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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덕암아래 굽이치는 은빛 폭포가 아름다운 臥仙亭
김태환 / 영주향토사연구소 소장
은빛 폭포물로 빚은 정자 와선정
춘양목의 고장 봉화군 춘양면 학산리(鶴山里) 골띠 마을에 위치한 와선정(臥仙亭)은 안동시 길안면 묵계에 들어앉은 만휴정과 함께 영남정자의 진면목을 보여 주고 있다. 문수산 동록에서 발원한 초계수(草溪水)가 쉼없이 굽이 흘러 내리는 초계동의 골짜기는 옛부터 그 수려함과 절경으로 널리 알려져 왔다. 이 아늑하고 수려한 골짜기의 한곳을 차지하고 들어선 와선정은 그야말로 신선이 누워 노닐만한 곳이다.
이곳은1636년(인조 4) 병자호란이 항복의 치욕으로 끝나자 벼슬을 버리고 두메산골인 이곳 태백산 아래에 묻혔던 태백5현이 소요하던곳이다. 태백오현은 잠은(潛隱) 강흡(姜恰, 1602~1671), 각금당(覺今堂) 심장세(沈長世, 1594~1660), 포옹(抱翁) 정양(鄭瀁, 1600~1668), 손우당(遜愚堂) 홍석(洪錫, 1604~1680), 두곡(杜谷) 홍우정(洪宇定, 1595~1654)으로 잠은은 법전의 버쟁이에 은거했으며 각금당은 모래골에, 포옹은 춘양 도심촌에, 손우당은 춘양 소도리에, 두곡은 봉성 뒤디물에 은거하였는데 그들이 은거 하던곳의 거리는 서로 10리에서 30리 안밖이었다. 이들은 서로 지근거리에 살면서 울분을 달래며 우의를 다졌다. 와선정은 태백오현의 대표적인 소요지이다.
와선정은갖출것은 다 갖춘 정자이다. 은폭(銀瀑)이라는 5m남짓한 폭포가 사시장철 정자를 지키고 있고 사덕암( 德巖) 바위위엔 늙은 노송의 그림자리가 언제나 내려앉아 있다. 와선대 위에 걸터 앉은 와선정은 사덕암 바위를 타고 흐르는 은빛폭포(사덕암 폭포)와 눈빛을 마주보고 있으며 높이 또한 정자와 수평을 이루고 있다. 와선정은 정면 2칸, 측면 2칸의 마루방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정자의 조성연대는 알수 없다. 와선정에 서서 사덕암폭포로 난 문을 열고 가만히 앉아 있노라면 금새라도 은빛 폭포에서 일어나는 푸른 물빛이 가슴을 파고 들것만 같다.
물은 사람의 뜻을 비우게하고, 꽃은 사람들을 운치있게하고, 돌은 사람의 뜻을 강하게 하고, 눈은 삶의 뜻을 넓게하고, 달은 사람의 뜻을 외롭게 한다지만 와선정에서 은빛폭포인 사덕암 폭포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이 모든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어진다. 맑은 폭포수에 눈은 멀고, 소탐스런 물소리에 귀는 멀어, 발길조차 옮길 수 없으니 이곳 와선정은 분명 신선이 사는 곳인 모양이다. 와선정 정자안에 들어가 눈이라도 감고 있노라면 금새 어느 옛 시인의 싯구가 떠오른다. “나의 방을 드나드는 것은 오직 맑은 바람뿐이고 나에게 술을 권하는 것은 밝은 달이 있을 뿐이다.” 와선정은 그렇게 자연속에 가만히 앉아 누군가 자신을 가지라고 손짓하고 있을 뿐이다.
사덕바위( 德巖)가에경치는
사계절 언제나 가히 볼만하다.
기이한 꽃은 푸른 벽에 비치고
상서나무는 맑은 여울에 덮였네
서리뒤에 금국화 밝고
눈가운데 옥 및 뿌리 수려하네
매일 오는데 고운자태를 가지고 있어
기리 노부(老夫)의 낯을 푸노라
손우당은 이렇듯 이곳 사덕암에 올라 이곳의 경치를 ‘제사덕암(題 德巖)’이라는 시(詩)로 표현했다. 현재 와선정의 내부에는 손우당 홍석의 ‘제사덕암’ 시판과 잠은 강흡의 현손인 강한(姜瀚)의 ;사덕명암기( 德名巖記)’현판이 걸려 있다.
또한 사덕암 바위위엔 ‘사덕암’이라는 암각이 있었으며 와선대 옆 바위에는 ‘와선대’라는 암각이 있는데 이는 손우당의 손자 가상(可相)이 암각했다고 전해져 오고 있다. 태백오현은 이곳 와선대에서 매년 삼짓날 정기적인 모임을 가졌는데 이 모임 을‘답청계(沓靑契)’라 하였다.
지금도 5현의 후손들은 하절기 중복과 음력 11월 9일을 정일(定日)로 하여 모임을 갖고 있다.
길고짧음의 차이야 있겠지만 결국은 모두가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
태백오현은 같은 시기에 함께 은거한 것은 아니었다. 먼저 두곡과 잠은이 1636년 병자호란뒤 이곳 봉화의 문수산 인근에 은거했으며 손우당은 4년뒤인 1640년(인조 18)에 이곳으로 들어왔으며 각금당은 영천(지금의 영주)군수로 있다가 어느날 이들 세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벼슬을 그만둔뒤 서울로 가지 않고 이곳에 은거했다. 잠은의 제문에서 1648년 각금당을 만났다고 했으며 손우당은 그 전해인 1647년 가을에 두곡, 각금당과 함께 태백의 황지를 유람했다 했으니 이 무렵에 이들이 이곳에서 만났을 것으로 생각된다.
포옹은 가장 늦게 이곳에 은거한 것으로 보이는데 두곡의 말년이나 그의 사후인 것으로 보인다. 포옹은 병자호란후 강원도 삼척에 있다가 효종원년 1650년 용안현감을 거쳐 3년후 비안현감으로 부임했다가 임기를 마치고 비로서 봉화의 춘양 도심에 들어 온것으로 보인다.
이들5현은 처음에는 두곡, 잠은, 손우당이 교류를 했으며 뒤에는 포옹, 잠은, 손우당이 자주 교류했던것으로 보인다. 특히 5현중 두곡은 끝내 세상에 나아가지 않고 초야에 묻혀 생을 마쳤다.
두곡은임종전날 각금당이 서울로 떠난다는 말을 듣고 송별시 3수를 지어 송별했으며 이어 다음과 같은 영결시(永訣詩)를 읊었는데
‘기취위생산측귀,귀하장단진동귀(氣聚爲生散則歸, 歸何長短盡同歸)’(자연의 기운이 모여 이 생명되었으니 그 기운이 흩어지면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는것, 길고 짧음의 차이야 있겠지만 결국은 모두가 자연으로 돌아가게 되리)
라고쓴 뒤 혼미하여 끝마치지 못하고 벗인 각금당에게 끝맺으라 하고 다음날 새벽에 죽음을 맞이했다. 그해 9월 5일 밤 각금당의 꿈에 두곡이 나타나 영결시의 재촉을 받고 각금당은 꿈속에서 이를 채웠다고 한다.
‘붕지골욕동귀진,초초오생독말귀(朋知骨肉同歸盡, 草草吾生獨末歸)’(친구들과 동료들은 다 돌아 갔는데 초라한 이 늙은이만 아직돌아가지 못하고 외로이 홀로남아 있구려)
라고하면서 이 시를 마무리 했다. 생사의 공간마져 뛰어넘으며 우정을 나누었던 태백오현의 대명절의와 정신은 혼탁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의(義)와 절(節)이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에 분명한 해답을 제시해주고 있다. 이후 사림에서는 1786년 사덕정사 ( 德精舍)를 세우고 각금당, 손우당, 잠은을 제향하고 포옹을 추향하였다.
태백오현의삶
홍우정(洪宇定)의 자는 정이(靜而), 본관은 남양(南陽), 문장공(文蔣公) 홍가신(洪可臣)의 손자이고, 서윤(庶尹) 홍영(洪榮)의 장자이다. 만력(萬曆) 을미년(1595, 선조 28)에 태어나, 병진년(1616, 광해군 8)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그는 지극한 효성으로 어버이를 섬겨, 일찍이 선친을 위하여 입으로 종기를 빨고 하늘에 울부짖으며 대신하기를 원하였고, 일찍이 똥을 맛보기도 하였다. 인조 초에 효종이 세자로 있을 때에 사부(師傅)에 임명하였으나 남한산성에서 나와 항복하였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다시 북쪽으로 돌아갈 뜻을 접었다. 명나라의 운수가 떠나고 부터 의관을 갖추지 않고 항상 삿갓을 쓰고 황색 단의(短衣)에 새끼 띠를 두르고 짚신을 신고 촌로들과 어울려 지냈고, 앉을때에는 북쪽을 향하지 않았다. 그의 시에,
대명천하에 집 없는 나그네
태백산속에 머리 긴 중
이라하였고, 또,
층계 아래 흐르는 냇물 바다로 흘러가니
너만이 알고 그 뜻을 드러내는 구나
하였다.
순흥 와란(臥丹) 두곡(杜谷)에 살았다. 곁에 냉천(冷泉)이 있었는데 그 청정한 산수를 사랑하여 집을 ‘옥류암(玉溜庵)’이라 했다. 때때로 시국을 한탄하고 나라를 걱정하면서 서쪽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곤 하였다. 전후로 벼슬에 제수하였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마침내 몸을 깨끗하게 하여 세상에서 숨었으니 세상에서 ‘숭정처사(崇禎處士)’라 일컬었다.
그후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증직하였는데, 교지에는 본 직함을 쓰지 않고 다만 ‘승정처사 홍모’라고만 썼고 또한 당시 연호인 ‘병자(丙子)’를 쓰지 않았다. 특별히 예관을 보내 가묘에 제사를 올렸다. 그가 살던 두곡에 구봉서당(九峰書堂)이 있어 을묘년에 여러 고을 선비들이 발의하여 이곳에 제향하였는데, 무오년에 나라에서 금하여 훼철되었다. 무진년에 유허비(有墟碑)를 세워 기렸다.
배유장(裴幼章)의 본관은 성주(星州). 참판(參判) 배응경의 손자이고, 도사(都事) 배상익(裴尙益)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행실이 독실하여 14세에 모친상을 당하여 예절에 맞게 거상(居喪)하였다. 일찍 문예를 이루어 19세에 대소향해(嚮解)에 합격했으나, 병자호란에 임금이 남한산성에서 나와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산에 올라가 통곡하고 오랑캐의 백성이 되지 않겠다고 맹서하였다. 이로 인하여 예조 시험에 응시하지 않았고, 드디어 종신토록 과거를 그만두었다. 스스로 호를 유암(愉岩)이라 하였다. 그의 시에,
대명천지에 내 태어나서
태평성대 이루려했는데 일월이 빛을 잃었네
오직이 마음 돌과 같이 굳어
포의로 부끄럼 없이 선종을 뵈오리라
하였다. 숭정처사(崇禎處士)로써 숙종 때 교관(敎官)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서헌부집의(司憲府執義)에증직되었다. 수식(水息) 천곡(泉谷)에서 살았다.
강흡(姜恰)의 본관은 진주(晋州)로 병자호란에 난리를 피하여 태백산 아래 법전촌(法田村)에 우거(寓居)하였다. 임금이 남한산성 아래에서 청에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드디어 세상일에 뜻을 끊고 집을 짓고 여생을 마쳤다. 스스로 호를 잠은(潛隱)이라 하였으니, 대개 도정절(陶靖節)이 송나라에 벼슬하지 않은 뜻을 흠모한 것이었다. 정축년(1637, 인조 15)에 제릉참봉(齊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정유년(1657, 효종8)에 세자익위사세마(世子翊爲司洗馬)에 임명되었는데, 그 때 효종이 나라의 원한을 씻고자 북벌준비에 발분함을 알고 사앙하지 않고 나아가 사은하였고, 이어 산음헌감(山陰縣監)이 되었다. 효종이 승하하자 곧바로 향리로 돌아왔다. 당시 뜻을 같이 한 이로 사부(師傅) 홍우정(洪宇定)·대구부사 심장세(沈長世)·진선(進善) 정양(鄭瀁)·사어(司禦) 홍석(洪錫)이 서로 이끌고 태백산 아래에 은거하니, 사대부들이 그 기풍과 절개를 높이 칭송하였다. 옛날 영릉(寧陵 효종)이 전날의 수치를 씻으려 할 때 산림의 제현들이 모두 그 뜻을 모이니, 공같이 세상을 단념하였던 선비도 애당초의 뜻을 고수하지 못하였다. 실로 그럴만한 이유가 아니었다면 어찌 일개 군수 직책을 위하여 갑자기 세상에 나왔겠는가. 명(銘)을 한다.
아름다운 분
태백산속에서 살았네
고고한노래 격앙되니
천지가 더렵혀졌네
자취를 감추고 숨은 뜻이
일신만을 깨끗하게 한 것이 아니었네
상산사호(商山四晧)처럼 돌아오고
월나라 쓸개 바야흐로 걸렸네
작은 관직 낮게 여긴 것이 아니라
대의를 어찌 감히 버리랴
원숭이와 학이 서로 부르며
숲속에서 여한 없이 살았네.
절개는 도연명(陶淵明)이고
본심은 노중련(魯仲連)이라네
홍석(洪錫)의 본관은 남양(南陽), 인재(忍齋)의 증손. 젊어서 김상헌(金尙憲)에게 수학하였다. 정축년(1637, 인조15) 난리에 김공이 남한산성에서 통곡하고 복주(福州, 安東)로 돌아오자, 공 또한 비분강개하며 따랐다.경서(經書)를 지고 태백산에 들어가 사부(師傅) 홍우정(洪宇定)·산음현감(山陰縣監) 강흡(姜恰)·대구부사 심장세(沈長世)·진선(進善) 정양(鄭瀁)등 세상을 피한 제공들과 벗하였다. 효종 기해년(1659, 효종 10)에 고 상진 김수항(金壽恒)이 조정에 천거하여 즉시 종부시 주부(宗簿侍 主簿) 주부에 임명하니, 공이 말하기를,
“나는세신(世臣)이다. 성상이 장차 큰일을 하시려 하니 나는 암혈 속에서 죽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하고,나아가 명을 받았다. 벼슬을 현령에서 마쳤다. 호가 손우당(遜愚堂)이다. 도암(陶庵) 이재(李縡)가 지은 묘지명에서,
태백산 우뚝한 곳에
누가은자 손우공인고
무릎치며 부르는 노래 무슨 생각
바다로 들어간 선비이자 여지응(茹芝翁)일세
운운하였다. 창해(滄海) 허격(許格)의 만사(輓嗣)에서,
옛날 숭정 말기에
나라 산하가 짓밟혔네
황지땅으로 피하여
고고하게 노래한 자지옹(紫芝翁)
이로부터 태백산
한층더 높아졌네
누가 일민전을 지어
후세에그 기풍 접하게 할꼬
하였다. 저서로 ≪상제요(喪祭要)≫·≪일성록(日省錄)≫등이 있다.
심장세(沈長世)의 본관은 청송(靑松). 갑자년 변란에 백의(白衣0 신분으로 공주(公州)로 피난하는 왕을 호종(扈從)하여, 특지(特旨)로 금오랑(金吾郞0에 임명되었다. 정묘년에는 임금을 강화(江華)에 호종했다. 병자호란 이후로는 벼슬에 뜻이 없었다. 일찍이 영천군수(永川郡守)로 있을 때 산음현감(山陰縣監0 강흡(姜恰0·사부(師傅) 홍우정(洪宇定0·진선(進善) 정양(鄭瀁)·사어(司禦)등이 세상을 피하여 태백산중에 숨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당일에 벼슬을 버리고 그곳으로 돌아가 단파동(丹坡洞)에 집을 짓고 그 거처 이름을 ‘감금실(覺今室)’이라 하였으니, 도징사(陶徵士)의 회왕추래(悔往追來)의 뜻을 취하였다. 상국 이단하(李端夏)가 지은 묘표에서,
“공은 스스로 영천군수 자리에서 물러나서는 벼슬살이에 뜻이 없었고, 태백산 가장 깊은 골짜기에 터를 잡고 동지 수인과 더불어 소요자적(自適)하면서 생애를 마치려고 하였다. 뒤에 비록 의리에 따라 뜻을 굽혀 부임하였지만, 세상에 나온 것은 그의 본 뜻이 아니었다. 운운.” 하였다.
산중에 무엇이 있냐고요
“산중에 무엇이 있냐고요
고개위에 흰구름 많지요
단지혼자만 즐길 수 있고
임금님께가져다 드릴 수 없지요”,
이시는 중국 양나라 도홍경(陶弘景)이 벼슬에 뜻을 두지않고 화양(華陽)에 숨어 살면서 소요하고 있었는데 고조(高祖)가 그를 보러 갔다가 그에게 “산중에 무엇이 있느냐”고 하니까 이에 대답한 시다. 그는 그후 무제의 여러번의 초빙에도 나아가지 않고 산림에서 세상을 잊고 살았다. 태백오현이 즐겼던 임천(林泉)의 생활이야 말로 도홍경의 모습과 같지 않았을까, 와선정 바위 위에 걸터 않아, 소나무에 바람지나가는 소리를 들으며, 시냇물 흘러가는 소리, 폭포수 떨어지는 소리, 산새우는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 아무것도 없는 적막하고 무변무애한 세계)”의 세계에 들어간다. 마치 금방이라도 신선이 될듯한 착각에 빠질 법 하다. 와선정과 은빛폭포는 사람들에게 뜻을 비우게 하고 가슴으로 맑은 솔바람을 채워주고 그 아름다운 공간은 우리들에게 언제나 그리움을 남겨준다. 와선정으로 난 구름다리를 건너며 소동파의 적벽부 한 구절 읊어 본다.
“저강위의 맑은 바람과 산골짜기의 밝은 달이여 귀로 듣노니 소리가 되고 눈으로 보노니 빛이 되도다, 갖고자 해도 말리는 사람없고 쓰고자 해도 다할날이 없으니 이것이 조물(造物)의 무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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