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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크림 반도(Cream peninsula)의 지리와 역사 영어: 크리미아(Cremia)
면적: 27,000㎢(경기+강원) 인구: 약 225만(가이드 500만) 크림자치공화국의 수도: 심페로폴
지리: 크림 반도는 특이한 지형을 가지고 있으며, 먼저 흑해와 아조프 해 사이에 있고, 반도 서쪽에 폭이 9km
밖에 안 되는 페레코프 지협(Perekopskiy, Peresheyek)이 있다.
이 지협을 통해 우크라이나 본토와 연결되는 섬 같은 반도이며, 동쪽은 길이는 105km의 긴 모래톱 아라바트
(Arabat) 반도에 의해 아조프 해와 시바시 염호(Syvash salt Lake)로 분리된다.
105km 중에 75km는 폭이 1km도 안 되는 가늘고 긴 특이한 모래톱의 반도이며, 크림 반도와 헤르손 주의
경계를 이루는 120km 중에 9km 페레코프 지협이고, 나머지는 호수로 시바시 염호와 연결된다.
반도 동쪽에 있는 게르치 해협은 아조프 해의 유일한 출입구이며, 해협 중간에 있는 투즐라 섬을 통해 러시아
타만(Taman) 반도를 연결한 크림 대교(Crimean Bridge)가 생겼다.
이 다리를 케르치 해협 대교(Kerch Strait Bridge)라고도 하며, 길이는 총 19km이고, 2014년 3월 착공하여
2018년 5월 16일 도로교가 개통되었고, 철도교는 2019년 말에 개통 예정이다.
반도 남쪽은 동서로 150km 뻗혀 있는 숲이 울창한 크림 산맥이 있고, 높이가 1,545m나 되는 로만 코쉬
(Roman kosh mountain) 산이 있으며, 남부 기후는 지중해성으로 주요 휴양지가 많다.
역사: 약 8만전 구석기시대에 인간이 살았으며, BC8~7세기 그리스 지배를 받았고, BC5세기 보스포루스
왕국의 지배를 받았으며, BC5세기 말에 케르소네소스가 건설되었다.
BC1세기~AD3세기에 고대 로마의 지배를 받았고, 330년부터 비잔티움 제국의 지배를 받았으면서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와의 교역을 통해 상업 도시로 성장했다.
375년 훈족에 점령되었으며, 7세기에 하자르 카간국의 지배를 받았고, 988년 키예프 대공국의 블라디 미르
1세 대공이 케르소네소스에서 기독교 세례를 받았으며, 13세기 몽골 제국이 정복했다.
그 후 오랫동안 타타르족의 본거지였고, 1475~1774년까지는 오스만제국의 종속국인 크림 칸국이 지배했으며,
1689년 표트르 대제는 투르크에 조공을 바치는 크림의 타타르족을 공격하였다.
1783년 예카테리나 2세가 반도를 제국에 편입시켰고, 이때부터 흑해진출을 위한 거점으로 삼았으며, 부동항을
얻기 위한 남하정책은 오스만 제국과 충돌하였고, 프랑스와 영국은 러시아 제국의 확장을 경계했다.
1853년 프랑스와 영국이 침공하여 크림 전쟁이 일어났으며, 1856년 패배한 러시아 제국은 흑해주변에 함대와
요새를 가질 수 없다는 파리 조약을 맺었고, 1917년 소비에트 유니온 공산 정부가 들어섰다.
1921년 타타르족은 소비에트 유니온 정부의 일원으로 크림 소비에트 사회주의 자치공화국을 수립했고,
1941년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으며, 독일은 선전포고도 없이 세바스토폴 전역을 점령했다.
크림 타타르족은 나치 독일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1944년 중앙아시아 등으로 강제 이주를 당했다.
1945년 2월 미국의 루스벨트, 영국의 처칠, 소련의 스탈린이 나치 독일의 패배와 전후 처리를 논의하기 위해
크림 반도 얄타에서 만나 회담을 했으며, 3나라 대표는 독일분할점령 원칙을 재확인했다.
주요 전범은 국제재판에 회부하고, 배상금문제는 모스크바에 위원회를 설치해 위임하기로 했으며, 소련이
대일전에 참전하기로 비밀의정서가 채택되었는데 그 대가로 러일 전쟁에서 잃은 영토를 반환한다.
1954년 크림반도는 흐루시초프가 조국인 우크라이나에 양도되었고, 1991년 소련의 연방해체로 우크라이나의
영토가 되었으며, 1992년 친러 성향이 강한 독립된 우크라이나의 크림자치공화국이 수립되었다.
2014년 초 친러 주의인 우크라이나의 빅토르 야누코비치 대통령이 혁명으로 실각한 이후 크림 자치 공화국이
러시아와의 합병을 준비하는 한편으로 우크라이나 과도 정부와 서방측은 이에 반발했다.
2014년 3월11일 크림자치공화국은 크림공화국으로 독립을 결의 하였으며, 3월 16일 러시아귀속의 주민투표에
압도적으로 찬성을 얻어 3월 18일 푸틴과 크림공화국 총리, 크림 공화국 최고회의 의장, 세바스토폴 시장이
합병조약에 서명하였고, 우크라이나를 비롯한 대다수 국가들은 이 합병을 불법이라고 주장하였다.
2014년 3월 27일 유엔은 합병을 반대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지만 2015년 1월 1일 완전한 합병이 완료되었다.
[타타르(Tatar) 족]
발트에서 크림 반도까지 가장 많이 듣는 민족은 타타르 족이고, 그 다음이 코사크 족이나 카자흐 족은 이번
여행에 나오지 않는 민족이나 같은 몽골제국의 일원이었던 유목민이라 함께 다루어 보았다.
타타르 족의 명칭은 유럽을 공포 속에 몰아넣었던 몽골군은 경멸하는 의미로 ‘지옥’의 뜻인 타르타로스가
어원이며, 투르크 어계로 10세기 경 러시아 남부에 유입되어 러시아에 몽골제국을 건설했다.
14세기 이슬람 수니파로 개종하였으며, 최고 통치자 칸의 가족 중 일부는 러시아귀족이 되어 유력한 지위를
차지했고, 현재 인구는 550만 명으로 러시아에서 가장 많은 소수민족이나 순수혈통은 적다.
13세기 칭기즈 칸의 몽골제국에 흡수되었고, 그 후 2집단으로 나뉘는데 하나는 러시아 연방의 타타르스탄에
살고 있는 타타르족으로 이 집단은 킵차크한국을 구성했던 토착 투르크계 부족들이다.
이들은 폴란드에서 타타르 만두나 타타르 소스에 이름을 남기고 있으며, 이들이 가장 많이 사는 타타르스탄
자치공화국의 수도는 카잔으로 인구의 비율은 러시이인과 1:1로 동등하다.
러시아인과는 종교, 문화, 풍습이 많이 다르지만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 소련의 공산체제아래 살면서 이들이
믿는 이슬람 종교색체는 많이 사라졌지만 카잔에는 모스크바처럼 크렘린 궁전이 있다.
크렘린(Kremlin, 크레물린)은 러시아어로 요새, 성채, 성곽을 뜻하는 ‘크레을’을 영어로 표기한 것이다.
이곳에는 이슬람 사원인 쿨 샤리프(Kul Shrif)와 러시아 정교회 건물인 수태고지 대성당(Annunciation)이 같이
있는 것이 마치 레바논의 베이루트 다운타운에도 모스크와 교회가 마주보고 있다.
다른 하나는 크림 반도에 거주하다가 1944년 강제로 쫓겨난 타타르 족으로 주로 우즈베키스탄과 시베리아에
살고 있는데 2차 대전 때 독일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고향에서 쫓겨났다.
[흑해와 크림(영어 크리미아, Cremia) 반도의 이야기]
동서1150km, 남북610km으로 이름은 1. 북쪽을 가리키는 나침반 바늘이 흑색이라서 2. 산소부족으로
플랑크톤이 적어 썩은 부유물질 많아서 3. 안개와 심한폭풍으로 위험하다는 뜻인 ‘검은 바다’라서
가장 신비성이 있는 2번보다 그루지야는 다른 민족이 바다를 건너올 때 지켜주었다고 하여 3번 믿는다.
4. 1783년 예카테리나 2세 때 투르크와 전쟁에서 승리하고 러시아를 괴롭혔던 크림한국(汗國)을 합병시키며,
'클레오파트라의 함대'라고 불린 호화스러운 항해로 크림 반도를 횡단했다.
5. 크림전쟁(1853-56): 러시아가 오스만 제국 내 정교회 교도들에 대한 보호권을 주장하여 일어난 전쟁으로
기독교국가인 영국, 프랑스의 지원을 받은 오스만 제국과 러시아가 벌인 전쟁이다.
중요한 것은 1864년 만국적십자 조약이 맺어지는 동기가 된 영국의 나이팅게일이 간호사가 참전했고, 보급이
부족한 담배를 병사들이 종이에 말아 피운 것이 현재 종이담배의 기원이 되었다.
그리고 크림전쟁에 참전한 스코틀랜드 군인들이 고향에 두고 온 애인을 그리워하며 애창함으로 널리 전파된
노래가 ‘Annie Laurie’로 우리나라 찬송가 493장 ‘하늘가는 밝은 길이’의 원곡이다.
6. 1945년 2월 루즈벨트, 처칠 수상, 스탈린이 얄타 회담을 리바디아 궁전에서 했고, 전쟁 후의 독일분할통치
유럽나라들의 처리문제, 국제연합의 창설방안 등을 협의했다.
소련의 대일본 전 참전으로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를 남과 북으로 나누는 것을 언급했으며, 러시아를 제2의
대국으로 인정한 루즈벨트는 귀국 후 2달 만에 사망하여 지도자의 건강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상기할 때 루즈벨트를 말하며, 그는 건강 때문에 회담하는 동안 리바디아 궁전에서 머물렀다.
얄타회담 때 건배주로 아르메니아 코냑으로 했다고 알려졌지만 그루지야는 자국의 와인으로 했다고 주장하나
한번만 아니고, 여러 번 건배할 때에 둘 다 사용했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처칠이 아르메니아 코냑에 반하자 스탈린이 매일마시라며 365병 선물했다는 일화가 유명하며, 또 루즈벨트가
제조한 칵테일이 ‘루즈벨트 마티니’가 사용되기도 했다고 한다.
7. 2014년 1월 31일 22회 동계올림픽시작이 되는 소치가 대 코카서스산맥의 서쪽 끝 흑해 연안에 있다.
※루즈벨트 마티니(Roosevelt Martini): 1933~45년까지 미국 최초로 4선 대통령이었던 루즈벨트는 회담을
마치고 돌아간 후 4월 12일에 사망했고, 후임으로 해리 트루먼(Harry S. Truman)이 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칵테일의 제왕인 마티니를 즐겼고, 직접 제조하여 권하기도 했는데 얄타 회담 때 처칠과 스탈린에게도
직접 만든 마티니를 내 놓은 것으로 전해지며, 그가 만든 칵테일을 ‘루즈벨트 마티니’라고 한다.
[아라라트(Ararat) 산과 크림 반도]
성경 창세기 8장 4절 “일곱째 달 곧 그 달 열이렛날에 방주가 아라랏 산에 머물렀으며”라는 기록이 있는
성산으로 이곳을 여행하는 기독교인들이 가장 보고 싶어 하는 곳이다.
이 산은 현재 터키의 동부 아르메니아의 고원에 있으며, 대(大)아라라트(5,185m) 소(小)아라라트(3,925m)이
나란히 있으며, 아르메니아는 터키 땅에 있는 이 산을 자기 나라 것처럼 사랑한다.
1783년 스탈린은 오스만제국의 보호국인 크림한국의 영토였던 크림 반도의 종주권을 얻는 대신 말썽 많은
아라랏 산을 터키에게 양도하여 외세로 아르메니아는 억울하게 영토를 잃었다.
지금도 아르메니아는 아라랏 산이 세계에 알려지기를 바라고 있었으나 터키는 반대로 조용히 묻히기를 바라고
있으며, 터키는 아라랏 산을 자기 나라 것처럼 사용하는 것에 대하여 항의 했다고 한다.
아르메니아가 답하기를 그럼 터키는 달과 별이 터키의 소유라 국기에 사용하는 가? 되물었다고 한다.
※루드빌라 파블리첸코: TC가 이곳에 대한 재미난 이야기를 물어서 파플리첸코와 포클론스카야 이야기를 하게
됐는데 가이드는 2사람 다 아는 것 같이 이름만 이야기했지 더 이상은 말하지 않았다.
그녀는 1941년 24살의 소련여자 스나이퍼로 2차 대전 때 독일군을 오데사전투에서 187명, 세바스토폴에서
122명, 총309명 사살하여 ‘죽음의 숙녀’라는 별명을 얻었다.
2015년 영화로 제작되었고 제목은 ‘1941: 세바스토폴 상륙작전(Battle for Sevastopol)’이며, 감독은 세르게이
모크리츠키 이고, 루드빌라 파블리첸코 역을 율리야 페레실트가 했다.
※나탈리야 포클론스카야: 1980년 3월18일 생으로 러시아 국가두마 의원이자 전직 크림공화국의 사장이었고,
우크라이나의 검사로 키예프에서 근무했으며, 러시아로 병합한 크림공화국의 초대검찰총장에 임명됐다.
그녀는 미녀로 유명하며, 2014년 3월 11일 총장임명과 함께 군대식계급을 부여하여 대령계급에 해당하는
‘선임 법무고문관’에서 ‘3급 법무국가고문관(소장) 즉 ‘장군’으로 승진해 화제를 낳았었다.
(구르즈프와 푸시킨)
1820년 유배생활 중 푸시킨 몸이 쇠약해지자 그를 아끼던 지역 사령관 라엡스키 장군이 그를 크림반도로
데려가 구르즈프에서 4개월 정도 요양을 하면서 머물렀던 2층을 박물관으로 만들었다.
그가 사용했던 펜, 종이, 자화상이 있고, 특히 그의 대표작 ‘예브게니 오네긴’의 최고 삽화를 볼 수 있다.
[헤르소네스(체르소네수스) 유적과 박물관(The Museum of Chersonesos)]
그리스어로 '반도'를 뜻하는 케르소네소스는 BC5세기 말 그리스인 헤라클레아 폰티카 출신 이주민들이 건설한
그리스 식민도시로 흑해 북부 연안의 크림 반도 남서부에 위치하며, 러시아 200루블 지폐에 도안 됐다.
유적지는 블라디미르 1세 동상과 성당이 있는 서쪽 해안가에 있으며, 고대집터, 공중목욕탕, 승리의 종, 바닷가
신전의 석주, 성벽, 원형극장 등을 볼 수 있고, 특별한 곳은 유적지의 정자이다.
이곳은 성 블라디미르 성당에서 세례를 받고, 기독교를 국교로 정했으며, 키예프 공국을 모스크바 쪽으로
세력을 확장시켜 현재 러시아를 만든 블라디미르가 세례를 받은 기념으로 만든 것이다.
박물관에는 토기그릇, 자기그릇, 타일 그림, 비문, 각 시대의 동전 등이 전시 되어 있는데 본래 일정에는 들어
있었지만 가지 않아서 섭섭했던 유적이다.
[11일] 18년 10월 27일 토요일 ●일정: 00:50(SU1845, 4h) 키시나우 출발→ 03:45 모스크바 도착→
06:20(SU 1636, 2h40) 모스크바 출발→ 09:00 크림반도 심페로폴→ 세바스토폴 관광[1 스커틀 쉽
기념탑 방문 2 크림 전쟁 파노라마 그림→ 얄타이동→ OREANDA 호텔
[세바스토폴(Sevastopl) 역사]
면적: 863.6㎢ 인구: 39.5만 명(가이드 50만)으로 크림 반도에서 가장 큰 도시.
역사: BC 421년 이 도시 서쪽에 고대 그리스의 식민지 케르소네수스가 있었고, 보스포루스, 로마제국, 비잔틴 제국의
영토가 되었으며, 989년 키예프의 블라디미르 대공이 점령하여 이곳에서 세례를 받았다.
1783년 크리미아를 합병한 러시아인들은 이곳에 해군기지와 요새건설을 시작하여 이듬해 세바스토폴이라고 했으며,
1808년에 무역항이 개항되었고, 크림 전쟁(1853~56)으로 파손된 도시는 후에 재건하였다.
1875년 철로가 개통되면서 발전하게 되었으며, 세바스토폴은 해군기지와 요새로서의 주된 기능을 발휘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1942년 6~7월 독일군은 거포로 98%를 파괴시켰으나 1944년 다시 재건했다.
가이드는 1954년 크림 반도가 우크라이나에게 양도될 때에도 세바스토폴은 빠졌는데 그 이유로 8개의 연방구
아래 22개 공화국이 있었으며, 그중 세바스토폴은 크림 반도에 있지만 남반구 직속 연방시었다.
즉 세바스토폴은 크림 반도 소속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2014년 크림 연방관구가 생겨 9개 연방국이었으나 2016년
7월 28일 폐지되면서 8개의 연방으로 줄었고, 세바스토폴은 3개의 연방특별시로 편입되었다.
[러시아 행정]
러시아는 85개의 연방주체로 구성되며, 이는 다시 22개의 공화국, 46개의 주, 9개의 지방, 1개 자치주, 4개
자치구, 3개 연방시로 구분되지만 각 연방은 구, 국, 주, 연방에 따라 등급이 다르다.
1. 8개의 연방관구는 러시아 대통령이 임명한 대표가 감독하고 정보를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기관이다.
1. 극동 연방관구 .2. 시베리아 연방관구 3. 우랄 연방관구 4. 북서 연방관구 5. 볼가 연방관구
6. 중앙 연방관구 7. 남부 연방관구 8. 북 캅카스 연방관구
2. 22개의 자치 공화국은 8개 연방관구 아래 소수 민족단위로 구성되며, 각각의 헌법과 행정수반, 의회를
가지고 있고, 공화국마다 공용어를 가질 권한이 있으나 공식적으로는 러시아어를 사용해야 한다.
자치공화국은 외교권은 없으며, 러시아 1.4억 인구 중에 80%로는 러시아인이고, 나머지 20%는 약185개의
다양한 소수민족인데 그중 가장 인구가 많은 민족은 타타르 족으로 양 550만 명이나 된다.
400만 명이 넘는 코사크 족, 100만 명이 넘는 민족은 우크라이나인, 벨로루시인, 몰도바인 등이 있다.
3. 46개의 주는 광역 행정구역으로 소수민족이 없는 지역에 설정되며 선거로 뽑힌 주지사와 의회를 갖추고
있어 법을 제정할 수 있고, 주로 러시아 서부에 밀집되어 있다.
4. 9개의 지방은 주와 권한이 같지만 접경지역에 있다는 점이 다르며, 1924-1938년 비 러시아인들이 주로
설치된 행정구역으로 입법기관을 통해 법을 제정할 수 있다.
5. 4개의 자치구는 특정지역에 거주해온 토착민을 인정하여 형성된 행정구역으로 주보다는 자치권이 많지만
공화국보다는 적으며, 자치구 입법기관을 통해 법을 제정할 수 있다.
6. 3개의 연방시는 본래는 1. 모스크바(Moscow) 2. 상트페테르부르크(Saint Petersburg) 2개이었다. 2016년
3. 세바스토폴(Sevastopol)은 2016년 크림 반도가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에 합병되면서 추가되었다.
연방특별시는 독립적인 행정 기능을 수행하는 주요 도시로 자치구 입법기관을 통해 법을 제정할 수 있다.
[세바스토폴로 향하면서]
오늘 0시50분에 키시나우를 출발하여 모스크바로 향했는데 비행기에서 잠 좀 자려고 수면제를 먹은 것이
잘 못되어 내릴 때까지 구토를 하는 바람에 좀 자려고 했던 것이 고생만 했다.
4시에 모스크바에 도착해서 6시20분 심페로플로 가는 비행기를 타려면 2시 여유 밖에 없는데다 출국하고
짐 찾아 그 넓은 공항의 탑승구를 찾아가려면 촉박한 시간이라 우리는 서둘렀다.
TC는 모스크바 공항에는 사기꾼이 많다고 하며 길을 찾다가 급한 나머지 러시아인에게 물었더니 우려했던
대로 엉뚱한 곳으로 끌고 다니다가 가버려 우리는 다시 찾아 겨우 도착하니 비행기는 이미 떠났다.
다음 비행기도 자리가 모자라 TC와 나는 그 다음 비행기로 향했고, 출국하여 일행과 가이드를 만나 버스에
올랐는데 너무 일정이 늦어져 아침도 먹지 못한 체 세바스토폴로 향했다.
차 안에서 이드와 운전기사를 소개했으며, 가이드는 반 남성 같은 여성이었고, 운전기사 이름이 바벨이었는데
성경의 바울을 러시아식으로 부른 것으로 폴 또는 포올이라고도 한다.
방금 내린 심페로폴 국제공항은 올 5월에 개장했다고 한다.
크림반도의 면적은 26,000㎢이고, 인구는 450만에서 500만으로 늘었다고 하며, 2014년부터 인구는 계속
늘어난다고 했는데 인터넷의 225만 명하고 차이가 많이 난다.
러시아이나 우크라이나에게도 매우 중요한 크림 반도를 1991년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은 술 한 잔 마시고
크림 반도를 우크라이나에게 주었다는 우스개도 있다고 가이드는 말했다.
이 때 세바스토폴에 흑해 함대가 정박할 수 있다는 조건으로 함대 중에 30%는 우크라이나가 갖고, 나머지는
70%는 러시아가 가지며, 정박 비용으로 돈 대신 그 대가만큼 가스 비를 활인해 주었다고 협약했다고 한다.
가이드는 크림 반도에서 태어나 1990년에 결혼하여 모스크바에 살다가 고향으로 돌아올 때는 우크라이나
영토로 되어 있어 우크라이나 여권을 받아 러시아 여권과 함께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2014년 이후는 우크라이나 여권을 버리고 러시아 여권만 가지게 되었다는 ‘비키니 섬의 거북이’ 같은 이야기를
했는데 미국의 핵실험으로 방사능 때문에 방향을 상실한 것이 비키니 섬의 거북이다.
크림 반도에 살던 우크라이나 사람들 중에 남은 사람은 러시아 사람이 되었으나 이곳을 떠나 우크라이나로
돌아 사람도 있다고 하였는데 이들은 중에는 ‘비키니 섬의 거북이’ 신세가 된 사람이 있을 것이다
러시아로 돌아간 뒤로는 점점 살기가 좋아 지고 있으며, ‘좋은 대통령과 좋은 정책은 위대한 업적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국민이 잘 먹고, 잘 사는 것‘이라는 진리의 말을 하면서 솔직한 심정을 말했다.
2014년 크림 반도를 러시아 영토로 편입한 것은 국제법을 어긴 것으로 유럽과 미국의 제제를 하고 있지만
유엔의 제제는 유엔 안전보전이사회의 상임이사국이라 반대하면 그만이다.
군사력은 워낙 강한 러시아이어서 물리적인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가 없고 다만 경제적인 제제를 지금도 진행
중인데 관광과 휴양지를 찾아 세바스토폴로 들어오던 그 많은 크루즈 여행객들이 딱 끊겼다고 한다.
얄타 북쪽에 있는 로만 코쉬 산(1,545m)은 경치 좋은 가을철엔 암벽등반을 하기 위해 등산객이 많은데 아침
비행기에서 내린 사람 중에 큰 배낭을 맨 사람들이 찾는 곳이라고 했다.
3시간 반 걸릴 거라고 했으나 2시간 반도 안 되어서 시가지에 들어왔는데 세바스토폴에는 크고 작은 항구가
36개 정도가 있다고 하며, 어부들만 이용하는 항구, 크루즈 선이 입항하는 항구도 있다.
항구는 민간인과 해군이 같이 사용하고, 핵 잠수함은 없었으며, 발트 해와 블라디보스토크에 있고, 철도 위를
지나 갈 때 2차 대전에도 피해를 입지 않은 7개의 건축 중에 하나라는 하얀 건물의 기차역이 멀리 보였다.
폭이 3km가 된다는 건너편 피브덴나 만(Pivdenna Bay)에 떠 있는 커다란 배는 잠수함도 건조할 수 있는
도크로 그 옆으로 여러 대의 잠수함도 있었는데 이곳에서 잠시 내려 사진을 찍었다.
이곳은 예카테리나 2세가 도시를 세웠다고 하나 실제로 도시를 건설한 사람은 포툠킨으로 1784년 이며, 그는
총독이고, 원수이며, 총사령관이자 예카테리나 2세의 연인으로 제2차 투르크 전쟁(1787~92)에서도 이겼다.
[수장군함 기념비(Scuttled ships Monument)]
이제 스커틀 쉽 기념탑을 보기 위해 내린 장소가 나키모프 제독의 광장이고, 그 중앙 동상은 크림 전쟁 때
저격병에 의해 사망한 나키모프 제독 기념비(Monument to Admiral V. Nakhimov, 1802~1855)가 있다.
백작은 세바스토폴 방어군 총사령관으로 러시아 영웅이며, 동쪽에는 가이드는 1846년 만들어진 콜로네이드
(colonnade, 주랑)이라고 한 곳의 1846 글자 위에 3개의 국기가 있다.
좌측은 해군기이고, 중앙(서쪽)은 러시아기이며, 우측은 세바스토폴기라고 했는데 지도엔 백작 제티(Count's
Jetty)라고 되어 있으나 인터넷을 뒤져도 찾을 수 없었고, 궁금한 조각과 건물도 알 수가 없었다.
세바스토폴 만에 있고, 100루블 지폐에도 도안 된 수장군함 기념탑은 크림 전쟁 때 영국, 프랑스, 연합군의
배가 들어오지 못하게 수장시킨 군함 80척을 추모하기 위해 바다를 매립하여 1905년 만들었다고 한다.
기념비 꼭대기에는 러시아의 상징 독수리가 있고, TC는 가이드에게 2차 대전 때 얼마나 죽었는지 물었는데
러시아 사람만 200만 명이라 했으며, 오래 머물만한 곳도 아니어서 바로 식당으로 향했다.
[레스토랑 세바스토폴(Restoran Sevastopol)]
레스토랑 세바스토폴 식당은 아주 멋진 자리에 위치하며, 건물도 화려하고 전면은 웅장한 코린트식 기둥으로
장식한 주랑이 있는 세바스토폴 호텔 온천(Sevastopol Hotel & Spa) 뒤편에 있다.
앞에 있는 멋진 건물은 지도엔 터피르마(Turfirma) 사령관 투어 (Komandor-Tur)라고 되어 있으며, 옆에는
세바스토폴 아카데미(Sevastopol'skiy Akademicheskiy)이 있었고, 뜰에는 사진과 그림이 전시 중이었다.
식당은 크기로 보아 호텔 전용은 아닌 것 같았지만 옆방에는 공연에 출연할 젊은 여자들이 복장을 갖추어
입는 모습도 볼 수 있었으며, 수장군함 기념탑은 가려서 보이지는 않았다.
워터 프론트(water front)에 위치하여 전망이 너무 좋았고, 기억에 남는 것은 식사 후 나온 나뭇잎이 그려진
커피였는데 영상에서 많이 봐왔지만 실제로 본 것과 먹게 된 것은 처음이었는데 먹기가 아까웠다.
TC가 없을 때 또 가이드는 묻는 것이 많았지만 다른 것은 모르겠으나 어디를 거쳐 왔는지는 알아들을 수
있어서 발트 3국과 그리고 우크라이나, 몰도바, 이제는 마지막으로 크림에 왔다고 했다.
그리고 일정에도 있으며, 가장 궁금하고 관심이 있는 체르소네수스 유적을 가는지 물었는데 안타깝게도 안
간다고 했는데 그때 일정표를 보여주고 여기에 있다고 하며, 가자고 하지 못한 것이 후회되었다.
[파노라마 세바스토폴 방어 그림(Panorama Sevastopol Defense Picture)]
가이드는 지금 가는 곳이 파노라마 박물관이라고 하며, 가면서 보이는 건물 중 2차 대전 때 파괴되지 않은 건물
중에 하나가 1905년 건축된 성 블라디미르 대성당(St. Vladimir's Cathedral)이라고 한다.
이 성당은 1917년 러시아의 사회주의(공산) 혁명 이후에는 스포츠 크럽으로 사용되다가 1985년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 선출된 고르바쵸프가 교회로 다시 돌려주었다는 설명을 들으며, 목적지에 도착했다.
박물관 안에서는 도슨트가 설명했는데 파노라마 그림은 프란츠 리오보우(라우바우 Franz Roubaund, 1856~
1928) 작품으로 프랑스 사람이라고 하여 프란츠를 프랑스로 들은 것 같아 자료를 찾아보았다.
자료에는 크림 반도 출신이며, 만든 기간은 3년이고, 1905년 이곳에 가져왔으나 2차 대전 때 파괴되어 1954년
다시 건축했으며, 그림과 우리와의 거리는 12m이고, 그 사이는 그림이 아니고, 실물을 배치했다고 한다.
자세히 보면 그림과 차이가 난다고 했는데 이렇게 함으로 그림이 그림으로 보이지 않고, 실제인 것처럼 보이게
했으며, 말은 그림이지만 마차는 실물을 교묘하게 배치하여 그림도 실체인 것처럼 하였다고 한다. 7311
중앙 배 옆에 길게 떠 있는 것이 보이는지 물었으며, 그것이 연합군의 배가 들어오지 못하게 수장시킨 배, 즉
스커틀 쉽(Scuttled ships)이며, 위 옷이 흰 사람은 러시아 셀이러(sailor, 배사람, 수병)이라고 했다.
장화를 신고 코트를 걸친 사람들은 러시아 육군이고, 349일 동안의 격렬한 공방전이었으며, 저격병에 쓰러진
나키모프 총사령관을 간호하는 사람은 ‘따샤’인데 그는 러시아에서 최초의 간호사라고 한다.
그는 이 그림을 그릴 때 옆에서 조언을 했다고 하고, 프랑스 군과 육박전 그림도 있었으며, 결국엔 프랑스가
승리를 하였고, 러시아는 세바스토폴을 잃었으나 이렇게 철저하게 빼앗은 땅도 파리조약으로 6개월 후에는
연합군은 본국으로 돌아가고 세바스토폴은 다시 러시아로 돌아왔다고 한다.
이로서 부동항을 얻기 위한 러시아의 남하 정책은 멈추었는데 톨스토이가 있는지 물었으나 그는 이곳이
아니고 다른 전쟁터에 있었다고 하였고, 이 그림은 조명으로 보이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림은 유리를 통해 들어오는 빛을 이용해서 보여 주는 것이라고 하였고, TC는 이것은 그림이 아니고 그림을
촬영한 필름이라고 하여 사실인지를 검색했으나 찾을 길이 없었다.
[크림 전쟁과 공성전(攻城戰) 그림]
크림 전쟁은 부동항을 얻기 위한 러시아의 남하정책은 투르크제국 내 정교회 교도들에 대한 보호권을 주장한
것이 직접적인 요인이었으며, 1854년 크림 반도를 중심으로 일어난 전쟁이다.
니콜라이 1세는 자신의 계산착오와 엄격함과 퉁명스러움 때문에 같은 그리스도교 국가의 지원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오스만제국을 돕는 영국, 프랑스 연합군과 외로이 싸워야만 했다.
이탈리아 사르데냐는 통일 전쟁에 지원을 바라고 적은 군대를 보냈으며, 세바스토폴은 1855년 9월 연합군에
함락되었고, 오스트리아가 연합군에 가담하겠다고 위협하자 러시아는 1856년 파리 강화조약을 받아들임으로
전쟁은 종전되었는데 전쟁의 전사자는 연합군이 7만 명, 러시아군이 13만 명이다.
세바스토폴 공성전 그림(Siege of Sevastopol Painting)은 폭 14m, 길이 115m로 그림을 원형을 만들어 놓고
그 앞에 소품을 배치하여 입체적으로 실감나게 장치한 디오라마(diorama) 관이다.
주로 세바스토폴을 방어하는 러시아군의 모습을 그렸는데 우리나라 거제포로수용소에도 디오라마 관이 있다.
[세바스토폴(Sevastopol)의 톨스토이 그리고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는 26세 때 포대장의 신분으로 참전한 349일간의 경험을 ‘세바스토폴 이야기’라는
작품을 썼으며, 그가 근무한 포대 진지에는 현재도 대포가 거치돼있고, 그 앞에는 톨스토이 참전 기념비가
서있으며, 그는 죽기 얼마 전 세바스토폴을 방문하였고, 그가 묵었던 건물은 그 사실을 알리는 동판이 있다.
플로렌스 나이팅게일(Florence Nightingale, 1820년∼1910년) 영국의 간호사이자 행정가, 병의원 제도의 개혁자,
사회 개혁가 이며, 그녀는 크림 전쟁에 군 간호사로서 참여하였다.
그녀는 크림 전쟁에서 아군과 적군을 구별하지 않고 헌신적으로 간호하여 ‘백의의 천사’라는 별명을 얻었고,
국제적십자를 만들어 제1회 노벨 평화상을 받은 스위스의 앙리 뒤낭은 그녀의 영향을 받았다고 했다.
※나이팅게일(Scotch Nightingale): 이 새는 개개비류의 지빠귀 새로 4월에 남쪽에서 찾아오는 철새인데 고운
소리로 울기에 사람들의 사랑을 많이 받으며, 토셀리의 소야곡(Nightingale Serenade)이라는 노래도 있다.
[얄타로 가는 길]
이제는 얄타로 향했는데 가이드는 9월24일까지 수영을 했지만 지금은 물은 좀 차도 수영이 가능할 것이라고
했으며, 얄타까지는 90km이지만 길이 좋지 않아서 1시간 반 정도 걸린다고 한다.
크림에는 여러 가지 과일이 생산되는데 지금 철에는 사과와 포도과 있으며, 그 중에 포도는 유명하여 마산드라
지역에서 생산되는 포도주와 세바스토폴 포도주가 유명하다고 한다.
얄타에 도착하여 들어간 오레안다(Oreanda) 호텔은 바닷가에 있고, 멀리 아이 패트리 산 같은 멋진 바위산도
보였으며, 호텔 아래에는 레바논에서 본 백향목 같은 시더나무(Cedarwood)가 인상적이다.
이 호텔 있는 멋진 수영장과 물놀이 기구는 보았으나 히스파니올라(HISPANIOLA)라는 이름의 배 모양의 멋진
부속 건물도 같이 있었는데도 보지 못한 것이 참으로 기적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산드라(Masandra) 포도주: 얄타 위의 마샨드라 지역에는 제정러시아 황제 니콜라스 2세의 여름궁전에
사용할 와인을 공급하기 위해 만든 포도원으로 황실포도주인 마샨드라 와이너리가 유명하다.
100만병 이상의 와인이 저장되어 있어 기네스북에 올라 있으며, 가장 비싼 와인은 1775년 생산된 ‘헤렌스프란
떼라’라는 브랜드로 병당 100만 유로로 현재 4병만 남았다고 한다.
[12일] 18년 10월 28일 일요일 ●일정: 얄타 관광[1 레닌 광장 2 알렉산드라 교회 3 보론쵸프 궁전
3 리바디아 궁전 4 체호프하우스 박물관]→ OREANDA 호텔
[얄타(Yalta, Jalta)의 역사]
우크라이나 남부, 크림 반도 남단해안, 흑해 북쪽연안에 위치하는 러시아 크림 주에 있는 도시로 인구 7.7만 명,
어원은 ‘물가(해변)이’라고 하고,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다고 한다.
얄타 시는 19세기 초에 이르러 형성되기 시작했고, 1838년 시가 됐으며, 기후와 공기가 좋고 겨울에 온화하고,
매우 아름다운 경치로 인해 가장 인기 있는 휴양지로 1899년 안톤 체호프가 별장을 짓고 이사 왔다.
1900년 작가이자 의사였던 체호프가 앞장서 요양소를 세웠으며, 흑해의 여러 항구에서 오는 배들이 입항하는
항구이고, 1945년 2월 제2차 세계대전 때 연합군 지도자들이 리바디야 궁전에서 만나 얄타 회담을 하였다.
[레닌 광장(Lenin Square)과 레닌 동상]
오늘이 이번 여행의 마지막 일정으로 출발할 때는 언제 다 갈까? 하고 작은 걱정도 했지만 벌서 마지막 날이
왔으며, 이젠 이렇게 긴 여행은 이것이 마지막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아니길 바랐다.
레닌 광장의 항구 옆에는 레닌 동상 있고, 북쪽 길 건너에 있으며, 공원과 함께 있어 얄타시민과 광객들에게는
좋은 산책과 휴식의 장소를 제공하는데 주말에는 개인 또는 소그룹 악단의 연주회도 열린다.
레닌 광장에서 해변을 걷는 거리에서는 사진 찍기 위한 배경도 있고, 이벤트로 차나 옷을 빌려주는데 야경에는
아주 재미있는 거리로 작은 먹거리도 있으며, 기회가 되면 주민들과 어울릴 수도 있다.
[소보르 알렉산드라 네브스코고(Sobor Aleksandra Nevskogo) 러시아 정교회]
이 교회는 1903년 건축되었으며, 2차 대전 때 파괴되지 않았고, 건물 중간에는 니콜라이 2세(1894~1917,
1918 사형)의 아들이자 제정 러시아의 마지막 황태자 c(1904~18) 흉상이 있다.
알렉세이의 혈우병은 방탕자 라스푸틴을 궁중으로 불러들었으며, 그에게 빠진 황후 덕분에 1915년 그의
권력은 절정에 이르렀으며, 이것이 재정 러시아 멸망의 한 원인이 되었다.
오늘이 주일이어서 안에는 예배 중이라 살짝 들어다보고 신부님이 파는 핸드메이드 허브 비누 5개를 샀다.
[보론초브 궁전(바란초프스키, 보론쵸브, Vorontsov Palace)]
궁전으로 가면서 가이드의 설명을 들었는데 보론쵸브에 대한 이야기는 아래에 기록했으며, 궁전은 부근에서
생산 되는 아주 단단한 돌(대리석 종류)로 19세기 중엽에 시작했다고 한다.
20년 동안 아주 정성을 다하여 아주 잘 만든 개인 관저이지만 이름은 궁전으로 빼어난 경치를 가진 깎아지른
절벽 산 아이페트리 아래 위치하며, 산의 나무와 바다로 인해 공기가 아주 좋았다고 한다.
공기에 반한 예카데리나 2세는 4년을 머물렀고, 보론초브도 오래 머물렀다고 하며, 또 보론초브는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1세(1825-55)를 초빙해서 궁전에 머물게 했고, 1899년 거장 체호프가 결핵치료를 위해 찾았다.
얄타회담 때 영국 처칠이 묵었던 숙소이기도 하며, 서유럽으로부터 들어오는 많은 크루즈가 있었으나 2014년
러시아로 불법 편입된 후 경제제재로 전부 끊어지고 지금은 대신 러시아인들이 많이 찾는다고 한다.
험한 길을 30분간 달려서 보론초브 궁전에 도착하였고, 가이드의 매표를 기다리면서 매그놀리아(Magnolia)에
대한이야기를 했는데 목련의 영어 이름인 몰랐고, 플루메리아((Plumeria) 꽃에 대한 이야기도 했다.
이 꽃은 하와이완 훌라춤을 추는 여자들이 레이(Lei)를 만들며, 하와이안 재스민, 라오스는 돋참파라고도 하며,
마릴린 먼로가 잠잘 때 입었다는 유일한 잠옷이라고 했던 ‘샤넬 No.5’ 향수의 원료이다.
꽃 이름은 17세기 카리브지역을 여행하던 프랑스 식물학자 Charles Plumier의 이름에서 왔고, 이젠 가이드를
따라 안으로 입장하여 처음 들어간 곳은 보론초브의 초상화가 있는 그의 집무실이다.
보론초브가 사용하던 원형테이블은 처칠도 사용한 역사적 유물이며, 다음은 중국식으로 꾸며진 부인의 방인데
부인과 아이들의 초상화가 있었는데 1945년 2월 얄타 회담 때 처칠이 잠을 잤던 곳이라고 한다.
다음은 처칠이 화장실로 사용하던 응접실의 창문 커튼은 런던에서 구입한 것으로 한 번도 바꾸지 않은 본래의
것으로 영국하고는 인연이 깊은 방이며, 실제로 그는 영국 친구가 많아 그들의 조언도 들었다고 한다.
이 방에는 예카데리나 2세의 초상화와 피아노도 있었는데 무엇보다도 압권은 천연으로 장식한 아름다운 아이
패트리아 산의 전경이 보이는 것이었으며, 응접실로 들어오는 문은 남쪽과 북쪽의 2개의 문이 있다.
남쪽 문을 나오면 2개의 문 사이에는 테라스 같았으며, 식물도 키우고 있는데 이것이 영국식 겨울 정원(윈터
가든, Winter Garden)으로 160전 그대로라고 해서 식물이 그렇게 오래 사는 것에 좀 놀랐다.
아마도 윈터 가든의 형태를 말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으며, 북쪽 문을 들어가면 다이닝 룸(식당,
dining room)이라는 만찬장으로 식탁 테이블, 벽난로 그리고 벽엔 욕조처럼 생긴 것이 있었다.
이것의 용도가 무엇인지 TC에게 물었다고 하는데 이것은 샴페인 등을 담아 두는 얼음 통이고, 옆방엔 영국에서
가져온 당구대가 있었으며, 이제는 다이닝 룸을 통해 나가면 궁전의 현관이 나온다.
출입국은 이슬람 모스크 출입구 방식인 아름다운 이완(Iwan- ∩) 모양을 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크림 반도를
지배하던 타타르 족을 고용했고, 그들이 믿는 종교가 이슬람이어서 이런 모양이 나왔다고 한다.
15분간의 자유 시간을 가졌으며, 먼저 이완 앞에 흑해를 바라보고 앉아 있는 하얀 2마리의 사자 상을 보면서
분수, 아름다운 정원과 나무들이 볼만했는데 그 중 한 나무는 열매의 색깔이 다른 것이 신기했다.
궁전 뒤로도 나무숲이 무성했는데 공기가 맑다는 것이 과장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고, 궁전의 색깔은 회색에
가까워 아름답다는 생각은 안 들지만 숲은 아름답다는 색각이 들었다.
이젠 점심 식사를 위해 식당으로 향했으며, 20분 정도 걸리고, 이 식당은 전망이 좋아 전망대라고 했는데
머릿속에 스치는 것은 ‘제비둥지의 성’이었으며, 식당에 도착하고는 맞았다는 것을 알았다.
제비둥지의 성은 여행하기 전 인터넷에서 보았는데 일정에 없어 차에서라도 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지도를
찾아보니 도로에서도 멀리 있어 포기했으나 이렇게 멀리서라도 볼 수 있어서 감사했다.
※미하일 세미오노비치 보론쵸프(Mikhail Semyonovich Vorontsov, 1782~1856): 외교관 세미욘 R. 보론초프
아들로 1782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출생하여 아버지를 따라 영국 런던에서 자랐다.
부인은 폴란드 백작 엘리자베스 브라니카 보론초프(Elizabeth Branicka Vorontsov) 인데 한 때 오데사에서
푸슈킨과 연인이었으며, 이 때문에 훌륭한 시들이 탄생했다고 한다.
19세기 러시아 정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는데 1801년 육군입대 후 나폴레옹 전쟁(1806~15)에 참가하여
1815~18년 프랑스 주둔 러시아 점령군을 지휘했다.
1823년 크림반도와 오데사를 포함한 인구가 희박한 변경지역의 총독으로 임명되었고, 공정하고 효율적인
행정체계를 확립하고 러시아정착민들을 대거 이주시켜 무역과 산업을 크게 발전시켰다.
1844년 카프카스 지역의 총독과 총사령관에 임명되어 통제권을 확고하게 다졌고, 1851년 조지아의 트빌리시
루스타벨리를 완성하였으며, 1848년까지 코카서스의 다게스탄을 러시아 영토로 편입시켜다.
농노해방과 완만한 개혁조치를 지지했으며, 1853년 관직에서 물러났고, 1856년 육군원수가 되었고, 같은 해에
오데사에서 사망했는데 보론초프 궁전을 지은지 4년째 되는 해라고 한다.
그의 무덤이 있었던 오데사의 변형 교회는 1936년 소련이 교회를 철거하여 그의 유해는 지역 묘지에 비밀리
매장되었다가 2000년 초 성당이 재건되어 부부의 유해는 2005년 다시 변형 교회로 옮겨왔다.
※호라 아이 패트리(Hora Ay-Petri) 산: 보론쵸프 궁전 뒤에 있는 높이 1,234m로 그리스어로 성 베드로인데
바위(돌, 자갈)이라는 뜻을 가졌으며, 혹은 아이빼뜨리(Aipetri)라고도 부르다.
산세가 절벽으로 신이 만든 빼어난 경관이라고 하며, 그 절벽 위로 놓인 십자가 다리는 위험하고 험하기로
유명하나 지금은 케이블카가 있다.
※제비 둥지 성(Swallow's Nest Castle): 보론쵸브 궁전 동쪽 끝에 절벽에 달린 ‘제비 둥지(Swallow's Nest)’
같다고 해서 붙인 이름과 사랑하는 사람에게 선물로 주었다고 해서 일명 '사랑의 성'이라고 한다.
본래 러시아 장군의 별장을 1910년 독일인 거상이 매입해서 독특한 성을 지었으나 1914년 1차 대전 때 급히
팔고 귀국했으며, 볼셰비키 혁명 때 국가로 귀속되었고, 1927년 대지진에 지반이 30% 쯤 소실되어 지금처럼
아슬아슬한 모습이 되었는데 현재는 세계유명작품을 모방한 것을 전시한다고 한다.
[리바디아 궁전(Livadia Palace)]
궁전끼지 15분 걸린다고 하면서 가이드의 설명을 들었는데 리바디아 그리스어라고 해서 검색한 것을 아래에
기록했고, 레닌은 니콜라이 2세의 모든 가족을 죽이라고 했으나 살아남은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도 했다.
어머니 ‘다그마르’ 이야기도 아래에 기록하였고, 궁전은 얄타 시 입구에 있는 작은 마을에 있으며,
얄타 회담으로 유명해졌다고 하며, 궁전 정원 앞에는 예쁜 꽃들이 피어 있다.
정원 잔디밭에는 흰색의 물건으로 글자를 만들어 놓았는데 1911-2018 이라는 숫자는 궁전을 재건축해서
현재까지를 의미하는 것 같은데 아마도 고정용이 아니고 행사용으로 임시 설치한 것 같다.
궁전의 건물 벽에는 니콜라이 2세 부부의 사진과 얄타 회담의 대표들 사진이 장식되어 있었으며, 이제는
가이드를 따라 안으로 들어가 제일 먼저 본 것은 원형테이블에 앉아 있는 3명의 밀랍인형이다.
시계방향으로 스탈린, 루즈벨트, 처칠이 코로나 19도 없었던 시절인데 거리 두기를 잘 지키고 있었으며, 벽엔
2장의 사진이 걸려 있고, 위의 사진 속에 등장하는 원형테이블과 의자는 밀랍 인형 것과 같다고 한다.
그러나 위치는 안쪽에 있었으며, 이 방에는 흰 대리석의 아취문은 오직 황실 사람만 이용하는 문이었지만 2차
대전 때 이곳을 점령한 독일사령관이 2년 동안 머물며 사용했다고 한다.
니콜라이 2세와 황후 알렉산드라가 서 있는 초상화가 있는 방에는 많은 의자가 있었는데 이것은 본래 이곳에
있었던 것이 아니고, 현재 열리는 회의(컨퍼런스, Conference)를 위해 둔 것이라고 한다.
밖에 있는 원형 테이블이 이 방 중앙에 있었다고 하며, 그것을 보여 주는 사진은 2월 13일 ‘브라비’라는 신문
기사라고 하였는데 회담은 11일까지만 했다는데 13일 기사라니? 그땐 기사 송고가 늦었나?
다음은 회담 때 루즈벨트가 사용했던 집무실로 그가 썼던 책상도 있으며, 침실로도 사용했다고 하는 방에는
처칠과 루즈벨트가 데리고 온 딸들 사진도 있고, 루즈벨트가 사용했던 식당(다이닝 룸)도 있다.
회담 마지막 날에 이 식당에서 식사를 마치고 회담문서에 서명을 한 후에 모든 것을 치우고 처칠, 루즈벨트,
스탈린 3사람이 앉자 찍은 사진이 바로 이 자리에서 찍은 것으로 그 사진이 벽에 있다.
이 방에서 나아가 회랑을 따라가면 이 나라 신문과 궁전에 대한 책, 제비둥지 등의 그림과 얄타 회담 그리고
황제가족에 대한 사진도 팔고 있으며, 화랑 벽에는 러시아의 중요한 사람들의 초상화가 걸려있다.
그리고 회랑이 둘러싸고 있는 ‘파티오’라는 아랍식 정원이 눈에 들어왔으며, 이 궁전에 아랍형식이 있다고 한
것을 읽었는데 아마도 이 정원 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파티오 정원도 아래에 기록했다.
인터넷은 이 정원에 식당에서 찍은 사진처럼 밀랍인형이 있었으나 지금은 장미만 피어 있는 평범한 정원이며,
1층은 얄타 회담에 관한 것이 전시되어 있고, 2층에는 니콜라이 2세에 관한 것이 전시되어 있다고 한다.
이제는 2층으로 올라가 니콜라이 2세의 집무실에는 책상 옆에 황제의 밀랍인형이 서 있는데 여기에 있는 모든
집기는 오리지널(원본, Original)이라고 했으며, 다음은 황제의 부모님 사진이 있는 방이다.
좌측은 아버지 알렉산드로 3세 이며, 우측은 어머니 마리아 페오도로브나(빅토리아) 이고, 중앙에는 니콜라이
황제와 부인이 함께 있는 아들은 비운의 황태자이자 미남인 알렉세이(Aleksey)이라고 한다.
알렉세이를 괴롭혔던 혈우병(헤모필리아, hemophilia)은 근친결혼에서만 생기고, 피가 멈추지 않는 질병으로
사망에도 이르게 하지만 여자는 나타나지 않고 유전만 시키는 잠재적 유전병이다.
멘델 법칙에 의하면 딸의 절반은 유전인자가 없으며, 절반만 유전인자를 갖는데 알렉세이의 혈우병은 방탕아
라스푸틴을 궁중으로 불러드렸고, 알렉세이 아픔을 달래는 사람은 라스푸틴뿐이었다.
황제, 특히 황후의 신임은 대단하여 10여 동안 국정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여 제정 러시아가 망하게 하는
한 원인이 되었지만 멀게는 우리나라 육이오 전쟁이라는 비극도 제정 러시아가 망국부터 잉태되었다.
욕탕을 본 후 식당으로 이동했는데 이 방에는 얄타 시내를 조명하기가 좋았고, 이 방에서는 반주 없이 부르는
아카펠라(cappella)를 들었는데 한 때는 고운 음성을 얻기 위해 남성을 거세하여 중성을 만들었다고 한다.
가이드는 황제 후손 같이 황제의 가슴 아픈 역사를 이야기를 했는데 아래에 우리나라의 관계도 같이 기록했고,
이젠 30분의 자유 시간을 가졌으며, 리바디아 공원에서 알렉산드로 3세의 동상을 보았다.
어쩌거나 지루하기도 했던 이번 여행의 마지막 관광지인 체호프 하우스로 향했다.
※궁전역사는 이포리토 모니게티라는 사람이 나무로 건축하면서 시작됐고, 1860년 이후 황실의 여름 별장으로
사용하면서 알렉산드로 2세가 좋아했으며, 그의 아들 알렉산드로 3세는 1894년 11월1일 별관에서 죽었다.
1909년 황제 니콜라이 2세는 알렉산드로 페오도로브나 부인과 함께 이탈리아 여행을 할 때 화려한 르네상스식
궁전모습에 감탄하여 여행을 마치고 와 1910년 8월(가이드는 5월)에 다시 궁전을 지었다고 한다.
크림(가이드는 이탈리아)에서 생산되는 흰 화강암으로 신 르네양식으로 건축하여 1911년 9월 11일 완성했고,
황제는 모스크바에서 오는 것만 1주일 걸렸으며, 1~2주 정도 쉬었다고 한다.
1917년 볼셰비키 혁명 이후 스탈린의 별장으로 사용했고, 독일군 점령기간 중에는 전시병원으로 쓰이기도
했으며, 1974년 박물관으로 개조하여 일반에 공개되었다.
1층은 얄타회담과 관련된 전시물이 전시되었으며, 2층은 니콜라이 2세의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얄타 회담(Yalta Conference): 1945년 2월 4일에서 11일까지 8일 동안 미국의 루즈벨트(1882~1845),
영국의 처칠(1874~1965), 러시아의 스탈린( 1879~1953)이 참여했던 회담이다.
가이드 이야기로는 처칠이 회담을 러시아에서 열리는 것을 원치 않고 몰타에서 열기를 원했으나 루즈벨트가
스탈린에게 부탁해하였고, 그는 병자였던 대통령을 위해 건강에 좋은 장소를 찾은 것이 휴양지인 얄타이다.
루즈벨트 대통령도 찬성했으며, 초등학교 시절 유명 도시들을 빼 놓고, 잘 알지도 못하는 곳에 회담장소로
정했을까? 하는 의문이 오늘 풀렸으며, 휠체어를 타는 루즈벨트는 리바디아 궁전에 머물렀다고 한다.
얄타 회담 전 처칠과 루즈벨트는 먼저 몰타에서 만나 회담을 마치고, 2일 후에 군용기로 이곳으로 왔으며,
제일 중요한 내용은 독일 문제로 분할 통치는 어떻게 할 것인지 이라고 했다.
그리고 폴란드 그리고 발칸과 유고 문제 등을 처리하는 것으로 매일 4시에 회담을 마쳤다고 하며, 하루는
스탈린을 집무실로 초청하여 밀담한 것은 일본 전쟁에 참전해 줄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스탈린은 참전 조건으로 러일전쟁에서 잃엇던 사할린 섬과 쿠릴 열도를 러시아 영토를 줄 것을 요구했으며,
몽골 영토와 중국으로 가는 철도부설을 요구한 것은 러시아에게는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고 한다.
루즈벨트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일본이 옥쇄(玉碎)로 버티며 항거로 인해 미군의 희생자가 많아 일본본토를
상륙하여 항복을 받으려면 50〜100만의 희생자가 날 것으로 우려했다.
러시아의 일본 참전으로 미군의 희생을 줄이기 위해 처칠의 회의적인 태도에도 스탈린에게 많이 양보했으며,
한국은 소련과 미국의 완충지대로 삼는다는 비밀 체결하여 첫 분단을 결정이었다.
※리바디아: 아테네의 북서쪽으로 130km 떨어진 곳에 위치하며 산악 지대에 둘러싸인 작은 도시로 이곳에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기억의 샘(므네모쉬네)과 망각의 샘(레테)가 있다.
제우스가 기간테스(Gigantes)와 전쟁에서 승리한 후 축가를 만들기 위해 이 전쟁을 자세히 기억하고 있는
므네모쉬네(고모뻘 됨)의 도움이 필요하여 그녀와 9일 동안 동침하여 9명의 님프(요정)을 낳았다.
이들이 뮤즈(Muse) 인데 음악(music)의 어원이며, 이들이 살던 집을 뮤지엄(Museum)으로 즉 ‘기억이 있는 집’
또는 철학원을 말하기도 하는데 이것이 박물관, 미술관의 어원이다.
저승으로 가기 위해 망각의 강인 레테 강을 건너야 하는데 기억의 강 또는 망각 강이라고도 한다.
※황비 마리아 페오도로브나(Empress Maria Feodorovna, 1759~1828): 그는 덴마크 공주로 이름은 다그마르(
Dagmar) 이였으며, 알렉산더 3세의 황비가 되면서 ‘마리아 페오도로브나(빅토리아)’로 바뀌었다.
1894년 11월1일 그의 남편 알렉산더 3세는 리바디아 궁전에서 휴양 중에 죽었고, 그의 아들 니콜라이 2세는
볼셰비키 혁명으로 손자와 함께 죽었는데 파란만장한 그의 인생은 영화로 만들어졌다.
‘아나스탸샤’도 그 중에 하나라고 하며, 그는 볼셰비키 혁명의 날 우크라이나에서 봉사활동을 하다가 소식을
듣고 크림 반도로 돌아와 버티었으나 영국으로 시집간 여동생 영국 메리 황후가 영국으로 피난 오라고 2년
넘게 끈질기게 설득했으며, 시간이 갈수록 위험하다고 판단하여 영국군함을 타고 영국으로 갔다.
그녀는 아들이 살아있다고 믿어 소식을 듣기 위해 덴마크로 돌아가 1928년 사망했고, 덴마크 왕가와 러시아
정부의 합의로 2009년 남편 곁으로 돌아가 상트페테루브르크의 베드로 바울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파티오: 아랍식 정원(안뜰)으로 사각형으로 둘러싸인 집 가운데 있으며, 알람브라 궁전도 파티오 형식의 대형
건물인데 아마도 이런 양식은 건물의 태양의 채광이 방을 밝혀 주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된다.
회교는 4명의 부인을 둘 수 있어 그들의 방이 파티오를 중심하여 있으며 4명의 부인은 4계절을 의미한다고
했지만 사실인지는 모르겠고, 코르도바는 ‘파티오’ 꽃 축제도 있다.
※니콜라이 2세(1894-1917, 1918 사형): 1894년 아버지를 이어 제위에 올랐으나 그는 소심하여 아내 영향을
받아 심령술사들과 신앙요법사들에게 조언을 구하였고, 그 가운데 라스푸틴이 있다.
황제는 즉위초기 자유주의파 의원들에게 행한 연설에서 정부 업무를 나누어 가지려는 의원들의 희망을
분별없는 꿈'이라고 무시하는 비타협적인 연설을 하였다.
결국 점점 확산되는 소요사태와 그에 따른 경찰의 과격한 진압에 직면하였다.
1914년에 1차 대전이 일어나고 전쟁에 참전하지 않으려고 버티다가 자신이 사령관이 되어 전쟁에 출전하였고,
이 중요한 시기에 내정을 맡길만한 사람을 다 해임하여 부인에게 맡기고 떠났다.
황후 알렉산드르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를 하던 라스푸틴이 조언자가 되어 내정은 그에 의하여 부패하였고,
귀족들이 라스푸틴을 암살한 몇 주 후 1917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니콜라이는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군대를 출동시켰으나 때는 이미 늦었고, 군의 지원을 받은 두마 선거를
통해 구성된 러시아의 입법의회)는 황제에게 퇴위할 것을 요구하였다.
3월 15일 프스코프에서 황제는 이를 받아들이고, 침착하게 제위를 포기하며, 어린 아들보다 동생 미하일에게
황제의 자리를 넘기겠다고 발표했으나 미하일은 이를 거절하였다.
임시정부의 총리는 황제와 가족들을 구금하고 영국으로 보내려고 계획하였으나 혁명노동자와 병사위원회의
반대로 시베리아로 보냈으나 1918년 4월 황제와 가족들은 우랄 산맥의 예카테린부르크로 옮겨졌다.
볼셰비키에 반대하는 러시아 '백군(白軍)'이 이곳으로 진격하자 지방당국은 백군이 황제일가를 구출하지 못하게
하라는 지시를 받았고, 1918년 가족들은 갇혀 있던 집 지하실에서 모두 학살당했다.
그 후 불태워져 폐 광산 갱도에 던져졌으나 아무도 몰랐으나 우연하게 발견되었고, 이 사실은 '백군'에게
점령된 뒤 조사를 통해 확인됐으며, 상트페테루브르크의 베드로 바울 대성당에 재 매장되었다.
[러시아와 조선]
1896년 고종임금이 러시아 대사관으로 피신한 '아관파천'이라는 사건은 명성황후 시해사건은 러시아를 등에
업은 친노파가 친일파 제거하여 일본의 세력을 몰아내려는 의도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친노파에 의하여 김홍집, 정병하, 어윤중은 사살되었고, 김윤식은 제주도 귀양을 보냈으며, 유길준, 조희연은
일본으로 도피하였으며, 김홍륙이 가비(커피)에 독약을 타서 죽이려 했던 사건도 일어났다.
러시아는 함경도 경원, 경성의 광산 채굴권과 마산포의 율구리만에 러시아 동양함대의 연료인 석탄저장소를
위한 땅을 샀고 부산 영도에도 30만평의 기지를 확보하여 영국은 거문도 사건을 일으켰다.
압록강 유역과 울릉도의 목재 벌채권을 받아 냈는데 이 중에 미국 영화배우 대머리 '율 부린너' 할아버지가
조선에서 벌채한 나무로 장사를 하였으며, 그도 조선에 왔었다고 한다.
일본이 공들인 조선이 물거품이 되려하자 러시아에게 38도를 경계로 나누어 갖자고 제의하였으나 러시아가
거절하였으며, 이것이 원인이 되어 러일전쟁(1904-05)이 일어났고, 러시아의 패전했다.
러시아에게 심각한 문제를 안겨주어 이에 대한 불만은 1905년(피의 일요일)의 혁명운동으로 확산되어갔다.
[안톤 체호프 하우스(Anton Chekhov house)] 체호프(1860~1904) 얄타(1899~1904)
안톤 체호프 집에 도착하여 처음 마난 것은 그의 흉상이 있는 정원이었으며, 가이드는 정원에 있는 모든
나무는 체호프가 심은 것이라 100년 이상 된 것이라고 하며, 그의 대한 이야기를 했다.
사랑의 스토리를 가졌기에 로맨틱이라는 별명을 가진 체호프는 1860년 크림 반도 북동쪽에 있는 아조프 해
북동쪽 끝 타간로크에서 가난한 농노 출신의 아들로 태어났고, 10살 때 아버지는 모스크바로 이사 갔다.
그는 모스크바에서 의대를 다녔고, 학생 때에도 글을 썼으며, 20대 초반에 문학적 진전을 이룩했으나 28살에
결핵이라는 진단을 받고, 의사는 남쪽 공기 좋은 곳에서 휴양할 것을 권유 받았다
그는 이탈리아서 6개월 살았으나 비용이 많이 들어 포기했으며, 가장 앞선 근대 단편소설과 사실주의 작품과
희곡이 인기를 얻으면서 많은 돈을 벌었으나 1897년 결핵으로 인한 각혈로 고생을 많이 했다.
1898년 얄타에 땅도 사고 1년 만에 집도 지지어 1899년 이사할 때 엄마와 오빠를 위해 결혼하지 않고 집안
살림을 도맡은 누이동생 마리아도 같이 왔으며, 그는 이곳을 싫어했다고 한다.
그리고 모스크바를 좋아했으나 건강 때문에 강요받아 이곳에 머물렀으며, 처음 들어간 식당에는 그가 좋아한
푸시킨의 초상화가 있었고, 그의 40세 때 그린 초상화도 있다.
객실(guest room)에는 3명의 형제들이 살았으며, 1901년 41살 때 자신의 연극에 출연했던 올가 크니퍼를
사랑해서 결혼했다고 한다.
부엌은 따로 만들어 어머니가 관리했는데 체호프가 입었던 옷이 옷장 있었는데 그는 키가 컸으며, 어머니가
거쳐했던 방과 그가 집필했던 방 그리고 식당은 우리가 들어 왔던 방이다.
1904년 결핵치료를 위해 독일로 떠나면서 ‘나 죽으러 간다.’라고 친구에게 농담으로 했던 말이 3개월 후에는
유언이 되었다고 하며, 건물 전체가 흰색이라 ‘하얀 별장’이라는 별명을 가졌다.
이로서 이번여행의 모든 일정을 마쳐 시원섭섭했는데 이번 가이드는 통역할 시간을 잊어버리는 것이 흠이었고,
이른 시간에 끝났기에 우리는 얄타 해변을 거닐기로 했다.
[얄타 해변(Yalta Beach)]
해변으로 들어서면서 가장 먼저 만난 것은 멋진 시더 나무(Cedar Tree)인데 가장 멋진 레바논의 백향목과
우리나라는 좀 다른 히말라야 시더, 미국의 레드(Red) 시더, 사막의 솔트(Salt) 시더 등이 있다.
나무를 씹으면 짠 맛이 나는 솔트 시더를 성경에서는 에셀 나무라고 하며, 다음은 감, 석류, 허프 등을 팔고
있는 노점상이 있었고, 다음은 '아펠신(Apelsin)'이라고 적혀 있는 바다와 공중에 사이에 떠 있는 그리스 갤리의
방식으로 만든 배인데 지도엔 ‘아펠신 카페 프로메나드’라고 되어 있는 카페 레스토랑이다.
그리스 갤리(galley)는 노를 젓게 만든 배인데 크림반도가 그리스 식민지로 시작했다는 의미라고 하며, 다음은
해변 턱에 걸쳐 앉아 얄타 해변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빌라 소피아(Villa Sofia)' 적힌 곳을 보았다.
이 건물에는 호텔과 레스토랑이 있고, 그 앞에는 신사 숙녀의 청동상이 있으며, 지도에는 스컬프투라 다마
소바초이(Skul'ptura ‘Dama S Sobachkoy’)라고 되어 있는데 다마는 숙녀, 스바초이는 신사가 아닐까?
다음은 거리의 악사를 만났으며, 이제는 Billy Vaughn 악단이 연주한 ‘바닷가의 예배당(Chapel By The Sea)’
같이 생긴 작은 성당이 있었는데 지도엔 너무 이름이 길어 생략한다.
이 성당은 암살 된 알렉산더 2세 황제 같이 모든 순교자를 기리기 위해 1881년 나무로 만들어졌으나 2009년
다시 세워졌다고 하며, 여기서부터는 낚시하기에 좋은 자리인지 많은 강태공이 보인다.
레닌 광장에 도착하여 Fast Food 전문점 미르버거(Mirburger)가 있었고, 우측은 주방용품을 파는 상가이며,
이젠 돌아서서 해변 뒤 길을 걸었는데 이름을 알 수 없으나 야자수가 아름다운 건물도 보았다.
일행은 호텔로 돌아가고 혼자서 반대편 해변 길을 더 걸었으나 별로 볼 것이 없었으며, 러시아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창시한 소설가인 막심 고리키(Maxim Gorki, 1868-1936) 동상을 보고 호텔로 향했다.
[13일] 10월 29일 월요일 ●일정: 심페로폴 이동→ 14:10(SU136, 3h)→ 17:10모스크바도착→ 21:35(SU599,
8h45)인천향발→
[14일] 10월 30일 화요일 ●일정: 11: 10 인천도착→ 울산 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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