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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날자 : 2017년 09월 08일 (금요일 당일 산행)
산행날씨 : 새벽부터 아침까지 짙은 안개 후 오전부터 맑고 무더웠던 늦여름 산행날씨
산행온도 : 영상 17도에서 영상 30도
산행인원 : 칠갑산 나 홀로
산행코스 : 노동당사 삼거리 옆 주차장-노동당사-87번 금강산로 2차선 포장도로-소이산 생태숲 녹색길-시멘트 포장도로-지뢰꽃산방 팔각정-지뢰꽃길-
교통호 등로-지독한 잡목과 잡풀구간-소이산전망대 팔각정-소이산 평화마루공원-미군막사-소이산정상(362미터, 전망데크, 조망도)-청성부대
홍보관-비포장임도-이정표(평화누리길 소이산, 칠만암 10.1 Km, 연천 역고드름 5.4 Km)-1차선 포장도로-이정표(고석 10 Km, 직탕폭포 7 Km,
철원용암대지 4 Km, 대교천현무암협곡 11 Km)-능선진입-295 무명봉(벙커와 철봉2개)-수도국지-새우젓고개(2번 2차선 포장도로)-비포장
임도-팔각정 쉼터-지독한 잡목과 잡풀지대-동주산성 쉼터-동주산(340미터)-이정표(철원향교, 관전리마을, 동주산성)-잡풀 비포장임도-군 훈련
이정판들-비포장임도-268 무명봉-군부대 철조망-2차선 포장도로-밭 경작지-지독한 잡목지대-원형철조망-교통호 등로-328 벙커봉 조망-
원형철조망-363 고사목봉-481 벙커봉 조망-비포장임도(수정산 갈림삼거리)-헬기장-수정산(498.9미터, 삼각점2개, 벙커)-수정산 갈림삼거리
복귀-능선진입-431 벙커봉-비포장임도-능선진입-348 벙커봉-335 벙커봉-밀양박공묘지-넓은공터-잡목능선-시멘트 포장도로-평창이공묘지-
묵은 비포장임도-좌측 능선진입-벙커봉-468 공터봉-487 소나무봉-511 벙커와 녹슨 철봉-473.2봉(숙향봉, 헬기장과 삼각점)-551 바위봉-
543 무명봉-타이어 교통호-비포장임도-갈림삼거리-대전차 방어벽-대소라치(547미터) 갈림사거리(대전차 방어벽) 이정표(사문안골입구 1 Km,
금학산정상 1.2 Km, 담터계곡입구 3.6 Km)-넓은공터-능선진입-677 능선-무명안부-보개산(752미터, 헬기장)-전망바위-바위우회구간-무명
안부-610 무명봉-619 바위봉-635 잡목봉-663 활엽수와 바위봉-677 참나무 공터봉-692 웅덩이봉-668 무명봉-632 참나무봉-601 돌담
벙커봉-624 바위무명봉-벤취1-폐타이어 등로-589 벤취봉-북마넘이고개(530미터, 임도갈림길 이정표 지장산 1.8 Km, 고대산 6.4 Km, 철원
상노리)-보개지맥 산행종료-폐 비포장임도-수도중앙교회수양관-산행종료
산행거리 : 무더위에 많은 땀 흘리며 여유롭게 쉬며 진행하여 21.46 Km (스마트 폰의 GPX 기준)
산행트랙 : 20170908 보개지맥 제1구간 노동당사-담터계곡 임도.gpx
산행시간 : 초반 지독한 잡풀과 잡목으로 어렵게 진행한 후 무더위에 고생하며 힘들게 진행하여 10시간 10분 (08시 23분 부터 18시 34분 까지)
교통편 : 애마와 택시를 이용
집에서 노동당사까지 애마 이용
담터계곡에서 노동당사까지 철원 콜택시 이용
보개지맥이란 ???
보개지맥은 왕재지맥 소이산(362.3봉)에서 분기하여 남쪽으로 수정봉(498.8봉), 숙향봉(473.2봉), 금학산(947.3봉), 보개봉(752봉), 보개산(지장산, 877.4봉), 화인봉(805봉), 북대(710미터), 성산(520봉), 난봉고개, 전곡읍내를 거친뒤 차탄천이 한탄강과 만난는 지점에서 끝나는 도상거리 약37 Km의 산줄기이다.
이곳 보개지맥은 그동안 지맥으로 인정을 받지 못하다가 최근에 새롭게 지맥 규정에 부합하여 정식 지맥 이름을 부여 받은 곳으로 한북정맥 상 지맥이 총 8개에서 12개로 늘어나게 되었다.
늦 여름 무더위에 고생하며 분단의 아품을 가슴속 깊이 느꼈던 시간들
선답자들의 산행지도와 산행후기를 참고한 후 난해하고 어려운 마루금 잇기 산행을 무탈하게 완주하고 돌아왔기에 단 한명의 후답자라도 다시 이 산객이 걸었던 마루금을 걸으면서 산행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하는 즐거운 마음으로 가능하면 마루금에 충실하게 적으려 노력하며 산행 후기를 적는다
아이들이 커가면서 가족 나들이 한번 다녀오기가 쉽지 않아 늘 다녀오던 여름 휴가도 집에서 잠시 보낸 후 오늘은 하루쯤 시간을 빼 쉬지 못한 여름 휴가 대신 다녀 오고 싶었던 보개지맥 산행을 진행해 보기로 한다.
이번 주 토요일 밤에는 산악회에서 실시하고 있는 보현지맥 제4구간을 다녀와야 하기 때문에 오늘 보개지맥 산행 후 내일 대득지맥 첫 구간을 다녀오기로 한 것은 어떻게 될지 오늘 산행 후 결정하기로 한다.
오래 전 옆지기와 하얀 눈이 쌓여 있던 금학산과 고대산 연계 산행을 위해 새벽 첫 버스를 타고 어렵게 걸었던 추억이 있고 산친구들과는 지장산 환종주를 하면서 걸었던 즐거운 기억이 있는 곳들이기에 낮설지 않지만 한여름의 끝자락에서 보개지맥이라는 이름으로 걷게 되는 산줄기는 또 다른 책임감과 의무감으로 가슴을 무겁게 만들고 있지만 그래도 무탈하게 완주 후 느끼는 희열이 크기에 이렇게 새벽잠을 설치며 또 다른 미지의 등로를 찾게 되는지도 모를 일이다.
새벽 일찍 일어나 대중교통을 이용하려다 새로 뚫린 고속도로도 타보고 경비도 크게 차이가 없기에 애마를 이용해 다녀오기로 한다.
하지만 짙게 깔려있는 안개가 마음을 더욱 무겁게 만들고 지난주 느꼈던 추위는 어디로 사라지고 아침부터 푹푹 찌는 무더위는 벌써 굵은 땀방울로 온 몸을 축축하게 적시고 있다.
그래도 몇 번인가 들렸던 철원에서 지금까지와는 달리 분단된 산하를 몸으로 직접 느끼며 걷게되었기에 가슴 답답한 마음으로 어려운 발걸음이 되었다.
총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 노동당사와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삶과는 무관하게 이념의 차이로 죽임을 당한 수도국지를 지나며 가슴이 답답함을 느끼고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다 보니 새벽에 짙게 깔려 있던 안개가 서서히 사라지며 생각보다 무더운 날씨에 벌써 준비한 식수 부족을 걱정하는 시간이다.
더욱이 생각보다 지독하게 엉켜있고 웃자란 잡목과 잡풀들로 인해 진행에 상당한 어려움을 느끼면서도 옛 추억을 생각하며 걸어가니 드디어 수정산에 도착을 해 기대하지 못했던 멋진 풍경과 조망에 잠시 쉬어가는 시간이다.
어렵게 진행한 보개지맥 분기점인 소이산에서 우측으로 끊어질 듯 이어져 이곳 수정산으로 이어져 온 산줄기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고 그 중간에 황금빛으로 변해가는 철원평야와 우측 아랫쪽의 군부대가 다른 의미로 눈길을 사로 잡고 있다.
수정산에서 시간 보내며 많은 사진을 남기고 뒤돌아 내려오다 등로 앞 우측을 살펴보니 오래 전 옆지기와 함께 추위 속에 벌벌 떨면서 첫 버스를 이용해 힘들었지만 좋은 추억으로 남겨져 있는 좌측의 금학산에서 우측의 고대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아름답게 펼쳐져 있고 그 좌측 앞쪽으로는 오늘 올라야 할 숙향봉이라 불려지는 헬기장으로 이뤄진 473.2봉이 우뚝 솟아 있는 모습도 눈에 들어 온다.
새벽에 이곳 철원으로 오면서 걱정이 되었던 짙은 안개는 벌써 사라지고 뜨겁게 대지를 달구는 강렬한 햇살이 내리쬐며 생각했던 것보다 더 많은 땀방울을 흘리고 있어 벌써 부족해지는 식수를 걱정하는 시간이 되었다.
생각보다 무더운 날씨에 습도가 높아 무수히 많은 땀방울을 등로에 뿌리며 잡목과 사투를 벌이다 보니 계획된 시간보다 한참이나 늦게 어려운 발걸음으로 보개산 정상의 헬기장에 도착을 한다.
잠시 그늘에 앉아 준비한 간식과 과일로 허기를 달랜 후 주위 풍경과 조망을 살펴보니 환상의 산그리메들이 일망무제로 펼쳐져 있어 고생한 보상을 받듯 많은 사진들을 남겨 본다.
남쪽 방향으로 오늘 오후와 다음 구간에 걸어야 할 보개지맥 마루금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고 그 우측으로 돌아가며 동두천의 소요산과 감악지맥의 마차산과 감악산도 지난날의 추억을 들추며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 놓고 있다.
이제 하루해가 서산으로 기웃기웃 저물어 가는 시간에 북마넘이고개에서 보개지맥 산행을 마치고 좌측의 담터계곡으로 이어진 폐 비포장 임도를 따라 한동안 걸어 내려가다 뒤돌아 보니 저 멀리 오늘 이 산객이 두발로 걸어 내려 간 보개지맥 산줄기가 길게 이어지며 조만간 다시 조우하자며 약속을 하고 있다.
생각보다 길게 이어지는 폐 비포장임도이기에 다음구간 들머리가 걱정이 되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을 친구삼아 오르면 또 금새 오르게 될 것이기에 오늘은 그저 아름답게 펼쳐진 마루금에 환희의 기쁨을 남겨 보는 시간이다.
아침 8시에 철원읍 동송버스 터미널 앞에 있는 김밥집에서 간단히 아침밥을 먹고 김밥 한줄 배낭에 넣은 후 텅텅 비어있는 넓은 주차장에 애마를 주차시키고 바로 옆에 있는 비극의 현장인 노동당사 건물로 걸어가니 바로 옆으로 지뢰꽃이라는 시가 보이고 잠시 그 시를 읽으며 아내석을 살펴본다.
철원시인 정춘근님이 쓴 지뢰꽃이란 시 한편이 가슴을 무겁게 만들고 잠시 잊고 살았던 분단된 조국의 비극적인 역사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었다.
앞으로는 다시 그런 비극이 찾아 들지 않기를 가슴속 깊이 바래보고 또 희망해 보는 시간이기도 하였다.
지뢰꽃이란 시 한편으로 울적해진 마음으로 계단을 타고 오르니 금새 총알 자국이 선명하고 오래되어 허물어져 가고 있는 노동당사가 나타나고 그 건물 주위를 한바퀴 빙 돌아 살펴 본 후 넓은 마당으로 내려 가 구경 온 할아버지 한분에게 부탁해 사진 한장 남겨 본다.
노동당사는 강원도 철원읍 관전리에 있는 노동당사는 1946년에 완공된 3층 건물로서 6.25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북한의 노동당사로 이용되었는데 6.25전쟁 때 큰 피해를 입어 건물 전체가 검게 그을리고 포탄과 총탄 자국이 촘촘하게 나 있지만 이런 모습이 6.25전쟁과 한국의 분단현실을 떠올리게 해서 유명가수의 뮤직비디오 촬영지나 유명 음악회의 장소로 활용되기도 했다.
현재 철원 노동당사는 철원군이 안보관광코스로 운영하고 있고 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으며 2001년 2월 근대문화유산에 등록되면서 정부 차원의 보호를 받고 있다.
앙상하게 뼈대만 남은 건물에서 남과 북으로 분단된 현실의 모습이 겹쳐 보이는데 철원지역은 해방 후 북한의 관할 하에 놓이게 되고 그때 지어진 노동당 철원군 당사 건물이 바로 이 건물로서 6.25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파괴되고 지금은 건물 외벽만이 보존되고 있는데 외벽의 포탄흔적은 한국전쟁 때의 상처이다.
골조에 나 있는 창의 형태를 보면 이 건물은 원래 3층이었음을 알 수 있는데 안으로 들어가면 1층만 방이 남아 있고 2, 3층은 무너져 버려 그 형태를 알 수 없다.
1층의 방은 밖에서 볼 때와 달리 크기가 작은데 어떤 목적으로 사용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해방 후 외국에서 활동하던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귀국을 하면서 좌와 우의 노선 경쟁이 치열해지고 남쪽에는 미국이 그리고 북쪽에는 소련이 진주하게 되니 그 갈등은 하나로 모아지지 못하고 전쟁이라는 비극을 낳게 되는데 철원 노동당사가 사용된 기간은 해방 후에서 한국전쟁까지의 시기라 하겠다.
1개 리당 쌀 200가마씩을 거두어 들여 이 건물을 만들었다는 이야기와 건물의 보안유지를 위하여 공산당원 이외에는 건축에 참가하지 못했다는 이야기 그리고 공산주의에 반대하던 사람들이 이곳으로 끌려와 고문을 당했다는 이야기들이 전해지는 건물이기도 하다.
이곳이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진 계기는 바로 90년대 대중문화의 아이콘이었던 서태지와 아이들 때문인데 그들의 노래인 발해를 꿈꾸며의 뮤직비디오를 촬영한 곳이 바로 여기였기 때문이다.
일과 산행을 위해 제법 많이 왔었던 철원이었는데 이곳 노동당사는 처음 접하는 건물이기에 아직도 알아보고 다녀 봐야 할 장소가 많음에 놀라는 시간이다.
노동당사를 잠시 둘러보고 87번 금강산로 2번 포장도로를 건너 좌측으로 잠시 걸어가니 도로 옆에 소이산 생태숲 녹색길이란 안내판이 보이고 그곳에는 소이산을 소개하는 글들이 보인다.
그곳에서 도로 우측을 보니 황금빛으로 변해가는 들판 넘어 안개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나즈막한 소이산이 올려다 보이는데 이곳에서 보는 것과는 달리 오르는데 칡넝쿨과 잡목들로 인해 너무나 힘들게 오른 소이산이 되었다.
좌측 도로를 따라 진행을 하였으면 좋았는데 밭둑을 따라 우측 소이산 방향으로 걸어 들어가니 그 밭이 끝나는 지점에 작은 개울이 흐르고 그 개울을 건너 좌측으로 가니 87번 금강산로에서 들어 오는 넓은 비포장 임도와 만나 이제부터는 조금 편안하게 우측 소이산 방향으로 진행을 한다.
잠시 후 도로 좌측으로 그물망을 친 사과과수원에는 붉게 익어가는 사ㅣ과드이 주렁주렁 열려 있어 사진 한장 남기고 민가를 지나 시멘트 포장도로를 타고 걸어 진행하니 본격적인 소이산 등로로 들어가는 입구 우측으로 팔각정 하나가 보인다.
그곳 그늘 아래에는 벌써 동네 할머니들이 모여 이야기 꽃을 피우고 있는지 두런 두런 이야기 하는 소리가 들린다.
소이산과 노동당사 가는 이정판이 특이하게 서 있고 지뢰매설지역에 관한 군부대장의 경고판을 지나 목계단을 오르니 등로 우측으로는 견고한 철조망이 좌측으로는 군벙커가 보인다.
소이산 생태숲 녹색길에 대한 간단하 설명판이 서 있는 곳을 지나자마자 직진의 넓은 비포장 임도를 버리고 좌측 군부대 교통호를 타고 소이산 정상부를 향해 본격적인 산행을 시작해 본다.
왔다 갔다 이어지는 교통호를 타고 오르니 화생방 신호규정이라는 군부대 안내판이 세월의 흐름을 대변하고 잠시 후 지붕 덮개가 설치되어 있는 군부대 벙커를 만난다.
그 벙커를 지나 조금 더 걸어 오르니 드디어 소이산 전망대 팔각정이 좌측 위쪽으로 빤히 올려다 보이는데 그곳으로 가는 길에 칡넝쿨이 지독하게 덮고 있어 한동안 왔다리 갔다리 하면서 시간을 보내다 너무나 힘들게 그 칡넝쿨 지대를 뚫고 올라 본다.
온몸은 벌써 굵은 땀방울로 흥건히 젖어 있고 팔 소매끝에서는 땀방울이 등로에 뿌려지고 있다.
그렇게 지독한 칡넝쿨을 뚫고 오르니 몰골이 말이 아니다.
그렇게 초장부터 너무나 힘들게 소이산 전망대 팔각정에 오르니 조감도가 펼쳐져 있는데 아쉽게도 안개가 시야를 가려 보이는 것이 매우 제한적이다.
그래도 삼자매봉 좌측으로 희미하게 백마고지가 보이고 우측으로는 고암산의 김일성고지도 박무속에 희미하게 다가 온다.
이곳으로 오르기까지는 짙은 안개로 보이는 것이 없어 기대도 하지 못했는데 이렇게나마 보고 싶은 풍경을 그릴 수 있어 다행이었던 시간이다.
우측으로는 평강고원과 철원역 그리고 월정역도 보일듯 말듯 다가와 있는데 그래도 선명하지 못한 조망에 아쉽기는 매 마찬가지 시간이기도 하다.
그 소이산 전망대 팔각정을 내려 와 안전목책과 로프가 설치된 잘 정비된 등로를 따르니 나무계단이 나타나고 그 계단을 타고 내려가니 바로 눈 앞으로 봉수대 오름길에 대한 이정판이 서 있다.
오랫동안 사용되지 않아 깨진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우측으로 조금 오르면 평화마루공원이 보이는데 이곳은 예전 미군이 상주했던 미국막사가 있던 소이산 정상부를 공원으로 바꿔 관리하고 있는 듯 보인다.
평화마루공원 초입에는 인공 조형물과 녹슨 철모가 보이고 곧이어 도로 우측으로 낡은 미군막사 건물도 그대로 그 모습을 간직하고 있지만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낡고 허물어 지기 일보직전처럼 보인다.
그 미군막사를 지나 돌계단을 타고 오르니 소이산정상 이정판이 서 있고 곧이어 넓은 나무데크로 이뤄진 소이산 정상에 도착을 해 제일 먼저 백마고지 방향을 살펴보니 희릿한 모습만 눈 앞에 아른 거린다.
소이산(362.3미터)은 북한이 1946년 지은 3층짜리 건물인 노동당사 건너편에 위치한 야트막한 산으로 민통선 밖에 있지만 주요한 군사시설이 많아 출입이 통제되어 왔기 때문에 전쟁으로 교란된 읍내 야산이 반세기 동안 스스로 변화해 온 모습이 간직돼 있는 산이기도 하다.
강원도와 한국관광공사 자료에 따르면 철원군 철원읍에 위치한 소이산은 해발 362미터의 낮은 산으로 고도는 높지 않아도 소이산 정상에 서면 백마고지, 철원역, 제2땅굴, 노동당사 등이 한 눈에 들어오며 지난 60여년 간 민간 통행이 금지되었던 군사지역으로 곳곳에 군사시설을 볼 수 있다.
해발고도가 낮기 때문에 정상까지 힘들지 않게 오를 수 있으면서도 정상에서의 전망이 빼어난 곳이며 전쟁이후에 지뢰지대가 설치되고 아이러니하게도 약 60여 년 간의 민간인 출입통제로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아 생태계와 자연환경이 잘 보존되어 있다.
지뢰밭이 지킨 평화의 숲이라는 타이틀은 이러한 연유에서 비롯된 것이며 지뢰지대가 분포되어 있기 때문에 주의표시가 되어있는 곳으로는 절대로 들어가지 말아야 한다.
2012년에 소이산 생태숲 녹색길이 조성되었고 소이산 생태숲 녹색길은 지뢰꽃길, 생태숲길, 봉수대 오름길로 나뉘어 있으며 정상까지 가려면 봉수대 오름길을 지나야 한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맑은 날에 다시 한번 올라 꼭 저 백마고지와 그 주변들을 자세히 볼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드넓은 평강 철원평원이 황금빛으로 불들어 가기 시작하지만 그 주위로 남아 있는 피의 역사는 보는 사람들의 마음을 숙연하게 만들고 있다.
평강 철원고원은 현무암지대라는 것이 특기할 만한 사항으로 이 지대를 평강고원 또는 닭우리벌이라 부르는데 오늘은 박무로 인해 아쉽기만 하다.
그 평강고원 우측 끝자락으로는 아이스크림고지도 보일듯 말듯 다가와 있는데 이 아이스크림고지는 잠시 후 지하 방커에 있는 청성부대 홍보관에서 조금 더 상세히 읽어 볼 기회가 있었다.
이 산객도 그렇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철원을 철의 삼각지, 백마고지, 아이스크림 고지, 김일성 고지 등의 싸움터로 알고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한국전쟁 때 치열한 격전지였던 이곳 비무장지대 내 월정역에는 부서진 채 고철이 되어버린 열차 한 량이 남아 있는데 철원평야를 사이에 두고 남북으로 갈라진 이곳은 철원군과 김화군 및 평강군을 잇는 이른바 철의 삼각지대였다.
이곳에서 벌어진 전투에는 수도고지 전투, 지형능선 전투, 백마고지 전투가 있는데 그중에서도 철원평야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산봉우리인 백마고지에서 1952년 10월 6일부터 15일까지 열흘 동안 벌어진 싸움은 철원군 동송읍 이평리에 세워진 백마고지전투전적비에 적힌 대로 포탄 가루와 주검이 쌓여서 무릎 높이까지 채울 만큼 치열하였다.
해발 395미터인 이 산봉우리는 열흘 동안 주인이 스물네 차례나 바뀌면서 1만 4000명에 가까운 군인이 죽거나 다쳤고 쏟아진 포탄만 해도 30만 발이 넘었다.
백마고지에서 건너다보면 봉우리 세 개가 다정하게 서 있는 삼자매봉이 있고 철원평야 언저리에는 철원평야를 빼앗기고 김일성이 사흘 동안을 울었다는 김일성고지가 있다.
노동당사는 그날의 상흔을 그대로 간직한 채 서 있고 월정역에는 철마는 달리고 싶다는 표어가 쓰인 부서진 열차가 휑하니 서 있다.
이곳 소이산 정상에서 사진을 찍고 있던 진사님 한분도 오늘은 영 조망이 좋지 않다며 다음을 기약해야 될 것 같다는 말을 전해주고 있다.
소이산 정상에서 아쉬운 조망과 풍경을 살펴보고 뒤돌아 나오며 진행 방향을 살펴보니 지하의 청서부대 홍보관 위로 또 다른 나무데크가 설치되어 있고 그 뒤 저 멀리에는 지금부터 올라야 할 능선이 안개속에 펼쳐져 있고 그 뒤 저 멀리 보여야 할 금학산과 고대산 능선은 아직까지 남아 있는 짙은 안개속에 숨어 보여주질 않고 있다.
아쉬운 마음으로 소이산 정상부를 내려가는데 그래도 아침까지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희미한 조망이라도 볼 수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다.
그렇게 소이산 정상부를 내려 와 이제는 직진의 지하 벙커 같은 곳으로 들어가니 그곳은 청성부대에 대한 소개와 함께 6.25 전쟁 당시 치열했던 전투에 대한 설명서도 있어 잠시 읽어 보고 출발한다.
피의능선 전투
피의능선 전투는 6·25전쟁 당시 양구 북방의 피의 능선에서 벌인 진지 공격전투로서 전투기간은 1951년 8월 17일부터 9월 3일까지이며 피의 능선이란 Star and Stripes지가 지은 이름으로 3개의 고지 즉 983고지와 940고지 및 773고지와 연결된 산맥으로 이루어진 능선을 말한다.
피의 능선전투는 국군과 유엔군이 캔사스-와이오밍 선으로 진출한 후 주 저항선 전방의 전초기지 확보를 위해 제한된 공격작전을 실시하고 있을 때 미 제2사단과 국군 제5사단 제36연대가 양구 북방의 피의 능선을 공격하여 북한군 제12사단과 제24사단을 격퇴하고 목표를 점령한 공격전투이다.
피의 능선에 대한 공격은 1951년 8월 17일 아침 한국군의 공격으로 시작되어 8월 25일까지 10여 일에 달하는 공격으로 능선을 점령했으나 다음날에 탈취당하고 말았으며 이때 한국군 제36연대는 1000명 이상의 사상자를 내었다.
그 뒤 미군은 제24사단의 4개 포병대대, 중형포 2개 대대, 1개의 105mm 대대 , 2개의 중박격포대대, 2개의 연대 전차중대 그리고 중형 전차대대 1개 중대 등을 투입하여 피의 능선에 공격을 감행했다.
8월 27일 940고지에 있던 미 제9연대 제2대대가 983고지를 공격하였고 28일에는 제3대대가 동쪽에서 긴 능선을 공격했으나 실패하였다.
30일에는 제1대대 및 제2대대가 북쪽 940고지에 대한 정면 공격을 감행하였으나 능선 정상의 수백 미터 전방까지 진출했다가 적의 사격으로 저지당하고 말았고 이후 9월 3일까지 제1대대는 포병 및 공중의 지원을 받으며 이 능선을 수차례에 걸쳐 공격하여 결국 견고히 구축된 적의 방어진지를 점령하기에 이르러 3주일 동안 지속된 한·미 양군의 공격은 종지부를 찍었다.
이 전투로 인해 국군과 미군은 1개 연대 규모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북한군은 1개 사단 규모 이상의 피해를 보았다.
또 북한군은 펀치볼 북쪽 능선으로 물러서게 되었으며 한미 양군은 피의 능선을 장악하여 백석산과 대우산 간의 측방도로를 확보하였다.
당시의 격전지에는 1980년 11월 11일 전투를 기념하기 위한 전적비가 세워졌다.
저격능선 전투
국군 제2사단이 1952년 10월부터 42일간 김화 저격능선을 놓고 중공군과 수행한 고지전으로 저격능선전투는 전선이 교착되었던 1952년에 중부전선의 금화(현 김화)지역에 배치되어 있던 국군 제2사단이 중공군 제15군과 맞서 주저항선 전방의 전초진지를 빼앗기 위한 공방전을 벌인 전투이다.
작전기간은 1952년 10월 14일부터 11월 24일까지 42일간이었며 교전지역은 금화 북방 7 Km 지점에 위치한 저격능선이었다.
이 저격능선은 철의 삼각지대 중심부에 자리잡은 오성산에서 우단의 금화지역으로 향하여 뻗어 내린 여러 능선 가운데 남대천 부근에 솟아오른 돌출능선으로 해발고도는 580미터 정도이고 능선의 크기는 1 Km2 정도의 장방형 능선이다.
미 제8군은 공산군의 공세에 대응한 제한된 공격작전을 계획하게 되었고 이 작전의 일환으로 국군 제2사단이 오성산 남쪽의 중공군측 전초인 저격능선을 공격하게 되었다.
미 제9군단의 작전통제 하에 실시된 이 공격에서 국군 제2사단은 첫날 공격에 성공하여 저격능선을 탈취하자 오성산 일대에 배치되어 있던 중공군 제15군이 바로 그 날 밤부터 역습을 감행하여 끈질기게 대항함으로써 장장 6주 동안에 걸친 공방전을 치르게 된 것이다.
최초로 공격에 나선 국군 제2사단 제32연대 제3대대는 10월 14일 05:00에 공격을 개시하여 5만 발에 가까운 포병의 화력지원을 받아 가며 목표를 탈취하였으나 이 대대는 중공군 제15군 예하 제45사단 제133연대의 역습을 감당하지 못하여 고지를 점령한 지 다섯 시간 만에 저격능선을 빼앗기고 물러서게 되었다.
다음날 두 번째 공격의 임무를 띤 국군 제17연대 제2대대는 주간공격을 감행하여 목표를 탈취한 후 이 병력을 증강하고 밀집방어를 시도하였다가 이 대대 역시 중공군의 야간 역습에 밀려 다시 철수하게 되었다.
이렇게 전개된 접전이 하루도 빠짐없이 연속되어 10월 25일까지 거의 같은 양상의 공방전이 반복되고 있었고 이때 국군 제2사단은 미 제9군단의 작전지시에 따라 10월 25일부로 삼각고지의 미군 작전지역을 추가로 인수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공군의 반격이 끈질기게 이어져 11월 11일부터 17일까지 1주일 동안에 세 차례나 A고지를 뺏고 빼앗기는 공방전이 또다시 되풀이되다가 18일을 고비로 하여 이 고지를 국군이 완전히 확보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중공군의 공격 빈도가 점차 줄어들더니 11월 24일을 기하여 이들이 공격을 중지하고 방어태세를 취함으로써 저격능선전투를 종결짓게 되었다.
중공군은 빼앗긴 고지를 찾으려고 계속 공격해왔으나 한국군은 이 능선의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끝까지 지켜냈으며 2개 연대의 병력을 잃은 중공군은 오성산 북쪽으로 철수하게 되었다.
이 전투에서 한국군도 1개 연대 병력의 사상자를 내어 이 전투는 백마고지전투와 함께 6·25전쟁사상 2대격전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 전투의 승리로 인하여 금화에서 금성간의 도로망 확보와 군사분계선 설정시 유리한 지형을 차지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전투가 끝난 후 중공군측에서는 저격능선전투와 삼각고지 전투를 합하여 감령전역이라는 명칭으로 격전기록을 남겼고 국군측에서는 저격능선전투와 백마고지 전투를 치른 장소를 가리켜 6·25전쟁의 2대 격전지로 평가하게 되었다.
아이스크림고지 전투(삽슬봉고지 전투)
삽슬봉의 별명으로 드넓은 재송편의 한 가운데 솟아있는 해발 219미터의 얕은 산이지만 입지적 이점이 많아 6.25전쟁 때는 피아간의 처절한 쟁탈전과 포격이 극심했고 산이 마치 아이스크림 녹듯 흘러내렸다하여 아이스크림 고지라 불린다.
예전에 이 산밑에 삽송리 또는 삼송리라는 마을이 있어서 이 산을 삽송봉(삽슬봉은 삽송봉의 구전변형체)으로 불렀고 또 그 모양이 흡사 투구 같다해서 투구봉으로도 불린다.
또한 삽슬봉은 고려시대에 산정상에 봉수대를 만들어 북쪽의 평강의 진촌산 봉수대와 남쪽의 할미산(구수봉) 봉수대를 연결했다.
철의 삼각지 전투
6·25전쟁중 철의 삼각지대를 중심으로 벌어진 전투로서 철의 삼각지대란 철원과 김화를 저변으로 평강을 정점으로 한 삼각지대의 군사적인 호칭이며 신고산에서 평강으로 이어진 추가령지구대를 통과하는 경원선과 5번국도가 이 지대에서 철원-연천-의정부-서울, 김화-포천-의정부-서울과 그 밖의 여러 곳으로 연결되는 교통의 중심지이다.
6·25전쟁 당시에는 북한군과 중공군이 나진, 성진, 원산항에 양륙된 군수물자와 각지에서 동원한 병력을 이 지대에 집결시킨 뒤 전선에 투입한 공산군 최대의 중간 책원지였고 이러한 이유로 철의 삼각(Iron Triangle)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전략적 중요성 때문에 수없이 많은 크고 작은 작전이 이 지대 일대에서 펼쳐졌다.
그 중에서도 쌍방의 전체적인 작전과 전세에 많은 영향을 끼친 중요 전투로는 파일드라이버(Pile Driver)작전과 백마고지전투 및 저격능선전투 등이 있다.
파일드라이버작전은 1951년 5월 27일부터 6월 20일까지 전개되었는데 이 작전은 중공군의 2차에 걸친 춘계 공세(1951.4·5.)를 격퇴한 국군과 유엔군은 철원-김화-양구-간성을 연결하는 선으로 진격하였다. 이 작전에서 국군 제3사단과 제9사단은 6월 11일과 12일에 철원을, 미 제25사단은 김화를 점령하고 13일에는 미 제3사단이 평강에 진입하여 적정을 수집한 후 철수하였다.
이 전투 이후 쌍방 어느 편도 철의 삼각지대 전체를 장악할 수 없게 되었다.
백마고지전투는 1952년 10월 6일부터 15일까지 벌어졌으며 이 전투는 6·25전쟁 기간중 가장 치열한 전초 거점 쟁탈작전이 전개되던 1952년 10월에 철원 북방의 백마고지를 방어하던 국군 제9사단이 중공군 제38군과 맞서 9일 동안의 혈전을 치른 끝에 철의 삼각지대 일각을 끝까지 확보한 전투였다.
전투기간 중 국군 제9사단은 중공군 3개 사단의 파상적인 공격을 격퇴하느라 수천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상황에서 1만여 명의 중공군을 격멸하고 백마고지를 지켜냄으로써 국군의 용명을 전세계에 떨쳤다.
저격능선전투는 1952년 10월 14일부터 11월 24일까지 벌어졌으며 이 전투는 1952년 가을철로 접어들면서부터 공산군이 대대적인 전초 거점을 전개한 것에 대응하여 김화 부근을 방어하던 국군 제3사단이 저격 능선을 목표로 감행한 공격작전이었다.
국군 제3사단은 오성산 남단의 저격 능선 일대에 배치된 중공군 제15군의 방어진지를 공격하여 초전에 목표를 점령하고 이후 42일 동안이나 인해전술에 의한 끈질긴 역습을 반복하는 중공군을 물리치면서 저격 능선 진지를 사수하였다.
이 전투의 특징은 쌍방이 모두 손실을 돌보지 않고 오직 목표를 탈취하기 위해 혈전에서 혈전으로 이어진 소모전을 감행한 데 있으며 이로 말미암아 국군 제2사단은 1개 연대 규모의 병력이 손실되었고, 중공군은 2개 연대 규모의 병력이 살상되었다.
백마고지 전투
국군 제9사단이 1952년 10월 철원 백마고지에서 중공군의 공격을 수차례 격퇴한 전투로서 백마고지전투는 휴전회담이 교착상태에 빠져들고 1952년 10월 초 판문점에서 포로회담이 해결되지 않자 중공군의 공세로 시작된 1952년도의 대표적인 고지쟁탈전이었다.
백마고지(395고지)전투는 회담이 난항을 겪고 있던 1952년 10월 6일부터 15일까지 철원 북방 백마고지를 확보하고 있던 한국군 제9사단이 중공군 제38군의 공격을 받고 거의 열흘 동안 혈전을 수행하였고 결국 적을 물리치고 방어에 성공한 전투이다.
백마고지에 대한 중공군의 공격은 1952년 10월 6일 시작됐는데 이날 아침부터 사단의 전 지역에 집중적인 공격준비 사격을 퍼부은 중공군은 북쪽 5 Km 전방에 있는 봉래호의 수문을 폭파해 아군의 후방을 관통하는 역곡천을 범람시켰고 이에 따라 아군의 증원과 군수지원이 차단된 것으로 판단한 중공군은 집요한 공격을 감행했다.
중공군은 고지 주봉에서 북으로 길게 뻗어 있는 능선으로 1개 대대를 투입하고 1개 대대를 주봉으로 각각 투입하였으나 국군 제9사단은 이날 밤 적과 3차에 걸쳐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한 끝에 적에게 많은 피해를 주면서 격퇴하였다.
그러나 며칠 동안 5차에 걸친 밀고 밀리는 치열한 공방전에서 제28, 제30 양 연대는 거의 재편성이 불가피할 정도로 많은 병력 손실을 보았다.
10월 11일 밤 고지는 다시 중공군의 수중으로 넘어갔으나 12일 아침 반격 제30연대가 제29연대를 초월 공격함으로써 이를 재탈환하였으며 다시 적의 반격을 받아 피탈되었다.
이에 제28연대가 다시 밀고 밀리는 육탄전을 10월 15일까지 계속한 끝에 마침내 탈환에 성공하였고 이어 제29연대가 기세를 몰아 395고지 북쪽 낙타능선상의 전초진지를 탈환하게 됨으로써 적을 완전히 격퇴하였다.
결과적으로 국군 제9사단은 10월 6일부터 중공 제38군의 공격을 받아 연 10일 간 12차례의 쟁탈전을 반복하여 7회나 주인이 바뀌는 혈전을 수행한 끝에 백마고지를 확보하였다.
이 전투에서 중공군 제38군은 총 9개 연대 중 7개 연대를 투입하였는데 그중 1만여 명이 전사와 부상 또는 포로가 된 것으로 집계되었으며 국군 제9사단도 총 3500여 명의 사상자를 낸 것으로 보고되었다.
이 전투로 국군 제9사단은 상승백마라는 칭호를 얻게 된 계기가 되었는데 백마고지전투는 1952년 10월 철원평야의 요충지인 395고지에서 벌인 전투로서 지역전투로서는 세계전사 상 유래가 없을 정도로 치열하였다.
이 전투에서 백마부대는 중공군 1만 3000여 명을 격멸하는 전과를 거둠으로써 한국군의 전투능력과 지휘관들의 부대지휘능력을 과시하게 되었고 이러한 전통을 바탕으로 국군 제9사단은 1966년 5월 맹호부대에 이어 파월부대로 선정되었으며 그해 8월 월남으로 이동해 닌호아, 투이호아, 캄란지역에서 부여된 작전임무를 수행하였다.
바쁜 일정이지만 청성부대 홍보관에서 6.25 전쟁 중 치열했던 전투에 대해 많은 정보를 읽어 본 후 나와 콘크리트 계단을 타고 내려가니 다시 미군막사를 지나 평화마루공원 임그에 도착을 하는데 전선 작업을 위해 방문한 작업자들이 있어 사진 한장 남기고 출발한다.
넓은 비포장 임도를 타고 한동안 계속 내려가니 임도가 시멘트 포장도로로 변하고 곧이어 평화누리길과 봉수대 오름길이라는 안내판이 서 있는 1차선 포장도로에 도착을 해 주위에 있는 2개의 이정표를 살펴 본다.
하지만 그 1차선 포장도로에서 진행 방향의 산행 들머리를 찾아 보지만 잡목과 잡풀들이 우거져 도저히 산행 들머리를 찾을 수 없어 난감해 하다가 능선 좌측 방향에 있는 논둑을 통해 수도국지 방향으로 진행하려고 들어가니 논둑 우측으로 작은 웅덩이 하나가 보이고 그 좌측으로 희미한 등로가 나타나 그곳으로 우측 능선으로 오르며 정상 마루금으로 접근을 시도해 본다.
가파른 오르막 등로를 따르니 커다란 운지버섯이 나타나고 잠시 후 정상적인 마루금과 만나 좌측 봉우리 방향으로 올라 가 본다.
잠시 오르니 녹슨 철봉 2개가 정상을 차지하고 있는 295 무명봉에 도착을 해 사진 한장 남기고 거미줄이 쳐져 있는 잡목 구간을 헤치고 다시 내려가 본다.
잠시 후 벙커 위로 올라 와 있는 굴뚝을 지나 내려가니 잡목 사이로 잠시 후 올라야 할 동주산 능선이 올려다 보이고 곧이어 등로 좌측으로 수도국지를 만나 잠시 둘러보고 진행하기로 한다.
수도국지는 일제강점기에 철원 주민들이 마실 물을 공급하기 위해 1936년에 설치한 저수탱크 및 관리소 건물인데 당시는 500가구에 2500명에게 이곳 식수를 공급하였고 1일 급수 가능량은 1500입방미터로서 강원 도내 유수의 상수도 시설로 알려져 있었다.
6·25 전란 당시 국군이 북진하자 북한 공산당은 패배해 도주하면서 노동당사와 내무서 등에 감금했던 인사들을 분류하여 반공정신이 투철한 애국인사들을 이곳으로 이송 조치하고 약 300여명에 달하는 반공투사들을 총살하거나 지하 6미터의 저수탱크에 생매장하고 도주한 학살 현장으로 알려져 있어 아직까지도 슬픈 역사가 간직된 곳이기도 하다.
과거에 억매여 살아서도 안되겠지만 그 슬프고 아푼 과거를 잊어서도 안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상기해 보는 곳이다.
그 수도국지를 살펴보고 그 아래로 보이는 2번 2차선 포장도로로 내려가니 수도국지 안내판과 설명판이 서 있고 그 옆으로 한여울길 제3구간 안내목과 거리표시도 눈에 보인다.
그 2번 2차선 포장도로를 타고 우측으로 오르니 대전차 방어벽이 보이고 그곳을 지나 새우젓고개에 대한 설명판을 읽어 보고 출발한다.
새우젓고개는 가슴 아픈 역사가 숨겨져 있는 수도국지가 바로 옆에 있는 고개로서 그 옛날 새우젓 장사들이 배를 타고 새우젓을 공급하던 시절에 한강으로부터 임진강과 한탄강 유역을 따라 배로 운반된 새우젓을 용담에서 철원장에 팔기 위해 새우젓을 지고 가다가 이 고개에서 쉬어 가던 고개라서 붙여진 이름이 바로 새우젓고개라고 전해지고 있다.
일제 강점기에는 철원의 민초들이 남쪽으로 통하는 생활 통로였고 6.25 전쟁 때에는 피난민들이 몰살 당하기도 했던 슬픈 역사가 숨어 있는 고개이기도 하다.
새우젓고개에 대한 설명판으 읽어 본 후 조금 더 걸어 가니 도로 좌측으로 비포장 임도가 보이고 그 임도를 따라 맥 잇기 산행을 이어가 본다.
완만하게 이어지는 넓은 비포장 임도를 타고 올라가니 임도에는 점점 더 많은 잡풀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잠시 후에는 이곳이 임도인지 아니면 일반 잡풀지대인지 분간하기도 힘들 정도의 지독한 잡풀들이 앞을 가로막고 있다.
많은 땀방울을 흘리며 어렵게 오르니 등로 좌측 앞으로 팔각정이 보이고 그곳으로 올라 잠시 쉬면서 시원한 물 한모금 마시고 출발을 해 본다.
그 정자 앞으로는 사람들 키보다 더 높게 자라난 잡풀들로 인해 그 넓은 공터인지 헬기장이 완전히 잡풀속에 갇혀 버렸다.
팔각정자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간식을 먹은 후 일어나 진행하지만 잡목과 잡풀들로 도저히 정상적인 산행이 불가능 해 다시 팔각정으로 돌아 와 그 팔각정 뒤를 살펴보니 그곳도 역시 잡목 등로이지만 짧게 오르면 진행이 가능할 것 같아 그 팔각정 뒤로 오른다.
물뱀 한마리를 만나 기겁도 하고 잡목과 가시에 찔려 고통을 느끼며 오르니 금새 잡풀들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비포장 임도에 도착을 하는데 임도 좌측 아래에는 군부대 시설물들이 보인다.
어렵게 잡풀들이 무성하게 자라난 비포장 임도를 타고 우측으로 걸어 오르니 임도 좌측으로 동주산성 전망대가 보이고 그곳으로 올라 가 잠시 주위 풍경을 살펴 본다.
동주산성터는 넓은 철원평야를 배경으로 천하를 꿈꾸었던 궁예가 강원도의 동남부 일대를 점령하고 인제, 양구, 화천을 거쳐 896년에 처음 철원지역에 도착했을 때 진을 쳤던 곳이 바로 이곳 동주산성으로서 그후 궁예는 905년 철원으로 천도를 단행하고 911년에 태봉국을 세우게 되었다.
현재 산성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지만 궁예가 처음으로 자리를 잡은 곳이라는 사실만으로도 대단한 역사적 현장이 아닐 수 없는 동주산성은 지금은 비록 휴전선으로 나뉘어 있는 작은 고을이지만 6.25전쟁 이전만 해도 교통의 요지로서 겸재 정선이 금강산 가던 길에 철원 삼부연폭포를 화폭에 담기도 했으니 금강산은 이곳 철원을 거쳐서 들어갔던 길목이기도 하였다.
동주산성 및 철원 땅은 궁예가 거대한 왕국을 세우고자 했던 희망의 땅이었던 곳이기도 하다.
그곳 동주산성 전망대로 올라 지나 온 방향을 살펴보니 잡목 사이 저 멀리 방금 전 올랐다 많은 생각을 하고 내려오며 고생을 했던 소이산 정상부와 그 우측으로 황금빛으로 물들어 가는 철원 평야가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하지만 아직도 그 뒤로 보여야 할 풍경들은 박무속에 가려 상상으로만 바라보는 아쉬운 시간이다.
우측 평강고원의 황금빛도 다시 한번 살펴 본 후 그 전망대를 지나 잡풀들이 사람 키만큼 자라난 비포장 임도를 타고 걸어 오르니 잡풀속에 동주산성터 안내판이 걸려 있고 잠시 후 벙커 위 동주산(340미터)으로 오르니 잡목과 잡풀들이 정상을 점령해 있지만 정상 표시가 없어 아쉬움이 남는다.
다시 잡풀과 잡목을 헤치며 등로를 찾아 내려가니 짧은 구간 가파른 내리막 등로로 이어지고 있다.
내리막 등로를 내려가니 다시 잡풀들이 자라고 있는 등로에 도착을 하는데 그곳에는 나무 말뚝들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박혀 있지만 아무 설명이 없어 무슨 용도인지 궁금하기만 하다.
그곳을 지나니 방금 전 동주산 정상으로 오르지 않고 진행할 수 있는 비포장 임도가 이어지고 그 한쪽 구석에는 이정표 하나가 서 있다.
진행해 온 방향으로는 동주산성이 우측으로는 관전리마을이 그리고 진행 방향으로는 철원향교 방향이 표시되어 있다.
관전리는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에 있는 리인데 고대산 밑의 구릉지에 자리하는 산촌마을로서 자연마을로 관골이 있으며 관골은 옛부터 관청들이 있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제부터는 잡풀이 우거진 넓은 비포장 임도를 타고 조금은 빠르게 걸어 본다.
잠시 후 5 원통통과(타이어통과)라는 군 훈련장비가 잡풀속에 묻혀있고 사진 한장 남기고 계속 걸어가니 등로 우측으로 넓은 공터와 4 허들넘기라는 안내판이 보인다.
그 앞으로는 풍향 확인 깃대가 펄럭이고 있다.
풍향 확인 깃대를 지나 완만하게 걸어 내려가니 군부대에서 정리를 하였는지 등로는 다시 넓은 임도로 바뀌고 있다.
넓은 공터의 잡풀들을 살펴 본 후 내려가 팔굽혀펴기라는 안내판을 지나고 소나무 임도를 통과하니 2 사자걸음이라는 안내판도 보인다.
계속 이어지는 넓은 임도를 따라 빠르게 걸어 진행하니 1 오리걸음 안내판을 지나 갈림삼거리에서 우측 군부대 후문의 철대문 넘어 펼쳐진 산줄기들을 살펴 보고 좌측의 비포장 임도를 따라 계속 걸어 진행한다.
좌측 비포장 임도를 타고 걸어가니 여전히 비포장 임도에는 잡풀들이 무성하게 자라고 잠시 후 직진으로 가는 비포장 임도를 버리고 우측 능선으로 들어가야 하는 능선 상의 268 무명봉을 지나 잡목이 우거진 우측 등로를 따른다.
단풍나무들이 보이는 사면 등로를 따르니 잠시 후 시멘트 말뚝에 철조망이 쳐져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 오는데 올라 가 살펴보니 군부대 철조망으로서 사진 촬영을 금한다는 경고판이 붙어 있다.
이제부터 잡목들이 우거진 군부대 철조망을 타고 어렵게 걸어 내려간다.
잠시 걸어 내려가니 군철조망 안쪽 잘 정리된 등로로 군인 2명이 지나면서 인사를 나누고 잠시 지맥 설명을 하지만 잘 알지 못하는 것 같아 인사하고 다시 출발하니 이제는 군 철조망 바깥인 이 산객 진행하는 역방향으로 정글칼을 들고 군인 2명이 올라오며 잡목을 정리하고 있다.
인사하고 조금은 편안한 정리된 등로를 타고 내려가니 이제 잡목이 사라지며 이제부터 진행해야 할 2차선 포장도로 건너 밭경작지와 그 위 328 무명봉이 빤히 올려다 보인다.
밭 가장자리를 타고 잡풀들을 조심하며 내려가니 부대앞 서행이라는 안내판이 서 있는 2차선 포장도로에 도착을 하는데 뜨거운 햇살이 비춰 재빨리 도로를 건너 밭 경작지 가장자리를 타고 맥 잇기 산행을 이어간다.
우측으로 군부대가 보이고 도로를 건너면 들머리 우측으로 이동통신탑이 서 있다.
잡풀과 공존하고 있는 콩밭 가장자리를 타고 어렵게 오르니 이제 그 콩밭과도 헤어져 우측의 잡목이 우거진 능선으로 이어지지만 보이는 등로가 없으니 트랙만 확인하고 걸어 진행을 해야 한다.
잠시 더 올라 바람이 약간 불어 오는 능선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며 간식을 먹고 시원한 물 한모금으로 목마름을 달랜 후 오르니 녹슨 원형 철조망이 나타나는데 잘 보이지 않아 주의가 필요하다.
그 원형 철조망을 지나 오르니 벙커가 나타나 그 벙커를 지나니 등로는 교통호를 따라 완만하게 이어지고 잠시 후 328 무명봉에 도착을 해 우측 저 멀리 소이산과 그 소이산 좌측으로 이어지는 철원평야를 살펴본다.
그 무명봉을 지나 다시 나타나는 잡목 등로를 헤치며 평이하게 진행하니 또 다시 녹슨 원형 철조망이 나타나고 조심하며 그 원형 철조망을 통과해 걸어 간다.
또 다시 나타나는 벙커와 교통호가 보이는 361 무명봉에 도착을 하고 잠시 후 다시 363 무명봉을 통과한다.
잠시 활엽수 등로를 따르다 교통호를 만나고 다시 벙커가 있는 481봉에 도착을 하니 지나온 보개지맥 마루금이 시원하게 펼쳐진 풍경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전망대 구실을 하고 있는 무명봉이다.
소이산 지나 새우젓고개가 보이고 우측 능선을 타고 오면 군부대를 우측에 두고 이곳으로 올라 온 마루금이 시원하게 펼쳐져 있다.
북쪽의 보개지맥 마루금을 살펴본 후 우측으로 북동쪽을 살펴보니 월하리 지나 황금빛으로 변해가는 철원평야가 펼쳐져 있고 그 뒤로 삼자매봉과 백마고지 그리고 김일성고지가 박무속에 희미하게 그 존재감을 알리고 있다.
가까운 소이산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던 이북쪽 풍경들이 멀어지니 안개가 사라지며 희미한 실루엣으로 다가 와 이 산객의 마음을 흔들고 있는 시간이다.
그렇게 한동안 그곳 벙커 위에서 주위 풍경과 조망을 즐긴 후 내려오니 벙커 입구가 큰 입을 벌리고 서 있고 짧은 교통호를 지나 넓은 비포장 임도에 도착을 한다.
지도를 보니 이곳이 우측으로 수정산을 갈 수 있는 수정산 갈림삼거리로서 그늘속에 들어 배낭 내리고 잠시 준비한 간식과 과일 그리고 시원한 물 한모금으로 허기와 목 마름을 달래 본다.
그리 멀지 않고 정상에 가면 주위 풍경이 좋다고 하니 배낭 숨기고 잠시 수정산 정상을 다녀 오기로 한다.
잘 관리된 넓은 비포장 임도를 따라 한고비 내려갔다 오르니 넓은 헬기장이 나타나고 그 헬기장 넘어 화생방 종과 풍향계 깃발 그리고 벙커 2개가 보이고 마지막 벙커 앞에는 일반 삼각점과 군용 삼각점 2개가 박혀 있다.
수정산은 영진지도에 산 이름없이 498.9봉으로만 표기가 되어 있는 산으로 철원군 철원읍 율이리와 동송읍 화지리 사이에 솟아 있는 봉우리이다.
제일 먼저 북쪽으로 소이산을 살펴보고 그 좌측을 보니 황금빛으로 변해가는 황금들녘 뒤로 철원읍이 보이기 시작한다.
지명유래에서 철원읍을 확인해 보면 강원도 철원군의 서부에 위치한 읍으로 15개의 법정리를 관할하고 있으나 읍사무소가 있는 화지리를 비롯하여 관전리, 대마리, 월하리의 4개 리를 제외한 대부분 지역이 주민이 거주할 수 없는 민통선 안에 있다.
원래 철원의 서쪽에 위치하여 서면 혹은 서변면으로 불렸던 철원은 여지도서 철원도호부 방리조에 서면은 관동리, 빙고리, 당동리, 중리, 언하리, 월음리, 와요산리, 선창리, 율지리의 9개 리를 관할하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해동지도에는 부의 북서쪽에 서변면, 궁왕고도, 선창, 소이산 등이 묘사되어 있고 조선지지자료에는 서변면에 관동리, 궁전리, 당동리, 월음리 등 29개 리가 수록되어 있다.
지금 주민들이 거주하는 동리 지명은 대부분이 1914년에 통합되어 형성되었으며 화지리는 화전리와 천황지리가, 관전리는 관동리와 궁전리가, 대마리는 대오리와 갈마리가, 월하리는 월음리와 하리가 각각 통합된 지명이다.
관동은 관청들이 있던 곳이라고 하여 붙은 지명이고 화지리는 구철원이라 하는데 이는 군청이 옮겨간 갈말읍 지포리를 신철원이라 부르면서 구별하기 위해 불리게 되었다.
1931년에 서변면이 철원읍으로 승격되었고 1963년에 무장면의 대마리, 산명리, 중세리가 1972년에 북면 유정리와 홍원리, 내문면 독검리가 각각 편입되어 오늘에 이른다.
오늘 이 산객이 걸어 온 보개지맥 우측인 북동쪽으로는 역시 황금 들녘으로 변해가는 평강고원이 펼쳐져 있지만 그 뒤로 보여야 할 능선은 박무속에 숨어 명확하지 않다.
그래도 이렇게 기대하지 못했던 조망과 풍경을 사진에 담을 수 있음에 감사한 마음으로 살펴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이제 많은 시간 그 498.9봉의 수정산에서 멋진 조망과 풍경을 가슴속에 담은 후 올랐던 등로를 타고 뒤돌아 내려가니 저 멀리 우측으로 고대산 줄기가 보이고 좌측으로 헬기장으로 이뤄진 473.2봉의 숙향봉과 그 뒤로 금학산이 드높게 솟아 있는 풍경이 눈에 들어 온다.
그 금학산과 고대산 사이로는 잘록한 대소라치가 있지만 능선에 가려 고갯마루는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한동안 수정산을 왕복하며 멋진 풍경과 조망을 즐기고 많은 사진을 담은 후 배낭을 숨겨 놓은 수정산 갈림 삼거리로 뒤돌아 내려 온다.
배낭을 찾아 둘러메고 계속 이어지는 넓은 비포장 임도를 따라 걸어 진행을 하니 임도가 우측 아래로 내려가는 곳 좌측 잡목지대 속으로 보개지맥 등로가 이어지고 있어 주의가 필요한 지점이다.
잡목을 헤치고 들어가니 생각보다 등로는 잘 나 있지만 가파른 내리막 등로이기에 주의가 필요하다.
많은 낙엽들이 쌓여 썩어가는 가파른 내리막 등로를 따르니 등로는 다시 키 큰 잡풀들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비포장 임도를 만나고 그 임도를 타고 걸어 내려가니 갈림사거리 안부이다.
그곳에서 곧바로 능선으로 붙어야 하는데 마음이 간사해 잠시 더 좌측으로 오르는 비포장 임도를 따르다 가파른 짧은 절개지를 타고 우측 능선으로 올라 정상적인 마루금으로 진행을 해 본다.
잠시 올라 뒤돌아 보니 방금 전 올랐다 내려 온 수정산 갈림봉이 올려다 보이고 곧이어 벙커를 만난다.
곧이어 431 무명봉을 지나고 잠시 소나무 등로를 타고 여유롭게 걸어 가는데 카메라에 습기가 끼었는지 사진을 찍을 때마다 뿌연 피사체가 나타나 살펴보니 렌즈가 하루살이로 인해 더러워져 있었다.
그 능선을 내려가니 다시 비포장 임도와 만나 그 임도를 타고 걸어가니 저 멀리 진행해야 할 방향으로 가운데 우뚝한 473.2봉의 숙향봉을 가운데 두고 우측으로는 고대산이 좌측으로는 금학산이 드높게 올려다 보이고 있다.
다시 잡풀들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비포장 임도를 따르니 잠시 후 잡풀들이 사라지며 제모습의 비포장 임도길이 나타난다.
그렇게 한동안 그 기능을 상실해 가는 비포장 임도를 타고 조금은 빠르게 걸어가니 눈 앞으로 높게 솟아 있는 금학산이 올려다 보이는데 저 금학산 정상를 다녀와야 되는지 고민되기 시작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잠시 후 비포장 임도가 좌측으로 휘어 내려가는 곳 우측 능선 방향으로 보개지맥 마루금이 이어지고 가파른 사면 등로를 타고 오르니 다시 온 몸은 땀으로 흠뻑 젖기 시작한다.
등로도 사라진 사면 등로를 따라 방향만 보고 오르니 바람 한점 불어주지 않는 등로에는 기온이 오르면서 한여름 무더위를 연상시키고 있다.
잠시 후 어렵게 주능선에 오르니 마대자루들이 깔려있는 348 무명봉에 도착을 하고 사진 한장 남기고 이제 평이해진 등로를 따라 빠르게 진행을 하니 벌목된 나뭇가지들이 덮고 있는 335 벙커봉이 보인다.
그 벙커봉을 지나 내려가니 저 멀리 올라야 할 511봉과 바로 발 아래 묘지들이 내려다 보이는데 이곳에서부터 등로 좌측에서 들려오는 사격 총소리에 공포와 두려움이 엄습하는 시간이 되었다.
아마도 금학산 자락에 위치한 신병 교육대에서 새롭게 들어 온 신병들이 사격 훈련을 하고 있는 시간이라 생각되는 사격 총소리이다.
가끔 들려오는 굳어 있는 조교의 마이크 소리도 예전 이 산객이 군생활을 하던 시절의 목소리와 너무나 흡사해 깜짝 놀라기도 했던 시간이다.
잠시 내려가니 선답자들의 산행후기에 단골처럼 명기된 밀양박공과 어부인 묘지들이 보이는데 벌써 벌초를 하였는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다.
그 묘지들을 지나 내려가니 넓은 공터가 나타나고 등로 좌측에서 더욱 크게 들려오는 귓청을 찟을듯한 강렬한 총소리에 심장이 쫄깃해지는 느낌으로 조금 더 걸어가니 잡목을 지나 1차선 시멘트 포장도로 위에 도착을 한다.
등로 좌측으로는 철원 화지리로서 철원읍이 지척이고 우측으로는 율이리를 이어주는 고갯마루인데 차량 통행도 어려운 좁은 시멘트 포장도로가 이채롭게 다가온다.
그 시멘트 포장도로 정상부로 올라가 봐도 아무 표식도 없는 무명고개이기에 다시 내려와 진입로를 찾아 보니 좌측 화지리 방향으로 조금 더 걸어 내려간 곳 우측으로 비포장 임도가 보이고 그곳을 통해 올라가니 평창이공과 부인인 전주이씨 묘지가 보이는 묘지지대가 다시 나타난다.
그 묘지 아래 비포장 임도에는 트럭 한대가 주차되어 있는데 사람은 보이지 않아 혹시 임산물 채취를 하러 올라 온 주민은 아닐까 생각하며 비포장임도를 따라 올라가니 중간지점에서 산사태가 났었는지 비포장 임도는 더 이상 이용할 수 없어 좌측 사면 등로를 개척하며 어렵게 올라 본다.
등로 좌측에서 들려 오는 사격 총소리는 더욱 강렬한 굉음으로 다가와 더욱 심한 공포심에 시달리는데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 뿐이다.
어렵게 사면 등로를 타고 오르니 벙커가 나타나고 벙커를 지나 한참을 많은 땀방울 흘리며 중간 크기로 자란 활엽수 지대를 오르니 드디어 주능선인 468 무명봉에 도착을 해 긴 한숨을 내쉬며 시원한 물 한모금으로 목마름을 달래 본다.
이 산객은 오래 전 논산훈련소에서 훈련을 받고 파주 연천으로 이동해 군 생활을 했는데 그때 그 시절이 생각나 잠시 회상해 보는 시간이기도 하다.
좁은 공터같은 468 무명봉을 지나 평이한 활엽수 등로를 따르니 다시 완만하게 올라 소나무 두그루가 정상을 지키고 있는 487 무명봉에 도착을 하는데 주위 나무들이 가려 조망은 전혀 없다.
사진 한장 남기고 내려가니 군벙커가 다시 보이고 잠시 후 녹슨 철봉 하나가 군벙커 위에 세워진 511봉에 도착을 해 잠시 물 한모금 더 마시고 출발한다.
물 2리터에 음료수 1.2 리터를 준비하였는데도 생각보다 날씨가 무더워 많은 물을 마시다 보니 오늘 다시 식수 부족을 걱정하는 시간이 되었다.
녹슨 철봉이 세워진 군 벙커를 지나 다시 활엽수 등로를 타고 잠시 여유를 찾아 걸어가니 이제 막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싸리버섯이 반겨주지만 아직 어리기에 다른 주인에게 양보하고 사진 한장 남긴 후 빠르게 걸어 본다.
다시 완만하게 이어지는 오르막 등로를 따라 많은 땀방울을 등로에 뿌리다 보니 넓은 헬기장으로 되어 있는 숙향봉이라 불리는 473.2봉에 도착을 하는데 생각보다 조망이 없고 뜨거운 햇볕이 내려 쬐고 있어 삼각점을 확인하고 사진 몇장 남겨 본다.
출발하려다 등로 우측을 살펴보니 잠시 잡목이 자라지 못한 곳 저 멀리 고대산 줄기가 아름다워 잠시 옛 추억을 더듬고 내려가 본다.
고대산(832.1미터)은 경원선 철도가 휴전선에 막혀 더 이상 달리지 못하고 멈추는 곳인 경기도 최북단인 연천군 신서면 신탄리와 강원도 철원군 사이에 있는 산으로 정상에서는 북녘의 철원평야와 6ㆍ25 때 격전지인 백마고지, 금학산(947미터)과 지장봉(877미터), 북대산 및 향로봉은 물론 한탄강 기슭의 종자산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분단의 한과 망향의 한이 굽이쳐 북녘이 그리울 때 멀리서나마 북녘땅을 바라볼 수 있는 3대 명산으로 고대산과 복계산(1057미터) 및 지장봉(877미터)을 꼽는데 해마다 6월이면 분단상황을 체험해보려는 많은 등산인들이 고대산을 찾는다.
수려한 전망과 적당한 코스 등 최적의 산행코스를 갖췄음에도 전략적 요충지라는 이유로 웬만한 지도에는 감춰진 산이다.
휴전선과 가장 가까운 곳에 있기 때문에 여태껏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다는 것이 이 산이 간직한 매력이기도 하며 또 하나의 매력은 역에서 산행 들머리 까지 걸어서 불과 10여분 정도의 가까운 거리에 있다는 점이다.
신탄리역에서 내리면 역 뒷편에 솟아 있는 산이 고대산으로서 정상은 역에서 보이는 봉우리의 능선을 타고 20여분 가는 뒷편에 있어 역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오래 전 추운 겨울 날 옆지기와 함께 올라 주위 조망을 즐기며 행복했던 한때를 보낸 곳이기에 오늘도 그 추억을 더듬어 보는 시간이 되었다.
숙향봉이라는 473.2 헬기장을 내려가니 급경사 사면 등로가 열리는데 등로가 보이지 않아 방향만 보고 내려간다.
잠시 후 교통호를 만나 우측으로 돌아 내려가니 좁은 공터가 나타나고 다시 활엽수가 빼곡하게 자라고 있는 그늘 등로를 타고 잠시 호사를 누려보는 시간이다.
한동안 특이할 것 없는 평이한 활엽수 등로를 따르니 바위 하나가 정상을 지키고 있는 551 무명 바위봉에 도착을 해 사진 한장 남기고 다시 빠르게 출발하니 나즈막한 안부를 지나 활엽수들이 빼곡한 543 무명봉에 도착을 해 긴 한숨을 내쉬어 본다.
귓청을 찟을 듯한 총소리도 조금은 멀어졌는지 가끔 들려오는 총소리도 이제 들을만 하다는 생각으로 걸어 보는 시간이다.
이제부터는 계속 이어지는 임도같은 활엽수 등로를 타고 한동안 걸어 가 본다.
큰 고도 차이도 없는 지루한 등로를 따라 나즈막한 무명 안부로 내려갔다 다시 오르기를 반복하다 보니 교통호와 벙커가 검정막에 씌여져 있는 곳 직전에 도착을 하고 그곳에서 약간 불어 오는 바람을 맞으며 준비한 간식과 과일로 허기를 달래 본다.
이제 곧 비포장 임도로 내려설 예정인데 좌측으로 보였던 금학산을 다녀올까 말까 잠시 고민하다 오늘은 그냥 패스하고 조망이 좋은 날 다시 한번 들려보자 마음 먹으니 편안하게 걸어 내려갈 수 있을 것 같다.
간식을 먹고 다시 배낭 둘러메고 내려가니 넓은 비포장 임도가 나타나고 그곳에서 정상 마루금은 좌측 짧은 절개지를 올라 금학산 방향으로 올랐다 정상 가기 전에 우측으로 내려와야 되지만 오늘은 그 금학산 우측으로 새로 생긴 비포장 임도를 타고 진행하기로 한다.
조금 아쉬운 마음이 없지 않아 있지만 두번이나 다녀 온 금학산이기에 큰 미련은 남지 않는다.
완만하게 이어진 비포장 임도를 따르니 갈림삼거리를 지나 대전차 방어벽이 설치된 고갯마루에 도착을 해 예전 추억을 생각해 보는 시간도 가져 본다.
그 대전차 방어벽이 설치된 고갯마루를 지나 내려가니 이제부터 올라야 할 보개산 정상부가 저 멀리 올려다 보이기 시작하고 임도 좌측으로는 담터계곡 우측 위로 지장산이 높은 하늘에 맞닿아 있는 형상으로 다가오고 있다.
잠시 후 이정표가 보이는 또 다른 대전차 방어벽이 설치된 대소라치 사거리 안부에 도착을 하니 가족 나들이를 나온 사람을 만나 혹시 식수를 얻을 수 있을지 문의를 하니 충분치 못해 주지는 못한다며 좌우측 계곡으로 가면 식수는 충분히 얻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전언이기에 확신이 없으면서도 좌측으로 나 있는 시멘트 포장도로를 타고 담터계곡 최상류 방향으로 걸어 내려가 보지만 역시나 너무나 먼 거리이기에 다시 되돌아 올라 와 진행 방향의 좌측 방향인 보개산 방향으로 맥 잇기 산행을 이어가 본다.
대소라치라는 이름이 재미있어 찾아보니 연천군 신서면 내산리 윗신틀거리 북쪽에 있던 마을로서 한국전쟁 전까지도 집성촌을 이루었던 배천 조씨들이 산제사를 모시던 큰 소나무 고목이 있었다 하여 지어진 이름으로 마을 북쪽에 있는 대소라치고개에서 그대로 음을 따와 불리워지는 이름이라고도 한다.
대소라치고개는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 약천동에서 경기도 연천군 신서면 대광리의 윗대광골로 넘어다니는 고개로서 대송정 마을에 있던 큰 소나무로 인하여 큰(대) 소나무(송)가 있는 고개(치)라는 합성 지명으로 이루어졌으나 앞 음절과의 연결 과정에서 매개모음 아가 동반되어 ㄹ이 뒤로 옮겨오면서 대솔아치가 대소라치로 변한 이름이라는 자료가 있어 정리를 해 본다.
대소라치고개로 다시 올라 와 이제는 진행 방향의 좌측 임도를 타고 완만하게 오르니 헬기장이 나타나는데 이미 잡풀들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어 헬기장인지도 모르게 지나칠 정도이다.
다시 좌측 수풀이 우거진 비포장 임도를 타고 조금 더 걸어가니 집적소라고 적혀있는 이정판 앞으로 차량 진지가 보이고 그 진지를 올라 우측 사면 능선쪽으로 붙어 오르니 희미한 등로가 보이기 시작하고 잠시 후 우측에서 올라 오는 뚜렷한 등로를 만나 본격적인 보개산 정상으로 향해 본다.
야생화가 지천으로 피어 있는 등로를 타고 오르니 오후 4시가 가까워지는 시간이라 그런지 서산으로 기울어져 가는 햇살이 활엽수 사이로 파고 들며 또 다른 빛내림이 환상적이다.
완만하게 이어지는 활엽수 등로를 따라 다시 땀방울을 흘리다 보니 보이지 않던 바위들도 가끔 나타나고 그렇게 조금 더 걸어 오르니 주능선에 도착을 하는데 그곳에는 잘려진 고사목 밑둥과 간벌된 나무들로 덮혀 있는 벙커가 있는 677 무명봉에 도착을 한다.
등로는 이제 우측으로 약간 휘어지며 진행이 되고 활엽수와 잡풀들이 자라고 있는 나즈막한 안부를 지나 다시 약간의 잡목들이 저항을 하는 완만한 오르막 등로를 따른다.
잠시 후 등로 옆으로 이점이라는 이정판이 서 있는 곳을 지나 계속 오르막 등로를 따르니 잡풀들이 자라고 있는 헬기장 정상에 도착을 하는데 이곳이 바로 752미터의 해발고도를 가지고 있는 보개산 정상이다.
강원도 철원군과 경기도 포천시 그리고 연천군의 경계에 솟아 있는 보개산은 이곳 헬기장이 아닌 지장봉의 정상부를 이르는 산으로 왜 이곳을 별도의 보개산이라 불리게 되었는지 궁금하기만 하다.
아무튼 헬기장 정상에 서면 사방 팔방 일망무제로 펼쳐지 아름다운 조망과 풍경이 산객의 마음을 사로잡아 한동안 그 환상의 풍경과 조망을 즐기고 출발해 보기로 한다.
제일 먼저 동쪽 방향으로 금학산이 눈에 들어 오는데 금학산은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에 있는 산으로 해발고도는 946.9미터이며 산 이름은 학이 막 내려앉는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해서 붙여졌다고 한다.
901년 궁예가 태봉을 건국하고 철원에 도읍을 정할 때 도선이 이 산을 진산으로 정하면 300년을 통치할 것이며 고암산을 진산으로 정하면 국운이 25년밖에 가지 못할 것이라고 예언하였으나 이를 듣지 않아 18년 통치 끝에 멸망하고 말았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산세는 부드럽게 보이나 산 속으로 들어서면 매바위능선과 큰바위능선 및 용바위 그리고 용아릉 등 암릉이 연이어져 있고 마애석불과 부도탑갓 등의 볼거리가 있는데 이중 마애석불은 신라시대 불상 양식으로 전체 높이는 3미터이며 몸통은 바위에 조각되어 있고 머리는 따로 만들어져 바위 위에 놓여 있다.
가까이에 백마고지가 위치하며 민통선과 인접한 산이며 산행할 때 군부대를 지나므로 신분증을 꼭 지참해야 한다.
여지도서 철원도호부에 금학산은 부 남쪽 15리에 있고 수정산에서 와서 고남산의 주맥이 되었으며 우뚝 솟아 하늘에 뻗어 지방의 명산이 되었고 산 위에 기우처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해동지도를 비롯한 조선 후기에 제작된 고지도에는 부의 남쪽 경계에 빠짐없이 묘사되어 있으며 산의 형세가 학이 내려앉은 모양을 하고 있어 유래한 지명이라 하는데 즉 오지리 방향으로 뻗어 내린 줄기는 학의 오른쪽 날개가 되고 이평리 방향의 줄기는 왼쪽 날개에 비유하며 그 날개 품안에서 뻗어 나온 지역인 초장족과 이장족 등의 마을은 학의 발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도선국사는 궁예가 송학으로부터 철원에 도읍을 정할 때 궁을 짓되 금학산을 진산으로 정하면 300년을 통치할 것이지만 고암산으로 정하면 국운이 25년 밖에 못 갈 것이라고 예언하였다고 하나 궁예가 고암산을 진산으로 정하였기 때문에 18년 만에 멸망하고 말았다고 전해온다.
산의 정상인 기봉(깃대봉)에는 남이장군의 용마가 나왔다는 용탕과 기우제를 지내던 터가 있으며 중턱에는 마애석불과 부도석재 등이 남아 있고 북쪽 산록에 위치한 칠성대는 궁예가 소원을 빌던 곳이라고 전해온다.
이평리 일대에는 금학과 관련된 상호가 많으며 금학연지과 금학체육공원 등에서 관련 지명을 엿 볼 수 있다.
남쪽 방향으로는 다음 구간에 올라야 할 지장봉 즉 실질적인 보개산 줄기가 아름답게 펼쳐져 있고 그 좌측으로는 오늘 저녁에 내려가야 할 담터계곡이 길게 이어지는 풍경도 눈에 들어 온다.
담터계곡 지나 저 멀리에는 종자산과 보장산 자락들도 보이는데 오래 전 산친구들과 나눴던 추억이 되살아 나 잠시 상념에 잠겨 보기도 한다.
자금쯤 그 산친구들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지내고 있을지 궁금한 시간이다.
동쪽으로는 다녀오지 못한 아쉬움이 약간 남아 있는 금학산이 기울어져 가는 햇살을 받아 더욱 선명하게 이 산객의 뇌리에 박힌다.
갈림 삼거리 임도에서는 시간도 없고 또 두번이나 다녀 온 금학산이기에 쉽게 포기를 하였지만 지나고 보니 그 아쉬움이 더ㅓ욱 커지는 것은 늘 경험으로 느끼는 것이지만 오늘도 그 아픈 마음을 이끌고 바라만 보고 있다.
조만간 다시 행낭 차려 저 금학산에 올라 이곳을 바라보며 오늘을 추악할 수 있기를 바래보며 아쉬움을 달랜다.
금학산 좌측인 동북쪽 방향으로는 궁예의 한많은 애환이 담겨있고 많은 전설들이 전해지고 있는 철원군 동송읍 들판과 마을들이 아름답게 내려다 보인다.
이곳 철원은 궁예와 관련이 깊은 도시 중 한곳으로 궁예가 개성과 철원 지역을 중심으로 후고구려를 세운 때는 893년이고 궁예는 905년 도읍을 철원으로 옮긴 뒤 경기도, 강원도, 황해도, 평안도, 충청도까지 세력을 뻗치며 후백제의 견훤과 자웅을 겨루었으나 역사는 그의 편이 아니었다.
그의 부하였던 왕건이 호족 세력과 연합하여 궁예를 축출하였으며 905년부터 왕건이 고려를 세운 918년까지 열다섯 해 동안 태봉국의 서울로서 한 나라의 중심지였던 철원군 철원읍 홍원리의 비무장지대에는 풍천원이라는 들에 터만 남아 있다.
궁예가 물을 마셨다는 어수정은 흔적만 있고 두 겹으로 쌓았던 성은 거의 다 허물어져 일부만 남았는데 성현은 용재총화에서 철원은 궁예가 차지하여 태봉국을 세웠던 곳인데 지금도 경성의 옛터와 궁궐의 층계가 남아 있어 봄이면 화초가 만발하며 지세가 막혀 강하는 조운이 어렵다라고 궁예가 도읍을 정했던 철원 땅에 대해 기록하였다.
또한 한탄강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철원이 태봉국의 도읍지였던 어느 날 남쪽으로 내려가 후백제와 전쟁을 치르고 온 궁예가 이곳에 와서 마치 좀먹은 것처럼 구멍이 숭숭 뚫려 있는 것을 보고는 아하 내 운명이 다했구나 하고 한탄을 하여 그때부터 한탄강이라 불렀다고도 하고 또는 같은 민족끼리 총부리를 겨누며 싸웠던 한국전쟁 때 수많은 젊은 생명들이 스러져간 곳이라 해서 한탄강이라 불렀다는 슬픈 내력도 있다.
오래된 역사의 영화부귀를 뒤로 하고 동송들판도 황금빛으로 물들며 풍년을 노래하고 있다.
서쪽으로는 대광봉과 고대산 능선이 마치 고래등을 연상시키며 길게 이어지고 있다.
금강산 가는 길목이자 경원선 철도가 끊겨 있는 철도중 절단된 지점인 연천군 신탄리역에 인접한 고대산(832.1미터)은 천혜의 자연경관을 간직하고 있으며 생태계가 잘 보존된 곳이고 등산으로 북녘땅을 바라볼 수 있는 국내 유일한 곳으로 등산여행에는 안성맞춤이다.
고대산의 유래는 큰고래 라고 부르고 있으나 이것은 신탄지명에서 연루된 것으로 보이며 방고래(땔나무를 사용하는 온돌방 구들장 밑으로 불길과 연기가 통하여 나가는 고랑을 고래하고 함)를 이르는 것으로 고대산은 골이 깊고 높아 고대산(높은 대가 있는 산)이라고 한다.
지형도에는 높은 별자리와 같다는 뜻과 의미가 담긴 곳이라 하여 고태라고도 표기하였으며 고대산은 옛부터 광범한 산록과 울창한 산림으로 말미암아 임산자원이 풍부할 뿐만 아니라 목재와 숯을 만드는데도 적합한 곳으로 부락으로 형성된 주막집들이 있다하여 신탄막이라는 지명으로 불리웠으며 실질적으로 한국전쟁 이전에는 참숯이 유명했던 고장으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또한 1907년 11월 4일 의병진 150명과 임진강에서 의병들을 토벌하러 파견된 일본군 보병 제20연대 8중대와 연천에서 격전한 후 신탄막에서 흩어지고 의병진 60명이 고대산에서 다시 일본 군대와 치열하게 교전한 곳으로서 우리 선열들의 용맹스러운 민족정기가 서려있는 곳이기도 하다.
동송읍 좌측인 북서쪽으로는 조만간 걸어야 할 왕재지맥 산줄기가 부르고 있지만 잡목과 잡풀이 무성한 시기가 지나면 만날 수 있으리란 생각이다.
고개를 다시 남동쪽으로 돌리니 그곳에도 오래된 추억이 남겨져 있는 산들이 보이며 다시 한번 고운 추억을 만들자고 유혹하고 있다.
지장산 지나 좌측으로 명성지맥의 불무산과 관음산이 뚜렷하고 그 좌측으로 돌아 저 멀리 명성산 줄기도 옛 추억을 들려주며 당당하게 서 있다.
그 좌측으로는 조만간 걸어야 할 대득지맥 마루금도 박무속에 존재감을 알려주지만 높지 않은 산세로 인해 사진으로는 아쉬움이 남는다.
많은 시간 그곳 752미터의 보개산 정상 헬기장에서 간식도 먹고 물도 마시며 아름다운 조망을 즐기고 아무 생각없이 고대산 방향으로 잠시 알바 후 되돌아 와 좌측 잡목으로 가려진 등로를 어렵게 찾아 다시 맥 잇기 산행을 시작해 본다.
잠시 좌측으로 사며ㅑㄴ 등로를 따르니 쓰러진 거대한 고사목 한그루가 인사를 강요하고 그곳을 통과하니 등로 옆으로 싸리버섯이 보여 먹을만큼만 채취하여 계속 이어지는 등로를 따라 조금은 빨리 걸어 본다.
요즈음 산행을 하면서 가장 자주 만나는 싸리버섯이기에 이제는 조금은 친숙한 버섯중의 하나가 되어 간다.
약간의 싸리버섯을 채취하고 빠르게 진행하니 등로 좌측으로 조망처가 나타나고 그곳에서 잠시 살펴보니 좌측으로 금학산과 그 아래 남쪽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아름답고 잠시 후 내려가야 할 담터계곡이 생각보다 길게 이어져 있어 하산 등로가 궁금해지고 걱정도 되는 시간이다.
잠시 후 그곳을 지나 내려가니 이제 넘어야 할 무명봉 넘어 저 멀리 다음구간에 만나야 할 지장산이 조심하여 내려갔다 조만간 만나자고 인사를 건네고 있다.
오래 전 산친구들과 환종주 산행을 하면서 어렵게 올랐던 지장산인데 이번에 다시 만나게 되면 그때보다는 조금 수월하게 오를 수 있기를 기대도 해 본다.
바로 눈 앞 진행 방향에서 좌측 동쪽으로는 멋진 뻥대가 보이고 그 뻥대 위에는 멋진 소나무들이 자라는 풍경이 눈에 들어 온다.
이제부터 특별한 조망도 없고 큰 오르내림도 없는 지루한 등로이기에 마음 먹고 빠르게 걸어 본다.
잠시 평이한 활엽수 등로를 따르니 눈 앞에 거대한 바위가 가로막고 그 바위를 좌측에 두고 우측으로 돌아 내려가다 살펴보니 동물 같기는 한데 어느 동물을 닮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잠시 사진 한장 남기며 자세히 보니 고릴라를 닮았다는 생각도 해 보는 바위이다.
그 바위를 우회해 내려가니 등로에는 짧은 로프들이 서ㅏㄹ치되어 있는데 생각보다 위험허ㅏ지 않은 등로에 왜 이런 로프들을 설치했는지 궁금하기만 하다.
잠시 후 바위 사이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면서 힘들게 버티고 있는 참나무 한그루에 세상 살기 힘듬을 살펴보고 잠시 나즈막한 안부를 지나 다시 오르니 낙엽을 헤치고 먹을 것을 찾은 멧돼지 식흔들이 널려있어 주의를 상기 시킨다.
잠시 완만하게 이어지는 오르막 등로를 타고 오르니 커다란 활엽수 한그루가 정상을 차지하고 그 옆으로 짧은 로프가 설치되어 있는 610 무명봉에 도착을 해 긴 한숨을 내쉬어 본다.
다시 볼 것 없는 평이한 활엽수 등로를 타고 빠르게 걸어 진행을 하니 등로 좌측 활엽수 사이에 보이는 619 바위봉을 지나고 잠시 후 진달래 나무들이 정상을 차지하고 있는 635 무명봉도 넘는다.
약간의 바위들이 산재되어 있는 663 무명봉을 통과하고 안부를 지나 오르니 커다란 참나무 한그루가 좁은 정상 공터에 자리하고 있는 677 무명봉에 도착을 해 남아 있는 물로 목마름을 달래 본다.
다시 약간의 잡목들이 보이는 평이한 활엽수 등로를 빠르게 걸어 진행하니 웅덩이가 있는 692 무명봉에 도착을 해 좌측으로 약간 꺽이는 등로를 찾아 무탈하게 진행을 한다.
잠시 후 잡풀들이 우거진 등로를 따라 좁은 공터가 있는 668 무명봉에 도착을 하고 바위를 넘으니 싸리나무들이 등로를 가득 채운 새로운 형태의 등로가 보이기 시작한다.
잠시 후 다시 평이한 일반 등로와 만나 안부를 지나고 완만하게 오르니 바위들로 쌓아 만든 벙커봉도 지난다.
잠시 후 바위가 있는 624 바위봉을 지나고 멧돼지들의 식흔이 선명한 낙엽 등로를 타고 걸어가니 참나무와 작은 바위가 보이는 647 무명ㅂㅇ에 도착을 한다.
그곳에서 잠시 바위턱을 올라 지나온 방향을 살펴보니 잡목 사이로 아름답게 펼쳐진 지나 온 보개지맥 마루금이 펼쳐져 있다.
이제 하루해가 서산으로 기울어져 가며 그림자를 길게 만들고 있어 조금은 서둘러 하산하기 시작을 해 본다.
잠시 우측 사면 등로를 타고 완만하게 걸어 내려가니 등로 좌측 능선방향으로 벤취 하나가 보이고 잠시 후 타이어 교통호가 보이는 등로와 만나 진행을 하게 된다.
오래 전 많이도 사용했던 타이어 등로이지만 이제는 환경에 피해를 준다하여 사용이 제한되어 있지만 오래 전 만들어진 타이어 등로는 그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타이어 등로를 타고 올라 다음구간에 올라야 할 지장산을 다시 한번 올려다 보고 안부를 지나 타이어 등로로 오르니 598 벙커봉이 나타난다.
벙커봉을 지나 잡목 숲을 헤치고 타이어 등로를 따르니 등로 옆에 벤취 하나가 보이는 589 벤취봉에 도착을 해 남아 있는 물 한모금으로 목마름을 달래 본다.
그 벤취봉을 지나 완만하게 이어지는 내리막 활엽수 등로를 타고 걸어 내려가니 잠시 후 넓은 비포장 임도가 내려다 보이고 그 건너편에는 바위 절개지 우측으로 나무계단이 보이기 시작한다.
다음 구간 산행 들머리를 확인하고 이곳 임도갈림길 즉 북마넘이고개에서 오늘 보개지맥 첫 구간 산행을 마무리 한다.
오후 5시 50여분이 다 되어 가는 적당한 시간에 마칠 수 있어 감사한 하루였다.
임도 좌측으로는 전봇대로 지붕을 만든 특이한 벙커가 보이고 그 벙커 앞쪽에는 임도갈림길이라는 이정표가 서 있는데 좌측 철원 상노리 방향으로는 방향 표시만 되어 있고 거리 표시가 없어 조금은 아쉬움이 남는다.
이곳 북마넘이고개는 경기도 연천군 신서면 내산리 삼각동에서 포천군 관인면 삼율리의 담터로 넘어가는 큰 고개로서 옛날에 이 고개로 말이 넘어갔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그러나 마는 으뜸과 높음의 뜻으로 쓰였던 고어의 음운 변천으로 말이 되어 넘는다는 뜻의 네미와 합쳐져 북쪽에 있는 높은 산마루를 넘는다는 뜻의 북말네미에서 북마네미가 된 것이다.
다음 구간 산행을 위해 다시 올라 만나야 할 북마넘이 고개이기에 머릿속에 잘 기억하고 그곳을 출발해 좌측 상노라 방향으로 이어진 비포장 임도를 따라 하산을 시작해 본다.
잠시 그 비포장 임도를 타고 걸어 내려가니 임도는 그 기능을 상실한지 오래되었는지 자갈들이 나뒹굴고 임도에는 잡목과 잡풀들이 자라면서 좁은 등로 하나만 길게 보이고 있다.
임도 우측으로는 산 자락을 깍아 만든 임도이다 보니 제법 높은 바위 절개지가 그대로 노출되어 있어 조금은 위험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래도 임도에 피어 있는 다양한 야생화를 친구 삼아 내려가다 보니 노란색과 붉은 색 그리고 흰색의 물봉선이 함께 피어 있는 임도도 만나 웃음꽃도 피워보는 시간이다.
지독한 잡목과 칡넝쿨 사이로 좌측 저 멀리 금학산도 보며 내려가니 눈 앞으로는 금학산에서 뻗어 나온 산줄기 하나가 계속 이 산객을 주시하듯 바라보고 있다.
잠시 후 임도 우측으로 지독한 칡넝쿨이 산 전체를 뒤덮고 있는 곳을 통과하는데 갑자기 멧돼지 소리가 들려 서로가 놀라며 소리를 지르니 그 멧돼지도 놀랐는지 소리를 지르더니 산속으로 도망을 가 버린다.
잠시 후 범의ㅗ리를 만나고 금색 마타리도 만나 눈을 맞추다 보니 생각보다 임도 상태거 좋지 않고 길어 다음 구간 오를 때 걱정이 되는 구간이기도 하다.
잠시 후 산사태가 났던 지역을 지나면서 사라진 임도를 찾지 못하고 좌측 계곡으로 잘못 들어가 고생하고 어렵게 우측 능선을 뚫고 올라 정상적인 비포장 임도를 다시 만나 걸어 내려가니 드디어 안도의 긴 한숨이 새어 나온다.
잠시 후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하고 내려 온 방향을 뒤돌아 보니 오늘 이 산객이 지루하게 걸었던 보개지맥 활엽수 등로가 길게 이어지며 서산으로 기울어져 가는 햇살을 막고 있다.
그렇게 한참을 더 걸어 내려가니 드디어 담터계곡 위에 설치된 다리가 보이고 철원군 관광안내도와 사용하지 않고 있는 담터계곡 관관안내소 콘테이너 박스도 보인다.
그곳에서 배낭 정리하고 철원 콜택시를 부르니 이곳 담터계곡 안까지 운행이 가능하다고 해 잠시 쉬면서 담터계곡의 이모저모를 살펴보는 여유도 가져 본다.
잠시 더 기다려도 택시가 들어 오지 않아 배낭 둘러메고 천천히 넓은 비포장 임도를 타고 담터계곡 입구 방향으로 걸어 내려가니 임도 좌측으로 대한예수교 장로회 수도중앙교회수양관에 도착을 한다.
강원도청에서 담터계곡에 관한 자료를 찾아보니 담터계곡은 강원도 철원군 동송읍 상노리에 위치하여 초입부터 절경을 이루는데 용정산 남쪽 기슭에 자리한 먹바위와 신포동을 지나서 만나는 수직 절벽 불상암(높이 약100미터)은 담터 절경이라 할 만하다.
담터는 산짐승을 사냥해서 잡아먹고 나서 버린 뼈가 담을 쌓을 정도였다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하는데 강원도 철원군과 경기도 포천시의 경계에 있으면서 고대산(832미터)까지 7 Km 이어진 깊은 계곡이다.
이 계곡의 특징은 암반을 따라 계곡물이 흐르기 때문에 우기에도 흙탕물이 일지 않으며 한여름에도 울창한 나무와 맑은 물로 한기가 느껴지며 여러 곳에 너비 50여미터의 담이 있어 야영하기 적당하다.
야영장도 조성되어 있어 여름철과 가을철에 많은 관광객이 찾고 있으며 또 가을이면 계곡을 물들인 단풍 또한 이 곳의 숨겨진 볼거리이다.
입구에서 2 Km 정도 들어가면 100미터 정도 높이의 절벽 위에 부챗살 모양의 불상암(부채바위)이 나오고 주변에 고석정과 도피안사 및 삼부연폭포 등 관광명소가 많다.
잠시 후 도착한 택시를 이용해 아침에 애마를 주차한 노동당사 주차장으로 이동해 애마를 회수하고 철원읍내에 있는 목욕탕에서 찌든 땀을 씻어 낸 후 막히지 않는 도로를 타고 생각보다 일찍 집에 도착을 한다.
다음 구간은 시간나는 대로 조만간 다시 와 진행하려 하지만 구간 길이가 길어 한번으로 완주가 가능할지 그것이 조금은 고민이며 교통 편 역시 신경을 쓰이게 만들고 있어 최선의 방법을 강구한 후 찾아야 될 것 같다는 생각이다.
내일 저역에는 보현지맥 제4구간인 사곡령에서 한티재까지 약 25 Km 이 예정되어 있어 토요일인 내일 하루 대득지맥 산행이나 가능할지 걱정이다.
일단 일어 나 상황을 보고 가능하면 대득지맥도 시작을 해 보지만 오늘 무더위에 고생해 여의치 않으면 하루쯤 쉬었다 의성 보현지맥으로 내려가도 좋겠다는 생각으로 잠자리에 든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칠갑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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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힘든 보개지맥의 여정이셨지만 맘 한구석 애잔함을 느끼셨으리라 생각됩니다.
제가 6월 초에 다녀갈 때도 수정봉 오름길 만만치 않았는데
잡목철에 지나셨으니 고충은 배가 되셨으리라 생각됩니다.
상세한 여정담을 보면서 지나던 때가 그리워지네요.^^
무성한 숲과 씨름하시느라 수고많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