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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론 스크랩 종말론 강해 6
물댄동산 추천 0 조회 24 09.06.16 08:3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종말론 강해 6

  

 

서철원 교수

 

 

 

 

 

 

 

 

 

제6강 종말론

 
안녕하십니까? 성경말씀은 누가복음 16장입니다. 제가 19절을 읽은 후에 한 절씩 읽어 주시기 바랍니다. 31절 까지입니다.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는데 나사로라 이름한 한 거지가 헌데를 앓으며 그 부자의 대문에 누워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불러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아브라함이 가로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가로되 그러면 구하노니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아브라함이 가로되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 하리이다 가로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오늘 이 시간에는 중간 상태를 오늘로 마치기를 바라고, 제일 종말론의 중심기론이 천년기론인데 다음 시간부터 천년기론을 여러분과 같이 논의해 보고자 합니다. 지난 시간에 죽음은 하나님께로 부터 분리이고 영과 육체의 분리이며 또 인간의 거주환경인 우주로부터의 분리이다 거기까지 말씀드렸습니다. 죽어서 어떻게 되느냐? 그런데 과학에서는 영혼이 육체와 별도의 존재로 존재한다는 것에 대해서 과학이 다 부인합니다. 과학은 감각적인 기관에 의해서 대상들을 탐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영이 감각에 잡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죽음은 육체로 끝나고 그 이상에 대해서는 전혀 없는 것으로 과학적으로는 증명할 수 없기 때문에 없는 것으로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특히 현대 의학에서 영혼이 없는 전통이 그대로 받아져서 지금 육체안에 독립적인 존재로서 영혼이 존재한다 하는 것에 대해서 거의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길버트 라일이라고 하는 20세기의 영국의 경험론 철학자에 의하면 “우리 몸 안에 육체하고 구분되는 독립된 별도의 존재가 있다고 하는 것은 마치 기계 안에 유령이 있다고 하는 것과 같다. 우리 안에 별도의 독립적인 존재가 존재한다고 하는 사실은 마치 공장의 기계가 돌아가는데 그 안에 옛날처럼 유령이 들어 앉아 있는 것과 같다. 그러니까 과학적으로는 전혀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정말 과학적으로는, 감각기관을 통해서만 모든 걸 탐구하는가? 그래서 표상이라는 말이 철학에는 참 깊이 쓰여지고 있어도 우리 한국 말에는 조금 생소한 말이 사실입니다.

 

 

 

 

우리가 그냥 칸트에 의하면 물리학 시간의 ( )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식 기관이 상을 만든다. 사물의 이치를 바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물 자체를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실은 우리의 의식 기관이 이와 같이 사물들을 볼 수 있도록 이와 같이 상을 만들어 준다. 그렇게 상이 이루어지는 것만 감각기관으로 좇아갈 수 있는 것이어서 그것만 과학의 대상이라,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전반적으로! 그래서 심리학이나 의학에서 영혼은, 그것을 만일 이름을 붙인다면, 그것은 두뇌의 기능, 작용일 뿐이지 별도의 독립적인 존재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주장하고 그것이 공통적으로 맞는 것으로 다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미국에 갔을 때에 그 어느 마취하는 한국 의사가 그런 이야기를 해요. 사람을 마취를 했더니 영혼이라는 별도의 존재가 있으면 비록 육체가 마취되었다 하더라도 그 영혼으로서의 기능을 나타내는 것이 있어야 할 터인데 마취 상태는 완전히 송장이었다. 그러니 그게 진짜 영혼이 있는 존재라고 할 수 있느냐? 그런 이의를 토론 석상에서 제기해요. 평신도니까! 자, 그래서 전통적으로 과학적으로는 우리의 두뇌작용 외에 별도의 독립기관으로서 영혼이 있는 것을 인정하지 않아 왔습니다.

 

 

 


그런데 과학도 다 항상 선입주견, 전제가 더 중요한 것이어서 같은 과학자이면서도 영혼의 존재를 분명히 믿고 주장하고 가르치고 또 자기대로 증명했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와일드 팬 필드라고 하는 미국 태생의 카나다 두뇌 과학자입니다. 이 교수는 본래 의학을 한 사람이 아니예요. 1921년 프린스톤 철학과를 졸업했습니다. 그러니까 미국의 일류대학 몇 개 중에서 미국은 모든 과가 일류대학이면 다 좋은게 아니고 대학별 과별로 좋은 대학이 있어요.

 

 

 

 

철학으로는 지금도 자타가 공인하듯 프린스톤을 제일 좋은 학교로 봅니다. 1921년 프린스톤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이 사람이 철학을 공부하고서는 두뇌의학으로 전향을 했습니다. 그래 가지고 당시의 영국의 세계적인 두뇌학자인 쉐링턴 경에게 가서, 그때 당시 쉐링턴 경이 또 세계적인 대가였는데, 세계적인 권위였는데 이 두뇌과학에 있어서 이 사람에게 가서 두뇌의학을 공부해 가지고 소위 팬 필드가 또 세계적인 권위가 되었습니다. 이름은 생각나지 않습니다만 소련의 국보라고 하는 수학자가 교통사고로 머리를 다쳤을 때 이 사람을 치료하기 위해서 와일드 팬 필드 교수를 초청했습니다. 소련 당국이!

 

 

 

 

그럴만큼 탁월한 두뇌 의학자 입니다. 가서 두뇌가 완전히 깨어졌는데 검사를 해보니까 의식이 있고, 그래서 수술하지 않도록 하면서 고치도록 그렇게까지 한 사람인데 이 사람이 두뇌의학을 해가지고 수없는 간질 환자들을 수술했습니다. 그리고 수천명의 교통 사고 만난 사람들을, 두뇌를 수술해서 고쳤습니다. 그러니까 두뇌에 대해서만은 정말 구석구석 연구를 잘 했어요. 그러면서 얻은 결론이 영혼은 두뇌하고 개별적인 독립적인 존재로 존재한다는 결론에 도달했고 또 그럴 뿐만 아니라 이 영혼은 출생하고 나아가서 창조된다고 해야 바르다고 하였습니다. 순전히 과학적인 근거에 의해 가지고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이 두뇌 전체에 대해서 연구를 했는데 가령 어떤 기관에 어떤 기억을 장치하고 있는 기관에 전기를 걸어가지고 압력을 세게 가했을 때는 그 말을 보여 주면서도, 그 환자에게는 말해도 못하니까 그 근처에 비슷한 단어를 말하게 하고 모든 결론들을 다 집약해 가지고 그 사람이 영혼은 독립된 존재로 존재하고 그리고 사후에도, 육체의 죽음 후에도 존재한다. 그러나 모든 일을 하려면 에너지가 공급되어야 하는데 육체를 떠난, 육체와 분리된 상태의 영혼은 에너지가 공급되지 아니하므로 새로운 일은 하지 아니하나 기억은 그대로 갖고 있다. 

 

 

 

 

마치 우리가 공부를 많이 하면 이 사람이 어떻게 비유를 했느냐 하면, 영혼은 컴퓨터의 프로그램에 비유하고, 그리고 두뇌는 컴퓨터에 비유를 했어요. 그래서 우리의 지식 수준이 학습의 도가 높아갈수록 낮은 수준의 지식 활동은 거의 자동적으로 이루어지고 그 영혼이 개입하지 않을 정도로 이루어지고 그 수준이 넘어서는 영혼이 되어 고차원적인 수준에서 작업을 하게 된다. 그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것이 1975년, 그 사람이 죽었는데 1976년 그후에 책이 나왔어요.

 

 

 

 

그 책 ( )란 책으로, 그 책을 죽기 얼마전에 미국의 철학회에 우리나라에도 철학회가 있습니다. 작은 철학회들이 있는 것을 아는데, 미국 전체 철학회에 가서 그 제목으로 강의를 했습니다. “마음의 신비”라 하는 제목으로 강의를 하고 1975년에 죽었는데 1976년에 책이 나왔습니다. 그러면서 컴퓨터 프로그래머가 프로그램을 작성해 가지고 컴퓨터에 입력해 놓으면 프로그래머가 없어도 일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두뇌의 상당한 수준까지에 학습으로 그 과정을 마치면 그건 자동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고 영혼도 더 고차원적으로 일할 수 있다.

 

 

 

 

컴퓨터 프로그램이 우리나라에서는 작은 퍼스날 컴퓨터 프로그램이 발달해서 프로그래머가 계속해서 키펀치를 쳐줘야 일이 되지만 큰 프로그램 같은 걸 보면, 미국에 있을 때 보니까 별로 큰 회사가 아닌데도 이 방보다도 큰 데이타가 아주 큰 컴퓨터가 여러 대 장치되어 있는데 프로그래머가 프로그램을 세워가지고 키펀치들이 와서 키펀치를 해놓고 가면 이게 계속해서 프로그램을 해내거든요. 누가 없어도, 자동적으로! 마찬가지로 영혼이 두뇌와 별도로 활동할 수 있고 존재할 수 있다. 그래서 뿐만 아니라 영혼은 출생하고 그리고 창조된다고 해야 맞다.

 

 

 

 

그리고 영혼은 그러기 때문에 육체의 사후에도 존재하고 또 기억을 갖고 있다. 그러나 육체를 통한 에너지의 공급이 없이 때문에 새로운 지식의 습득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생존시에 가졌던 모든 것이 다 기억을 갖고 있다. 그러니까 그런 것도 이상하지 않습니까? 우리의 몸을 완전히 신진대사를 한번 하는데 7년이 걸린다고 하지요. 그러면 기억을 담고 있는 물질들이 7년이면 완전히 바뀌는데도 그 물질 자체에만 기억이 들어있다면 이게 완전히 바뀌어 버렸는데도 어찌해서 기억은 계속 존재할 수 있느냐? 그랬더니 이에 대해서 굉장히 많은 반대가 일어났습니다. 

 

 

 

 

그가 부록으로 신앙고백을 하고 있어요. 자기가 이렇게 자연과학으로 많은 사람들을 과학적인 증거에 의해서 이렇게 자기 학설을 뒷받침하고 그리고 정립을 했지만 그러나 이렇게 가도록 하는데 자기가 어려서 부모님들에게로 부터 받은 신앙교육, 주일학교에서 배운 하나님이 말씀의 교육이 자기로 하여금 이 결론에 이르도록 역사를 했다. 그러니까 우리가 자녀 교육에 있어서 집에서의 신앙교육, 말씀을 가르치는 것, 그리고 주일학교에서 말씀을 가르치는 것이 얼마나 큰지를 다시 새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어렸을 때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놓으면 커서 자연과학을 아무리 연구하고 세상 학문이 어떻다 하더라도 바른 결론에 도달하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참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큰 일을 한 사람이지요. 그가 두뇌의학에 큰 공헌을 했는데 이 사람 소설도 썼어요. 소설도 쓰고, 두뇌 수준이 높으니까 의학자라고 소설 못 쓸 것 뭐 있습니까? 철학을 하던 사람이 의학 못 한다는 법도 없는 거지요. 자, 과학적으로 두뇌와 독립된 존재로서 영혼이 존재한다. 그리고 사후에도 존재할 뿐만 아니라 기억을 갖고 있다. 나아가서 이 영혼은 출생한다고 해야 맞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두뇌가 얼마나 긴요한 것이냐! 통계가 나옵니다.

 

 

 

 

지금 현재 알려진 우주의 원자가 몇 개냐.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원자가 몇개냐 하면, 이것이 추정치이지만 1에다가 0을 66개 한 것 만큼! 그런데 두뇌 속에 있는 뉴우런들의 결합은 몇개냐? 두뇌 안에 있는 뉴우런을 형성하는 그 결합들이 몇 개냐? 7에다가 0을 2백 7십 8만 3천개 붙인 것 만큼 있다. 이런 굉장한 두뇌를 실은 우리가 많이 못 쓰고 있다. 얼마냐 쓰고 있냐? 윌리암 제임스라고 하는 하버드의 철학자이고 심리학자이며 소위 근세 실험심리학의 창설가, 그러니까 심리학을 과학적인 기초 위에 확립해서 건설한 사람이라고 할 윌리암 제임스가 뭐라고 했느냐면, 우리의 두뇌를 많이 써도 10%-20% 밖에 못 쓰고 있다. 보통 사람들이!

 

 

 


그런데 기이한 것은 유물론을 강력히 가르치는 공산주의 세계의 대학들이( ), 이상심리, 정상심리가 아니라 투시나 원시, 예언할 수 있는 능력, 예언과 같은 영혼의 능력이 물체에 영향주는 것과 관계를 다룬 이런 이상심리를 공산주의 세계가 가장 많이 연구하고 있습니다. 1930년에 이 이상심리가 학문으로 확립되었는데 그 때에 듀크 대학에, 소위 닉슨이 나온 법과 대학에 심리학과에 라인 박사가 이상심리를 연구하고 확립하고 결론 내리기를 인간은 피와 살 덩어리의 결합만은 결코 아니다. 그런데 피와 상덜어리 만으로 아는 공산주의 세계에서 그 대학들에서 이것을 가장 많이 연구하고 있다.

 

 

 

 

과학으로 그런 인간이 피와 살 만이 아니고 그 이상 넘어가는 존재라고 하는 것을 인간들이 다 알고 있는 거지요. 자, 그러면 아무리 과학이 뭐라 하더라도 다른 과학은 영혼의 존재를 인정하고 죽으면 그 영혼이 존재해서 저 세상으로 간다. 자, 그런데 철학적으로도 그 영혼에 대해서 존재하느냐, 안하느냐 해서 확실한 말은 못해요. 이제 칸트가 18세기에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 세 개의 비판을 썼습니다. 순수이성비판에서 그가 쓴 것은 인간의 영혼이 인간의 지성의 능력으로 알 수 있는 세계는 이 감각기관으로 표상할 수 있는 세계 뿐이고 내세라든지 하나님이라든지 초월의 세계 이런 것에 대해서는 전혀 알 수 없다. 있는지 없는지 확실하게 단언할 수 없는 거지요.

 

 

 

 

그래 마지막에 가서 나는 신앙을 위해서 지식이 자리를 양보하도록 한다. 이렇게 말을 하기도 했는데 그것은 늙어서 한 말이고 순수이성비판에서는 인간의 이성의 능력으로는 저 영원의 세계 미래의 세계 이런 것을 다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그것은 전혀 알 수 없다. 그러면 하나님에 대해서 어찌 알 것이냐? 하나님은 체계를 구성하기 위해서 학문을 구성하는데 체계를 구성하기 위해서 요청해요. 하나님이 꼭 있어서 증명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말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 체계를 구성하는데 통일의 원리로서 한계개념으로 체계를 구성하는 데 하나님은 그런 한계개념으로 요청한다. 

 

 

 

 

무슨 말이냐 하면, 세계라고 하는 말, 세계는 어떤 사람도 경험해 보지 못한 통일의 원리예요. 세계가 무엇이냐? 세계를 몇 바퀴 여행하면 우리 한국 분들 요새 여행 자주 다니시는데 그 어디서 돈이 많아서 자주 다니시는지, 나는 외국에 한 10년 있다 돌아와서 갈 일도 없지만 돈도 없어서 한번도 못 나갔습니다. 한 몇 번쯤 여행하면 세계를 알 수 있습니까? 한 열 두 번쯤 돌면 압니까? 세계라고 하는 것이 물론 이런 우주적인 세계도 말하지만 우리가 말하는 그냥 세계라고 할 때는 우리가 갖는, 지구상의 인류가 갖는 모든 지식을 포함해서 경험이 곧 지식이지요? 모든 경험들을 총화를 이룰 때 그걸 세계라고 표현을 해요.

 

 

 

 

그러니까 세계가 무엇이냐에 대해서 구체적이고 내용을 전달하는 진술을 할 수가 없지요. 과학의 지식을 전달하는 방식으로 세계에 대해서 확정적인 그런 진술을 할 수 없는 개념이다. 단지 우리의 경험을 통합하기 위한 통일의 원리로 그 체계를 구성하기 위한 한계개념으로 세계를 필요로 한다. 그것 뿐이지 그것을 넘어서서 세계가 어떻다고 구체적으로 말하지 못합니다. 자유대학에서 철학부에 있으면서 철학을 열심히 박사과정을 하는 친구가 있었어요. 한번 토론을 했습니다. 그래 세계 철학이 하는 의미가 무엇이냐? 그랬더니 ( ) 실제의 총체에 대해서 논의하는 것이 철학이다. 그렇게 답을 해요.

 

 

 

 

그래서 내가 묻기를 도대체 ( ) 이 뭐냐? 그 사람 미국에서 온 학생인데, 미국에서 대학을 나와서, 물론 자유대학 박사과정 하기 전에 자유대학 과정을 하고 박사과정을 하는 사람인데 그 사람 이야기가 철학이 무엇이냐? ( )에 대해서 논하는 것이 철학이다. 그래서 내가 단번에 묻기를 도대체 ( )가 뭐냐? 실제의 총화가 무엇을 말하느냐? 도대체 네가 무슨 내용을 그것으로 말하려고 하느냐? 그것은 단지 어휘, 단어의 장난일 뿐이지, 그 안에 무슨 내용이 있느냐? 말해 봐라. 네가 그것으로 무슨 내용을 전달할 수 있느냐? 그러니까 날 보고 하는 말이 너는 너무 칸트적으로 말을 한다. 그래요.

 

 

 


자, 마찬가지로 (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세계란 말로, 그렇지만 우리가 ( )라고 할 때 무슨 구체적인 진술을 할 수 있느냐? 저 사람이 지식을 가질 수 있도록, 그런게 없지요. 단지 경험을 통합하기 위한 통합의 원리로서 세계를 한계개념으로 체계 구성에 도입한 것이지 실제로 그런게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러면 신은 무엇이냐? 이와 같은 모든 세계에, 우리가 경험하고 살고 있는 세계 내에 있는 모든, 전체를 하나로 통일하고 있는 통일의 원리, 결국 어디서 왔느냐? 신에게서 온 거지요. 그 이 좋은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그런 의미로서의 하나님이 아니고 이 모든 우리가 갖는 경험을 통일해 주는 통일의 원리로서 필요합니다. 이것은 체계를 구성해 주기 위한 한계개념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철학을 하시지 않는 분들에게는 이게 너무 어려울는지 모르겠습니다. 자, 그러면 세계나 신이나 이런 것에 대해서 알 수가 없다. 우리의 감각적인 기관을 통해서 세계나 신에 대해서 이런 총체적인 경험을 할 수가 없어요. 그래 이런 존재에 대해서 도대체 있다 없다 말할 수 없어요. 칸트의 철학으로는! 그러면 칸트가 그걸로 끝내느냐? 그게 아녜요. 실천이성비판에 오면, 실천이성이란 말은 윤리적인 이성 도덕적인 이성을 말해요. 혹은 윤리 공동체가 바른 삶을 살 수 있느냐 하는 데 그 바른 삶의 법칙을 제시해 내는 일을 하는게 실천이성비판이라.

 

 

 

 

우리의 윤리적인 행동, 사람으로서 행동하는 이 윤리적인 행동하는데 그걸 하는 데 있어서 칸트는 이제 순수이성비판에서 지식에 대해서 도저히 알 수 없다고 하는 내세와 하나님과 자유의 개념을 도입해 들입니다. 어떻게 도입해 들이느냐? 인간이 우리가 덕을 닦고 살아야 하는데, 인간의 본질이 윤리 아닙니까? 어떻게 하면 인간답게 바르게 사는가? 그걸 칸트는 의무감에서 하는 행동, 그것이 윤리적이라. 우리 윤리가 무엇이냐? 도덕적인 것이 무엇이냐? 의무감에서 하는 행동들 그것이 윤리다 도덕이다 그렇게 말해요. 우리가 이웃을 사랑해야지요. 관용해야지요. 그리고 이해해야지요. 그런데 이게 말은 쉬워도 잘 됩니까? 이해한다는 것이 잘 됩니까?

 

 

 

 

여러분도 아시는 총신 교수 중에 부인이 의사인데 미 8군에서 정신 담당 의사로 일을 해요. 그래 한번 식사를 하면서 이야기 하는데 그 미국인들이 너무 외롭고 그렇기 때문에 한국에 사는 여자들 하고 결혼을 한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와서 죽으려고 한다는 거예요. 상담을 하는데, 나는 한번도 내 아내하고 진지하게 대화를 해본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밥을 내 구미에 맞도록 한번도 식사를 해 준 적이 없습니다. 이거 보통 기가 막힌 일이 아닌 것 같애요. 그래 어떻게 하느냐? 싸우다 못해서 서로 완전히 냉전 상태에서 자기는 빵에다가 버터 같은 걸 발라서 치즈 끼우고 이렇게 채소 썰어 넣어서 자기가 해서 들고 서서 먹고, 아내는 김치하고 된장찌게 해 갖고 밥하고 먹고 앉았단 말이예요.

 

 

 

 

그러니 이게 참, 한번도 이해 차가 나는 걸 설득하고 논의하는 걸 하려는 법이 없다는 거예요. 한번도 대화해 본 적이 없다는 거예요. 그러니 어떻게 삽니까? 결혼했는데, 물론 이혼하고 털털 털고 가버릴 수 있지요. 그러나 결혼한 그들 중에는 그리스도인도 있을 터인데 마음대로 이혼 못하는 거지요. 그러니까 그냥, 그 국제결혼의 장벽이 얼마나 쎈지, 오죽 하면 미국에 가서 사는 한국 동포가, 우리 교포가 나중에는 천대와 박대가 너무 심하니까 자살해 죽어 버렸어요. 그리고 많은 경우에 한국 여자들이 속으로 고민하고 자기부족을 탓하지 적극적으로 나서서 저쪽을 네가 틀렸다고 증명해 주고 그렇게 잘 못하잖아요?

 

 

 

 

그러니까 압박받고 천대를 받을 때마다 그걸 가서 토로하고 어디가서 호소하지 못하고 혼자 당하고 고민하고 괴로와하다가 그 사이클이 계속 돌면 나중에는 미치고 이혼하고 죽는 경우가 참으로 많습니다. 그 언어의 장벽, 문화의 장벽을 넘어서기가 그렇게 힘들어요.

이해해 주는 것 얼마나 중요합니까? 환자들이 말할 때 사람들이 고독하다 고독하다 하면 누굴 부른다고 합니까? 한국은 아직 그러지 않는지 모르지만 한국은 아직 떼지어서 어울려서 사는 사회입니다. 고독하다 고독하다 견디다 못해 의사를 부른다고 합니다. 의사는 자기 말을 들어 주니까! 그런데 조그만 차이에서 오는 이해의 갭을 메꾸기가 그렇게 어렵다는 거예요.

 

 

 

 

서로 이해하는 것, 이번 동의대 사건도 대통령이, 죽자마자 뭐 순국했다, 무슨 순국입니까? 자기들이 죽여놓고! 설득할 수 있고 대화할 수 있는데 왜 강경진압만 하냐고요. 내가 5월 초에 갑자기 KBS에서 오라고 그래서 폭력에 대해서라니까 다 피하니까 날보고 오라고, 그래서 갔습니다. 가서 이야기 했어요. 데모하게 해라. 강경진압, 원천 봉쇄해 가지고 한번 데모라도 일어나면 정치생명이 내일이라도 끝나는 줄 아는데 누가 그렇게 정권 물러나라고 하느냐? 학생들이나 노동자들이나 국민들이 그러길 원하느냐? 데모하게 하라. 의사발표를 해야 될 것 아니냐? 의견 발표하면 순환여부는 해당 ( ), 그건 빼버렸어요.

 

 

 

 

나중에 편집할 때 보니까, 데모하게 하면 스트레스 효과도 있다, 하게 해라. 그리고 공공질서가 어긋날 때는 그 최루탄이나 총포 쏘지 말고 소독처럼 고무 호스로 물 뿌리면 안되느냐? 그렇게 하고, 정부가 너무 가진 자 편에 서서만 그러는데 중재해라, 중재! 정부하고 노동자들, 그래서 그들의 생존권, 농촌의 생존권을 보장하는 면에 대해서 해야 된다. 그러면서 광주사태도 이야기하고 다 했습니다. 할 이야기를 저는! 그런데 그렇게 학생들을 설득할 수 있는 상황에서 설득 안했다. 대화를 안했어요. 너무 급해 가지고, 막 때려 부수고!

 

 

 

 

감히 어떻게 나를! 하는 방식으로 하기 때문에 그 젊은 사람들 6명이나 죽였는데 사실 그렇게 우리 한국은 경직된 사회에 대해서 이해하는 것 너무 힘들지요. 그런데 그것이 언어와 문화의 차이가 있는데 그것을 넘어선다는 것 참 어렵거든요. 그래 우리 한국 사람들 외국에 가서 보면, 내가 한번 KAL 비행사에 갔어요. 암스텔담 지점에 갔는데, 본사에서 나와서 그 화란 사람들 직원을 조사하는데 말이예요. 그 심문조로 하는 것 같애요. 그러니까 그 사람이 기분이 나빠가지고 화가 나가지고는 곧 싸울듯이 내가 뭐 이 회사 아니면 일할 데가 없냐? 난 나가도 좋다는 식으로 하고 버티고 그러는 거예요.

 

 

 

 

한국 사람들이 어학, 말이 짧으니까 외교적인 술어를 못쓰는 거예요. 그래 가지고 마음 안상하고 물을 말 다 묻고 다 부탁할 것 다 할 수 있는데 그러고 나가서는 자기는 잘했다고, 본사에서 나왔기 때문에 우월감을 가지고 화란 사람들을 우리가 고용한 회사니까 그런지 몰라도 완전히 한국 회사에 대해서 적대감을 갖게 하고, 그래 내가 물어 봤어요. 그 지점장 보고, 한국 항공회사에서 근무하는 사람들이 여기서 일하는 것을 수치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말이 짧으니까 외국 나가서 상담을 해도 이런 외교적인 언어들을 전혀 못하거든요. 말이 짧으니까! 우리 말로 한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통역을 시켜 놓고! 이해를 해야 이게 사회생활이 되고 좋은데 이해할 길이 없는 거지요.

 

 

 


우리는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원수까지 잘 사랑할 수 있습니까? 원수를 사랑하라!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그렇게 죽으셨으니 원수를 사랑합시다. 사랑합시다 그렇게 말하면 얼마나 외치기도 좋고 듣기도 좋습니까? 허나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대학원에서 강의할 때 했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어느분이 목사님보고 7계를 범했다고 하고 그냥 소문을 내서 왈칵 뒤집어졌는데 그래 가지고 목회 생명을 망쳐 놓은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물으니까 사랑을 어떻게 해요? 죽어도 못합니다.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그랬는데 어떻게 사랑하다니요? 그게 원수 아닙니까? 세상적인 원수야 듣기도 좋고 말하기도 좋지만 법적으로 자기가 하지도 않은 일을 했다고 뒤집어 씌워가지고 목회 생명을 망쳐 놓고 내어 쫓는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 그렇게까지 가려면 성자의 경지에 가야지요. 바쁘게 살다보면 언제 그 경지에까지 갑니까? 짧은 이 세상에서 돈벌고 가정생활하고 바쁘게, 아무리 열심히 그리스도인이 덕을 쌓아가면 그리스도인의 성품을 함양해 간다 하더라도 이거 어려운 거지요.

 

 

 


그러니까 이 세계에서는 칸트가 80을 살았는데도 그 바른 도덕을, 덕을 함양하는 데는 이 기간이 너무 짧다. 그러니까 내세가 있어야 되겠다. 내세가! 그리고 이 세상 살면서 온갖 악을 행한 사람들은 잘산다. 그렇지요? 지금 뭐 5공 비리를 행한 사람들 그냥 뭐 백담사에 가 앉아 있어도 철옹성 속에 가 앉아 있지 않습니까? 누가 총을 들고 가 쏘겠어요? 칼을 들고 가 찌르겠어요? 정호용이 물러나야 한다고 그래도 내가 왜 물러나? 내가 37명이나 되는 TK사단의 장인데... 그렇지요? 내가 대통령을 해먹을 그 다음 바통을 이을 사람인데, 내가 왜 물러나? 그러고 끄덕도 안하고 잘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뭐 돈 많이 먹은 사람들 얼마나 잘 삽니까? 그리고 우리같이 이렇게 의롭게 살려고 하는 사람들, 조금만 교인들이 돈을 가져와도 황공스럽고, 혹 돈을 조금 받아도 이게 부끄럽고 창피스럽고, 이렇게 여린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늘 가난하게 살고, 그러나 통 큰 사람들, 그렇게 전두환 씨 같은 사람들 쥐고도 잡고 7,8년, 9년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은 잘 살고, 그래 죽어가지고 그 사람이나 나나 똑같다면, 내세가 없어서, 무슨 차이가 있느냐 말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악하게 살았든 선하게 살았든 간에 아무 차별도 없이 내세에 가서 똑같다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말이예요? 그러면 누가 일률적으로 살려고 하겠어요? 바르게 살려고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계셔서 이 선악의 진보의 도에 따라 상급과 형벌을 주는 존재가 있어야 된다. 그러니까 요청이예요. 요청!

 

 

 


하나님이 계셔서가 아니고 우리의 윤리생활을 바로 하려면 내세도 있어야 하고 또 하나님도 있어야 한다. 또 그것 뿐이요? 강제 아래서 선을 행한다면 그건 의미가 없는 거지요. 강제 아래서 선을 행하면 그건 의미가 없습니다. 사람에게 자유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자유 의지 있는 것 증명할 수 있습니까?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어요? 그러니 바른 윤리 생활을 하려면 자유가 요청됩니다. 증명되지 않지만 요청됩니다. 자유를 증명한 사람이 있습니까? 이제까지 자유에 대해 많이 노래하고 찬양하고 자유를 위해서 투쟁해도 자유를 증명할 수 있어요? 궁극적인 문제에 있어서 증명하지 못하지요. 그러나 요청됩니다. 자유가 있어야 된다고 말해야 윤리가 성립하지, 자유가 없이 어떻게 윤리가 성립하겠어요?

 

 

 


결국 자유와 내세와 영원의 불멸, 그리고 하나님의 존재가 요청됩니다. 이건 지식적으로 증명되는 상황이 아니예요. 요청됩니다. 그런 식으로 칸트는 하나님과 내세를 요청해요. 이건 증명되는 상황이 아니예요. 윤리 생활이 가능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요구되는 상황이예요. 철학적으로도 내세를 증명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아까 과학으로도 참 과학도 증명을 하지만 대부분의 거짓 과학은 부정하지요. 거짓 과학들, 그러니까 우리가 과학을, 이중에 자연과학을 가지고 신학을 하신 분도 계시겠지만 과학을 모르는 우리들, 과학에 대해서 조금 컴플렉스가 있지요. 잘 모르니까!

 

 

 

 

그래도 과학에 대해서 그렇게 컴플렉스 가질게 없습니다. 과학처럼 부정확하고 불확실한 것이 없어요. 가장 확실한 건 하나님 말씀이고 하나님 계시지요. 하나님의 가르침에 의해서 영혼이 사후에 존재한다. 그리고 죽으면 신자는 하나님 품으로 가고 불신자는 여기 음부라고 되어 있는데 지옥으로 간다. 자, 죽으면 영혼이 어디로 가느냐? 주 예수께서 육체를 입고 계신 그곳으로 가요. 그곳이 어디냐? 그렇게 증명을 하고 말하라 그러면 어렵지요. 그러나 그 세계는 시간이 지배되고 있는 이 세계는 아니다. 그럼 은하계 밖이냐? 은하계 밖이면 그럼 시간이 없느냐? 또 그렇게 말할 수는 없지요.

 

 

 

 

시간이라는 것이 명암으로, 상태의 변화로 나타나니까 영혼은 육체를 벗으면 그와 같은 상태를 벗어나요. 그래 영원의 세계로 가지요. 하나님이 계신 곳에! 그러면 죽어서 그렇게 되지 않는다고 하는 주장을 하기 전에, 그러면 낙원하고 음부는 무엇이냐? 자, 지금 신지들이 죽으면 낙원에 가고 주님 오셨을 때는 천당에 가는 걸로 알고 있고, 불신자는 음부에 가고, 주님 재림하신 심판 후에는 지옥으로 가는 걸로 알아서 중간기 처소가 따로 있는 걸로 대부분 믿고 있어요. 그런데 낙원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이 계신 곳하고 별도의 처소로 낙원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상에 못 박힌 그리스도께서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셨는데, 강도를 향해서! 그것은 왜 그렇게 하셨느냐 하면, 낙원이 천당과 별도의 곳에 있기 때문에가 아니고 여기보면, 누가복음 23장 43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 그 낙원이라고 하는 것이 천국과 별도의 지점으로 불신자들이, 악한 자들이 가는 마지막 종착역 전에 음부에 상하는 지점으로 알고 있는데 그런 것이 아닙니다. 왜 그러면 주님이 낙원이라고 했느냐? 첫 낙원이 타락으로 인해서 폐쇄되고 그리고 노아 홍수 때, 나는 그렇게 믿고 주장을 해요. 언제 이것이 완전히 소실되었느냐? 노아 홍수로 하나님이 완전히 흔적을 없애 버리셨다.

 

 

 

 

나는 그렇게 믿고 주장을 하는데, 현대 신학자들은 낙원이라는 것을 별도의 그와 같은 존재로 인정하지 않지요. 칼 발트도 낙원이라고 하는 것은 일하는 장소를 뜻할 뿐이지 어느 지구상의, 지도상의 여기를 딱 찍어서 낙원이라고 지시할 곳이 아니라 그렇게 해석합니다. 칼 바르트가! 지구를 딱 펴놓고 바로 여기라고 할 곳이 지구상에 없다. 그래 지금 보면 ‘동쪽에’ 그렇게 되어 있지요. 자, 그런데 처음 낙원이 소실되니까 후대 유대교에서 낙원의 사상을 발전시켜서 하늘로 올렸습니다. 지상에 있던 낙원을 후기 유대교가 하늘로 올려요.

 

 

 

 

그래서 후기 유대교에 의하면 낙원이 메시야의 처소입니다. 그래서 낙원이 하늘로 올라가 형성되는데 메시야의 처소를 낙원이라고 말해요. 그 바로 유대인들이 알고 있는 그 사상을 예수님께서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하심으로 밑에 사람들이 다 듣고 있지요. 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과 백성들이 다 듣고 있는데서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하심으로 바로 십자가에 못 박힌 내가 너희들이 못 박은 내가 메시야라는 것을 증명하신 것입니다. 바로 이 낙원을 사용하심으로 자기가 메시야이신 것을 백성들에게 선언하신 것이예요. 그런 것이지 낙원이 천당보다는 증간지점, 우리가 아브라함이,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품처럼 아직 천당과 같은 상태 이전의 곳이 아니라, 죽으면 다 주님 계신 곳에 가지 낙원이란 별도 처소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럼 음부는 어떠냐? 음부는, 음부란 말은 구약에서는 스올이라 그러고 희랍어에는 하데스라고 되어 있어요. 그 23절에 보면 ( ), 하데스에서 그의 눈들을 들어서, 어디 있느냐? ( ), 밑에 있으면서,( ) 멀리서 아브라함을 보면서 ( ), 나사로도 보고 그의 품 안에 있는 나사로를 보았다. 그래서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으로 가고 부자는 음부로 갔으니까, 하데스라는 곳으로 갔으니까 음부라는 곳이 따로 있지 않느냐? 그런데 여기서 스올이라고 하는 히브리어가, 보통 여기서 세 가지 뜻인데 첫째로는 죽음을 뜻하고, 두번째로는 무덤을 뜻하고, 세번째로는 죽은 자들이 가는 곳을 뜻합니다. 우리 한국에도 기독교 복음이 들어오기 전에는 죽은 자들이 다 저승으로 간다고 했어요. 다 저승으로!

 

 

 

 

그 저승이 죽은 자들의 세계 아닙니까? 스올로 간다. 죽은 자들에게로 간다. 구약도 말했는데 계시가 점점 더 명백히 밝혀지면서 스올이 죽은 자들이 가는 곳에서 구분되어 나왔지요. 그때는 선한 자와 악한 자들이 구분되는 것으로 말하지 않았어요. 죽은 자들이 다 같이 가는 곳으로 말했는데 이것이 이제 하데스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데스나 스올이나 다 마찬가지로 악령들이 가는 곳이라. 그러면 이곳이 지옥 전이냐? 아브라함 카위퍼는 재미있게 해석을 해서 주님이 재림하시기 전이기 때문에 지옥의 문 앞과 같은 데다. 하데스를! 아브라함 카위퍼가요! 이 본문 보면 거기서도 분리되는 괴로운 곳이니까 다 지옥을 뜻합니다. 그래서 음부하고 지옥을 말하고 별도의 처소가 아니다.

 

 

 


그러면 왜 죽은 자들의 세계라고 하느냐? 지난번에도 제가 말씀했듯이 우리의 인간의 인격에는 영혼 뿐만 아니라 육체가 필연적인 구성요소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육체가 없는 영혼은, 육체를 벗은 영혼은 산 자의 세계에서 끊겨있고 적극적인 활동을 못합니다. 그러니까 죽은 자에게 속합니다. 그리스도의 품에 가서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며 살아도 죽은 자들은 죽은 자들의, 그러니까 주님께로 간 영혼들은 죽은 자에 속하지 산 자에 속한다고 할 수 없다. 죽은 자에 속한다.

 

 

 


자, 중간기는 있으나 중간기 처소는 없다. 그것이 지금 말하려고 하는 요점입니다. 중간기 상태는 있으나 중간기는 있지요. 중간기 처소는 없다. 개인 영혼이 죽을 때부터 주님 오실 때까지가 중간기 상태라. 그러나 별도의 처소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자, 그것이 바른 기본이고 죽으면 죽은 자가 일단 산자의 세계에서 끊긴 것이니까 이곳에 머무르는 것이 아닙니다. 공중에 배회하는 것도 아니고 바로 저쪽 가야 할 자리로 갑니다. 그리고 앞으로 이야기가 나오겠습니다만 인간의 영원한 운명은 죽은 후에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몸을 입고 살아 있는 생존기간에 결정이 됩니다. 그것이 확실하고 확실히 해야 할 진리입니다.

 

 

 

 

이 중간에 많이 생긴다고 하는 이론이 많아요. 그러기 때문에 문제가 있어요. 첫째 하나가, 이것 하기 전에 스칸디나비아에 스웨덴보르크라고 하는 아주 입신의 경험이 많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스웨덴보르크에 의하면 인간의 몸은 둘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완전한 육체적인 몸하고 영적인 몸으로 되어 있다. 죽으면 육체적인 몸은 벗고 영적인 몸으로 부활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이 스웨덴보르크에 의하면 참 좋아요. 죽는 것이 더 좋은 겁니다. 왜냐? 육체적인 몸을 벗고 영적인 몸으로 부활하는 것이니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영적인 몸은 우리가 부활 때 주의 권능으로 변화되는 것이고 우리 지금 현재 몸 속에 영적인 몸이 또 들어있다. 지금 현재 우리가 아는 이와 같은 몸 이외에, 영적인 몸이 또 있다고 하는 것을 성경이나 다른 것으로 전혀 증명할 길이 없습니다. 스웨덴보르크는 신인합일, 또 입신 이런 걸 너무 많이 해서 세계를 너무 많이 돌아다녔기 때문에 이런 것을 만들어냈는지 모르지만 그러나 전혀 이런 것은 없습니다. 영혼이 주의 품으로 가는 것이고 지옥으로 가는 것이지, 영적 몸으로 부활, 우리의 몸이 이중 구조로 되어 있어서 지금 보이는 몸이 육체적인 몸이고 이 안에 영적인 몸이 또 있어서 영적인 몸으로 부활한다. 죽음이 바로 부활이예요. 스웨덴보르크에 의하면 죽는 것 자체가 부활입니다. 영적인 몸으로, 옛몸을 벗어버리고 영적인 몸으로 살게 되니까요. 

 

 

 

 

그 다음에 스피리티즘이라, 영계주의인데, 이게 지금 뭐라고 번역을 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저 뉴욕에서 생긴 사건인데 어느 집에 살인사건이 생겼어요. 19세기인가, 18세기인가, 그런데 이 영이 늘 들어와서 괴롭힌다. 그러니까 그 딸이 어느날 그 집의 딸이 뭐라고 말했느냐면 이 테이블을 가지고 표시를 하게 하자 그렇게 했는데 실제로 영이 와서 테이블을 흔들었다는 거예요. 그러기 때문에 이제 두렵고 그래서 딴 집으로 이사를 갔는데 그 영이 또 그대로 따라왔다. 그 집에 와서 또 테이블을 흔들었다.

 

 

 

 

그러면서 영이 나타나서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기도 하고 또 연필로 긁어 써서 의사를 표하기도 하고 그래서 이 영혼이 현재 살아있다. 저 세계로 가지 않고, 저승에 가지 않고 이 세계에 살아서 운동하고 활동하는 걸로 그렇게 말했습니다. 이 초대교회서 부터 있던 이단이지요. 그래 이것이 변형된 형태가 소위 김기동 목사의 귀신론, 김기동 목사 여러분도 다 아시지요. 글을 안 읽어도 다 돌아다니는 말로 아시지 않습니까? 저도 읽지는 못했어요. 김기동 목사 저도 옛날에는 만나서 압니다. 옛날에 60년대 69년인가 70년도 그 어간에 내가 만났어요. 그때는 아주 귀신을 쫓는 초보적인 단계였습니다. 그래서 아직 이단으로 정죄되지 않을 때고 그렇게 문제가 아주 적을 때였어요.

 

 

 

 

그런데 귀신을 쫓아냈을 때 녹음한 것을 틀어주면 이것이 귀신이 말하는데, 여자 귀신인데 이것이 김기동 한테 데리고 와갖고 나를 나가게 하려고 그런다고, 목소리를 변해갖고 말하는 걸 들어보고 했는데, 이 사람은 이 김기동 목사는 어디서 이렇게 희한한 귀신을 만들어 내는지, 인간의 수명이 홍수 이후에 120세까지로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120세가 인간이 정상적으로 살아야 할 수명이고 그 이전에 죽으면 120세 수명을 지상에 있으면서 떠돌아 다니다가 120년이 차면 저승으로 간다. 음부나 낙원으로 간다 그러는데, 자 아까 말씀드렸던 대로 죽은 자가 죽은 자의 세계로 가면, 사람이 죽으면 영혼이 육체와 분리되고, 우주로 부터 분리되기 때문에 산 자의 세계에서 죽은 자로 가지 산 자의 세계에 남아 있을 수 없고, 일단 죽은 자의 세계에 갔던 자가 산 자의 세계에 넘나들 수 없습니다.

 

 

 

 

이게 전적으로 그릇된 이론이고 그 귀신이 되어 가지고 또 들어간다고 그러는데, 죽은 자의 영혼이 귀신이 되어서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본래 귀신이 있습니다. 있는데 죽은 사람이 버정상적으로 죽었을 때 그 되풀이를 할 수 있는 그와 같은 근거를 가지고 그 사람의 탈을 쓰고 그 사람에 해당되는 사람에게 들어가지요. 내가 며칠 전에 어느 의사를 만났는데 그 병원에 약사로 근무하는 약사에게 귀신이 들렸다는 거예요. 누구 귀신이 들렸느냐? 오빠의 귀신이 들렸다. 여자가 몇 살이냐? 28살이라. 그래 그러면 내가 물어봤어요.

 

 

 

 

그러면 그 오빠가 결혼하지 않고 죽었다더냐? 그렇다 그래요. 처녀귀신, 유명한 이야기 아닙니까? 내가 추측하긴 그래요. 오빠가, 그런데 영락없이 귀신 행세를 한다는 거예요. 영이 들린 사람이! 그래 할 수 없이 병원에서 쫓고 원장도 벌벌 떨고 많이 어려움을 당했다는데! 사람이 죽으면 귀신이 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은 자기 갈 곳으로 갑니다. 신자는 주님의 품으로, 악한 자는 다 지옥으로 가지요. 중간 상태는 없습니다. 그런데 억울하게 죽은 경우, 그런 경우는 귀신이 그 한을 가지고 죽은 사람의 경우에 그 사람을 해칠 수 있는 명분을 얻고 그 일을 하지요. 그런 것이지 사람의 영혼이 귀신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김기동 목사도 사람의 영혼이 귀신된다고 말하는데 사람의 영이 귀신이 되는 것이 아니고, 악령들이 있는데 그 악령들이 그렇게 죽은 사람들의 한을 받아가지고 지상에 산 사람들에게 악을 행사하는 거지요. 그러나 산 사람의 영혼이 죽으면 귀신이 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그러면 사무엘서에 보면, 사울이 하도 위기를 당하니까 사무엘을 불러 올리지 않습니까? 그건 어떻게 해석할 것이냐? 성경이 구약의 그러한 현상까지 부인하는 게 아니예요. 인정은 해도 그렇게 하는 것을 금했지 그러한 현상까지 부정하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영들의 활동은 인정을 한다고요. 목사님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뭐라고 가르치셨어요? 교인들에게! 분명히 영매를 이용해서 사무엘을 부르니까 사무엘은 몰라도 영매들은, 그 점쟁이는 보지요. 사무엘의 얼굴이 어떻게 생겼느냐? 허연 옷에 허연 수염을 내고 머리가 어떻게 생기고 했다. 그래 맞았다. 영락없이 사무엘이다. 그러면서 네가 오늘 죽을 것을 예언한다 말이예요. 그러니 이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사무엘의 영이 이렇게 신접한 자에 의해서 불려져 올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말입니다. 그런 것이 아니고 그 귀신이 신접한 자의 영매에 의해서, 주술에 의해서 귀신이 사무엘의 형태를 입고서 나타난다.

 

 

 

 

예언은 어떻게 하느냐? 예언하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사무엘 자신이 예언한 것이 아니라 사무엘이 말한 것처럼 사무엘의 형태로 예언을 한 거지요. 하나님이 지금 사울을 죽게 하기로 작정해 놓으셨기 때문에 영들이기 때문에 알아요. 될 일을! 그런 것이지 사무엘의 영이 땅으로 부터 올라오는 것이 아니지요. 자,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사람의 영은 죽으면 저승에 간다. 우리 말로 하면! 신자들, 선한 사람의 영혼은 주님의 품으로 가고 악한 자들의 영혼은 지옥으로 가지 이 산 자의 세계를 넘나들며 행동하는 것이 아니다.

 

 

 


그 다음에 아까 제가 칸트의 실천이성비판에 대해서 여러분께 이야기 했는데 칸트에 의하면, 칸트가 제일 강조하는 것이 윤리입니다. 물론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이 제일 훌륭한 저서이고 그 책이 근세를 만든 분수령입니다. 칸트 이전의 신학하고 칸트 이후의 신학은 180도 반대극에 서 있어요. 그러니까 근세 신학 이후에 전개되는 것을 알려면 칸트를 이해하지 않고는 도대체 근세신학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 알 수 없고 왜 그렇게 내용이 바뀌었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칸트를 알아야 필수입니다. 근세철학과 신학에서 분수령이 칸트입니다.

 

 

 

 

그런데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으로 인간의 이성이 알 수 있는 영역을 제한해서 이 감각세계, 시간과 공간의 세계로 제한을 했습니다. 그런데 칸트가 그렇게 한 기본 이유 중에는 오히려 윤리 세계의 생활이 바로 이루어지기 위해서 그와 같이 한 것입니다. 칸트에게 있어서 중심점은 순수이성비판, 그러니까 지식을, 순수한 지식을, 과학적인 지식을 탐구하는 그 영역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인간이 바르게 살 수 있는가 하는 윤리의 영역이었습니다. 그래서 칸트 만큼 의무를 강조하고 윤리의 법을 도덕을 강조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칸트 속에 칼빈이 들어있고 또 둘이 서로 영향을 주었다.

 

 

 

 

한쪽은 16세기 사람이고 한쪽은 18세기 사람인데, 200년의 차이가 있는데도 그런 소리를 해요. 그만큼 칸트가 윤리를, 법을 강조를 했어요. 그러기 때문에 칸트에게서 영향이 한 세 가지로 나타나는데 기독교 영향으로는 슐라이어막허가 그와 같은 신학을 했고 슐라이어막허의 윤리주의 학자들이 있습니다. 그래 가지고 칸트의 실천이성비판의 영향을 입은 사람들이 윤리의 진보를 많이 강조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죽은 후에 이것이 운명이 완전히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죽은 후에도 발전하고 윤리를, 인간의 덕을 함양하는 진보의 단계가 있다 그렇게 주장을 했습니다. 19세기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죽을 때 일이 바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운명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아직도 계속적으로 완전한 운명을 결정하는 일이 차후에 진행되고 있다. 우리는 그걸 반대하지요. 전통적인 우리의, 특별히 개혁주의 입장에 의하면 살아있을 때, 중생 후의 성화의 과정이 어떠했든지 간에 죽는 순간 하나님의 그의 특별한 영적인 은혜의 역사로 성화를 종결시키고 완결시킵니다. 그래서 주님 앞으로 갈 때에는 완전히 죄과를 벗고 죄의 몸을 벗고 깨끗해진 영혼으로 주 앞에 가요.

 

 

 

 

그러니까 죽은 후에도 지상에서 성화가 계속되는 방식으로 성화가 진행되지 않습니다. 죽을 때 하나님께서 그 순간 특별한 하나님의 역사로 우리의 영혼을 변화시켜서 완전하게, 깨끗하게 해서 주님의 품으로 데려 가십니다. 그때는 비록 어린 아이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을 듣지 못한 어린 아이라도, 선택된 경우는 성령의 특별한 공작에 의해서 그를 중생시켜서 완전히 깨끗하게 해 가지고 주님 품으로 가요. 그러기 때문에 죽은 후에 성화같은 진행이 주님 품 안에 가 있는 동안, 천국에 가 있는 동안 진행되지 않는다.

 

 

 

 

그런데 윤리주의자들은 그렇게 말해요. 죽은 후에도 계속적으로 덕의 진행이 이루어진 다음에 사후에 완전한 운명이 결정된다. 그러니까 이게 신학을 이해하려고 해도 철학을 조금은 알아야 이해를 할 수 있습니다. 왜 그러냐면, 18세기에, 18세기가 분수령인데, 개신교의 신학자들이 신학하는 원칙을 정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이 우리가 갖고 있는 복음, 신약의 복음을 그 당대의 언어로 번역하는 것, 그것이 신학작업입니다. 그것이 신학하는 원칙입니다. 그래서 이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복음의 내용을 그 당대의 언어로, 그 당대의 사상으로 번역하는 것, 그래서 그 당대의 사람들이 알아 듣도록 하는 것이 신학 활동의 기본작업이라고 정했습니다. 

 

 

 

 

이 원칙 이후 때문에 18세기 이후에 그렇게도 많은 신학이 일어났다가 사라진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래 철학이 나올 때마다 그 철학에 맞추어서 신학을 새로 만들어요. 칼 바르트도 그렇고, 불투만도 그렇고, 틸리히도 그렇고, 지금의 몰트만도 그렇고, 판넨베르크도 그렇고, 다 철학 없이는 생각할 수가 없어요. 다 그 배경이 전부가 철학이 결정하고 있어요. 이것보다 더 근본적인 것은 연옥, 연옥은 로마교회가 중요한 교리로 확정을 하고 있지만 연옥교리는 로마 교회만 있는 것이 아니라 희랍정교회도 갖고 있습니다. 희랍정교회가 갖고 있다는 말은 초대교회 교부들에게도 이 연옥 사상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근자에 와서 연옥 사상이 생긴 것이 아니고 초대 교부들, 그러니까 그레고리, 대 바실, 그런 사람들에게 벌써 연옥 사상이 있었습니다. 왜 그렇게 말해야 되냐면 로마교회는 계속적으로 교리를 발전시켜 왔는데 이 희랍정교회, 동방정교회는 5세기가 제일 분수령이예요. 451년 칼세돈 공의회가 의합 신학자들의 활동의 최고 피크이고 그 이후에는 거의 없는 것처럼 사라져요. 거의 신학 활동이 없어집니다. 그 이후에는 완전히 서방측으로 논의 주도권이 넘어옵니다. 그런데 787년 제 2니케야 공의회는 거의 신학활동이 없다고 해야 맞습니다. 동방교회에,

 

 

 

 

그러니까 그전에 이미 형성된 교리만 붙여가고 있어요. 그러니까 자기네들이 정교회라고 주장합니다. 정통교회, 그러니까 희랍정교회는 연옥은 있어서 거기서 정화의 과정을 밟는다는 것은 인정은 하나, 그 면은 인정은 하지만 로마교회는 지상에서 하는 행동이 그 연옥에서의 정화과정과 시기를 결정한다고 하는 것에 있어서 차이가 있습니다. 로마교회는 미사와 선행과 많은 헌금을 통해서 연옥에 가 있는 자들의 정화기간을 단축하고 천국으로 들일 수 있지요. 그러나 희랍정교회는 지상에서 진행되고 있는 선행이라든지 교회의 많은 헌금이라든지, 교회를 유익하게 하는 큰 일을 하는 것이 이 연옥에 가 있는 사람들의 정화과정에 아무런 상관이 없다. 

 

 

 

 

자, 그러나 우리는 서방교회에서 나왔기 때문에 연옥은 성경적으로만 생각하지 아니하고 목회학적인 관점에서만 생각하면 이게 참 그럴듯하고 좋은 점 아닙니까? 내가 미국에서 참 신실한 가톨릭 신자를 만났어요. 자기 말로 그래요. 자기는 거짓말도 하지 않고 그저 자기가 어느 음식점, 식품회사 같은 데서 일한다고 해서 거기서 혹시 피로하면 먹기는 한다고 하더라도 그런 것을 갖고 싸 짊어지고 집에 가는 일은 없다. 참 착실하고 훌륭한 크리스챤, 로마 가톨릭이에요.

 

 

 

 

그래 내가 물었어요. 너 오늘 저녁 죽으면 천당가지? 예수 믿지? 한참 있다가 연옥은 가겠다. 천당가는 자신이 없어요. 연옥은 갈 수 있대요. 내가 교회 속해 있고, 양심에 거리끼는 일 안했고 그랬기 때문에 천당에 직접은 못가도 연옥은 갈 수 있다. 연옥이 성경에 아무 근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연옥을 보편적으로 받아들이고 믿는다 말이예요. 죽을 때에 세례 받고서 죽을 때에 교회하고 화평한 중에 죽지 못했거나, 그러나 완전히 고해성사를 이루고 죄과를 다 해결하지 못했거나 그의 생활이 바르지 못한 사람은 바로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연옥으로 간다.

 

 

 

 

그래 얼마나 인도적이고 좋습니까? 거기서 정화해 가지고 그 악들을 다 쏟아내고 정화해서 천국으로 올라가니까 좋은 거지요. 그런데 그 천국에 올리는 것을 누가 하느냐? 천국과 지옥의 열쇠를 받아 가진 베드로의 후계자인 로마교회가 해요. 그러니까 미사 같은 것을 통해서 천국으로나 지옥으로는 안보내지요. 천국으로 보내고 단축기간을 줄일 수 있다. 지상에서 진행된 큰 선행이나 교회를 위한 큰 봉사나 교회에 바친 큰 헌금들이 그 기간을 단축시킵니다. 그것은 성경에 근거하지 않고 유교사상의 영향으로 들어온 것이지 성경에 의한 것이 아니라! 성경에 근거가 없다.

 

 

 


여기 보면 우리가 오늘 본문으로 읽은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도 보면 죽은 자가 바로 지옥에 가고 또 나사로가 바로 아브라함의 품에,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갔지, 중간기 처소에 가서 정화하는 기간을 거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완전히 선한 사람들은 천국에 가지만 세례받고 완전하지 못한 사람은 연옥으로 가고, 그래도 악한 자들은 지옥으로 가고, 그리고 이제 세례도 받지 못하고 어렸을 때 죽은 선악을 가부간에 행하지 않은 어린 아이들은 림보에 간다. 로마교회에 가면 천국, 연옥 림보, 지옥, 세례도 받지 않고 선악을 행하지도 않은 어린 아이들은, 세례도 받지 않았으니 구원받을 수 없지요. 로마교 교리에 의하면!

 

 

 

 

그렇다고 지옥으로 보낼 수도 없기 때문에 림보로 보낸다. 림보는 적극적인 악과 고통이 있는 것이 아니고, 그냥 자연적인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곳이라 그래요. 이것도 목회학적으로 참 좋은 것이지요. 어린 아이가 낳자마자 얼마 안되어서 죽었는데, 죽어서 얼마나 참 슬프고 섭섭한데 신부님이 오셔서 유아림보에 갔다. 그러니 너무 슬퍼하지 말라 할 때 얼마나 위로가 되고 소망이 있겠어요? 내 자식이 지옥은 안갔으니까 소망이 있고 기쁜 거지요. 참 우리는 이런 데 가서 뭐라고 위로할 말이 없어요. 뭐라고 위로를 합니까? 지옥을 갔다고 말해 주겠습니까? 천당을 갔다고 말해 주겠습니까? 말 못해 주지 않습니까? 로마교회는 훨씬 앞서 있어요. 그런 면에!

 

 

 


그래 노르만 빈센트 필 목사도 그 책에 보면 처음 목회지에 갔을 때 젊은 부부가 사는 집에 어린 아이가 죽었다. 찾아가도 할 말이 없는 거지요. 뭐 위로할 말이 없는 거지요. 그래도 위로하면서 교회도 아직 자기 교회 나오지 않는 사람인데, 자기기 부임해 왔기 때문에 찾아가 위로한 거예요. 등을 툭툭 두드리면서 그래도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그 말 밖에 할 말이 없는 거예요. 아들이 죽었는데 뭘 나를 사랑해요? 그런 슬픔과 고통이 심할 때에 그래도 하나님이 당신들을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나왔더니 그 후에 장례 지내고 다 끝나고는 자기 교회 나와서 좋은 크리스챤이 되었다.

 

 

 


우리는 할 위로의 말이 없는데, 어린 아이들이 죽었을 때 가서 로마교 신부님은 유아림보에 가 있으니 너무 걱정하고 염려하지 말아라. 그래 얼마나 좋은지... 거기는 또 좋지만, 자기 남편이 죽었는데 지금 연옥에 갔다. 불의를 행해서 고통을 받고 있으니까 교회를 위해서 큰 일을 하면 고통 받는 기간이 단축되고 빨리 정화가 이루어지니까 큰 고별미사를 하도록 해라. 재산 다 바치는 거지요. 남편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그냥 다 바치고 나면 살 게 없는 거지요. 살 게! 그래 나중에 어디로 갑니까? 천막 치고 성당 주변 가서 교회서 주는 옥수수 죽 먹고 사는 거지요. 남미가 대부분 그 상황이예요. 성당 주변이 다 빈민촌이예요.

 

 

 


그리고 림보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이전에 죽은 사람들, 구약 교회 조상들은 그리스도의 피를 흘리지 않았기 때문에 속죄가 이루어지지 않았어요. 그래 천당에 못갔어요. 어디에 가 있어요? 조상림보, 조상들의 림보에 가 있어요. 그래 또 그럴 만한 성경구절이 또 있어요. 없는게 아니라고요. 어디에 있습니까? 자, 베드로전서 3장에도 있어요. 18절,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19절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또 여기만 있습니까? 바울에게도 있어요. 어디에 있습니까? 사로잡힌 자들을 땅에 내리셨던 그가 하늘로 올리시면서 사로잡힌 그들을 하늘로 데려가셨다고 되어 있어요. 바울이 그랬어요.

 

 

 

 

그러니까 이 조상림보라고 하는 것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좋은 거지요. 왜 그들이 천당 못 갔느냐? 아직 그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를 흘리기 전에 죽은 자들이기 때문에 속죄가 이루어지지 않았어요. 그래 천당 못 간거지요. 그러니까 조상림보에 가 있다가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되셨을 때 그 오신 곳이 어디예요? 여기 영으로 옥에 있는 악한 자들에게, 베드로전서 3:18에 이렇게 되어 있는데, 전파했다고 하는데 바로 이때 주님이 그들에게 가서 옥 문을 열고 조상림보에 갇혀있는 아담부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그 이전에 죽은 유대인들을 다 끌어 내셨다. 

 

 

 

 

그러면 우리는 뭐라고 답해야 됩니까? 비록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지금부터 2,000년 전에 흘려졌지만 하나님께서 그의 영의 권능에 의해서 그의 피와 그의 의가 그의 조상, 택한 백성들에게 전가되게 하심으로 바로, 물론 그들의 죄도 그리스도의 피에 의해서 용서되었지만 하나님의 경륜에 의해서 그의 피의 공로가, 또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그의 의가 구약 백성에게 전가되게 하심으로 그의 공로에 의해서 하나님 품으로 갔어요. 시간적으로 사고하는 현대인들에게 로마교회의 조상림보가 더 설득력이 있어요.

 

 

 

 

그러니까 저 나치에 관한 그런 글들을 읽어보면, 기억이 분명히 잘 안납니다만 이제 독일에서 김나지움을 다니다가 뉴욕으로 이민을 가서 자기는 문학에 소질이 있어서 문학가가 되기를 원했는데 모든 친족들이 다 반대를 해서 할 수 없이 법관이 되기로 했어요. 변호사, 그래서 밥을 벌어놓고 문학은 그때 해도 된다. 그래서 문학을 해서 자기가 김나지움 시절에 나치 시절에 박해받던 이야기를 써놨어요. 그런데 보면 그 헤르초크, 공작의 아들이 한 반에서 공부를 했는데, 그 사람과 자기와의 관계를 주로 써놨는데 그때 자기를 향해서 나치에 대해서 선전을 하니까 너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지옥으로 꺼져라!

 

 

 

 

그렇게 저주하는 이야기를 써놨어요. 그러니까 나치 아이들이 아는 이야기가 바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지옥으로 꺼져라! 이 말을 보면, 그리스도의 피 이전의 사람들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도 지옥 갔을 것이고 조상들의 림보로 갔다. 자,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가 흘리기 이전에도 아담과 셋과 에녹과 노아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택한 백성들이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가 역으로 진행되어서 하나님의 품에 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피 흘리기 이전에라도! 

 

 

 

 

그 다음에 현대, 이것 하기 전에, 조건적 영생설, 본래 사람은 다 죽도록 창조되었는데 예수를 믿은 사람은 영생에 이르고 믿지 않은 사람은 멸절된다. 또 조건적 영생설과 비슷한 말이 있지요. 조건적 불멸설, 또 뭐 있습니까? 보면 마찬가지예요. 본래 사람이 죽지 않도록 창조되었지만 죄 때문에 다 죽게 되었고, 멸절설, 죄 지은 사람은 다 죽게 되어 있다. 그러니까 죄 지은 사람으로는 살 수 있는 사람이 없고, 그거나 멸절설이나 같은 이야기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을 구원에 이르고, 없는 사람은, 믿지 않는 사람은 멸망에 이른다.

 

 

 

 

이 설에 의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예수 믿으면 영생하지만 예수 안 믿으면 끝나니까 뭐 세상에서 마음껏 살다 죽어도 두려울게 뭐 있어요? 끝나는데, 멸절하는데, 죽으면 멸절이 아니지요. 멸절하고 죽은 것 하고는 다르지요. 오히려 죽으면 적극적인 행동이예요. 존재방식이 변하지요. 이런 것들도 전적으로 하나님의 공의에 배치, 만일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선행을 하고 하나님을 봉사하는 사람이 영생에 이름이 합당하다면 하나님을 배척하고 훼방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끝까지 거부한 사람은 하나님의 공의의 법에 의해서 영벌을 받아야 맞지 그냥 죽어버린다, 멸절해 버린다고 하는 것은 맞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현대인들의 사고에는 이게 맞아요. 왜? 현대인들은 죽으면 무로 돌아가는 것이 끝이예요. 죽음이란 모든 것의 마지막입니다. 죽음이 무엇이냐? 하이데거가 뭘 강조합니까? 죽으면 무로 돌아간다. 아무 것도 없는 거지요. 열반, 열반으로 되돌아가요. 열반이 무엇입니까? 극락이란 곳이 있는 것입니까? 아니지요. 열반이라고 하는 곳은 우리처럼 영원히 있어서 윤회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의 흐름이 불교에 있어서 도는 것이다. 그래 영혼이 저 극락세계로 간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민족 사상을 원효가 토착화해 놓은 것이고, 불교 이름으로!

 

 

 

 

본래 불교 용어로는 영혼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의식의 흐름만 있다. 그것이 해탈하면 더 이상 사이클에서 놓여나기 때문에 더 이상 존재 형태로 구애받지 않아요. 그래 의식이 소산되는 것입니다. 죽음으로 의식이 흩어져요. 없어져요. 완전히 의식의 흐름이! 그것이 입적이예요. 열반이예요. 그것이 소위 불교가 말하는 우리 무식한 한국 백성들이 믿고 열심히 시주하게 한 그 극락세계에 가는 거지요. 없어져요. 죽으면 끝나요. 불교에서는! 해탈하면, 다 거짓 종교들... 

 

 

 

 

그 다음에 마지막으로 지옥, 무슨 말이냐 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선인들이 영생에 이른다고 믿습니다. 영원한 상급에 이른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배반하고 거역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끝까지 거부한 사람들은 영벌에 이르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에 합당하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지옥이 정화처이기 때문에 종말에 가면 지옥이 소실된다고 하는 주장이 있습니다. 이것이 근세에 20세기에 들어와서 칼 바르트의 신학의 영향으로 이루어진 것이지만 초대교회 부터 이 사상이 있었습니다.

 

 

 

 

오리게네스, 오리겐에 의하면 하나님이 만유를 회복하셔요. 하나님의 지으신 존재 중에 하나님의 구원에 동참하지 못할 존재가 아무도 없습니다. 마지막에 모든 것을 회복하시고 완성하실 때에 심지어 사탄까지 정화되어서 그 완성된 단계에 포함됩니다. 그러니까 지옥은 뭐하는 곳입니까? 정화하는 곳이예요. 정화처! 그래서 하나님께서 모든 창조를 완전히 회복하신 그 때에 그 때, 물론 다음 얘기가 또 있습니다만, 너무 복잡하니까 할 건 없고, 그 때에 지옥에 있는 모든 영들이 다 정화되어서, 원상 회복입니다. 그 때에 그런 것을 일으킨 모든 것의 장본인인 사탄도 정화되어서 하나님의 그 완전히 회복하시는 그 세계에 회복되어요. 사탄까지도 하나님의 구원에 동참해요.

 

 

 

 

그러므로 모든 인류의 역사의 드라마가 끝납니다. 그 다음 얘기 또 있지만 그 얘기는 할 필요 없고... 어떻습니까? 이 이론은? 아주 좋지요? 칼 바르트가 20세기에 와서 구원론을 폈는데, 전통적인 개혁신학에 선택교리가 있지 않습니까? 선택교리, 이게 이것 때문에 얼마나 개혁교회와 개혁신학이 욕을 먹어요? 칼빈이 제일 욕을 많이 먹지 않습니까? 죽을 때까지! 그 때 칼빈이 죽었을 때 교황 이름이 피요스네스인데 그 사람이 칼빈이 죽었다는 말을 전해 듣고 그 교황이 뭐라고 말했습니까? 나도 내 신하 중에 저와 같은 이단자가 있었으면 좋겠다. 칼빈이야말로 정말 돈에 욕심 안부리고 복음만을 위해서 일생을 자기 뼈를 갈아서 바친 사람 아닙니까? 대의를 위해서 전력을 다했지요.

 

 

 


한번은 카디날이 칼빈을 방문했습니다. 처음부터 자기를 카디날이라고, 추기경이라고 소개하지 않았어요. 다 제네바의 삐에르 성당, 교회당과 자기의 집들을 다 보여 주었습니다. 살고 있는데 너무 비참하게 살고 있거든요. 칼빈이 그리고 금으로 된 권총을 하나 주었어요. 칼빈에게 카디날이! 그래 바로 그걸 받아서 헌금함에 넣었어요. 그리고는 자기가 카디날이라고 소개를 했어요. 그러자 칼빈이 크게 사과를 했어요. 제가 추기경이신 줄 알지 못하고서 추기경의 존귀에 합당하도록 처음부터 예우하지 못한 것을 진심으로 사과한다.

 

 

 

 

그런데 칼빈은 로마교회도 싫어하고 루터교회도 싫어하고 복음주의요 감리교 계통도 싫어하고 다 싫어 하거든요. 너무 지독한 사람이라고! 그 중에 제일 미움받는 이유 중에 첫번째로 꼽아댜 할 이유가 바로 선택교리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그의 기쁘신 뜻대로( ), 부패의 덩어리들 중에서 일부를 영생에 이르도록 선택하시고 그 나머지를 간과하셨다. 그게 선택 교리거든요. 그런데 그것을 20세기에 와서 칼 바르트가 완전히 뒤집었어요. 칼 바르트에 의하면, 하나님의 선택은 그렇게 악한 자와 선한 자와, 구원 얻을 자와 구원 얻지 못할 자와, 야곱과 에서로 나누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하심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선택과 함께 인류 전체를 선택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유기된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으로 유기됨으로 모든 인류가 다 유기되었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이 선택하므로 모든 인류가 그 안에서 다 선택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칼 바르트에게 있어서 선택교리는 밝은 태양불이지 어둠이 없어요. 어둠이 좋습니까? 물론 죄 지으려면 좋지만, 태양만이, 밝은 빛만이 좋은 거지요. 모든 인류가 다 선택되었어요.

 

 

 

 

그러면 교회 안에 있는 사람과 교회 밖에 있는 사람과의 차이가 무엇이냐?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은 자기가 선택된 사람인 줄 아는 것이지만 교회 밖의 사람들은 그걸 몰라요. 그러기 때문에 복음의 전달이라고 하는 것은 선포하고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대화를 통해서 알게 해 줘야 해요. 그들도 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들이라고 하는 것을 알게 해 줘요. 다 선택되었는데 누가 유기됩니까? 다 선택되었는데 어느 종교만이 하나님께로 가는 길입니까? 그러니까 종교간의 대화가 충분히 가능한 것입니다.

 

 

 

 

이 사상에 근거해서 로마교회도 종교간의 대화를, 그리고 저번에 말씀드렸듯이 교회 밖의 그리스도, ( ) 칼 라너가 참 비상한 정력가 입니다. 윈스터 대학에서 가르쳤는데, 칼 바르트가 14권의 조직신학 책을 쓰지 않았습니까? 13권, 그런데 이 사람도 13권인가 14권인가, 그는 신학을 위한( ), 그는 주제 아래 쓴 것이 아니고 아티클들로, 제목들로 썼습니다. 3,000아티클 이상, 이렇게 굉장히 방대한 책을 썼습니다. 그 중에( ), 무명의 그리스도,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도 다 가증적으로 그리스도인, 다 이미 은혜에 접해 있는 사람, 하나님이 어디에 계셔요?

 

 

 

 

라너에 의하면 이성의 자기를 계시하십니다. 이성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의 계시를 모를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그것이 20세기 로마교회 신학자의 논리입니다. 20세기 개신교 신학자인 칼 바르트의 논리도, 논의가 시작이라고요. 그러면 모든 인류가 다 선택되었어요. 지옥에 가서 마지막에 멸망으로 끝맺음 해야 할 필요가 어디 있어요? 바르트의 후계자들에 의해서 지옥이 정화처로서 지옥이 종말에 의무를 다해요. 그래 지옥이 종말에 소실돼요. 그래 다 불로 정화해서, 악을 제거해 가지고 만유가 회복되었을 때 거기에 동참할 수 있게 했는데 지옥이 더 이상 남아 있을 필요가 어디 있습니까? 종말에 지옥은 없어집니다. 이것이 만인구원설의 가정, 결론입니다.

 

 

 


이 바르트 좋지 않습니까? 왜요? 화란에서 내가 설교를 가끔 들어봅니다. 참 신학적인 논의는 매끄럽게 잘 하는데 복음의 생명력은 없거든요. 그래 내가 그랬어요. 저 사람 바르트 신학을 잘 개진하고 있다. 자, 만인구원설이 되면 예수 안믿어도 됩니다. 지옥에 가서 고생 좀 해도 최후에는 다, 사탄도 정화되어서 완전히 창조에 회복되는데 우리야 육체를 입고 조금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물론 많이 사람을 죽인 자도 있지만, 사탄보다는 다 정하지 않습니까? 다 우리는 하나님이 만유를 회복하실 때 다 회복되었습니다. 회복된 세계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 믿으려고 바득거릴 필요가 없어지지요. 그렇게 되면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필요가 있어요? 오늘 이렇게 해서, 그리고 제 2 시련설이 있는데, 그것만... 이것도 연옥과 같은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윤리적 진보를 말하는 중에 매개 신학자들, 이거 뭐 옛날 이야기니까 할 필요는 없지요. 19세기 매개 신학자들, 헤겔 철학의 영향을 입은 신학자들을 쉽게 말하면 매개 신학자들이라고 합니다. 거기도 하늘로 올라가도록 인류가 작정되었기 때문에 그렇지요. 자, 살아 있는 동안 예수를 믿지 않았어도 죽은 후에 머무는 상태에서, 거기는 아직 중간기 상태이기 때문에 마지막까지 죽은 자의 상태에서 복음을 거절할 때만이 정죄되어 지옥에 이른다고 하는 제 2 시련설이 있습니다.

 

 

 

 

이것도 전적으로 그릇된 것이 죽은 자의 운명은 죽음으로 결정되기 때문에 변경이 사후에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복음으로 구원할 자들을 구원하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에 복음 외의 방법으로 또 한번의 구원의 길을 내신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세상을 구원하는 유일한 길로 복음을 내셨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것을, 예수의 구원을, 이 방법 외에 다른 물리적인 방식으로 구원에 이르게 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바울이 복음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권세라, 권능이라고 그랬는데 로마서 1장 16,17절에 복음의 충족성에 배치다.

 

 

 

 

그러기 때문에 복음 외에 다른 방법으로 구원이 또 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구속경륜, 구원의 경륜을 근본적으로 해치는 것입니다. 사람이 구원에 이르는 길은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길이 아니라! 자, 그 이전에,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전의 사람들은 또 구원에 이르는 길은 이스라엘 밖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그 약속을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셨고, 그 이후의 구원은 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더 이상 구원의 방식외에 다른 방식으로 구원에 이르게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그의 영원한 경륜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한다는 그의 작정에 전적으로 배치된다. 그러기 때문에 배척을 해야 맞습니다. 오늘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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