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봉서방
성탄의 본질을 회복하라 마 2: 1- 12
성탄의 기쁨
10절에 보면, 동방의 박사들이 “별을 보고 가장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동방의 박사들은 동방에서부터 인도했던 별이 다시 나타나 인도한 것을 보고 크게 기뻐하 고 기뻐했습니다. 이들은 기뻐서 어쩔 줄 몰랐습니다. 그러니까 동방의 박사들은 기쁨과 감격 가운데별을 따라서 예루살렘까지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찾아오신 그리스도를 아직 만나지도 않았는데도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합니다. 동방의 박사들은 정말 큰 기쁨 가운데 메시야를 만나기 위해 예루살렘을 찾았는 데. 그러면 저와 여러분은 이런 기쁨, 이런 감격 가운데 이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해 찾아 오셨습니까? 이런 기쁨과 감격이 있습니까? 왜 우리에게는 이런 성탄의 기쁨과 감격이 없을까요? 성탄의 목적, 성탄의 본질, 예배의 본질, 신앙생활의 본질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기쁨도 잃 어버리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우리가 성탄절을 맞이해서 정말 회복해야 할 것이 있다면 성탄의 본질, 예배의 본질, 신앙 생활의 본질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러면 성탄의 기쁨, 신앙생활의 기쁨도 회복될 거라고 확신합니다.
동방의 박사들 1절과 2절에 나오는 박사들이 왔던 동방이란 곳이 어떤 나라인지 구체적으로 알 수는 없습 니다. 동방을 페르시아로 보는 학자도 있고, 아라비아나 인도로 보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저는 페르시아로 생각합니다. 동방에서 온 이들을 ‘박사들’ 이라고 호칭하고 있는데, 박사라고 번역된 ‘마고이’라는 단어는 점성가를 가리킵니다. 점성가는 천체를 연구하는 사람들이었으나 오늘날 천문학자 들처럼 천체 자체에 관심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인간사(人間事)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별자리를 연구하면서 개인이나 국가의 운명을 예측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나라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인간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동방박사들은 이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해 노력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때 당시는 점성가는 왕이나 귀족의 자문관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난세에는 왕을 간택하는 일까지 감당할 정도로 대단한 권력을 갖고 있던 엘리트였습니다.
예전 사람들도 우리와 똑같은 문제로 인해 고민하고 그 해답을 얻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새해만 되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새해 운세를 알고자 점쟁이나 역술가를 찾아다닙니까? 그런데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지난 월요일에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급사를 했습니다만 누가 그 죽음을 알았습니까? 어떤 점술가들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게 우리 인간의 한계요, 점술가들의 한계입니다. 속지마세요. 누구만 아십니까? 하나님만 아십니다. 내일 일은 하나님만 아십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죽었다고 해서 좋아해야 합니까? 슬퍼해야 합니까? 좋아 해야 하는데 어느 누구도 좋아할 수가 없습니다. 북한이 불안하고 격변이 일어나면 이 나라의 운명도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오히려 더 불안 해 하는 것 아닙니까? 이 나라의 운명도 누구만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만이 알 수 있습니다. 저는 분명히 믿습니다. 하나님이 이 나라를 사랑하시며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줄 믿습니다. 별자리를 보고 나라와 개인의 운명을 점치던 사람들이 동방에서 예루살렘까지 찾아와서 유 대인의 왕으로 나신이가 어디 있느냐고 묻습니다.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다고 합니다. 여기서 유대인의 왕이라는 말은 온 우주를 구원할 메시야, 구원자라는 말입니다. 그의 별을 보고 메시야를 찾아, 구원자를 찾아 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유대인도 아니 동방의 점술가들이 어떻게 구약에서 약속한 메시야를 알고 예루살 렘까지 찾아올 수 있었을까요?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만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BC 586년에 남 유다가 바벨론에 망하자 수많은 왕족과 귀족과 젊은이들이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이 다니엘입니다. 거기서 수난과 고통 가운데 지내던 사람들은 구약 성경이 약속했던 메시야를 학수고대했습 니다. 하루빨리 메시야가 오시기를 고대했습니다. 찬송가 104장처럼 메시야를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 곧 오소서 임마누엘 오 구하소서 이스라엘 그 포로 생활 고달파 메시야 기다립니다 ♬ 이 동방의 박사들이 포로로 잡혀 온 유대인들로부터 성경을 접하게 되었고, 구약 성경을 연구하는 가운데 그들도 메시야를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이상한 별 하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유난히 밝게 빛나고 움직이는 별이었습 니다. 그들은 그 별이 메시아의 탄생을 알리는 것임을 감지하고 먼 길을 떠나기로 작정합니다.
생명을 바쳐 왕께 경배 점술가들이 동방에서부터 먼 예루살렘에 까지 온 목적이 분명했습니다. 2절에서 분명이 자신들이 방문한 목적을 이야기 합니다.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고 말씀합니다. 그렇습니다. 왕께 경배! 이것이 성탄의 본질이요, 성탄의 목적입니다. 저들이 생명을 바치고, 자기들의 생활을 포기하고 베들레헴까지 찾아온 것은 요셉을 만나 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마리아에게 축하해주기 위해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메시아 되신 왕을 경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당시의 교통수단은 너무나 열악했습니다. 저들이 걸었던 길은 지금처럼 아스팔트로 포장된 길이 아니었고 사막과 광야가 연속된 길이었고, 교통수단은 자동차나 기차도 아니었고 기 껏해야 낙타 정도였습니다. 참으로 험난한 길이었습니다. 모래 먼지를 뒤집어쓰고 와야 하 는 길이었습니다. 곳곳마다 강도들이 출몰하는 위험한 길이었습니다. 동방박사들은 상류계층의 사람들로서 생활이 넉넉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저들은 평안을 추구하지 않고 왕 되신 예수께 경배하기 위해 순례의 길을 떠났습 니다. 생명의 위협과 죽음을 무릅쓰고 왕 되신 예수께 경배하기 위해 먼 길을 떠났습니다. 참된 예배란 이렇게 생명을 바쳐 왕 되신 주님께 경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생명을 바쳐 왕께 경배하는 것! 이것이 성탄의 본질이요, 예배의 본질이요, 신앙생활의 본질입니다.
그런데 성탄의 본질이, 예배의 본질이, 신앙생활이 퇴색되고 있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왕 되신 주님께, 왕 되신 주님을 이 땅에 보내 주신 성부의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이 신앙 의 목적인데, 어떻게 하면 복을 받을 것인가? 어떻게 하면 내 문제가 해결 받을 것인가에 만 목적을 두고 주님을 찾고 있으니 안타까운 것입니다.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눈앞의 이익 때문에 영적으로 눈이 어두운 사람들에게 무슨 기쁨이나 감격이 있겠습니까? 물론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분이시고,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이 목적 때문에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왕 되신 주님을 경배하기 위해 찾아야 합니다. 그것도 생명을 바쳐, 목숨을 바쳐 왕 되신 주님을 경배하기 위해 찾아야 합니다. 무슨 다른 일이 생기면 다른 일이 우선이 아니라, 예식장이 우선이 아니라 생명을 바쳐 주 님을 경배하기 위해 찾아야 합니다. 거기에 신앙의 참된 기쁨과 감격이 있을 뿐 아니라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풍성하게 채워 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역사가 있을 것입니다.
신앙의 고백이 담겨진 헌신 동방의 박사들이 왕께 경배만 하기 위해서 예루살렘을 찾은 것이 아닙니다. 경배하고 예물을 드리기 위해서였습니다. 예물은 마음의 표현입니다. 저들은 아기 예수님께 경배하고 보배 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습니다. 이 세 가지 예물은 단순한 예물이 아니라 이들의 신앙의 고백이 담겨진 예물이었습니다. 신앙의 고백들이 담겨진 헌신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의 고백이 담겨진 예물! 헌신! 이것이 성탄의 본질이요, 신앙의 본질이요, 경배의 본질입니다. 성탄의 목적입니다.
‘황금’은 그 당시 왕에게만 드리는 최고의 선물이었습니다. 아기 예수께 황금을 드린다는 말은 당신은 나의 왕이라는 고백입니다. 당신은 나의 왕입니다! 이 고백으로 경배를 드렸습니다. 여러분! 이 고백으로 경배와 헌신을 드리고 있습니까? 당신은 나의 왕이십니다. 물질이 왕이 아니고 나 자신이 왕이 아니고 바로 당신이 나의 왕이십니다.
예수님 탄생을 기준으로 기원전과 기원후를 나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기원전과 기원후를 B.C.와 A.D로 표시하는데, B.C.는 Before Christ라는 뜻이고, A.D.는 Anno Domini의 약자인데 라틴어로 ‘주의 해’라는 뜻입니다. 기원 전, 기원 후라는 말보다는 오히려 주전, 주후라는 말이 더 적합합니다. 예수님의 출생을 기준으로 세계 역사가 구분되었습니다. 하물며 예수를 영접한 사람의 인생이 구분되지 않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기 전과 믿은 다음이 확연하게 구분되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비록 이전에는 물질을, 내 자신을, 세상을 왕으로 섬기며 살았을지라도 이제는 예수님을 왕으로 섬겨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그 순간부터 물질은 더 이상 우리의 왕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왕입니다. 예수님이 나의 왕입니다. 이 고백으로 경배를 드리고 섬기고 헌신을 할 때 참 기쁨이 있고 감격이 있는 것입니다.
‘유향’은 제사장이 성전에서 향기를 내기 위해 피우는 향입니다. 예수님을 대제사장으로 인정하는 예물이었습니다. 당신은 나의 영원한 제사장입니다 라는 고백입니다. 몰약은 죽은 사람의 시체에 바르는 약으로 이것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나타냅니다. 예수님 당신은 우리의 구원자 되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동방의 박사들의 예물에는 ‘당신은 나의 왕이시며, 나의 영원한 참 대제사장이시며, 나의 구원자가 되십니다’ 라는 고백이 담겨진 헌신들이 있었습니다. 동방의 박사들에겐 이런 고백이 담겨진 경배와 섬김과 헌신들이 있었기 때문에 기쁨과 감 격이 있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에게 성탄의 감격과 기쁨이 없는 것은 이런 고백이 없 이 주님께 예물을 드리고, 섬기고, 헌신을 하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성탄의 예물은 많이 드리느냐, 적게 드리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예물에 내 마음의 고백이 담겨져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인 것입니다.
그와 반면에 당시 유대의 왕이었던 헤롯왕을 보십시오. 예루살렘에 웬 낯선 사람들이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를 찾아왔다고 하니 예루살렘이 발 칵 뒤집힙니다. 요즘은 익명성의 시대라고 합니다. 자기 옆집에 사는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는 것이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옆집 일을 소상하게 아는 것이 이상합니다. 하지만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그렇지 않았습니다. 누구네 집 돼지가 밤새 새끼를 몇 마리 낳았는지, 어느 집 아들이 어느 집 딸과 연애하는 지 전부 알았습니다. 당시 예루살렘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 낯선 사람들의 얘기를 듣고 가장 놀란 사람은 헤롯이었습니다. 헤롯이 대제사장과 서기관에게 유대인의 왕이 어디서 출생하는지를 물었고, 대제사장과 서 기관은 베들레헴에서 출생한다고 성경에 예언되어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헤롯은 동방박사들에게 베들레헴에 가서 새로 태어난 왕을 만나거든 자기에게 얘기 해달라고 했습니다. 겉으로 내세운 이유는 자기도 찾아가서 경배하고 싶다는 것이었지만 속셈은 그게 아니었습 니다. 자기의 왕좌를 위협하는 요소를 사전에 제거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이때 동방박사들은 예수님을 만난 후에 헤롯에게 가지 않고 다른 길로 돌아갔습니다. 뒤에 나오는 내용입니다만 뒤늦게 속은 것을 알아차린 헤롯은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는 다 죽이라는 잔학한 명령을 내립니다.
메시야의 탄생에 대해서 헤롯이 이토록 경악스러운 반응을 보인 이유는 간단합니다. 메시야의 탄생이 자기에게 손해이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왕좌에서 물러 날 수 있다는 생각 을 합니다. 급기야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는 전부 죽이라는 끔찍한 명령까지 내립니다. 자기 왕권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지 기꺼이 하는 사람이 바로 헤롯이었습니다.
헤롯의 이런 작태를 보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정말 잔학하다, 어떻게 인간의 탈을 쓰고 그럴 수 있단 말인가?”라는 생각이 들지 않습 니까? 그러면 성경에 헤롯이 등장하는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옛날 옛날에 팔레스타인 지방에 헤롯이라는 왕이 있었는데 그는 잔인한 왕이 있었다 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기 위해서 일까요? 성경은 우리를 교훈하기 위한 책입니다. 헤롯을 흉보거나 헤롯의 실상을 알리기 위한 책이 아닙니다. 성경에 헤롯이 기록된 것은 그 내용이 헤롯의 문제로 끝나지 않고 우리의 문제로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바로 헤롯과 같은 사람입니다’라는 이야기에 대해서 선뜻 수긍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헤롯은 메시야의 탄생 소식에 기겁했습니다만 우리는 해마다 크리스마스만 되면, ‘기쁘다 구주 오셨네.’ 찬송을 부르는 사람들입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서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를 다 죽이라는 끔찍한 명령을 내렸던 사람과 우리를 동일시하는 것은 도무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를 헤롯에 비유하는 것은 어쩌면 인격모독이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 오늘날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적극적으로 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신앙생활을 충실히 하는 것이 자기에게 손해라는 생각 때문이 아닐까요?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자기가 어느 만큼 예수를 믿을지’를 미리 정합니다. ‘이것까지는 한다.’라는 것을 미리 정해놓고 그 테두리 안에서만 예수를 믿습니다. 그 테두리는 대부분의 경우 일주일에 한 번 교회 나오는 것입니다. 더 이상은 하지 않습니다. 더 이상 하는 것은 손해라고 생각합니다.
내 인생에 걸림돌이 된다면, 내 길에 방해가 된다면 그 어떤 것도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신앙이 되었든, 그것이 예수님이 되었든, 그것이 교회가 되었든 그 어떤 것도 용납 하지 않습니다. 예수는 믿는다! 일주일에 한 번 씩은 나와 준다. 그러나 더 이상은 안 된다! 헌신이니 십자가이니 고난이니 이런 것들은 안 된다. 수요일도 안 되고, 새벽기도는 더더욱 안 되고, 십입조는 더더더욱 안 되고! 그럼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는 여러분이 헤롯과 사실 다를 바가 뭐가 있습니까? 거기에 무슨 신앙의 기쁨과 신앙의 감격이 있겠습니까?
여러분! 성탄절의 목적이 무엇이며 신앙생활의 본질이 무엇입니까? 생명을 바쳐 왕께 경배하는 것! 이것이 성탄의 본질이요, 예배의 본질이요, 신앙의 본질입니다. 고백이 담겨진 예물! 고백이 담겨진 헌신! 고백이 담겨진 섬김! 이것이 참된 성탄의 본질이며 신앙의 본질입니다. 어떤 환난과 십자가와 손해가 있다할지라도 왕께 경배하고 고백이 담겨진 헌신을 가지고 경배하는 것이 성탄의 목적이며 신앙의 본질입니다. 이번 성탄절은 무엇보다 신앙의 본질을 회복하는 은혜가 있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을 드립니다. 여기에 성탄의 참 기쁨이 있고, 감격이 있고 신앙의 감격이 있고 기쁨이 있고,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
|
<음원출처: 오, 거룩한 밤 / 국립합창단 / 덴탈코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