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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단원 주제 | 소단원 주제 | 대단락 주제 |
1. 1차 귀환(1:1-2:70) | 1) 스룹바벨과 포로 귀환(스1:1-11) | (1) 고레스의 조서(1:1-4) |
(2) 귀환을 위한 준비(1:5-11) | ||
2) 스룹바벨의 인구조사 (스2:1-70) | (1) 귀환 백성(2:1-63) | |
(2) 회중과 예물을 합계(2:64-70) | ||
2. 성전 재건축(3:1-6:22) | 1) 성전 재건 시작 (스3:1-13) | (1) 제사를 드림(3:1-6) |
(2) 성전 기초 시작(3:7-13) | ||
2) 성전 재건 중단 (스4:1-24) | (1) 대적의 요청을 거절(4:1-3) | |
(2) 성전 건축 방해(4:4-24) | ||
3) 성전 건축 재개 (스5:1-6:12) | (1) 성전 건축 시작(5:1-5) | |
(2) 총독들의 상소(5:6-17) | ||
(3) 다리오 왕의 조서(6:1-12) | ||
4) 성전 완공 (스6:13-22) | (1) 성전 건축이 형통(6:13-15) | |
(2) 봉헌식(6:16-22) |
Ⅰ. 1차 귀환 (스1:1-6:22)(B.C. 538년)
1. 총독 스룹바벨 (스1:1-2:70)
1) 스룹바벨에 의한 포로 귀환 (스1:1-11)
(1) 바사 왕 고레스는 유다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도록 허락하는 조서를 공포하였다(1:1-4)
1-3절은 역대하 마지막 두 구절을 그대로 되풀이한다. 하나님은 바사 왕 고레스를 사용하여 유다인이 유다로 돌아가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도록 허락하는 조서를 공포하게 하셨다. 게다가 고레스는 유다의 이웃들에게 명하여 그 귀환한 잔존자들에게 쓸 것을 풍족히 주라고 했다. 그는 본문에서 여호와를 인정했는데(3,4), 이는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이라기보다는(사 45:5) 포로 민족에 대한 회유책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다. 고레스는 출생하기 여러 해 전에 하나님에 의해 이름이 밝혀지고 이 존귀한 일을 위해 구별된바 있었다(사 44:28-45:13).
이 조서는 유다인의 70년간의 포로생활을 마감지었다. 그 70년은 두 가지 방법으로 계산될 수 있는데, 하나는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쳐서 첫 번째 포로를 취해간 B.C. 605년에서 성전 지대가 놓여진 B.C. 535년까지이며, 다른 하나는 예루살렘이 멸망한 B.C. 586년에서 성전이 완공된 B.C. 516년까지이다.
(2) 성전 재건을 위해 백성들이 예물을 기쁘게 드렸고, 고레스는 성전 그릇들을 돌려주었다(1:5-11)
고토(故土)로 귀환을 허락받은 백성들은 앞을 다퉈 성전 재건에 필요한 물품들을 가져왔다. ‘그 마음이 하나님께 감동을 받은’(5) 자에 한했으나 이 같은 헌신의 물결은 이스라엘 역사상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특히 느부갓네살에 의해 이방 신전에 옮겨진 성전 기명(器皿)들이 되돌려진 것은 지난날의 유수(幽囚)와 피탈이 어디까지나 ‘잠정적인’ 상황이었음을 보여 준다 하겠다.
2) 인구조사 (스2:1-70)
(1) 스룹바벨 지도로 단행된 1차 귀환자들을 기록하였다(2:1-63)
B.C. 536년 스룹바벨 지도로 단행된 1차 귀환자들의 수가 족속별(3-20), 출신 지역별(21-35), 제사장(36-39), 레위인 및 성전 봉사자들(40-58), 왕의 신복(59-63) 순으로 기록되었다. 제사장의 수에 비해 레위인의 수가 적은 것은 성전 봉사의 고된 임무를 꺼려한 상당수 레위인들이 포로 생활 중 직무를 포기한 데 있는 듯하다.
(2) 1차 귀환한 자의 총수는 약 50,000명이었다(2:64-70)
온 회중의 합계가 42,360명, 종은 7,337명, 노래하는 자가 200명, 말, 노새, 낙타, 나귀가 많았다. 귀환한 잔존자의 총수는 약 50,000명으로 사로잡혀간 수의 일부에 불과했다. 족장들이 성전 건축을 위해 드린 예물은 금 61,000다릭, 은 5,000마네, 제사장 옷이 100벌이었다.
느 11:1-13:3의 목록과 비교하면 다소 수효의 차이가 있는데 이는 전사(轉寫) 과정에서 비롯된 착오이거나, 아니면 일부 계층(여자, 어린아이)의 포함 여부에 따른 차이일 것으로 보인다.
2. 성전 재건축 (스3:1-6:22)
1) 성전 재건 시작 (스3:1-13)
(1) 이스라엘이 7월에 번제단을 쌓고 번제를 드리며 절기를 지켰다(3:1-6)
번제단을 쌓음(1-2절). 초막절 등의 주요 절기가 있는 일년 중 가장 거룩한 달인 7월에 이르러 성전 재건의 도화선에 불이 당겨졌다. 이는 본토 귀환 후 약3개월 후였다.
번제를 드림(3-6절). 과거 앗수르 제국에 의해 팔레스타인으로 밀려난 듯한(4:2) 이민족의 위세에 다소 위축이 되었으나, 백성들은 담력을 내어 번제를 올렸다. 바벨론 유수 후 50년 만의 첫 성전 제사인 번제를 드림으로 실추된 하나님과의 계명과 율례를 그들의 마음에 새겼던 것이다(고후 3:3).
(2) 성전 재건을 위한 재료를 준비하고 감독자를 세웠으며, 성전 지대를 설치하였다(3:7-13)
재건 준비 및 착수(7-9절). 귀환 후 1년 2개월이 지나서야 비로소 본격적인 역사(役事)가 시작됐는데, 이는 역군 정비 및 재료 확보 때문이었다. 당시 두로와 시돈은 바사의 지배하에 있었으므로 목재 운송은 고레스의 인준을 필요로 했다.
지대 설치 및 기공 예배(10-13절). 성전 기공 예배에 해당되는 본문 기사는 지대 설치 과정 및 기간을 생략, 곧바로 찬양의 광경을 소개함으로써 성전 재건 사역이 백성들에게 주는 역사적 의미의 부각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오랜 포로 생활로 극도로 피폐해진 대다수 백성들의 심령은 황폐한 고토의 중심에 놓인 지대를 바라보는 순간 막혀 있던 봇물이 터지듯 벅찬 감동과 환희를 발했으나, 옛 성전의 영화를 직접 목격했던 노인들은 실망과 회환의 눈물을 뿌렸다. 이렇듯 상반된 감정의 혼재 속에 시작된 재건 사역은 대적들의 방해로 15년간(B.C. 534-520) 중단되는 우여곡절 끝에 B.C. 515년경에야 그 완성을 보게 된다.
2) 성전 재건 중단 (스4:1-24)
(1) 혼합 종교주의의 사마리아 인들이 성전 중건 참여를 요청했으나, 스룹바벨은 거절했다(4:1-3)
1절에 언급된 ‘유다와 베냐민의 대적’은 앗수르가 북왕국을 사로잡아갈 때 그 땅에 정착시킨 다른 지역에서 온 식민지 이주자의 후손이었다. 그 이주다들은 그 땅에 남은 유다인들과 통혼을 했으며, 그 후손이 사마리아인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들이 스룹바벨에게 이르러 성전 중건을 돕기를 원하는 체했다. 그들도 여호와를 숭배했으나, 여호와는 그들의 우상숭배적인 혼합종교체계에서는 여러 신들 중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그들의 제의를 거절했다.
(2) 사마리아인들의 훼방으로 성전 중건이 다리오 왕 2년(B.C. 520)까지 중단되었다(4:4-24)
4:4-5,24. 사마리아인들은 이어서 전략을 바꿨다. 우선 그들은 유다 백성을 낙심시키려 했다. 그런 다음 그들의 건축사역을 훼방했다. 또한 그들은 모사를 매수하여 왕궁에서 이스라엘에 불리한 공작을 꾀하게 하고, 공갈과 협박으로 유다인을 낙담케 했다. 드디어 성전 중건이 중단되었다.
24절은 연대적으로 5절 뒤에 연결된다. 유다의 대적은 다리오 왕 2년까지 성전 중건을 중단시키는데 성공했다.
삽입된 두 고소 사건(6-23절). 본문은 23,24절의 문맥 연결과 아하수에로, 아닥사스다 왕의 통치 연대가 서로 엇갈려 견해가 다양한 부분이다. 혹자는 아하수에로를 캄비세스(B.C. 529-523)로, 아닥사스다를 스메르디스(B.C. 523-522)로 보았으나 이는 오히려 성전 재건보다 훨씬 후대, 곧 에스라의 지도로 이루어진 제2차 귀환 후의 성곽 중수 사역을 방해하기 위해 아하수에로(B.C. 485-464)와 아닥사스다(B.C. 464-424) 2대에 걸쳐 일어났던 사마리아인들의 고소 사건을 에스라가 연대적 순서를 무시하고 삽입한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3) 성전 건축 재개 (스5:1-6:12)
(1) 학개, 스가랴의 촉구와 스룹바벨, 예수아의 지시로 성전 재건이 다시 재개되었다(5:1-5)
학개와 스가랴의 격려(1-1절). 학개 1:1과 스가랴 1:1에서 본장이 다리오 통치 2년에 해당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1절; 4:24). 이 두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들 자신을 위해서 값진 집을 짓지 말고 성전 중건을 재개하라고 촉구했다(학 1:4). 스룹바벨과 예수아는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여 즉시 건축사역을 시작하라고 명했다. 건축사역이 재개된 것은 왕의 조서의 능력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신 성령의 능력 때문이다(슥 4:6).
다리오 시대의 반대(3-5절). 반대가 신속히 일어났다. 유브라데 강 서편 총독과 그 일행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유다인들이 어떤 자격으로 건축을 시작했으며 그 일을 명한 사람이 누구인지를 물었다(9,10절). 그들은 유다 지도자들의 이름을 받아 적었다. 이 바사 관리들은 4장에 언급된 관리들보다 합리적이었다. 그들은 건축을 중단시키지 않고 그 적법성을 결정하기 위해 다리오에게 편지를 보냈다. 유다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기를 시작한 까닭에 하나님이 그들을 돌아보사 그 일을 이루게 하셨다.
(2) 총독들은 다리오 왕에게 상소를 하여 유다인들의 성전 재건을 허락해야 하는지 물었다(5:6-17)
다리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닷드내와 스달보스내는 유다인들과 나눈 대화와 유다인들의 답변을 알렸다.
유다 장로들은 먼저 자신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자격을 부여받았음을 밝혔다. 그들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의 종들이었으나, 일찍이 그들의 죄악으로 인해 바벨론인들에게 포로로 잡혀 갔다. 이제 하나님께서 그들을 고토로 돌아오게 하셨으므로 성전을 재건해야 했다. 유다인들은 성전 재건을 허락한 고레스의 조서도 가지고 있었다. 총독은 고레스 왕이 그런 조서를 내린 적이 있는지, 이 문제에 대해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지를 알려달라고 다리오에게 청했다.
(3) 다리오 왕은 고레스의 조서를 확인하고 성전 재건을 보장했고, 원조하였다(6:1-12)
사마리아 총독 닷드내의 보고를 받은 다리오 왕(B.C. 522-486)은 즉시로 조서 확인을 지시, 일의 자초지종을 조사하였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사역의 합법성 확보는 물론, 기대치 않은 왕의 원조 보장을 받게 되었는데 이는 당대 현군으로 이름 높은 다리오 왕의 선처이기 이전에, 역사를 주관하시는 ‘천지의 하나님’(12)의 손길이 개입한 결과였다.
* 고레스 조서가 기록된 두루마리(6:1-5) 다리오의 명으로 메대도 악메다 궁성에서 찾은 조서에 고레스 왕이 왕실에서 경비를 내고 성전 그릇을 돌려보내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라 명령한 것이 기록되어 있었다. * 성전 재건을 명령(6-12) 다리오 왕이 총독들에게 성전공사 경비를 주어 멈추지 않게 하고 번제물을 주어 하나님께 왕과 왕자를 위해 기도하게 하며 명령을 변조하는 왕이나 백성은 하나님께서 멸하시기를 원한다.
4) 성전 재건 완성 (스6:13-22)
(1) 건축을 재개한지 4년만에 성전이 완공되었다(6:13-15)
다리오 왕의 명령은 신속히 준행되었다. 성전 건축에 박차를 가했다. 선지자 학개, 스가랴의 격려와 다리오의 보고의 물자공급을 통해 성전은 4년만인 다리오 왕 6년 아달월 3일에 완공되었다. 성전 지대가 놓인지 19-20년 만의 완공이다.
(2) 이스라엘이 성전 봉헌 제사를 드리고 유월절과 무교절을 지켰다(6:16-22)
제사를 드림(16-18절). 이스라엘 백성들과 지도자들은 기쁨으로 성전의 봉헌 제사를 드렸다. 성전 봉헌식을 행할 때 수소 100, 숫양 200, 어린 양 400마리와, 수염소 12마리로 제사를 드리고 모세의 책에 기록된 대로 제사장과 레위인을 세웠다. 이 봉헌은 솔로몬의 봉헌, 즉 소 22,000마리와 양 120,000마리 외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소와 양을 드린 제사와 비교하면(대하 7:5; 5:6), 한없이 빈약하고 보잘것없게 보였지만, 이스라엘은 그런 생각에 머물지 않고 즐거워하였다.
유월절과 무교절 준수(19-22절). 출애굽 사건에 기원을 둔 본 절기는 이스라엘 역사상 주요 신앙의 분기점마다 의미 깊게 준행되곤 했다(대하 30,35장). 이 속에는 여호와 신앙으로의 복귀라는 본질적 의미와 아울러 과거의 청산 및 성전 예배 회복이라는 보다 실제적역사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연대: B.C. 458
본문: 스 7:1-10:44
주제: 2차 귀환
개요
1. 아닥삭스다 왕 7년에 아론의 후손, 율법에 익숙한 에스라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라는 조서를 받고 * 인구 조사를 마친 후 레위인을 모아 * 출발한 지 4개월 만에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성전에서 번제를 드렸다.
2. 에스라는 이방 여인과 통혼한 백성들로 인해 하나님께 기도하니 * 백성들이 이방여인을 끊겠다고 맹세하고 통혼한 자들을 조사했다.
개관
중단원 주제 | 소단원 주제 | 대단락 주제 |
1. 2차 예루살렘 귀환(7:1-8:36) | 1) 에스라에 의한 포로 귀환 (스7:1-28) | (1) 에스라의 결심(7:1-10) |
(2)왕의 조서(7:11-28) | ||
2) 귀환을 위한 준비 (스8:1-30) | (1) 귀환자 계보(8:1-14) | |
(2) 귀환 준비(8:15-30) | ||
3) 2차 돌아온 백성들 (스8:31-36) | (1) 돌아온 백성들(8:31-36) | |
2. 신앙 개혁(9:1-10:44) | 1) 에스라에 의한 통회 자복 (스9:1-15) | (1) 이방인과 통혼(9:1-4) |
(2) 에스라의 기도(9:5-15) | ||
2) 백성들의 대각성 운동(스10:1-44) | (1) 백성들에게 회개를 촉구(10:1-15) | |
(2) 이방인과 통혼한 자들의 명단 (10:16-44) |
Ⅱ. 2차 귀환 (스7:1-10:44) (B.C. 458년)
1. 에스라 (스7:1-8:36)
1) 에스라에 의한 포로귀환 (스7:1-28)
(1) 스룹바벨의 1차 귀환 후 58년이 지나서 제사장인 에스라가 2차로 귀환하였다(7:1-10)
에스라는 7장을 전후로 해서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저자는 스룹바벨이 이끌고 돌아온 1차 귀환을 성전 건축이라는 지상 과제를 중심으로 1-6장까지 설명해 왔다. 그리고 이제 58년간의 세월을 뛰어 넘어 자신이 직접 이끈 2차 귀환을 기록하기 시작한다. 이 58년간의 침묵 기간 사이에 에스더서의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그리고 3차 귀환에 얽힌 사건들은 느헤미야서에 소개된다.
본문은 2차 귀환(B.C. 458)의 기록이다. 에스라는 자신의 제사장 신분을 강조하고자 중요치 않은 인물들은 계보에서 과감히 생략했다(대상 6:3-15). 그는 율법에 정통한 학사로서 이스라엘의 신앙 부흥을 꾀했다. 사변적인 연구보다는 율법을 준행함으로써 백성들의 모범이 되고자 했던 그의 개혁 정신은 후대 종교 지도자들에게 더없이 귀한 교훈을 남겼다(고전 4:20).
(2) 바사 왕 아닥사스다가 에스라의 예루살렘 귀환(2차 귀환)을 허락하였다(7:11-28)
7:11-26 바사 왕 아닥사스다(B.C. 464-424)는 전날에 선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신(1:1) 그 동일한 하나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2차 귀환령을 내렸다. 1차 귀환이 황폐된 성전을 중건함으로 이스라엘의 종교적 결속을 도모했다면, 본 귀환은 그 결속을 바탕으로 본격적 신앙 부흥의 전기로서의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7:27,28 아닥사스다의 파격적인 배려로 풍성한 헌물과 함께 본토로 돌아가게 된 에스라의 감격에 찬 찬양 고백이다. 그는 여기서 세상 권세자들의 모략과 의향을 주장하사 당신 백성들의 길을 평탄케 하시는 여호와의 위엄과 권능, 지혜와 자비를 노래하고 있는데, 이는 성경적 신앙, 역사관을 견지한 모든 신자들의 공통된 찬양과 묵상의 주제이다.
2) 귀환을 위한 준비 (스8:1-30)
(1) 에스라와 함께 2차 귀환한 족장들의 계보를 기록하였다(8:1-14)
2차 귀환자 명단을 기록하였다. 대부분 1차 명단의 계보와 일치한다(2:3-19). 후에 가담한 레위인들(8:15-20)을 포함하더라도 이는 1차 명단의 1/3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효이다. 지파별, 또는 직계손 등의 기준 대신 유명 가문별로 족보가 기록된 것은 대부분이 유다 왕족 출신이었기 때문이며, 당시 상황으로 보아 족보 개념이 다소 흐려졌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2) 성전 봉사를 위한 레위인들을 모집하고, 신앙을 무장하고, 예물을 관리하게 했다(8:15-30)
8:15-20. 본토 진입에 앞서 백성을 재점검하는 과정에서 에스라는 성전 봉사 및 율법 전수를 맡을 레위인들이 빠져 있음을 확인, 즉시로 족장과 모사들을 불러 레위인의 집단 거주지인 듯 한 가시뱌 지방과 기브온 족속 후예들의 거주지인 느디님 지방에서 필요한 일꾼들을 모집토록 했다. 이러한 신속한 확인 및 조처는 성전 예배 회복을 종교 개혁의 관건으로 인식한 에스라의 제사장적 통찰력의 소치라 할 수 있다.
8:21-23. 종교 지도자 및 봉사자들의 모집이 끝나자 에스라는 금식을 선포, 백성들의 영적 무장을 도모했다. 당시 팔레스타인과 메소보다미아 일대에는 아랍 족속 및 소수 야만족들의 약탈이 잦아 여행자들은 군대의 호위를 받아야 했으나(느 2:7-9), 에스라는 하나님의 선하신 약속을 믿음으로 이 난관을 극복하기로 결단했다.
8:24-30. 면밀한 에스라로서는 마땅히 제사장들의 관할하에 있어야 할 성전 기명들의 방치를 보고서 그대로 지나칠 수가 없었다. 그는 일일이 중수(重數)를 달아 엄중한 권고와 아울러 그 기명들을 제사장들에게 맡겼는데, 이는 그의 세심한 성격, 철저한 율법관, 숭고한 신앙심 등의 조화를 이룬다.
3) 돌아온 백성들 (스8:31-36)
(1) 2차 귀환자들이 안전하게 예루살렘에 도착하였으며 감사의 제사를 드렸다(8:31-36)
해석: 바벨론을 떠나(31절; 7:9; 8:15) 제2차 포로 귀환이 무사하게 이뤄지게 되었다. 그들의 간구대로(23) 대적들의 위험에서 벗어나 무사히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백성들은 1차 귀환 때와 마찬가지로(6:17) 여정을 계획하고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의 제사를 올렸다.
2. 신앙 개혁 (스9:1-10:44)
1) 에스라에 의한 통회 자복 (스9:1-15)
(1) 에스라는 이스라엘의 지도자와 백성들이 이방인과 통혼하는 사실을 알고 탄식하였다(9:1-4)
이방인과 통혼(1-2절). 율법에 정통한 학사 겸 제사장 에스라의 귀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하나의 신앙적 기폭제였다. 1차 귀환 후, 걸출한 지도자 없이 신앙적 공백기를 지내는 동안 백성들은 다시 귀환 전의 상태에 빠졌는데, 모세 율법에서 엄금한 이방인과의 통혼이 대표적 사례였다. 특히 분별과 처신에 있어서 세인의 모범이 돼야 할 지도자들이 오히려 앞서 타락했는바, 당시의 도덕적 부패상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알 수 있다.
에스라의 탄식(3-4절). 사태의 전모를 들은 에스라는 ‘기가 막혀’ 앉아서 통분해 할 수밖에 없었다. 팔레스타인의 신앙적 상황이 긍정적이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으나, 손댈 수 없을 정도로 열악하다는 것은 상상 밖이었다. 이 개혁자의 처절한 비탄의 몸짓은 그가 하나님을 위한 근심에 온전히 사로잡혀 있음을 나타낸다.
(2) 에스라는 이스라엘을 향해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께 백성의 범죄함을 고백하였다(9:5-15)
낮 동안 비탄 속에 보낸 에스라는 저녁 제사 드릴 시간이 되자(오후 3시경) 백성들의 죄를 대신하여 중보의 기도를 올렸다. 그의 기도는 용서와 회복을 구하는 간구의 기도가 아니라, 한계 상황에 다다른 백성들의 불순종과 패역을 토로하는 철저한 참회와 자백의 기도로서, 에스라의 심령 속에는 양떼의 과오를 대신 회계(會計)하고자 하는(히 13:17) 참 목자의 정신이 충일했다.
2) 백성의 대 각성 운동 (스10:1-44)
(1) 백성들이 이방 여인을 끊어버릴 것을 맹세하였고, 에스라는 신속한 실행을 촉구했다(10:1-15)
해석: 10:1 에스라의 비탄은 곧 큰 무리의 통곡으로 이어졌다. 제물을 드리러 성전 제단 주위로 몰린 경건한 무리들은 한 지도자의 통회의 기도에 깊은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10:2-5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소망은 있었다. 통곡하는 무리 가운데 스가냐라는 한 인물이 사태 수습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것이다. 그는 백성을 대변하여 에스라에게 이스라엘의 죄악을 시인하고, 아울러 그 만연된 타락상을 과감히 척격할 것을 제안했다. 참으로 그는 죄악을 깨닫는 그때야말로 회복에 있어 절호의 기회임을 깊이 인식했으며(고후 6:2; 히 3:13), 백성들도 그와 더불어 일어나 하나님 앞에서 죄의 청산을 맹세했다.
1:6-15 비록 백성들의 일치된 청산 의지를 보았지만 에스라는 그런 원칙적 서약에 만족하지 않고 신속히 이방 여인을 끊어버릴 것을 촉구했다. 이에 회중은 기슬르월이 팔레스타인의 최다 우기로서 장시간의 옥외 집회에 부적합하다는 점을 들어 적정한 때와 사태 수습 위원회 결성을 요구하는 현명함을 보였다. 그러나 그중에는 조치 자체를 반대하는 무리가 있었다.
(2) 이방인과 통혼한 제사장, 레위인, 백성 112명의 명단이 밝혀졌다(10:16-44)
10:16-44 용의주도한 에스라의 지휘 아래 장장 2개월에 걸쳐 112명의 통혼자 명단이 밝혀졌다. 거기엔 제사장의 이름이 제일 먼저 나오는데 이는 그 책임의 중대성을 반영한 듯하다. 문제의 해결책으로 제시된 두 가지 사항은 아내를 내보내는 것과 속건제를 드리는 일이었는데, 전자는 매우 가혹한 처사로 보이나 성별된 백성으로서 순수한 신앙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결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