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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제5복음서의 중심지 갈릴리
임 태 수 박사
(호서대명예교수/제2종교개혁연구소 소장)
이스라엘에서 20년 이상을 살면서 성지를 연구한 픽스너(Bargil Pixner)라는 수도사는 <제5복음서에 따른 갈릴리의 예수>(With Jesus through Galilee according to the fifth Gospel)라는 책을 썼다. 여기서 말하는 제5복음서란 성지 즉 이스라엘 땅을 의미한다. 제5복음서 가운데서도 예수와 가장 밀접한 관계를 가진 곳이 갈릴리 지역이다.
1. 예수 당시의 배 발견
1986년 갈릴리 해변에서 고대의 배 한 척이 발견되었다. 이 배는 이 지방에 2년간이나 계속된 가뭄 덕택에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이 배가 발견되었을 때 이 일을 축하라도 하듯이 쌍무지개가 갈릴리 호수에 떴다고 한다. 배의 크기는 길이 8.2m, 폭 2.3m이다. 건축기법과 탄소실험결과를 종합분석한 다음 학자들은 이 배의 연대를 기원전 1년으로부터 기원후 1년으로 추정하고 있다. 연대로 보아 예수 당시의 배임이 분명하다. 이 배는 어쩌면 예수와 제자들이 탔을 수도 있는 배이다. 아니면 최소한 그들이 탄 배와 같은 종류의 배일 것이라는 점에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이 배는 현재 기노사르 키부츠의 이갈 알론 센터(The Yigal Allon Centre, Kibutz Ginosar)에 보관되어 있다.
우리는 기노사르에서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 건너편에 있는 엔게브 키브츠로 향하였다. 우리 일행이 배에 올라타자 선장은 태극기를 게양한다. 한국관광객이 많이 오니까 이렇게 태극기까지 준비한 모양이다. 조금 전 이갈 알론 센터에서 나누어 준 자료도 한글로 되어 있었다. 한국 애국가 카셋트가 필요하다고 해서 보내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귀국한 즉시 하나를 사서 보내 주었다. 이 배의 선장 이름은 베드로였다. 베드로처럼 검은 구레나루 수염을 기르고 옛날 유대인들이 입었던 하얀 통옷을 입었다. 그림에 나오는 베드로의 모습을 연상케 했다. 정말로 이름이 베드로인가 물어보았더니 본 이름은 네나드 마르야노비치(Nenad Marjanovic)라고 했다. 3년 전에 유고에서 이곳으로 온 유대인이었다.
이 배의 이름도 <예수의 배>(The Jesus Boat)였다. 그리고 선수(船首)에는 갈릴리의 예수라는 제목 하에 예수가 활동한 지역을 표시한 갈릴리 호수 주변의 그림도 비치해 놓았다. 유대인의 뛰어난 상술에 놀랐다. 그에게 예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더니 예수는 랍비였다고 간단히 대답한다. 자기는 예수를 구세주로 믿지 않으면서도 이곳을 찾는 기독교인들로부터 돈을 벌기 위하여 이러한 상술을 발휘한 것이다. 그는 갈릴리 바다에서 잡은 작은 조개껍질로 만든 십자가도 배 안에서 팔고 있었다. 조잡하고 값도 너무 비싸서 아무도 사지 않았다.
우리는 호수 건너편에 있는 엔게브 키부츠 식당에 도착해서 점심을 먹었다. 구운 베드로 고기가 반찬으로 나왔다. 한국의 붕어와 모양이 비슷했다. 약 20Cm정도 크기의 고기였는데 고소하고 맛이 있었다. 엔게브 안내자의 설명에 의하면 이른바 베드로 고기는 태래(tilapia)魚科에 속한 민물고기로서 5종류가 있다고 하는데 우리가 먹은 것이 어떤 종류의 것이었는지는 물어보지 못했다. 사실 이 고기도 본래 베드로와는 상관이 없는 고기인데 장사를 위해서 베드로라는 이름을 붙인 것일 것이다.
2. 가버나움에서 발견된 베드로의 집
가버나움은 예수선교의 중심지로서 교통이 발달한 곳이었다. 이 곳에서 일어난 일은 순식간에 온 갈릴리와 데가볼리, 그리고 온 사마리아와 유다 지방에 퍼져 나갔다. 예수의 소문이 삽시간에 팔레스타인 전역에 퍼질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교통요지인 가버나음의 덕택이기도 하였다. 예수는 가버나움에서 베드로의 장모를 고친 것을 비롯하여 많은 병자들을 고치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많은 기적을 경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가버나움과 고라신과 벳새다가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자 예수는 이 마을들을 저주하였다. 이 세 마을은 이미 1300여 년 전부터 폐허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가버나움은 베드로의 고향이었다(마 17:25). 예수는 자주 이곳을 방문하였을 뿐만 아니라 한 때는 이곳에서 살기도 하였다(마 4:13). 그래서 복음서는 가버나움을 예수의 고향으로 묘사하고 있다(마 9:1; 막 2:1).
가버나움은 1865년부터 발굴되기 시작하여 1985년까지 수 차례에 걸쳐 발굴되었다. 그 결과 유대교 회당과 베드로의 집터 등이 발견되었다. 고고학자들은 처음에 회당 유적지를 발견하고 이 회당이 눅 7:5에서 말하는 로마 백부장이 건축한 회당이라고 생각했으나, 다시 정밀조사한 결과 이 회당은 주후 4-5세기의 것으로 판명되었다. 하얀 석회석으로 지어진 이 회당은 매우 아름다웠을 것이라고 학자들은 말한다. 후에 이 회당 기초석 밑에서 예수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현무암으로 된 기초석을 발견하였다. 또 이 회당에서 법궤모양이 새겨진 커다란 돌덩이도 발굴하였다. 우리는 일부 복원되어 있는 회당 안으로 들어갔다. 기둥들이 줄을 지어 서 있고 양쪽 벽에는 돌로 된 의자가 이층으로 복원되어 있었다. 나는 오른 쪽 벽 의자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예수가 이 곳에서 가르치시고 병자들을 고치신 일 등을 잠깐 묵상하였다.
가버나움 발굴에서 특히 세계 기독교인들의 주목을 끈 것은 1968년에 발굴된 베드로의 집터였다. 이 집이 바로 예수가 베드로와 함께 살았던 집이었을 것이라고 학자들은 추측한다. 출토된 벽면 부스러기에서 예수 베드로 등의 이름이 발견되었다. 이 베드로의 집은 이미 사도시대에 가정교회로 개조되었으며 이 가정교회에서 십자가를 비롯하여 100여 개가 넘는 유대계 기독교인들의 여러 가지 상징물들이 발견되었다. 이 베드로의 집은 4세기에 다시 한번 개조된 다음 5세기 후반에 8각형의 교회를 건축하기 위하여 헐리고 말았다. 주후 638년에 이슬람교도들이 이 지역에 침략해 와서 정착한 다음 유대교 회당과 교회는 아랍인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 방치된 후 파괴된 채 오늘에 이른 것이다. 지금은 가톨릭교회가 지은 8각형의 교회가 베드로의 집터 위에 서 있다. 2000년 전의 베드로의 집터가 폐허이기는 하지만 그대로 남아 있다니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3. 팔복교회에서 들려오는 예수의 음성
예수께서 산에 올라가 팔복을 포함한 산상수훈을 말씀하신 장소를 기념하기 위하여 지은 팔복교회가 갈릴리 호수 북쪽에 자리 잡고 있다. 산이라기보다는 작은 언덕이라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갈릴리 호수가 해저 200m인데, 버스를 타고 팔복교회를 향하면서 <해발 0>이라는 표지판을 보고 조금 올라가서 팔복교회에 이르렀으니, 갈릴리 호수로부터 200m 조금 넘는 높이에 있는 작은 언덕이다. 이 언덕을 에레모스 언덕(Eremos heights)라고 부른다. 봄철에는 이 언덕에 붉은 아네모네(Anemones), 파란 붓꽃(Iris) 등이 아름답게 핀다고 한다. 이런 꽃들을 보고 예수가 들의 백합화의 영광이 솔로몬의 모든 영광보다도 더 아름답다고 하였을 것이다.
팔복교회는 이 곳에서 팔복을 말씀했다는 기독교 전통에 따라 1938년에 이탈리아의 건축가 안토니오 발루치(A. Barluzzi)가 건축한 것이다. 작지만 아담한 아름다운 교회다. 현재 가톨릭 수녀들이 관리하고 있다. 학자에 따라서는 현재의 팔복교회에서 약 500m 정도 호수 쪽으로 내려간 장소, 즉 예수가 기도했다는 에레모스 동굴 옆에 비잔틴 시대의 산상수훈 기념교회 터가 있는데 이 장소를 팔복설교 장소로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느 장소가 예수님이 팔복을 말씀하신 장소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이곳이든 저곳이든 이 근방에서 예수님이 산상수훈을 설교하셨을 것이란 사실이다. 나는 이곳에서 그 예수님의 체취를 느끼고 싶었다.
우리는 교회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둥근 돔 밑에 라틴어로 팔복을 새겨놓은 8개의 색유리창을 통해서 들어오는 은은한 빛으로 교회내부는 부드럽고 따뜻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우리는 의자에 앉았다. 안내하는 고세진 박사가 마태복음 5장을 읽었다. 지금부터 2000여 년 전 바로 이 곳에서 예수님이 저 말씀을 하셨다고 생각하니 고 박사의 낭독하는 음성이 마치 예수님이 직접 말씀하시는 말씀처럼 들렸다. 한국에서 수 없이 많이 듣고 읽었던 산상수훈과는 전혀 다른 느낌을 주었다. 이러한 느낌은 현장을 직접 방문하지 않고서는 맛볼 수 없을 것이다. 내가 팔복교회에서 산상수훈을 들으면서 느낀 것은 산상수훈은 믿음의 철저한 실천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산상수훈과 예수의 교훈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실천이 도외시 된 값싼 은혜가 아닌가?
나는 교회 한 가운데에 있는 작은 제단 앞으로 나아가 무릎을 꿇고 ,주님의 말씀을 내 자신이 먼저 실천할 수 있는 제자가 될 수 있게 하시고, 이 말씀을 제대로 가르치는 제자가 될 수 있게 해 주십시오하고 기도드렸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4. 교회의 반석이 된 가이사랴 빌립보의 고백
우리는 이스라엘이 1967년 6일 전쟁 때 시리아로부터 빼앗은 골란고원을 지나 가이사랴 빌립보로 향했다. 골란고원은 구약시대에는 바산이라고 불리운 곳으로 토지가 비옥해서 살찐 소가 유명했다(암 4:1). 골란고원에 들어서서 탈무드시대의 마을인 카쓰린(Qazrin) 유적을 잠깐 둘러 본 다음 시리아와의 비무장지대를 오른 쪽에 끼고 가다가 베케라트 람이라는 드루즈(Druze) 족의 마을에 도착하였다. 드루즈 족은 소수민족으로서 자기가 속한 나라에 충성하는 민족이라고 한다. 소수민족이 살아남기 위한 지혜가 아닌가 생각되었다. 그렇게도 뜨겁던 날씨가 여기 오니 선선했다. 지도를 보니 1220m 정도 되는 고지대다. 우리는 여기에서 지름이 40Cm나 되는 드루즈 족의 전통빵을 맛보았다. 버스가 지나가는 산골짜기 양옆으로 약 5-7Km에 이르는 넓은 과수원이 계속되었다. 땅이 비옥해 보였다. 우리는 드디어 가이사야 빌립보에 도착했다. 여기에서 갈릴리 호수는 40여 Km정도 멀리 떨어져 있다.
입구에서 판 신전(The Shrine of god Pan)이라는 간판이 우리를 맞는다. 가이사랴 빌립보의 현재 지명은 바니아스(Banias)다. 파니아스(Panias)의 아랍식 발음이다. 파니아스란 이름은 헤롯 대왕이 판(Pan) 신을 위하여 세운 화려한 대리석 신전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이 신전은 매우 아름다웠다고 한다. 헤롯 대왕의 아들 빌립(Philip)이 이 도시를 크게 확장하고 로마 황제 즉 가이사랴 아구스도(Caesar Augustus)에게 바친 데서 가이사랴란 이름이 생겨났다. 그 이후에 다른 가이사랴와 구별하기 위하여 가이사랴 빌립보라고 불리우게 되었다. 이곳에는 판 신전의 잔해들과 신들을 안치했던 바위에 판 벽감들(nichs)의 흔적만 남아 있을 뿐 예수와 관련된 흔적은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이와 같이 아무런 볼거리도 없는 가이사랴 빌립보에 기독교인들이 몰려오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가 제자들과 함께 이곳에 오셔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질문하자,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한 그 고백 때문이다(마 16:13-20). 우리는 이 역사적인 장소에서 함께 머리숙여 이 베드로의 고백을 우리의 고백으로 다시 한번 확인하는 기도를 드렸다.
티베리아스 숙소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이 베드로의 고백과 관련하여 동승한 신약학 교수들 간에 즉석 토론이 벌어졌다. 어떤 교수는 베드로의 고백을 들은 예수가 베드로에게 사단아 물러가라(막 8:33)고 말한 것은 자기가 그리스도임을 거부한 비그리스도 선언 것이라고 해석했다. 또 다른 한 교수는 예수의 그 말씀은 예수가 정치적, 군사적 메시야임을 거부하고, 다시 말하면 영광의 그리스도임을 거부하고 수난의 그리스도임을 선언한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이 두 교수의 해석은 가이사랴 빌립보의 해석을 둘러싼 논쟁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두 해석을 대변하는 것이다. 이 두 해석 가운데서 우리는 어떤 해석을 받아들이고 있으며 어떤 고백을 하고 있는가?
오늘날까지도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는 예수의 질문은 계속되고 있다. 오늘날도 예수를 더러는 엘리야, 더러는 예언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예수를 메시야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자리에서 인간의 차원으로 끌어내리려는 시도들이 오늘날 그 어느 때 보다도 강하게 시도되고 있다. 그러나 기독교 2000년사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고백 위에 서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 고백이 없는 곳에는 교회도 존립할 수 없고 참다운 의미의 기독교인도 있을 수 없다.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예수에 대한 가이사랴 빌립보의 고백이 나의 고백이 되고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되기를 기도하면서 귀로의 발걸음을 재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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