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애국계몽운동
- 1906 대한 자강회 발족
- 1907 1월 국채보상운동 시작
- 1907 4월 신민회 조직
- 1909 8월 청년 학우회 조직
- 1911 일제가 1월 105인 사건 조작
국채보상운동
국채보상운동은 1907년 1월 29일 대구의 광문사에서 김광제(金光劑)·서상돈(徐相燉) 등에 의하여 시작되었다. 민간에서 이 같은 운동이 전개되었던 것은 1904년 8월 일제의 강압으로 체결되었던 한일협정서에 의하여 대한제국의 재정고문으로 목하전종태랑(目賀田種太郞)이 임명된 이래 일본으로부터의 차관도입이 급격히 이루어진 것과 무관하지 않았다. 특히 1906년 일제는 통감부를 설치하자 한국의 시정개선이라는 명목으로, 실제로는 한국침략에 소요되는 경비를 고율의 국채를 기채하여 일본차관으로 조달하였던 것이다. 1907년 초 한국정부의 대일차관은 1,300만 원에 이르렀는데 그 액수는 정부의 1년 예산과 맞먹는 정도였다. 따라서 정부에 의한 국채보상은 사실상 불가능한 상태였다. 김광제와 서상돈 등은 이러한 상황에서 2천만 동포가 담배를 3개월 동안 끊어 모금한 돈으로 민간에서 국채를 보상하자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대구에서 시작된 이 운동은 곧 전국적인 규모로 확대되어 갔다. 2월 22일에 서울에서 김성희(金成喜)·유문상(劉文相)·오영근(吳榮根) 등의 주도로 국채보상기성회(國債報償期成會)가 조직된 것을 비롯하여 전국에 국채보상을 목적으로 한 단체들이 결성되기 시작하였다.
국채보상운동은 전국민의 전폭적인 호응으로 모금이 시작된 지 3개월 뒤인 5월에는 모금액이 20만 원에 달하였다. 1907년에 불같이 일었던 국채보상운동은 일제의 방해로 말미암아 지속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실패의 원인은 그밖에도 참가세력의 조직적 통일이 이루어지지 못하였고, 지도논리와 구체적 발전전망이 모자랐던 점에서도 찾을 수 있다. 지도층은 분열되었을 뿐 아니라, 모금 자체에만 주목하였고 보상방안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가지고 있지 못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국권침탈이 전개되던 시기에 대중운동으로 전개되면서 애국심의 고취와 항일의식의 고조는 충분히 의의를 가질 수 있었다고 하겠다.
신민회
신민회는 1907년 4월 양기탁(梁起鐸)·전덕기(全德基)·이동휘(李東輝)·이동녕(李東寧)·이갑(李甲)·유동열(柳東說)·안창호(安昌浩) 등 7인의 노력으로 조직되었다. 이 조직의 핵심은 안창호였다.
안창호는 양기탁·윤치호·이승훈 등과 의논하여 단체의 조직을 제의하였다. 그리하여 창건위원을 선정하고, 총감독으로 양기탁, 총서기로 이동녕, 재무 전덕기 등의 임원을 정하였으며 안창호는 집행원이 되었다. 안창호가 맡았던 집행원은 회원의 입회를 관장하여 사실상의 조직 및 회원을 관리하던 핵심적인 자리였다.
신민회는 그 취지서에서 “본회의 목적은 아한(我韓)의 부패한 사상과 습관을 혁신하여 국민을 유신케 하며 쇠퇴한 교육과 산업을 개량하여 사업을 유신케하며, 유신한 국민이 통일 연합하여 유신한 자유 문명국을 성립케 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천명하였다.
즉 부패한 사상과 습관의 혁신, 교육과 산업의 발달 등을 통하여 새로운 국민〔新民〕이 되고, 또한 유신한 자유 문명국을 건설한다는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 바로 새로운 국민의 창출이었다. 이것은 나라의 부강이 국민의 부강에서 나온다는 판단에서 신국민을 창출하고자 한 것이다.
신민회가 이런 목적을 달성하는 방법으로 채택한 것은 당시 계몽운동에서 일반화되고 있었던 실력양성론이었다. ①신문·잡지 및 서적을 간행하여 백성의 지식을 계발할 것, ②각곳에 권유원(勸諭員)을 파건하여 권유문(勸諭文)을 전파하여 백성의 정신을 각성케 할 것, ③정미(精美)한 학교를 건설하여 인재를 양성할 것, ④각 곳의 학교의 교육방침을 지도할 것, ⑤실업가에게 권고하여 영업 방침을 지도할 것, ⑥신민회원의 합자(合資)로 실업장을 건설하여 실업계의 모범을 지을 것 등이었다. 이 가운데서도 특히 신민회에서 강조한 것은 신사상 고취를 통해 국민들의 습관을 고치자는 것이었다.
이러한 목적하에 신민회는 비밀결사로 조직되었다. 안창호는 당시 인민의 정도가 유치하여 이를 표면단체로 하면 사회의 반감을 사서 방해를 받을 수 있다는 점, 또 입회 희망자를 전부 참가시키면 회의 진정한 목적을 달성하기 불가능하다는 점, 또 정치적으로 자립자존을 목적으로 하므로 통감부에서 해산을 당하여서는 안되겠다는 점 등을 고려하여 비밀결사로 할 것을 주장하였다.
신민회는 주로 서북지방을 중심으로 확산되었다. 평북은 이승훈, 처음 평남·황해는 최광옥이 관장하였으며, 1908년 경에는 안태국이 평남, 김구가 황해도, 그 뒤 다시 장응진이 평남을 관장하였고, 함경도는 이동휘가 관장하였다. 회원이 되었던 사람들은 대체로 상공인·교사였으며, ‘합방’후에 학생층까지 회원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들은 대개 기독교인이었다.
신민회에서는 회원을 모집하는데 매우 신중하였다. 각 책임자는 항상 회원의 모집에 주의하며 회원의 추천이 있을 지라도 길게는 1년여, 짧게는 수 개월 그 행동을 관찰하고, 그 의사가 견고하다고 인정하면 입회시켰다. 입회는 집행원 안창호가 국가사상의 후박(厚薄)을 문답하고, 다시 담력을 시험하여 결정하였다. 신민회의 존재를 알려주지 않고 단지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하는 표면의 회명, 가령 청년학우회(靑年學友會) 같은 단체 이름으로 회원을 확보하기도 하였다.
신민회는 민족 실력 양성을 위해 신문 · 잡지 등 계몽도서 간행, 강연회 개최, 민족 학교 설립, 민족 산업 진흥 등 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신민회는 국외 독립 운동 기지를 건설하였다.
일제는 신민회의 움직임을 탐지하고 소위 ‘안악사건(安岳事件)’ · ‘양기탁 등 보안법 위반 사건’ · 사내정의(寺內正毅) 총독 암살 음모사건‘ 등을 조작하여 신민회 회원을 검거 탄압하였다.
신민회의 활동은 1910년대 중국 · 러시아 지역 독립 전쟁의 발판이 되었으며 청산리대첩 · 봉오동대첩 등 독립군의 대일 항전으로 계승 발전하였다.
배재학당
미국 북감리회 선교사 아펜젤러(H.G.Appenzeller)가 서울 정동(貞洞)에 설립한 근대식 중등교육기관이 다. 1885년 8월 아펜젤러가 이겸라(李謙羅)와 고영필(高永弼) 등 두 학생을 가르치면서 시작된 배재학당은 정동에 있는 민가 몇 채를 사서 1886년 신축·이전하였으며, 이 해 6월 8일 고종황제로부터 배재학당이라는 교명을 하사받아 정식으로 개교하였다.
중등과정의 보통과와 대학과정의 본과를 둔 이 학교에서는 기독교 정신에 바탕을 두고 서구의 각종 근대식 학문을 가르쳐 학생들에게 개화사상을 일깨워 주었다. 교과과정은 예비과정부·교양과정부·대학과정부 등이 있었으며, 특히 영어를 배우려고 입학하는 학생들이 많았다. 1894년부터는 정부로부터 후원을 받기도 하였으며, 서재필의 주도로 1896년에는 배재학당 안에 협성회(協成會)가 조직되었다. 협성회에서는 매주 토론회를 열고 개화사상을 고취하는데 힘썼으며, 기관지인 『협성회회보』를 주간으로 발행하다 이를 일간으로 바꾸면서 『매일신보』로 게재하였다. 1900년 당시 과목은 영어·한문·지지·역사·산술·이학·화학·문법·독서·작문 등이었다. 관립인 육영공원이 소기의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침체된 데 비하여 사립인 배재학당은 큰 인기를 얻으면서 신지식 보급과 지식층 양성에 선구적 역할을 하였다. 학생들은 독립협회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정부와 마찰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1909년에는 「사립학교령」에 배재고등학당으로 인가받았으며, 1912년 6월 연합대학을 학당 안에 특설하였다. 1914년 3월에는 교원양성을 위하여 중등사범전수과(專修科)를 병설하였다. 1909년에 4명의 졸업색(김동혁·임성금·최경희·한익수)을 배출한 이래 많은 민족 지도자들을 배출하였다. 배재학당은 배재고등보통학교 설립을 인가 받아 1916년부터는 배재학당과 배재고등보통학교를 병설·운영하였다. 이후 배재학당이라는 교명은 1925년 일제에 의해 폐지되었다.
육영공원
육영공원은 1866년 설립된 한국 최초의 근대식 국립교육기관이다. 「한미수호조약」이 체결된 이듬해인 1883년 민영익(閔泳翊)을 대표로 하는 보빙사(報聘使) 일행은 미국을 방문하고 귀국한 뒤 고종에게 근대식 학교의 설립을 요청하였으며, 1894년 9월 고종의 윤허를 받았다. 그러나 이해 12월에 일어난 갑신정변 때문에 설립계획이 보류되었다가 1886년 7월 헐버트(Homer. B. Hullbert) · 벙커(Delzell. A. Bunker)·길모어(George. W. Gilmore) 등이 교사로 초빙되고 「육영공원설학절목(育英公院設學節目)」이 제정된 뒤 마침내 9월 23일 육영공원이 설립되었다. 육영공원의 관리는 수문사(修文司)의 당상(堂上)과 주사(主事)가, 교육은 3명의 교사가 맡았다. 반(班)은 좌원(左院)과 우원(右院)으로 나누었는데, 좌원은 젊은 관리들 중에서 뽑아 통학하게 하고, 우원에는 15~20세의 선비들 중에서 뽑아 합숙시켜 교육하였다. 경비는 호조와 선혜청에서 같이 부담하다가 뒤에는 해관세(海關稅)로 충당하였다. 학생은 1886년, 1887년, 1889년 세 차례에 걸쳐 모집하였는데 각각 35명, 20명, 57명 등 총 112명이 입학하였으며, 이들은 대부분 양반고관의 자제들이었다. 과목은 영어를 비롯하여 독서 · 습자 · 지리 등이었으며, 특히 영어교육에 교사와 학생 모두 관심과 열의를 보였다.
그러나 한국인 관리들과 학생들이 여전히 전통적 사고와 관습에서 벗어나지 못하였고, 길모어를 비롯한 교사들이 계속 사직하고 재정사정도 나빠지는 등의 악재가 겹치면서 육영공원은 점차 침체되었다. 1894년 벙커마저 배재학당으로 자리를 옮기고, 그 뒤 영국인 허치슨(W. F. Hutchison)이 새로이 육영공원을 인계받으면서도 교명도 ‘영어학원’으로 바뀌었다. 이 영어학교는 다시 관립외국어학교의 하나로 개편되었다.
원산학사
함경남도 원산에 설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민간학교이다. 1883년에 서당을 개량하여 설립되었으며 시무에 긴요한 각종 실학과 근대적 학문을 가르침으로써 개항장인 원산에서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였다. 종래 한국최초의 근대학교로 알려진 배재학당보다 2년 앞서 설립되었다. 1880년 4월 원산 개항 후 이 지역 주민들은 일본상인의 침투에 대응하여 새로운 세대에게 신지식을 교육할 목적으로 서당을 개량·운영하던 중 1883년 1월 신임 덕원부사 겸원산감리 정현석(鄭顯奭)에게 학교 설립기금을 모을 뜻을 밝히고 근대적 학교의 설립을 요청하였다. 정현석은 이러한 주민들의 뜻을 받아들여 당시 서북경략사 어윤중(魚允中)과 원산항 통상담당인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 주사 정헌시(鄭憲時)의 지원을 받아 그해 8월 정부로의 정식 승인을 받고 원산학사를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설립 초기에는 문예반과 무예반으로 편성하였다. 문예반은 정원이 없었으나 약 50명의 학생을 입학시켰고, 무예반은 정원 200명으로 출신과 한량을 뽑아서 교육하여 별군관을 양성하도록 하였다. 특히 무예반을 함께 둔 것은 동래(東萊)의 예를 따라 무비자강(武備自强)을 시도한 것이다. 이러한 대응책은 당시 일본의 무력위협이 수시로 자행되었기 때문에 매우 시기적절한 조치였다. 입학자격은 덕원·원산지방의 연소하고 재주 있는 자제로, 학교설립에 기금을 내지 못한 지방민의 자제도 차별 없이 입학을 허가하였으며, 다른 읍의 사람이라도 입학금을 내는 자는 거절하지 않으며, 무사로서 무예반에 들어오고자 하는 자는 입학금 없이 입학을 허가하도록 하였다. 설립 당시의 교과과목은 공통과목과 특수과목으로 분류하였다. 문무의 공통과목은 시무의 긴용한 과목으로서 산수·격치(물리)로부터 기기·농업·양잠·광채 등에 이르기까지 실학을 가르쳤다. 특수과목으로서 문예반은 경의(經義)를, 무예반은 벙서를 가르쳤다. 이러한 교과목의 교재로 처음 사용하고 비치한 도서는 『영지(瀛志』,『연방지(聯邦志』,『기기도설(奇器圖說』,『일본외국어학(日本外國語學』,『법리문(法理文)』,『대학예비문(大學豫備門』,『영환지략(瀛環志略』,『만국공법(萬國公法』,『심사(心史』,『농정신편(農政新編)』등이다. 이로 볼 때 원산학사의 교과목은 일본어 등의 외국어와 법률·만국공법·지리 등 광범위한 근대학문이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문예반의 최초 교수진은 교수 1명과 조교인 장의(掌議) 2명이었다. 시험방법은 문예반이 매월 초에 월별고사를 부과하여 최우수자 1명을 뽑아 매년 가을 공도회(公都會)에 보내 초시 합격자의 정원명단에 넣도록 하였다. 무예반은 병서를 숙달한 뒤 사격을 익혀 매월 월별고사를 부과하여 연말에 최우수자 2명을 뽑아 병조에 보고하여 출신은 절충(折衝)으로 특별히 승진시키고 한량은 바로 전시에 응시하도록 허가하였다. 학생에 대한 벌칙으로는 태만하여 시작은 있으되 끝을 맺지 못하거나, 술집에 출입하거나, 부랑하여 믿을 수 없거나, 교사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자는 경중에 따라서 벌하거나 제적하도록 하였다.
원산학사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손으로, 특히 민간인들이 자발적으로 설립기금을 모아서 근대학교를 설립하였다는 점엣 커다란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 또한 외국세력과 직접 부딪히는 지방의 개항장에서 시무에 대처하기 위해 설립되었으며, 외국의 학교를 모방한 것이 아니라 서당을 개랴하여 근대학교로 발전시켰을 뿐 아니라 실학자들이 애독하였던 책들과 외국의 새로운 서적들을 교육함으로써 전통과 근대의 조화와 융합을 도모하였다. 원산학사는 1894년 갑오개혁 무렵 원래의 소학교와 중학교 기능이 분화되어 원산학사는 문예반만 갖춘 원산소학교로 되었고, 원산감리서에서 역학당(譯學堂)을 세워 중학교의 기능을 담당하면서 소학교 졸업생들에게 외국어와 고등교육을 실시하였다. 원산소학교는 남산동의 같은 자리에 교사를 증축하고 크게 발전하다가 일제 치하에서는 ‘원산보통학교’·‘원산제일국민학교’로 명칭이 변경되었지만 1945년까지 존속하였다고 한다.
이화학당
이화학당은 1886년 5월에 미국 북감리교 선교사 스크랜턴(Scranton.M.F)이 설립한 이래 1910년에 이르기까지 초등부터 고등 교육과정을 둔 기독교계 사립여학교이다.
이화학당의 교명은 1887년 명성황후가 하사하였는데 배꽃같이 순결하고 아름다우며 향기로운 열매를 맺으라’는 뜻이라고 한다. 1908년 중등과 제1회 졸업생을 배출하고 같은 해 보통과와 고등과를 신설하였다.
이화학당은 한국 최초의 여성 교육기관이며, 이를 계승한 이화여자고등학교는 1986년에 한국여성 신교육 100주년의 전통을 세웠다. 설립 당시에는 여성교육을 기피하는 사회통념과 서양인에 대한 배타적 성향 때문에 학생 수용에 어려움을 겪어, 단 한 명의 여학생으로써 개교하여 영어를 가르쳤는데 1887년 학생수가 7명으로 늘었고 교과목도 성경과 국어가 추가되었다.
1892년에는 반절(反切:국어)·한문·영어·성경·수학·역사·지리·과학 등을 가르쳤으며 1909년에는 음악이 정식 과목으로 추가되었다. 1904년에 4년제 중등과를 설치하여 1908년 중등과 제1회졸업생을 냈고, 같은 해에 보통과와 고등과를 설립하였다. 1910년 4월에는 4년 과정의 대학과를 신설함으로써 초등·중등·고등교육을 모두 실시하게 되었다. 1918년에 고등과와 보통과를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와 이화여자보통학교로 각각 개편하였다. 1945년 광복과 더불어 이화여자대학이 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운영진은 초기 미감리교회 조선부인선교부 유지재단에서 1921년 조선인 이사진이 참가한 이화학당이사회로 바뀐 뒤 1935년 신흥우가 한국인 최초로 이사장에 취임한 후 1943년 김활란이 뒤를 이었다. 교육목적은 한국여성을 기독교적으로 가르칠 수 있는 지도자 양성이었다.
1922년 이화 YMCA가 조직되어 학내외 종교활동, 『이화』의 발간, 부녀자 한글강습회와 농촌강연회 등을 중심으로 학생자치활동을 전개하였다. 기독교계 교육기관으로 총독부 제약을 덜 받았기에 학생들의 민족의식도 남달랐다. 3·1운동은 물론 6·10만세운동·광주학생운동에 호응한 1929년말~1930년 초 서울학생시위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3·1운동의 상징적인 여성운동가 유관순은 바로 이화학당 학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