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기왕 발자취 역사 여행
왕의 전설이 있는 횡성
갑천·어답산·태기산성·신대리
태기왕 설화에 얽힌 지명 많아
전설아닌 역사속 실존인물 조명
횡성주민 ‘최고의 왕’으로 꼽아
어답산,갑천면,병지방,태기산성….
이들은 모두 횡성지역 최고의 전설로 내려오는 태기왕 설화에 얽힌 지명들이다.태기왕은 삼한의 하나였던 진한의 마지막 왕으로 경주에서 신라의 박혁거세왕에 쫓겨 소수의 병사를 이끌고 횡성으로 와 4년동안 머무르며 군사력을 키웠으나 결국 신라군에 패배해 자결했다는 전설의 주인공이다.
그러나 역사적인 사실이 없었다면 횡성지역에 산재해 있는 지명들에 얽힌 전설이 2000년이라는 긴 생명력을 갖고 전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태기왕은 문헌이 없어 전설속의 인물로 그려져 있지만 횡성지역에는 태기왕과 관련된 지명들이 많고,태기산성이라는 역사적인 증거도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실존인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태기왕의 전설이 더이상 전설이 아닌 역사속 인물로 조명받기 시작했다. 지난 9월 횡성군이 주관하고 강원도민일보가 개최한 ‘태기왕 자산연계활용 심포지엄’은 태기왕을 전설속의 인물에서 현실속의 인물로 이끌어내려는 새로운 시도 였다. 횡성군은 내년부터 태기왕을 새롭게 조명하는 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한다는 계획이다.
이제껏 태기왕은 실존 여부를 떠나 횡성주민들에게 ‘최고의 왕’으로 인식되어 왔고,횡성발전의 원동력이자 핵심적인 존재였다. 2000년전으로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태기왕이 신라군에 쫓겨 다녀간 곳을 따라 2000년전의 역사여행을 떠나본다.
태기왕의 이야기는 갑천면,청일면,둔내면지역에서 활발하게 전승되고 있다.
태기왕은 삼랑진(경남 밀양)에서 신라군에 대패해 1000리길을 한달동안 행군해 횡성지역에 도착했다. 그곳 냇가에서 잠시 틈을 내 갑옷을 씻었다해서 갑천이라는 지명이 태어났고,신라군을 정찰하기 위해 주위를 살피기 위한 높은 산에 올라 진(陣)을 쳤다. 신라의 박혁거세왕도 태기왕을 뒤쫓기 위해 산에 올랐는데 임금이 산을 밟았다고 해서 어답산이라는 이름이 태어났다. 어답산 정상에 오르면 주변 100리가 한눈에 들어온다. 그중에서도 횡성호가 최고의 절경이다. 횡성호수길은 2000년전 태기왕과 병사들의 숨소리를 듣는 역사탐방길이다.
어답산에 피난온후 병사를 한곳으로 모아 방어하던곳은 병지방,어답산 동쪽에 진을 쳤다고 해서 동막삼거리등이 생겨났다.이곳에서 태기왕은 마을에서 병사를 모으고 세금을 걷고,소금창고까지 지었다. 그래서 공서울,은전머리,먹해라는 지명이 있다. 어답산은 산세가 깊지만 넒은 구릉지가 있고 물이 풍부해 병사들이 진을 치고 숨어있기 좋은 천연요새이다. 현재 병지방계곡은 여름철 최고의 피서지로 유명해 올해부터 오토캠핑장이 운영되고 있다.
청일지역은 태기왕의 병사가 신라군을 보고 놀라 그대로 뭄이 굳어 바위가 됐다는 신대리 촛대바위,태기산으로 갈때 여러곳에 소수의 병사를 배치했다는 유평리 소구니 마을 등이 있다.
태기왕의 아들이 부왕이 있는 청일면 신대리쪽으로 가다 길을 잘못 들어 날이 저물어 노숙하던 중 한 군사가 왕자의 피로를 달래주기 위해 구릿대를 베어 피리를 만들어 불었다고 해서 피리골이 생겨 전설도 내려온다. 이 피리가 구릿대 단소다. 구릿대단소는 동학혁명 때 신호음악으로 쓰이는 등 갑천지역에서 생겨난 유서 깊은 악기로 알려졌다.
또 태기왕이 도주할때 왕비였던 아라왕비가 신라군에 붙잡혔다. 아라왕비가 칼을 꺼내 자결하려고 하자 신라군이 풀어줘 태기왕을 만나 태기산으로 함께 올라갔다는 드라마 같은 러브스토리도 전해지고 있다.
둔내면에는 태기산성이 있다. 태기산은 높고 험난하고 원시림으로 우거져 있는데다 운무마저 감돌아 피신하기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그래서 성(城)을 쌓고 전답을 개간해 군량미와 소금을 충당해 군사훈련을 실시하며 4년을 보냈다. 그 사이 군사들은 과거의 패잔병이 아니라 일당백의 정예군으로 변했다.
그러나 태기왕의 정예군은 한순간의 경계실수로 신라군에 대패했다. 태기왕이 남쪽만 경계한다는것을 신라군이 알고 홍천 서석면 생곡리 방면으로 위장공격했던 것이다. 태기왕은 지르매 재를 넘어 속실리 율무산성으로 도주했고,그 후 일설에 평창 봉평면 멸온리에서 숨졌다고 한다. 태기왕 병사들은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새로운 마을을 개척해 살았는데 그곳이 바로 신대리라고 한다. 태기산에는 성터와 우물,곡식창고등의 흔적이 남아있다. 횡성문화원은 태기산성비 등 태기왕과 관련된 지역들을 찾아가는 문화탐방을 운영하고 있다.
이같은 태기왕의 발자취가 횡성지역 곳곳에 존재하고 있는데도 왜 역사기록에는 남아있지 않았을까. 이는 승자는 역사가 되고,패자는 전설이 되는 결과물로 해석된다. 그런데도 횡성주민들은 태기왕을 가장 친근한 왕으로 생각하고 있다. 전쟁에 져 나라가 망하고 죽은 왕인데도 2000년동안 긴 생명력을 지니고 있는 것이 이를 반증하고 있다. 횡성주민에게 태기왕은 태기문화제,태기산 산신령 등을 통해 미생의 왕이 아닌 완생을 꿈꾸는 이상향의 왕으로 삼고있다. 태기왕의 부활에 새로운 횡성의 미래가 달려있다.
이영식 도문화재 전문위원은 “횡성주민들은 태기왕이 실존인물이 아니더라도 자신이 갈망하는 꿈에 대입해 이야기하는 마음속의 왕으로 삼고 있다”며 “이는 태기왕에 대한 부정적인 수식어가 따르지 않고 있는데서 알수있다”고 했다.
박순업 횡성문화원장은 “태기산에는 기후제가 잘 보존되어 있고,태기산성에 얽힌 설화들을 정리해 태기와 설화탐방로를 개설하면 고대왕국의 역사여행을 활성화시킬수 있다”고 말했다. 횡성/권재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