며 일단 먼저 테니스를 하자고 제안했다.
거부할 수가 없었다. 빚을 졌으니 포구에서 차로 이동해
6번 올레길을 따라 서귀포 칼 호텔을 지나서 아름다운 테니스장으로 이동했다.
정말 그 테니스장은 6번 올레길 옆에 있는 숲속 테니스장인데..
서 있기만 해도 저절로 몸이 맑아지는듯한 느낌이 들었다. 맑은 공기와 아름다운 풍경들,
찬란한 태양, 너무 축복받는 시간이었다.
경찰서장이라는 분은 별반 실력이 출중하지 못했다. 친구와 내가 일방적인 승리로 게임은
더이상 신경쓸 필요없이 간단하게 승리를 했다. 서울에이스 왔다고 병원장 사모님도 와서
관전하고 기어코 한 게임 하겠다고 하셨지만 나는 빠지고 유선생이 대신 끝까지 게임을 마무리했다.
그 이후 우리는 자리돔물회가 유명하다는 곳으로 이동했다.
그야말로 생전 처음 먹어보는 맛이다. 고소하고 담백했다.박노군씨가 샀다. 그분과 나는 20년도
더 넘는 세월동안 알아온, 아주 오래된 인연이다. 내 남편또한 마찬가지였고..
식사를 마치고 차를 마시는데 해변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너무 오싹하니 추웠다.
박노군씨는 최근에 장암 수술을 하고나서 회복기라고 했다. 그토록 건강관리를 열심히
하시는 분도 나이 60이 넘으니, 어쩔수 없는 일이었나보다.
나는 충분히 바쁜 스케쥴에 비행기표 구해준 것에 감사를 표했다. 선물에 대해 무척이나
맘에 들어하는 모습을 보니 더욱 더 괜찮은 기분이 되었다.
우리는 서귀포에서 차를 돌려 제주시로 향했다. 중앙중학교 옆에 있는 연미코트로 가서
클럽 탐방과 제주도 테니스 연합회를 동시에 취재하기 위해서다. 제주도는 내가 생각했던것 보다
더 훨씬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국제대회, 전국대회를 개최한다는것을 알게 되었다.
동문클럽 회원들도 모두 다 환영했다. 그곳에서 세게임을 연속했다. 나이드셨지만 김승익씨는
여전히 자신감 넘치는 공을 치고 있었다. 연달아 세게임을 모두 다 이기자 모두들 깜짝 놀라는
눈치였다. 나이든 아줌마치고는 공을 제법 친다고 여겼는지...
제주도는 아직 나정도의 국화부 선수는 없었다는것이 놀람의 이유였다.
그날밤, 우리는 매우 특별한 저녁을 먹었다. 다음에 제주에 가면 꼭 다시 먹고 싶은 메뉴다.
메뉴 선정을 해 달라는 요청에 가볍게 야채에 곁들여 먹을 간단한 저녁을 먹고싶다고 했더니
산채 비빔밥집으로 데려갔다.
버섯의 향기와 야채가 잘 어울어져 어찌나 맛있던지, 그정도의 프로 정신을 가지고
음식장사를 한다면 누군들 성공하지 않을까 싶었다. 동문클럽 회원이 운영하는 음식점이라는데
정말 인상깊은 밤이었다. 김승익씨가 저녁을 샀다.
제주의 밤공기는 유별나다. 마음에 풍선을 달게한다. 훨훨 날게 할 만큼 몸을 가볍게 하고 맛이있다.
우리는 창문을 열고 흥얼거리며 유쾌하게 집으로 향했다. 들어오면서 할머니 드실 부드러운 빵하고
음료수하고 이것저것 준비해서 가져왔다. 할머니가 행복해 했다.
셋째날,
조금 방황을 한 날이다. 청보리가 황보리가 되었다는 소리를 듣고 가파도행을 추자도행으로 바꿔
가기로 하고 제주항으로 갔다. 예약제도가 정착이 되어 있었는지 들어가는 배표는 있어도 나오는
배표가 없었다. 9시반 배를 타고 가면 오후 4시반 배를 타고 나오는 일정인데 표가 없으니
그곳에서 하루를 유해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다음날 새벽 일찍 한라산을 가야하는 계획인데 그곳에서 잠을 자고 열한시 첫 배를 타고 나와야
한다니 다시 모슬포로 할수없이 이동을 해야했다. 항구에는 마라도가는 사람들과 가파도 가는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엄청 줄을 많이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11새 배를 타고
15분정도 가니 가파도가 나왔다. 말그대로 모슬포서 빌린 돈은 가파도 되고 마라도 되는
섬중의 하나다. 그곳은 초록 물결이 춤을 추는 청보리가 아니라 진짜 황보리 천지였다.
때란 이렇게 중요하다. 4월말이나 5월초가 가파도에 여행의 적기임을 알았다.
우리는 바닷길을 따라 만들어진 10-1 올레길을 걸었다. 해풍이 부드러웠다.
유선생은 성게와 말미잘들을 무겁게 끌고 가는 해녀의 짐을 대신 끌어 준다고 용을 쓰다가
전복시키기도 했다. 거의 5백미터를 해녀 대신 짐꾼이 되어 끌어주었다.
착한 심성이 거기서도 그대로 나온다. 해녀들을 가까이 보면 얼굴이 검다못해
숯처럼 갈라졌다. 삶의 녹녹지 않은 애환이 스며들어 있다.
걷는다는 것, 예전에는 그 의미를 잘 몰랐다. 요즘은 걷는다는 것은 매우 내 자신과 친해질 수 있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말없이 걷는것에 심취하게 되었다. 내 자신을 비우고
욕심을 비우는 행위중의 하나다. 바람과 태양과 한없이 맑은 하늘, 모든것이 우리 여행을 축복해
주고 있었다. 점심으로 보말 칼국수를 먹었다. 성게 칼국수도 먹었는데 유자 막걸리는 파이였다.
싱겁고 맛이 없었으나 고소한 보말칼국수 맛은 명품으로 명물이 될 만한 가파도 음식이었다.
배를 타고 나와 송악산 둘레길을 걸었다. 제주에서 가장 아름다운 코스라고 한다.
오똑 솟은 산방산을 계속 바라보며 바닷길을 걸었다. 용머리까지 차로 이동하면서 주변의
아름다운 풍광에 녹아들었다. 우리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멋지고 행복한 사람으로 되어갔다.
저녁은 우리 둘이 오붓하게 애월항에서 먹었다. 지인이 소개해 준 화성식당에서 자연산 회를 시켯다.
3만원에 회 20여점과 매운탕이 나왔다. 맛이 각별했다. 왜 그분이 그 횟집을 가라했는지 알만했다.
소주와 맥주 한병을 둘이서 나눠먹었다. 다음날 긴 산행을 해야하니 몸에 무리를 하면 더욱더
고달파 질것 같아서 술을 자제했다. 할머니 드실 것을 농협에서 샀다.
네째날, 부처님 오신날 드뎌 한라산을 가는 날이다. 새벽에 일어나 할머니께서 지어주신 아침밥을
든든하게 먹고 출발했다. 성판악에서 왕복 19.6킬로다. 중간 진달래고지까지 오후 한시넘어
도착하면 정상에 못 오르게 막는다고 했다. 안개가 짙어서 매우 위험하기 때문에 오두 두시 반이면
백록담에서 다 내려와야하니..참으로 가슴이 답답한 일이었다. 유선생 온라인 친구 허니바람이
우리를 안내하기 위해 나왔다. 제주출신의 건강한 젊은 여성,39세, 나비처럼 훨훨 날라 올라갔다.
우리는 수도없이 쉬며 걸었다. 그때까지도 산철죽을 엄청 기대했었는데 막상 철죽군락지에
도착을 해 보니 아쉽게도 딱, 두 그루의 철죽꽃만 피어있었다. 사람들은 부처님 오신날이라고
모두다 관음사쪽으로 산행을 하는지 우리쪽은 그리 붐비지 않아서 천만다행이었다.
해발 1700고지를 넘어서자 점점 나무들이 키가 작아지더니 돌과 작은 들풀들만 자생을 했다.
아프리카 여행때 갔던 킬리만자로가 생각났다.
그때 우리들은 해발 1900에서 시작해서 해발 2700고지까지 걸었는데
비가 얼마나 내렸는지 우비를 입고 정말 고생고생을 했는데 그때는그렇게 다리가 아프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이 된다. 공기는 서리가 내리는 것처럼 매우 차거운 바람이 불고 산안개도
가끔씩 덥쳤다.
하지만 태양이 찬란해서 더없이 행복한 산행이 되었는데 드디어 고지, 1950 백록담에 도착했다.
해낸다는것은 바로 이런 기분일 것이다. 힘든만큼 보람과 만족감은 매우컸다.
날이 가문 탓인지 생각보다 백록담에 고인 물은 많지 않았다.
우리나라 3대 영산인 최고봉에 올라 마음속 염원들을 풀어냈다. 간절한 기도를 곁들여서...
자식들, 그리고 일구월심 하나를 키우기 위해 애쓰시는 분, 나를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는 친구의
건강을 기원했다. 백록담의 물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흐를듯 젖은 옷을 최정상 고지에서 갈아 입었다.
고슬소슬한 몸에 엷은 안개가 스치고 지나간 후 따사로운 햇살을 받고 앉아 있자니 저절로
"아! 행복해! 아, 행복해!!!"가 나도 모르게 나왔다.
웬 까마귀가 그리도 많았는지...우리들은 싸온 먹거리들을 던져주었다.
까마귀들은 사람들을 경계하지 않고 가까이에서 친근하게 음식들을 잘도 먹었다.
.......
삶은 늘 여행을 떠나기 전과 후로 나누어 매우 달라진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여행은 늘 그렇게 새로운 깨우침을 주었다.
4박5일의 제주 여행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태양은 여행기간 내내 스페인표였다.
얼마나 쾌청하고 강렬하게 내리쬐는지, 그 맑은 하늘과 태양과 바람이 나를 황홀하게 만들었다.
일도 했다. 제주도 테니스계의 영향력있는 인사들을 만나 취재도 하고 올레길도 걷고
가파도를 걷고 테니스도 하고 결국에는 한라산 백록담까지 성공적으로 등반을 했으니
이보다 더 좋을수가 없었다. 특히 공기좋은 곳에서 머물다 오니 감기가 뚝, 떨어졌다.
5일분 약을 지어갔는데 단 한봉지도 먹지 않았다. 해풍만 쏘이면 나는 만사형통이다. 몸에서 좋아라한다.
첫날,
아주 오래전부터 알았던 김승익씨가 공항으로 우리를 픽업하러 왔다.
50세부 베테랑에서 랭킹 1,2위 하시던 분이다. 그 당시 나 또한 국화부에서 랭킹 1,2위 했고
같은 그린스타에서 함께 운동을 한 멤버로 아주 오랫만에 뵙는 분인데 매우 친절하게 공항까지
마중나와 주셨다. 그분은 매우 개성이 독특한 분이다.
스스로 자신에 대해 자존감이 강하다고나 할까? 아무튼 다른 동호인과는 다르다. 그 분은 아마
얼추 나이가 65세는 되지 않았을까?
미리 예약한 자동차를 랜트해서 흑돼지집으로 갔다. 그 곳에서는 김승익씨와 함께 운동하는 클럽의
신회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도착하자마자 그 곳에서 대접을 받았다. 뜻밖의 귀인대접을 받으니
어리둥절해졌다. 다음날 클럽취재를 하겠다는 말씀을 드리고 헤어졌다.
우리가 묵어야 할 곳은 제주 공항에서 15분 정도 가야하는 외곽의 애월항 근처다.
첫날부터 술 석잔 마신 이유로 대리운전을 불러야했다. 이제는 여행 첫머리에 왜 자제를
해야 하는지 잘 안다. 여행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적당한 절제가 필수다.
마지막날까지 꿋꿋하게 버티기 위해서는 체력을 아껴야 하기 때문에 유선생은 맥주를,
나는 한라산 소주를 석잔씩만 마셨다.
밤 열시가 넘어가는 시간임에도 88세의 할머니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선물을 드리고 재워온 불고기를 드렸다.잘 걷지 못하셨으나 매우 영민하셨다.
공기가 좋으니 첫 밤, 방에서 약간 시골스런 팡이 냄세가 풍겨도 숙면을 할 수 있었다.
달콤한 해풍에 내 코와 목이 좋아라 환호성을 했다.
2일째,
일찍 얼어났다. 불고기를 구어 할머니께 밥상을 차려드렸다. 할머니는 잘 삼키지 못했다.
대충 식사를 마치고 곧바로 7번 올레길로 갔다. 그곳이 가장 아름답다고 소문이 난 코스다.
해변을 걷는 코스, 아름다운 풍광, 나를 유혹하는 바닷바람, 이보다 더 좋을순 없는 상태다.
무념무상, 모든 시름, 서러움을 다 날려버릴 판이다. 4월 대회준비하면서, 처음으로 시작한
재능기부하면서 속을 태웠던 어려움들이 씻겨나갈 판이다.
가만히 나 자신을 들여다보는 시간, 내 자신에 대한 탐구..
친구와 여행할때는 일부러 체면치레 말이 필요가 없다.
우리는 거의 하나처럼 서로에 대한 믿음과 신뢰, 눈빛 하나면 모든것이 통한다.
참으로 값진 시간이다. 말없이 파도소리를 들으며 해변을 걸었다. 누가 만든 올레길인지
자신을 성찰하며 침묵하며 걷기에 너무나 알맞은 코스였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나?
갑판포구에서 박노군씨가 기다리고 있노라고 전화가 왔다. 비행기표 구해주신 분이다.
두시간도 채 걷지 못했는데 그 이상은 별반 재미없는 코스라고
6번의 멋진 코스로 이동하면 된다며 일단 먼저 테니스를 하자고 제안했다.
거부할 수가 없었다. 빚을 졌으니 포구에서 차로 이동해
6번 올레길을 따라 서귀포 칼 호텔을 지나서 아름다운 테니스장으로 이동했다.
정말 그 테니스장은 6번 올레길 옆에 있는 숲속 테니스장인데..
서 있기만 해도 저절로 몸이 맑아지는듯한 느낌이 들었다. 맑은 공기와 아름다운 풍경들,
찬란한 태양, 너무 축복받는 시간이었다.
경찰서장이라는 분은 별반 실력이 출중하지 못했다. 친구와 내가 일방적인 승리로 게임은
더이상 신경쓸 필요없이 간단하게 승리를 했다. 서울에이스 왔다고 병원장 사모님도 와서
관전하고 기어코 한 게임 하겠다고 하셨지만 나는 빠지고 유선생이 대신 끝까지 게임을 마무리했다.
그 이후 우리는 자리돔물회가 유명하다는 곳으로 이동했다.
그야말로 생전 처음 먹어보는 맛이다. 고소하고 담백했다.박노군씨가 샀다. 그분과 나는 20년도
더 넘는 세월동안 알아온, 아주 오래된 인연이다. 내 남편또한 마찬가지였고..
식사를 마치고 차를 마시는데 해변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너무 오싹하니 추웠다.
박노군씨는 최근에 장암 수술을 하고나서 회복기라고 했다. 그토록 건강관리를 열심히
하시는 분도 나이 60이 넘으니, 어쩔수 없는 일이었나보다.
나는 충분히 바쁜 스케쥴에 비행기표 구해준 것에 감사를 표했다. 선물에 대해 무척이나
맘에 들어하는 모습을 보니 더욱 더 괜찮은 기분이 되었다.
우리는 서귀포에서 차를 돌려 제주시로 향했다. 중앙중학교 옆에 있는 연미코트로 가서
클럽 탐방과 제주도 테니스 연합회를 동시에 취재하기 위해서다. 제주도는 내가 생각했던것 보다
더 훨씬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국제대회, 전국대회를 개최한다는것을 알게 되었다.
동문클럽 회원들도 모두 다 환영했다. 그곳에서 세게임을 연속했다. 나이드셨지만 김승익씨는
여전히 자신감 넘치는 공을 치고 있었다. 연달아 세게임을 모두 다 이기자 모두들 깜짝 놀라는
눈치였다. 나이든 아줌마치고는 공을 제법 친다고 여겼는지...
제주도는 아직 나정도의 국화부 선수는 없었다는것이 놀람의 이유였다.
그날밤, 우리는 매우 특별한 저녁을 먹었다. 다음에 제주에 가면 꼭 다시 먹고 싶은 메뉴다.
메뉴 선정을 해 달라는 요청에 가볍게 야채에 곁들여 먹을 간단한 저녁을 먹고싶다고 했더니
산채 비빔밥집으로 데려갔다.
버섯의 향기와 야채가 잘 어울어져 어찌나 맛있던지, 그정도의 프로 정신을 가지고
음식장사를 한다면 누군들 성공하지 않을까 싶었다. 동문클럽 회원이 운영하는 음식점이라는데
정말 인상깊은 밤이었다. 김승익씨가 저녁을 샀다.
제주의 밤공기는 유별나다. 마음에 풍선을 달게한다. 훨훨 날게 할 만큼 몸을 가볍게 하고 맛이있다.
우리는 창문을 열고 흥얼거리며 유쾌하게 집으로 향했다. 들어오면서 할머니 드실 부드러운 빵하고
음료수하고 이것저것 준비해서 가져왔다. 할머니가 행복해 했다.
셋째날,
조금 방황을 한 날이다. 청보리가 황보리가 되었다는 소리를 듣고 가파도행을 추자도행으로 바꿔
가기로 하고 제주항으로 갔다. 예약제도가 정착이 되어 있었는지 들어가는 배표는 있어도 나오는
배표가 없었다. 9시반 배를 타고 가면 오후 4시반 배를 타고 나오는 일정인데 표가 없으니
그곳에서 하루를 유해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다음날 새벽 일찍 한라산을 가야하는 계획인데 그곳에서 잠을 자고 열한시 첫 배를 타고 나와야
한다니 다시 모슬포로 할수없이 이동을 해야했다. 항구에는 마라도가는 사람들과 가파도 가는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엄청 줄을 많이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11새 배를 타고
15분정도 가니 가파도가 나왔다. 말그대로 모슬포서 빌린 돈은 가파도 되고 마라도 되는
섬중의 하나다. 그곳은 초록 물결이 춤을 추는 청보리가 아니라 진짜 황보리 천지였다.
때란 이렇게 중요하다. 4월말이나 5월초가 가파도에 여행의 적기임을 알았다.
우리는 바닷길을 따라 만들어진 10-1 올레길을 걸었다. 해풍이 부드러웠다.
유선생은 성게와 말미잘들을 무겁게 끌고 가는 해녀의 짐을 대신 끌어 준다고 용을 쓰다가
전복시키기도 했다. 거의 5백미터를 해녀 대신 짐꾼이 되어 끌어주었다.
착한 심성이 거기서도 그대로 나온다. 해녀들을 가까이 보면 얼굴이 검다못해
숯처럼 갈라졌다. 삶의 녹녹지 않은 애환이 스며들어 있다.
걷는다는 것, 예전에는 그 의미를 잘 몰랐다. 요즘은 걷는다는 것은 매우 내 자신과 친해질 수 있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말없이 걷는것에 심취하게 되었다. 내 자신을 비우고
욕심을 비우는 행위중의 하나다. 바람과 태양과 한없이 맑은 하늘, 모든것이 우리 여행을 축복해
주고 있었다. 점심으로 보말 칼국수를 먹었다. 성게 칼국수도 먹었는데 유자 막걸리는 파이였다.
싱겁고 맛이 없었으나 고소한 보말칼국수 맛은 명품으로 명물이 될 만한 가파도 음식이었다.
배를 타고 나와 송악산 둘레길을 걸었다. 제주에서 가장 아름다운 코스라고 한다.
오똑 솟은 산방산을 계속 바라보며 바닷길을 걸었다. 용머리까지 차로 이동하면서 주변의
아름다운 풍광에 녹아들었다. 우리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멋지고 행복한 사람으로 되어갔다.
저녁은 우리 둘이 오붓하게 애월항에서 먹었다. 지인이 소개해 준 화성식당에서 자연산 회를 시켯다.
3만원에 회 20여점과 매운탕이 나왔다. 맛이 각별했다. 왜 그분이 그 횟집을 가라했는지 알만했다.
소주와 맥주 한병을 둘이서 나눠먹었다. 다음날 긴 산행을 해야하니 몸에 무리를 하면 더욱더
고달파 질것 같아서 술을 자제했다. 할머니 드실 것을 농협에서 샀다.
네째날, 부처님 오신날 드뎌 한라산을 가는 날이다. 새벽에 일어나 할머니께서 지어주신 아침밥을
든든하게 먹고 출발했다. 성판악에서 왕복 19.6킬로다. 중간 진달래고지까지 오후 한시넘어
도착하면 정상에 못 오르게 막는다고 했다. 안개가 짙어서 매우 위험하기 때문에 오두 두시 반이면
백록담에서 다 내려와야하니..참으로 가슴이 답답한 일이었다. 유선생 온라인 친구 허니바람이
우리를 안내하기 위해 나왔다. 제주출신의 건강한 젊은 여성,39세, 나비처럼 훨훨 날라 올라갔다.
우리는 수도없이 쉬며 걸었다. 그때까지도 산철죽을 엄청 기대했었는데 막상 철죽군락지에
도착을 해 보니 아쉽게도 딱, 두 그루의 철죽꽃만 피어있었다. 사람들은 부처님 오신날이라고
모두다 관음사쪽으로 산행을 하는지 우리쪽은 그리 붐비지 않아서 천만다행이었다.
해발 1700고지를 넘어서자 점점 나무들이 키가 작아지더니 돌과 작은 들풀들만 자생을 했다.
아프리카 여행때 갔던 킬리만자로가 생각났다.
그때 우리들은 해발 1900에서 시작해서 해발 2700고지까지 걸었는데
비가 얼마나 내렸는지 우비를 입고 정말 고생고생을 했는데 그때는그렇게 다리가 아프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이 된다. 공기는 서리가 내리는 것처럼 매우 차거운 바람이 불고 산안개도
가끔씩 덥쳤다.
하지만 태양이 찬란해서 더없이 행복한 산행이 되었는데 드디어 고지, 1950 백록담에 도착했다.
해낸다는것은 바로 이런 기분일 것이다. 힘든만큼 보람과 만족감은 매우컸다.
날이 가문 탓인지 생각보다 백록담에 고인 물은 많지 않았다.
우리나라 3대 영산인 최고봉에 올라 마음속 염원들을 풀어냈다. 간절한 기도를 곁들여서...
자식들, 그리고 일구월심 하나를 키우기 위해 애쓰시는 분, 나를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는 친구의
건강을 기원했다. 백록담의 물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흐를듯 젖은 옷을 최정상 고지에서 갈아 입었다.
고슬소슬한 몸에 엷은 안개가 스치고 지나간 후 따사로운 햇살을 받고 앉아 있자니 저절로
"아! 행복해! 아, 행복해!!!"가 나도 모르게 나왔다.
웬 까마귀가 그리도 많았는지...우리들은 싸온 먹거리들을 던져주었다.
까마귀들은 사람들을 경계하지 않고 가까이에서 친근하게 음식들을 잘도 먹었다.
.......
첫댓글 행복한 여행기록입니다.
부럽습니다..
부러우면 진다는데 확실히 졌습니다.
양팔들고 항복이요,,,
복춘아 반갑다. 여행기 다 읽어 보았니? 내가 생각해도 너무 잘 살고 있는 거 같아. 일단은 자유롭고 근심 걱정이 없으니까.
재미나게 잘 읽어보았답니다.
고모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