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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남기맥매죽헌(통박)단맥종주
종주에 필요한 5만분의1 지형도 도엽명 : 논산
금남기맥이 금남정맥에서 분기하여 흐르다가 논산시 가야곡면, 양촌면, 완주군 화산면의 삼면봉인 까치봉(456)에서 금남기맥은 서남방향으로 흘러가고 한줄기를 서북방향으로 분기하여 삼재(270, 1.1)-통박산(310, 0.7/1.8)-더운댕이재 임도(170, 0.7/2.5)-매죽헌성삼문묘 북측 4번군도 사송재(130, 1.8/4.3)-△226봉(1.5/5.8)-은진임씨묘소안부(170, 0.6/6.4)-구명봉(△211, 2.2/8.6)-호남고속도로 방고개(70, 1.8/10.4)-갈마산(156, 0.6/11)을 지나 △57.9 삼각점(0.8/11.8)-68번국지도를 지나 논논산시 가야곡면 병암리 매오리마을 논산저수지(탑정호) 입구(30, 0.2/12)에서 끝나는 약12km의 산줄기를 말한다
이산줄기는 처음 우리산줄기별 이야기나 우리산줄기수체계도를 만들때는 매죽헌 성삼문의 묘와 사당을 품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처음으로 나오는 통박산의 이름을 차용하여 금남기맥에서 분기하였으므로 금남기맥통박단맥이라고 이름을 지었으나 답사를 하면서 그 사실을 알게 되어 오히려 그 산이름은 몰라도 국민들이 사육신 성삼문의 명성은 이미 다들 알고 있다는 점에 착안해서 단재 신채호의 낳고 자라고 묻혀있는 것을 기리기 위해 한남금북단재단맥이라고 이름을 지은 것과 같은 맥락으로 금남기맥매죽헌단맥이라 이름을 수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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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고롭지만 5만지형도와 대조해가며 읽으시면 재미있을 것입니다 ^^
만약 사진이 안보이시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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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 2016. 3. 1(화) 맑음 흐림 반복
누가 : 고송부 계백 신경수
어디를 : 논산시 가야곡면에서 완주군 화산면을 넘는 643번지방도로 금남기맥상 말목재에서 금남기맥을 따라 까치봉으로 올라 매죽헌 성삼문의 묘와 사당이 있는 4번군도 사송재를 지나 가야곡면 강청리 독점마을 은진임씨 묘지로 탈출
까치봉(456) : 충남 논산시 가야곡면, 양촌면, 전북 완주군 화촌면
통박산(310) : 충남 논산시 가야곡면, 양촌면
구간거리 : 8.7km 접근거리 : 2km 단맥거리 : 6.4km 하산거리 : 0.3km
구간시간 6:35 접근시간 1:20 단맥시간 2:15 하산시간 0:05 휴식시간 2:10 헤맨시간 0:10
오늘은 97주년 3.1절입니다
일제강점기때 나라를 찾기 위해 들불처럼 전국으로 번져나간 비무장항거
그 함성이 들리난듯 합니다
아침 먹거리를 찾아 주위를 빙빙돌다 찾아들어간 식당 아침은 백반 밖에 안된다고 합니다
무쟈게 맛없는 백반을 안주로 해장술 젊잖게 이야기하면 입산주를 각 1병씩 때립니다
어제 그택시를 불러 오늘 답사할 금남기맥매죽헌단맥(처음에는 통박단맥이라고 했다가 답사후 매죽헌단맥이라고 수정하였음)
들머리인 논산시 가야곡면 삼전리에서 전북 완주군 춘산리 석천마을을 넘는 643번지방도로 말목재에서 내립니다
고갯마루 옥녀봉쪽으로 거대한 목장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석천버스정류장부스가 있는데
전주에서 오는 시내버스가 이곳에서 유턴하여 다시 전주로 갑니다
석천교회 가는 곳으로 있는 가건물 비슷한 스레트 처마밑으로
정말로 오래간만에 보는 고드름이 주렁주렁 대추나무 연걸리듯이 달려있습니다
추억의 한자락...........
춥긴 추운 모양입니다
하여간 금년 겨울 산행은 날짜만 잡으면 영하20도입니다 그려^^
이런저런 안내판들이 즐비하고
남쪽으로 조금만 가면 이정표가 있는 곳에서 금남기맥을 따라 작봉산쪽으로 오르는 길이 좋습니다
까마득한 옛날에 지나간 기억은 아예 사라지고 전혀 다른 곳을 오르는 것 같은 기분입니다
세월무상...........
이정주에
쌍계사입구8.64, 작봉산5.74km"라고 하는데 이 작봉산이 까치봉이 아닙니다
말목재 : 9:25
입산주를 때려서 그런지 어제 하산주 때문인지 오르는데 엄청나게 힘이 듭니다
에고~~~~
급경사를 오르는데 엄청나게 미끄러워 나뭇가지를 잡고 통사정을 하며 살짝 오른 곳에서
바튼숨을 내쉬며 숨을 고릅니다
9:40 9:45출발(5분 휴식)
벌써 일행은 눈가에서 사라진지 오래입니다
급경사를 밧줄잡고
돌들이 널린 등고선상410봉으로 올라서니 의리있게 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기냥 가시지 뭘 이렇게나^^
등고선상410봉 : 10:10 10:15출발(5분 휴식)
돌들이 널린 곳을 살짝 올라서면 쉼터자리가 있습니다
10:25
더 오르면 등고선상410봉 : 10:30
급경사를 밧줄잡고 통사정을 해가며 숨을 고르며 오르느라 애궂은 시간만 잘잘하게 흐릅니다
드디어 까치봉으로 올라서니 까치가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그것도 합창을^^
어느분의 정상팻찰 만드신 것 까지는 좋고 본받을 일이며 범인은 하지 못할 대단하신 일을 하셨는데
그런데 이게 뭡니까
이곳이 왜 금남정맥입니까 ????
앞으로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가 될 우리 역사의 기록물인 산경표를
이렇게 정면으로 부인을 해도 유분수지 이게 말이나 되는 일입니까
힘들어 죽겠는데 이런 것까지 속을 썩이니 부화가 치밉니다
좀 너그러워져야하는데 아직도 속좁은 소인배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내가 싫습니다
확 떼어내 분질러 버리고 싶은 마음을 가까스로 추스리고 일행과 합류해 숨을 고릅니다
잘못 표기를 한 것으로 인정을 하니 마음이 좀 안정이 됩니다
만약 정말로 금남정맥으로 알고 계신다면 이렇게 만천하에 드러내지 마시고
혼자만 알고 그렇게 인정하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우리산줄기를 모르고 계신분이 만약 이 팻찰을 보신다면 이 산줄기가 금남정맥이라고 오해를 할 소지가 100%입니다
그런 와중에도 J3시그널 한개가 위안을 줍니다 반갑습니다^^
2km도 안되는 거리를 왔을뿐인데 시간은 1시간 반이나 걸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줄기차게 내려가는 산줄기이므로 기대를 해봅니다
까치봉 : 10:55 11:10출발(15분 휴식)
좌측 북서쪽으로 논산시 가야곡면과 양촌면의 경계를 따라 내려갑니다
등고선상410봉 : 11:20 11:25출발(5분 휴식)
잡목이 약간 성가신 능선길을 줄기차게 내려가 펑퍼짐한 운동장 같은 삼재에 이릅니다
삼재 : 11:45 12:00출발(15분 휴식)
시니브로 아니 오른듯 올라가면 대구의 김문암님께서 정성드려 만드신
정상판이 반갑습니다
안녕하시고 산하사랑 여전하시겠지요^^
판독불능 삼각점과 논산432 해발303m 삼각점 안내판이 있군요
통박산 : 12:15 12:20출발(5분 휴식)
살짝 오른 곳에서 좌측으로 내려갑니다
12:25
엄청나게 어려운 산즐기입니다
짐승 길인지 나물꾼 길인지 흔적들이 어지럽고 잔능선이 수시로 나오며 헷갈리는데
잘 가늠해서 내려가 묘지 오르는 경운기길로 내려가
자갈갈린 비포장임도 십자안부인 더운뎅이재로 내려섰습니다
양지쪽 바람 안부는 곳에 멍석깔고 앉아 에너지보충을 하며 늘어지게 쉽니다
그러나 마음은 바쁘기 한량없습니다
더운뎅이재임도 십자안부 : 12:40 13:15출발(35분 휴식)
너른 경운기길로 잠시 내려가면 진짜 더운뎅이재인 등고선상150m 십자안부입니다
납작묘가 있는 등고선상210봉으로 올라서면 Y자길이 있고 우측 북동방향으로 내려갑니다
13:25
등고선상170m 십자안부 : 13:35
등고선상190봉 : 13:45
등고선상170m 십자안부 : 13:50
고도를 약10m 정도 올리다가 좌측으로 휘어지면서 북서방향으로 오르는 곳에서
계속 등고선상290봉으로 오르지 않고
우측 북동방향으로 내려가는 길이 있습니다 그리 내려가야합니다 무쟈게 어려운 곳입니다
잠시 내려가다
부여서씨 가족묘지에서 그길은 경운기길 비포장 도로로바뀌게 되며
머리가 깨질듯이 아퍼와 생각하기도 싫고 해서
걱정 근심 시름없이 무조건 가다가 보니 앞으로 커다란 저수지가 내려다보이고 길은 그리로 내려갑니다
13:55 14:15출발(10분 휴식 10분 헤맴)
길좋다고 가다가 결국 능선을 놓치고 말아 빽을 해서 본능선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측 계곡으로 내려가는 길이 보이면 그리로 내려갑니다 등고선상150m 안부입니다
즉 질러가려고 그런 것인데
석물에 비해 소박한 묘1기가 나오고 그 앞으로
묘를 올라오는 박석깔린 엄청난 좋은 길이 열리고
성삼문묘 안내판이 있습니다
성삼문묘
문화재자료제81호
성삼문(1418~1456 결국 38세에 돌아가셨다는 이야기가 되네요) 선생이 한강가에서 거열(車裂)의 극형을 당한후 그 시신을 전국의 산하에 매장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현재의 위치에 시신의 일부가 묻히게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이유로 일지총(一肢塚)이라고도 전한다 성삼문의 호는 매죽헌(梅竹軒) 본관은 창녕이다 도총관 승의 아들로 1438년(20세때임 세종20년)에 하위지와 함께 식년문과에 급제하였고 1447년 문과 중시에 장원하였다 직집현전으로 신숙주와 함께 예기대문언독을 편찬하였다 정음청에서 정인지등과 한글 창제를 앞두고 명나라 언어학자로 요동에 유배되어있던 황찬에게 13차례나 내왕하면서 음운을 연구하여 한글창제에 기여하였다 1455년 4월에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발각되어 왕의 국문을 받고 사망하였다 원래의 묘역에 상석 문인석 석주 등을 최근에 제작하여 배치하였다
나도 단지 사육신이라는 것과 노량진 사육신묘역에 묻혀게시는 것으로만 알았는데
같이 답사를 한 계백님의 공부한 결과를 나는 노력 하나 안하고 모셔옵니다 고맙습니다 ^^
成三問(성삼문) : 죽음으로 매화의 지조와 대나무의 절개를 지킨 충신
조선 제일의 충의(忠義)를 지킨 인물, 성삼문(成三問, 1418~1456)은 집현전 학사 출신으로 목숨을 바쳐 신하의 의리를 지킨 사육신(死六臣)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1455년 수양대군이 단종을 내쫓고 왕위에 오르자 이듬해 단종 복위를 계획하다 발각되어 능지처참을 당하였다. 한번 옳다고 여긴 신념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지키려고 했던 산봉우리의 낙락장송(落落長松) 성삼문. 그의 곧고 맑은 지조야말로 조선 선비들의 의리 정신을 보여주는 거울이 아닐 수 없다.
집현전 학사로 발탁되다
성삼문은 충청도 홍주 노은동(현재 충남 홍성군 홍북면 노은리) 외가에서 출생하였다. 자는 근보(謹甫) 또는 눌옹(訥翁)이며, 매화나 대나무와 같은 강직한 군자의 기질을 흠모하여 호를 매죽헌(梅竹軒)이라 하였다. 본관은 창녕이며, 부친은 도총관을 지낸 성승(成勝)이다. 어머니는 현감 박첨(朴襜)의 딸이다. 그가 태어난 홍주 노은동은 고려 말의 명장이었던 최영 장군이 출생한 곳이기도 하다.
영웅이 탄생할 때 흔히 갖춰지는 탄생설화가 있듯이 성삼문도 태어날 때 공중에서 ‘낳았느냐?’ 하는 세 번의 소리가 있었다는 일화가 전한다. 그의 이름인 ‘삼문(三問)’의 유래이기도 한데, 문헌으로 전하는 내용은 아니고 구전 설화에 가깝다.
성삼문은 1435년 18살 되던 해에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3년 뒤인 21살 때에 하위지(河緯地)와 함께 식년문과에 급제한 뒤 집현전 학사로 발탁되었다. 안평대군을 통해 그의 학문과 인품 됨됨이를 전해들은 세종이 직접 집현전 학사로 발탁했다. 이때 성삼문과 함께 집현전 학사로 발탁된 인물은 박팽년(朴彭年), 신숙주(申叔舟), 하위지(河緯地), 이개(李塏), 이석형(李石亨) 등이다. 성삼문은 이들과 함께 집현전에서 학문연구에 전념하였다. 이후 세종의 지극한 총애를 받으면서 수찬(修撰)·직집현전(直集賢殿)으로 관직이 올라갔다.
세종을 도와 훈민정음을 만들다
세종 때에 신숙주, 성삼문 등 집현전 학사들이 왕명으로 편찬하여 1448년에 간행한 [동국정운]. 통일된 한자 표준음을 정하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우리나라의 바른 음’이란 뜻을 담고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사기초사전>
25살 때에는 박팽년, 신숙주, 이개, 하위지, 이석형 등과 함께 삼각산 진관사에 휴가를 받아 독서에 열중하기도 하였다. 이를 사가독서(賜暇讀書)라 하는데, 집현전 학사들에게 준 특별한 혜택이었다. 집현전 시절 성삼문은 세종의 명을 받고 훈민정음 창제를 위한 준비 작업을 진행했다. 그 결과 1443년(세종 25) 세종이 훈민정음 28자를 만들 때, 정인지, 신숙주, 최항, 박팽년, 이개 등과 더불어 성삼문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성삼문은 1445년(세종 27) 신숙주와 함께 요동을 13차례나 왕래하면서 그 곳에 유배와 있던 명나라 학자 황찬(黃瓚)으로부터 음운학을 배워왔다. 1447년 그의 나이 30살 때에 신숙주, 최항, 박팽년, 이개, 강희안 등과 함께 한국 한자음을 정리한 [동국정운東國正韻]을 편찬하는데, 수차례에 걸친 요동방문의 결과물이었다. 안평대군과 성삼문을 비롯한 집현전 학사들 간의 교류 또한 유명한데, 성삼문은 박팽년, 신숙주 등과 함께 안평대군의 정원에 있는 진풍경을 시제로 하여 <비해당 사십팔영(匪懈堂四十八詠)>과 그 서문을 짓기도 했다.
단종 복위를 꿈꾸다
문종이 죽고 어린 단종이 즉위하자 성삼문은 성리학적 정치윤리에 충실하여 어린 임금을 보필하였다. 그러나 1453년(단종 원년) 왕위를 탐내던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김종서(金宗瑞)를 죽이고 아울러 집현전 신하들에게는 정난공신의 칭호를 내려 주었다. 공신의 칭호를 성삼문은 부끄럽게 여기고 이를 사양하는 상소를 올렸다. 수양대군이 정치적 야심을 키우는 사이 성삼문은 1454년에 집현전부제학이 되고, 이어서 예조참의를 거쳐, 1455년에 예방승지 자리에 올라 단종을 가까이서 보필하였다.
태어나면서 어머니를 잃고 다시 아버지마저 잃은 어린 단종은 위협에 못 이겨 왕위에 오른 지 3년 만에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당시 단종의 옥새를 수양대군에게 전달하는 임무는 예방승지로 있었던 성삼문이 맡았다. 양위식을 담당한 성삼문은 옥새를 끌어안고 대성통곡을 하였다. 세조가 울고 있는 그를 한참 동안이나 차갑게 노려보았다.
이런 상황에서 집현전 출신의 젊은 관료들과 단종 및 문종의 처가 식구들을 중심으로 단종 복위 움직임이 조심스럽게 이뤄지고 있었다. 그 중심에 선 인물이 성삼문과 박팽년이었다. 승정원에 근무했던 성삼문은 나름대로 세조의 동태를 파악하고 있었고 명나라 사신이 한양에 도착한다는 정보를 입수하여, 1456년 6월 1일에 거사를 이루기로 했다.
“성삼문과 박팽년이 말하기를 6월 1일 연회장의 운검(雲劒)으로 성승과 유응부가 임명되었다. 이날 연회가 시작되면 바로 거사하자.우선 성문을 닫고 세조와 그 오른팔들을 죽이면, 상왕을 복위하기는 손바닥 뒤집는 것과 같을 것이다.” ([연려실기술] 단종조고사본말 중에서)
그러나 이들의 거사는 채 이루기도 전에 발각되고 말았다. 성삼문과 함께 단종복위를 도모하던 김질이 단종 복위계획 사실을 누설해 버린 것이다. 김질을 통해 진상을 파악한 세조는 성삼문을 불러들여 결박하였다. 성삼문의 뒤를 이어 함께 거사를 도모했던 박팽년·하위지·이개·유응부·유성원·박정 등이 끌려와 심문을 받았다.
“너희들이 어찌하여 나를 배반하는가.”
“옛 임금을 복위하려 했을 뿐이다. 천하에 누가 자기 임금을 사랑하지 않는 자가 있는가. 어찌 이를 모반이라 말하는가. 나의 마음은 나라 사람이 다 안다. 나으리가 남의 나라를 빼앗았고, 나의 군주가 폐위당하는 것을 보고 견딜 수가 없어서 그러는 것이다. 나으리가 평소 걸핏하면 주공(周公)을 지칭하는데, 주공도 이런 일이 있었소? 삼문이 이렇게 하는 것은 하늘에 태양이 둘이 없고 백성은 군주가 둘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리라.” ([대동야승] 중에서)
성삼문의 말에 화가 난 세조는 “지난 번 옥새를 가져올 때는 가만히 있다가 이제 와서 나를 배신하는 이유가 무엇인가”라며 다그쳤다.성삼문은 “때를 기다려 뒤를 기다렸을 뿐이다.”고 답했다.
성삼문은 부당하게 폐위된 단종의 왕위를 다시 찾고자 했다. 신하에게는 두 임금이 있을 수 없고 백성에게도 두 임금이 있을 수 없다는 명분이 있었다. 그는 단종의 신하로서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원칙을 지키고자 했다.
“너는 나의 녹을 먹지 아니 하였는가? 녹을 먹고도 배반을 하였으므로 명분은 상왕을 복위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스스로 정권을 차지하려는 것이 아닌가?”
“상왕께서 계신데 나으리가 어찌 나를 신하라고 하십니까? 또 나으리의 녹을 먹지 아니하였으니, 만약 나의 말을 믿지 못하겠다면 내 가산을 몰수하여 헤아려 보십시오” (남효온, 「육신전」 중에서)
성삼문의 당찬 말에 화가 치민 세조는 쇠를 달구어 다리를 뚫게 하고 팔을 자르게 했다. 극심한 고문에도 성삼문은 얼굴빛을 바꾸지 않고 “다시 달구어 오게 하라. 나으리의 형벌이 참으로 독하다.”고 태연히 말할 뿐이었다.
성삼문은 세조, 즉 수양대군을 자신의 군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녹봉으로 받은 것을 손대지 않고 그대로 보관하였으며, 세조를 향해 나으리라는 호칭으로 군신관계가 결코 아님을 분명히 하였다. 그에게 있어 세조는 어린 조카의 왕위를 빼앗은 불의한 인간이자 역모자일뿐이었다. 실제로도 그가 죽은 뒤에 가산을 빼앗아 보니 1455년 즉 세조 즉위년부터 받은 녹봉을 별도로 한 곳에 쌓아두고 ‘어느 달의 녹’이라고 기록해 놓았으며 집안에는 남은 것이 아무 것도 없었고, 오직 거적자리만 있을 뿐이었다고 전한다.
성삼문이 한창 고문을 받고 있을 때 오랜 벗이자 동료였던 신숙주가 세조 옆에 있었다. 그를 본 성삼문이 노려보며 말했다.
“옛날에 너와 함께 집현전에 있을 때 영릉(세종의 능호)께서 원손을 안고 뜰을 거닐면서 세월이 흐른 뒤에 너희들이 이 아이를 잘 생각하라는 당부가 아직 귓전에 남았는데, 네가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
호통을 들은 세조는 신숙주를 피신시켰다. 성삼문은 거사를 앞두고 “신숙주는 나와 서로 좋은 사이지만, 죽어야 마땅하다.”고 하였다.비록 두 사람이 개인적으로는 좋은 벗이었지만, 세종의 당부를 잊었을 뿐 아니라 불의의 편에 선 신숙주의 처세는 신의를 져 버린 것이므로 성삼문은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
혹독한 고문에도 결코 굴하지 않고 태연자약하게 세조의 불의를 꾸짖고 세종과 문종, 그리고 단종을 향한 신하의 충성을 지킨 성삼문.세조가 성삼문에게 함께 공모한 자를 물었을 때 그는 “박팽년 등과 우리 아버지뿐이다”라고 하였다. 다시 세조가 공모한 자를 재차 물으니 “우리 아버지도 숨기지 않는데 하물며 다른 사람이겠는가”라고 말할 뿐이었다. 그때 제학 강희안(姜希顔)이 관련되어 고문을 받고 있자, 성삼문이 “나으리가 선대의 명사를 다 죽이고 이 사람만 남았는데, 그는 이 사건을 모의하지 않았으니 남겨 두어서 쓰게 하시오. 이 사람은 진실로 어진 사람이다.”하여 강희안은 석방되었다.
성삼문이 죽으러 나갈 때 좌우에 있던 옛 동료들을 돌아다보며, “너희들은 어진 임금을 도와 태평성대를 이룩하라. 이 성삼문은 돌아가 옛 임금을 지하에서 뵙겠다”고 말하였다고 한다. 또 그는 수레에 실릴 때 다음과 같은 절명시를 남겼다.
둥 둥 둥 북소리는 사람 목숨 재촉하는데
머리 돌려 돌아보니 해는 이미 기울었네
머나먼 황천길에 주막 하나 없으니
오늘밤은 뉘 집에서 재워줄꼬.
당시 그에게는 대여섯 살쯤 되는 딸이 있었는데, 수레를 따르며 울며 뛰었다. 성삼문이 돌아보며 말하기를 “사내 자식은 다 죽을 것이고, 너는 딸이니까 살 것이다”라며 달랬다. 집안의 종이 울며 술을 올리자 몸을 굽혀서 마시고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임이 주신 밥을 먹고 임 주신 옷을 입었으니
일평생 한 마음이 어길 줄 있었으랴
한 번 죽음이 충의인 줄 알았으니
현릉(顯陵)의 송백(松柏)이 꿈속에 아련하네
위의 시는 성승이 지은 시라는 설도 있으나, 확실치는 않다.
단종 복위 사건에 연루된 인물들은 모두 체포되어 죽음을 당하거나 자결하였다. 성삼문을 비롯하여 박팽년·유응부·이개는 작형(灼刑:단근질)을 당하였고, 뒤에 온 몸을 찢어서 죽이는 거열형을 당하였다. 하위지는 참살당하였으며, 유성원은 잡히기 전에 자기 집에서 아내와 함께 자살하였다.
성삼문은 아버지 성승과 함께 군기감 앞에서 능지처사(凌遲處死)를 당하였고, 그의 아들 5형제와 아우 삼고, 삼빙, 삼성 등 남자는 젖먹이까지도 살해되는 멸문지화를 겪었다. 가산은 몰수되고, 처 차산과 딸 효옥은 운성부원군 박종우(朴從愚)의 노비가 되었다. 후손으로는 딸 효옥 외에 박림경에게 시집간 맏딸과 유자미의 며느리가 된 손녀, 엄씨에게 시집간 딸 등이 유일하게 살아남았을 뿐이다.
성삼문은 흔히 고려 말의 충신 정몽주와 비견되곤 한다. 정몽주는 사후에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받았는데, 성삼문의 시호는 충문(忠文)이었다. 정몽주가 절개를 지키는 마음을 담은 단심가를 지었다면, 성삼문은 죽기 전 다음과 같은 유명한 절의가(絶義歌) 한편을 남겼다.
이 몸이 주거 가서 무어시 될고 하니,
봉래산(蓬萊山) 제일봉(第一峯)에 낙락장송(落落長松) 되야 이셔,
백설(白雪)이 만건곤(滿乾坤)할 제 독야청청(獨也靑靑) 하리라.
— 성삼문, <청구영언>
성삼문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절신(節臣)으로서 오늘날까지 한국인들의 존경의 대상이 되고 있는 사육신의 한 사람이다. 세종대에 발탁된 문신으로 문명(文名)이 높았으며, 조정의 경연(經筵)과 문한(文翰)을 도맡아 처리하였다. 세종을 도와 훈민정음 창제에 큰 역할을 하였으나, 세조의 왕위 찬탈에 반발하여 단종 복위를 꾀하다 죽음을 당하였다. 뒷날 생육신의 한 사람인 남효온(南孝溫)은 [추강집(秋江集)]에서 성삼문을 비롯한 사육신의 죽음을 택한 절개를 기록에 남겼다.
성삼문은 2백년이 지난 뒤인 숙종 때가 되어서야 역모의 혐의가 풀렸다. 사육신(死六臣)의 무덤이 수축(修築)되고 묘지 위에 사당을 세우게 되었고, 삭탈된 관직이 회복되었다. 또 영조 때에는 그에게 이조판서의 관직이 추증되었고, 충문의 시호가 주어졌다. 그의 묘는 서울 노량진 사육신 묘역에 있으나 그의 일지(一肢)를 묻었다는 묘가 충청남도 논산시 가야곡면에도 있다. 저서로 [매죽헌집(梅竹軒集)]이 있다. ~인물한국사:정성희>실학박물관 학예연구사~
성삼문 사당
너른 주차장에 이르면 관리사무소 등이 있으며 관리인이 기거를 하고 있는 민가도 딸려있습니다
매죽헌성삼문묘소 : 14:25출발(10분 묘소 관람)
여기서 큰길로 나가 고갯마루로 올라도 되고 사당 뒤 밭을 가로질러도 금방 고갯마루에 이르게 됩니다
제대로 능선을 타고 내려왔다면
오석비가 있는 곳으로 내려오게 됩니다
성삼문묘소쪽으로 바라본 사송재 2차선도로
4번군도 사송재 : 14:30 14:35출발(5분 휴식)
고갯마루에서는 오를 수가 없으니 좌측으로 조금 더 내려가
우측 편편한 무명묘지로 오르면
경운기길로 능선으로 오르게 됩니다
마지막묘에서 길 흔적으로 오르면 가시 잡목 넝쿨 등이 걸구적거리는 등고선상170봉입니다
14:50
살짝 내려가다 우측 동쪽으로
반남박씨가족묘지로 내려가
등고선상130m 십자안부 : 14:55
등고선상150m 십자안부 : 15:00
등성이 십자안부에서 좌측 북쪽으로 오릅니다
15:05
조망좋은 뾰족한
226봉으로 올라서면
판독불능 삼각점과 논산431 해발227m 삼각점 안내판이 있습니다
226봉 : 15:30 15:35출발(5분 휴식)
우측으로 휘어서 북동방향으로 가다가 우측으로 휘어지는 지점에서
좌측 북서방향으로 길없는 급경사를 내려가는데 잘 살펴보면 좌측에서 내려오는 길 흔적을 찾을 것입니다
응달이라 눈이 그대로 쌓여있어 벌벌벌 기면서 내려갑니다
능선 좌측으로 엄청나게 크고 잘쓴 묘들이 즐비한 은진임씨예랑공파공원묘역이 내려다보이고
등고선상170m 안부에 이르면
밤 고사리를 줍거나 꺽어가는 사람들을 절도죄로 적용하여 고발하겠다는 엄청 야박한 안내판이 망가져가고 있습니다
은진임씨공원묘지 십자안부 : 15:40 15:55출발(15분 휴식)
우여곡절끝에 좌측 묘지입구로 내려가 부른 택시로 논산으로 갑니다
은진임씨공원묘지 입구 : 16:00
에필로그
말목재에서 남쪽으로 조금 내려가 이정표가 있는 곳에서 금남기맥을 따라 작봉산쪽으로 오릅니다
급경사가 빈번히 나오고 밧줄잡고 오르기를 얼마나 했을까
실하게 고생 한번 하고 드디어 매죽헌단맥 분기봉인 까치봉으로 올라섰습니다
좌측으로 성긴길을 따라 내려갑니다
시나브로 통박산을 넘어 4번군도 사송재 우측 작은 계곡안에 있는 매죽헌 성삼문 묘와 사당이 있는 곳에 이르고
구경을 하느라 시간을 좀 보내고 고개 좌측으로 조금 아래 너른 무명묘지를 가로질러 경운기길을 따라 오릅니다
엄청나게 속도가 붙질 못하고 겨우겨우 이어가고 있습니다
어차피 10km 조금 넘는 산줄기라 그리 큰 걱정은 안해도 완주하는데는 이상이 없을 것 같은데
먼저 앞장 서시던 고송부님이 은진임씨공원묘지 안부에 이르러 오늘은 이곳에서 산행을 접자고 합니다
물론 내가 너무 느리게가는 연습을 하고 있으니 오늘 해질녁까지 완주가 안될 것이 뻔해 그런 것 같습니다
미안하기도하지만 그러나 나는 이해가 안됩니다 지금 시간이 15시 조금 넘었으니
앞으로 해질녁까지와 잔광이 있을때 까지만이라도 한다면 종주도 가능하고 적어도 호남고속도로까지 가더라도
봉우리 한개 남겨놓고 종주에 가름해도 될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일행중 한사람이라도 중간에 탈출하면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같이 하산하는 것이 산꾼들의 불문율입니다
더 가라고 말을 하지만 그럴 수는 없어 미적거리다가 같이 하산하기로 결정하고 내려갑니다
묘지입구에서 일꾼들 2명을 만났는데 아마도 무슨 말을 들은 것 같습니다
여기는 개인문중묘소니 일반인들은 들어오면 안된다는 이야기일 것입니다
에구 다음에 남은 자투리를 답사하려면 어디로 접근을 해야하나 그것이 또 걱정으로 남습니다
아침에 그택시를 불러타고 논산역으로 갑니다
시간이 1시간 여유가 있어 역근방 한 음식점으로 들어가 감자가 거의 없는 감자탕을 안주로 하산주를 하고
우여곡절로 점철된 산줄기 답사산행을 접습니다
서대전에서 고송부님 내리시고 용산역에서 경의중앙선을 타고 DMC역에서계백님 내리시고
나는 강매역에서 내려 집에 도착하니 8시를 조금 넘기고 있습니다
여름 같으면 지금 이시간에 하산할 시간인데 어째 시간이 조금 아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산경표따르기 카페 개설에 따른 부탁의 말씀
<카페명 : 산경표따르기, 부제명 : 우리산줄기 바로 세우기>
백두대간보전법이 생긴지도 어언 13년째입니다 법만 만들어놓고 실제로는 일제 강점기에 만들어진 태백산맥 등이 지금도 각종지리교과서나 방송 기업 정부와 단체등 사회전반적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에 누천년간 사용해오던 우리고유의 산줄기 이름과 흐름을 1769년 여암 신경준 선생께서 영조의 명을 받아 족보형식으로 편찬한 우리나라의 지리정보 집합서인 산경표에 기초한 백두대간 낙동정맥 등 1대간 1정간 13정맥 산줄기를 바로 알고 바로 잡아보자는데 뜻을 두고 있습니다. 관심을 가지고 동참해 주실 분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구체적인 사업도 아직은 확정된 것이 없습니다 앞으로 모든 회원님들과 숙의 과정을 거쳐 활동을 할 예정입니다 시작이라 가입인원이 적습니다. 내용도 아직은 빈약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뜻을 같이 하는 님들의 열정에 힘입어 알찬 내용으로 채워지고 빛을 낼 것입니다
일반인, 산악인 관계 없이 주변에 가입 홍보도 부탁드리며,
앞으로 우리산줄기 이름이 널리 실생활과 인문지리 등 학문에도 쓰일수 있도록 다같이 힘을 합쳐 주십시요.
고맙습니다! 꾸뻑~
신경수, 다올, 현오 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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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성삼문의 유래를 더듬는 매죽헌단맥길이군요.
이틀간 이어진 눈길 산행으로 추억의 여정은 이어졌습니다.
함께 하신 분들 모두 수고많으셨습니다.
이어지는 산행 내내 건강한 여정이시길 바랍니다.
방장님께서도 환절기 건강 유의하시어
의미있는 산하사랑 거침없으시기를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예전에 금남기맥 산행하면서 말골재에 도착,정류장에 앉아서
하염없이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산행을 접었던 기억이 납니다.
입산주 각 일병 하고 산으로 드시고...
자투리 남은 구간은 나중에 탑정호 한바퀴 도시면서 하셔도 좋을듯합니다
ㅎㅎ 고맙습니다
4시간 정도면 될 것 같아 바로 그 옆으로 북쪽으로 이어지는 중토단맥 답사를 하다가
시간 내어 마무리 지으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매번 괸심 주셔서 고맙습니다^^
요즘 친박이니 진박이니 그런 정치 용어가 많더라구요...ㅎㅎㅎ
더 이상 미루시면 않됩니다... 후배들에게 떳떳한 선배님들이었으면 합니다...
버거님의 말씀처럼 그리 되려고 하지만 현실적인 여건은 열악합니다
버거님의 고견 힘이 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