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생활을 할 때 우리는 항상 수많은 감각 자극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단 한 순간만이라도 주의를 분산시키는 이들 자극으로부터 벗어나 절대적 평화와 안정을 찾고 싶다는 희망을 품기도 합니다. 그러나 자극으로부터 도망치기는 쉽지 않습니다. 좋아하는 영화가 시작되기를 기다릴 때도 수십 번씩 반복해 틀어주는 광고와 홍보영상으로 인해 눈과 귀가 어지럽기 짝이 없습니다.
이에 비해 차분한 연극을 보러 갔을 때는 첫 장면이 시작되기 전에 절대적 암흑이 무대와 관객석을 뒤덮을 때가 있습니다. 불과 몇 초 안 되는 순간이지만, 완전한 암흑 속에서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을 때, 관객들은 극도의 긴장감을 느낍니다. 과연 무슨 일이 벌어질까? 어떤 소리, 어떤 장면부터 다시금 우리의 주의력을 끌어갈 것인가? 이 순간만큼 기대감에 벅차오르는 순간은 일상생활 속에서는 그리 찾아보기 힘들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뇌는 절대적 암흑이나 절대적 고요를 잘 버텨내지 못하는 듯합니다. 2006년 영국의 방송사인 BBC는 완전한 감각 박탈이 인간 심리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조사해보았습니다. 건강한 자원자를 모집한 후 빛과 소리가 완전히 차단된 독방에서 48시간을 지내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경험은 절대적 평화가 아니라 잔혹한 고문이었습니다. 그들은 독방에서 지내는 동안 끊임없는 환각현상(줄무늬 등의 기하학적 패턴으로부터 살아 있는 뱀이나 용 같은 괴물의 모습까지)에 시달렸으며,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지속된 불안을 참아내야만 했습니다.
48시간이 지난 후 피험자들의 기억력이나 계산 능력 등을 점검했을 때, 이들은 매우 혼란스러워했으며 피암시성이 높아져서 연구진들의 지시에 무조건 복종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1930년대 독일의 심리학자인 볼프강 메츠거(Wolfgang Metzger)는 시각 자극을 박탈했을 때 환각을 보는 현상을 규명하고 이를 ‘간츠펠트 효과(Ganzfeld effect)’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독일어의 ‘ganzfeld’란 영어로 ‘total field’라는 뜻으로 한국말로 하면 ‘전체 시야’ 정도의 의미가 됩니다. 그야말로 전체 시야를 차단하여 어떠한 시각 자극도 입력되지 않도록 하면, 뇌는 내부에서 거짓 신호를 만들어내서라도 절대적인 감각 박탈이 일어나지 않도록 합니다.
이러한 현상은 실험실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광부들이 사고로 칠흑 같은 어둠 속에 고립된다거나, 온통 하얀 눈밖에 안 보이는 남극에서 몇 달간 보내는 경우, 또는 중죄수로서 독방에 오래 수감되는 경우 모두 지독한 환각을 경험하며 현실과 환각 사이의 경계가 모호해집니다. 일부 정치범 수용소에서는 이러한 감각 박탈을 고문의 한 형태로 이용해서 윤리적으로 문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자연은 진공을 싫어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처럼, 우리의 뇌는 아무것도 없는 것을 견뎌내지 못합니다. 하지만 역으로 이러한 성질을 통해서 뇌의 숨겨진 능력을 키울 수 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만약 감각이 빈 공간을 뇌가 스스로 채워 넣는다면 이때 채워지는 것은 단순한 악몽이 아니라 무의식 저 깊은 곳에서 끌어 올린 지혜이거나 초의식 혹은 영적인 신비체험일 것이라는 주장입니다.
미국의 초심리학자인 찰스 호노턴(Charles Honorton)은 간츠펠트 상태에 들어간 사람은 쉽게 초감각 능력을 인지할 수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실제로 이들의 뇌파는 정상일 때와는 다른 양상을 보이고, 좌우반구가 좀 더 동조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이들 초심리학자들은 이러한 뇌파의 변화가 좌뇌와 우뇌가 진정으로 협력하는 증거이며, 일상의 자극 과다 속에서 잃어버린 인간의 제6감이 비로소 드러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쯤 되면 믿거나 말거나의 영역으로 들어가겠지요. 지금까지 수십 년간에 걸쳐 수천 명을 대상으로 간츠펠트 체험을 이용한 초감각 능력 시험이 이루어졌지만 아직도 결론이 나지 않은 상태입니다. 물론 제대로 훈련된 과학자들은 어느 누구도 이를 믿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간츠펠트 효과를 진지하게 치료에 응용하는 경우는 있습니다. 완전한 감각 박탈이 아닌 약 80% 정도의 감각 차단을 목표로 특수하게 제작된 욕조 속에 들어가 누우면 마치 명상 상태와 유사한 신체적 정신적 이완이 이루어지는데, 이런 경험이 우울증이나 중독의 치료, 통증이나 스트레스 감소에 효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임상적으로 얻어진 경험들을 종합하면 간츠펠트 효과는 완전한 감각 박탈에서 비롯되었을 때는 심한 후유증을 남길 수 있지만, 적당한 감각 차단으로 유도되었을 때는 오히려 이완 및 휴식과 함께 창의력을 증진시키고 당면 문제에 대한 새로운 통찰력을 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초심리학자들의 입장을 전적으로 수용하긴 어렵다 할지라도, 우리가 감각 포화 상태에서 살기 때문에 타고난 심리적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고 여겨집니다.
간츠펠트 효과는 주어진 감각 자극이 없을 때 우리의 뇌가 무언가 대체할 자극을 만들어내는 현상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손만 뻗으면 쉽사리 닿는 인터넷과 스마트폰, MP3 플레이어와 개인용 영상기기를 이용해 귀와 눈을 꽉꽉 채워 넣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런 기기들이 주변에 없으면 마치 감각 박탈 상태에 놓인 것처럼 불안과 초조감에 시달리고, 해결할 수 없는 무료함에 지쳐버립니다.
무료함은 예로부터 마음의 행복을 갉아먹는 어두운 힘으로 묘사되어 왔습니다. 초기 기독교 교부들은 무료함을 ‘acedia’라는 용어로 지칭했으며, 온통 밝음이 가득한 대낮에도 수도사의 마음을 점령하여 사물의 생동감을 말려버리고, 자신을 둘러싼 풀과 나무, 음악과 음식의 향취를 소멸시키는 영리한 악마라고 불렀습니다.
이러한 무료함에 빠진 사람은 자신이 처한 환경을 탓하고 더욱 자극적인 감각을 추구하나, 그 역시 오래가지 못하고 다시금 무료함에 점령되어버리는 악순환에 빠집니다.
현대 사회의 감각 포화는 우리로 하여금 쉽게 무료함의 악마에 사로잡히게 합니다. 누구나 끼고 있는 이어폰의 볼륨은 점점 커져만 가며, 영상물과 게임 화면은 점점 더 원색적이고 자극적인 내용으로 채워집니다. 스마트폰의 조그만 화면에서 고개를 들어 창밖을 스쳐 지나가는 주변의 경치에 시선을 내맡기는 사람은 없어 보입니다.
한 번씩은 이러한 감각들을 모두 물리고, 스스로 감각 차단 상태에 몰입해보는 게 필요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나의 뇌가 그 빈 곳을 채우기 위해 어떤 소리, 어떤 영상을 퍼 올려내는지 살펴볼 수 있을 것입니다. 간츠펠트 효과가 만들어내는 내면의 목소리에는, 우리가 오랫동안 잊어버리고 있던 내면의 지혜가 숨겨져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네이버 지식백과] 간츠펠트 효과 [Ganzfeld Effect] - 내면의 목소리, 내면의 지혜 (사람을 움직이는 100가지 심리법칙, 2011. 10. 20., 케이엔제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