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열광함에 관하여
극단 동 <재현100년展>
가끔 눈물이 웃음보다 생에 더욱 필요하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지나온 기억을 더듬어보면 분명 축가(祝歌)보다는 애가(哀歌)를 부른 기억이 우리의 마른뼛속에 더 깊이 새겨져 있곤 하다. 세상에 슬픔이 존재하는 것은 빛이 있는 곳에 당연히 그림자가 드리우는 것과 원리임에도 불구하고 대개의 사람들은 그것들을 숨겨버린 채, 혹은 숨기기를 강요당한 채 반듯하고 단정한 얼굴로 살아가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렇게 고요한 얼굴로 거리를 지나쳐버리다가도 문득 우리는, 무엇인가와 피할 수 없는 싸움을 시작해야 할 때가 있다. 용서받을 수 없는 욕망, 열병처럼 속내를 파고드는 공허함, 새끼를 빼앗긴 짐승에게나 올법한 상실감, 뱃속에서 끓어오르는 막을 수 없는 열정, 그래서 결국엔 버릴 수도 없고 가질 수도 없는 당신 그리고 나. 생의 애가(哀歌)는 도무지 끝이 나지 않는다. 핏방울이 사방으로 튀기고 숨이 턱에 찬다. 그러나 헉헉거리며 남아있는 마지막 펀치를 날리는 순간 우리는 깨닫는다. 그림자야말로 바로 삶을 깨어나게 하는 섬광이었음을. 실은 슬픔이야말로 삶을 열광하게 만드는 아귀와도 같은 존재였음을.
<재현100년展>. 얼핏 들어서는 어떤 작품인지 알 수 없는 제목이다. 극단 동의 ‘현대연극의 출발점을 되돌아보다 시리즈’중 첫 번째 작품으로, 현대극의 기초를 마련한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의 대표적인 작품을 되돌아봄으로써 우리 연극의 현재를 확인하고, 나아가 더 나은 방향을 모색하려는 목적으로 기획된 이 연극은<테레즈라캥>과 <유령>의 두 작품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동안 대학로 연극들이 상업화되었다고들 하지만 사실은 굉장히 많은 실험들이 그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었잖아요. 저희 극단도 계속해서 저희 스타일에 맞는 연극을 하려고 하고 또 찾으려고 애를 써왔었는데.. 그런 시도를 하다가 보니까 현대 연극이 어떤 뿌리를 갖고 있는지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보고 어떤 식으로든 무대 위에서 찾아보고 하는 식의 작업이 필요하지 않나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현대 연극의 출발점이 되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거장들의 연극들을 되돌아보자는 것이 바로 <재현100년展>이에요. ‘재현’이라는 것은 ‘어떤 것을 그대로 묘사하는 것’이잖아요. 그런데 19세기 이전까지 재현이 ‘정신’. 그러니까 ‘속에 있는 어떤 것’을 묘사하는 것이었다면 19세기에 들어오면서 과학적인 생각과 사고 속에서 흥미라는 것이 정신적인 것 뿐 아니라 ‘겉에 있는 것’에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았죠. 이를테면 신경계 계통이라든지……. 그래서 그것을 그대로 묘사하는 일이 시작되었죠. 이것이 연극에 얼마나 획기적인 것이었는가 하면 ‘무대에 삶에서 일어나는 일을 그대로 올려놓는다.’ 그러기 위해선 계속해서 진짜가 되려는 노력을 해야 하잖아요.그러다보니 무대가 지금처럼 날것의 일상생활을 그대로 보여줄 수도 있는 것이 되었고.
아예 그 순간을 진짜로 살아버리는 것인 ‘퍼포먼스’같은 것도 나오게 되었죠.
에밀졸라는 앙뜨완느라고 하는 프랑스 사실주의 연극 연출가에게 굉장히 많은 것을 주었어요. 그가 사실주의 연극의 시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그리고 또 사실주의 연극을 정확하게 무대에 형식화시켰다고 평가가 되는 입센의 작품을 통해서 ‘재현’이라고 하는 것의 현재적 의미를 담아보자는 것이죠.“
- 연출가 강량원
테레즈 라캥, 구역질나는 것 속에서 문득 스치는 정신
테레즈: 난 다시 옛날로 돌아갈 수 없어요.
내 몸이 차갑게 식으면 그때 당신을 놓아주겠어요.
나는 사람의 성격이 아니라 기질을 연구하기를 원했다. 나는 자유의지를 박탈당하고 육체의 필연에 의해 자신의 행위를 이끌어가는, 신경과 피에 극단적으로 지배받는 인물들을 선택했다. 테레즈와 로랑은 인간이라는 동물들이다. 그 이상은 아무것도 없다. 나는 이들의 동물성 속에서 열정의 어렴풋한 작용을 ,본능의 충동을, 신경질적인 위기에 뒤따르는 돌발적인 두뇌의 혼란을 조금씩 좇아가보려고 노력했다. 그들에게 영혼은 완벽하게 부재한다. 나는 그것을 시인한다. -에밀 졸라 <테레즈라캥>제2판 서문에서
프랑스의 대표적인 자연주의 소설가인 에밀 졸라, 철저하게 인간을 동물로 바라보고 육체에 지배받는 인간을 해부해보려는 그의 노력의 산물인 테레즈와 로랑. 그들은 오로지 서로의 육체적인 욕망을 채우기 위해 테레즈의 남편 까미유를 살해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 욕망을 채우지 못하고 결국 서로에 다시 죽음을‘선물’한다. 그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이야기 내내 행해지는 냄새나는 해부의 과정 가운데 문득 스치는 ‘정신’이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테레즈와 로랑은 그들이 저지른 일로 인해 결국 다른 인간이 되었다. 주어진 현실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던 테레즈는 운명을 거역하고 스스로 결말을 선택할 수 있는 여자가 되어갔고, 먹고 마시며 색을 탐하는 것 외에 다른 것을 알지 못하던 로랑은 감당할 수 없는 죄를 저지를 이후 저 역시도 알 수 없는 삶에 관한 형형색색의 다층적인 감정을 가진 인간이 되어간다. 어떤 형태로든 그들의 ‘동물적’인 죄는 그들을 ‘인간답게’ 했다는 아이러니가 성립하고야 마는 것이다. 그래서 극단 동이 보여주는 이번<테레즈라캥>에서는 관객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어쩌면 남루하며 때로 구역질나는 그것이 바로 그들을 인간답게 하게 한 것이 아닐까? 라는…….
유령, 선택 앞에서 울다
헬레나: 아까 애들을 통해 제가 본 것은 유령이었어요.
우리들 모두에게 유령이 달라붙어 있어요.
아버지 어머니로부터 유전된,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 가치들, 사상들, 도덕들이 유령이에요.
<유령>은 입센이 환경과 유전이 인간의 운명을 결정짓는 두 요소라고 한 에밀 졸라의 영향을 받아 쓴 대표적인 자연주의 작품이다.<인형의 집>의 연작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작품의 주인공 헬레나는 가정에 계속 남아있도록 설득당한 노라로 가정과 사회의 관습이 낳은 희생자다. 헬레나는 죽은 남편의 방탕한 행실을 감추기 위해 계속해서 자선사업을 추진해왔다. 그러나 아들 오스왈드가 아버지로부터 성병을 물려받았음을 고백하고 그녀는 괴로워한다. 아들을 희망 없는 불치명자로 계속 살게 해야 할까, 아니면 그의 뜻대로 죽을 허락해 주어야 할까. 햇살은 여지없이 선명하게 떠오르고 그녀는 선택 앞에서 눈물을 흘린다.
유령은 지금 우리 삶을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모든 고정관념들. 우리를 붙잡고 있는 그 모든 것들을 의미한다. 그러나 과연, 인간이 그런 모든 유령과 존재를 의심해야한다. 그리고 또한 의심을 의심해야만 한다. 그래야만이 선택 앞에서 흘리는 눈물이 부끄럽지 않을 것이다. 자유롭기 위해서 자유를 의심해야하는 것이 인간이다. 살아남기 위해서 우리는 세상이 강요한 사상을 수학공식처럼 풀어 내리지만 그 답은 오직, 각자만이 알 수 있는 것이다.
고통은 살아있는 자의 특권
무대위에서 재현하는 인간. 그것은 과연 지금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모두-관객과 배우-에게 무대는 재현인 동시에 실재이다. 그러나 무대와 관객사이에는 거리가 있다. 관객은 그저 남들이 질펀하게 치고받는 모습을 지켜볼 뿐이다. 그러나 ‘지켜볼 뿐이야’라고 끝날 수 없다. 그들은 핸드폰을 껐다! 다른 세계와의 단절이다. 관객은 무대의 ‘재현’속에서‘실재’를 느끼고자 한다. 그들이 존재해야 할 이유를 찾고자 한다. 그래서 이 시간과 공간을 지나가면 그들은 이전과 다른 사람이 되어 나가고자 한다. 그러나 매 순간을 ‘재현’하기 위해선 깨어있는 ‘실재’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래서 우리는 그림자와 눈물에 열광한다. 살아있는 자만이 고통을 느낄 수 있기에 삶이란, 매순간 열광하는 자에게만 그의 얼굴을 내보이기에.
한국연극2008[1].02호.hw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