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창(居昌) - 크고 넓은 들판
덕유산 자락 아래 드넓게 펼쳐진 축복의 땅, 거창(居昌). 살거(居)자는 클거(巨)자와 음이 같고 창성할 창(昌)자는 밝음과 함께 기운차게 뻗어 나가는 의미로 풀어 낼 수 있으니 거창은 일찍부터 크게 일어날 밝은 곳으로 예견된 축복의 땅이라 할 수 있다. 지금도 거창평야의 일부를 한들이라 부르고 있는데 한들은 한밭(大田), 한길(大路)과 마찬가지로 큰 들판이다.
거창 문화관광 http://tour.geochang.go.kr/
거열산성(居列山城)
http://tour.geochang.go.kr/guide/popup_mov.asp?menu=guide&submenu=mov&idx=44
고견사[古見寺]
http://tour.geochang.go.kr/guide/popup_mov.asp?menu=guide&submenu=mov&idx=48
금원산[金猿山]
http://tour.geochang.go.kr/guide/popup_mov.asp?menu=guide&submenu=mov&idx=35
송계사[松溪寺]
http://tour.geochang.go.kr/guide/popup_mov.asp?menu=guide&submenu=mov&idx=29
연수사[演水寺]
http://tour.geochang.go.kr/guide/popup_mov.asp?menu=guide&submenu=mov&idx=49
월성계곡
http://tour.geochang.go.kr/guide/popup_mov.asp?menu=guide&submenu=mov&idx=34
거열산성(居列山城)
http://tour.geochang.go.kr/guide/popup_mov.asp?menu=guide&submenu=mov&idx=44
거창박물관 http://museum.geochang.go.kr/main/
거창의 역사 유물을 한눈에 살필 수 있는 거창박물관은 이 지역의 독지가인 계림농원 대표 최남식(崔南植), 제창의원 원장 김태순(金泰淳) 두 분이 평생 수집한 귀중한 자료들을 당국에 기증하고 직접 건립 운동에 앞장서 1988년 개관하였다. 1988년 전국 최초 군 단위 공립박물관으로 개관했다.
거창양민학살사건[居昌良民虐殺事件]
그 후 국회조사단이 파견되었으나 경남지구 계엄민사부장 김종원(金宗元) 대령은 국군 1개 소대로 하여금 공비를 가장, 위협 총격을 가함으로써 사건을 은폐하려 하였다.
거창사건추모공원 거창사건은 한국전쟁 중, 1951년 2월 9일에서 11일까지 거창군 신원면에서 마을 주민들이 일부 국군의 총검에 학살된 사건이다.
고견사[古見寺]
http://tour.geochang.go.kr/guide/popup_mov.asp?menu=guide&submenu=mov&idx=48
조선 1395년(태조 4) 태조가 고려 왕조 왕씨의 명복을 빌기 위해 전지(田地) 50결을 내리고, 매년 2월 10일에 내전의 향(香)을 보내서 수륙재(水陸齋 불교에서 물과 육지에서 헤매는 외로운 영혼과 아귀(餓鬼)를 달래며 위로하기 위하여 불법을 강설하고 음식을 베푸는 종교의식)를 행하게 했다. 조선 초기에는 교종에 속했으며, 1414년(태종 14)부터는 1월 15일에 수륙재를 행하였다. 1424년(세종 6)에는 45결이었던 전지를 100결로 늘리고 승려 수도 70명으로 하였다. 사찰 뒤에 의상대사가 참선하던 곳이라 하여 의상봉이라 불리는 봉우리가 솟아 있다.
고견사에는 세 가지 볼거리와 세 가지 자랑거리가 있다. 볼거리는 높이 80M 되는 가정산 폭포, 쌀굴, 최치원 선생이 심었다는 은행나무이며 세 가지 자랑거리는 조선시대 숙종이 숙종이 원효대사를 기려 내린 강생원(降生院) 현판, 고려시대 석불, 보물로 지정된 조선시대 동종이 있다.
쌀굴 의상대사가 수도할 때 밥을 지을 쌀이 나왔다는 쌀굴 이야기와 참선을 하면서 수도를 하였다는 의상봉이 있는 오랜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사찰이다.
우두산(牛頭山 산의 형세가 소머리를 닮았다) 고견사 동쪽 산허리를 넘어가면 굴이 있는데 이곳에서 의상이 수도를 했단다. 매일 두 사람 분의 쌀이 나와 나중에는 ‘쌀굴’이란 이름이 붙었다.
금원산[金猿山]
http://tour.geochang.go.kr/guide/popup_mov.asp?menu=guide&submenu=mov&idx=35
황금원숭이 금원산(金猿山)이라는 지명의 유래는 옛날 금원숭이가 하도 날뛰는 바람에 한 도승이 그를 바위 속에 가둔 뒤로부터 나라가 태평성대를 이루고 있다고 구전되고 있으며, 그 바위는 마치 원숭이 얼굴처럼 생겨 낯바위라 하는데 음의 바뀜으로 납바위라 부르고 있다
달암 이원달 선생과 그의 부인 김씨가 얽힌 금달암(金達岩), 효자 반전이 왜구를 피해 그의 아버지를 업고 무릎으로 기어오르며 피를 흘렸다는 마슬암(磨膝岩), 하늘에서 세 선녀가 내려와 목욕을 하였다 하는 선녀담(仙女潭) 등이 널려 있다. 금원산에는 크게 이름난 두 골짜기가 있다. 유안청 계곡과 지재미골이다.
금원산 유안청계곡은 맥반석의 길이가 1.5km나 되는 정갈한 계곡으로서, 옛날 속세를 등진 선비들이 자연을 벗 삼아 노닐던 곳이라는 말이 딱 맞을 만큼 자연미 넘치는 골이다.
이태의 남부군 소설에서도 빨치산 루트인 이곳을 지나던 패잔병 남녀 500여명이 유안청 폭포의 절경에 빠져 알몸으로 목욕을 했다고 전한다.
유안청이란 조선시대 유생들이 지방 향시를 위해 공부하던 서당 격인 ‘유안청(儒案廳)’이 들어섰던 데서 유래한 지명이다.
초입에는 문바위와 보물 530호인 가섭사지 마애삼존불이 있다.
문바위(門岩)는 옛 가섭사 일주문에 해당하는 가람 수호신으로 우리나라에서 단일 바위로는 가장 큰 바위로 알려져 있다.
드러난 바위 중에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것으로 유명한 문바위를 지나면 인간의 고민과 번뇌를 상징하는 108 계단이 세상사를 안고 있다.
가섭암지 마애여래삼존입상 (居昌 迦葉庵址 磨崖如來三尊立像)
바위면 전체를 배(舟) 모양으로 파서 몸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光背)를 만들고 그 안에 삼존불(三尊佛) 입상을 얕게 새기고 있다. 중앙의 부처가 두 보살을 좌우로 거느린 모양이다. 중앙은 아미타여래, 오른쪽은 관음보살, 왼쪽은 지장보살로 보인다.
이 불상은 삼국시대 불상의 양식을 계승하면서도 고려적인 요소가 반영된 마애불상임을 알 수 있다. 불상의 조상시기가 1111년(고려 예종 6년) 10월임이 확인되었다.
금원산자연휴양림 휴양림 상부 금원산 중턱 850m고지에는 2012년 개원한 생태수목원이 태고의 비밀을 간직한 천연림 속에 나타난다. 덕유산, 지리산 등 남부지방의 고산지대 식물의 보존. 증식. 연구를 위해 조성한 수목원에는 1,000여종의 식물들이 저마다의 자태를 뽐낸다.
수승대 국민관광지[愁勝臺] http://ssd.geochang.go.kr/main/
1543년 퇴계 이황이 이곳의 산수를 보고 속세의 근심(愁)을 잊을 만큼 경치가 빼어난 곳이라고 격찬하며 수승대로 바꿔 부를 것을 권하여 이후 수승대라 부르게 되었다.
구연서원[龜淵書院]
그 뒤 성팽년(成彭年)과 1808년에 신수이(愼守彛)를 추가 배향하여, 선현 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어 아직 복원되지 않고 있으며, 서원 터에 사적비와 신권을 위한 산고수장비(山高水長碑)만 남아 있다.
성혈(性穴) 한반도에만 있다는 알터(성혈(性穴),컵 마크)가 관수루 바로 옆 바위위에 새겨져 있다. 예전에 여인네들이 이 알터에 기름을 부어 불을 켜고 옆 강물에서 목욕재개하고, 자녀의 생산과 가족의 안녕을 기원하는 장소로 쓰였다고 한다.
신권(愼權) 1501년(연산군 7)∼1573년(선조 6) 호는 요수(樂水). 선교랑(宣敎郞 종6품) 훈도(訓導)를 지냈다. 학행이 있었다. 구암(龜岩) 이정(李楨), 갈천(葛川) 임훈(林薰)과 여러 날 학문을 강마하다가 더러는 시를 주고받기도 하였다.
수승대 거북바위 요수정 아래 건너편에 10m 높이에 넓이가 50㎡에 이르며 거북바위는 바위가 계곡 중간에 떠 있는 모습이 거북처럼 보인다해서 붙여진 이름이예요. 세월의 아픔을 견뎌낸 소나무들이 바위 곳곳에 자라고 있다.
바위둘레에는 퇴계 이황이 ‘수승대’로 개명할 것을 제안한 5언 율시를 비롯해서 옛 풍류가들의 글들로 가득 차있다.
수승대 원각사는 1960년대 지해스님이 수승대 골짜기 토굴에서 부처님의 계시를 받고, 현재 위치에 창건하게 되었습니다. 수승대의 전설과 함께 시작되었다고 할수 있으며, 토굴은 아직도 존재합니다. 기도를 하면 소원을 성취할 수 있다고 하여 불자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는 곳입니다.
수승대 은행나무 주변에는 야외 노천 까페인 ‘은행나무 까페’가 운영된다. 300년 넘는 은행나무 아래에 마련되는 이곳은 축제에 참가한 참가팀과 수승대를 찾은 관객들, 축제 사무국 관계자들이 모여 밤새도록 연극과 페스티벌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친교를 다지는 만남의 장이다.
송계사[松溪寺]
http://tour.geochang.go.kr/guide/popup_mov.asp?menu=guide&submenu=mov&idx=29
임진왜란 때 영취사를 비롯하여 5개의 암자가 모두 불탄 뒤 폐허로 있다가 숙종 때 진명(眞溟)이 송계암만을 중건했다. 6·25전쟁 때 다시 전소된 것을 1969년 중창했다. 1995년에 원정(圓靜)이 1969년 중창 때 건립한 영취루가 기울어진 것을 해체하여 다시 짓고 문각(門閣)이라 이름을 바꾸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극락보전을 중심으로 대웅전·문각(종각)·요사채 등이 있다. 유물로는 아미타여래좌상·소종(小鐘)·탱화 3점 등이 있다.
연수사[演水寺]
http://tour.geochang.go.kr/guide/popup_mov.asp?menu=guide&submenu=mov&idx=49
이 은행나무에 얽힌 설화가 전한다. 고려 때 한 여인이 왕손에게 시집을 갔다가 남편을 일찍 여의고 나서 유복자를 낳았다. 여인은 이 절에서 승려가 되어 남편의 명복을 빌었는데, 10년이 지난 어느날 한 노승이 아들을 데려가 공부를 시키겠다고 하였다. 아이는 절 뒤뜰에 젓나무를 심고 ‘이 나무가 사철 푸르게 자랄 것이니 저를 보듯 길러 주세요’라고 말하였다. 이에 여인도 ‘나는 앞뜰에 은행나무를 심고 기다릴 테니 만약 훗날 내가 없더라도 어미를 보듯 대하라’고 하였다. 이후 젓나무는 강풍에 부러졌고 은행나무만 홀로 남았다고 한다.
월성계곡
http://tour.geochang.go.kr/guide/popup_mov.asp?menu=guide&submenu=mov&idx=34
월성계곡의 첫머리는 강선대(降仙臺)와 모암정(帽岩亭)이다. 강선대는 조선 인조 때 척화신 동계 정온(鄭蘊) 선생이 남한산성에서 고향으로 돌아와 살았던 덕유산 모리재 초입에 있는 명소로 경치가 좋아서 신선들이 하늘에서 내려와 노닐었다는 전설이 있다. 대를 들러리하고 있는 맞은편 고숲(古林)에는 모암 임지예(林芝藝)를 기려 세운 모암정이 물과 어울린다. 위쪽으로 올라갈수록 계곡을 돌 때마다 마을이 있고 넓은 반석이 개울을 따라 펼쳐진다.
월성계곡 상류에 있는 사선대(四仙臺)는 월성에서 황점으로 오르는 길 중간 지점에는 사선대(四仙臺)가 있다. 동춘당 송준길(宋浚吉) 선생이 이곳에 은거하면서 머물러 송기(宋基) 또는 송대(宋臺)라고 불렀다. 1909년 고종의 5남 의친왕 강(堈)이 나라가 어지러울 때 전(前) 승지 정태균을 찾아와 머물면서 북상·위천 지방의 우국청년들과 이곳 일대를 뒷날 의병의 근거지로 삼으려고 준비하던 중 일제에 발각되어 뜻을 이루지 못한 구국의 한이 서린 곳이다. 왕실의 선원(璿源)을 뜻한 이름으로 사선대(思璿臺)라 부른 것을, 바위 포갬이 4층이고 돌 위에서 신선이 바둑을 두었다는 전설에 의해 사선대라고 부른다. 기단 위의 3층 석탑을 방불케 하는 사선대 맨 위 바위 모양은 마치 거북 같기도 하고, 봉황새 모양 같기도 한데, 그 머리 부분이 남덕유산을 바라보고 있다.
선원(璿源)-선(璿)은 미옥(美玉)을 뜻하고 원(源)은 수본(水本), 즉 수원(水源)을 의미하므로 선원(璿源)은 왕실조계(王室祖系)를 서술한 것임.
황산전통한옥마을
이 곳 황산전통한옥마을의 가옥들은 대개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건립된 건축물로 대한제국 말기와 일본 강점기 시대의 지방 반가의 전통 한옥 건축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는 곳이다. 남아 있는 한옥은 약 50여호로 안채와 사랑채를 갖추고 있고, 모두 기와집으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씨족 부농촌의 모습을 보여준다.
마을의 담장은 제법 큰 자연석을 이용한 토석담으로 약 1.2Km에 걸친 활처럼 휘어진 전통 담장길은 전통고가와 잘 어우러져 매우 고즈넉하고 아늑한 느낌을 준다. 물빠짐을 위해 아랫단 60~90cm 정도는 커다란 자연석으로 돌만 이용하는 메쌓기 방식으로 쌓고 그 위에 황토와 작은 돌을 교대로 질서 있게 쌓아 올렸다. 담장 위에는 대부분 한식 기와를 올렸다
마을에 들어서면 입구에 높이 15m, 수령 600년에 이르는 '안정좌'나무라 부르는 느티나무가 자리하고 있다. 마을 중앙에는 "황산신씨고가"가 자리 잡고 있는데, 1927년 옛 건물을 허물고 새로 지은 건물로 '원학고가'라고도 부른다
황산리 정온선생생가와 황산리신씨고가
http://tour.geochang.go.kr/guide/popup_mov.asp?menu=guide&submenu=mov&idx=41
정온선생가옥[鄭蘊先生家屋] 중요민속자료 제205호. 정온은 조선 중기의 문신인데, 후손들이 그의 생가를 1820년에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솟을대문의 대문간채를 들어서면 남향한 사랑채가 있다. ㄱ자형 평면이며 정면 6칸, 측면은 전퇴(前退) 있는 2칸 반이고, ㄱ자로 꺾여나온 내루(內樓)부분이 1칸 반 규모이다.
이 건물의 주목되는 점은 두줄박이 겹집이며 전퇴를 두었다는 것과 내루에 눈썹지붕이 따로 설치되어 있다는 점이다. 안채로 들어가려면 사랑채 왼쪽의 중문을 통하도록 되어 있으며 중문채는 3칸이다.
정온(鄭蘊)선생은 조선 중기 문신. 남명 조식의 학맥을 이었으며 절개와 충절이 높은 선비로 평가된다. 광해군 때 영창대군의 처형에 반대해 제주도에서 10년간 귀양살이를 했고, 병자호란 때는 화친에 반대해 자결하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산간에 운둔하면서 여생을 보냈던 충신이다. 소박하고 아기자기한 장식적 요소가 볼 만한 동계(桐溪)정온고택은 인조가 내린 정려문과 사랑채 내루의 눈썹지붕이 눈길을 사로잡고 툇마루에서 바라본 금원산 풍광이 그림 같다.
현재의 건물은 1927년 1월에 옛날 건물을 헐고 건립한 것이다. 검소한 양식에 서민적인 전통한옥 특징을 갖추어 지은 건물이다.
당시 이 집의 주인은 큰 지주였다고 하는데, 이 집은 그러한 집주인의 경제력을 잘 보여주고 있다.
마을 어귀에는 군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는 수령 600년에 달하는 고목이 자리하고 있다. 마을 내 고가들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건립된 것으로 지방 반가의 건축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굽이굽이 돌아가는 마을 옛담장은 향촌마을의 아름다움과 정서를 고이 간직하고 있어 등록문화재로 등재, 보존 관리되고 있다. 총 10가구가 민박을 운영해 옛 선조들의 주거생활을 체험할 수 있다
인조(仁祖)가 중국 청태종 앞에 나가 항복하는 치욕적인 화의(和議)가 성립되자 자결을 시도했던 척화파 정온(鄭蘊)이 남한산성에서 낙향하여 말년을 보냈던 모리재(某里齋:경남유형문화재 제307호)에 보관되어 있었는데 1704년 화재로 일부가 불에 탄 흔적이 남아 있다. 당시 과거에 급제한 사람들의 명부인 〈우왕3년정사감시방목〉은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것으로, 고려말 조선초의 사회상과 제도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크기는 27.5㎝×41.5㎝에 12장 24면으로 되어 있고, 뒷부분에는 6개의 다른 방목이 적혀 있다.
--------------------------------기 타 -------------------------------
은진 임씨인 갈천 임훈 선생의 형제들이 노닐던 뜻 깊은 곳이다. 평균 높이 20여m에 수령 200~300년 된 소나무·물오리나무·느티나무·느릅나무로 이루어진 숲으로, 면적은 약 2만m²이다. 1982년 11월 23일 거창군 천연보호림 제2호로 지정되었다.
숲 안에 가선정(駕仙亭)이라는 정자가 있어 가선림이라고도 부르고, 치내마을의 숲이라 하여 치내숲이라고 한다.
갈계숲은 조선 명종 때 6현신(六賢臣)의 한 사람으로 언양현감·비안현감·광주목사 등을 지내고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효행으로 이름 높았던 임훈(林薰 1500~1584)이 노닐던 숲으로, 갈계숲과 갈계리라는 명칭 모두 임훈의 호인 갈천(葛川)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숲에는 임훈과 그의 형제들과 관련된 유적이 남아 있다. 임훈의 덕망을 추모하기 위해 후손들이 1934년 숲 속에 건립한 가선정은 정면 2칸·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누각으로, 원래 이름은 임정(林亭)이었다.
또 하나의 정자는 임훈의 첫째 아우인 도계 임영(林英)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건립한 도계정(道溪亭)으로, 도계정 바로 뒤에는 임영을 기리는 경모재가 있고, 정면 1칸·측면 1칸의 병암정(屛巖亭)이라는 누정도 있다.
갈계숲을 끼고 있는 갈계마을에는 임훈이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둘째아우 임운(林芸)과 함께 건립한 갈천서당(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295호), 임훈이 살던 집인 거창 갈계리 임씨고가(경상남도민속자료 제9호)를 비롯해 1564년 임훈이 생전에 받은 효자정려(旌閭), 사당 등의 유적이 즐비하다.
거창국제연극제
1989년 경상남도지역 연극단체들 간의 화합과 이 지역 연극의 발전방향을 모색하기 위해 시작된 시월연극제가 모태가 되어 발전한 것이다. 1993년 5회부터는 전국적인 규모로, 1995년 7회부터는 해외극단들의 공연을 참가시키면서 국제적 규모의 연극제로 발전했으며 거창국제연극제(KIFT)라는 명칭으로 개명했다
물놀이 및 보트를 타고 볼 수 있는 세계 유일의 연극제
거창 농산리 석불입상[石佛立像]
광배(光背)와 대좌(臺座)를 모두 갖춘 통일신라시대의 비교적 완전한 석불입상으로, 전체 높이는 270㎝이다. 불신과 광배를 동일석으로 조각하여 암반형 바위를 원추형으로 쪼아 만들어 대좌 위에 얹었다. 머리는 소발(素髮)에 둥근 형태의 육계가 봉긋하게 솟아 있으며 사각형의 얼굴은 마멸되어 상호(相好)가 불분명하다.
거창 둔마리 벽화 고분 [ 居昌 屯馬里 壁畵 古墳 ]
동쪽 무덤의 벽화는 적외선사진에 의해 남쪽에 3명, 북쪽에 2명 등 주악무도천녀(奏樂舞蹈天女)들이 그려져 있음이 밝혀졌다. 그중 남쪽의 천녀는 빗어 올려 얹은 머리에 둥근 관을 썼고, 얼굴은 타원형의 윤곽이며, 입에는 피리를 물고 왼쪽 손은 위로 올려 과일 같은 것이 담긴 접시를 들고 있다.
이 벽화는 얼마 남지 않은 고려시대의 것(4점)으로 불교적인 양식이 강하지만 도교적인 양식도 엿보인다는 점이 특색이다. 거창박물관 모형 전시
거창사과
사과가 우리나라에 씨앗을 내린 것은 1906년 일본에서 국광·홍옥을 받아들이면서다. 거창에서는 1930년 한 일본인이 거창읍 10여 농가에 묘목을 심으면서로 전해진다.
그래도 거창 사람들은 "1940년 계림농원을 설립한 최남식 선생이 이 지역 최초 보급자"라고 말한다. 본격적인 대량 생산 및 보급 시발점으로 받아들이면 될 듯하다.
거창사과테마파크 사과에 대한 모든것을 오감을 통해 보고, 느끼고, 체험할 수 있는 전시공간
거창 상동 석조관음입상[造觀音立像]
연화대 위의 독립상으로 지금은 없어진 건흥사(乾興寺)에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머리에는 보계(寶髻)가 높직하고, 따로 관(冠)이 있었을 것이나 현재에는 없으며, 관을 쓴 것처럼 표현한 뒷머리는 함안대산리석불(咸安大山里石佛)과 흡사하다.
얼굴은 긴 타원형이고 신라보살의 우아한 품격은 보이지 않는다. 왼손은 연꽃을 잡고, 오른손은 내려 정병(淨甁)을 잡은 모양이 어색해 보인다. 가슴에는 목걸이를 장식하였으나 형식적이며 어깨에 걸친 천의(天衣)는 도식화(圖式化)가 역력하다
거창 양평동 석조여래입상[石造如來立像]
거창 정장리 최남식(崔南植) 가옥 거창읍 정장리 978-4번지
거창 하늘마을고로쇠축제 거창 북상면 남덕유산 일원에서 자라는 고로쇠나무의 생명력 넘치는 수액을 맛보고 즐길 수 있는 하늘마을 남덕유산 고로쇠 축제가 열린다.
거창 농산물 대축제 녹색곳간 거창 농산물 대축제 기간 2010년 10월 1일~3일 장소 거창스포츠파크일. 가을을 맞아 풍성한 농산물 대축제를 연다.
건계정[建溪亭] 거창군 거창읍 상림리
건계정계곡 거창읍에서 서북쪽으로 약 3km에 떨어진 계곡으로, 거열산성군립공원(居列山城郡立公園) 내에 자리잡고 있다
아림예술제
1960년에 시작된 아림예술제는 우리고장의 전통문화를 계승발전 시키기 위해 운영 되어온 행사로서 군민의 축제라 하겠다.
오부자공방
경남무형문화재 제14호 징장 이용구선생과 계승자 이경동씨가 운영하는 사물악기, 방짜유기를 만드는 '두부자공방'의 모습이다.
처음 네 아들과 함께 징을 만들었다고 해서 그 이름을 오부자공방이라고 했지만 현재는 막내만 아버지 곁을 지키고 세 아들은 각기 독립했다고 한다. 그래서 2008년 4월 22일 아버지와 막내를 뜻하는 '두부자공방'이라고 상호를 변경했다.
1993년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 14호로 지정된 이후 우리 민족의 얼을 담은 징, 꽹과리 등 악기는 물론 생활식기, 제기, 불기, 다기에 이르기까지 모든 제품들을 만들며 우리 전통의 문화를 지키고 있다.
침류정(枕流亭)
한편 새롭게 단장된 침류정은 일제강점기에 일제침략의 부당성을 알리는 파리장서 운동을 주도한 면우 곽종석 선생을 기리는 파리장서비와 한일합방과 일제에 항거하다 순절한 연호 이주환 의사의 사적비가 세워져 있다.
1코스 수승대-정온선생종택-모리재-강선대-농산리고인돌-만월당-갈계숲- 행기숲-농산리석조여래입상-용암정-수승대
2코스 수승대-정온선생종택-농산리석조여래입상-강선대-농산리고인돌-만월당-갈계숲-행기숲-용암정-수승대 코스로 수승대 주변의 모든 문화유산과 빼어난 자연경관을 볼 수 있도록 9.9km에 2시간 40분 소요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