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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保閑齋)신숙주. 범옹(泛翁) 신숙주 申叔舟
보물 제613호 신숙주 초상화 (15세기작)
신숙주(申叔舟, 1417년 8월 2일 (음력 6월 20일) ~ 1475년 7월 23일 (음력 6월 21일)는
조선 전기의 성리학자·문신·정치가이며 언어학자, 외교관이다.
본관은 고령(高靈), 자(字)는 범옹(泛翁), 호는 희현당(希賢堂) 또는 보한재(保閑齋)이다.
시호는 문충(文忠)문충이며 신장(申檣)의 아들이자 윤회의 손녀사위이기도 하다.
1438년(세종 20년) 생원,진사시에 모두 합격하고 1439년(세종 21년) 친시문과(親試文科)에 급제하여
세종 때 집현전의 학사로서 성삼문, 박팽년, 정인지 등과 함께 훈민정음의 창제와 연구에 기여하였다.
그는 이두, 중국어, 일본어, 몽골어, 여진어에 두루 능통하였으며,
이들 언어를 비교 분석하고 조선인의 발음과 비교 분석하여
훈민정음 창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기도 했다.
1447년(세종 29년) 문과 중시(重試)에 4등으로 합격하여 당상관이 되었으며,
이후 계유정난과 세조 반정을 적극 지지하였고,
세조의 최측근으로 활약했다.
1456년 병조판서로 재직 중 다도해를 침략한 왜구를 소탕하였고,
1460년 강원 함길도 도체찰사(江原咸吉道都體察使)로서 모련위(毛憐衛) 여진족을 토벌하였다.
그는 문신의 신분이었으나 병력을 이끌고 여진족과 왜구 토벌에 여러번 출정하였다.
1461년부터 1464년, 1471년부터 1475년까지 의정부영의정을 역임했다.
사육신과 함께 세종의 유언을 받들어 단종을 보필하기로 약속했으나 변절하여
수양대군(세조로 즉위)의 편에 가담하여 후일 사림파 도학자들로부터 비판과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단종 복위 운동 실패 후 단종과 금성대군의 처형을 강력히 주장하여 관철시켰으며,
남이의 옥사 때 남이의 처형에도 적극 참여하여,
사후 사림파 도학자들에 의해 격하, 단죄되었다.
1910년(융희 4년) 이후 그의 한글 창제에 대한 공적 재조명 여론이 나타났으며,
1980년대 이후부터 그에 대한 재평가 노력이 진행되어 복권되었다.
뛰어난 학식과 글재주로 6대 왕을 섬겼고,
'국조오례의', '고려사', '고려사절요', '국조보감', '동국정운' 등의 편찬에도 참여하였으며,
농업과 축산업 기술에 대한 서적인 '농산축목서'를 편저하였다.
생전에 정난공신, 좌익공신, 익대공신, 좌리공신 등 4번 공신에 책록되었으며.
연산군의 생모인 성종의 폐비 윤씨는 그의 5촌 조카딸로,
그의 사촌 여동생 군부인 신씨의 딸이었다.
사육신과 생육신 김시습, 그 밖에 한명회, 권람 등 다양한 인맥을 형성한 인물이기도 하다.
역사학자 단재 신채호는 신숙주의 18대손이다.
윤회(尹淮), 정인지(鄭麟趾)의 문인이다.
생애 초반 출생과 가계
1417년(태종 17년) 음력 6월 20일 희현당 신숙주는 고령신씨 신포시의 손자이며
공조 참판을 지낸 신장(申檣)의 아들로
그의 외가가 있던 전라남도 나주군 노안면 금안리 오룡동 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나주 정씨는 지성주군사(知成州郡事)를 지낸 정유(鄭有)의 딸이다.
위로 형 신맹주(申孟舟), 신중주(申仲舟)가 있었고,
아래로 동생인 신송주(申松舟)·신말주(申末舟)가 태어났다.
또한 폐비 윤씨의 친정어머니인 부부인 신씨는 신숙주의 삼촌 신평(申枰)의 딸로,
신숙주는 연산군에게는 외외재종조부가 된다.
그의 조상들은 본래 경상북도 고령현(高靈縣)의 향리였으나
신숙주의 7대조가 되는 신성용(申成用)이 처음으로 과거 시험에 합격하여
중앙 정계에 진출 벼슬이 검교 군기감(檢校軍器監)에 이르렀다.
증조부 신덕린(申德隣)은 전의 판서(典儀判書)를 지냈고,
할아버지 신포시는 공조참의를 지냈다.
형제가 아들 다섯이 있는데.
신맹주(申孟舟)·신중주(申仲舟)·신숙주(申叔舟)·신송주(申松舟)·신말주(申末舟)였다.
아버지가 관료생활을 하게 됨에 따라 고향 나주를 떠나 본가인 한성부로 이주하게 되었다.
아버지 신장은 글씨를 잘 썼는데 숭례문의 현판 글씨 중 하나는 그의 글씨체라는 설도 전한다,
동생 신말주의 손자 신공섭은 조선후기의 유명한 화가 신윤복의 선조로,
신윤복은 신숙주의 종손 신공섭의 서자 신수진의 7대손이었다.
한편 일제 강점기의 역사학자 단재 신채호는 그의 직계 18대 손이 된다.
어린 시절 아버지 신장은 남에게 맞서기를 싫어하는 온화한 성품의 문인이었다.
왕조실록의 졸기에 의하면 "사람됨이 온후하고 공순하여 남에게 거슬리지 아니하였다.
사장(詞章)에 능하고 초서와 예서를 잘 썼다.
성품이 술을 좋아하므로, 임금이 그 재주를 아껴서 술을 삼가도록 친히 명하였으나,
능히 스스로 금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는 아버지 신장으로부터 학문과 글씨를 배웠는데,
어려서부터 글재주에 뛰어났다.
뒤에 윤회(尹淮)와 정인지(鄭麟趾)의 문인이 되어 그로부터 학문을 배웠다.
청소년기 첫 스승인 윤회는 하륜과 정도전의 문인으로,
그를 통해 이색과 백이정, 안향의 학통을 사사하였다.
뒤에 그는 스승 윤회의 손녀사위가 되는데,
신숙주는 윤회의 아들인 영의정부사(贈領議政府事) 윤경연(尹景淵)의 딸 무송윤씨를 아내로 맞는다.
뒤이어 정인지의 문하에서도 수학했는데 그를 통해 정몽주의 학문도 계승하였다.
1438년(세종 20년) 21세의 나이에 시(詩)와 부(賦)로 생원시에 입격하여 생원이 되었다가
그해의 진사시에도 모두 합격하여 바로 진사가 되었다.
그 뒤 초시(初試)에 장원한 뒤, 복시(覆試)에도 장원하였다.
@관료 생활.
1439년(세종 21년) 친시문과(親試文科)에 3등으로 급제하여 전농시직장이 되었다.
이후 집현전 부수찬을 시작으로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에 이르는 6대의 임금을 섬겼다.
그는 초시와 복시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과거에도 병과로 급제하여 세종대왕의 눈에 들어.
그해에 전농시직장(典農寺直長)이 되었다가
이조(吏曹)에서 그를 성균관 문묘에 제례를 올릴 때 제집사(祭執事)로 특별히 임명하였다.
@집현전 학사와 한글 창제
1441년 다시 집현전 부수찬(集賢殿副修讚)이 되었다.
그 뒤 입직할 때마다 장서각에 파묻혀서 귀중한 서책들을 읽었으며,
자청하여 숙직을 도맡아 하였다.
숙직이 없더라도 장서각에 있으면서 밤새도록 독서를 하였다.
윤회, 정인지의 훈도 외에도 다양한 독서 덕택에 경사와 고전에 두루 능통하였고 역사 지식이 해박하였다.
관료 초반.그는 집현전에서 주로 활동했는데
이때 세종대왕의 명을 받아 훈민정음 정리 작업에 참여했다.
이 과정에서 명나라 한림학사 황찬의 도움을 얻기 위해 성삼문과 함께 13 차례나 요동에 다녀오기도 했는데,
당대 최고의 언어학자였던 황찬이 그의 뛰어난 이해력에 감탄할 정도로 대단히 총명한 인물이었다.
또한 집현전 내에 새로운 우리 언문 연구를 찬성, 적극지지하였다.
새로운 언어 연구를 찬성하는 편에는 신숙주와 그의 스승의 한사람인 정인지, 신숙주의 동료 친구인
성삼문, 정창손, 박팽년 등이 적극 참여하였다.
그는 집현전 장서각에 들어가서 평소에 보지 못한 책을 열심히 읽고
동료를 대신하여 숙직하면서까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새벽까지 공부하기가 일쑤였다.
숙직이 아닌 때에도 장서각에 파묻혀서 귀중한 서책들을 읽느라 밤을 샜다고 한다.
이러한 학문에 대한 열성이 세종에게까지 알려졌으며,
세종은 그가 열심히 공부하는 것을 발견하고 어의(御衣)를 하사하여 칭찬했다.
하루는 책을 읽다가 잠이 든 그를 발견하고 왕이 직접 자신의 옷과 포의, 이불을 내렸다 한다.
새벽에 깨어나 자신의 몸에 용포가 덮혀진 것에 깊이 감동한 그는 오래도록 감읍하였다 한다.
1442년(세종 24) 훈련원 주부(訓練院主簿)가 되었다.
이때 일본에 통신사를 보내게 되어 글 잘하는 선비를 서장관(書狀官)으로 삼기로 하였는데,
신숙주가 이에 뽑혔다.
집현전 학사로서 언어에 능해 중국어, 일본어를 비롯한 몽골어, 여진어, 유구어(琉球語) 등
동아시아 8개 국어에 신숙주가 능통했기 때문이다.
그 무렵 신숙주는 과로로 오랫동안 병을 앓다가 병이 나아 일어난 직후였다.
형제나 친구들이 여의고 피곤한 몸으로 어찌 먼 곳을 가려느냐고 한사코 말렸으나.
그는 자청해서 가겠다고 하였다.
“신하된 사람에게는 평안 할때나 험한 고난이 닥쳐도 한 가지일터
어찌 제 몸이 편안할 것만을 생각할 수 있겠는가? ”
1443년 2월 21일에 부사직(副司直)이던 그는 다시 훈련원 주부에 임명되어
조선 통신사 변효문(卞孝文)의 서장관 겸 종사관(書狀官兼從事官)으로 선발,
통신사가 파견되자 일본에 건너가서 우리의 학문과 문화를 과시하고,
언어와 한자, 유학을 가르쳤다.
일본을 여행할 때 그의 재주를 듣고 시를 써 달라는 사람이 마구 몰려들었는데,
즉석에서 붓을 들고 시를 줄줄 내려써서 주니 모두들 감탄하였다.
10월 19일까지 9개월간 일본에 다녀와서,
당시의 견문록(見聞錄)과 일본의 인명·지명 등을 한자음으로 기록하였다.
이 기록을 통해 후에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가 1471년(성종 2)에 완성되었다.
특히 이 책의 ‘조빙응접기’ 항에서는 일본 사신의 응대법에 대하여 상세히 규정하여
국가행사에 차질이 없도록 하였다.
그들의 제도·풍속, 각지 영주들의 강약 등을 기록하고.
돌아오는 길에 대마도에 들러서 무역 협정을 체결하니,
이는 돌아오는 길에 대마도 도주와 세견선(歲遣船)을 50척,
세사미두(歲賜米豆)를 200섬으로 제한하는 내용의 무역협정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이 곧 계해조약이다.
1443년 10월 배편으로 인천항을 통해 귀환했다.
귀국 이후 성삼문, 박팽년, 정인지 등과 함께 세종대왕의 명을 받아 문자 개발 연구에 착수한다.
집현전수찬을 지내면서 그는 세종대왕의 뜻을 받들어 훈민정음 창제와 연구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어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할 때 참여하여 가장 공이 컸는데.
당시 그는 세종대왕의 명으로 성균관 주부인 성삼문, 행 사용(行司勇) 손수산(孫壽山) 등과 함께
명나라의 한림학사 황찬(黃瓚)를 찾아가게 된다.
때마침 명나라 한림학사 황찬이 죄를 짓고 당시 만주의 요동으로 귀양와 있다는 소식을 접한
신숙주는 성삼문 등과 함께 요동에 가 명나라의 언어학자 황찬을 기적적으로 만나게 되어
음운론과 인간의 발음,
언어에 대한 주요한 지식을 얻었다.
이후 신숙주는 13번이나 요동을 왕래하면서 황찬을 찾아가 음운과 어휘에 관한 것을 의논하였다.
그는 이두는 물론 중국어·일본어·몽골어·여진어를 두루 구사하며 훈민정음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이들 언어와 조선인의 발음과 비교 분석하여 유사점과 차이점을 가려냈다.
1446년 안견이 안평대군의 꿈이야기를 듣고 몽유도원도를 그리자 이에 대한 찬시를 써서 헌정했다.
그는 천부적인 재능으로 세종대왕이 기획했던 말글정책을 충실히 보필하였으며,
세종대왕이 1443년(세종 25)에 창제한 훈민정음의 해설서 집필에 참여하여
다른 일곱 학자와 함께 1446년(세종 28) 9월에 훈민정음해례본 편찬을 완료하였다.
1447년(세종 29년) 집현전 부응교(副應敎)가 되었다가 그 해,
문과 중시(重試)에 4등으로 합격하여 통훈대부로 승진하고 집현전 응교(應敎)에 임명되었다.
이후 이어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집의(執義)를 지냈으며 겸경연시강관과 춘추관수찬관을 겸임하였고,
세자시강원필선(弼善)도 겸임하여 세자를 보도하였으며 직제학과 부제학 등을 두루 역임한다.
그는 또한 《동국정운》의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1448년부터는 세자시강원필선 자격으로 세자인 문종의 대리청정에도 참여하였다.
1451년(문종 1년) 명나라 사신 예겸 등이 조선에 당도하자 왕명으로 성삼문과 함께
시짓기에 나서 동방거벽(東方巨擘, 동방에서 가장 학식이 뛰어난 사람)이라는 찬사를 얻기도 했다.
이 해에 사헌부 장령, 집의를 거쳐 직제학이 되었다.
해동제국기 일본국쓰시마섬도1445년(세종 27년)에는 권제,
정인지, 안지 등이 지어 올린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의 내용을 다른 학자들과 함께
1447년(세종 29)까지에 걸쳐 보완하였다.[4] 이 외에도
우리나라의 전승된 한자음을 정리하여 표준 한자음을 만들려는 목적에서 편찬한 『동국정운』이
1447년(세종 29년)에 6권으로 완성시키고 1448년(세종 30년) 출간하였다.[4]
한명회,
그의 설득으로 신숙주는 수양대군의 편에 서게 된다.
평소 인간관계가 넓었던 그는 한명회, 권람 등과도 만나서 친분관계를 쌓았다.
당시 한명회는 개국공신의 손자였으나 경덕궁직이라는 낮은 직위에 있었고,
권람은 일찍 부모를 잃고 불우한 처지에 있었지만,
우연한 기회에 이들이 새로운 웅지를 품고 있음을 간파하고는 이들을 더욱 각별하게 대한다.
집현전직제학을 거쳐 1452년(문종 2년) 사헌부집의가 되었다가,
그해부터 집현전 직제학 지제교 경연 시독관 겸 지승문원사
(通訓大夫行集賢殿直提學知製敎經筵侍讀官兼知承文院事)로 춘추관기주관을 겸하여
《세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세종실록》은 2년만인 1454년(단종 2년) 3월에 완성한다.
세조가 즉위하기 전인 1452년(문종 2년)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간 일이 있는데,
이때 신숙주는 서장관(書狀官)으로 따라갔었다.
한명회와 권람의 조언에 따라 그는 서장관으로 수양대군을 수행하면서 그와 깊은 유대를 맺었다.
이후 세조가 즉위한 후로는 언제나 침실에까지 불러 들여 의논하였으며,
공신(功臣)의 호를 내리고 고령군(高靈君)의 작위에 봉군하였다.
단종이 즉위하자 수양대군은 사은사가 되어 명나라로 떠나는데 이 때 신숙주가 동행했다.
당시 수양대군은 중국의 고명에 답하기 위해 사은사를 자청했는데,
신숙주는 이때 서장관으로 그를 수행했다.
수양대군 일행은 공식적인 업무가 끝나자 도성인 연경(현재의 베이징)으로부터 다소 떨어져 있는
명나라 성조 영락제의 장릉(長陵)을 찾아간다.
이듬해 4월 조선에 돌아온 뒤부터 둘 사이는 급격히 가까워졌고,
결국 수양의 거사에 신숙주는 간접 지원의 형태로 가담하게 되었다.
1453년초 귀국, 상호군(上護軍) 겸 지병조사(知兵曹事)가 되었다.
@계유정난과 세조 반정
1453년 3월 승정원동부승지가 되었다.
그해 10월 수양대군이 한명회, 권람 등과 계유정난의 거사를 모의할 때 참여하여
어린 단종의 뒤에서 실력을 행사하는 김종서, 황보인 등을 제거하는데 동참한다.
이때 그는 수양대군에게 건의하여 집현전 학사들을 포섭할 것을 건의한다.
성삼문, 박팽년, 성승 등은 수양대군을 못마땅히 여겼으나
그의 회유와 권고로 정난공신의 지위를 일단 수용한다.
그해 10월 우승지를 거쳐 계유정난이 성공하고 집현전의 학사들까지 포섭하여
반발을 무마시킨 공로로 그는 수충협책정난공신(輸忠協策靖難功臣) 1등관에 오르고
이듬해 승정원도승지로 승진했다.
신숙주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승정원도승지의 위치에 있으면서 단종의 일거수일투족을 면밀하게 감시,
관찰하여 세조에게 보고했다.
반정 직후 그는 유언비어를 일소하는 한편,
어린 왕의 치세기간 중 일부 권신들과 재상들이
어린 왕의 눈과 귀를 가리고 정사를 마음대로 독단적으로 행사하였으며
민심이 바로 전달되는 것을 차단하였다며 민생을 위한 정책을 펼칠 것을 선언,
흉흉해진 민심을 수습하였다.
@사육신과 결별
사육신으로부터 세조 3부자 처형 거사에 동참할 것을 요청받았으나 그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한명회나 권람 등에게 이 사실을 고변하지 않았는데,
뒤에 김질이 자신의 장인 정창손의 설득으로 거사를 폭로하면서 알려지게 된다.
그러나 그가 사육신의 거사를 밀고했다는 소문이 알려지면서
김시습 등은 그를 추한 배신자와 변절자로 규탄하며, 사림파들의 조롱거리가 되었다.
그는 자신이 살아남아 할 일이 있다고 생각했다.
이로써 사육신과는 결별을 결심한다.
세조가 단종을 폐위하고 왕위에 오른 뒤 세조를 적극 보좌하여 공신이 되었고,
우의정과 좌의정, 영의정을 모두 지냈는데,
계유정난 이전부터 세조는 신숙주의 관리로서의 재능을 아끼고 있었다.
신숙주는 성삼문 등의 단종 복위 운동이 명분상으로는 옳지만,
인력과 장비 부족으로 실현히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1456년(세조 2년) 성삼문, 하위지 등의 단종 복위 계획이 발각되고
사육신과 그 관련자들이 처형되었다.
신숙주는 정승들과 함께 입조하여 단종을 강등시키고 서인으로 만들 것을 건의했고,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등되었다.
사육신인 성삼문과 박팽년은 형문을 당하면서도 굴하지 않고 신숙주를 향해
반역자, 배신자라고 규탄하자 신숙주는 그들에게 "자네들은 단종의 충신이지만
나는 금상(세조)의 충신이네 " 라며 항변하였다.
신숙주는 세조 옆에서 그들의 고문 장면을 지켜봤으며 성삼문의 질타에도 묵묵히 자리를 지켰다.
사육신의 처형 직후 그는 변방의 축성을 강화하고 남해 해안가에 출몰하는 왜구를 격퇴하게 하였으며,
대마도 도주에게 조약문의 사본을 보내 경고하였다.
곧 이어 경상북도 지역에서 이보흠과 금성대군 등의 거사로 단종 복위 운동이 다시 발생하자,
탄핵 상소를 올려 노산군과 금성대군의 처형을 강력히 주장하여 이들의 처형을 관철시켰다.
이후 그는 노산군의 부인 송씨를 자신의 노비로 내려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세조도 차마 그것만은 허락하지 않았다.
송씨를 자신의 노비로 삼으려던 것이 알려지면서 산림에 은둔중인 학자들은
그가 다른 뜻을 품지 않았는가 하며 의혹과 조소를 퍼부었다.
김시습은 그가 행차할 때마다 나타나서 면박을 주거나 변절자라는 말로 조롱하기도 한다.
1456년(세조 2년)에 병조판서로서 국방에 필요한 외교응대의 일을 위임받아
사실상 예조의 일도 관장하였다.
1456년 병조판서와 예조판서를 지내고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가 되어 판병조사(判兵曹事)를 겸하였으며,
그해 여름 의정부우찬성이 되어 성균관대사성을 지낸 뒤
1457년 가을 의정부좌찬성(左贊成)이 되었다.
세조의 명을 받아 《동국정운》의 편찬에 참여하였고,
농업과 목축에 대한 간단한 백서인 《농산축목서》를 찬하기도 했다.
1458년(세조 3년) 9월 좌찬성으로 평안도도체찰사를 겸하였으며,
1458년 말 의정부우의정, 1459년(세조 5년)에 의정부좌의정이 되었다.
1458년(세조 4)에 우의정이 되어 10년간 예조판서를 겸하여
국가 외교에 있어서도 큰 공적을 세웠다.
1462년(세조 8년) 5월 20일 영의정부사로 승진하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지위가 너무 높아진 것을 염려하여 1464년 영의정부사직을 사직한다.
세조는 그의 사직을 허락하지 않았으나 그는 거듭 사직하여 물러났다.
1464년(세조 10년) 영춘추관사(領春秋館事)가 됐다.
1464년 7월 일본에 파견되는 통신사(通信使)가 되어 배편으로 일본을 방문하였다.
그러나 7월 19일 일본 국왕 고나하조노가 병으로 죽었으므로 일본측의 대접은 소홀하였고
그해 12월 배편으로 귀국하였다.
1467년 건주위 토벌에 출정하여 공을 세워 그해 12월 군공 3등(軍功三等)에 녹훈되었다.
이후 그는 평안도와 함경도에 성곽을 쌓고,
각 군에도 성곽을 개보수하게 여진족과 몽골족 등의 침략에 대비할 것을 건의하였다.
1468년 세조는 죽음을 앞두고 '당 태종에게는 위징, 나에게는 숙주'라고 말했다고 한다.
세조가 신숙주를 당 태종의 위징에 비견한 것은
자신도 당 태종처럼 신숙주를 통해 문화 통치를 이루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한편으로는 그만큼 신숙주를 신뢰했다는 뜻이 된다.
1468년 세조가 병으로 돌아가고 예종이 어려서 즉위하자
신숙주는 한명회, 구치관, 정인지 등과 함께 원상(院相)의 한사람으로 승정원에 들어가
정희왕후와 함께 서정(庶政)을 처결하고 혼란을 수습하였으며,
예종 즉위 후 남이의 옥사가 발생하자 그는 유자광 등과 함께 위관으로 참여,
남이 장군과 강순 등을 심문한 뒤 숙청하여,
수충보사병기정난익대공신(輸忠保社炳幾定難翊戴功臣)에 책록되었다.
1469년 예종이 재위 1년 만에 돌아가자 그는 한명회, 홍윤성, 정인지 등과 함께
원상의 한 사람으로 정무를 처결하였다.
예종이 죽자 그는 정희왕후에게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 자을산군 혈을 왕으로 추천해
결국 그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하는 데 성공한다.
1469년(성종 1년) 12월 29일 왕명으로
한명회, 구치관, 최항, 조석문(曺錫文), 김질(金礩) 등과 함께
경연청 영사(經筵廳領事)를 겸임하였다.
서적 편찬과 영의정 재임 [편집]성종이 즉위하자 성종을 추대한 공로로
1471년(성종 2년) 순성명량경제홍화좌리공신(純誠明亮經濟弘化佐理功臣) 1등에
책록되고 다시 영의정에 임명하였다.
그는 이때 노병을 이유로 여러번 사직하였으나 성종의 윤허를 받지 못했으며,
이후 정치적, 학문적 영향력을 발휘하며 정계에 남아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공신들과 훈구파의 세력이 오래 가지는 않을 것이라고 판단,
사치를 금하고 자신에게 내려진 혜택을 사양하거나 거절하였다.
《경국대전》과 《세조실록》, 《예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또 일본과 여진(女眞)의 지도(地圖)를 만들었으며,
병력 1만 이상을 증강하도록 건의하여 병력을 양성하여 북방과 해안가의 방비에 힘썼다.
또한 《동국통감》, 《오례의(五禮儀)》도 왕명으로 그의 감독하에 편찬해 낸 것이다.
그는 마포의 한강변에 담담정(淡淡亭)을 짓고 문인, 시인들과 교유하였다.
또한 서실을 짓고 문인들에게 글과 사서육경,
역사와 고전 등을 가르치는 한편 그림에도 능하여 그림과 서화를 가르치기도 했다.
그의 서실에는 많은 글과 학문, 그림, 서예를 배우고자 하는 청년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영의정 재직 중 최후
신숙주의 묘비1473년 충훈부 당상(忠勳府堂上)이 되었으며
경혜공주의 아들 정미수(鄭眉壽)가
분에 넘치는 혜택을 받는다는 이유로 탄핵하였으나 성종이 듣지 않았다.
1474년(성종 4년) 2월 병을 이유로 사직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성종이 이를 반려하였다.
1474년 4월 24일 공혜왕후의 국상 시 국장도감 도제조(國葬都監都提調)에 임명되어
그해 6월까지 장례식을 주관하였다.
1475년 병으로 사직을 청했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아 계속 영의정직에 있었다.
신숙주가 임종 직전에 문병 온 성종이 조언을 묻자
'일본과의 화친 관계를 잃지 마소서'라고 유언하였다.
그는 노환을 이유로 계속 사직을 청하였으나 성종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왕이 그에게 특별히 궤장과 안대를 하사하려 하였지만
그는 자신이 궤장을 받을 나이는 아니라며 조용히 사양하였다.
한편으로 일본과 여진을 경계하여 북방과 해안가의 방비에 주력할 것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글씨에도 뛰어났으며 서예로도 재능을 발휘해 특히 송설체를 잘 썼다고 한다.
그는 송설체의 유려한 필치를 보여주는 《몽유도원도》에 대한 찬문과 해서체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화명사 예겸 시고》 등의 작품을 남겼다.
많은 시와 다양한 저작과 작품을 남겼으나 후일 사림파에 의해 역적으로 단죄되면서
그의 저서와 작품, 시, 글씨들 중에는
중종 때와 임진왜란때를 정점으로 해서 다수 소각되거나 인멸되었다.
또한 그가 사후 변절자, 배신자로 매도당하면서
그의 작품과 저서, 시, 그림 등은 대부분 외면당하고 말았다.
현재 전하는 작품으로는 저서인 《보한재집 (保閑齋集)》, 《북정록 (北征錄)》,
《사성통고 (四聲通攷)》, 《농산축목서》, 《해동제국기 (海東諸國記)》 등이 있고,
글씨로는 《몽유도원도》의 찬문(贊文)과 해서체의 작품
《화명사예겸시고 (和明使倪謙詩稿)》 등이 현전한다.
사후 경기도 양주군 별내면 고산리(현 의정부 교도소 맞은편) 산5번지 야산에 안장되었으며
부인 무송군부인 무송윤씨와 쌍분으로 조성되었다.
후일 그의 자손들 묘소도 근처에 조성되면서 묘역이 되었다.
묘비문은 이승소(李承召)가 썼고, 신도비문은 정난종(鄭蘭宗)이 찬하였다.
이후 성종의 묘정에 배향되었고, 문충(文忠)의 시호가 추서되었다.
충북 청원군 가덕면 인차리 구봉영당(九峯影堂),
청원군 낭성면 관정리의 묵정서원(墨井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정난공신, 좌익공신, 익대공신, 보사공신, 좌리공신 등에 책록되었으므로
성종은 그에게 부조지전을 내려 불천지위가 되었다.
그에 대한 당대의 평은 '대의를 따르는 과단성 있는 인물'이었으나
후대에는 사육신, 생육신 등을 쫓는 도학적인 분위기가 형성돼 '기회에 능한 변절자'로 평가되었다.
성종과 중종 때 사림파(士林派)가 정계의 요직을 차지하면서
그는 배신자와 변절의 대명사로 낙인찍혀 비판과 단죄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생육신 조려와 기타 단종 폐위에 분개하여 관직에 나가지 않았던
김시습, 원호 등과 친분이 있던 김종직과 그의 문도들이 정관계에 진출하면서
신숙주는 부정과 규탄의 대상으로 격하되었다.
또한 그가 단종비 송씨를 종으로 달라고 했던 것이 기록되어 전해짐으로서
조선시대 내내 부정적인 평가를 받게 되었다.
유자광, 한명회 등과 함께 남이를 숙청하는데 가담한 점 역시 남이 등에 대한 동정 여론이 형성되면서,
그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확산시키는 원인이 됐다.
그의 문집들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병자호란 등을 거치면서 대부분 실전, 인멸되었다.
그러나 《보한재집》 등은 현전하는데,
특히 보한재집은 1644년(인조 22년) 신숙주의 6대손인 신숙(申洬)이
영주군수로 있을 때 교서관에 소장되어 있던 문집의 완질을 빌려서 모사한 것이 전한다.
조선이 멸망한 후부터 그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와 조명 여론이 나타났다.
한때 이광수의 단종애사나 월탄 박종화의 금삼의 피, 목메이는 여자 등의 작품에서
그가 부정적으로 그려졌기 때문에 해방후 우리에게 심각한 역사적 오해가 인식되었다,
사실 조선역사에서 벼슬길에 오른 인물치고 신숙주 정도의 처세가 없는이 드물것이다.
요즘도 tv사극을 보면 역사인식이 부족한 작가 한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드라마 내용이
전 국민의 머리속에 사실인것 처럼 각인된다 . 역사적 한 사람을 평가할때는 좋은 점과
나쁜 점을 구별해서 평가할 책임이 있는것이다.
@그의 묘는 1970년대까지도 버려졌다가
1980년 이후부터 신숙주의 역할에 대한 조명과 재평가 노력이 진행되면서
비로소 사료와.작품, 저서들도 정리, 재출간되고 버려져 있던 묘소도 정비되었다.
전남 나주군 오룡동에 있던 그의 외가와 생가도 대한민국 수립 이후
1980년대부터 성역화와 재정비가 시작되었다.
한글학회는 1971년 10월 9일 한글의 날에 그의 묘정에다 ‘한글 창제 사적비’를 건립했다.
충북 청원군에서는 신숙주의 영정을 봉안한 영당 등을 ‘도지정 문화재’로 지정했고.
문화관광부는 2002년도 10월의 문화인물로 신숙주를 선정했다.
2007년 9월 15일 경기도 평택시 청북면 고잔리에 신숙주 문학비가 세워졌다.
신윤복, 호는 혜원, 종11대 손이고. 신채호, 호는 단재, 18대 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