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양업 신부의 발자취를 확인하다 (I)
이 답사기는 지난 2008년 7월 21일(월)부터 27일까지 양업교회사연구소(충북 진천군 백곡면 양백리 소재) 주관 아래 ‘하느님의
종’ 최양업(토마스) 신부(1821~1861년)의 발자취를 찾아 만주 일대를 여행한 기록이다. ‘하느님의 종’이란 교회에서 시복 시성 대
상자로 선정된 이들을 가리키는 특별한 용어로, 최양업 신부는 현재 교황청의 인준 아래 시복 시성을 위한 재판이 진행 중에 있다.
최양업 신부는 김대건(안드레아) 성인 신부와 함께 중국 마카오와 만주 일대에서 유학 생활(1836~1849년)을 한 뒤, 1849년 4월
15일 상해에서 사제로 서품되었으며, 이후 귀국하여 11년 6개월 동안 전국에 흩어져 있는 신자들을 순방하다가 과로에 장티푸스
까지 겹쳐 1861년 6월 15일에 선종하였다.
* 필자 : 양업교회사연구소 차기진
* 출처 : 천주교 청주교구 배티성지-양업교회사연구소, <회보> 104-110호, 2008년 8월 15일-2009년 2월 15일.
<2008년 7월 21일■월> 맑음. 한국에서는 1주일 동안 몇 차례의 비가 예고되고 있었다. 중국 지린성(吉林省) 남부에 위치
한 옌지(延吉) 지역의 날씨 예보도 그다지 반가운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예정된 일정을 변경할 수는 없었다. 내심 불안함 속에서
도 중국 기상청의 날씨 예보 또한 우리 못지 않다는 사실에 기대를 걸어본다.
<22일■화> 흐리고 비. 어제 오후, 옌지 공항에 도착한 이래 일행을 조바심 나게 하던 비가 아침부터 계속 이어진다. 훈춘(琿
春)으로 가는 길이 다시 불안해지면서 별다른 말들이 없었다. 다행히 투먼(圖們) 지역을 지나면서 햇살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중
국 기상청 예보는 믿을 것이 못된다고, 괜찮을 거라고■■” 그 말에 큰 희망을 걸어본다.
옌지 최초의 중국 동포 사제 엄태준 신부가 사목하는 훈춘 성당과 1998년 11월 4일에 개원한 그 옆의 ‘애덕복리원’(춘성로 우의
호동 258호). 샬트르성바오로수녀회에서 운영하는 양로원이다. 몇 년 만에 다시 만난 수녀님들이 그지없이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점식 식사 후, 훈춘에 처음 파견(1997년 5월 20일)된 원장 김 헬레나 수녀님께서 구교우 박 회장님을 소개시켜 준다. 예전에 뵈었
던 중국 동포 박용진(이시도로) 회장님(2005년 93세로 선종)의 장남으로, 우리가 찾아가는 퉁캉즈(東崗子) 마을 옆의 파렌쳉(八連
城) 출신이란다.
수녀님과 박 회장님에게 그 마을을 찾아가는 이유를 설명했다. “1846년 2월, 메스트르(이 요셉) 신부와 최양업 부제가 국경 무역
(즉 경원개시)이 열리는 조선의 경원(현 함경북도 새별군 새별읍)으로 가서 조선 교회의 밀사들을 만나기 위해 10일 동안 숨어 지
내던 마을이 통캉즈로 추정된다”는 이야기. “그 마을은 조선 국경 즉 두만강에서 10리 떨어진 마을”이라는 이야기■■
162년 전인 1846년 1월 말. 메스트르 신부와 최양업 부제는 교구장 페레올 주교의 명에 따라 경원으로 가기 위해 만주의 조바자
츠(小八家子, 현 장춘시 합륭진 팔가자촌)를 떠났다. 그런 다음 17일을 걸어 국경에서 10리 떨어진 마을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서
양인이 숨어 있다는 사실이 알려져 만주 관원들에게 체포되었고, 3일 만에 석방되어 조바자츠로 돌아가야만 했다. 그 길은 바로
김대건(안드레아) 신학생이 1844년 2월 5일부터 29일 무렵까지 걸었던 길이다. 이때 김대건 신학생은 두만강 너머의 경원으로 들
어가 3월 8일에 밀사들을 만난 뒤 조바자츠로 귀환했었다.
퉁캉즈 마을은 박 회장님이 잘 아는 곳이란다. 예로부터 훈춘에서 두만강을 건너 경원(새별읍)으로 가는 길목에 자리잡고 있는
곳으로 근동에서는 아주 큰 마을이라고■■ 국경에서 10리 가량 떨어진 곳인 데다가 경원으로 갈 생각이었다면 퉁캉즈 마을을 지
나가야 했을 것이고, 지금 마을을 통과하는 도로가 예전부터 있던 국경으로 통하는 길이라고 덧붙여 설명해 준다. 염려했던 것과
는 달리 아주 화창한 날씨. <계속>
첫댓글 아주 힘든 그리고 진지한 학술답사를 하셨습니다. 많은 사람에게 종교적인 것을 떠나서도 큰 흥미를 줄 것으로 믿습니다.