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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수재에서 도솔봉을 넘어 죽령까지 -
백두대간 26차[저수재~묘적봉~도솔봉~죽령] 산행일지
▣ 산행개요
◈ 산행일자 : 2014. 2.15~16(무박2일) ◈ 날 씨 : 맑음 ◈ 산 행 지 : 백두대간 도솔봉(1,314.2m) ◈ 위 치 : 충북 단양군, 경북 영주시. ◈ 동 행 자 : 낙동산악회원 42명. ◈ 산행코스 : 저수재~촛대봉~시루봉~배봉~싸리재~뱀재~묘적령~묘적봉~도솔봉~삼형제봉~죽령. ◈ 산행거리 : 20.18km ◈ 산행시간 : 10시간13분(02:47~13:00 아침,휴식 포함) ◈ 구간거리 : 저수재-3.98-배재-1.0-싸리재-2.6-뱀재-4.05-묘적령-1.05-묘적봉-1.7-도솔봉-5.8-죽령
◈ 구간별 산행시간 ○ 02:47 저수재(850m : 지방도 927호선), 산행시작. ○ 03:16 촉대봉(1,080.6m) ○ 03:30 투구봉(1,081m) ○ 03:52 시루봉(1,110m) ○ 04:21 배봉(1,084m) ○ 05:02 싸리재(924m) ○ 05:41 흙목(1,070m) ○ 06:00 철탑 ○ 06:22 뱀재(헬기장) ○ 07:02 솔봉(1,021m) ○ 08:18 묘적령(1,019.8m) ○ 08:48 묘적봉(1,148.0m) ○ 09:53 도솔봉(1,314.2m) ○ 13:00 죽령(697m : 국도5호선,36호선), 산행끝. *지도p. 229.
▲ 산행구간(저수재~죽령)
▲ Track : 저수령~죽령
▣ 산행사진 ▲ 2014. 2.15. 23:11 구포역에서.......
▲ 02:28 경상북도 예천군과
▲ 충청북도 단양군 경계지점인 저수령에 도착하여
▲ 02:47 인원점검 후 출발(산행시작)
▲ 03:16 첫번 째로 접수한 촛대봉(출발지에서 0.8km, 33분 소요)
▲ 솔봉까지 12.43km.
▲ 권재구 대장님과.....
▲ 03:30 두번 째로 밟은 투구봉(출발지에서 1.53km, 43분 소요)
▲ 봉팔이님과......
▲ 03:52 세번 째 시루봉 넘고(출발지에서 3.0km, 1시간 5분 소요)
▲ 시루봉 단체 찍고.....
▲ 04:21 배봉 팻말
▲ 04:21 네번 째로 올라 선 배봉(출발지에서 4.19km, 1시간34분 소요)
▲ 05:02 싸리재(출발지에서 4.98km, 2시간15분 소요)
▲ 05:41 흙목(출발지에서 5.93km, 2시간54분 소요), 해발1,070m.
▲ 07:02 다섯 번째 솔봉(1,021m)
▲ 솔봉(1,021m), 삼각점.
▲ 쌀쌀한 날씨에 해가 밝기를 기다렸다.
▲ 08:13 묘적령
▲ 묘적령 오른쪽으로......
▲ 08:18 묘적령(출발지에서 11.63km, 5시간33분 소요), 사동리 하산 갈림길.
▲ 08:48 여섯 번째로 묘적봉까지(출발지에서12.68km, 6시간1분 소요)
▲ 09:48 작은 도솔봉(출발지에서 7시간1분 소요)
▲ 09:53 마지막으로 탈환한 도솔봉(출발지에서 14.38km, 7시간6분 소요)
▲ 도솔봉 Solo
▲ 건너편으로 다음 구간인 소백산 전경.
▲ 11:38 삼형제봉을 지나 마지막 봉우리 가기 전 마지막 휴식 지점(연하봉 11km전방)
▲ 12:00 하산 갈림길, 여기서부터 하산 시작
▲ 12:12 통과
▲ 12:28 통과
▲ 13:00 들머리 팻말(하산완료)
▲ 혼자서 심심하게 내려왔는데 능총님께서 반가히 맞아주네요. 하이~~
▼ 죽령 풍경들
▲ 15:27 풍기호텔 사우나에서 목욕을 마치고
▲ 15:50 식당에 도착하여
▲ 특별 메뉴(인삼갈비탕)로 식사를 마치고.......
▣ 그 외 사진들
▣ 산행후기 출발지에서 도솔봉까지는 언제나 그랬듯이 거의 날아다니는 선두그룹을 쫓아가기에 바빴고, 날이 밝으면서 아름다운 경치가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하는데 가는 도중에 눈길에 미끄러져 디카도 함게 설욕?(雪浴)하는 바람에 디카가 말썽을 부린다. 아쉬운 마음이 가득하지만 눈앞에 펼쳐지는 영상들은 뇌리에 담아 오기로 하고.......
도솔봉에서 죽령까지 5.8km, 이제 다왔다는 생각에 긴장이 풀리면서 체력도 바닥을 드러낸다. 도솔봉에서 삼형제봉을 지나 하산 갈림길까지 1.6km, 이 구간에서 가장 힘이 들었던 구간이다. 삼형제봉을 오를 즈음 잡고 가던 선두 꼬리를 놓고 잠시 쉬는 동안 선두를 놓치고 가다가 뒤 따라오는 마가렛 일행과 모두 네 명이서 삼형제봉을 지나 (죽령 3.9km 팻말) 지점에서 물 한 모금 마시며 한참을 쉬어간다.
여기서부터 마지막 한 봉우리를 남겨놓고 이미 체력은 바닥인지라 정신력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옮겨 가는데 함께 쉬었던 세 분은 보이지 않고 혼자가 된다. 하산 갈림길에서 죽령까지 3.4km, 이제부터는 하산길이다. 시계를 보니 12시 정각. 하산길이라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 부지런히 내려가서 날머리에 도착했을 때 오후 1시 정각이다. 전체 평균 시속 19.975km 산행 속도에 3.4km/h, 오늘 산행 중에서 가장 빠른 시속이다.
도상거리 20.18km지만 실제로는 30~40km이상 되는 에너지가 소모되며 오르내림도 비교적 심한 편으로 많이 힘든 구간이었다. 10시간 이내에 주파한 선두그룹에는 못 끼었지만 그래도 빨리 도착한 셈이다. 어느 산악회 어느 산행기를 보더라도 낙동산악회 12기 선두 그룹만큼 빨리 다니는 것은 아직 보지 못했다. 그리고 후미가 도착할 때까지 불평 한 마디 없이 기다려주는 넓은 아량....... 정말 대단하고 존경스러운 12기 님들이다.
밤새 잠 한숨 안자고 아침식사를 부실하게 한 탓에 스스로 자신을 학대한 대가를 톡톡히 치룬 셈이다. 다음에는 무조건 아침식사를 확실하게 챙겨 먹어야겠다는 결심을 하면서.........
曾子曰 吾日三省吾身 爲人謀而不忠乎 與朋友交而不信乎 傳不習乎 (論語 學而) <증자왈 오일삼성오신하노니 위인모이불충호아 여붕우교이불신호아 전불습호아니라 : 논어 학이편>
“증자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하루에 세 가지로써 나 자신을 반성한다. 남을 위해 일을 함에 충실하지 않았는가, 친구와 사귐에 미덥게 하지 않았는가, 스승에게서 배운 것을 익히지 않았는가.”
오늘의 산행기를 마친다.
▣ 참고자료. ☞ 저수령 저수재 850m 죽령만큼 교통량은 많지 않지만 경북 예천군의 위치에서는 수도권이나 중부 내륙 으로 접근하는 가장 가까운 길이다. 대간의 북쪽 사면을 목초지로 개간하여 소를 기르는 소백산목장이 언저리에 있다. 고갯마루에는 휴게소와 주유소가 있지만 이용자는 많지 않다. 예천 쪽 1Km 지점에 아담한 용두리 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고려 태조 11년(928년) 12월,고려국의 남쪽 성인 고창군(현재의 안동)을 후백제의 견훤이 포위하자 왕건은 유금필을 대장으로 삼고 저수봉으로부터 나아가 크게 이겼다는 기록이 있다.
이로 보아 저수재가 개척된 지는 오래된 것 같다. 우리말로 ‘돼지머리고개’처럼 생긴 곳이다. 이곳은 경상북도 예천군 상리면 용두리와 충청북도 단양군 대강면 올산리를 경계로한 도계(道界)지점으로 경북과 충북을 넘나드는 이 고개이름은 옛부터 저수령(低首嶺)이라고 불리워 왔다. 지금의 도로를 개설하기 이전에는 험난한 산속의 오솔길로 경사가 급하며 지나다니는 길손들의 머리가 저절로 숙여진다는 뜻으로 불렸다고도 하고, 한편으로는 저수령에서 은풍곡(殷豊谷)까지 피난길로 많이 이용되어 왔는데 이 고개를 넘는 외적들은 모두 목이 잘려 죽는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현재의 도로는 지방도 927호로 1994년도에 개설 완료 하여 충북과 서울 강원지방으로 연결되는 중요한 관광 및 산업도로의 기능을 하고 있으며, 남쪽(예천방향) 1.6Km 아래 지점에는 멀리 학가산이 바라보이는 아늑한 산자락에 경상북도와 예천군에서 괘적한 휴계공원을 조성하여 이곳을 지나는 많은 길손들의 쉼터로 제공되고 있다.
☞ 소백산 관광 목장 소백산관광목장은 충청북도 단양군과 경상북도 예천군과 경계로 하는 백두대간에 소백의 주봉에서 흘러내린 촛대봉과 옥녀봉 사이에 둥지를 틀고 있다(충북 단양군 대강면) 해발 850고지 소백산 저수령에 조성된 35만평의 광할한 초지에 한우, 사슴, 흑염소가 한가로이 풀을 뜯고 수백 마리의 소떼가 어우러진 말 그대로 전원의 목장마을이다.
☞ 촛대봉(촉대봉) 소백산 마지막 봉우리. 저수령 건너편의 옥녀봉과 마주 서 있다. 서쪽 사면은 경사가 비교적 완만한 편으로 목장용 초지가 넓게 조성되어 있다. 이곳부터 대간은 방향을 틀어 서진하면서 내륙의 중앙부를 동서로 관통한다. 세워놓은 촛대와 같이 높게 솟아 있다. ‘촉대’는 촛대의 한자어다.
☞ 투구봉 정상에 있는 투구처럼 생긴 바위가 있다. 이 때문에 붙여진 이름인 듯하다.
☞ 시루봉 1080m 소백산의 산괴가 월악으로 이어지기 전에 두 개의 봉우리로 마감된다. 시루봉과 촉대봉이다. 산의 성질은 벌써 월악을 닮아 바위로 빚어졌다. 저수령에서 출발해 간단하게 등반하고 유황온천으로 향하는 일반 산행자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떡쌀을 찌는 시루와 같이 생겨서 붙은 이름인데, 밑에서 무엇이 받쳐 주는지 뭉뚝한 모습으로 우뚝 솟아 있다.
☞ 배재 싸리재에서 서쪽으로 1Km 남짓한 거리에 위치한다. 북쪽 구릉 너머로 지나온 삼형제봉과 도솔봉, 묘적봉 등이 부채를 편 듯이 펼쳐진다. 남쪽의 척 밑에 저수령으로 향하는 927번 국도가 산모퉁이를 이리저리 감돌며 올라가는 모습이 보인다. 마을의 ‘등뒤(背)에 있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나 용두리의 등 뒤인지 남조리의 등 뒤인지는 모르겠다.
☞ 싸리재 저수령이 없던 시절 예천 용두리에서 이 고개를 거쳐 남조리로 넘어가면 단양에 닿을 수 있었다. 지금도 걷는 거리로는 저수령보다 싸리재가 더 가깝다. 남조리의 단양유황온천으로 내려서는 등산로가 이곳 에서 갈라진다. 공터가 있다. 이구간에는 우리말 지명이 특히 많다. 싸리재도 이름 그대로 ‘싸리고개’다. 싸리>사리>솔이(松)이므로 ‘솔재’일 수도 있으나 현지의 형상으로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 흙목 흙목 근처 예천군 상리면 두성리에 흙목 마을이 있다. 토항(土項)이라고도 한다. 중국의 명풍수 ‘박성’ 이라는 사람이 산천에 제사 지낼 때 향을 피운 곳이라고 하여 吐香이라고 적기도 한다. 吐香이 土項ㆍ흙목 이라 와전되었다고 한다.
☞ 뱀재 솔봉에서 남쪽 1Km 지점에 있는 공터다. 대강면 남조리와 상리면 초항리의 중간에 위치한다. 예전에는 양쪽을 넘나드는 고갯길이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오솔길조차 보이지 않는다. 뱀처럼 길다고 하여 뱀재로 부른다. 우리말이다.
☞ 솔봉 도솔봉 구간의 한가운데에 해당한다. 첩첩산중이기는 하지만 조망이 매우 좋다. 동쪽으로 예천군 고항리의 시골마을 풍경이 발끝에 놓이고, 서쪽으로는 단양유황온천이 있는 남조리 일대의 농경지와 마을이 한눈에 들어온다. 솔봉은 ‘소나무봉’ 이다. 고항리의 ‘송전마을’도 소나무가 많은 산촌이다.
☞ 모시골 마을터가 모시 광우리 같다고 모시골이라한다. 풍기군수 겸암 유운룡이 임진왜란 때 어머니를 모시고 피난했다는 겸암굴 이 마을 북쪽에 있으며 웃모시골 아랫모시골로 나뉜다.
☞ 묘적령 묘적봉 남쪽 사거리의 안부로 대간은 이곳에서 경북 예천군과 단양군의 지경으로 들어선다.
☞ 묘적봉 칼바위능선과 1185봉을 지나서 만나는 경승지다. 봉우리 두 개가 나란히 서 있는데 먼저 만나는 것이 정상이다. 정상은 바위와 흙과 나무가 잘 조화를 이루면서 오똑하게 올라앉았다. ‘묘(妙)하게 쌓여진 (積) 봉우리’이니 어느 방향에서 바라 보든 어느 방향으로 바라보든 경관이 빼어나다.
☞ 도솔봉(兜率峰) 1314m 도솔봉은 형제봉과 더불어 가장 한적한 육산으로 꼽히고 있다. “여지도서”에 (두솔산: 兜率山)이라 표기되어 있는데, 도솔천에서 따 온 것으로 보인다. 또한 도솔산에는 도솔산성이 있었는데, 대동여지도에 따르면 ‘등강성’이라 했다. 6.25 당시 모두 사라졌다고 한다.
- 도솔천[兜率天, Tusita] 불교에서 말하는 욕계(欲界) 6천(六天) 중의 제4천. 통속적인 어원 해석으로는 ‘만족 시키다’의 의미로 설명하여 지족 (知足) ·묘족(妙足) ·희족(喜足), 또는 희락(喜樂) 등으로 번역한다. 장차 부처가 될 보살이 사는 곳이라고 하며, 석가도 현세에 태어나기 이전에 이 도솔천에 머물며 수행했다고 한다. 현재는 미륵보살(彌勒菩薩)이 여기에서 설법하며 남섬 부주(南贍部洲)에 하생(下生)하여 성불할 시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도솔천은 미륵보살의 정토(淨土)로서, 정토신앙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소백산 국립공원에 속하는 도솔봉은 충북 단양과 경북 영주의 경계를 이루는 산으로 형제봉과 더불어 가장 한적한 육산으로 꼽히고 있다. 도솔봉은 소백산의 축소판이라 불릴만큼 한 키나 되는 철쭉과 진달래가 화원을 이루며 각종 고산식물이 많다. 또한 숲길 가득 수목이 울창하고 계곡마다 꽃피는 초본류가 무성하여 발길 닿는 곳마다 풍치가 그만 이다. 정상 도솔봉을 주축으로 삼형제봉과 묘적봉을 거느리고 우뚝 솟아 있으며, 능선 에는 바위지대와 억새 등이 있다. 정상 암봉에 서면 중령에서 장엄하게 뻗어 오른 소백산의 장릉을 끝까지 바라볼 수 있어 황홀하고, 남쪽으로는 활같이 구부러지면서 황정산으로 이어내린 백두대간이 아련하기만 하고, 단양팔경으로 유명한 산야가 펼쳐져 보인다.
☞ 삼형제봉 우리나라에서는 ‘형제봉’이라는 산 이름이 유난히 많다. 대부분 엇비슷한 높이의 봉우리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거나 나란히 늘어서 있는 형상을 산 이름으로 지은 것이다. 봉우리가 두개면 ‘형제봉’, 세 개면 ‘삼형제봉’, 일곱 개면 ‘칠형제봉’으로 부르는 식이다. 이곳의 ‘삼형제봉’도 예외는 아니다. 부분적으로 암릉을 형성한다.
☞ 죽령 689m 충청북도 단양군 대강면과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경계의 소백산맥에 있는 고개. 높이 689m. 도솔봉(兜率峰:1,314m)·연화봉(蓮花峰:1,394m)·국망봉(國望峰:1,421m) 등 높이 1,400m 내외의 높은 봉우리 들이 이어져 있는 험한 지세 때문에 조선시대부터 조령과 더불어 영풍-단양 간의 주요교통로였다. 옛날 어느 도승이 짚고 가던 대지팡이를 꽂은 것이 살아났다 하여 죽령이라 했다 한다. 서쪽 사면은 충주호로 흘러드는 죽령천의 상류 하곡과 연결된다. <삼국사기〉 에 의하면 신라 아달라이사금 5년에 이 고개를 사람이 통할 수 있게 만들었다고 전한다. 비교적 높고 험한 고개이므로 봇짐이나 등짐을 지고 걸어다녀야 했던 시절에는 이 고개에 도둑떼가 들끓었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도둑떼에게 아들을 잃은 할머니가 도둑소굴로 숨어들어 망을 보다가 사람들에게 신호로 "다자구야"라고 외쳐서 도둑떼를 사로잡는 데 공을 세워 이곳 주민들은 매년 대강면 용부원리의 산신당에 모여 다자구 할머니에게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 중앙선이 이 고개를 통과하기 위해 '또아리굴'이라 불리는 루프식 터널을 건설했다. 죽령에서 단양까지의 서쪽 사면은 비교적 경사가 완만하여 높은 곳까지 개간되었고 동쪽 사면인 경상북도 풍기 쪽으로는 산림이 우거져 있다. 부근에 죽령 봉수와 보국사, 희방사· 죽죽사가 있다. 아흔아홉 구비의 험하고 힘든 고개로 유명한 죽령은 옛날부터 오르막 30리, 내리막 30리라 했다. 소백산맥이 영남과 호서를 갈라놓는 길목에 해당하며, 추풍령, 문경 새재와 더불어 삼국시대 이래 군사적인 요충지로 영남권과 기호지방을 연결하는 3대 관문의 하나로 각광받아 왔다. 삼국사기에 ‘아달라왕 5년 3월에 비로소 죽령길이 열리다’라 했고, 동국여지승람에는 ‘아달라왕 5년에 竹竹(* 642년 대야성에서 백제의 윤충에게 죽은 죽죽과는 동명이인)이 죽령길을 개척하고 지쳐서 순사(殉死)했고, 고갯마루에는 죽죽을 제사하는 사당(祠堂)이 있다’ 했다. 그래서 죽령이라 한다. 일명 대재. 삼국 시대 이래로 봄·가을에 나라에서 제사를 지내던 곳이며, 조선시대에는 죽령사(竹嶺祠)라는 산신사당이 있었다. 대강면 용부원리 죽령역에서 풍기읍 희방사역으로 빠지는 중앙선 철도가 길이 4,500m의 똬리굴(죽령 터널)을 통하여 죽령 산허리를 통과한다. 또 중앙고속도로 단양~풍기 구간이 죽령터널을 통과하여 나 있다.
죽령은 한동안 고구려의 국경으로 신라와 대치, 삼국의 군사가 엎치락 뒤치락 불꽃 튀는 접전장이었다. 고구려가 죽령을 차지한 것은 장수왕 말년 신라 진흥왕 12년, 왕이 거칠부 등 여덟 장수를 명하여 백제와 함께 고구려를 공략, 죽령 이북 열 고을을 탈취했으며, 그뒤 영양왕 1년 고구려 명장 온달장군이 왕께 자청 하여 군사를 이끌고 나가면서 ‘죽령 이북의 잃은 땅을 회복하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다’라고 한 삼국사기의 기록으로 보아서도 죽령이 막중한 요충지 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고려시대를 지날 무렵에는 왜구의 침입이 빈번하여 우왕 8년(1382년)과 9년에 각각 왜구가 죽령을 넘어왔다는 기록이『고려사』에 남아 있다.
- 죽령 산신당(용부원리) 설화 - 매바우(鷹岩) 마을(면사무소 직원들은 아예 그런 마을 이름들을 뭉뚱그려 용부원리(用富院里)라 하는데 조선 시대 용부원이 있었다)에는 나라에서 제사를 지내던 산신당이 있다. 죽령의 산신은 ‘다자구 할머니’다. 단양 문화원이 펴낸 『단양군 민속조사 보고 서(김영진ㆍ1992)』에 따르면 일찍이 신라시대부터 죽령에는 나라에서 지내는 제사(國行祭)가 있었다고 한다.『세종실록지리지』에도 “봄가을로 나라에서 향과 축문을 내려보내 작은 제사를 지낸다”고 죽령 밑에 주석을 달았다. 지금의 죽령사(竹嶺祠)를 짓고 산신제의 틀을 갖춘 것은 대략 조선 중기로 보이는데 이때 등장하는 산신이 바로 다자구 할머니다. 당시 나라에 바치는 세금으로 삼베니 무명, 엽전 따위가 죽령을 통해 넘어가는데 고갯마루에 숨은 도둑들이 사람 물건 할 것 없이 빼앗고 헤치지만 관병도 이를 다스리지 못했다. 어느 날 두 아들을 잃은 할머니가 죽령의 산적을 잡는 데 번번이 실패를 거듭하던 토포군과 미리 짜고 산적굴에 들어갔다. ‘들자구야’는 기다리라는 신호였고 ‘다자구야’는 공격 신호였다. ‘다 자구’는 모두 잔다는 뜻이고 ’들자구’는 아직 덜 잔다는 뜻이다. 산적에게는 이름이 ‘들자구’와 ‘다자구’인 두 아들을 찾는다고 둘러댄 터였다. 마침내 산적이 모두 술 취해 잠 든 사이 노파의 ‘다자구야’ 소리를 신호로 토포군이 들이닥쳐 산적을 섬멸했다. 이에 나라에서는 죽어 산신령이 된 ‘다자구 할머니’를 기려 해마다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그후 나라에서 할머니를 찾으려 애를 태우자 관리의 꿈에 나타난 할머니가 '나는 사람이 아니라 산신이니 정 보답하고 싶으면 서울에서 연을 띄워 처음 앉는 자리에 사당을 짓고 1년에 제를 두 번씩 올려달라' 했다. 두 번째 시도 끝에 지금의 터에 연이 내려 앉았고 그 자리에 서있던 옻나무를 베어 산신당을 짓고 나라에서 하사한 사당 옆의 토지에서 얻은 곡식으로 국행제를 올리는 풍습이 시작되었다 한다. 경술국치 이후 일제는 이 땅의 모든 국행제를 금지시켰다. 죽령 산신제 역시 마을 사람들의 손에 의해 근근이 그 명맥을 이었다. 매바우에선 지금도 매년 음력 3월과 9월이면 어김없이 산신제를 지낸다. 날짜는 초정(初丁)인데 초정에 부정(不淨) 이 들면 중정(仲丁)으로 넘겼다가 중정마저 부정이 들면 또 하정(下丁)으로 넘긴다. 도가(都家:제사 준비를 맡은 집)로 뽑힌 집주인은 목욕재계하고 3일 동안 기도를 올려 정성을 들인다. 매바우에선 마을 사람 누구라도 산신당에 대한 믿음은 가히 절대적이다. 그런데 현재 도가인 김성락 옹에 의하면, 김순재라는 면장이 부임하고선 그 땅을 빼앗아 사람들에게 전부 분배해준 뒤, 다자구 할미산신의 재산이 없어졌다고 한다. 마을에서는 군수와 문화원에 사정해 돌려주라고 했지만 이뤄지지 않고 그 후로 때마다 50만원씩 지원금을 받아 겨우 제사만 지내고 있다고 한다..
- 죽령 터널 - 국내에서 가장 긴 터널로, 중앙고속도로 구간에 위치하고 있으며 총길이 4.6㎞. 죽령터널은 죽령고개를 관통해 경북 영주와 충북 단양을 연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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