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이쿠 이런! ㅉㅉ>
그녀의 몸이 형편없이 부서지고 그을려 있었다.
발로 차고 찢고 불태우고 기계에 그런 짓을 했으니 망정이지 사람이나 짐승에게 그랬다면 범죄가 되었을 것이다. 누군가의 심심풀이 땅콩이었을까? 아니면 어제 술망나니?
어젯밤 술취한 어떤 녀석이 욕설과 함께 뭔가를 냅다 걷어 차는 소리에 잠을 깼다. 또 그 녀석인가. 맞은 편 연립2층에 사는 자인데 평소에는 사람이 좋다가도 술 몇 잔만 들어가면 제 차를 걷어차는 녀석이 있다. 제 물건 제가 걷어차는데 상관할 바는 아니지만 새벽 2시라 잠이 후다닥 달아나고 치밀어 오르는 것은 밤에 곤한 잠을 깨웠다는 분노다. 저런 넘은 오뉴월 장마철 개패듯 해도 개값 물어줄 능력만 있어도 되겠으나 무전유죄인 세상에는 아무리 상대가 괘씸해도 모른체 꾹꾹 눌러참는 것이 최고 미덕일 게다.
<그래도 저런 녀석을 그냥 두면 안되지. 이웃을 위하여 내가 먼저 할 일이 있다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112
<그래 거기 전화하자. 미친 개는 짭새가 처리해 주어야 해. 짭새한마리 봉급의 10분의 1만큼 내지도 못하지만 세금을 내는 국민의 권리인 걸.>
수화기를 드는 순간 잡아채는 손이 있었다.
“이웃에서 다 알아서 처리해요. 왜 당신이 신고해서 해꼬지를 당할 참이에요?”
단순한 나를 제지하는 것은 아내다.
"뭘 부수나 잠깐 구경하고 올께."
"제발 쓸데없는 일하지 말고 가만있어요."
장난기가 발동하여 나가려다 다시 제지를 받았다. 술취한 사람은 정신이 없기 때문에 주정들어주며 외곽으로 데려가 버리고 오면 곧 술이 깨어 집에 돌아오게 된다. 술깨는 게 오래 걸리더라도 당장의 소음은 사라지니 괜찮은 방법이긴 하다. 하지만 추운 겨울에 그랬다가는 취객이 얼어죽을 수가 있긴 하다.
망할 녀석, 십오 분 정도는 그렇게 시끄러웠다. 차소리가 들리는 가 싶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내가 아니라도 신고를 대행하는 이웃도 있군. 다행이야.
아침에 혹시나 궁금하여 나와보니 혹시 필요한 사람이 있으면 가져가라고 한켠에 놓아둔 그 녀가 살갗이 부서지고 찢긴 살갗과 내장들이 붙은 채 불에 처참히 그을려 있었다. 어젯밤 주정꾼의 소행은 아닌 것 같았다. 살을 찢고 발로 밟고도 모자라 옆에서 플라스틱 같은 걸 모아 불까지 해놓은 범인은 사이코가 아니었는지 추측만 할 뿐이다. 살아있는 유기체에 못된 짓을 하는 녀석은 영화를 통해서 종종 보았지만 움직이지 못하는 쇳덩이에 그딴 짓을 하는 사이코는 전무후무한 일일 것이다.
케이스와 함께 내부 부품들이 찌그러지고 불에 녹아붙은 것을 보니 인간의 그것을 보는 것같이 구역질을 느꼈다. 함부로 열어 생긴 고장은 책임지지 않는다고 하여 겉에 있는 먼지나 열심히 닦았지 케이스를 열어보는 모험은 하지 않았었다. 아니, 딱 한번은 열었었다. 그런데 나사못 하나를 어디다 떨구었는지 찾지 못하여 여섯 개의 나사 중 하나는 없는 병신이 되었다. 그나마도 다섯 개를 잘 맞추지 못하여 컴퓨터 기사를 불렀더니 말끔하게 맞추어 준 이후로는 그 녀의 몸을 만지는 것 조차 엄두를 내지 못했다.
처음 그 녀의 몸을 열었을 때 오밀조밀하게 다닥거리게 붙은 회로들과 뭉치내장들이 핏줄로 연결되어 있긴 한데 TV를 열었을 때보다 더 단순하게 보였었다. 저런 내장을 갖고 인터넷과 영화를 보여주는 걸 보며 신기해 했고 케이스도 잘 맞추지 못하는 실력으로는 부품하나 들어내는 것, 케이블 소켓을 다시 뺐다 끼우는 것조차 두려워했다. 언젠가 스피커소리가 잘 안나길래 연결잭을 손보려고 그녀에게 손을 댄 순간 전해지는 누전충격에 놀란 후로는 문제발생이 있을 때마다 기사를 불러 해결했다.
어제 새 녀가 도착했다.
시원하고 넓은 모니터와 본체를 들여놓으니 여태까지 부렸던 그녀는 모니터와 함께 자리를 비켜주어야 되었으니 모니터는 아직 쓸만하다고 하여 동생네 주기로 하고 본체는 메인보드를 교체한 지 얼마 안되어 그 새부품만 뽑아가고 폐물이 되었다. 폐컴퓨터를 내놓으면 칩속에서 금이 나온다 하여 전문업체가 수거한다기에 안아다 쓰레기 버리는 장소에 놓아두었다.
여자하인인 주제에 몸에 손을 대는 것조차 용납하지 않던 그녀였지만 부서져 파편으로 내동댕이 쳐진 것에 고소하다기 보다 불쌍한 연민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랑하던 개의 시체라면 땅속에 묻어 다른 식물들의 몸체로 태어나게 해 주겠으나, 기계 덩어리이니 매장할 수 없어 전문꾼이 쓸 만한 것은 다시 뽑아다 귀금속으로 재탄생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 녀가 잠깐 정신이 돌아왔던 적이 있었다.
PC방에서 새 녀를 주문하고는 그 날 저녁에 혹시나 하고 켰던 적이 있었다.
BOOT FAILURE라는 메시지 없이 단번에 깔끔하게 동작했었다. 카페 하나를 들러 댓글 하나 달 때까지도 멀쩡했었다. 그런데.
“삡”
이 소리가 마지막 가는 소리였다.
화면이 검게 변하더니 조금 있다가 공포로 파랗게 질려버렸다. 그 후로는 아무리 껐다 다시 켜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숙환으로 노인이 별세하기 직전 맨 정신으로 돌아와 할 말 다하고 밥 실컷 드시고 돌아가시지. 과일나무가 죽기 전에 열매를 많이 맺는 것도 어떤 자연의 법칙이 듯 기계로 태어난 그녀의 몸에도 그런 법칙이 들어갔을까?
<그래. 갈 거면 고이 보내 주지.>
그 녀의 평안한 영면을 위하여 더 이상 손대지 않았다. 마지막 가는 길에 내 불찰로 이렇게 처참한 몰골이 되었구나.
<네게 영혼이 있다면 구천에 떠돌지 말고 좋은 것으로 다시 태어나 다오.>
<8부 완결편에서 계속합니다.>
첫댓글/그녀 마이 이쁘지요. 사랑스러워 어쩌나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